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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으로 가는 길 2007년 7월 13일 10시, 수원에서 출발하는 여수행 열차를 탔다. 함께 가기로 한 후배가 있는데, 왜인지 열차에 없다. 혹시 숨바꼭질하려고 숨었나? 열차가 출발하고도 한 10분 짐짓 모른 척하고 기다렸다. 어라, 그러나 이 자식 어떻게 된 건지 나타나지 않는다. 뭔가 이상한 낌새에 서둘러 전화를 건다. 이 바보 같은 놈 저녁 10시 차라고 착각했단다. 할 수 없이 이렇게 된 거 일단 나 혼자 출발이다. 후배는 이따 오후 차를 타고 내려오기로 했다. 열차 안에서는 예전보다 못하지만 곳곳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들린다. 아, 이렇게 듣는 것도 참 정겹고 좋다. 전라도로 가는 느낌이 팍팍 난다. 지난번 광주 가면서 KTX를 탔을 때랑은 참으로 다르다. 열차를 타면 두 가지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어르신들이 입석으로 타시면 ‘이거 일어나야 하나 마나, 연세도 있으신대 좀 좌석으로 끊으시지’ 하는 생각이 하나. 그렇지만 그런 분들이 없으면 서운한 마음이 드는 또 하나. 참 간사하다. 그래도 요즘은 그런 분들이 거의 없으시다. 세월이 지난 탓이겠지. 옛날 기차는 화장실에도 사람이 꽉 차서 열차가 설 때마다 내려서 볼 일을 봤다고 하던데 말이다. 아직 무궁화호에는 그런 맛이 남았다. 뭐니 뭐니 해도 무궁화를 타야 기차 타는 맛이 난다. KTX, 새마을은 빠르긴 하지만 별 맛이 없다. 맥주를 시켜 놓고 집에서 싸온 쥐포를 뜯는다. 같이 먹으려고 가지고 왔는데 영 별로네. 그러고는 그냥 잠이 들었다. 자다 깨다 하기를 몇 시간 드디어 순천역에 도착했다. 7년 전 처음 왔을 때랑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2년 전 선배를 만나러 왔을 때와도 똑같다. 그런 면에서 전라도는 잘 바뀌지 않는 면이 있다. 여기 사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정겨운지도 모르겠다. 그림 1 1960년대 순천역.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반공,”“통일”이라는 구호를 걸었다. 그림 2 2007년 순천역. 위 사진과 비교하면 건물은 그대로라는 걸 알 수 있다. 창문의 모양을 보라. 순천역은 60년대 사진에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역 앞의 길이 찻길로 바뀐 정도일 뿐이다. 버스가 서 있는 곳은 택시 정거장이 들어서 있다. 옛날 사진의 구도를 보고 갔으면 그와 똑같은 구도로 찍었을 텐데 아쉽다. 언제 순천에 갈 일이 있는 분은 꼭 가셔서 확인해 보시라. 본론으로 들어가자. 다카하시 노보루는 이곳 전남 순천군에 1939년 2월 26일에 왔다고 기록을 남겼다. 그때가 언제인지 달력을 뒤지니 음력 1월 8일이다. 설도 지났고, 남쪽이니 슬슬 거름을 내거나 농사를 시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전라남도 순천군에 와 순천읍 풍덕리豊德里를 방문한다. 순천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찾으니 풍덕리는 순천시 풍덕동으로 바뀐 것을 확인했다. 나의 첫 번째 답사지는 풍덕동으로 결정했다. 잠시 그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그에 따르면 당시 이 마을에는 모두 61호가 살았다고 한다. 그럼 지금은 얼마나 살까? 통계자료를 보니 2005년 풍덕동에는 3561세대 1,0846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무려 3500호가 늘었다. 한 집에 사는 식구도 줄었지만 사람도 팍팍 늘어서 그럴 것이다. 당시에는 61호 가운데 농사짓는 집이 47호였다. 그 가운데 자작이 10호, 자소작이 10호, 나머지는 27호는 소작농이다. 그리고 남는 13호는 날품을 팔아 사는 사람들과 담배 말리는 곳 1호이다. 또 친절하게도 마을에 우물이 네 군데 있다고 적어 놓았다. 