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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텃밭농사

줄모와 막모

by 石基 201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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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모를 내다가 마지막에 막모를 내는 모습.

 

 

원래 조선놈들은 막모를 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논이 천둥지기였고,

그래서 이런저런 농사일을 하다 비가 내리길 기다렸다가 모를 내야헸고,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논농사를 책임지다 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되어 근대농법이라며 선진적인 일본의 농법을 보급하면서 줄모를 내게 되었지요.

하지만 조선의 논 사정은 여전히 수리불안전답이었지요.

당시 수리조합이 세워지며 그 혜택을 받는 논은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어지고 이어져 80년대인가까지 물세를 내라고 정부기관에서 종용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아무리 정책적으로 줄모를 내고 품종개량을 해서 줄모를 내라고 해도 조선사람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왜냐.. 조건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결국 일제가 선택한 것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농정이 그렇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농정과 비슷하지요.

소농 말살.. 대농의 육성(기업농 육성).. 등등 

 

당시 줄모를 내지 않으면 군청 직원이라든가 공무원들이 나서서 못자리부터 밟아 뒤엎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물론 산간 지방으로 이어지는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일수록 그런 일이 적었지요.

아무튼 그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박정희 때 녹색혁명을 이루자 할 때였지요.

그때 통일벼를 심지 않는 곳은 못자리부터 밟아 버렸답니다. 취재를 다니며 그런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통일벼에 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냉해에 약하다는 점이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통일벼는 열대지방의 쌀인 인디카 계열을 근간으로 육종한 벼라 그렇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농진청에서도 통일벼로는 되지 않는다 하여 다른 방향으로 육종을 했답니다.

 

저는 계속 의문인 것이 무엇이 보릿고개를 해결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석종욱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 의문이 더 깊어졌습니다.

옛날에 농사지을 때는 유기물 함량이 5% 가까웠는데 점점 화학비료에 의존하면서 2% 이하로 떨어졌다.

그럼 옛날 사람들은 바보라서 보릿고개를 그냥 놔두었는가?

역사 자료를 뒤지면 당시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겼는지 나옵니다.

얼마나 훌륭한 복지시스템이 작동했는지는 다시 말해 귀찮을 정도지요.

그게 무너지면서 넘어간 것이 조선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모를 내는 행태를 말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이야기가 줄줄 이어졌습니다.

아무튼 줄모를 내는 것은 편하고, 좋다는 이유를 가졌는데 일의 효율에서는 막모보다 못했습니다.

특히나 지형이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조선의 논에서

날을 잡아 그렇게 그렇게 하는 일은 우스운 일이었지요.

조선의 농법은 날씨와 조건... 그것들이 큰 영향을 주었을지 몰라도...

정말 큰 일은 그때그때 맞춰서 한다는 것.

그 원칙에 따라 간다는 것.

그걸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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