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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는 현재 공업 위주의 신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 정부의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고 과거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안산시는 해안에 위치한 관계로 전통생업으로서 농업과 아울러 어업이 이루어져 왔다. 즉 내륙 마을은 농업 위주였고, 해안 마을은 어업 위주였다.
그러나 현재는 신도시계획으로 인하여 예부터 해 오던 대부분의 논밭들이 도시가 되고 공장이 들어섰으며, 현재도 계속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안산의 대표적인 어촌이었던 사동(사리)의 경우만 해도 2~3년 전까지 마을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조수가 나가면 갯벌에서 온갖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어업생활을 영위했던 곳이다. 그러나 이것이 시화방조제공사로 인하여 이제는 사동(사리) 앞바다가 뭍으로 바뀌면서 과거에 해 오던 어업의 터전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신도시계획으로 인하여 안산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농업생활과 어업생활이 아득한 역사의 시간 속으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는 실정이 되었다.
비록 과거의 것이고, 아무 쓸모 없고 미개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 민족의 생활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생활관습과 의식구조가 얽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이미 소멸되었거나 사라져가는 과거 이 지역의 전통생업이었던 농업과 어업에 대하여 가장 재래식 방법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조사 방법은 본인이 조사한 것과 경험자의 얘기를 토대로 기록하였다.

1. 농업

(1) 갈이기술[耕地技術]과 도구(道具)
땅을 가는 것은 농사의 가장 기본작업이다. 무슨 곡식이든 파종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논밭을 갈아서 일구어야 한다. 우선 논갈이의 경우를 보면 봄에 하는 봄갈이와 가을에 하는 갈갈이가 있는데, 봄갈이보다는 갈갈이를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갈갈이는 벼를 거두고 땅이 얼기 전에 갈아 놓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표 1-9 생업기술과 도구의 조사 면담자
성명
성별
나이
주거지
직업

안선호
안O서
안종남
김태수
강덕원
안광업
이은수
김OO








60세
60세
77세
76세
69세

44세
88세
안산시 신길동
안산시 신길동
안산시 사동
안산시 사동
안산시 사동
안산시 사동
안산시 대부동
안산시 대부동
농업
농업
어업
어업
어업
어촌계장(96. 12)
어업
어업

안산 지역의 경우 논은 대개가 벼만 재배하는 일모작(一毛作)이기 때문에 논갈이는 갈갈이든 봄갈이든 간에 농가의 형편에 따라서 했다고 한다.
땅을 가는 연장으로는 쟁기가 쓰였는데, 이 지역에서는 주로 소 한 마리에 메워서 끄는 호리쟁기만을 사용했고, 두 마리로 끄는 겨리쟁기는 없었다고 한다. 쟁기의 구조는 보습 위의 볏이 한 쪽으로 비스듬히 경사져 있어 볏밥이 한 쪽으로만 넘어가게 되어 있는데, 경부(耕夫)의 입장에서 보면 왼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처음 갈아 나갔다가 두 번째로 돌아오면 볏밥이 마주 모여서 두둑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로 갈아 나갔다가 네 번째로 돌아오면 볏밥이 더해져서 두둑이 크게 된다. 이렇게 네 번 갈아서 한 두둑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가는 사람의 뜻에 따라서 두 번 갈아서 한 두둑을 만들기도 하고, 네 번 갈아서 한 두둑을 만들기도 하며, 심지어는 여섯 번 갈아서 한 두둑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네 번 갈아서 한 두둑을 이룬다.
이와 같은 갈이 방법은 인근의 수원 지역도 안산 지역과 마찬가지이지만,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수원 지역(수원시 이의동)의 경우, 처음 갈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볏밥이 쌓여 있는 자리를 띄워 놓고 쟁기를 대기 때문에 볏밥이 쌓여 두둑이 되는 자리의 중심은 쟁기가 들어가지 않아 땅이 갈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중에 2차로 갈이를 하여야 1차 갈이 때의 두둑이 완전히 갈리게 된다.
그런데 안산 지역의 경우는 처음 갈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볏밥이 쌓인 자리를 띄우지 않고 그 자리에 쟁기를 대면서 갈아 온다. 그러면 볏밥이 처음 갈아 나간 자리로 넘어가 두둑이 된다. 그러나 이처럼 하면 갈려고 하는 자리에 먼저 갈아 나간 때의 볏밥이 넘어와 있어 쟁기질을 하는 데 보다 더 부담이 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수원시 이의동의 경우처럼 두 번 갈이를 하여야 두둑의 땅이 다 갈아지는 것에 비하면 능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두둑을 만들지 않고 계속 한 쪽으로만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막갈이’라고 한다. 두둑을 만들지 않고 막갈이를 하게 되면 땅을 한 쪽에서 차례로 갈지 못하고 여기저기 갈기도 하고 사방 돌면서 갈기도 하는데, 이렇게 막갈이를 하는 것이 일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두둑을 만드는 것이 농사에 좋다고 한다. 그래서 논갈이를 해 놓은 것을 보고서 두둑을 크게 지었으면 농사를 잘 하는 집으로, 그렇지 않고 막갈이를 했으면 반대로 생각했다고 한다. 또 농사가 많은 부잣집일수록 논갈이를 할 때 두둑을 크게 지었고, 농사가 적은 집들은 막갈이를 했다고 한다.


사진 1-70 쟁기질
안산 지역에서는 주로 소 한 마리에 메워 끄는 호리쟁기를 사용하였다.
이상과 같이 축력(畜力)을 이용한 갈이 방법은 최근 기계화가 될 때까지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과거에는 소가 없으면 논밭을 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 집집마다 농우(農牛)를 기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소가 없는 집에서는 남의 소를 빌려 사용했다. 소를 빌리는 품값은 일꾼 두 사람 몫으로 계산했다. 즉 소는 사람의 두 몫으로 계산해, 소를 하루 빌려 부렸으면 그 대가로 사람이 이틀간 일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소와 사람을 함께 빌리면 소품 둘 사람품 하나로 계산하여 3일간 일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소를 빌려 쓰는 데 대한 품값 계산은 갈이뿐만 아니라 다른 농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논밭을 가는 데 쟁기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많이 있다. 땅이 너무 굳거나 높은 곳 또는 작은 논밭은 쟁기질이 어려워 사람이 직접 땅을 파 일구어야 한다. 이때 사용하는 도구가 쇠스랑·괭이 등이다. 쇠스랑은 긴 나무자루에 쇠로 된 기역자 모양의 세 개의 발을 박은 것으로, 이것을 사람이 양손으로 자루를 잡고 높이 들었다가 땅을 내리 쪼아서 땅을 파 일군다.

