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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읽을거리

벼 재배와 논벼 농경사회

by 石基 2018.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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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1. 벼 재배와 논벼 농경사회 

             -일본 열도의 경우 若林邦彦



벼의 재배가 그대로 논벼 농경사회의 성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농경을 주체로 하는 사회의 성립이나 확산에는 다양한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벼농사 사회가 많이 형성된 아시아 각지에서 횡단적으로 고찰해야 하지만, 실제로 상세한 인간 집단의 동태를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역과 시대는 한정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고 유적을 농밀하게 조사하여 상세한 사례연구를 제시할 수 있는 일본의 야요이 시대 사회의 성립을 둘러싼 의론부터 논벼 농경사회 확산의 조건을 살피고, 아울러 그 이전의 벼 재배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다.



야요이 문화 확립에 대한 기존 시나리오


최근 중국 대륙 등에서 벼농사의 발생에 대한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양쯔강 유역에서 1만 년 전의 벼가 발견된 것이 이야기되고 있다. 한편 전라산田螺山 유적(Zheng, Sun, Nakamura 2000)의 상세한 발굴조사에서 검출된 벼 재배는 다양한 수렵채집 활동과 함께 있었던 일로 판명되어 반드시 생업의 중심은 아니었다고 한다. 즉, 벼재배 개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여 중국 대륙에서 단순히 농경 문명의 개시기가 소급된다는 의론에는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벼농사 농경사회 그것이 벼 재배 이후에 나와, 동아시아에서 단계적으로 형성되어 왔냐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 대륙에서 농경사회가 확립된 뒤에 그것이 어떻게 동아시아 각지에서 확산되었느냐는 문제를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면 생각해야 할 문제는, 본격적인 벼농사 중심 사회가 어떻게 하여 확산되었냐는 것이다. 생업의 한 수단으로서 벼 재배의 기원과는 별개로, 고대에 중국 왕조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농경사회란 구도의 밑바탕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것도 이미 벼농사 농경을 둘러싼 큰 문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확립된 농경 중심 사회가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선행하여 성립되었단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건 어떻게 하여 확대되어 갔는가? 그에 대해서는 농경 기술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집단이 이주, 이동하여 확산되었다는 모델이 있다. 특히, 일본 열도에서 초기 농경사회, 즉 야요이 문화의 확산과 확립에 대해서는 조선 반도서기원을 하는 농경집단의 이주와 이동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 배경으로 인골 분석의 문제가 있다. 조몬 시대의 인골에 비하여 야요이 시대 이후의 인골에서는 큰 키와 고안화高顔化라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그러한 변화는 조선 반도의 인간 집단이 갖는 형질이 유입되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여 상이한 신체 특징을 가진 인간 집단이 일본 열도에 건너와, 그 계보가 되는 집단이 열도 각지로 벼농사 농경사회를 확산시켰다는 느낌이 유포되었다. 결과적으로 '조몬인 Vs 야요이인'이란 상황이 존재하여,그 결과 후자가 전자를 석권했을 것 같다는 핵심어가 사회에 뿌려졌다(국립과학박물관 2005).


그러나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그 의론의 발단이 된 큰 키와 고안 형질을 가졌던 야마구치현 토이가하마土井井浜 유적의 인골군은 발굴 당초 야요이 시대 전기의 것으로 여겨졌는데, 현재는 야요이 중기의 인골 매장을 다수 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山田 1999). 즉, 야요이 문화 확산의 초기부터 앞에 언급한 형질의 인간집단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을리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킨키近畿 지방 야요이 전기의 고베시 니가타新方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군은 형질로는 조몬 인골의 특징과 아무런 변화가 없고(片山 1998), 야요이 문화 정착과 형질 변화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는 예도 적지 않다. 


정말로 이주, 이동으로 벼농사 사회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 문제를 일본 열도에서 가장 이 시기의 야요이 시대 유적의 조사가 진행되어 상세한 자료가 존재하는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검증하고 싶다.



오사카 평야에서 야요이 문화가 전파된 모델


오사카 평야에서 최후의 조몬 토기라고 하는 돌대문 토기와 최초의 야요이 토기라고 하는 온가가와遠賀川식 토기는 제작방식이 크게 다르다. 특히 토기의 형태를 만들 때 기본이 되는 점토띠를 쌓아올리는 방식이 약 1만 년 동안 이어진 조몬 토기의 수법과 달리 조선 반도의 전통적인 수법에 의해 제작되었다. 전자는 토기의 안쪽부터 점토띠를 접착시키는 데 반해, 후자는 바깥쪽부터 접착시킨다(家根 1984). 이것은 토기 제작의 기본에 외래의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수법이 도입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돌대문 토기와 온가가와식 토기에서는 주체가 되는 크기도 달라 용도, 즉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양식도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佐藤 1999, 濱田 2003). 이러한 점에서 두 가지 토기 양식을 제작해 사용했다는 건 서로 다른 인간 집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오사카 평야에서는 각각을 주체로 하는 집단이 평야와 산지 주변에 동시에 존재했다는 설도 제시되었다. 이른바 벼농사 중심 생활의 새로 온 이주자가 저지대에, 기존의 수렵채집 생활자가 산지 주변에 공존했다는 설이다. 이 배경이 되는 건 돌대문 토기와 온가가와식 토기가 모두 출토된 유적이 많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토기 양식의 공존 기간을 인정함에 따라 '공존론'이 성립하고, 이주집단에 의한 벼농사 사회 전파론이 긍정된다는 순환이 성립했다. 이것은 정말일까? 필자는 이 상황을 상세하게 재검토해 보았다(若林 2002).