자작농과 자소작농이 20호 정도였으니 마을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심한 곳은 마을 사람 모두가 소작농인 곳도 있었으니 말이다. 순천은 들이 넓어서 그런지 옛날부터 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1927년에 있었던 조선총독부의 조사를 보면 순천에서 100정보 이상, 그러니까 30만 평의 농사땅을 가진 사람이 조선사람과 일본사람 모두 합쳐 46명이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땅이지만, 아무튼 조선 지주들도 꽤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농사가 잘되는 좋은 땅은 이미 조선 지주들 것이어서 새로운 일본 지주들이 들어오기 힘들었다. 나중에 또 얘기가 나오겠지만, 일본 지주들은 수리시설 따위가 좋지 않은 농사짓기 힘든 곳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수리조합을 만들고, 개막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답사에서 찾으려는 벌교에 있는 중도 방죽, 곧 나카시마 방죽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림 3 1930년대 순천의 풍경. 너른 들을 볼 수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의 농사 규모도 조사한 점이 흥미롭다. 이 마을에서 보통 대농은 논 37~40마지기(2.7町, 8100평)에 밭 5마지기(1反7畝, 510평), 소농은 논 2~3마지기에 밭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또 아예 밭농사를 짓지 않는 집도 10~15호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논농사만 짓고 밭은 푸성귀나 뜯어 먹을 정도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 마을에 소는 11마리 있고, 모내기철 이 마을에 일하러 오는 다른 마을 사람이 5명인데 한 번 오면 20일쯤 일했다고 한다. 그걸 따지면 100명이 일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방문한 풍덕리의 집은 순천읍에서 약 1.09㎞(10町), 순천역까지 1.09㎞(10町)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사는 걸 감사히 여겨야겠다. 인터넷으로 지도를 볼 수 있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순천역에서 반경 1㎞인 풍덕동을 찾았다. 미리 머릿속에 확실한 정보를 넣고 와서 그리 헤매지 않고 잘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림 4 빨간 원이 순천역에서 1km 안에 있는 지역. 이번에 답사한 곳이다. 그림 5 동천을 끼고 자리 잡은 순천 시가지의 모습. 지도의 강이 바로 동천이다. 그가 그렇게 찾은 곳은 바로 풍덕리에 살던 황귀연黃貴連 씨라는 분의 집이다. 그 분은 식구가 모두 12명이었다고 한다. 아버지(61), 어머니(56), 자기(32), 아내(32), 맏아들(9), 둘째 아들(4), 맏딸(1), 동생(25, 일본에 있음), 제수씨(22), 둘째 동생(19, 역무원), 둘째 제수씨(19), 셋째 동생(16)이 그들이다. 아들이 9살인 것으로 봐서 그때는 다들 그랬겠지만 요즘과 달리 결혼을 무척 일찍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 동생들이 딸려 있는 걸 보면 전형적인 우리네 옛 식구의 모습이다. 그래도 동생이 역무원이었으니 그렇게 힘든 삶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림 6 풍덕동에 있던 오래된 집. 황귀연 씨네도 이랬을까? 이 사람이 짓던 농사는 모두 5140평에, 밭 320평이었다.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자. 먼저 집 앞 논(チバムノン)이다. 이 논은 집터 옆에 있는 800평짜리 논이다. 흔히 말하는 문전옥답이다. 두 배미로 나뉘어 있고, 소작료는 60%에 볏짚은 소작인이 가졌다고 한다. 이때는 볏짚도 소에 밟혀 거름으로 쓰던지 가마니를 치던지 하는 중요한 자원이어서 누가 볏짚을 갖느냐가 관심거리였다. 