괭이 역시 긴 나무 자루에 기역자 모양의 쇠날을 박았는데, 날은 하나로 되었으며 길고 넓은 편이다. 사용 방법은 쇠스랑과 같다. 그런데 괭이보다는 쇠스랑이 땅을 파 일구는 데 더 많이 사용되었다.
땅을 가는 또 다른 연장으로는 ‘극젱이’를 들 수 있다. 형태는 쟁기와 비슷하지만 작은 편이고, 볏이 없어서 볏밥이 양쪽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은 논밭을 갈기보다는 주로 쟁기로 갈아 놓은 뒤에 골을 타는 데 사용한다. 그래서 보리밭 골이나 감자밭 골을 타는 데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극젱이를 같은 안산 지역에서도 반월 쪽에서는 많이 사용하였지만, 다른 곳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185)

사진 1-71 말굽쇠형따비.
안산 근해의 도서지방에는 과거에 사용하던 따비를 찾아볼 수 있다.
인력으로 땅을 가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따비’를 이용하는 경우이다. 따비는 역사적으로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서 그 유래는 매우 오래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농경문청동의기(農耕文靑銅儀器)에 괭이질과 함께 따비질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러한 따비가 과거에는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일반화된 듯하나 근대로 오면서부터는 일부 특수한 지역에서만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안산 지역의 경우를 보더라도 안산 본토 지역에서는 따비의 유물이 거의 없는 데 비하여, 안산 근해의 도서지방에서는 과거에 사용했던 따비의 유물을 찾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한 예로서 풍도의 따비를 들 수가 있다. 이곳에서는 근래까지 따비를 사용하였는데 따비의 형태는 말굽쇠형따비이다. 풍도의 따비를 현재 안산문화원에서 한 점 소장하고 있는데, 그 모양이 청동기 시대의 농경문청동의기에 새겨진 따비의 형태와 비슷하다.
따비의 사용 방법은 날을 땅에 대고 자루를 세워서 양손으로 잡고 한 쪽 발로 발판을 밟으면 날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손으로 자루를 잡아 젖히면 땅이 파 일구어진다. 쇠스랑이나 괭이가 손으로 들고 내리 쪼아서 땅을 파 일구는 것이기 때문에 팔 힘이 좋아야 깊이 파 일굴 수 있는 데 비하여, 따비는 발로 밟는 힘이 좋아야 깊이 파 일굴 수가 있다.
역학구조로 본다면 괭이나 쇠스랑은 땅을 내리 쪼아서 날이 땅 속에 들어가게 한 뒤에 손으로 자루를 뒤로 들어 젖히는 지렛대운동으로 땅을 일구는 것이라면, 따비는 발로 밟아서 날을 땅 속에 꽂은 뒤에 손으로 자루를 몸쪽으로 잡아당기는 지렛대운동으로 땅을 일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정지기술(整地技術)과 도구
1) 논삶기―써레질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쟁기로 논을 갈아 두었다가 모심기 직전에 삶아서 논바닥을 고르게 하여야 된다. 논을 삶는 대표적인 연장은 써레이다. 써레의 형태는 거의 전국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으나 지역에 따라 다소 크기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논을 삶기 위해서는 미리 논에 물을 대어야 한다. 써레질을 하기 전의 논은 봄에 논갈이를 해 놓았기 때문에 두둑이 져 있고 볏밥이 흙덩이 상태로 뭉쳐 있어 그냥 써레질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물이 땅에 충분히 스며들도록 논에 물을 많이 댄 다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써레질이 가능하다.
써레질을 하는 목적은 논갈이 때의 두둑을 무너뜨려 높고 낮은 논바닥을 편편하게 고르고, 뭉쳐져 흙덩이가 되어 있는 볏밥을 부수며, 써렛발로 논바닥을 긁어 땅을 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써레의 세 가지 기능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그래야만 모내기를 할 때 손으로 모포기를 꽂기가 쉽다.
그런데 이 써레질과 관련하여 안산 지역이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써레질을 하고 나서 번지질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근 지역인 수원의 경우만 하더라도 써레질을 한 뒤에는 반드시 번지질을 해서 바닥을 매끄럽게 하고 나서 모를 심는다.


사진 1-72 고잔벌.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기 저느 가을걷이가 끝난 고잔벌의 모습.
번지질을 하는 방법은 넓고 긴 송판을 써레발에 대여 양쪽을 줄로 고정시킨 뒤에 소에 메워 써레질하듯이 끄는 것인데, 이것을 써레번지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산 지역에서는 이러한 써레번지질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연장도 없었다고 한다. 수원과 인접한 안산시 반월에서는 써레질을 한 뒤에 써렛발 끝 부분에 새끼를 두어 겹 감아 걸어 소가 끌게 했다고 한다. 186) 이것은 번지만큼은 안 되지만 그래도 다소의 효과는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안산 지역에서는 왜 번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물론 극히 일부 지역에서 번지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지역의 토질이라든가 생산관습 등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필자로서는 어느 한 쪽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느 경험자는 그것은 토질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즉 이 지역의 논들은 써레질을 하고 나면 흙이 빨리 가라앉아 굳어지기 때문에 써레질을 하고 난 후에는 곧바로 모를 심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 말대로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써레질 이후에는 쇠스랑을 이용하여 논바닥을 고르는 작업이 뒤따랐다. 이것은 써레질 후에 논바닥 군데군데 뭉쳐 있는 흙덩이들을 깨부순다든지 높은 바닥을 긁어 고르는 작업이다. 쇠스랑은 날이 세 개인 것이 일반적인데, 땅을 파 일구거나 외양간 두엄을 쳐내는 데도 쓰였다.

