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터를 타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는 와쿠이 토오루涌井徹 씨. 아키타현 오가타촌大潟村에서 2017년 10월 喜屋武真之介 촬영.


「이런 곳은 가족에게도 보여주지 않아요.」

9월 말, 아키타현 오가타촌. 성인의 키보다 큰 잡초가 무성한 들판을, 셔츠 차림의 남자가 땀투성이가 되어 트랙터로 돌진한다. 잡초를 쓰러뜨릴 때마다 가쿵 가쿵 트랙터가 크게 흔들린다. 마을에서 55헥타르의 논을 소유한 대규모 벼농가 와쿠이 토오루 씨(69)이다. 

 국가가 쌀의 생산을 억제하는 '재배면적 축소 정책'으로 50년 가까이 방치된 약 20헥타르의 토지를 빌려서 개간하고 있다. 원래라면 벼베기로 바쁜 시기이지만, 와쿠이 씨는 여기에 벼를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을 양파밭으로 바꿀 계획이다. 

 오가타촌은 전쟁 이후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였던 하치로 가타八郎潟를 간척하여 생겼다. 대규모 농업을 목표로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와쿠이 씨도 1970년 니가타현에서 이주해 왔다.  그런데 쌀이 남아돌자, 국가는 이듬해인 1971년부터 재배면적 축소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따르지 않았던 와쿠이 씨는 '범죄자' '이단아'라고 불렸지만, 꾸준히 직거래 판로를 구축하고 소비자의 지지에 힘입어 그를 이겨냈다. 

 기자가 양파밭을 개간하는 와쿠이 씨를 취재하고 1주일 뒤, 와쿠이 씨가 일하다 트랙터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나는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다. 걱정하며 전화하자  남의 일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내는 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지요.」

 국가는 올해 생산된 쌀을 최후로 재배면적 축소 정책을 폐지한다. 와쿠이 씨는 「그 시점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양파밭의 개간에) 착수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가 드디어 와쿠이 씨를 따라가는 모양이지만, 그는 더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오가타촌 이단아의 인생과 그 생각의 일부를 살핀다.


눈이 내리는 농지에서 양파의 자람새를 확인하는 와쿠이 토오루 씨. 2017년 12월 촬영. 



◆농업의 희망을 찾는 와쿠이 토오루 씨 

농업정책으로 분단된 마을 

 

「사과해야 합니다.」

 2009년 11월26일, 아키타현 오가타촌을 방문한 민주당 정권의 아카마츠 히로타카赤松広隆 농림수산상(당시)은 의견교환 모임에 참석한 마을의 임원과 농민들 앞에서 사죄했다. 이 마을은 '일본의 식량기지'를 만들고자 탄생했지만, 농업정책이 이주자들을 농락하고 마을을 분단시켰기 때문이다. 

 오가타촌은 하치로 가타를 간척하여 1964년 10월에 탄생했다. 쌀을 증산하는 '모델 농촌'이란 평을 받고, 전국에서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을 선발했다. 평균 경영규모가 1헥타르 정도였던 시대에 1농가에 제안된 농지는 10헥타르(이후 15헥타르)였다. 



 그런데 벼농사에 의욕을 불태우던 이주자들을 '재배면적 축소 정책'이 가로막았다. 국가는 식량관리법에 근거하여 농가에서 쌀을 매입해 소비자에게 판매했는데, 1인당 소비량이 1962년을 정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쌀값을 유지하기 위하여벼농사를 축소해 생산량을 조정하는 일이 1970년에 시작되어, 1971년 이후에는 쌀 이외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지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으로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추진했다. 오가타촌도 농지의 거의 절반을 밭농사로 전환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일부 이주자들은 겨울철 농한기가 되자 밭농사를 짓는 선진농가를 시찰하고 다녔다. 니가타현 도카마치시十日町市에서 1970년에 이주한 와쿠이 토오루 씨(69)도 그 한 사람이었다. 칸토, 칸사이, 시코쿠……. 근사한 대처를 목격하고 「나도 할 수 있다」며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도쿄 우에다역을 출발한 야간열차가 아키타에 가까워지면서 창밖에는 은빛세계가 펼쳐졌다. 꿈은 눈의 무게에 눌려 점점 시들고, 오가타촌에 도착할 무렵에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멜론, 호박, 대두 등다양한 밭농사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눈 때문에 재배시기가 제한되는 데다가, 간척지는 배수설비를 갖추지 않으면 작물의 뿌리가 썩는 등 조건이 나빴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정리한 생각을 와쿠이 씨는 나중에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설국의 농업은 눈이 없을 때 노지에서 작물을 키우고, 눈이 있을 때에는 시설 안에서 가공을추진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무엇을 심고 무엇을 가공할지, 작물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설국에 좋은 작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작물'이란 얄궂게도 국가가 생산을 제한하려는 쌀이었다.


