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이 논문은 어떤 지역에 특징적 문화현상이 존재할 때에는 그 나름의 배경과 까닭이 있으므로 이를 해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안동 목현마을의 삼베길쌈의 전통을 분석한다.
Ⅰ. 머리말
안동 지역은 전통적으로 삼베길쌈이 무척 성행했다. 특히 이 글의 무대인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2리 목현마을에서는 1960년대까지 그러했다. 당시에는 의류의 자가생산·소비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쇠퇴하고, 1970년대 말부터는 단절되다시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삼베길쌈의 전통이 1980년대 말쯤 소생하여 지금은 이 마을 부녀자들의 일반화된 생산활동이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은 삼베길쌈 전통이 새로운 모습으로 재등장한 현상은 어떠한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의의를 갖는지 검토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홉스봄의 ‘전통의 창조(invention of tradition)’라는 개념과 레슬리 화이트의 “문화는 상호작용을 하면서 새로운 순열, 조합 그리고 종합을 이루어내는 문화특성들의 일단, 혹은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견해를 수용하여 분석한다.
Ⅱ. 삼베길쌈의 전통과 쇠퇴
1. 여성의 세공기술로서 삼베길쌈의 전통
안동 지역에서 생산된 삼베는 안동포라는 이름으로 19세기 후반부터 명성이 높았다. 그것은 이곳에서 생산된 삼베의 품질이 여타 지역의 것과 구별되는 우수성 때문이었다. 그러한 우수성은 삼베길쌈의 기술이 갖는 특성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바로 안동 지역에서 직조하는 삼베는 ‘생냉이(生布)’라는 점으로서, 생냉이는 현재 안동에서만 전승되는 직조기술이다.
생냉이는 대마피의 외피를 벗긴 상태에서 삼을 삼아 직조한 것이고, 익냉이는 대마피의 외피를 벗기지 않은 채 삼을 삼은 후에 잿물(또는 오줌)에 담가 외피를 벗겨내고 직조한 것이다. 그러한 생냉이가 익냉이보다 고운 삼베를 직조하는 기술이다. 생냉이 기술로는 보통 8~9새, 가끔은 10새의 삼베를 짰고, 익냉이 기술로는 보통 5~6세, 잘 짜야 7새의 삼베를 직조했다.
안동 지역에서 우수한 품질의 생냉이 삼베를 직조한 것은 사회적 수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특히 유교문화가 융성했던 안동 지역의 사회문화적 특징과 연관이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의례와 예학이 발달한 안동에서 양반과 선비들이 품질이 좋은 생냉이를 원했던 것이다. 이후 신분제가 와해되고 나서는 일반인들도 상층지향적 노력을 기울여 생냉이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증가했다.
이러한 삼베를 생산하는 주체는 농민, 특히 여성농민이었다. 조선 후기 대동법이 시행된 뒤 삼베의 교환가치가 점차 증가하면서 생산량을 늘리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1913년에는 안동마포조합이 결성되면서 삼베의 품질 균일화와 대량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농민들이 자가소비 이외에 상품으로 판매할 목적으로 삼베길쌈을 강화해 왔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목현마을의 여성들은 1970년대 초반까지 여름부터 초가을까지는 삼베길쌈을, 겨울철에는 무명길쌈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여했다. 당시 농사일의 특성상 풋구(草宴: 호미씻이)를 먹고 추수할 때까지 집중적으로 삼을 삼고, 베짜기도 음력 8월에 많이 했다.
삼베길쌈의 공정 대부분이 여성의 몫이지만, 대마의 경작과 수확, 삼굿(삼찌기) 작업까지는 거의 남성의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먼저 한식 무렵 대마를 파종하여 가꾸다 초복 무렵 수확하고, 수확한 대마의 잎을 친 다음 삼굿이라고 공동으로 삼을 찌는 과정을 거친다. 이 작업은 많은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요구하기에 개별 농가단위가 아닌 남녀가 동참하여 공동으로 처리했다.
생냉이 길쌈 공정은 다음과 같다.
① 대마피 벗기기: 대마를 물에 불려 겨릅에서 껍질을 벗기기.
② 겉껍질 벗기기: 대마피 가운데 섬유가 될 수 없는 겉껍질을 삼톱으로 훑어 벗기기.
③ 삼바래기(계추리 바래기) : 삼을 질기게 하려고 작은 다발로 묶어 일정 시간 햇볕에 쏘이기.
④ 삼째기: 삼을 삼고자 섬유소의 결을 따라 손톱과 빗으로 가늘게 찢기. 얼마나 가늘게 째느냐에 따라 삼베의 고운 정도가 결정.
⑤ 삼삼기: 찢은 삼을 날실이나 씨실이 되도록 길게 이어서 삼올을 만들기. 날실을 이을 때 중요한 것은 삼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비벼서 전체 올이 꼬아 강하게 하는 ‘비벼삼기’이다. 씨실은 ‘그냥삼기’라 하여 비벼서 삼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삼둘게’라 하여 이웃간에 모여 공동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⑥ 베날기: 일정한 길이(1필, 2필 등)와 새수(升數)에 맞추어 베를 짜고자, 정해진 길이와 새수를 적용해 날실을 조직하기. 이때 모든 날실이 바디에 꿰어진다. 이 작업은 까다롭기에 일부 여성만 할 수 있다.
