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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농사를 둘러보고 송정리로



이제 밭농사를 살펴보자. 정길채 씨의 밭은 모두 세 군데이다. 배안골이라는 곳에 두 군데, 텃밭이 나머지 하나다. 배안골 위아래에 밭이 있었는지 하나의 이름은 위 배안골(上のペアンコル)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 배안골(下のペアンコル)이다. 먼저 위 배안골을 보자. 집에서 이곳까지 오가는 데에는 곰방대 한 대 피우는 시간이 걸리는데, 거리로는 약 1.4㎞쯤 된다고 한다. 지게에 짐을 지고 간다면 한 번 쉬었다 가는 정도이다.



곰방대. 긴 것은 높으신 양반들이, 짧은 것은 아랫사람들이 피웠다고 한다. 곰방대가 길면 길수록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분을 나타냈다.



넓이는 900평이고, 그러께부터 600원에 사들여서 자작을 하는 곳이며, 흙은 상등급에 속한다. 900평에 600원이면 그때에도 꽤 비싼 편에 속한다. 그 까닭은 땅이 정말 좋은 곳이라 그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화폐가치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는 없지만, 물가가 50년 전보다 11만 배 올랐다고 하니 대략 6600만 원 이상이다. 부동산을 잘 몰라서 땅값에 어두운데, 액수만 놓고 보면 나한테는 참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 땅에 올해는 두 종류의 농사를 짓는다. 600평에는 쌀보리에 사이짓기로 목화를 기르고, 나머지 300평에는 쌀보리에 그루갈이로 고구마를 심는다. 가을에는 밭 전체에 쌀보리를 심고 이듬해 그루갈이로 콩을 기를 생각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 농법이 나온다. 사이짓기와 그루갈이가 그것이다. 그루갈이는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했으니 여기서는 사이짓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이짓기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한 종류의 작물이 생육하고 있는 이랑 사이 또는 포기 사이에다 한정된 기간 다른 작물을 심는 것.”


쌀보리밭.



밀과 보리는 수염(까락)으로 구별하면 쉽다. 뭐라고 할까? 보리가 장비의 수염 같다면 밀은 관우와 같다고 할까?



누렇게 익고 있는 쌀보리.



그루갈이와 사이짓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 여기 있다. 그루갈이는 일 년 동안 어느 밭에서 한 작물을 심어 완전히 거둔 뒤 다른 작물을 심는 방법이고, 사이짓기는 아직 거두기 전에 다른 작물을 심어서 한 작물을 거둔 뒤에도 계속 작물을 기르는 방법이다. 자라는 시기가 다른 작물을 어느 기간 동안 같은 땅에서 기르므로 보통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을 조합하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먼저 심어 거두는 것을 앞그루, 나중에 심어 거두는 것을 뒷그루라고 부른다. 이렇게 농사를 지으면 2년에 3번까지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다카하시 노보루나 다른 일본 농학자들이 우리나라의 농법 가운데 칭찬해 마지않았던 것이 바로 2년3작식 농법이다. 일제강점기 초대 서선지장의 장을 지낸 다케다 소우시치로(武田總七郞)는 조선의 농법 가운데 세 가지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은근슬쩍 자기들의 전통 농법인 양 소개한 적이 있다. 그는 세 가지로 “서선 지방의 2년3작식 밭농사 방법”과 “마른논 곧뿌림 재배”와 “개성과 경성의 배추 씨받이”를 들었다. 이러한 내용이 그가 쓴『도작신설稻作新說』이라는 책에 나온다는데, 아직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청계천 어느 헌책방에 있다고 하는데 조만간 구해 봐야겠다.



“도작신설”이란 제목의 책. 일본인들은 얼마나 철저히 조선을 조사한 것일까?