2) 밭고르기
밭에 곡식을 파종하기 위해서는 이랑을 짓고 두둑을 만드는 등의 작업을 해야 한다. 쟁기로 갈아만 놓은 상태에서는 땅이 거칠고 흙덩이가 다 부서지지 않아 효과적인 파종이 어렵다. 그러므로 우선 거친 흙덩이를 부수고 나서 재배작물에 따라 일정하게 이랑을 만든다. 이때 주로 사용하는 연장은 쇠스랑이다. 쇠스랑으로 슬슬 긁으면 흙이 다 풀어진다. 밭의 경우는 쟁기로 땅을 갈 때 대개 두둑을 짓지 않고 막갈기 때문에 쇠스랑으로 긁을 때 대충 골을 만들어 나가는데, 한 번으로 완전히 되지 않으면 다시 반복해서 한다. 이때 쇠스랑과 함께 괭이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는 것은 이랑을 만드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쟁기로 밭을 갈고 나서 극젱이로 골을 탄다. 같은 안산 지역에서도 반월 지역에서는 극젱이를 사용했었다. 187) 그리고 수원시 이의동의 경우도 밭을 갈고 나서 극젱이로 골을 탄 뒤에 쇠스랑으로 긁어서 이랑을 골랐다. 그러나 현재의 안산시 신길동 지역에서 20여년 전에 농사를 지었던 구술자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서는 전혀 극젱이는 쓰지 않았고 오직 쇠스랑으로 흙을 골라 이랑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같은 지역 내에서도 작업 방법과 사용 도구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감안할 때, 어느 한 쪽만으로 그 지역 전체를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따라서 앞으로 보다 더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판단된다.

(3) 벼농사와 그 작업 과정
안산 지역의 전통적인 논농사는 벼이다. 물론 안산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벼를 거두고 난 논에 보리를 심는, 즉 벼·보리 이모작(二毛作)을 하는 경우도 많으나 이 지역에서는 오로지 벼만 경작하는 일모작을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안산 지역의 논농사는 벼농사에만 국한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이제부터 과거 이 지역에서 행했던 벼농사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가래질
가래질은 논둑을 수축하는 작업으로, 봄이 되어 언 땅이 풀리면 땅이 부풀어올라 둑이 약해지고 또 들쥐들이 논둑에 구멍을 내는 경우가 많아 비가 오면 둑이 무너져 내려앉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가래질은 기본적으로 세 사람이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최소한 3명의 일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 농가에서 장정 3명이 되는 집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웃과 품앗이를 해서 가래질을 한다. 그런데 수원시 이의동의 경우는 6~7개 농가 또는 많으면 10여 개 농가가 공동으로 가래질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안산 지역에서는 주로 3명이 품앗이를 했다고 한다. 대개 가래질 작업과 동시에 못자리 작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래질을 하던 일꾼들이 그대로 못자리 작업을 한다.

2) 못자리
못자리를 할 장소는 물을 대기가 좋은 위치에 선정한다. 그리고 못자리를 할 장소는 쟁기질을 해 사방 구획을 짓고 둑을 만들어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해 못자리를 할 논을 삶는다. 모판의 넓이는 4자 정도로 하는데, 모판과 모판 사이의 흙을 삽으로 쳐올려 모판을 골보다 조금 높게 한다. 그리고 쇠로 된 갈퀴로 모판 바닥을 고르고 모판마다 새끼줄을 친 다음에 모판에 물을 댄다. 모판의 물은 볍씨가 잠길 정도로 하며, 1~2일 지나 흙탕물이 가라앉은 뒤에 볍씨를 친다.
한편 볍씨는 못자리하기 10여 일 전부터 물에 담그는데, 주로 독에 담근다. 이때 손으로 휘저어 물 위로 뜨는 것은 체로 건져내고 며칠에 한 번씩 물을 갈아 준다. 못자리 때까지 싹이 채 안 날 것 같으면 볍씨를 치기 하루이틀 전에 독의 볍씨를 자루에 담아 방안으로 들여놓는다. 그러면 방안이 따뜻하여 싹이 빨리 난다고 한다. 이러한 못자리 방법은 196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모판에 비닐을 덮는 것은 그후의 일이었다.
모판에 볍씨를 친 후에는 뿌리 내려 싹이 물 위로 올라올 때까지 물관리를 잘 해야 하고, 또 피를 잘 가려내야 한다. 피를 모판에서 잘 가려내지 못하면 온 논에 피가 퍼지게 된다. 특히 피는 생김새가 모와 비슷하여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일꾼들은 모판에 엎드려 피를 찾아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3) 모내기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논갈이를 해 놓은 논에 미리 물을 대 가두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물이 땅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흙덩이가 잘 부서지고 논바닥을 고르기 쉽다. 모내기를 하는 당일에는 써레를 소에 메워 논을 삶는다. 써레질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흙덩이를 부숴 논바닥을 다듬고, 두둑을 해체해 논을 고르는 등의 기능을 한다. 그래야만 손으로 모포기를 꽂기 쉽다.
써레질을 해서 논을 삶은 뒤에는 바로 모를 심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판에서 모를 쪄야 한다. 모 찌는 방법은 한 손으로 몇 포기씩 뽑아서 한 줌이 되면 물에 뿌리를 착착 흔들어 붙어 있는 흙을 씻어낸다. 이처럼 모를 뽑아 흙을 씻어내 두세 움큼 되면 짚으로 돌려 묶어 모춤을 만든다. 즉 한 쪽에서 써레로 논을 삶는 동안에 다른 일꾼들은 모판에서 모를 찐다.
이처럼 한 쪽에서는 논을 삶고 다른 한 쪽에서는 모를 찌는데, 모춤을 써레질한 논으로 옮겨 논바닥 여기저기에 갖다 놓아야 한다. 그래야 모를 심을 때 모 공급이 원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를 찌는 한편으로 모춤을 운반하는데, 같은 논에서는 끌개를 만들어 모춤을 실어 날랐고, 다른 논의 경우에는 바지게로 운반하였다. 끌개는 별도의 도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마니에 새끼줄을 매어 모춤을 얹어 놓고 끄는 것이다. 논으로 운반한 모춤은 논 여기저기에 골고루 나눠 놓아야 한다.
모를 다 찌고 나면 일꾼들은 논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모심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쯤이면 시간적으로 보통 오전 새참 때가 된다. 일꾼들은 모판에 엎드려 모찌기를 하느라 허기를 느끼게 되어 논으로 들어가기 전에 새참을 먹는다. 새참은 주로 국수에 막걸리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모를 심는 방법은 못줄을 대고 눈금에 따라 심는데, 줄 맞추기는 한 쪽으로만 한다. 즉 외짝 줄모만 심는다고 한다. 줄모를 언제부터 심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 60세 정도 된 사람이 어릴 적부터 줄모를 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작은 논에서는 못줄을 댈 것도 없이 막모를 심는다.
모내기를 할 때는 일시에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만으로는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과 품앗이를 한다. 얼만 전까지만 해도 품앗이를 하지 않고 일손을 빌릴 때는 품삯을 돈으로 주지 않고 곡식을 주었다고 한다.
일손이 필요한 정도는 일꾼 한 사람이 하루에 논 한 마지기 정도를 심을 수 있는 것으로 계산한다. 여기서 한 마지기는 150평을 말한다. 따라서 논 1천5백 평 정도면 10명의 일꾼이 필요하다.
한편 땅을 쟁기로 갈지도 못하고 써레로 삶을 수도 없는 논뙈기에서는 쇠스랑으로 대충 땅을 파 일구는데, 모를 심을 때도 땅이 단단하여 손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호미로 파고 모를 심는다.
모내기를 다 하고 나서는 논둑에 콩을 심었는데, 이것을 ‘논둑콩’이라 부른다. 심는 방법은 호미로 땅을 파 콩씨를 넣고 덮는다. 지역에 따라서는 나무꼬챙이로 논둑에 구멍을 내 콩씨를 넣기도 하는데, 안산 지역에서는 주로 호미로 파서 심었다고 한다.

