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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8일. 아침 7시 30분에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밥을 먹다가 걸려온 전화에 화들짝 놀라 얼른 나갔다. 7시에는 만나야 시간 안에 갈 수 있던 걸 착각하고 있었다.

8시 넘어 괴산으로 출발. 먼저 지난번에 찾은 청참외를 확안하고자 상리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 이름과 유래가 적힌 비석을 촬영.

 

 

 

 

윗시몇의 시몇은 수미터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라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동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수밑, 숨밑과 비슷한 발음을 하시던데 혹시 숲밑은 아닐지?

 

 

 

 

마을 유래비에서 바라본 윗시몇 마을 전경. 마을 유래비 내용을 보면 어느 도인이 좋은 수맥을 찾아주어 마음 편히 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 유래비처럼 이 마을은 물이 좋다.

 

 

지난번 찾은 참외로 연출한 사진. 꽃과 잎과 줄기와 열매까지 모두 한자리에 나온다.

 

 

우리에게 줄 참외를 찾고 계신 이종윤 어르신. 

 

 

지난번에 본 대한이란 벼의 교잡종. 빨간 까락이 보인다. 연풍 지역의 논에서는 이러한 교잡종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너무 많아서 지저분해 보일 정도다. 볍씨 갱신할 때가 다 되어서 그런가?

 

 

산에서 끊임없이 찬물이 흘러 내려온다.  

 

 

'대한'이란 벼를 심은 논. 찬물이 흘러 들어오기에 뒷도구(물을 돌려서 수온을 올린 다음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도랑)를 쳤다.

 

 

논 바로 옆에 있는 우물. '우물 안에 내가 있소. 하늘이 들어 있소.'

 

 

다음으로 드디어 연풍면으로 넘어갔다. 처음 찾은 곳은 갈길 마을. 하지만 별 다른 것은 찾지 못하고 다음 금대 마을로 넘어갔다.

 

 

 

 

갈길 마을과 금대 마을. 이 두 마을을 합하여 갈금리라고 한다. 칡 갈 자에 가야금 금 자. 그걸 그대로 풀어 칡덩굴이 가야금의 현과 같다고 하는 해석도 있다. 헌데 우리나라에 '갈'이란 지명이 여기저기 있는 걸 보아서는, '갈'이란 고어의 뜻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금대 마을의 모습. 다리 난간은 참깨 말리는 곳으로 전환되었다.  

 

 

금대 마을 입구에 자리한 수수밭. 온갖 종류가 뒤섞여 있는 좋은 학습장이라고 한다. 키가 큰 놈, 작은 놈부터 이삭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키 작은 수수와 키 큰 수수의 차이. 

 

 

금대 마을에 들어가 정자에서 쉬고 계시던 분들께 정보를 얻어 18대째 살고 있다는 집을 찾았다. 

 

 

고추 말리기가 한창이다.

 

 

이 집에 사시는 할머니께서는 지난해까지 옛날 자주감자를 심다가 매상도 안 해주고 힘도 들어 그만 없애셨단다. 지난해에만 왔어도 괴산 토종 자주감자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대신 완두와 엇그루팥을 얻었다. 엇그루팥은 그루팥의 일종인데, 알이 좀 더 굵은 느낌이다. 이것 말고 잔그루팥이라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진짜 오래된 것인데 그것도 사라졌다고. 잔그루팥은 말 그대로 자잘하다는 뜻이겠지.

 

 

동네에서 얻어다 심는다는 완두콩.

 

 

엇그루팥.

 

 

엇그루팥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려고 밭을 찾아 나섰다.  

 

 

밭으로 가다가 죽어 있는 새끼 뱀을 보았다. 개미의 먹이가 되고 있는 중. 자연은 감정이 없다. 그저 돌고 도는 순환의 고리일 뿐.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나무에 날아와 쉬고 있다. 

 

 

엇그루팥을 찾다가 이상한 동부를 발견했다. 이 동부의 주인을 찾으려 동네를 뒤진 결과 다시 그 18대째 살고 있다는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토종의 법칙을 확인할 수 있다. 있는 집에는 이것저것 많이 있다. 

 

 

강가 귀퉁이 땅에는 부추도 계속 심어 오고 있다. 이 부추도 상시 심는 것. 거름을 많이 하면 넓적해진다고 한다.

 

 

 

 

금대 마을을 나와 적석리 쪽으로 달렸다.

 

 

후동을 찾아가려고 잠시 차를 세워 더위를 피하고 계신 어르신 두 분께 길을 물었다. 이 소나무는 200년 가량되었다. 

 

 

 

 

원래는 길 쪽으로도 가지가 뻗었으나, 썩어 부러져 가지를 쳤다고. 이 나무를 살리려 주사도 많이 줬단다.

 

 

후동과 양지 마을에서는 별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사과 과수원만 가득. 연풍이 사과로 유명한 곳임을 실감했다.

다음은 양지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음지 마을로 향했다. 음지 마을은 마을 위로 34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지나다니는 차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면 모두들 떠났을 것이다.

이 마을의 위쪽에는 사방댐이 있는데, 군에서 등산로를 개발하면서 외지 사람들이 와서 마을의 식수가 되는 그곳에서 목욕까지 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고 불만이 대단했다. 모르는 곳에 가서 함부로 서리하지 말지어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지어다. 그곳도 모두 사람이 살고 있는 곳, 그곳만의 법이 있다.

 

 

음지 마을에서 멋진 댑싸리 하나를 발견. 

 

 

간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내린 큰비로 개울물이 무섭게 불었다. 

 

 

길이 뚫리며 생긴 변화의 하나. 외지인이 산에 들어와 함부로 산나물과 약초를 훔쳐간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오래된 나무 전신주 하나가...