수확기를 맞은 논을 둘러보는 와쿠이 토오루 씨. 2017년 10월 촬영. 


타작물 전환에 실패를 거듭한 와쿠이 씨 등은 제한면적을 초과하여 모내기를 실시한다. 하지만 현의 담당자는 그 과잉 재배한 분량을 푸른 상태에서 베어내라고 지도를 내렸다. 이른바 '풋베기'이다. 

 이주하면서 계약에서는 국가의 방침에 따르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농지를 반환(환매)하도록 요구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동료와 논의했지만 해결책은 없었고, 와쿠이 씨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가을에는 약 1주일 뒤에 수확할 벼이삭을 풋베기하라는 지도를 받아, 자신의 콤바인으로 베어서 논에 방치했다. 벼이삭은 90% 가까이 영글어 있었다. 니가타에서 함께 이주한 아버지 헤이고로平五郎 씨(2013년 사망)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건'은 그 무렵에 일어났다. 이앙기로 한 번 오갈 분량을 풋베기하지 않은 두 농민이 국가에게서 농지를 환매하라는 처분을 받은 것이다. 와쿠이 씨는 말한다. 「두 농가의 태도가 너무 완고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실력을 행사했죠. 우리는 이런 압박을 받으면서 농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분노와 불안을 느꼈습니다.」

 오가타촌의 이주자 약 580명 가운데 와쿠이 씨 등 200명은 1983년 아키타 지방법원에 농사조정을 제기한다. 농가가자신의 토지에서 쌀을 재배하면 안 된다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농가마다 소유한 논 15헥타르에 할 수 있는 한 농사를 짓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마을에서 유일한 집하업자에게서 수확한 벼의 매입을 거부당했다. 와쿠이 씨와 동료는 전화번보부를 펼쳐 전국의 미곡상에게 연락하고, 자신들의 벼를 취급해주는 가게를 개척했다. 이 쌀은 이른바「암거래 쌀」이라 불리는데, 현과 현의 경찰은 1985년 10월부터 2개월 동안 마을 입구에서 검문을 하여 암거래 쌀의 출하를 저지하려 했다.

 1987년이 되자 와쿠이 씨는 동료 몇 명과 주식회사 '오가타촌 아키타 코마치 생산자협회'를 설립한다. 계약 농가에서 농협도다 높은 가격으로 쌀을 구입해, 자사의 공장에서 가공하여 독자적으로 개척한 고객에게 직거래를 시작했다. 신품종 '아키타 코마치'의 평가는 최상으로「산지 직송은 맛있다」는 평판을 얻는다. 하지만 재배면적 축소 정책을 준수하는 쪽에서는 '돈벌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마을에서 「암거래 쌀을 출하하지 마라」는 시위대가 몰려와 「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힐난하여 와쿠이 씨는 반론을 했다. 

 「재배면적 축소를 계속한다고 새색시가 옵니까? 훌륭한 농업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대두를 재배하던  '재배면적 축소 준수파'의 미야자키 시다요시宮崎定芳 씨(78)는 와쿠이 씨에게 호통을 친 적이 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대항하는 지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등은 밭농사를 짓도록 연약한 지반을 없애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미야자키 씨 자신은 재배면적 축소에 협력하는 게 마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은 재배면적 축소 반대파와 준수파로 분단되어, 반대파의 아이가 친구들에게 '암거래 쌀'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미야자키 씨는 말한다. 