4) 거름주기와 물대기
① 거름주기
현재는 과학이 발달하여 다양한 화학비료가 많지만, 과거의 전통적인 재래농경사회에서는 거름을 주로 농가에서 직접 장만하여 논밭에 내다 주었다. 거름을 장만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퇴비(堆肥)에 인분(人糞)이나 가축의 분뇨를 섞어서 만드는 것이었다. 따라서 농가에서는 농우(農牛)를 길러 농사일에 이용하고 농가경제에 보태는 것 이외에도 거름을 장만하기 위해서도 많이 길렀다. 형편이 부족하면 하다못해 돼지라도 키웠다.
소외양간이나 돼지우리에는 짚이나 풀을 깔아 주는데, 가축이 배설한 분뇨가 저절로 이에 섞이고 짓밟혀져 부드러워진다. 이렇게 여러 날 반복하면 외양간이나 돼지우리에 퇴비가 쌓여 소·돼지의 잠자리가 불편해지는데, 이때 쇠스랑이나 거름대로 이를 쳐내어 마당 한쪽에 모아 둔다.
또 다른 거름으로는 부엌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灰]라든가 닭똥·개똥 등이 있는데, 이를 모아 퇴비에 섞는다. 이처럼 겨우내 모아진 퇴비는 봄에 논밭으로 내가는데, 농가에 따라서는 퇴비를 잘 썩게 하기 위해서 봄에 해동이 되면 인분(人糞)을 퍼다가 퇴비에 섞기도 한다.
거름을 나르는 방법으로는 사람이 바지게로 져 나르거나 소에 거름질마(옹구)를 메워 날랐으며, 간혹 부잣집에서는 네바퀴수레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논으로 운반한 퇴비는 논갈이를 하기 전에 쇠스랑이나 거름대로 논바닥에 고루 펴 놓았다.
이 밖에도 봄에 갈잎을 베어다 논에 펴기도 하였고, 논둑풀을 베어 넣기도 했으며, 버들가지를 작두로 여물 썰듯이 잘라서 넣기도 하였다.
② 물대기
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다. 벼는 심고부터 이삭이 여물을 때까지 벼포기가 항상 물에 잠겨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산 지역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수리시설(水利施設)인 저수지나 보(洑)가 그리 발달되지 못하여 일찍부터 물 가두기에 힘을 썼다. 즉 이른 봄부터 비가 올 때마다 물을 가두어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특히 모내기를 전후해서는 아랫논 농부가 몰래 윗논 논둑에 구멍을 뚫어 윗논의 물을 아랫논으로 빼내 가는 경우도 있어 밤새워 논물을 지키기도 하였고, 이로 인한 물싸움도 있었다.
물을 푸는 도구로는 두레박과 두레가 있었는데, 두레박은 똥바가지처럼 만든 것으로서 혼자서 퍼 올리는 것이고, 두레는 혼자서 사용하는 용두레와 둘이 마주잡고 물을 푸는 맞두레가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무자위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두레박이나 두레는 주로 웅덩이의 물을 논으로 퍼 올리는 데 사용하였는데, 웅덩이가 없는 논은 밑의 논물이 좀 많을 경우 물고 있는 곳에 용두레를 설치하고 물을 퍼 올렸다.

5) 논매기
모를 심고 나서 20여 일쯤 지나면 초벌 논매기를 하는데, 이때도 혼자서는 해내기가 어려우므로 주로 이웃들과 품앗이를 한다. 논을 매는 방법은 호미로 논바닥을 찍어 흙을 파서 엎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땅을 파 일구는 번토(飜土)와 김을 묻어 죽이는 제초(除草)를 동시에 이루는 것이다.
과거에는 모포기의 뿌리를 많이 끊어야 새로운 뿌리가 나와 모가 잘 자란다고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한 모뿌리가 많이 끊어지도록 호미질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초벌 논매기를 하고 나면 끊어진 모뿌리가 논물 위에 많이 떠 있었다고 한다.
초벌 논매기 이후 다시 10여 일 지나면 재벌 논매기를 한다. 그러나 이때는 대개 호미를 쓰지 않고 맨손으로 김만 훔친다. 물론 잡초가 매우 심할 경우에는 간혹 초벌과 같이 호미를 사용한다.
일제 이후에는 제초기가 보급되어 호미 대신으로 쓰기도 했는데, 현 안산시 신월동 지역에서는 과거에도 전혀 제초기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곳의 땅이 너무 단단해 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1960년대 이후 더러 쓰이기도 하였다.