수확량은 1936년에 은방주를 심어 나락 10섬을 거두고, 1937년에는 나락 6섬을 거뒀다. 모내기는 18×21㎝(6×7寸)로 해서 1평에 모두 86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또 이 논에는 남부 지방답게 뒷갈이로 쌀보리를 1말7되5홉을 심어 2섬을 거뒀다. 왕골도 자투리에 1평을 길러 고삐 28.8m(12尋)를 꼬고, 자운영 5홉을 5평에 심었다. 자운영의 씨앗 값은 1섬에 85원이었다고 한다. 1섬은 1000홉이니 5홉이면 2원쯤이다. 이는 사람을 하루 데려다 쓰는 돈보다 더 비싸다. 농사에 자운영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다. 그들이 운영한 권업모범장에서 정책적으로 자운영을 심으라고 권고했으니 비싸도 울며 겨자 먹기로 심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아무튼 쌀보리에 밑거름으로는 두엄 40지게와 과인산석회 1가마니를 쓰고, 웃거름은 사람 똥오줌 60장군을 준다고 한다. 다음은 강실랑(カンシンリャン)이라는 논이다. 강실랑이 아마 사투리 같은데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논은 집에서 654m(6町)떨어진 6마지기(1마지기 200평)의 논으로서 한 배미라고 한다. 1200평이 한 배미였으니 꽤 넓었을 것이다. 이를 봐도 순천은 예로부터 들이 넓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논도 물론 소작이었다. 이 땅은 축축해서 뒷갈이는 하지 못하고 벼만 심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모를 21×24㎝(7×8寸) 간격으로 심어 1평에 64그루를 심는다. 또 축축한 땅이고 넓은 만큼 가뭄을 덜 타기 때문인지 여기에 못자리 150평을 만든다. 볍씨 3.5말을 뿌리는데, 변경弁慶이라는 품종 2말과 은방주 1말5되를 뿌린다고 한다. 변경이라는 품종은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또 언제 전라도 어르신에게 확인해야 하는데, 이 부분의 기록에 “한모리닥(ハンモリタク)”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모리닥”이란 말은 지게 다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한머리닥이라고 하면 지게에 짐을 한가득 지고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이건 앞으로 검증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림 7 지게와 그 부분의 이름 오종(オ―チョン)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논들이 쭉 나온다. 먼저 오종평(オ―チョンピョン)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집에서 654m(6町) 떨어진 500평의 논이다. 한 배미인데 4년 전에 430원 주고 산 자작 논이다. 벼를 심은 뒤 뒷갈이로 보리 400평과 자운영 100평을 심는다. 그 다음 중오종(チュンオ―チョン)이라는 곳은 집에서 1308m(12町) 떨어진 440평의 논이다. 이곳도 자작이고 한 배미라고 한다. 은방주를 21×24㎝(7×8寸) 간격으로 1평에 64그루를 심고, 뒷갈이로는 쌀보리를 심는다. 마지막으로 하오종(ハオチョン)은 1962m(18町) 떨어진 400평의 논인데, 이곳도 자작이고 한 배미이다. 마찬가지로 은방주를 21×24㎝(7×8寸) 간격으로 심고, 뒷갈이는 쌀보리를 심는다. 여기서 나오는 오종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오종, 중오종, 하오종이라는 것으로 봐서는 집을 기준으로 순서대로 부른 것이 아닐까? 다음은 산배니(サンペニイ)와 샛들(セッツル)이라는 논이 있다. 이곳들은 똑같이 집에서 1962m(18町) 떨어진 곳인데, 각각 1200평과 600평 되는 논이다. 산배니는 1200평 1배미인 넓은 논으로 벼를 심은 뒤 뒷갈이로 보리 500평을 심고 못자리 300평(볍씨 5되 뿌림)을 만드는 곳이고, 샛들은 600평인데 축축해서 벼만 심는데 수리시설인 둠벙이 있는 물잡이논이다. 