 

 

음지 마을에서 나와 종산 마을로 향했다. 34번 도로를 타고 적석터널을 지나 종산 마을로.

 

 

종산 마을의 어느 집. 장독대며 집 안이 정갈하다. 담장 위에서 자라는 호박이 정겨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할머니 혼자 사시며 집을 깔끔히 유지하고 계셨다.

 

 

할머니 댁의 마늘. 연풍 지역의 마늘은 유난히 알이 잘다. 추운 겨울과 관련이 있을까? 

 

 

할머니 댁에서 키 작은 자주빛 강낭콩을 발견했다. 색이 참 곱다.

 

 

종산 마을에서 발견한 대파. 내력과 유래를 찾고자 했으나 집에 주인이 없었다. 들에 일하러 가신 듯... 마당에서 주운 1만 원은 다음에 오면 깜짝선물로 찾아주겠다며 안완식 박사님이 처마 쪽에 몰래 숨겨 놓으셨다.

 

 

가지를 많이 치는 종산 마을의 대파. 

 

 

개량종 대파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슈퍼에 가서 사는 대파와 비교해 보시길... 

 

 

종산 마을에서 본 4륜 구동 트럭 세렉스. 대학 시절 강원도로 농활을 가면 흔하게 보던 트럭이다. 이곳도 산간 지대라 이런 트럭이 필요하다.

 

 

종산 마을까지 보고 연풍면 쪽으로 향하다가 2시가 넘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주인 아저씨의 취미 생활로 맛뿐이 아닌 재미를 더하고 있는 연풍가든. 우리집 개의 이름이 연풍이인데, 이곳은 어디를 가든 연풍이다. 심지어 연풍 성지까지 있다.

 

 

점심을 먹고 유하리로 향했다. 버드나무와 관련된 한자말이다. 아마 이 골짜기를 흐르는 내의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았나 보다. 1914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명을 자신들이 알아볼 수 있는 한자로 전면 제정한다. 그 이후 우리의 지명은 한자에 오염이 되어 버렸다. 오전에 갔던 후동後洞만 해도 그렇다.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는 뜻으로 부르던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후동이라 했을 것이다.

유하리 오수물에서는 별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 위쪽에 자리한 내응 마을에서는 무언가 나왔다.

 

 

내응 마을에서 찾아간 집. 앞마당에서 유월두를 말리고 있었다. 마침 할머니가 그늘에 앉아 계시길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할머니 댁 안의 예전 외양간 같아 보이는 곳에는 할머니가 달아 놓은 씨앗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솜씨 좋은 실력으로 지은 듯한 이 외양간은 이제 사용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께서는 치매가 와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신다고...

 

 

 

할머니 댁에서 얻은 흰동부. 첫날 괴산 장에서 샀던 그 동부와 비슷하다. 여기도 있구만 장터 할머니도 참...

 

 

검은깨. 알이 참 굵다.

 

 

밭에서 자라고 있는 흰동부를 찾고 싶어 길을 나섰다. 흰동부는 늦게 심을수록 좋다고 한다. 6~7월이 적당한 때. 일찍 심으면 덩굴이 너무 많이 져서 좋지 않다고. 앞으로 동부는 조금 늦게 심자. 덩굴이 뻗는 것일수록 그게 좋겠다.

 

 

내응 마을의 댑싸리. 쪼로록 함께 자라니 참 예쁘다.  

 

 

내응 마을 새마을 창고.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어디선가 이런 노래가 흘러나올 듯한 분위기. 이곳이 바로 유럽 식으로 말하자면 마을 광장이다. 마을회관도 보건소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네 할머니들도 이곳에 모여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흰동부를 심으신 분과 검은깨를 심으신 분을 찾았다.

 

 

할머니를 모시고 밭을 찾아왔다. 바로 눈앞으로는 중부내륙고소도로가 뻗어 있다. 인간의 위대한 역사다! 

 

 

안완식 박사님은 꽃이 핀 모습을 찾고자 분주하시고, 할머니는 동부의 순을 질러주느라 바쁘시다. 농사일이 다 그런가 보다. 할머니는 연신 눈에 보이는 풀을 잡고, 순을 지르고... 일이 눈에 보이자 손이 잠시도 쉬지 않으신다. 

 

 

흰동부가 자라고 있는 모습. 아쉽게도 분홍빛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논두렁에 심은 흰동부. 덩굴이 그리 심하게 뻗지 않으니 이렇게 키울 수 있는 거겠지.

 

 

할머니를 다시 광장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른 할머니와 함께 검은깨를 찾아나섰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검은깨. 앞으로 며칠 뒤면 베어 말려야 하겠다. 검은깨는 키가 2m 가까이 자란다. 가지도 좀 치는 편이고. 

 

 

검은깨의 꽃. 검은깨라고 꽃까지 검지는 않았다. 자주감자는 자주꽃, 흰감자는 흰꽃이란 노랫말과는 다르다. 

 

 

내응 마을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이런 광경이 나왔다. 

 

옥수수와 참깨를 말리고 있었는데, 참깨 중 하나가 갈색이 나길래 얼른 들어가 보았다. 헍데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찾으러 가려고 차를 돌리는 사이에 도랑에 앞바퀴 하나가 빠졌다. 이런, 다행히 차가 망가지거나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어걸 어쩐다... 할 수 없이 힘을 합쳐 차를 들어올리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영차! 다행이다. 작은 차라서 그런가 쉽게 들 수 있었다. 