6) 피사리와 새쫓기
① 피사리
논매기를 할 때는 논바닥의 잡초는 물론이거니와 모포기에 쌓여 있는 잡초도 뽑아내야 한다. 특히 피는 잡초 중에서도 생장력이 비교적 강할 뿐만 아니라 생김새가 모와 비슷하여 쉽게 찾아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모판에서부터 피뽑기에 신경을 쓰지만 완전히 가려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피는 모판에서부터 재벌 논매기 때까지는 모와 거의 비슷하지만, 그 뒤부터는 차츰 성장이 빨라지면서 잎과 줄기가 모포기에 비해 높고 색깔도 달라진다. 논매기를 할 때마다 피를 골라내지만 그래도 지나고 나면 또 피가 보인다. 따라서 재벌 논매기 후에도 수시로 논에 나가 피를 뽑아내는데, 이삭이 나올 때부터는 포기째 뽑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낫으로 줄기를 베어 논둑에서 말려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는다.
이처럼 피사리는 모판에서부터 추수할 때까지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한 농부는 재벌 논매기 이후 ‘어정 칠월 거들 팔월’이라는 기간에도 수시로 피를 뽑고 논두렁을 깎는 등 헛된 날을 보내지 않는다.
② 새쫓기
벼가 익어 이삭이 고개를 숙이면 머잖아 가을걷이를 해야 한다. 그런데 벼가 익어서 벨 때까지 새들이 벼이삭을 쪼아먹어 피해를 입힌다. 새를 쫓기 위해서는 흔히 허수아비를 군데군데 세워 새의 접근을 막는데, 이는 안산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허수아비는 논뿐만 아니라 수수밭이나 콩밭에도 세웠는데, 이는 전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가을 풍경이었다.
또한 소리를 내어 새를 쫓는 방법도 동원되었다. 삼줄을 새끼처럼 꼬아 끝을 가늘게 풀어지게 해서 나무 막대에 맨다. 이때 줄 길이는 3m 정도가 된다. 이 막대를 잡고 빙빙 돌리다가 반대 방향으로 힘차게 잡아채면 ‘딱’ 하는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에 새들이 깜짝 놀라 날아간다. 이것을 표준어로는 ‘태’라고 한다.

7) 가을걷이(秋收)


사진 1-73 숫돌.

낫은 곡식을 거두는 데 뿐만 아니라 농가 생활에 있어 중요한 도구이다.
① 벼베기
벼베기를 지금은 기계로 하지만 과거에는 사람이 벼포기를 잡고 낫으로 베었다. 오늘날도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산비탈이나 높은 지대에서는 역시 사람이 낫으로 벼를 베고 있다. 낫으로 벼를 베는 방법은 한 손으로 낫자루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벼포기 중간쯤을 잡는데, 낫을 그루에 대고 낫을 몸쪽으로 당기면 그루가 베어진다.
옛날에는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어 두드려 낫을 만들었는데, 일제 시대 이후 이러한 전통적인 낫은 점차 줄어들고 새로운 낫이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통적인 낫을 ‘조선낫’이라 하고, 일인들이 보급한 새로운 낫을 ‘왜낫’이라고 하였다. 조선낫과 왜낫의 차이는 조선낫은 왜낫에 비하여 무겁고 날을 양쪽으로 갈아서 쓰는데 비하여, 왜낫은 낫이 가볍고 날을 한 쪽 면만 갈아서 쓴다. 결과적으로 왜낫은 조선낫에 비해 가볍고 기능이 나아서 조선낫은 곡식과 풀 등을 베기보다는 주로 나무치기 등에 이용되었다.
낫으로 벤 벼는 바로 단으로 묶어 이삭이 위로 향하도록 세워서 며칠 간 건조시킨다. 그런데 논에서 볏단을 건조시키는 동안에 참새라든가 들쥐들이 벼이삭을 까먹어 적잖이 피해를 입힌다.

② 볏단 운반
이렇게 건조시킨 벼는 집으로 운반해 타작을 하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볏단을 들에다 노적가리를 만들어 쌓아 두었다가 가져오는 경우도 있는데, 안산 지역에서는 노적(露積)을 해두는 일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지금처럼 농기계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볏단을 거둬들이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사진 1-74 수레(우마차)
삼한 시대부터 이미 이용되어 온 우리나라 고유의 운반기구이다.
볏단을 운반하는 방법은 사람이 직접 지게에 져 나르거나 소등에 실어 날랐다. 수레(우마차)가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형편이 좋은 농가에서나 사용할 뿐 일반 농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게는 오늘날도 전국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이미 삼한(三韓)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우리 나라 고유의 운반기구이다. 소를 이용해 운반하는 방법은 먼저 소의 등에 길마를 얹고 그 위에 걸채를 얹어서 고정시킨다. 이 ‘걸채’를 안산 지역에서는 ‘발채’ 혹은 ‘질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볏단을 싣는 방법은 우선 소의 양 옆으로 새끼줄을 얽어서 내려뜨린 후에 볏단을 싣는데, 양쪽 무게가 비슷해야 걸채가 기울지 않는다. 양옆으로 볏단을 다 채우고 나면 소의 등 위로도 볏단을 올려 싣는다. 그리고 볏단이 떨어지지 않도록 새끼줄을 동여 맨다.
이처럼 소를 이용하는 것이 사람이 지게를 이용해 나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나를 수 있기 때문에 소 없는 집에서는 남의 소를 빌려서 운반하였다. 소를 빌릴 경우 소의 품은 사람의 두 배로 계산하였으므로, 소를 하루 빌릴 경우에 사람이 이틀간 일을 해주어야 했다.

③ 타작(打作)
볏단을 집으로 운반한 다음에 할 일은 벼타작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이삭을 털어서 알곡을 거두어야 온전한 수확이 된다. 현재는 농기계가 발달하여 기계가 벼를 벰과 동시에 자동으로 탈곡하고 먼지와 쭉정이를 가려 자루에 넣지만, 과거에는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 타작을 하였다. 현재 60세 이상 된 사람이 직접 보고 경험한 가장 보편적인 재래식 벼타작 방법은 다음과 같다.
과거 농가에는 거의 집집마다 절구가 있었다. 벼를 타작할 때는 절구를 마당 한가운데 뉘여 놓고 그 위에 볏단을 태질해서 이삭을 떨었다. 태질을 하고 난 볏단은 다시 마당에 이삭이 맞닿을 정도로 마주 놓고서 도리깨질을 해서 두드렸다. 이유는 태질에서 이삭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질을 할 때는 볏단을 작게 다시 묶어서 하지 않고, 논에서 운반해 온 볏단 그대로 하였다. 그러나 태질로써는 벼이삭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으며, 도리깨질을 해도 속에 든 이삭은 그대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광복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타작 방법이 우리네의 보편적인 타작 방법이었다.
또한 빗살처럼 되어 있어 벼이삭을 날 사이에 끼우고 잡아당겨 낱알을 훑는 그네라는 것이 일제 시대 이후로 더러 쓰였으나, 이것은 집집마다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많은 벼타작을 이것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사진 1-75 족답식 탈곡기.
1930년 이후 보급된 것으로, 현재 안산 문화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이후 주로 사용된 것이 족답식 탈곡기이다. 1930년에 일본에서 수입된 뒤로 한국에서 제조하여 보급하였다. 구조는 목재와 합판 또는 아연으로 만든 기틀에 회전통을 설치하고 회전통에는 강철선으로 된 급치를 박았다. 회전통 옆에는 톱니바퀴가 부착되어 있고 뒤에는 발판이 있으며, 발판과 회전통은 톱니바퀴로 연결되어 있는데, 사람이 뒤에 서서 발판을 밟으면 톱니바퀴가 작용하면서 고속으로 회전통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때 볏단을 잡고 이삭을 회전통에 대면 급치에 부딪쳐 낱알이 떨어진다.
기계의 크기는 회전통의 길이에 따라서 1인용과 2인용이 있었는데, 초기에는 1인용이 먼저 쓰이다가 점차 2인용이 많이 쓰였다. 현재 대부동 애향관에는 과거에 쓰던 1인용 족답식 탈곡기가 전시되어 있다. 타작을 할 때는 기계를 직접 작동하는 사람 외에도 볏단을 집어주고, 볏짚을 치우고, 기계 앞을 손질하는 사람 4~5명은 있어야 작업이 원활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족답식 탈곡기는 동력탈곡기가 보급될 때까지 쓰이다가 점차 사라졌다.

