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7일. 오랫만에 맑은 날이다. 꼽아보니 제주도에 와서 두 번째 맑은 날이다. 그동안 흐린 날씨에 고생 좀 했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다.
먼저 화순리 옆에 있는 덕수리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한 집을 들르고, 두 집을 들르고... 왜인지 할머니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집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다니다 가게 앞에 꼬마애들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른들은 어디 안 계시냐고.
돌아오는 답에 머리를 쳤다. 어른들은 오늘 화순리에 잔치가 있어서 모두 그곳에 가셨단다. 우리가 화순리에서 왔는데, 이 마을 어른들은 모두 거기로 간 것이다. 이런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쉽지만 이 마을은 여기서 이만 접기로 했다.
덕수리에서 만난 폭낭(팽나무).
다음 마을로 건너갔다. 이번에 들른 곳은 한경면 고산리. 이곳은 밭이 있긴 한데 홑짓기가 주를 이루고 있어 별 것이 없었다. 정말 가까이서 보니 장관이다. 너른 땅에 쭉 똑같은 작물만 자라고 있다. 마늘 아니면 양파.
고산리에서 만난 어느 밭. 저 끝까지 모두 마늘이다. 이렇게 농사를 짓기에 농민이 적어도 그 많은 도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이 중요해지는 것이고...
이 마을에서 바쁘다는 할머니를 한 분 간신히 찾아서 40일깨와 50일깨를 얻었다. 40일깨는 키가 작아 무릎 정도까지 자라고, 50일깨는 그보다 커서 허리까지 자란단다. 그리고 한 창고에서 쪽파를 다듬는 어르신 내외를 만났는데, 토종 이야기를 꺼내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토종은 가져가면 농협에서 수매를 안 해줘요. 그래서 멸종이 되었어요."
그렇다. 토종은 생계와 직결된다. 생계를 완전히 다 책임지진 않아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면 토종이 뿌리를 내리는 일도 쉬워질 것이다. 이건 참 복잡다단한 문제이니 여기서는 그만두겠다.
그리고는 길가의 담장에서 나팔꽃 같은 것을 하나 채집했다.
다시 차에 올라 신도리로 향했다. 여기는 바다와 가까운 곳이라 구릉도 없고 길이 평탄하기만 하다. 햇빛도 따땃하고 별다른 변화도 없으니 졸립다. 차에 올라 가만히 있으면 단조롭고 한가하기만 한 시간이다.
신도리를 돌아다녔지만 별 건 없었다. 그러다 한 젊은 농부 한 분을 만났다. 이 분께 토종을 물으니, 제주도 풋마늘이라면서 한 단을 들고 나오신다. 지금 심는 건 30년 이상 되었다고 하니 눈이 번쩍 띄였다. 이건 마늘을 먹는 게 아니라 줄기를 먹는 건데, 알이 작고 잔뿌리가 많으며 가지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먹었을 때 다른 곳의 것보다 향이 좋다며 제주의 식당에서 나오는 풋마늘은 대부분 신도 1, 3리와 용수리가 주산지라고 한다. 1단에 3700~3800원을 받아 값도 나쁘지 않다고.
7월 말에서 8월 초에 심어 12월 말에서 1월 초에 거두는데, 5월이 되어야 씨가 나오니 지금은 나눠줄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나중에 그맘때 연락하기로 약속하고 말았다. 풋마늘은 농사짓기는 힘든 편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울에 눈비 맞으며 일해야 하기에 그렇단다.
신도리의 젊은 농부. 이 정도면 아주 아주 젊은 편에 속한다. 농사로 벌어 먹기 힘들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고향과 땅을 지키고 있다.
풋마늘. 농사로 돈을 벌어 살려면 무엇보다 판로가 큰 관건이다. 토종도 그런 쪽으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온 듯하다.
신도리를 조금 더 돌다가 신도2리 1317번지에서 양이남(71)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께 갯나물(갓) 빨간 거를 얻으며 들으니, 파란 것보다 이게 더 맵다고 하신다.
다음은 중산간으로 올라갈 차례다.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바닷가 근처보다 중산간으로 오를수록 그나마 집에서 조금조금씩 심어 먹는 것이 많았다. 다시 말해 그만큼 토종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기대를 하며 산양리 방향으로 올랐다.