조선의 큰 임금이었던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농사직설』에서는 사이짓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밭이 적은 사람은 보리나 밀이 패기 전에 두 이랑 사이를 얕게 갈고 콩을 심되, 보리나 밀을 거둔 뒤 다시 보리 그루를 갈아서 콩에 북을 준다(田少兩麥未穗時 淺耕兩畝間種以大豆, 收兩麥訖 又耕麥根 以覆豆根).”이를 통해 아주 옛날부터 사이짓기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은 점점 한 작물을 대량으로 홑짓기하는 경향이 있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냥 집에서 먹을 거 정도나 이렇게 할까? 사이짓기는 보통 노동력보다 땅이 적은 사람이 하던 방식이다. 잠시도 땅을 놀릴 세 없이 농사짓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땅이 남아도는 시대에 사이짓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사이짓기가 어느 정도 유효할지도 모른다. 작물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일종의 궁합이 있다. 자기 스스로 거름을 만드는 콩을 심으면 그 뒤에 심는 작물은 다른 때보다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든지, 앞그루가 자라고 있기에 뒷그루를 심을 때까지 다른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다는 점이라든지, 앞그루와 뒷그루의 특성에 따라 서로 필요한 양분이 다른 점을 이용한다든지. 이렇게 사이짓기가 가진 여러 이점을 머리만 좀 쓰면 현대에 되살려 충분히 잘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안산의 한 분은 밀을 거두기 전에 사이사이에 콩을 심어서 요즘 극성을 부리는 새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하기에 따라 무수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 900평의 밭에서 쌀보리를 5섬 거두고, 보릿짚은 40지게를 얻는다고 한다. 목화는 600평에서 270㎏을 얻었는데, 제철목화가 210㎏, 철늦은목화가 60㎏이었다. 목화대는 20지게가 나왔다. 제철목화는 서리가 내리기 전에 제때 거둔 목화를 말하고, 철늦은목화는 된서리를 맞고 죽은 목화에서 딴 채 여물지 않은 목화로서 품질이 떨어진다.



목화꽃 1.



목화꽃 2.



목화꽃 3. 이 꽃들을 보니 퍼뜩 멘델의 유전법칙이 생각나네.



다음으로 아래 배안골로 넘어가자. 아래 배안골이란 밭은 당연히 위 배안골과 같은 곳에 있는 밭이다. 이 밭은 1000평으로 5년 전에 사들인 중등급의 밭이다. 여기에는 3년 동안 고추를 20평씩 심어 왔다. 하지만 조사하는 사람도 그렇고 농사짓는 사람도 고추에 크게 관심이 있던 때가 아니라 고추 농사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없어 아쉽다. 고추 말고는 쌀보리에 목화 → 쌀보리에 콩과 수수 → 다시 쌀보리에 목화 농사를 680평 지었다. 그리고 나머지 300평에는 680평과 엇갈리게 쌀보리에 콩과 수수 → 쌀보리에 목화 → 쌀보리에 콩과 수수를 심었다. 이는 아마 이어짓기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농법인 듯하다. 그렇게 보면 고추도 한곳에서만 이어짓기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다른 곳에다 심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를 좀 보기 쉽게 표현하면,

고추 → 고추 → 고추 20평
쌀보리에 목화 → 쌀보리에 콩과 수수 → 쌀보리에 목화 680평
쌀보리에 콩과 수수 → 쌀보리에 목화 → 쌀보리에 콩과 수수 300평

이 밭의 수확량은 고추는 8말이고, 목화는 680평에서 240㎏(제철목화 180㎏, 철늦은목화 60㎏)에 목화대 40지게를 거두었다. 또 콩은 300평에서 5말에 콩대 4지게, 수수는 5말에 수숫대 3지게, 쌀보리는 6섬(최저 5섬에서 최고 7섬)에 보릿짚 60지게를 얻었다. 앞에서 본 위 배안골보다 수확량이 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확실히 땅의 차이에서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새밭이 50평 있다. 여기에는 마늘 10평, 파 5평, 시금치 15평, 상추 20평, 호박 2그루를 심고, 가을에 김장에 쓰려고 그루갈이로 배추 20평과 무 30평을 심는다고 한다.
집짐승도 키우는데 2년 된 돼지 한 마리와 닭 10마리가 있다. 이 정도면 집에서 달걀도 먹거나 내다 팔고 풍족하지는 않아도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거다.

앞서 말한 머슴은 25살 먹은 남자인데, 이 사람에게 한 해에 40원을 준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이제 신분제는 완전히 무너져서 영원히 예속된 노비나 종 같은 신분은 이미 사라지고, 계약에 따른 노동자-고용인 관계가 형성된 때이다. 머슴은 보통 계절별로 바쁜 철에만 사와서 먹이고 재우며 일을 시키든지, 일 년 단위로 계약했다. 이밖에 놉을 사서 일할 때도 있었다. 한 해에 남자는 스무 명 정도, 여자는 100명 정도 사다 쓴다고 한다. 이들을 사다 쓰는 때는 남자의 경우 6월에 보리 벨 때와 모내기철에, 여자는 7월에 밭에 김맬 때이다. 이렇게 놉을 사오면 품삯은 남녀별로 준다. 이런 관행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에게는 30전에 밥 세 끼와 담배 3전어치를 주고, 여자에게는 20전만 준다고 한다. 놉은 다른 데서 따로 사오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사서 쓴다.
이 집에는 소가 없어서 쟁기질하려면 소를 빌려 와야 한다. 그래서 소갈이 품삯을 주는데, 논은 한 마지기를 세 번 갈고서 1.2원을 내고, 밭은 한 마지기를 한 번 갈고서 70전을 낸다. 밭갈이는 보리를 심을 때만 하고, 목화와 콩을 심을 때는 쟁기질하지 않고 괭이로만 한다. 그래서 극젱이나 쟁기도 집에 없고, 쟁기질하는 사람이 그때그때 가지고 온다.