 「서로의 관계가 최악이었다.」

 암거래 쌀이 사실상 추인을 받게 된 것은 1988년 1월 아키타 지검이 내린 판단이 계기였다. 암거래 쌀을 판매했다고 하여 식량관리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된 재배면적 축소 반대파 3명을 모두 불기소 처분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쌀 수입규제를 심하게 비판하고, 국가가 농가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한계에 이르렀다. 불기소 처분을 알게 된 와쿠이 씨는 「국가와 대결하는 일은 끝났다」고 느꼈고, 당시 식량청의 과장이고 나중에 농수사무 차관을 지낸 다카키 유우키高木勇樹 씨(74)도 「이제 식량관리법은 무너지겠다고 확신했다. 시대에 뒤처진 법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장 때문에 본심은 입 밖에로 낼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전쟁 이후 최악의 기록적 흉년이었던 1993년, 대량 판매점 사장이 오가타촌을 방문해 '1가마 6만 엔'이란 가격으로 사재기를 추진했다. 지난해까지 1가마 2만 엔으로 매입했던 와쿠이 씨는 「6만 엔은 무리이지만, 4년 동안 3만 엔에 구매하겠다」고 약속하고 생산자를 묶어 놓았다. 이듬해는 생산량이 회복되어 일반 쌀값이 떨어졌지만, 3만 엔에 계속 구매하겠다고 한 와쿠이 씨는 지난해의 쌀값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전국의 직거래 고객에게 <지금의 쌀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한다면, 희망 가격을 알려 주세요>라고 편지를 보내자, 90%는「지금의 가격도 괜찮다」고 답했다. 가격 인하 요구가 많으면 경영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꾸준히 개척한 고객의 만족도는 높았다. 


오가타촌으로 이주한 직후 볍씨를 뿌리는 헬기 앞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 왼쪽에서 두 번째. 본인 제공. 


다카키 씨는 자성을 담아 말한다. 「소비자는 국가가 매입하는 정부미보다 농가에서 필사적으로 농사지은 『암거래 쌀』이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농업을 잘못 지켜서 농가의 창의성을 빼앗았다.」다카키 씨가 농수성의 관방장이었던 1995년, 식량관리법은 식량법으로 대체되는 형태로 폐지되고 암거래 쌀은 '암거래'란 딱지를 떼었다. 

 오가타촌의 분단이 해소된 것은 2010년 무렵이었다. 2009년 마을을 방문한 당시 아카마츠 농수상이 농업정책을 사죄하자, 재배면적 축소 준수파에게서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며 반발의 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재배면적 축소로 줄어든 벼농사 농가 등의 수입을 보전하는 '호별 소득보상제도'가 2010년 도입되고, 쌀가루용 등의 벼농사를 지어도 재배면적 축소로 취급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을 농가의 재배면적 축소 참가율은 지난해 49%에서 84%로 높아졌다. 분단 구도는 마침내 무너졌다. 


참치처럼 돌진


 「나는 참치처럼 멈추면 죽는다.」

 와쿠이 씨는 자신을 이렇게 비용한다. 생각이 나면 곧바로 행동한다. 기자가 취재하며 쌀 가공공장의 안내를 받을 때도 생산라인의 문제점을 발견하자, 현장의 직원과 이야기하느라 20분 정도 열중했다. 

 와쿠이 씨는 1948년 9월,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 지역은 「까마귀에게 부딪치는 흙도 없다」고 할 만큼 농지가 귀중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농가의 셋째 아들로 논의 지분이 0.3헥타르였는데, 와쿠이 씨도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아버지와 시노가와천信濃川의 하천부지에 조금씩 흙을 날라 논을 1.8헥타르까지 넓혔다. 그럼에도 농사일로는 연간 100만 엔 정도 벌어 공사현장 등에 돈을 벌러 나가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자택 앞에서 사진을 찍은 와쿠이 씨(왼쪽 끝). 본인 제공. 


마음껏 벼농사를 짓고 싶다. 그런 꿈을 품은 아버지와 아들은 자연스럽게 오가타로 이주를 목표로 했다. 이주 조건 등을 듣고자 와쿠이 씨는 19세 때 혼자서 상경하여, 느닷없이 옛 농림성(현 농수성) 본청을 방문했다. 담당직원에게  「그렇다면 가나자와金沢의 호쿠리쿠北陸 농정국에 가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열차에 타고 가나자와로 향했다. 