둘 다 소작하는 곳이다. 이제 밭인데, 밭은 모두 두 군데이다. 먼저 남지종 앞밭(ナムヂヂョンアッパ)이라고 집에서 1308m(12町) 떨어진 3마지기 280평하는 밭이다. 이곳은 소작을 하는데, 정조定租로 나락 1섬을 낸다. 정조는 소작을 계약할 때 미리 수량을 정하고, 수확한 다음 지주가 정한 날까지 소작료를 내는 소작 관행이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보통 40~60%를 냈는데, 세금은 지주와 나눠서 내거나 함께 부담했다. 거의 반을 지주에게 바치고 거기에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다면 농사지을 맛 안 났을 것이다. 그저 배운 게 도둑질이고 죽지 못해 사는 형편이지 않았을까? 요즘 이렇게 내라고 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이 밭에는 쌀보리에 그루갈이로 콩을 140평, 쌀보리에 사이짓기로 목화 140평을 지은 뒤에 가을에는 김장거리로 무와 배추를 심는다고 한다. 그걸 거두면 다시 쌀보리를 심고, 140평씩 한 번은 이쪽에 콩, 다음번에는 저쪽에 콩을 심는 식으로 돌아가며 콩과 목화를 심었다. 콩과 목화를 거두고 난 뒤에는 다시 김장거리를 심는 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땅을 한시도 가만히 놀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밭은 텃밭이다. 집터 앞에 약 40평 되는 남새밭으로서, 소작료로 나락 2말5되를 냈다고 한다. 다카하시가 찾은 날이 26일인데, “20일 무 10평 가을배추 3평”이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봄동으로 먹거나 씨를 받으려고 지난해 놔둔 것일까? 그렇다면 배추 3평은 이해가 가지만 무 10평은 이해할 수 없다. 아무튼 봄배추로 28평, 무 2평을 심고, 가을에는 무만 30평 심는다고 한다. 거기에 나머지는 상추와 시금치 같은 잎채소를 7평 심는다. 그림 8 풍덕동에서 본 텃밭. 푸성귀를 심으려는 텃밭은 아니고, 이제는 농사짓는 텃밭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둘레에 도라지와 참깨, 들깨, 옥수수를 심고, 수수 한 두둑에 콩 세 두둑을 심는 식으로 기른다. 참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이 집에는 농사 말고도 산이 3210평(1町7畝) 있다고 한다. 산까지 있을 정도니 살 만한 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글에서도 말했지만 이 사람이 조사한 농가는 좀 살 만한 집이 주요 취재 대상이었다. 이 산은 집에서 4㎞(1里) 남짓 거리라고 한다. 그곳에는 1.5m(5尺)쯤 되는 작은 소나무들이 있고, 대나무 숲은 없다고 한다. 남쪽인 만큼 대나무가 잘 자라서 대나무를 물어봤을 것이다. 또 소 한 마리가 있고, 개나 닭, 돼지는 없다고 한다. 부업으로는 집에서 쓰려고 한 해에 무명 5필을 짠다. 앞에서 목화 농사를 짓는다고 했으니 거기서 수확한 목화솜으로 짰을 것이다. 무명 한 필은 6m(20尺)라고 한다. 이 집에서는 계절머슴은 쓰지 않고, 머슴을 한 명 들였다고 한다. 머슴은 다들 아는 것처럼 주인집에 살면서 새경私耕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업 임금 노동자이다. 다른 말로는 고공雇工, 고용雇傭, 용인傭人 들로도 불렸다. 머슴은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부터 많아졌다. 그를 통해 노비들도 머슴으로 많이 바뀌고, 호칭도 머슴으로 굳었다. 머슴은 고용되는 기간에 따라 일 년 단위로 고용되던 머슴이 있고, 몇 달 또는 바쁜 계절 단위로 고용되던 달머슴(月傭)과 반머슴(季節傭)이 있었다. 고지雇只 머슴이라는 특수한 형태도 있었는데, 땅이나 집 또는 식량을 빌리고 고용주를 위하여 일정 날짜 동안 일하거나 정해진 작업량을 해주었다. 또 노동력과 농사 경험에 따라 상머슴과 중머슴, 꼴담살이, 애기머슴 따위가 있었다. 머슴은 농사일 말고도 가사 노동에도 썼다. 하루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잡으면 머슴은 한 해 평균 225일을 일하고, 고용주와 그 가족은 139일을 일했다고 한다. 