⑦ 베매기: 날실 표면에 곡물로 쑨 죽에 된장을 섞어 만든 풀을 먹여 튼튼하게 하면서 도투마리에 모든 날실을 감기. 이 작업도 솜씨 있는 일부 여성만 할 수 있다.
⑧ 베짜기: 베틀에 날실이 감긴 도투마리를 올려 날실과 씨실을 결합시켜 피륙을 만들기.
⑨ 상괴내기: 잿물로 표백하고 치자물을 들이기. 이 공정은 오래전부터 시장에 있는 전문가에게 의뢰.
익냉이 길쌈은 이 가운데 ②, ③, ⑨의 공정이 없는 대신 ⑤ 삼삼기 다음에 중요한 두 가지 공정을 거친다. 첫 번째는 잿물이나 오줌에 삼을 담가 두었다가 물에 흔들어 씻어 삼올에 붙어 있는 겉껍질을 벗기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돌겻과 물레를 이용해 삼올을 전체적으로 꼬아서 튼튼하게 하는 과정이다. 이는 생냉이처럼 삼을 전체적으로 비벼 꼬지 않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2. 농촌사회 변동과 삼베길쌈의 퇴조
우리의 농촌 사회는 1970년대부터 국가사회적 산업화의 물결로 크게 변모된다. 농업은 산업농(industrial agriculture) 체제에 편입되고, 생활 전반에 걸쳐 자가생산·소비의 전통이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1970년대부터 기성복이 등장하며 삼베의 가치는 하락하고, 직접 생산하기보다 구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또한 삼베를 직조하여 시장에 판매하더라도 농산물에 비해 교환가치가 크지 않았다. 그 결과 직접 대마를 경작하여 삼베길쌈을 하던 분위기는 크게 위축된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목현마을에서도 삼베길쌈이 거의 단절되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이 풍산장에서 거래되는 삼베의 마지막 과정인 베짜기만 품삯을 받으며 대행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걸 ‘장베’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제법 괜찮은 일거리라는 사실을 안 다른 여성이 몇 년 뒤에 ‘장베’를 짜기 시작했다고 한다.
Ⅲ. 삼베길쌈의 전통 재창조와 경제가치
1. 가사노동시간 감소와 삼베길쌈의 가치 재인식
시간 | 하는 일 | 비고 |
4~5시 | 기상, 우물에서 물 긷기, 밥하기(1시간~1시간 30분) | |
6~6시 반 | 상차리기, 도시락 싸기 | |
9시 | 가축 먹이주기 | |
9시 이후 | 간단한 집 청소, 참 준비, 방아찧기(보통 2~3시간) | |
점심 무렵 | 점심 준비(30~40분, 일꾼들이 있으면 1시간 이상) | |
2시쯤 | 들에서 돌아와 설거지, 쇠죽 주기 | |
2시 이후 | 빨래, 오후 참 준비 | |
저녁 전 | 나물 캐기, 반찬거리 준비, 텃밭 농사, 땔감 마련 등 | |
저녁 무렵 | 밥하기 | |
저녁 이후 | 설거지, 간단한 방 청소, 다른 식구들 취침 준비, 바느질이나 길쌈 | |
11~12시 | 취침 |
이 마을에선 1940년대 정미소가 설치되면서 방아 찧는 일이 간소화된다. 그리고 1970년대 전기가 보급되고 농기계가 도입되면서 가사활동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특히 가사활동 시간이 연장되고, 다양한 가전제품이 도입되어 가사활동 시간이 크게 줄었다. 또한 농기계가 도입되면서 남성의 중노동이 경감되고, 이로 인해 여성의 농사를 보조하는 부담도 가벼워졌다. 게다가 이 시기 국가적으로 추진한 산아제한 정책은 가족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억제했다. 이에 따라 목현마을 여성들은 농작업의 참여를 선택적으로 강화했는데, 특히 담배농사에 많이 참여했다. 이후 1970년대 말 고추 가격이 폭등한 뒤에는 고추농사가 인기를 모았다. 목현마을의 여성들은 이러한 요인들에 의해 삼베길쌈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하게 되었다.
2. 삼베길쌈 전통의 현대적 변용
목현마을에서는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삼베길쌈이 다시 성행하기 시작했다. 직접적 요인은 ‘장베’의 돈벌이가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이고, 간접적 요인은 안동포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증가하면서 가격이 상승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다시 성행한 삼베길쌈은 예전의 것과는 다른 몇 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첫째, 이제는 대마를 직접 경작하지 않고 안동 지역에서 구입한다는 점이다. 목현마을은 교통이 불편해 1박 2일의 일정으로 임하면 금소리와 고곡리에 “삼 받으러 간다.” 둘째, 생냉이와 익냉이 가운데 생냉이만 생산하되 품질은 하향평준화가 되었다. 셋째, 삼베길쌈의 공정과 방식,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작업을 품삯을 지불하고 타인에게 의뢰한다. 넷째, 삼베길쌈을 하는 주체의 작업방식과 가족 내적 지위에 변화가 생겼다. 농가마다 작목이 달라 함께 모일 기회가 축소되어 둘게삼 삼기가 약화되었다.
