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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은 흉악 범죄가 일어나는 도시라는 안 좋은 이미지가 강하다. 2009년 연초부터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연쇄살인사건이 그렇고, 그 이후에도 이따금씩 강력사건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런데! 그런 안산이 조선시대에는 충신들이 살던 곳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이번 답사는 그런 안산의 충신들을 찾아가는 길이다.
안산을 가로질러 흐르는 두 하천인 화정천과 안산천의 사이에 자리한 와동. 이곳은 예전에 기와를 굽는 곳이라고 하여 와동(瓦洞)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이다. 뒤에는 광덕산이 버티고 있고, 앞으로 안산과 화정천이 흐르는 좋은 명당 자리이기도 하다. 이곳에 임진왜란으로 유명해진 충신이 잠들어 있으니, 그의 이름은 김여물(金汝物, 1548~1592) 장군이다.
그의 이름 석자는 신립 장군과 함께 기억된다. 신립 장군이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막다 결국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김여물 장군은 그보다 유명하진 않지만, 신립 장군에게 문경새재에 진을 치고 왜군을 막자고 건의했던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김여물 장군의 건의대로 문경새재에 진을 치고 왜군을 막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당시 왜군의 주력이었던 조총부대와 조선의 주력이었던 기마대의 성격상, 그리고 또 8천의 조선군과 1만 8천 남짓의 왜군의 전력상 어디에서 맞붙었건 조선군의 패배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김여물 장군의 문경새재 방어설이 인구에 회자되는 건 그만큼 신립 장군의 패배가 너무도 아쉬웠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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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물 장군은 명종 22년(1567) 진사가 되고 10년 뒤인 선조 10년(1577) 알성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한다. 알성문과란 임금이 성균관에 참배한 뒤에 치르는 과거를 말한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 1591년 의주목사로 있을 때, 관동별곡으로 유명한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로 파직되는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이 된다. 그런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의 특명으로 신립과 함께 충주 방어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 듯이 그는 충주에서 신립과 함께 장엄히 전사하게 된다.
이후 조선은 병자호란까지 겪는 암울한 시기를 만나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던 김여물 장군의 후실인 평산 김씨와 아들 김류(인조반정의 주역)의 아내 진주 유씨, 그 손자 김경징의 아내 고령 박씨와 증손자의 아내 진주 정씨가 모두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진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데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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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는 그 집안의 충성과 열녀 정신을 높이사서 사세충렬문을 세워주기에 이른다. 그 사세충렬문의 옆에는 김여물과 김류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다. 김여물은 전사한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어 신도비에 충신증영의정(忠臣贈領議政)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아들 김류의 신도비에는 그가 살아 생전 역임한 영의정이란 직함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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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난 산책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순천 김씨의 묘역이 나온다. 주변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가벼운 맘으로 산책을 나서곤 하는 그곳에서 김여물과 김류가 영면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데 이 두 부자에겐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광덕산 자락을 오른쪽에 놓고 안산 면허시험장 쪽으로 살살 발걸음을 옮겼다. 안산 면허시험장을 지나 사세충렬문에서 약 1.5km, 20분쯤 걸어가면 영동고속도로 밑으로 아랫버들이란 곳으로 들어서는 길이 보인다. 길의 입구에는 수도권 외곽에서 늘 볼 수 있듯이 소규모 공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몇 개의 공장을 지나자마자 흙길이 나오기 시작한다. 영동고속도로를 빠르게 지나는 차 소리가 조금 귀에 거슬리긴 하지만 발에 느껴지는 흙의 보드라운 감촉이 그걸 무마시킨다.
