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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농경사회에서 농사는 목숨과 직결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한 해의 농사가 망하면 말 그대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일이 일어났다.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건 농산물을 비축하는 기술도 부족하고, 인구의 수요량 대비 절대적인 생산량도 모자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장에서 농산물을 사다 먹기보다 직접 집에서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하여 소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도시에서는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시장이 발달하며 직접 농사짓기보다 사서 먹는 일이 많았을지도 모르지만, 농민이 절대 다수였던 과거에는 집집마다 텃밭 농사라도 지으며 집에서 필요한 농산물을 충당하는 일이 더 흔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여러 종류의 씨앗을 구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씨앗을 준비해놓지 못한 집은 통장에 잔고가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씨앗이 생명줄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함께 찾아온 근대화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일은 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경성 내외의 읍과 대도시에 있는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 10무의 땅에서 수만 전을 벌어들인다(10무는 논 40마지기이고, 만 전은 100량이다).”라고 한다. 당시 환금작물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와 수준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 조선 후기에도 이미 상업이 발달하며 환금작물이 재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농민들은 먹을거리를 자급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농촌 사회와 농민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김용섭 박사는 당시 농지의 소유면적으로 부농층, 중농층, 소농층, 빈농층을 나눈다면, 소농층과 빈농층의 숫자가 어느 지역에서나 과반수를 넘는 상태였다고 지적한다. 많은 농민들이 영세농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대부분의 농지가 부농층에 의해 소유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안이란 자료를 바탕으로 회인과 의성, 전주의 농민들의 토지소유 관계를 분석한 바에 의하면 각각의 지역에서 부농층은 6.5%, 11.5%, 14.9%로 나타나는데, 그들이 소유한 농지의 비율은 33.6%, 40.9%, 53.2%에 달했다고 한다. 즉, 이 시기에는 대략 10% 내외의 부농층이 40~50% 내외의 광대한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영세농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수확량 증가를 위해 농법을 개량하고자 힘쓰고, 상품성 있는 고부가가치의 작물을 재배하며, 부농의 농지를 함께 경작하기도 하며, 일부는 임노동자로 전락하여 농업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가고, 어떤 자는 화전민이, 또 어떤 자들은 상업에 종사하기도 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래도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까지 농토에서 쫓겨나 손에서 농사를 놓은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여타의 직업으로 옮기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농경은 국가의 중요한 중추 산업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토지조사사업에 동양척식주식회사도 설립되고 산미증식계획이란 것을 앞세워 조선의 소작농들을 수탈하지 않았던가. 힘겨운 소작농의 삶으로 전락했을지언정 쉽게 농토를 떠나지는 못했을 터이다. 한국산업은행조사부에서 1955년에 발표한 [한국산업경제10년사(1945~1955)]에 보면, 1930년대부터 1949년까지 농업에 종사한 인구가 76~78%에 이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광복 이후 한국의 산업화가 완성되기 전까지 계속되어, 한국에서 도시의 인구가 농촌의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나 되어서이다. 여담으로, 일제강점기에 고향에서 쫓겨나다시피 간도와 만주 일대로 떠난 사람들은 그곳에서조차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당시 조선 이주민들의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들의 이주를 보면 솥 한 개, 의류와 이불 한 보따리, 남자는 짐을, 여자는 아이를 업고 쟁기를 가지고 만주로 들어갔다. 그들은 물이 흐르기만 하면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작게나마 논을 일구고, 논 부근 조금 높은 곳에 토벽을 쌓고 지붕을 세워 흙으로 만든 작은 집에서 온돌식으로 취사하며 벼농사에 종사했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나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같은 문학작품에서도 당시 이주민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아리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봉천 쪽에 20년 남짓 벼농사를 짓는 조선사람들 동네가 몇 있다고 했다. 몇 사람을 보내 볍씨도 구하고 만주 논농사도 배워오게 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볍씨를 그냥 쓰자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기후가 달라 어쩔지 모르니까 반반씩 쓰기로 했던 것이다. 여자들까지 매달린 농사였지만 첫해 소출은 보잘것이 없었다. 야토(생흙)라 논으로 풀이 죽지 않았고, 뿌리 덜 뽑힌 잡초들이 기승을 부렸고, 기후 적응도 서툴렀던 것이다. …중략… 그런데 해가 바뀌고 금년 들어 땅주인이 나타나고 말았다. 첫해는 그냥 넘겨주었으니 금년부터는 반타작 소작료를 내라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의 농민들 덕분에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이 끌어올려졌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토질도 다르고, 기후도 다른 곳에서 제대로 된 씨앗도 없이 새로 논을 만들고 벼를 재배하는 일의 어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조선의 농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택한 일이었겠지만 벼 재배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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