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오늘 한국 농경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발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 발굴된 유적지에서 신석기시대의 밭 유적이 발견된 일이다.

이곳은 2001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그 결과가 오늘 발표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 이전에 한국의 초기 농경사에 대한 설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였다.


1. 한국의 농경은 신석기시대 초기에 시작됐다. 괭이, 보습 등 석기와 조, 기장 등 탄화 곡물이 이를 뒷받침한다.
2.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수렵채집 경제였으며, 농경은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됐다. 괭이, 보습 등의 석기는 농경도구가 아니라 식물뿌리의 채집이나 땅을 파는 데 사용됐을 것이다.
3. 한국의 신석기시대 후반에는 조, 기장의 재배가 시작됐으나 그 비중이 높지 않아 신석기시대를 수렵채집 경제, 청동기시대를 농업 경제로 봐야 한다.

위의 세 가지 설이 그동안 한국에서 언제 농경이 시작되었느냐에 대한 기존 학계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번 고성 문암리의 밭 유적이 발굴되어 신석기시대부터 한국에서 농사가 이루어졌다는 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곳의 유적을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확정한 결정적 증거는 하층 밭과 5호 집자리의 토층 관계라고 한다. 집자리가 하층 밭을 터파기하여 조성되었음이 뚜렷하다는 것이고, 여기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네 조각이 신석기 중기(기원전 3600~3000년)의 것이라 한다. 



이번 발굴에 참여한 홍형우 연구관은 "신석기시대의 밭은 현재까지 중국, 일본에서도 확인된 바 없어 이번에 발굴된 밭은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밭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곳에서는 크게 2개의 층에서 밭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해발 2.71~2.89m 높이에서 드러난 상층 밭은 조사 지역 전체에 걸쳐 확인되며 현재까지 드러난 면적은 약 380평 정도지만 동쪽과 서쪽, 남쪽으로 더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실제 밭은 이보다 훨씬 더 컸다고 추정된다. 밭은 이랑이 나란히 길게 늘어선 전형적인 '이랑 밭' 형태이고, 이랑 방향은 구릉의 등고선과 직각을 이룬다. 이랑의 규모는 두둑의 평균 길이 9.7m에 너비 38~82cm, 고랑의 너비는 40~90cm, 깊이 15~17cm이다.

그리고 하층 밭 역시 조사구역 전체에서 확인되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좁아져 상층 밭보다는 규모가 작았을 것 같다. 해발 2.61~2.63m 높이에서 현재까지 확인한 하층 밭 넓이는 300평 정도이다. 이랑 방향은 상층 밭과 비슷하게 등고선과 직각이다. 이랑의 규모는 두둑 너비 45~150cm, 고랑 너비 40~87cm, 고랑 깊이 13~15cm이다. 

하층 밭은 곳에 따라 형태가 다르다. 동쪽 중앙부는 이랑이 나란하게 길게 늘어선 모습이지만 남쪽과 동쪽 가장자리로 갈수록 네모꼴이나 긴네모꼴과 같은 형태로 작게 구획한 형태가 두드러진다. 서쪽과 북쪽으로 갈수록 이랑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이런 모습을 근거로 문화재연구소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전까지 한국에서 발굴된 밭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가장 빠른 것이었다.  황해도 지탑리, 평양 남경 유적, 경기 가현리 토탄층, 경남 진주 상촌리 집자리 등지에서 탄화한 조, 기장, 볍씨 등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농경의 흔적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씨앗이나 곡물만이 아니라 농사를 지었다는 결정적 증거인 논밭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밭 유적은 청동기시대 이후의 것만 확인됐다. 초기 삼국시대의 밭이 하남 미사리에서 처음 보고된 이래 진주 대평리(청동기시대)에서 대규모로 조사됐다. 2006년 현재 고대의 밭 유적은 43군데에서 보고되었다.

이번 고성 문암리의 밭 유적을 통해 한국이란 땅에서 적어도 5000년 전에 농사를 짓고 살았음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농경의 기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되었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