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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당
청문당(淸聞堂) 건물 자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이 글에서는 청문당이 조선 시대 중기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학문 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자료는 동국대학교의 강경훈(姜景勳) 교수가 쓴 글 128)에서 얻었다.
목래선(睦來善)의 사천 목씨(四川睦氏), 민희(閔熙)·민암(閔?)의 여흥 민씨(驪興 閔氏)네와 더불어 기호(畿湖) 남인(南人)의 3대 가문으로 손꼽히던 진주 유씨네가 지금의 안산시 부곡동으로 낙향을 한 직접적인 동기는 1694년(숙종 20년)에 일어난 갑술옥사(甲戌獄事)에 있었다. 이때 당사자인 해암(海岩) 유경종(柳慶種;1714~1784)의 할아버지 3형제(命堅, 참판;1628~1607/命天, 예판;1633~1705/命賢, 이판;1643~1703)가 각기 외딴 섬으로 정배를 당하고 그의 조부가 적소에서 운명하는 비운을 만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15살이던 1728년(영조 4년)의 무신란(戊申亂) 때에는 중부(徠, 안동판관;1687~1728)도 억울하게 죽고 아버지(?;1691~1769)마저도 이에 연루되어 해남으로 쫓겨나는 등 하루아침에 온 집안이 정치적으로 몰락을 당하는 불행을 당했다.
그리하여 경종은 1732년 남문 밖에 있던 경저(京邸)를 아주 떠나 안산시 부곡동의 시골집으로 내려와 버렸다. 서울의 정치판에서 벗어나 오직 학문을 닦고 시문을 즐기는 생활로 생을 마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청문당이 조선 후기의 학문과 예술, 그리고 문화 발전에 기여하게 된 데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있었다.
청문당이 조선 후기 학자들의 학문적 구심점이 되었던 것은 이 집에 소장된 1만 권의 서책 때문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경성당에도 또한 같은 양의 책이 있었다. 따라서 안산의 유씨네에는 도합 2만 권의 장서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만한 양이면 궁궐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제외하고는 전국 제일의 장서였다. 다음은 영조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강준흠(姜浚欽;1768~1833)이 남긴 기록(「독서차기<讀書箚記>」)의 일부이다.

“조선에 만권당(萬券堂)이 네 군데 있다. 첫째는 월사(月沙) 고택이고, 둘째는 진천(鎭川) 해와재(海窩齋)의 만권루(萬券樓)이며, 셋째는 퇴당(退堂;柳命天)의 청문당이고, 넷째는 정재(靜齋;柳命賢) 고택인 경성당이다. 좋은 책이 산처럼 쌓여 있어서 아이들 사이에서도 ‘우리들은 유대감 댁 좀벌레가 되어 만권의 책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책이 있는 곳으로 학자들이 모여듦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거니와, 유씨 집에서 책을 빌려가는 이들 중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1712~1791)도 있었는데, 다음은 유경종에게 보낸 책을 빌려 달라는 편지의 일부(1783년)이다.

“부곡 유사문(柳斯文)께 올립니다. ……책을 빌려 주시겠다는 말씀은 전후 여러 번 후의가 진지하시니 감사의 말씀 다 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하인을 보내니 힘껏 지워 보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홍서(鴻書) 3권은 아직도 제게 있습니다. 본초(本草)와 속통고(續通考)는 이미 빌려 주시겠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이 밖에 심심풀이로 삼을 만한 소질(小帙)들도 함께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광주지(廣州志), 지리고(地理考), 명사말권(明史末卷) 역시 상고(詳考)할 일이 있어 말씀드리니 다시 보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살펴보소서, 삼가 올립니다.
계묘년 10월 21일, 늙은 벗 정복 올림