 

 

할머니 댁 마당에는 도꼬마리가 하나 자라고 있다. 보통 도꼬마리는 키가 작은데 이건 키가 엄청 크다. 이것도 토종의 하나라고. 며느리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 머리에 피부병이 생겨 고생했는데, 창포처럼 이 잎을 뜯어 삶은 다음 감았더니 싹 나았다고. 머리에 비듬이나 진물이 나는 등 문제가 생기신 분은 도꼬마리잎을 삶아 그 물로 머리를 감아 보시라. 우리네 민간요법이 효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차조기는 파뿌리와 대추 등을 함께 넣고 푹 고아 마시면 감기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할머니 집의 대문 앞에는 백일홍이 자라고 있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것도 개량종이 아닌 독특한 것이라고 하신다. 할머니도 이게 참 예뻐서 동네는 물론 멀리 시집을 간 딸에게도 씨를 줬다고 하신다.

 

 

 

 

내응 마을을 나와 송오와 방화 마을을 뒤졌다. 날씨가 저기압이라 그런지 무척 힘이 든다. 방화 마을을 뒤지고는 잠시 숨도 돌릴 겸 자리에 앉아 쉬었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차에 올라 쇠잿말로 향했다.

 

 

쇠잿말 길가의 어느 집에서 자라고 있는 황기. 진딧물에 개미들이 찾아와 단물을 빨고 있다. 

 

 

꽃마다 흔하게 찾아오는 곤충이 따로 있다고 한다. 황기에는 뒤엉벌이 그런 관계인가 보다. 

 

 

황기를 심으신 분을 찾다가 한 동네 할머니를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꺼내서 보여주신다. 

 

 

괴산의 특징은 집에 이런 상자텃밭을 많이 키운다는 점이다. 밭의 활용도도 무척 높다. 도무지 놀리는 땅이 없을 만큼 촘촘하게 자투리 땅도 활용한다. 이 지역의 농사법을 조사하는 것도 무척 재밌는 일이 되겠다. 

 

 

할머니가 보여주신 덤불양대. 인천에서 맛있다고 얻어온 종류는 금방 상해 버리는 데 반하여, 이 덤불양대는 가을에 수확을 못해 겨우내 달려 있어도 전혀 상하지 않는다고. 그뿐이 아니라 맛까지 좋다고 하니 금상첨화이다.

 

 

냉장고에서 적두팥을 꺼내와 보여주시는 할머니. 농민은 가장 알맞은 보관법을 찾아낸다.

 

 

할머니 마당 한켠에 자라고 있던 조선오이. 그물망이 쫙쫙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이꽃. 

 

 

다 쓴 물건이라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다. 닳아서 못 쓰게 된 댑싸리 비는 이렇게 다시 묶어서 계단 등을 쓰는 빗자루로 활용한다.

 

 

대문 입구 쪽에서 자라고 있는 덤불양대. 

 

 

쇠잿말에서 오늘의 마지막 마을인 요동으로 가기 전, 길가에 특이한 수수가 눈길을 잡아 끈다.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마을 주민분께 물으니 옛날에는 방맹이 수수라는 것이 있었다고. 이건 신품종이란다. 실제로 송오 마을에 살고 있는 주인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물으니 장연 쪽에서 얻어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토종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수수. 그렇지만 재밌게 생겼다.

 

 

이 분들에게 더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이 왜 쇠잿말인가?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르셨지만 이 분들의 말을 듣고 유추하면 이렇다. 옛날에는 수안보에서 장이 크게 섰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는 방앗간이 없어서 곡식을 가지고 전부 수안보로 가서 찧어 왔다. 그런데 그곳에 바로 우시장도 섰다고. 그러니까 여기는 소를 사거나 팔아서 끌고 넘나들던 옛 고갯길인 셈이다. 그래서 쇠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재미난 것은 쇠잿말이 이곳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고개 하나 넘으면 장연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수안보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도 쇠잿말이다. 궁금하신 분은 3차 수집 조사 편을 참고하시라. 장연면 면사무소가 있는 곳 근처에 1000년이 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는데, 그곳 바로 위가 쇠잿말이다. 장연에서는 그쪽 고개를 넘어 수안보로 소를 사거나 팔러 다녔을 게다. 마지막으로 더 재미난 사실은 장연의 쇠잿말도 그렇고 이곳의 쇠잿말도 그렇고 큰 도로가 이어져 뚫려 있다는 사실.

 

 

가운데 보이는 산을 중심으로 오른쪽 골로는 수안보로 넘어가고, 왼쪽  골로는 장연으로 넘어갔다. 동네 주민의 말에 따르면 30분이면 수안보까지 갔다는데, 그건 뻥 같고 1시간 반에서 2시간쯤 걸리지 않았을까 한다. 방앗간이 없어 수안보로 다닐 때 버스에 곡식을 실어서 보내고 사람은 이 고개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가면 당시에는 길이 좋지 않아서 버스보다 사람이 더 먼저 도착했다고. 사람이 많이 다닐 때는 지금처럼 수풀이 무성하지도 않고 길도 잘 닦여 있어서 말 그대로 대로였단다. 지금은 이리로 아무도 넘나들지 않는다.

 

 

쇠잿말에서 흙살림의 윤성희 이사님이 합류했다.  시간은 6시가 다 되었을 무렵. 마지막 마을인 요동으로 함께 향했다.

 

 

요동 입구에서 발견한 배나무. 안민동에서 이야기를 들은 청배의 특징과 비슷한 모습이다. 혹시 이것이 청배가 아닐까 하여 동네를 뒤졌지만 찾은 답은... 지난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도 나가셨다고 한다. 이 배의 유래는 알 수 없는 것일까? 다음에 다시 찾기로 기약했다.

 

 

 

 

청배의 주인을 찾고자 산골짜기까지 올랐으나 끝까지 갈 수 없었다. 괜히 갔다가 옴짝달싹 못하게 될 수도 있기에...