농번기에는 아침부터 잠자기 전까지 일했기에 ‘머슴밥’이라는 엄청난 양의 밥을 하루에 대여섯 번 먹었다. 농한기에는 한가한 편이지만, 거름과 땔나무를 하고 가마니를 치고 새끼를 꼬아야 했다. 머슴의 새경은 보통 현물로 줬는데 대개 벼 1섬에서 1섬 반이었고, 1930년대 초반에는 돈으로 30~40원부터 160원까지 받았다고 한다. 농번기에만 고용되면 약 3개월에 60~70원을 받고 옷과 밥은 자기가 해결하기도 했다. 이러한 머슴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땅을 뺏기고 인구가 늘면서 더 많아졌다. 1930년의 통계로 보면 고용주 44,2908명에게 머슴 53,7432명이 고용되었다고 한다. 머슴은 1940년쯤까지 계속 늘어나다가 그 이후 징병과 지원병으로 노동력이 차출되고, 공장이 들어서고 만주로 이주함에 따라 특히 서북 지방에서는 머슴을 고용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졌다. 그밖에 한 해 놉을 150명 쓴다. 놉을 쓰는 기간은 모내기철에 50~60일, 김매기철에 50일, 벼베기철에 3일이다. 놉은 밥과 술을 먹이고 날삯을 주어 일을 시키는 일꾼을 말한다. 식구들이나 품앗이로도 일을 다 할 수 없을 때 품을 산다. 품을 파는 사람들은 주로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자기 농사땅이 적은 영세농이나 소농들이다. ‘날품팔이’는 계약을 맺은 완전한 임금노동자를 말하는데, 놉은 보수를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얼굴 보고 사는 가까운 집단 안의 사람들이 서로 협동한다는 생각으로 주고받는 노동력이다. 그래서 놉을 산 집에서는 보수 말고도 술, 담배, 참 따위를 공짜로 주고, 보수도 꼭 돈 말고 필요한 현물로 주기도 하며, 지급하는 시기도 일정하지 않다. 특히 보수를 마음대로 정한 뒤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정한 범위 안에서 고용자가 주는 대로 받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놉은 품앗이 같은 협동 노동 형태가 머슴 같은 임금노동의 형태로 바뀌는 중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놉에게 주는 품삯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모내기 때의 품삯은 남자는 20명을 쓰는데, 그들에게 세 끼+막걸리 20전+담배 5전을 준다. 밥은 모두 다섯 주발로서 쌀로 치면 1되5홉의 양이다. 당시 흰쌀은 1되에 32전이었다고 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다섯 주발 가운데 두 주발 분량의 쌀은 놉이 집에 가지고 간다는 점이다. 그렇게 따지면 남자의 품삯은 하루 93전 정도라고 한다. 여자는 30명을 쓰는데, 세 끼(5주발)를 주고 품삯은 78전 정도다. 김매기철에는 남자 20명에게 한 끼+담배 5전+술은 양껏 주고, 여자는 김매기에 데려오지 않는다. 이 모습만 보면 이건 지금과 같은 형태의 놉이라기보다는 두레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논 김매기는 힘이 많이 들기도 하고 이러저러 이유로 여자는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따로 돈은 주지 않고, 밥 한 끼에 담배와 술을 마음껏 먹도록 하는 모습이 두레패일 것 같다. 그렇게 일하고 나면 다른 집에 가서 똑같이 대접받고 일하고 왔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벼베기 때의 품삯은 남녀 모두 모내기철과 같다고 한다. 그림 9 1935년 8월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면 언암리의 두레패 모습. 지금까지 순천 사시던 황귀연 씨의 농사 규모를 대충 살펴보았다. 다음에는 그분이 짓던 논농사를 자세히 알아보고, 내가 다닌 순천의 이야기를 조목조목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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