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을 문전옥답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고대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전기부터 거름을 사용하는 시비법을 농업에 적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와 말의 분뇨 등을 사용하는 시비법이 적극 활용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조선전기에는 획기적으로 재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재와 분뇨 등을 섞은 구비 즉 두엄이 등장한다. 비로소 비료라고 부를 수 있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중기이후에는 두엄의 등장으로 생산력이 증가하여 1년1작이 사라지고 2년 3모작이나 1년 2모작이 일반화 된다. 그리고 거의 전체 농지에 비료를 쓰는 등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17세기부터는 우리가 '칙간'이라고 부르는 화장실이 보편화되었다. 당시 농촌지식인 우하영은 그의 저서인 천일록에서 "다른 사람에게 한사발의 밥은 줄지언정 한 삼태기의 분(뇨)은 주지 말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제야 농사를 알 것 같다“고 하면서 비료의 중요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농사에서 비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분회 1두면 곡식 1승을 얻을 수 있으니 재를 버리면 곧 곡식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제 지방에서는 분뇨를 훔쳐가는 것을 일반 물건을 훔치는 것과 같이 도둑으로 취급하여 곤장을 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진나라 재상 상앙은 재를 버리는 자를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비록 가혹하기는 하지만 농사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분뇨의 재활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간 통행금지와 운송수단때문이었다. 그래서 개혁을 주창한 박제가는 "중국에서는 거름을 금처럼 아낀다. 우리는 분뇨와 재를 도시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몇만 섬의 곡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며 적극 활용을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우리도 중국처럼 거름 활용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면 경제력 상승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각종 농업서적에는 시비법에 대해 심도 깊게 언급되어 있어 이른바 "과학영농"이라 할 수 있었다. 18세기 농서인 산림경제에서는 처음으로 시비법을 추가 하였다. 이렇듯 얼마 전까지도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보는 생활양식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시비법등 자연친화 영농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농업기본정책은 화학비료사용을 고수하고 유기농업을 육성하는 것에는 별다를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실질적인 환경농업예산은 전체 농업예산의 0.1%도 안된다. 이것은 원자력발전문제와 같은 논리처럼 산업문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현실적 고육책일까? 아니면 혹시 실제 농업인구보다 더 많다는 농업관련업계(?)의 이해관계 때문은 아닌가? 그들에게 조상들이 가꾼 금수강산, 문전옥답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의지가 과연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 더 알고 싶을 때 볼책
박지원, 2003, 『북학의』, 박정주 옮김, 서해문집
이영학, 1997, 『한국사 33, 조선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이완주, 2002, 『흙을 알아야 농사가 산다』, 들녘
홍만선, 1997, 『산림경제』, 유증림 옮김, 솔출판사
최홍규, 1995, 『우하영의 실학사상연구』, 일지사
손영배, 1997, 『한국의 쓰레기 2천년사』, 문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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