 

 

돌아 내려오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 산비탈이 모두 밭으로 개간이 되어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

 

 

하늘에는 달이 빛나고,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요동을 나와 점심을 먹었던 곳에서 7시가 넘어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11시. 피곤하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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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3일 8시. 안산을 출발해 사리면사무소를 목적지로 설정하니 2시간 5분쯤 걸린다고 한다. 지금까지 갔던 곳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리는 거리. 부지런히 달리다 안성맞춤 휴게소에서 또 한 번 쉬는 시간을 가졌다.

 

휴게소에서 조금 쉬고 다시 차로...

 

 

증평 교차로로 빠져나와 새로 뚫린 34번 국도, 고속도로와 같은 그 길을 따라가다가 다시 옛 34번 국도로 내려왔다. 옛날 길이 사람냄새가 나고 좋다. 새 길은 너무 쭉쭉 넓게 뚫어놓아서 경치도 사람도 집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산을 깎아 무식하게 일직선으로만 뚫려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옛 길은 원래 사람이 밟고 다니던 길 위에 포장을 한 곳이 많아 여기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처음 들른 곳은 사리 농공단지 근처의 방축골. 이 마을은 괜히 들어왔다 싶을 정도로 공장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차를 돌려 나와 송명골이란 곳으로 향했다.

 

송명골은 작은 마을이었다. 4~5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듯한 모습. 길로 들어서니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리를 맞이한다.

 

 

 

작은 마을이지만 오래된 노거수가 여기저기 여러 그루 서 있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34번 국도만 아니면 더 근사한 곳이었으리라. 걔 중에 한 집이 눈에 띄어 찾아갔다. 곳곳에 오이를 심어 놓으신 것이 뭔가 있을 듯. 송명골길 41-6에서 만난 연춘자(69) 할머니께 먼저 오이에 대해 물었다. 이건 시집와서부터 심던 것인데, 늦게까지 달리고 맛이 좋다고 한다. 지금은 씨가 없으니 나중에 와서 받아가겠다고 씨 좀 밑지지 말고 꼭 받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아욱도 있었는데, 그건 따로 씨를 받지 않고 떨어져 나는대로 먹는다고...

 

 

 

다음은 부석이란 마을에 들어갔는데, 축사에 새로 지은 집들이 대세다. 그래도 확인하는 셈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 나왔다.

 

그리고 들른 불당골. 옛날에는 절이 있었던지 불상이 있었던지 아무튼 불교와 관련이 있는 곳이 아닐까? 괴산 지역을 다니며 보니 마을 입구에 꼭 유래비를 세워 놓던데, 시간이 허락하면 그것도 한 번씩 읽고 다니면 더 재밌겠다.

불당골에 들어와 어느 집에 딸린 텃밭에 콩이 익어간다. 유월두가 아닌가 하며 확인하려고 들어갔는데 사람이 없다. 비가 오려고 꾸물거리는 날씨에도 어디 들에 나가셨나 보다.

 

혹시 유월두가 아닌지? 주인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없기에 나중에 들를 곳으로 남겨 두었다.

 

 

 

주인은 없고 강아지만 팔자 좋게 늘어져 자고 있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니 또 다른 집에 울타리콩과 아욱이 예사롭지 않다. 뭔가 있겠다 싶어 물어보려고 찾아들어갔으나 역시 아무도 없다. 천상 불당골은 나중에 한 번 다시 와야겠다. 사진 좀 찍으려고 사진기를 꺼내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는다. 어라... 오늘 이렇게 비가 오면 아무것도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된다. 안 그래도 날씨가 꾸물거려 불안했는데...

 

아무튼 비를 뚫고 그대로 강행! 다행스럽게 비는 확 쏟아지고 지나가더니 잠잠해지는 기미다. 고래울이란 마을에 들어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논길을 한참이나 후진으로 나왔다. 운전도 참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짝 증평 쪽으로 다시 빠졌다가 진지바위란 마을을 지나 도화동으로 이어졌다. 차를 타고 지나는데 어느 집에 대학찰이 아닌 다른 옥수수가 걸려 있는 걸 보았다.  

 

사람은 살지 않고 농막으로 쓰는 듯한... 

 

 

주인을 찾으러 동네를 돌아다닌 결과, 증평 사는 50대가 이곳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고... 

 

 

잠긴 대문을 열고 들어가 뭔가 없나 한참을 찾으니, 옥수수 말고 수세미와 여주, 호박이 볼 만하다. 오늘은 그냥 확인만 하고 나중에 한 번 들러보든지 해야겠다.

 

호박의 무게를 버티도록 끈으로 묶어 주었다. 

 

 

도화동을 지나 칠성바위, 증말, 노동이란 마을을 들렀다. 칠성바위란 마을에 들어가는 어귀에 동부가 자라고 있다. 그 꽃이 너무 예뻐서 사진에 한 장 담았다. 아무튼 증말이란 마을에는 정말 없고, 노동은 전원주택들이 꽤 들어서거나 부유해 보이는 듯한 집이 많았다. 

 

 

 

 

다음 송오란 마을은 있을 법한 집에는 사람이 없어 일단 기록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주인은 없고 수확물만 우리를 맞아 주었다. 다 익은 울타리콩 꼬투리(위)와 자라고 있는 모습(아래)

 

 

참깨도 있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집에는 아래와 같은 커다락 호박이  놓여 있었다.

 

 

송오 마을 입구에는 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정체를 알고 싶어 잠시 내렸을 때, 한 아주머니가 사륜오토바이를 타고 오시길래 여쭈니, 자신이 지난해 신품종을 가져다 심었는데 이게 좋아서 동네에 모두 퍼졌다고 한다. 씨앗은 이렇게 돌고 도나 보다.