편지 내용 가운데 주목할 대목은 「삼국유사」 초간본 완질(完帙) 4책이 유씨네에 있었던 점이다(현재 초간본은 국내를 통틀어 2책뿐이다.). 따라서 청문당이나 경성당의 서책이 그 수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뛰어났음을 알게 된다.
순암이 편지 말미에 ‘늙은 벗’이라고 적었듯이, 두 사람의 우정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두 집이 이웃해 있어 몇 대째 세교(世交)를 맺었을 뿐 아니라, 왕실과 혼인한 국척(國戚)으로도 통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문하에 들도록 도운 사람 또한 경종과 그의 처남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었던 것이다.
안정복 외에도 청문당과 경성당의 책을 읽거나 이곳에 모여 학문을 토론 하고 연구한 사람 가운데 채제공(蔡濟恭)·남태재(南泰齋)·임희우(任希雨)· 목만중(睦萬中)·이기양(李基讓) 등은 정경(正卿)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또 이용휴(李用休;李家煥의 부친)·조중보(趙重普)·박도맹(朴道孟) 등은 시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강세황처럼 화평과 서평으로 일가를 이룬 남태응(南泰膺)·정지순(鄭持淳) 등도 멤버들이었다. 학자들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도 모여들어 예술 창조와 문화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어떤 인사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시회가 있는 날이면 각지의 문사들이 모이는데, 이 중 수십 명은 그의 넓은 사랑에 식객으로 눌러앉는다.”고 적었다. 많은 학자·문사·예술가들이 책은 앞의 두 집에서 읽고 숙식은 경종의 집에서 하였던 모양이다.
한편 한여름의 복 때에는 청문당에서도 개장국 잔치가 벌어졌다. 표암 강세황은 이 장면을 그림(「玄亭勝集」)으로 남겼는데, 그 한쪽에는 유경종의 글을 적어 놓았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복날은 개를 잡아 여럿이 모여서 먹는 것이 풍속이다. 정묘(1747년) 유월 초하루는 초복이었다. 이날 마침 일이 있어서 그 다음날 청문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술이 거나하여 광지(光之;강세황의 字)에게 부탁, 그림을 그리게 해서 뒷날 보고자 하였다. 방 안에 앉은 사람은 덕조(德祖;유경종), 문밖에 책을 들고 마주앉은 사람이 유수(有受;柳慶容), 가운데가 광지, 옆에 앉아 부채질을 하는 이가 공명(公明;嚴慶應), 마루 뒤쪽에서 바둑을 두는 사람은 순호(醇乎;朴道孟), 갓을 벗은 채 대국하는 이는 박성망(朴聖望), 그 옆에 앉은 사람이 강우(姜右), 발을 벗은 이는 중속(仲叔, 이름 모름)이다. 동자(童子)는 둘로, 책을 읽는 자가 경집(慶集;이름 모름), 부채질을 하는 자가 산악(山岳;이름 모름)이다. 마루 아래 시립한 사람은 가동 귀남(貴男)이다. 이때 장마가 처음으로 걷히고 새롭게 매미 소리도 들려왔다. 거문고와 노랫소리가 번갈아 이어지고 술을 마시며 시를 읊어서 피로를 씻었다. 그림을 그린 뒤 덕조는 기(記)를 짓고, 다른 이들도 모두 시를 지어 그 밑에 달았다.”
35세에 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옮겨 적은 강세황은 유경종의 처남으로, 혼인하여 처가살이를 하였으며 그가 살던 집 또한 청문당과 경성당 사이에 있었다. 그가 예술가들을 부곡동으로 불러 모으는 데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 밖에 부곡동의 모임에 대해서는 안정복의 시(別離 午橋村庄)와 채제공의 시(又次 前韻 呈柳德祖), 그리고 강세황 자신의 시(淸聞堂聯句) 등을 비롯하여 여러 편의 기(記)·서(序)·발(跋) 등이 전한다.
안산은 청문당과 경성당의 2만 권 서책과 학문과 시를 사랑했던 유경종의 대인다운 풍모가 어우러져 조선 후기의 학문과 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강경훈 교수의 설명이다.

“조선 후기 학문에 큰 물줄기로 평가받고 있는 성호실학(星湖實學)이 안산이라는 고장에서 꽃피울 수 있었고, 순암의 민족사학이 오교촌장(午橋村庄)에서 태동되었으며, 조선 예원(藝園)의 총수로 존숭받고 있는 표암 선생과 그가 길러낸 수많은 제자들, 그 중에서도 단원 김홍도와 자하 신위 같은 큰 인물과 예술이 해암을 조력자로 하여 안산에서 탄생되었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문화·예술사에 있어 중요한 대목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 글의 ‘오교촌장(午橋村庄)’은 유경종의 조부인 유명현(호 靜齋)의 시골집이 있던 자리로, 그 이름은 안산시 부곡동 정재골이라 불린 곳에 오교(午橋)가 있었던 데에서 왔다. 뒤에 유경종은 이곳에 촌장(村庄)을 세워서 안산의 문화·예술 중심지로 만들었다. 후손들은 1971년, 3천5백 평의 대지를 정부에 기증, 현재의 정재(靜齋)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우리 나라에 명문가가 많고 그 가운데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적지 않지만 청문당이나 경성당, 그리고 오교촌장처럼 학문·예술, 그리고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건물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김광언(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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