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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생산지를 배후에 둔 생산지대에서는 순계품종 재배에 노력한 결과 잡종은 쉽사리 판로를 찾기 어렵게 되고 가격도 순계에 비해 매우 싸지만, 백미생산지에서는 이품종을 적당히 섞어서 맛있고 값싼 백미를 만드는 백미혼합기술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백미 원료로서는 품종혼합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순계 품종이나 혼합벼나 실제 가격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 또 한백미 생산이 많은 지방에서는 원료벼의 함유수분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으며 건조가 불량한 벼와 양호한 벼의 격차도 별로 없으므로 경성에 판로를 가지고 있는 지방에서는 생산개량을 하여 원료벼의 품종을 단일화하고 건조를 잘 하면 할수록 생산자는 개량비와 건조비만 손해본다.

조선인 소비자는 낟알이 굵은 곡량도를 좋아하는데 비해 조선쌀의 소비가 많았던 일본의 관서지방 등에서는 낟알이 잔 은방주를 좋아하였다.  ■ 조선 내 최대의 쌀 소비지였던 서울을 시장으로 하고 있었던 경기도 등지에서는 당국에서 말하는 품종개량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아서 애를 태우는 당국의 목소리가 당시 자료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농민이 곡량도 생산에 집착하는 구체적인 이유로는 벼의 가격차와 농민들의 주요 부업의 하나였던 새끼, 가마니 등의 원료가 된 짚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곡량도보다 은방주쪽이 더 비쌌지만 서울에서는 오히려 곡량도 값이 더 비쌌다고 한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로 조선인측의 정미소에서는 한백미의 원료로 곡량도를 은방주보다 70전이나 더 비싸게 거래하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양주군의 생산자가 은방주보다 곡량도를 선호하여 재배하는 것은 곡량도가 경성에서 비싸게 팔린다는 이유도 있으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곡량도의 볏짚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말에 의하면 은방주는 짚이 짧고 가볍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낟알이 굵은 것을 선호하는 경성부민은 곡량도의 산지인 고양군의 쌀이 가장 좋은 쌀이라 하였고 ■ 지금도 고양군산 쌀은 맛있다고 하여 부민들에게 소중히 여겨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양주군은 경성에 벼를 팔기 때문에 낟알일 굵은 것을 존중하여 총생산량의 65%까지는 곡량도이고 은방주 같은 것은 30%에 불과하다

곡량도는 경성쪽이 비싸므로 경성으로 반출되는 경우가 많고, 은방주, 다마금은 인천에 반출하며 ■ 예를 들어 용인 등은 은방주 생산이 많으므로 인천과의 거래가 많은데 이천, 여주에서는 곡량도가 많으므로 거의 전부 경성과 거래한다. 또 수원 관내에서도 수원읍 같은 데서는 은방주가 많으므로 경성보다는 인천으로 주로 반출되고 있으나 병점은 유명한 곡량도 산지인 만큼 경성으로의 벼 반출량이 몇 배나 많다고 한다. 또 파주군도 벼 품종별로 볼 때 은방주는 약 40%를 차지하고 곡량도는 50% 이상에 달하므로 거래는 주로 경성과 이루어지고 인천에 반출되는 수량은 겨우 2000-3000석에 불과하다