 

 

 

 

시간은 12시를 넘겼지만,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이르다. 몇 군데 더 둘러보고 점심을 먹을 계획. 소매저수지 부근 응암(매바위)라는 곳은 축사가 많은 곳이었는데, 이곳도 그럴싸한 집이 많아 느낌이 오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큰길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큰터(대기)라는 곳도 별로 볼 것이 없는...

 

이제 점심을 먹기 전 마지막 마을이 남았다. 둔터라는 곳이다. 마을 유래비를 보면 둔터가 군대의 둔전과 상관이 있는 뜻인지 알 수 있었겠으나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둔터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갓끈동부를 발견했다. 오호, 이런 곳에 갓끈동부가? 어느 집 것인지 마을을 멀리서 쓱 바라보았다.

 

괴산에서 발견한 갓끈동부. 그 유래는?

 

 

어느 한 집이 느낌이 온다. 그 집에 가서 무엇 좀 물어보자. 마을로 들어가 그 집 앞에 이르니 어디 나가셨다가 이제 막 돌아오신 모양이다. 얼른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윤재노(74) 할아버지는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무척 안정적으로 보이셨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이런 분위기의 집에는 무엇이 많긴 하다. 갓끈동부는 증평 쑥고개라는 곳에서 7~8년 전에 가져다가 심은 것이라고 하신다. 젊은 사람들이 갓끈동부를 알아보자 짐짓 놀라신 듯하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작두콩을 몇 년 전 호평에서 얻어다 심는데, 담북장(청국장)을 쑬 때 조금 넣으면 냄새가 덜 나서 심는다고 하신다. 또 아주까리도 2종류를 심으시고, 차조기도 밭 한켠에 기르며, 파와 가지도 옛날부터 그대로 씨를 받아서 심고 있단다. 가지는 꼭지 부근에 몇 군데 있는 가시가 아주 따갑고 다 큰 것이 15cm쯤 되는데, 맛이 정말 좋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 테니 꼭 씨 좀 받아 달라고 부탁드리자 할머니가 농을 건네시며 알았다고 약속하셨다.

 

차조기.

 

 

가지꽃과 가지. 

 

 

 

두 종류의 아주까리. 

 

 

논 옆의 가로수에 갓끈동부가 타고 올라가도록 심으셨다. 저 멀리 왼쪽에 보이는 집이 윤재노 할아버지 댁이다.

 

논에서는 벼가 수정을 하느라 바빴다. 암꽃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제 점심을 먹으러 사리면 소재지로 가는 길. 괴산 지역은 이제 참깨 수확기에 들어가 가드레일마다 다리의 난간마다 참깨를 베어다 세워 말리느라 꽉 찼다. 가을이면 아스팔트는 벼를 말리는 곳이 되니 농촌에서 아스팔트 길은 이래저래 쓰임새가 많은 곳이다.

 

 

 

사리면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으니 상권이 많이 죽어 문을 닫은 가게가 태반이다. 할 수 없이 그 가운데 가장 번쩍이는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고 사리면 소재지를 잠시 어슬러거리며 다니다가 옛날 약방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이 자리에서 약방을 하셨을까?

 

 

 

점심을 먹고는 모래못으로 찾아갔다. 모래못은 부자 동네 티가 확 나는 곳이었다. 역시나 그렇게 찾아볼 만한 것은 없어 돌아서 나와 하도 마을로 향했다. 하도 마을은 축사가 많은 마을이라 특이한 것이 없었고, 시동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수암이란 곳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율무가 집 마당 한켠에 자라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심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으나 이곳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다들 어디를 가신 것인지? 날이 궂어서 마을회관에 모여 먹을 거 해 먹으시나? 

 

 

 

 

 

수암 마을을 돌고 있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이 보인다. 밭에 일부러 차풀로 보이는 풀을 심어 놓은 곳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냥 풀이 자란 걸 놔둔 듯하지는 않고 일부러 기르는 티가 난다. 말뚝에 줄까지 띄워 놓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다음에 수암 마을을 다시 찾아오기로 기약하고 이만 돌아섰다.

 

 

 

 

다음 들른 곳은 산정(산우물)이라는 곳이다. 아, 이제와 돌아보니 사리면의 산간 지대에는 유난히 물이 나는 곳이 많았다. 밑으로 큰 지하수맥이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마을은 고추와 배추를 특화시킨 곳이었다. 마을 입구에 장승으로 배추와 고추를 새겨 세워 놓은 것이 너무 특색있었다. 하지만 토종은... 배추와 고추에 밀려서인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산정을 나와 석촌을 찾아갔다. 석촌 마을은 심한 비탈면에 자리한 6~7가구가 전부였다. 비탈이 심한 만큼 텃밭도 별로 보이지 않고 했지만, 비탈의 끝까지 올라갔다가 차를 돌리느라 애를 먹었다.

 

바로 맞은편에는 황산 마을이란 곳이 자리하고 있다. 길을 따라 그곳으로 쭈욱 들어갔다. 안쪽에는 내황산이란 곳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어 그곳을 보고 내려오면서 또 보려고 했다. 내황산은 1가구가 살며 인삼 농사를 크게 짓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차를 타고 내려왔다.

 

내황산에서 내려오면서 보이는 경치.

 

 

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길가에 조 비스무리한 것이 보인다. 얼른 차를 세우고 그곳으로 가 보았다. 이건 강아지풀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조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뭔가 모를 것이 자라고 있다. 일단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긴 다음 두어 개를 표본으로 뽑아서 가지고 내려왔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혹시라도 뭔가 아는 게 나올지도 모른다.

 

강아지풀보다는 크고 조보다는 작은... 그런데 끝이 조처럼 갈라져 있는... 