 이주자는 응모자 가운데 서류심사와 면접 등으로 선발했는데, 유부남이 유리하다고 들은 와쿠이 씨는 <이주한 뒤 현지 여성과 결혼을 희망한다>고 적은 결혼희망서를 작성하여 이주 응모서류와 함께 제출했다. 22세였던 1970년 12월 이주한 직후 먼저 온 이주자의 딸 아야코 씨(71)와 결혼했다.

 재배면적 축소는 올해로 끝난다. 하지만 와쿠이 씨의 시행착오는 계속된다. 

 사장을 맡은 오가타 아키타 마치코 생산자협회(종업원 수 160명)은 올해로 설립 30년을 맞이한다. 계약농가는 현재 약80호, 직거래 회원수는 약 5만 명에 이르는데, 최고일 때보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쌀의 생산부터 가공, 판매까지 다루고 부가가치를 높이려고 떡과 찰밥, 찹쌀떡 등을 발매했지만, 가격경쟁에 밀리고 있다. 쌀가루를 사용한 가공시설도 신설했지만 기대만큼 매출이 많지는 않다. 최근에는 글루텐(밀가루에 함유된 단백질)을 쓰지 않는 음식을 먹는 테니스 선수의 몸 상태가 개선되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되며 쌀가루로 만든 글루텐 프리 파스타 등의 판매도 시작했다. 

 재배면적 축소 정책의 종료와 농가의 고령화, 그리고 환태평양 파트너쉽 협정(TPP) 참가 이후의 시대를 눈여겨 보는 와쿠이 씨는 지난해 더 수익성 높은 농업 모델을 만들고자 금융기관 등과 주식회사 '미라이 공창 팜 아키타(みらい共創ファーム秋田)'를 설립했다. 지금 주력하고 있는 건 쌀이 아니라 양파이다. 기계를 쓰면 대규모로 재배할 수 있고, 가공용 양파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쌀보다 수익성이 높다고 한다. 마을의 배수 대책도 추진하여 밭농사 환경도 조성해 왔다.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밭을 빌려서 집약적으로 효율적인 경영을 목표로 한다. 

 「꿈과 희망이 있는 농업을 실현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벼농사만 짓거나, 겉모습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쌀, 쌀이라고 떠들던 오가타촌에서 하는 일에 영향이 있을까?」

 직접 양파밭을 개간하다 머리를 부딪쳐 부상을 당하는 등, 내년에 칠십을 바라보지만 참치처럼 돌진할 뿐이다. 걱정하는 소리도 있지만, 그러니까 투쟁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번 달 중순, 와쿠이 씨와 양파밭에 방문했다. 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와쿠이 씨는 밭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설국에서 태어난 건 눈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간다. 이 양파도 차가운 눈 아래에서 자란다. 봄이 지나 양파를 수확할 수있을까.」

 푸른 싹이 흙 아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https://mainichi.jp/articles/20171224/ddm/010/040/06000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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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azTO&articleno=547




고랭지 배추밭. 멋지죠? 그런데 농사를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곳의 배추 덕에 도시민들이 옛날처럼 김장에 매달리지 않아도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건 고마운 일인데, 배추가 자라지 않을 때는 삭막하거든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흙도 엉망으로 망가져 있을 거예요.



http://news.joins.com/article/15605479



최소한 비바람에 겉흙이 쓸려가지 않도록 하고, 또 흙에 유기물을 보충해 줄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농진청에서도 관련 연구를 꽤 오랫동안 진행해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장에서는 채택하지 않고 있지요. 이건 국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정말 고랭지의 배추밭들 다 망가져서 황폐해질 거예요. 거기에 기대어 사는 농민들은 물론이고, 그 덕에 배추 잘 먹고 있는 도시민들까지 큰 피해를 볼 겁니다. 네? 중국산 배추 사다가 먹으면 된다고요? 그럼 그렇게 하시든지요. 쳇.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6972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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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경제연구원에서 나온 <신정부 쌀 산업 정책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읽었다.