식민지기 서울의 정미업은 개항장 인천에 비해 그 생산미의 수요가 거의 서울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것이 별로 없음이 특징이다. 그리고 서울 정미소의 지역별 분포상황을 보면 일본인 경영자는 주로남부 및 용산 방면에, 조선인 업자는 서부 및 동부 지역에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분포가 판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소비자의 거주지에 따라 공장분포가 달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각기 생산하는 쌀의 종류도 달랐던 것이다. 일본인 경영자가 석발미를 조제, 공급하는 반면, 조선인 경영자는 일반 조선인이 주로 찾는 불발미(한백미)를 조제하는 자가 많았다.
또 서울의 조선인 정미업자가 생산하는 쌀은 불발미가 많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공장의 경영내용도 달라진다. 우선은 원료의 차이를 들 수 있다. ■ 조선인 정미공장은 벼를 원료로 현미를 찧어 그것을 부내의 현미기 없는 정미업자에게 팔거나 정백까지 해서 백미(그 대부분이 한백미)를 직접 조선인 소비자에게 팔았다. 이에 반해 일본인 정미업자는 벼를 원료로 하는 자가 없고 거의가 현미를 원료로 하여 ■ 석발미를 생산해 이를 부내의 일본인 소비자에게 발폭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원료의 차이는 당연히 공장 설비의 차이를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벼를 원료로 하는 공장에서는 벼 건조장으로서 넓은 토지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현미공정 및 백미공정의 일관체제를 갖추고 생산하는 것이 유리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업자가 현미를 원료로 정백하는데 그치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몇 가지 사정이 있었다. 우선은 앞에서 언급한 토지문제이다. 땅값이 비싼 서울에서 넓은 땅을 구입하는 것은 과대한 자금의 고정화를 초래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토지소유가 많았던 지주가 경영하는 정미소가 단연 유리하였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종래 객주들의 주된 활동무대였던 마포에 현미만을 생산하는 도정공장이 많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 정미소는 현미를 찧지 않고 정미기만을 사용하여 현미를 원료로 정백하는 자가 일반적으로 많다. 그러나 조선인측의 정미소에서는 정미업자가 상당한 자산을 가진 자가 많아서 자본을 잠재우는 데 대해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둘째로 벼를 구입하는데 따른 어려움이다. ■ 지방상인 또는 농가와의 거래경험이 있어서 이에 정통하지 않으면 원활한 상담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벼를 원료로 하는 자가 대부분 조선인 경영자이고 일본인 경영자가 적은 가장 큰 이유이다. 셋째, ■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의 1930년대 중반의 쌀 유통과정을 보면, 쌀 생산농가에서 최종소비자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이 민족별로 상당히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주로 대소비지 서울에 쌀을 파는 지역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장려하는 품종개량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조선인이 좋아하는 낟알이 굵은 곡량도 생산이 많았으며, 이렇게 생산된 쌀은 벼검사를 받아도 이득은 고사하고 오히려 손해만 보므로 필사적으로 검사를 피해 반출되었다. 또 유통경로는 철도나 트럭에 의한 수송이 늘어나지만 서울에 반입되는 쌀은 여전히 종래로부터의 배편에 의해 수송되는 것이 가장 많았고 배편에 의해 수송되는 벼는 검사를 받지 않는 것이 더 많았다. 그리고 조선인의 식량으로 소비되는 쌀은 한백미가 대부분이며 그것은 거의 조선인 정미업자에 의해 찧어져 직접 또는 조선인 거주지역의 소매상을 통해 최종소비자에게 공급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낟알이 잔 은방주를 좋아하는 일본인 소비자에게는, 마포 등지에서 생산된 현미를 구입하여 이를 이른바 석발미로 정백하는 용산 등지의 일본인 정미업자 또는 정미기를 소유한 일본인 소매상에 의해 공급되었다.
쌀 유통에서의 이러한 민족적 구별은 생산농가까지를 포함한 쌀유통과정의 각 단계에 관여하는 식민지민중의 재생산활동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 지배에서 차지하는 쌀의 중요도로 보아 적어도 쌀 유통에 있어서는 당연히 일본인 상인이 압도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는 것이다. ■

cf. 마포, 현석리 방면은 옛날부터 대량의 미곡집산지로서 이를 위탁판매하는 객주도 많았으며, 절구, 연자배 등으로 찧은 한백미를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에 위탁판매하는 등 오로지 백미만을 생산하던 지역이었다. 그런 마포, 현석리, 동막 등이 현미만을 생산하게 된 것은 서대문 및 용산 방면의 현미기 없는 정미소가 출현한 이후부터였다.


출처 이홍락, 1995, "식민지기 조선내 미곡유통," 경제사학 19.
원자료는 조선미곡사무소, 1936, 경성부에 있어서의 미곡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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