 

 

 

황산 마을에 내려와 어느 집을 찾아갈까 하다가 마을회관 옆집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한창 옥수수를 따서 손질해 포장하고 계셨다. 은근슬쩍 다가가 조인지 모를 풀을 꺼내 보이며 말을 걸었다. 일단 조로 시작해 다른 작물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주머니께서 집으로 들어가신다. 그러면서 하나둘 씨앗을 꺼내오시는데 도라지, 강낭콩, 개팔이동부, 울콩, 어금니동부, 만삼, 상추, 아욱이 줄줄이 나온다. 몇몇 씨앗은 당장은 없어 나중에 다시 오기로 기약하고 이러저런 씨앗만 얻어서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씨앗을 나눠주시는 정현복(65) 아주머니.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 볼품없다던 아욱. 

 

 

황산 마을을 나와 커다란 저수지 안쪽에 자리한 배실 마을로 향했다. 배실, 혹시 배나무와 어떤 연관은 없을까? 이곳에서도 토종 배를 볼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끝에는 축사, 한 집에서 고추 씻는 일이 한창이다. 시끄러운 기계 소음 사이로 소리소리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 집을 택하여 들어온 것은 집 앞에 있는 꽈리 때문이었다. 김태우(60) 아저씨께 물으니 10여 년 전에 산에서 씨앗을 구해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도 혹시 모르니 일단 기록을 남기고 돌아나왔다.

 

 

 

돌아나오는 길 배실 마을의 어느 집. 염소와 토종닭이 어울려 살고 있다. 병아리가 너무 귀여워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자 했으나 가까이 가면 도망가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다음으로는 점말이란 곳으로 찾아갔다. 점말의 가장 끝에 자리하고 있는 집까지 들어갔다가 돌아나오려는데 오이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찾아가 사람을 찾았다. 방에서는 할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던 중이었다.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고 씨앗 이야기를 꺼내니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신다. 내친 김에 씨앗 있는 것 좀 보여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는 지금 81세이신 허채봉 할머니이다. 평생 이곳에서 농사짓고 살며 증평장과 괴산장으로 씨앗 장사를 다니셨다고. 할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씨앗은 씨갑시라고 한다. 참, 앞서 황산 마을에서 보았던 조는 돌조가 아닐까 하셨다. 괴산에서 조는 조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허채봉 할머니께는 대파, 상추, 갓, 조선아욱, 도라지, 쥐눈이콩, 붉은팥, 파란팥(그루팥) 등 여러 작물의 씨앗이 있었다. "할머니 이거 할머니 몇 살 때부터 심던 거예요?"라고 말을 하면 "아, 평상 하는 거지"라고 답하신다. 웬만한 것은 할머니가 이곳에 산 6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나중에는 농으로 "할머니 이건 몇 년이나 된 거예요?" 하고 물으니 "그건 얼마 안 됐어. 50년!"이라고 답을 주신다. 더 자세한 내력은 나중에 안완식 박사님과 함께 왔을 때 추적할 수 있다. 아무래도 지식이 얕다 보니 필요한 사항을 딱딱 맞게 캐물을 수가 없다.

 

다리가 성할 때만 해도 장으로 씨갑시 장사를 다녔다는 허채봉 할머니. 씨앗을 얼마나 꼼꼼하게 쟁여 놓으셨는지 모른다.

 

필요할 때는 이렇게 냉장고 안에 보관하시는 감각을... 

 

허채봉 할머니 댁의 상추. 

 

60년 됐다는 대파. 할머니는 해마다 씨를 받아서 내다팔고 또 심어서 씨를 받고를 60여 년 동안 반복하셨다. 

 

할머니 집 텃밭에 자라고 있는 실부추. 이건 씨가 없고 뿌리로 번식한다고... 그래서 씨를 받지 않는단다.

 

허채봉 할머니 댁의 오이. 씨를 꼭 받아 놓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허채봉 할머니 댁의 모습.

 

 

 

점말을 나와 포동을 뒤졌는데, 큰길 옆이라 그런지 별 것이 없다. 통뫼(덕고개)도 그렇고, 쇠편이라는 마을도 그렇고 34번 국도가 새로 뚫리면서 마을을 가운데에서 쫘악 나눠 놓았다.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나라의 사업이라 반대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수 없이 더 깊숙한 안쪽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월현(달고개) 마을이 그곳이다. 고개라는 지명처럼 이곳의 고개를 넘으면 괴산에서 다른 지역으로 경계가 바뀐다. 월현 마을에 도착하니 할머니 네 분이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별 소득이 없을 줄 알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들어가 인사를 건넸다. 역시나 할머니들이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시며 짖궂게 구신다. 더 길게 이야기해야 별 거 없을 듯하여 나오다가 커다란 호박을 발견하고 나중에 이 씨앗을 받으러 오겠다며 기약만 남겼다. 나중에 할머니 혼자 계실 때 다시 찾아와야지...

 

달고개 마을의 호박. 나중에 다시 찾아가야겠다.

 

 

 

달고개 마을을 나오며 마전 마을을 거쳤는데, 이곳도 신작로의 영향 탓인지 자세히 볼 것이 없었다.

다음은 마전 마을 건너편에 있는 점말과 오룡동이란 곳을 찾아갔다.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은 없었는데, 마을 분위기가 나중에도 이렇게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이 마을은 가을에 다시 한 번 찾아가야겠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고개를 넘는데 이동 슈퍼 트럭이 마주쳤다. 가끔 인간극장이나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 이런 트럭이 있던데 여기도 다니고 있었다. 깊숙한 곳은 깊숙한 곳인가 보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로, 이리로 가면 분명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나올 듯하여 그냥 내질렀다. 고개를 넘어 좁다란 산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바위에 긁히지 않게 조심조심 돌아서 나오니 역시나 우리가 가려던 대촌 마을이 나왔다. 마을회관 주변에 있는 집에서 차조기와 수세미를 발견. 할머니들은 집에 계시지 않고 역시나 마을회관에서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거기는 들어가 봐야 별 수확이 없을 테고, 나중에 다시 들러야겠다는 기록만 남기도 돌아나왔다. 이 마을도 뭔가 있을 듯하다.