집은 터가 150평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마당이 100평이고, 건물은 50평으로 두 채가 있다.



이와 같이 조사를 마무리하고 다카하시 노보루는 짧은 여행기를 기록한다.

밤에는 광주에서 묵었다(26일 밤).
1939년 2월 27일 정오, 광주를 출발해 송정리松汀里를 떠나서 이리에 도착했다.

광주 어디에서 묵은 것일까?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충장로 어디가 아니었을까? 충장로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으로, 일본사람들도 많이 살고 상업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1935년 광주 충장로의 모습. 일본어 간판과 당시 첨단 교통수단인 자전거가 눈에 띈다.



2007년의 광주 충장로. 세월이 흘렀지만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간판의 한글과 자동차가 변했을 뿐.



나도 송정리역으로 가려고 송정동으로 향한다. 송정 29라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극락교를 지나자마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본 뒤 송정리까지 쭉 걷는다. 길을 가며 보니 어떤 아주머니께서 논두렁에 뭔가를 심고 계셨다. 혹시나 해서 가까이 다가가 넙죽 인사하고 말을 붙여 보았다.

“안녕하세요, 뭐 심으세요?”
“학생인가? 나 콩 심제.”
“그게 무슨 콩인가요?”
“이거이 메주콩이여.”

같이 앉아서 아저씨가 송정 사람인데 자기는 담양서 일루 시집와서 평생을 살고 있다는 얘기도 듣고, 아들이 서울서 법대를 나와 직장 다니고 있다는 얘기이며, 여기는 비행장 때문에 시끄러워서 크게 말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콩을 심는다고 하시기에 혹시 새 피해는 없을까 했는데, 비행기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우니 어디 새들이 와서 먹을 생각이나 할까. 진짜 하늘이 쫙 째지는 듯한 굉음을 내며 비행기들이 날아다닌다. 이런 상황에 새 피해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풀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서 아주머니께 여쭈었다.

“풀은 어떻게 하세요?”

그랬더니 잘 모르냐는 듯 약방에 가면 ‘그○○’라고 하는 좋은 풀약이 있으니, 가서 물어보면 쓰는 법도 잘 알려줄 테니 그대로 하면 된다고 하신다. 논에는 나락이 있응께 나락이나 콩에 닿지 않게 풀에다만 살살 뿌리면 두 번 세 번 매지 않아도 돼서 참 편하다고 하신다.
이번에는 이걸 어떻게 심냐고 여쭈니, 한 구녕에 2~3알썩 호미 한 자루 되게 심는데, 땅이 걸면 더 벌리고 메마르면 좀 배게 심으라고 일러 주신다. 그러면서 이 콩은 메주 쒀 먹어도 되고, 콩고물 내서 떡을 하면 맛이 기가 막힌다면서 장에 가서 사려면 한 됫박에 1만2천 원이나 줘야 한다고 하신다.



콩을 어떻게 심는지 몸으로 일러주시는 아주머니.



아주머니께서 타고 오신 자전거. 여느 농부가 그렇듯이 뒤에 삽 한 자루 달고 오셨다.



아주머니께 얻은 푸르대콩. 이 분은 이걸로 메주를 쑨다고 하신다.

안산에서 농사짓는데 조금만 얻어 가자고 하니 두 손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멈출 생각을 안 하시길래,

“이제 됐어요. 그만 주세요.”
“이것 가지고 될랑가? 씨할 놈이라 더 못주는 게 서운하네.”