④ 고르기(精選)


사진 1-76 삼태기. 곡식을 나르거나, 거름ㆍ흙 등을 나르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농가의 필수 도구이다.
타작한 벼는 먼지 쭉정이·짚부스러기 등의 잡물들을 가려내는 정선작업을 하여 저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선 작업은 동력탈곡기를 사용하면서부터는 탈곡과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이 별도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고르기는 태질을 하거나 족답식 탈곡기로 타작을 하던 때의 타작마당에서 행해졌던 작업을 뜻한다. 어떤 방법으로 곡식에 섞인 잡물들을 제거했는지 경험자의 예기를 토대로 살펴본다.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고르는 작업은 크게 2단계로 행해진다. 먼저 마당질을 하고 다음에 바람에 날리는 작업을 한다. 마당질이란 타작을 다 한 뒤에 마당을 깨끗이 쓸고 나서 타작한 벼를 마당에 펴고 하는 일련의 작업을 말하는데, 우선 갈퀴로 뒤적여 짚이나 검불을 대충 걷어 낸다. 이때 사용하는 갈퀴는 쇠갈퀴보다 대갈퀴가 좋다. 그리고 비를 가지고 곡식 위로 바람을 일으키면서 휙휙 쓸어 가벼운 짚북더기·먼지·쭉정이 등을 날린다. 이렇게 마당에 펴놓고 한다고 하여 마당질이라고 하는데, 이처럼 몇 차례 반복하면 1차적으로 굵은 짚이나 검불 및 기타 가벼운 잡물들이 대충 제거된다.

그리고 나서 곡식을 긁어모아 다시 바람에 날려 남은 잡물을 제거하는데, 바람에 날려 고르는 방법으로는 키내림질을 이용한다. 키내림질을 하는 방법은 마당질한 곡식을 키에 담아 높이 들고 바람이 불 때 조금씩 흔들어 흘러내리면 가벼운 잡물은 멀리 날려가고 알곡은 바로 밑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키내림질을 할 때는 바람이 잘 불어야 하는데, 이곳 안산 지역은 바다가 가까워 바람이 많은 관계로 키내림질을 하기가 좋다고 한다. 이러한 키내림질은 혼자도 가능하지만 타작마당에서는 대개가 타작한 일꾼들이 하게 되기 때문에 한 사람은 삼태기로 벼를 담아서 키에 부어 주고, 다른 사람은 키를 높이 들어서 내린다.
곡식을 고르는 또 다른 방법은 풍선질을 해서 날리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풍선은 바람개비를 말하는 것이다. 나무로 만든 받침대에 ×자 모양의 철판으로 된 날개가 달려 있는데, 날개 뒤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고 손잡이와 날개 사이에 톱니바퀴가 설치되어 있어서 손잡이를 돌리면 톱니바퀴가 작용하여 날개가 고속으로 돌아가며 바람을 일으킨다.이때 곡식을 담아 키내림질을 하듯 높이 들고 흘러내리면 가벼운 잡물들이 날아간다. 이것도 기계를 돌리는 사람과 곡식을 내리는 사람 도합 둘이 있어야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기계가 간편하고 구입 부담이 적어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⑤ 말려서 저장하기
타작을 해서 정선한 벼는 햇볕에 잘 말려 저장해야 한다. 그대로 저장하면 건조가 덜 되어 벼가 상하기 때문이다. 벼를 말리는 방법은 멍석에 널어 햇볕이 잘 쬐도록 가끔씩 고무래로 뒤적여 준다. 이렇게 며칠간 말린 벼는 섬이나 가마니에 넣어서 묶어 둔다. 간혹 농사가 많은 집에는 수수깡이나 짚을 엮어서 마당에 밑자리를 하고 둘러쳐 벼를 넣어 둔다. 중간에 새끼를 동이고 위에는 비가 새지 않도록 짚을 덮고 이엉을 두른다.


사진 1-77 벼 말리기. 벼를 멍석에 널어 놓고 햇볕을 고루 받도록 고무래로 뒤적여 준다.

(4) 보리농사와 그 도구
보리는 가을에 가는 갈보리와 봄에 가는 봄보리가 있는데, 거의 모두가 갈보리를 했다. 보리는 밭에만 갈고 논에는 갈지 않았으며, 갈보리는 가을에 콩을 뽑아내고 나서 갈았다. 이곳 안산 지역에서는 밭작물로서 보리와 콩을 주로 하였다. 간혹 보리 대신으로 밀을 가는 수도 있었지만 이는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논은 한 해에 벼 한 번만 하는 일모작이지만, 밭은 보리와 콩 두 가지를 하는 이모작(二毛作)이었다.

1) 보리갈기─파종
먼저 밭을 갈아 일구어야 한다. 가는 방법은 논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쟁기를 소에 메워 끄는데, 논을 가는 것처럼 두둑을 짓지 않고 그냥 막갈아서 엎는다. 그리고 나서 쇠스랑으로 긁어 대충 골을 친다.
거름은 가축을 이용한 퇴비를 미리 운반하여 밭 군데군데 쌓아 둔다. 그리고 골을 다 치고 나면 삼태기로 거름을 담아서 골골이 뿌린다. 그 다음에 보리씨를 종다리끼나 둥구미 같은 간편한 그릇에 담아 들고 다니면서 한 골씩 뿌린다. 씨를 다 뿌리고 나서 쇠스랑을 가지고 두둑진 부분을 긁어서 흙이 덮이게 한다. 이렇게 허면 보리갈이가 다 된 것이다.