3. 부녀자들의 경제활동으로서 삼베길쌈의 가치
농촌 여성에게 삼베길쌈은 매우 중요한 경제활동이다. 2000년 7새 삼베 1필은 50만 원이었는데, 생산원가는 직접 할 경우 4만 원, 타인에게 의뢰할 경우 19만 원으로 31~46만 원 정도 순이익이 발생한다. 벼농사 1마지기의 순이익을 계산하면 35~46만 원으로서, 삼베길쌈의 경제적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보통 1명의 여성이 1년에 삼베 2필 정도 짤 수 있기에 대략 2마지기의 벼농사를 짓는 것과 비슷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Ⅵ. 삼베길쌈을 수용한 마을 문화와 입지조건
1. 민촌 동성마을 문화에 기초한 삼베길쌈
35가구가 사는 목현마을은 한 가구만 제외하고 모두 평해 황씨인 집성촌이다. 이렇게 동성마을이란 점이 삼베길쌈을 다시 시작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했다. 동성마을이 갖는 구성원 사이의 동질성·동류의식·협업의식, 그리고 양반이 아니라서 두드러지는 여성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적극적 참여의식이 삼베길쌈의 전통을 재창조하는 자원이 되었다.
2. 지리적 조건에 부합되는 삼베길쌈
목현마을은 산골의 가장 안쪽 깊숙이 자리하고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이웃 마을과의 교류도 원활하지 않고 다소 폐쇄적이다. 특히 교통이 불편한데, 이러한 제약은 상품경제적 농업생산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러한 장애는 환금작물을 선택할 때 건조하면 무게가 감소하는 담배나 고추를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삼베 또한 부피나 중량에 비례하여 어떤 농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가품이다. 삼베는 가벼운 무게 때문에 아무리 많이 생산해도 운송과 판매 과정이 힘겹지 않다. 목현마을은 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마을로서,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지리적 조건에 효율적으로 적응하는 방안으로 삼베길쌈의 전통을 선택한 것이다.
논평
필자는 목현마을의 삼베길쌈이란 문화현상에 주목하고 전통의 현대적 재창조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과거 단절되다시피 한 목현마을의 삼베길쌈이 어떠한 요인들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고 선택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논문을 읽고 드는 몇 가지 의문이 있어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는 “여성들이 밖에서는 농사일에 종사하면서도 집에서는 길쌈을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농업기계화·화학농업의 일반화, 전등불과 가전제품의 보편적인 사용”이 중요한 배경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삼베길쌈은 전에도 계속 하던 일로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소멸한 것이다. 그러한 삼베길쌈의 전통이 부활한 데에는 필자가 지적한 배경 외에 경제적 배경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급을 목적으로 하던 목현마을의 생활양식이 시장경제에 편입되면서 삼베길쌈의 전통을 되살린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을 ‘장베’와 순이익을 다루면서 암시하고는 있지만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다. 목현마을 여성들이 삼베길쌈이란 전통을 되살린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둘째, 벼농사의 생산원가 계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를 직접 구입하여 농사짓는 사람의 경우 종자·농약 등의 구입비만이 아니라 농기계 구입비도 감안하여 계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계산하면 삼베길쌈은 벼농사에 비해 엄청난 고부가가치를 지닌 일이 된다. 그런데 왜 목현마을에서는 이러한 고부가가치의 일을 전업으로 삼지 않고 있는지 궁금하다.
셋째, 필자는 현재 목현마을에서는 대마를 직접 경작하지 않고 임하면 쪽에서 구입한다고 했다. 그런데 대마 생산지의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양질의 대마를 생산한다고는 지적했지만, 교통이 불편한 목현마을의 사람들이 굳이 1박 2일이란 시간을 들이면서 그곳까지 가서 대마를 구입하는 까닭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듯하다. 왜 대마 농사를 포기하고 구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는지 궁금하다.
넷째, 필자는 농업노동에서 여성은 대체로 남편의 일을 돕는 역할을 하고, 밭매기의 경우에만 여성이 거의 전담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농업에서 여성의 역할이 단순히 남성의 보조 역할만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소를 부려 논밭을 가는 일과 같은 힘이 많이 필요한 일이나 주곡인 벼농사에서 남성이 담당한 노동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파종이나 밭의 관리, 수확, 종자의 관리 등에서 여성이 담당한 역할이 작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다. 또한 농작업이 기계화되어 남성의 중노동에서 크게 줄었지만, 노동시간이란 측면에서 그러할 뿐 노동강도는 오히려 더 심화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은 여전히 농기계 작업에서도 남성을 보조하고 있다. 농기계 도입이 어떻게 삼베길쌈의 전통을 되살리는 요인이 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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