산양리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감귤. 감귤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건 제주에 와서 처음 알았다. 이건 껍질이 두껍고 단맛이 덜해서 그다지 상품성이 없는 것이지만, 길을 다니며 하나씩 까먹으면 참 맛났다.
한경면 산양리의 어느 농가 뒷밭의 모습. 제주는 대문만이 아니라 밭에도 이렇게 대문을 만들어 놓았다. 특히 이곳처럼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마소를 놓아먹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 대문은 도둑놈을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을 막으려고 걸쳐 놓은 것이다.
산양리에 올라 또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다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뭐 훔치러 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땅을 보러 다니는 외지 사람인 줄 알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한 할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신다.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하다 보니, 이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사신 토박이셨다. 토종 종자를 찾는다고 말씀드리니 집으로 가보자며 이끄신다. 한경면 산양리 2441번지에 사시는 이경구(80) 어르신이다.
할아버지를 따라나서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여러 개 들었다. 제주의 장이 서는 순서는 이렇다. 제주시에서 애월로, 애월에서 한림으로, 한리에서 고산으로, 고산에서 모슬포까지 갔다가 다시 제주로 간단다. 그리고 쟁기질은 흙이 센 밭은 겨리로 갈지만, 대개는 홑머리로 밭을 갈았다. 돼지는 보통 집집마다 1마리만 키웠다. 그건 다들 아는 똥돼지다. 씨를 뿌리고 발로 밟은 것은 밭이 일어나서 그랬다. 그렇게 발로 밟은 씨는 조와 산듸(밭벼) 두 가지였다. 예전부터 옥수수나 수수 같은 건 심지 않았다고 한다. 그건 아무래도 거름 때문일까?
이런 저런 이야기만 듣고 정작 씨는 얻지 못했다. 아니, 호박 하나를 얻었긴 한데 별로 좋지 않아서 숙소에 있던 것과 바꾸었다. 그것도 같은 제주도 안인 군메오름 근처에서 얻어온 것이란다.
다시 차에 타 청수리 방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감귤 하우스 재배를 하는 분을 만났다. 전문적으로 아주 열심히 농사를짓는 분이었다. 이제 제주도 하우스 감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분 밭에 있는 박을 하나 얻었다. 지난해 서귀포 농사시험장에 견학을 갔다가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청수리를 돌았지만 별 건 없어, 서광서리 쪽으로 향했다.
서광서리는 뭔가 있을 만한데 다들 감귤에만 집중하고 있어 그런지 정작 돌아보니 토종을 만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집에서 콩을 말리고 있어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한참을 뒤지고 찾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감사의 수건 하나를 놓고, 콩을 조금 얻어왔다.
서광서리에서 이제 어제 잠을 잤던 숙소 쪽으로 향했다. 여기만 돌면 오늘의 일정은 끝이다. 마지막으로 돌아볼 곳은 구억리라는 곳이다. 대평면 구억리 697번지 주재희(84) 할머니 댁에서 대미를 장식할지 이 순간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그 윗집에 들어가 한참을 뒤졌지만 별 게 없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특히 텃밭에 자라는 무와 배추가 심상치 않아 보여 실례를 무릅쓰고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참 사람을 찾는데 마당 한켠에 이런 무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무의 생김생김이 심상치 않았다. 이걸 보자마자 안완식 박사님께 달려가 보고했다.
다시 돌아오니 할머니께서 나와 계셨다. 이게 뭐하는 놈들인가 신경 안 쓰시는 척하며 유심히 보시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본인이 하실 일을 차분히 하시는데, 우린 아주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하신다. 귀찮게 들러붙어서 이것저것 여쭈었다. 저 무는 언제부터 심은 건지? 사다 심은 것인지 아니면 씨를 받아서 심는 것인지? 자꾸 귀찮게 물으니 사람 말을 안 믿는다며 벌컥 화를 내신다. 육지 사람들은 이상하다며, 속고만 산 사람들처럼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역정이시다. 하지만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이야기를 많이 나누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자식들 챙겨줄 참깨를 키질하고 계신 조재희 할머니.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자식들 챙기는 데 가 있는 걸까?