 

대촌 마을 우물터. 아직도 이곳에서 빨래를 하실까? 비오는 날이라 물이 뿌옇다. 세수를 했는데 물은 참 차가웠다.

 

대촌 마을에서 본 수세미. 평소에 보던 것보다 더 길쭉하고 생김새도 특이하다.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이었는데, 눈빛이 흐릿한 것이 좀 어디가 안 좋으신 듯했다. 나중에 씨앗 좀 얻겠다며 꼭 씨앗 밑지지 말고 받아 놓으시라고 부탁드렸다.

 

 

이제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마을 상리(윗시몇)가 남았다. 솔직히 처음 들어가면서 이 마을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 긴장이 좀 풀린 탓도 있겠지만 마을 입구에는 무슨 세라믹 공장인가 뭔가가 커다란 공장이 자리하고 있는데다가 시골집답지 않은 그런 전원주택들도 보이고 해서이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도 나중에 안완식 박사님과 오면 다시금 들러야 할 곳이었다.

마을을 돌다가 다른 벼보다 키가 크고 이상한 벼가 있어 마침 동네 할아버지들이 모여 계시길래 물어보았다. 이 벼는 토종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4~5년 전쯤에 보급종으로 도열병에 강하다고 하여 받아다가 계속 심는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 논을 자세히 바라보니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우물로 고였다가 논으로 바로 흘러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논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뚝을 박고 슬레이트판을 꽂아 물이 바로 들어가는 걸 막았다. 대신 고랑을 내서 한바퀴 둘러서 논에 들어가도록 했다. 아마도 우물물이 그대로 흘러들어간다면 엄청 차가울 것이다. 우물물을 길어서 만져보니 실제로 엄청 찼다. 그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다보니 '대한'이라고 하는 이 도열병에 강한 벼를 택하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고랑을 이렇게 내서 물을 돌리시는 것일 게다. 그도 그럴 것이 물이 돌아가는 길목 중간중간에 논으로 들어가는 물꼬를 터 놓으셨다.

 

논물의 활용. 찬 물이 직접 닿지 않게 하려고  막아 놓은 슬레이트판. 

 

 

그건 그렇고 토종에 대해서는 모르실까?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을 때 얘기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면서 여쭈었다. 돌아온 답은 역시나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요즘은 다 사서 한다고 그러신다. 이야기를 하다가 뒤에 있는 조그만 하우스에는 뭐가 있냐고 하니 참외란다. 참외? 근데 이게 좀 다르다. 보통 시장에서 파는 노란 참외가 아니라 푸르다. 할아버지는 이걸 청참외라고 부르신단다. 토종 참외 종류는 대개가 푸른 빛이 나는 게 많은 듯하다. 얼마 전 먹어본 사과참외나 개구리참외가 그랬다. 

이 참외의 특성은 무르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이가 좋지 않아 과일을 잘 못 먹는데, 이 참외는 물러서 숟가락으로 파 먹기 좋단다. 당도는 어떠냐고 하니 별로라고 하신다. 할아버지께 부탁하여 하나만 먹어봐도 되겠냐니 허락하셔 하나 가져왔다. 

 

이종윤(75) 할어버지의 청참외.

 

 

확실히 무르다. 물렁물렁한데 그렇다고 흐물흐물거리지는 않고 아삭함이 살아 있다. 무르면서 씹는 맛이 있다니. 또 말씀처럼 그리 달지 않은 게 아닐 달았다. 개구리참외보다는 훨씬 달고, 사과참외보다는 좀 덜 달다. 이 참외가 어디서 왔는지는 기억하시지 못하는데, 10여 년도 전에 어디서 얻어다 심었다고 하신다.

 

청참외의 속. 

 

상리 마을에서 내려다본 모습.

 

우물 옆에 앉아 담소를 나누시다가 우리를 만나신 어르신들. 

 

 

이로써 오늘의 사전조사는 이대로 마치기로 했다. 시간은 6시 가까이 되었다. 그래도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끝난 편이다. 사리면이 농공단지가 자리하고 있어 그렇기도 하고, 면을 관통하는 34번 국도 신작로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길이 뚫리면 문물이 들어온다. 문물이 들어오면 당연히 그를 따라 문화가 들어오고, 문화가 들어오고나면 사람이 들고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디는 흥하고, 어디는 망하는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할까. 흐음, 아무튼 길이 잘 뚫려 있으니 오가는 시간은 평소보다도 팍 줄어 2시간쯤 걸리더라. 그 덕분에 오늘 일찍 끝나기도 했다. 다음주는 연풍과 칠성면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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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카메라를 산 건 순전히 절박한 목적 때문이었다.

암으로 투병하던 어머니의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이 먹고 나서는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때가... 2001년쯤이었나?

아직 디지탈 카메라라는 걸 모르던 시절이라 용산에 가서 필름카메라를 구입했다. 수동은 어떻게 다루는지 전혀 몰라서 그것도 자동으로...

그게 바로 Rollei에서 나온 자동카메라(17만 원)였다.

그 사진기로 그래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디카를 알았다면 더 많은 모습을 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요즘에 와서 한다.

아무리 자동카메라라고 해도 필름을 사고 인화하는 비용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 카메라는 내가 2005년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서도 썼다.

 

하지만!

신혼여행에서 나온 결과물들은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과감히 카메라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몇 개월에 걸쳐 디지탈 카메라를 알아보았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Canon의 Poweshot S70(60만 원). 나의 두 번째 카메라다.