현재의 쌀 문제가 발생하는 건 소비량 감소가 생산량 감소보다 심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데, 어디에도 수입 쌀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다. 몰랐던 걸까? 아니면 영향이 미미하다고 보는 걸까? 아무튼 이에 대해 가타부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면서 대책으로는 무조건적으로 재배면적을 줄여 생산량을 줄이는 방안만 이야기한다. 차라리 고급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생산방식이나 품종을 바꾸는 걸 권고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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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대책을 세워서 시행해 보았자 사람들이 60-70년대처럼 애를 낳지는 않을 테니, 천상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을 잘 짜야 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일본도 그런 방향으로 돌아섰더만.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09/2016060902265.html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준다고 해도 농업 부문에 종사할 한국인 노동자는 제한적일 것 같으니 말이다. 
또, 농촌의 일손은 점점 고령화로 노동력을 잃어갈 테니 말이다. 
기계나 자동화 등으로 인력을 대체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누군가는 흙을 밟고 일해야 하는데 그 일을 이주민들이 담당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

한편 미국의 트럼프가 펴는 반이민정책이나 영국의 브렉시트 같은 사례는 반면교사로 잘 참고하면 좋겠다. http://v.media.daum.net/v/2017021707270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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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식량정책은 오랫동안 부조리로 가득 차 왔다. 우린 매년 농업보조금으로 수백 억을 쓰는데, 그 중 대부분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작물을 심는 부유한 상업적 운영에 도움이 된다.  공급 과잉이 세계의 작물 가격을 하락시키고, 개발도상국의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한편 수백만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수혜자에게 하루 4달러 조금 넘게 제공되는 푸드 스탬프 덕에 기아에 시달리지는 않는 상태로 살고 있다. 


그래서 공화당이 이러한 모든 문제를 악화시킬 농업법을 요청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거의 너무 터무니없다. 국가 예산의 균형을 잡기 위한 추정 목적을 위해, 의회가 농업법의 장기 교착 상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공화당 간부회의가 상원과 협상을 추진하는 방안은 국가의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는 빈약한 원조를 삭감하고 부유한 소수의 미국 농민들은 계속 살찌우는 데 사용될 것이다. 


의회는 10년에 걸쳐 400억 달러의 푸드스탬프 혜택을 삭감하자고 제안했다. 2009년 경기부양법에 포함된 푸드스탬프 프로그램 인상 만료와 함께 이번달 이미 발효된 삭감에 50억을 더한다. 한편, 공화당은 지난해 전체의 일부인 149억 달러의 농업보조금을 허용하여 만족한 듯하다. 공화당의 제안은 직불금 -시장의 변동과 상관없이 특정 작물을 계속 재배하도록 권장하기 위해 매년 농민에게 설정된 비율로 지불- 부터 작물보험 보조금까지 정부의 지원을 전환시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더 저렴하지 않을 수 있다. 더 나쁜 점은, 직불금과 달리 작물보험 보조금은 이 아낌없이 주는 형태를 받을 농민들의 소득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제안은 어떻게 증대되고 있는 불평등이 경제학자들이 지대추구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부양되는지에 대한 완벽한 사례이다. 소수의 미국인들이 매우 부유하게 성장함에 따라, 그들의 정치권력도 불균형한 크기로 급증했다. 소수의, 강력한 이윤 -이 경우 부유한 상업농- 이 국가 경제 파이의 더 큰 조각을 도용하여 자신만 혜택을 누리도록 시장을 왜곡하는 공공정책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그들의 더 큰 조각은 다른 사람의 작은 조각을 취한다는 뜻이다. 파이는 더 커지지 않았다. 지대추구자들은 개별 미국인으로부터 손실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조금씩 취하는 데 숙달되어 있다. 그들이 각각의 개별 미국인들의 주머니에서 꺼내는 돈은 작지만, 지대추구자들이 취하는 총합은 거대하다. 그리고 이것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공화당의 농업법에 제안된 부조리한 계획은 특히 이 과정의 어처구니 없는 버전이다. 가난한 미국인에게서 맨손으로 생존하는 데 필요한 진짜 돈을 가져가고, 그 돈은 자신의 캠페인 기부금과 정치적 지지에 대한 보답으로 받을 가치가 없는 소수의 부유층에게 가져다준다. 거기에는 경제적 정당성이 없다. 이 법은 실제로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종류의 생산을 촉진하고, 가장 작은 소득을 지닌 사람들의 소비를 축소하여 우리의 경제를 왜곡시킨다. 또한 도덕적 정당성도 없다. 그것은 실제로 수백만 미국인의 일상생활에 고통과 불안정성을 증대시킨다.