그 결과, 오사카 평야 중부의 조몬, 야요이 이행기의 26개 유적 가운데 같은 유구(쓰레기 구멍이나 구조 등)에서두 가지 토기 형식이 함께 발견된 건 온가가와식 토기의 최초 단계뿐이라는 걸 밝혔다. 게다가 그 안에서 돌대문 토기가 주체가 되는 예는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 10개의 사례 이상은 온가가와식 토기 중에서 한두 조각의 돌대문 토기가 섞인 예뿐이었다. 고고 유적에서는 직전 시기의 토기가 작은 조각으로 그보다 새로운 유구가 매장된 흙에 섞여 있는 예가 부지기수이다. '함께 발견된다'는 것만으로는 두 가지 토기 형식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두 종류의 토기가 안정적인 비율로 복수의 유적에서 공존하는 것이 동시존재의 근거이다. 이런 점에서 두 가지 토기 형식이 공존했던 기간은 눈에 띄게 짧아지든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돌대문 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온가가와식 토기로 변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공존'은 아니다. 결국은 새로 온 이주집단이 농경사회를 가져왔다는 모델은 고고학적으로 근거를 잃는 것이다.


하나 더, 이주집단에 의한 사회변화 모델에 대해서 부정적인 예가 있다. 야요이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대륙계 간석기라는 도구류가 있다. 벼 수확을 위한 돌칼, 목기 가공용 외날 돌도끼, 벌채용 양날 돌도끼이다. 이 가운데 킨키 지방에서 돌칼은 초기 야요이 유적에서도 안정적으로 출토되는 것이고, 그 이외에는 야요이 전기의 말미가 되기까지 출토수가 뚜렷하게 적어진다. 이것은 벼농사와 목기 가공 등의 기술체계를 지녔던 집단이 그대로 찾아와 사회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요소가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야요이 사회, 즉 일본의 본격적인 농경사회가 확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토기의 변화는 크지만, 그러한 다양한 문화 요소 변화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주집단에 의한 문화의 교대가 아니라, 조몬시대 이후의 인간집단이 중국 대륙과 조선 반도에 있었던 벼농사를 시작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 요소를 서서히 들여와서 형성된 것이 야요이 문화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동아시아 농경사회가 광역화된 건 단순히 집단 이동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지역에서 농경사회로 변화하는 요소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나,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필요성에쫓겼을 때 재래집단이 사회, 문화 변화를 일으켜 여러 변화가 성립된 것은 아닐까?



논벼 농경사회 이전의 벼 재배


그럼 본격적인 농경사회 출현 이전의 벼 재배는 일본 열도에서 어떻게 확인되는 것인가? 2007년 가을에 일본 고고학협회에서 "열도 초기 농경사의 새로운 시점"이란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열도 안의 선사시대 식물 유체 출토 사례를 집성하여 검토한 연구회였다. 그 안에서 식물 유체의 출토 사례를 통해 보는 한 벼와 보리, 기장에 대해서는 조몬시대 후기부터 재배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고 여러 연구자들이 보고했다. 즉, 농경사회 이전에 잡곡복합의 식물 재배가 야요이 시대보다 이전으로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큐슈 지방의 잡곡류 종자의 출토 세트는 최근 조선 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서부로 농경이 전파된 경로의 유력 후보지라는 산둥 반도의 벼, 맥류, 잡곡 복합농경에 유사하다는 것도 지적되었다(小畑 2007).


다만, 조몬 후기의 벼 출토 사례에 대해서는 큐슈 지방이 주체라는 점에서 일본 열도 안에서 안정적으로 재배가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수많은 조몬시대의 생업 가운데 일부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 기술한 대로, 중국 대륙의 초기 벼 재배 사례에서도 농경 주체 사회 이전의 식물 재배 사회가 존재했다. 열도안에서도 그와 같은 시기가 존재했다는 생각은 근년의 고고학에서도 일반적으로 되고 있다. 앞으로는 그러한 생업 체계의 상세한 모습과 야요이 시대 이후와의 사회, 문화 구조의 차이를 정의해 가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업 전략이란 다양하여, 광역 교류망을 통하여 여러 가지 수법이 있을 수 있다. 그와는 별개로 광역에서 사회변화와 생업 체계 변화가 연동하여 일어난 경우가 있다. 전자가 단순한 벼 재배, 후자가 농경사회 확립(일본의 경우, 야요이 사회의 확립)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변화도 대규모 식민이 없어도 실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보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전후의 문화, 사회, 환경의 여러 요소를 분석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고고학, 인류학, 식물학 등의 여러 분야는 그를 위하여 연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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