그 마음에 얼마나 찡하던지. 참 거시기했다. 저 멀리서는 한 아저씨가 모를 깁고 계신다.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한참을 걷다 보니 이런 표지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온다. “음주 운전을 하지 맙시다.” “우리 종자 지킵시다.” 이런 작은 표지판에도 우리 종자를 지키자는 문구가 있다니!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에는 밀을 거두고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 여기는 또 뭐가 있을까 그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할머니는 얼마나 일을 하셨는지 허리가 다 굽으셨다. 지금은 나이도 많고 힘도 딸려서 집 앞에 있는 조그마한 텃밭만 하시는데, 거기에 밀을 심으신 것이다. 그걸 오늘 거두는데, 도리깨질할 것도 없이 자동차로 밟으면 된다고 그렇게 하고 계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니 밀 말고도 무 비스무레한 것이 있지 않은가. 할머니께 이게 무가 맞냐고 물으니 맞다고 하신다. 그 내력을 물으니 그냥 시집와서 계속 심어서 씨를 받는 거라며 뭐 그런 걸 다 묻느냐는 투다. 어렵게 입을 떼서 조금만 얻어 가자고 하니 슥슥 긁어모아 검불을 대충 날리고는 건네주신다. 확실히 종묘상에서 파는 것과는 좀 다르게 생겼다. 뜻밖에 수확에 이거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날아갈 것 같았다.



집 앞 텃밭에서 농사지으시는 할머니. 집도 예사롭지 않아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낯선 사람이라 경계하시는지 개가 사나워서 안 된다고 하셨다.



동네 사람이 밀과 무를 차로 밟아 주고 있다.



뜻밖에 횡재! 무씨도 얻었다.



이 무슨 우연인지 송정동에 장이 섰다. 오늘이 장날인가? 장터를 한 바퀴 돌까 하다가 다리도 피곤하고 저녁도 얼마 안 남아 서둘러야 했기에 그냥 입구만 조금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팥과 메밀을 발견하고 안 그래도 팥이 없었는데 잘 됐다 싶어서 작은 됫박으로 한 되씩 3000원 주고 샀다. 가방에 든든히 챙겨 넣고 돌아서니 씨고구마를 팔고 있네. 지금까지 고구마순을 사다가 심었는데 씨고구마를 파는 모습에 쭈그리고 앉아 이것저것 물었다. 밤고구마인지 호박고구마인지, 어떻게 심는지, 얼마인지. 이건 밤고구마고, 이걸 갖다가 땅에 묻어 두면 순이 올라오는 걸 똑똑 끊어다 숨구면 되고, 한 바구니 3000원이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살 거야 안 살 거야 하시는데 안 산다니 팩 돌아서 버리신다. 그 기세에 놀라며 황급히 일어나 내 갈 길을 갔다.



씨고구마



송정리역은 이 바로 옆에 있었다. 어떤 역인지 궁금했는데 고속열차가 여기를 지나 목포로 가면서 역을 싹 뜯어고쳤다. 꼭 성형 미인을 마주한 것 같은 난감함이 들었다. 이런 모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1951년 송정리역의 모습.



2007년 확 뜯어고친 송정리역.



역은 볼 것이 없어 들어가서 마른 목이나 축이고, 바로 나와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무슨 뒷골목이 있길래 들어가 걸으니 한 30~40m 여인숙들이 쭉 늘어서 있다. 별 생각 없이 걸어가다가 골목에 나와 앉은 할머니가 “놀다 갈 거야” 하시는 바람에 여기가 어딘지 알았다. 어느 역이나 역 근처에는 다 있는 그곳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그대로 눈길 돌리지 않고 쭉 걸어갔다. 그러자 이거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발견했다!
다카하시 노보루가 기차를 타고 지나면서 보았을 법한 때 지은 집이 그것이다. 벌써 몇 십 년이 흘렀는데 이런 건물이 아직도 있는 것이지? 그것도 돌이나 콘크리트로 지은 것도 아니라 나무로 지은 집이. 그것도 한 채가 아니라 꽤 여러 채의 건물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일반 가정집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집의 뒤란. 이런 집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할 뿐이다. 벽과 기둥은 그대로 두고 지붕만 수리하면서 스레트로 바꾼 것 같다.



안에서 주인이 TV를 보고 있어 더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뜰에 있는 종려나무라든지 멀리서 보이는 지붕의 모습, 약간 튀어나온 현관 들이 확실히 일본풍이다.


송정리역에 대한 좀 더 많은 자료가 있을까 해서 광산구청 문화관광과도 들어가 묻고, 광산문화원에도 가보고 송정도서관에도 가 봤지만 다들 그런 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송정도서관은 참고자료실 문이 굳게 닫혀 있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이런 도서관도 있구나 새삼 느끼며 씁쓸하게 나온다. 아무리 지방 한적한 곳이라지만 관공서들이 다들 너무하다. 그래도 늘 일이 많고 바쁘다고 하겠지. 아무래도 시스템은 영 내 체질이 아니다.

다카하시는 기차를 타고 이곳 송정리를 거쳐 이 철길을 따라 쭉 이리로, 곧 지금의 익산시로 향했다. 나도 곧 뒤를 밟아 줘야지.



송정리역에서 익산 쪽으로 난 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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