사진 1-78 가마니와 둥구미.

가마니와 둥구미 모두 볏짚이 재료이며, 주로 농한기를 이용해 만든다

2) 보리밟기와 분뇨 주기
가을에 보리를 갈고 나면 춥기 전에 싹이 파랗게 올라와야 한다. 절기적으로는 입동(立冬) 전에 싹이 올라와 보릿골이 파랗게 이어져야 하는데, 이렇게 올라온 보리를 춥기 전에 밟아 준다. 그 이유는 겨울은 날씨가 춥고 바람이 강해서 땅 속에 찬바람이 들어가면 흙 사이에 서리가 끼어 보리 뿌리가 얼어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릿골을 발로 밟아 흙을 다지는 것이다.
보리밭을 밟을 때는 파랗게 올라온 보리 위를 중심으로 밟아 나간다. 이때 보리싹이 발에 밟혀 부러지기도 하지만, 가을에 올라온 보리싹은 겨울을 지나면서 누렇게 시들고 봄이 되면 새싹이 올라온다.
한편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밭을 덮어야 보리가 잘 된다. 이유는 눈이 밭을 덮어야 땅이 건조해지지 않고, 동시에 눈이 찬바람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안산 지역에서는 봄이 되어 땅이 녹으면 다시 보릿골을 밟아 준다. 이것 역시 겨울 동안에 얼었던 땅이 해동이 되면서 부풀어오르는 수가 많기 때문에 땅 속 뿌리가 잘 안착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보리밟기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치 않다. 그냥 신을 싣고 밟으면 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곰방메로 흙덩이를 두드려 깨면서 밟아 나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거의 그런 경우가 없다.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즉 겨울 동안 보리밭을 가꾸는 작업으로는 분뇨를 가져다 보릿골에 주는 정도이다. 분뇨 중에서 특히 사람의 오줌을 갖다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위해 농가에서는 변소나 집 모퉁이에 오줌을 받는 통을 놓아 두고 오줌만 별도로 받는다. 그리하여 통에 오줌이 가득 차면 지게로 져다가 보릿골을 따라 물을 주듯이 부어 나간다. 이러한 보리밭 오줌주기는 겨울 중 좀 따뜻한 날씨를 택해 오줌이 모이는 대로 수시로 갖다 준다. 특히 설이 지나서는 더욱 그렇게 한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농가월령가」 정월 가사 중에도 “맥전(麥田)에 오줌치기 세전(歲前)보다 힘써 하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
한편 변소에 모인 분뇨도 갖다 주는데, 이것은 겨울 동안은 별로 하지 않고 주로 봄에 한다. 이때 변소의 분뇨는 너무 걸기 때문에 그대로 보리밭에 주지 않고 오줌이나 물을 섞어 어느 정도 희석시킨 후에 오줌장군이나 거름통에 담아 밭으로 운반해서 오줌 주듯이 보릿골에 준다. 이처럼 봄에 보리밭에 분뇨를 주고 나면 한동안 그 주위에는 분뇨 냄새가 가득하다. 그러나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는 그 냄새가 악취로 느껴지지 않는다.

3) 보리밭매기
봄이 되면 가을에 올라왔던 싹은 겨울을 지나면서 누렇게 시들고, 그 사이로 새싹이 올라온다. 따라서 새싹이 보릿골에 이어지면 밭매기를 해준다. 보리밭매기는 호미를 사용하는데, 보릿골 사이의 흙을 파 일구고 김을 죽이며 보리 뿌리에 북을 준다.
그리고 얼마간 지나 보리가 어느 정도 크게 되면 사람이 앉아서 호미로 밭을 매기에는 불편하다. 그래서 이때는 보릿골을 극젱이로 갈아서 보리에 북을 돋아 줌과 동시에 김을 묻어 죽인다. 이때 극젱이는 소에 메워서 끌기도 하고 사람이 끌기도 한다. 극젱이는 보습 위에 볏이 없어서 흙이 좌우로 넘어가기 때문에 보릿골을 타기에는 알맞은 도구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젱이가 현재의 안산시 신길동 지역에서는 쓰이지 않았으나, 안산시 반월지구에서는 사용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188)

4) 보리 베기
과거에는 보리를 전적으로 낫으로 베었다. 벼는 일정한 간격으로 포기로 심지만 보리는 골을 따라 뿌려진 것이므로, 이를 베는 것도 골을 따라 베어 나가야 편리하다. 낫은 양쪽으로 갈아서 날을 세우는 조선낫을 쓰다가 일제 시대 이후로는 한 쪽만 갈아서 날을 세우는 왜낫을 썼다.
보리는 베는 대로 바로 단을 묶어 들에 오래 두지 않고 집으로 들여온다. 운반하는 방법은 볏단 운반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지게로 나르거나, 소에 길마를 메워 그 위에 걸채(또는 발채)를 얹어서 운반한다. 물론 농사가 많은 부잣집에서는 우마차를 이용한다.