이 골짜기의 이름은 아랫버들, 그 이름처럼 작은 시내가 흐르고 논이 발달해 있다. 공장이 자리하고 있던 그곳도 예전에는 모두 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작은 시내 주변에는 물기를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10여 분을 걷다보면 저 멀리 길의 끝에 면허양어장이 보인다. 조금만 신경을 써서 왼쪽을 보며 가면 산길로 들어서는 입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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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닦여 있는 걸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인 듯하다. 허나 길은 있으나 그 길의 이름은 딱히 없는 사정, 이곳이 아랫버들이니 버들고개가 어떨까 하고 이름을 붙였다. 버들고개는 노적봉을 가로질러 화정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안산의 일동에도 노적봉이 있는데 이곳에도 또한 노적봉이 자리하고 있다. 노적봉은 노적가리, 곧 낟가리를 닮은 그리 높지 않은 산에 붙이는 이름이다. 그래서 어느 동네나 노적봉이 있는 곳이 많은데, 그런 곳은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노적봉을 가로지르는 버들고개의 정상에서 오른쪽 길로 발걸음을 옮기자. 산이 가장 아름다운 5월 초, 소설가 조정래는 이 무렵의 산의 빛깔을 유록색(乳綠色)이라 명명했다. 하지만 그 말로는 부족하다. 이 아름다운 연둣빛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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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가파르지 않은 길을 따라 30여 분을 걸으면 오른쪽으로 확 트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안산 공원묘지가 자리하고 있는지라 울창한 숲이 없는 덕에 좋은 풍광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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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과 부곡동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이곳에서 잠시 땀을 식히며 한 숨을 돌리자. 그러는 사이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에 빠지기에도 좋다. 이 길은 꼭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걷는 맛이다. 저승이 그리 먼 곳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사람은 착하게 살지 않을런지.
산길을 따라 그대로 쭉 걸어가면 마산 정상에 닿는다. 오늘은 산행이 목적이 아니라 안산에 남아 있는 충신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 화정동에 자리하고 있는 고송정을 찾아가야 한다. 어디로 어떻게 내려가야 하는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잠시 땀을 식히며 죽음을 생각했던 곳에서 몇 분만 걸으면 '고송정'이란 간판이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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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부터는 길이 조금 가파르다. 노약자와 함께했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연인 사이라면 서로의 손을 꼭 잡을 수 있으니 더욱 좋다. 연애 초기라면 사람도 그리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니 은밀한 접촉(?)도 즐길 수 있을 테다.
10분 남짓 내려가면 고송정을 볼 수 있다. 이곳에 얽힌 일화가 눈물겹다. 안산에는 유난히 단종 복위와 관련 있는 유적과 인물이 많다. 안산이란 곳에 아웃사이더, 비주류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곳 고송정도 바로 단종 복위와 연관이 있다.
단종 복위에 가담했던 김문기(金文起)라는 분이 세조에게 걸려 그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 손자인 김충주(金忠柱)는 그 난리를 간신히 피하여 이곳저곳 신분을 숨기고 떠돌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 뒤부터 자신이 누구인지를 숨기고 숯을 구워 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뒷산에 올라 너른 바위 위에서 단종과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를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얼마나 울었던지 주변의 소나무가 눈물의 소금기 때문에 말라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니, 그 절절한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는 1827년 김충주의 9세손이 짓고 고송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옆 바위에는 탄옹고지(炭翁古址)라는 글씨를 새겨 지금도 대나무 숲은 잘 헤치면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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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송정 앞으로는 논이 펼쳐져 있다.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아 벼 밑동만 덩그러니 보이지만, 이제 곧 모내기를 하고 날이 무더워지면 노거수가 주는 시원한 그늘과 벼의 푸르름이 참으로 아름다울 듯하다. 무더운 한여름에 꼭 다시 찾아야겠다.
고송정이 자리한 동네의 이름은 너비울이다. 들이 넓다는 뜻에서 너비울이다. 고송정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기에 그 말을 실감할 수 없으나 동네로 걸어나오면 탁 펼쳐진 들판에 어째서 너비울이라 부르는지 알 수 있다.
걷기에 자신 있는 분이라면 여기서부터 화정천을 따라 안산 시내까지 걸어가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분이라면 이곳에서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6번 마을버스가 고잔역까지 운행하고 있는데 그리 자주 있지 않기에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 사이에 동네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정각을 둘러보아도 좋겠다.
내친 김에 조금 더 걷고자 하는 분이라면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꽃우물을 들러도 좋다. 화정동의 화정(花井)이 바로 이 꽃우물에서 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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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물이 계속하여 샘솟는 이곳에서 세수도 한 번 하고, 목도 축였다. 쭈그리고 앉아 씻는데 너른 논이 눈에 들어온다. 꽃우물의 물이 이 논의 젖줄이었으리라. 이제는 양수기의 편리함에 꽃우물의 소중함이 밀렸을 테지만, 그 옛날 마르지 않고 샘솟는 꽃우물의 풍요로움에 기대어 살았을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이 우물에 모여 수다를 떨며 빨래를 했을 아낙네들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백중날에는 떠들썩하게 마을 잔치가 열렸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너른 들판에서 자라는 벼를 보며 풍년을 빌었을 그네들의 삶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출처 : 안산 옛길 걷기여행 2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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