그렇게 어렵게 물어 알아낸 것은, 이 무는 6월에 심는데 빨리 하고 늦게 하고의 차이일 뿐 모두 같은 무이다. 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일 뿐이다. 그리고 청춘부터 심던 것으로, 정확히는 시집와서부터이니 18살부터다. 씨를 받아서 쓰는데, 약방에서 사온 소독약을 다라에 넣어서 살살 잘 묻혀서 쓴다. 그래야 3년을 두어도 끄떡없어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키질하시던 깨는 40일깨로 이것도 젊어서부터 심었다. 텃밭에 있는 배추도 물론 시집와서부터 씨 받아서 계속 심는 것이다. 그래도 무보다는 좀 늦다고 한다.
할머니 성격이 장난이 아니다. 본인도 늑저분한 곳에는 있지 못하신다는데, 집 안 곳곳이 깔끔하다. 이 연세에도 몸을 놀려 집을 치워 놓으신 걸 보면 기가 막힐 뿐이다. 할머니는 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멍 얼굴도 모르고 자라셨단다. 그런데도 살림 솜씨는 대단하신 듯하다. 어느 정도 지나자 이제 귀찮으신지 "혼저 갑서"라고 외치시며 얼른 내보내신다. 그 등쌀에 쓱 물러나왔지만, 오늘 마지막에 큰 수확을 얻어 다행이다.
구억리 할머니의 배추. 그리 통이 많이 차지 않고 길쭉한 것이 토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땅에 박혀 자라고 있는 단지 무(추정)의 모습. 제주도 무는 왜 다들 이렇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같은 씨를 가지고 뭍에서 심으면 어떻게 될까?
이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대정 성터를 잠시 들렀다. 현재 수리하고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대신 담이 낮아 밖에서 기웃거리면 충분히 볼 수 있다.
추사가 이런 일을 했을리는 없고 어디 있는 걸 주워다 놓지 않았을까?
추사가 유배생활을 했다는 집의 뒷간. 역시나 돼지가 살고 있다. 저기 돌그릇은 물그릇처럼 놓았지만 원래는 곡식을 다루는 데 쓰던 것일 듯하다. 그냥 대충 가져다 놓은 티가 난다.
대정 성벽. 이곳은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 사람도 그때 이곳에서 이 성벽을 보았겠지. 하지만 추사의 유배지는 저렇게 꾸며 놓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뭐 그때는 주변의 집들이 다 저런 식이여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을 게다.
대정 성터에 있는 하루방. 지금의 하루방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좀 더 익살스럽고, 좀 더 몽골인과 닮았다고 할까? 확실히 하루방은 몽골인의 모습에서 온 듯하다. 모자는 아주 몽골 모자와 똑같이 생겼다.
대정 성터를 잠시 둘러보고는 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오늘도 어제 잔 화순리의 모텔이다. 대정리에서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에는 삼방산이 있었다. 삼방산은 산이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주의 몇 안 되는 산이다. 대부분은 오름이라 하여 용암이 불룩하다 식어 산의 모양처럼 솟은 것인데, 이건 암반부터 다르다고 하니 원래 용암이 팍 터지기 전부터 삐죽하니 튀어나와 있던 곳이 아닐까? 아무튼 참 신기하다.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에 만난 삼방산. 구름과 하늘이 삼방산과 어우러져 너무 멋있는 모습에 취해서...
삼방산 자락에 있는 절 앞의 주차장에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 왼편에 저게 용머리라고 했던가? 그 옆에 파랗게 보이는 게 하멜이 표류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배 모양의 무엇이다. 가까이 가보지는 않았다. 어서 돌아가야 하기에.
삼방산의 웅장한 모습. 불뚝하니 참 잘 생겼다.
화순리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날이 좋아 재수 좋게 한라산을 볼 수 있었다. 신령스러운 모습이다. 2000m가 이러니 그 이상 되는 산은 얼마나 놀라울까? 저절로 눈물이 주루룩 흐르지 않을까?
이로써 오늘 하루도 끝났다. 밤에는 안완식 박사님의 지인께서 저녁에 초대하여 배터지게 먹고 재밌게 놀았다. 두 분은 매화를 매개로 귀한 인연을 맺었다고 하는데, 아무튼 이런 회식은 20일 넘게 다니면서 처음이다. 덕분에 참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다음날 그 여파가 미쳐 좀 힐들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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