5) 보리타작
보리타작도 과거에는 전적으로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 가장 재래식 타작 방법은 벼와 마찬가지로 절구통을 뉘여 놓고 태질을 하는 것이었다. 태질하는 방법은 역시 벼와 같이 새끼로 보릿단을 감아 쥐고 이삭 부분을 절구통에 내리쳐 낱알이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태질을 하고 난 보릿단은 나중에 다시 마당에 뉘여 놓고 도리깨로 두드린다. 이유는 태질만으로는 속에 있는 보리 이삭이 다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매듭을 풀어서 도리깨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리깨로 두드리고 난 보릿짚은 단으로 묶어 쌓아 두었다가 땔감을 한다. 볏짚도 땔감으로 쓰이지만 보릿짚이 더 좋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 태질해서 탈곡한 보리와 다시 도리깨로 두드려 탈곡한 보리를 함께 마당에 펴 놓고 도리깨질을 한다. 이것은 보리가 이삭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마당질을 한다. 갈퀴로 짚검불을 걷어 내고 비로 쓸어서 날리고, 다시 갈퀴로 뒤적여 끌어 내고 비로 쓸어 날리기를 몇 차례 반복한다. 이렇게 마당질을 한 후에는 고르는 작업을 한다. 고르는 방법은 벼와 마찬가지로 키에 담아 높이 들고 바람이 불 때 천천히 흘러내려서 검불을 날리거나, 바람개비를 돌려서 풍선질을 한다.
한편 족답식 탈곡기가 있는 집에서는 간혹 보리를 이것으로 타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기계는 원래 벼탈곡 전용이지만 보리타작이 너무 힘들어서 이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족답식 탈곡기로 보리를 탈곡하면 벼와는 달리 보리가 이삭째 떨어지는 수가 많았다. 그래서 이것으로 타작을 하여도 나중에 다시 도리깨질을 했다고 한다. 그 뒤에 벼·보리 탈곡용 자동탈곡기가 등장하였고 지금은 콤바인으로 보리를 수확하지만, 안산 지역에서는 이미 보리 재배를 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5) 콩 농사와 그 도구
콩은 보리와 함께 과거 안산 지역에서는 주된 밭작물이었다. 앞의 보리농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논이 한 해에 벼 한 가지만 하는 일모작인 데 비하여 밭은 여름에 보리를 거두고 콩을 심었다가 가을에는 콩을 거두고 보리를 가는, 한 해에 두 작물을 하는 이모작(二毛作)이었다. 현재는 농사 기술이 발달하여 특수작물이 다양하게 재배되고, 비닐하우스로 계절에 관계없이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과거의 재래식 콩농사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콩심기
① 밭갈기
콩을 심기 위해서는 우선 밭을 갈아야 한다. 콩은 주로 보리를 베어 내고 심으므로 밭을 갈면 보리 그루가 묻힌다. 보리는 골에 씨를 뿌리지만 콩은 두둑에 심기 때문에 밭을 갈아 두둑을 만들어야 한다. 두둑을 만드는 데는 보통 네 번 갈아서 한 두둑을 만들며, 가는 연장은 논과 마찬가지로 쟁기를 소에 메워 끈다. 쟁기로 갈아 두둑이 만들어지면 쇠스랑으로 슬슬 긁어 두둑을 고른다. 더러는 쇠스랑 대신 쇠갈퀴(레이크)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땅이 고와야 가능하다. 이렇게 갈아서 두둑을 만든 후에 콩씨를 넣는다. 거름은 거의 주지 않는다.
② 씨넣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콩씨앗은 골에 뿌리는 것이 아니라 두둑에 심는다. 두둑을 ‘뚜랑’이라고도 부르는데, 한 두둑에 보통 여섯 구덩이를 심는다. 씨앗을 심는 방법은 두둑의 양쪽 기슭에 발뒷굽으로 밟아 구덩이를 만들어 콩씨를 넣고 발로 문질러서 묻는데, 두둑의 한 쪽 기슭에 세 줄씩 만들어 한 구덩이에 콩씨 3~4개씩을 넣는다.
콩을 다 심고 나면 두둑의 봉우리에는 대부분 수수를 심는데, 이때 수수는 미리 모종을 내 놓은 것을 이식하는 것이다. 한 포기에 3~4줄기씩 심으며, 포기의 간격은 4자 정도 되게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고랑에는 열무씨를 뿌린다. 열무는 씨를 뿌린 후 1개월쯤이면 뽑아 먹는다. 이처럼 대부분의 콩밭에는 수수와 열무를 간작하는 경우가 많다.

2) 김매기
콩밭 역시 호미로 맨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콩밭에는 수수와 열무를 간작하는데 열무는 기간이 짧아 한 달이면 뽑아 먹으나, 수수는 콩과 함께 가을에 추수한다. 특히 수수는 키가 크고 잎이 길며, 콩보다 미리 모종한 것을 이식하기 때문에 콩밭을 맬 때쯤이면 수수는 크게 자라 있다.
콩밭에도 간혹 비료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콩에는 주지 않고 수수포기에만 주므로 수수는 더욱 무성해진다. 콩밭을 매면 덥고 땀이 많이 흐르므로 가끔 수수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또 수숫잎을 잘라 머리에 수건 동이듯 두르면 시원하다.
밭을 매는 목적은 김(논밭에 나는 잡풀)을 제거하고 포기 사이의 땅을 파 일구는 데 있다. 잡초가 없는 밭이라도 반드시 매야 하는데, 이것은 가뭄을 극복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즉 땅은 단단할수록 습기를 내포하는 비중이 줄어들기 때문에 여름에 가물수록 김매기를 자주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콩밭을 매는 횟수는 일정하지 않지만 콩잎이 무성하여 사람이 들어가기 어렵기 전에 매주어야 한다.

3) 콩 거두기와 타작

사진 1-79 키. 키는 농가에서 생산하는 모든 곡식을 까불러 고르는
중요한 기구이다.

  사진 1-80 갈퀴. 검불ㆍ낙엽ㆍ곡식 등을 긁어 모으는 데 쓰는 농기구로, 주로 대나무를 가늘게 쪼개 만든다.

콩은 벼나 보리처럼 낫으로 베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뽑는다. 그래서 다른 작물에 비해 힘이 든다. 온 밭의 콩을 일일이 손으로 뽑자면 힘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콩꼬투리에 손이 찔리는 수가 많다. 대부분의 작업이 기계화된 오늘날에도 콩 거두는 작업은 아직도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콩을 손으로 뽑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콩은 손으로 뽑아 짚으로 단을 묶어서 들에 가려 둔다. 그리고 다른 바쁜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져와 타작한다. 콩타작은 콩을 마당에 펴 놓고 도리깨질을 하여 콩알을 떨궈 내는데, 콩짚은 걷어서 땔감으로 쓰고 콩깍지는 소여물을 한다.
콩도 벼나 보리처럼 타작을 하고 나면 간단히 마당질을 하는데, 갈퀴로 긁고 키로 날려서 거친 잡물을 제거한다. 콩은 벼나 보리처럼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정선작업은 대개가 여자들이 맡아서 한다.
한편 수수는 낫으로 목을 잘라 엮어서 인가 근처 나무에 걸쳐 두거나 집안 적당한 곳에 매달아 건조시킨다. 특히 수수는 대개 콩을 뽑기 전에 이삭이 여문 것을 수시로 베어다 말린다. 그래서 가을철 콩밭에는 이삭 잘린 수숫대가 이삭 있는 수수와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베어서 건조시킨 수수는 한가할 때 마당에 멍석을 펴고 함 줌씩 쥐고 막대기나 방망이로 이삭을 두드려 낱알을 턴다. 털고 난 수수이삭은 비를 만들어서 사용하고, 밭에 남은 수숫대는 나중에 베어다 엮어 울타리를 만든다. 특히 수숫대(수수깡)는 아이들의 장난감 안경, 허수아비, 바람개비 등을 만드는 재료로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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