그 카메라는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잘 만들었다.

첫 여름 여행로 놀러간 속초에서 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뒤 확인한 결과물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모른다.

역시 돈이 좋구나, 디지탈 카메라로 바꾸기를 잘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엄청 많은 장면을, 또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2008년 12월에는 한 달 동안 강화도와 울릉도, 제주도를 돌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과 식물, 씨앗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 DSLR이란 기종을 본 것이었다.

처음 가까이에서 지켜본 Nikon의 DSLR 카메라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렌즈를 갈아끼는 모습이며 큰 덩치 때문인지 결과물이 내 사진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무엇이 차이인지 2009년에 들어와 처음으로 디지탈 카메라라는 놈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아냈다, 무엇이 차이인지!

마침 수중에 돈도 들어왔겠다. 카메라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내에게는 미리 양해를 구했다. 멀쩡한 카메라를 두고 또 카메라를 산다고 이러고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 필요한 카메라는 무엇인지 자문해 보았다.

무겁고 큰 카메라는 싫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부담스러워하지 않아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화질은 좋았으면 좋겠다.

그 결과 만난 것이 SIGMA의 DP1(70만 원). 나의 세 번째 카메라가 되었다.

내 기대와 다르지 않게 역시나 작은 것이 최고의 화질을 보여주었다.

우와, 이런 세상이 있다니! 나에게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나와 함께 일본까지 가서 S70과 함께 좋은 사진을 많이 남겨 주었다.

문제라면 나를 닮을 필요까지는 없는데 엄청 느리다는 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만지지 못한다는 거...

누군가에게 우리 사진을 부탁할 수 없는 처지.

IXUS의 광고를 보면서 정말이지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 가서 남는 내 사진은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찍는다는 그 말! 100% 공감한다.

 

함께 1년 남짓 지내다 보니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햇빛이 미치는 곳에서는 최고의 화질을 보여주지만, 실내나 어두운 곳에서는 쥐약 먹은 강아지처럼 비실비실... 도무지 맥을 쓰지 못한다.

최대한 숨을 참고 참으며 흔들림 없이 찍으려 하지만 10에 2~3장이나 건질까?

그리고 그 느릿느릿한 여유로움에 결정적인 순간을 놓친 사진을 또 얼마나 많은지...

그러면서 깨달았다. 이 사진기는 풍경 사진기이구나!

사람이나 동물처럼 움직이는 걸 찍거나 실내나 야간처럼 햇빛이 없는 순간에 무언가를 찍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카메라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미 시장에는 2008년 말과는 달리 참 다양한 카메라들이 나와 있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제품은 Panasonic의 DMC-LX3였다.

또 삼성에서도 야심차게 새로운 제품들을 내놓고 있었다.

헌데 둘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LX3는 아는 사람이 가지고 있어 만져보았다. 참 잘 만든 카메라이긴 하지만 너무 크다.

어차피 휴대성을 강조하는 것 그렇게 클 필요가 없다. 더구나 나에게는 이미 DP1이 있지 않은가.

난 DP1이 할 수 없는 실내와 야간에 강하며 들고 다니기 좋은 카메라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삼성은 언제나 그렇듯, 하드웨어는 믿을 만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아직은 영... 그래서 통과.

또한 미러리스라고 하여 요즘 미친듯이 팔리는 Olympus의 PEN 시리즈와 Panasonic의 GF1.

이 두 놈 때문에 한참을 골머리를 앓았더랬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결론은 통과. 그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DP1 때문이다.

DP1은 그만큼 최상의 결과를 보여주는 카메라. 기계 성능이 무지하게 떨어지지만 말이다.

떨어지는 기계 성능은 나의 느긋한 성격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사진 찍는 재미가 있기도 하다. 한 장 한 장 충분히 생각하며 숨을 고르며 셔터를 누르게 되니 말이다.

 

그러다가 새로운 카메라를 사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S70이 부상을 입어 장애가 생긴 것이다.

원래 집에서 기르는 개인 연풍이가 새끼 때 이갈이를 하면서 한 번 카메라를 깨물어 놓아서 단추가 잘 눌러지지 않아 수리를 맡긴 적이 있다.

그런데 다시 몇 년이 지나 그 부분이 말썽을 일으켰다. 이제 아예 헐거워져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걸 수리를 맡기느냐 카메라를 새로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된 거 DP1의 약점을 보완할 카메라를 새로 사자!

수리를 해 본 경험상 이건 수리하러 들어가면 10만 원은 나오겠다. 그럴 바에 돈을 더 주고 사자!

그동안 검색하고 고심한 결과 다시 한 번 Canon을 믿기로 했다. Powershot S90(50만 원)으로 결정했다.

뒤져보니 S80이 70과 같은 형태의 비슷한 카메라였다. 그러나 90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 카메라가 되었다.

F2.0에 다양한 기능들... 기본적인 기능은 70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동안 발전한 기술력이 응집되어 있었다.

크기는 담배갑만 하지 않나... 그저 기술의 발전에 웃음이 날 뿐이다.

이래서 전자제품은 사고 나면 후회한다. 사고 나면 또 더 좋은 것이 뒤따라나오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소비욕을 자극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한 번 살 때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사고, 산 뒤에는 다른 건 돌아보지 말고 자기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이 엄청난 소비의 거미줄을 벗어나 자기 완성을 이룰 수 있다. ㅋㅋ

 

아무튼 S90과 함께 최고의 조합을 이루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의식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가볍게 들고 다니며, 상황상황에 맞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

DP1+S90에다가 핸드폰 카메라.

이 핸드폰은 방수에 방진이 되는 것이라 악천후에서는 제대로 성능을 발휘한다.

이로써 나의 카메라 탐닉은 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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