농업보조금은 80년 전인 1933년에 시작되었을 때 더 합리적이었다. 당시 미국인의 40% 이상이 농촌 지역에 살았다. 농가소득이 대공황이 시작되고 3년 동안 약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 상황에서 보조금은 빈곤퇴치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현재, 농업보조금의 목적은 전혀 달라졌다. 환경실무그룹(Environmental Working Group)에 의하면, 1995~2012년에 1%의 농가가 전체 보조금의 1/4 이상인 약 150만 달러씩 받았다. 보조금의 약 3/4이 단 10%의 농가로 갔다. 이 농가들은 1년에 평균 3만 달러 이상을 받았다. 이는 일반적으로 푸드스탬프라 부르는 연방정부의 보조영양프로그램(SNAP)으로 지난해 개별 수혜자가 받은 평균 혜택의 약 20배이다.


오늘날, 푸드스탬프는 빈곤퇴치 노력의 주요한 지원 가운데 하나이다. 지난해 미국 농무부의 종합자료에서 2011년 SNAP에 참여한 미국인 4500만 명의 80%는 빈곤 수준 이하의 가구소득이었다. (그 이후, 총 참여자 수는 약 4800만으로 확대되었다.) 그러한 지원으로도 그들 중 대부분은 식량불안을 경험했다. 즉, 일 년 중 어떤 시점에는 식탁을 음식을 올리는 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푸드스탬프 프로그램과 농업보조금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둘은 이상한 협력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근거가 있다. 식량의 경제학의 두 측면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생산과 소비. 국가 안에 풍부한 공급을 갖고 있는 것이 그 국가의 시민들에게 잘 공급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부유한 자에 대한 농업보조금과 가난한 자에 대한 영양지원 사이의 근본적인 불균형 —농업법 제안이 직접적으로 촉진시킬 불균형— 은 이 확립된 경제적 사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증거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Amartya Sen은 심지어 기근이 반드시 공급이 부족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얻는 데 실패함으로써 일어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1943년의 벵갈 기근과 한 세기 이전에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에서 이는 사실이었다. 영국의 지주에 의해 통제되던 아일랜드는 시민이 기아로 죽을 때조차 식량을 수출하고 있었다.  


유사한 역학이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농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미국은 옥수수와 콩의 가장 큰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그럼에도 수백만 미국인들이 여전히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공화당이 현재 삭감하고자 하는 기아와 영양실조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빈곤층에서 취하여 부유층에 보조금을 준다.


미국의 식량정책과 관련된 모순적인 층이 또 있다. 과잉생산을 장려하는 한편, 농가에서 생산하는 식량의 품질과 다양성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옥수수에 대한 과다한 보조금은 건강에 해로운 많은 식품이 상대적으로 싸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가계가 빡빡한 사람들은 식료품을 사면서 영양가가 없는 음식을 선택하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국인이 재력과 어울리지 않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만율과 함께 제2형 당뇨병의 발생률이 높다는 기아의 역설에 직면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빈곤한 미국인들은 특히 비만의 위험이 있다.


몇 년 전, 나는 12억 인구 중 수천만 명이 매일 기아에 직면한 인도에 있었다. 첫 페이지의 머리기사에서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살 여유가 없기 때문에 미국인 7명 중 1이 식량불안에 직면했다고 시끄럽게 떠들던 때였다.  다음주에 내가 만난 인도인 친구는 이 소식에 당황했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여전히 기아가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당황스러움은 이해할 만하다. 부유한 곳에서 기아는 불필요하다. 내 인도인 친구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미국인의 15% —그리고 미국 아이들의 22%— 빈곤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점이다. 최저임금 7.25달러에 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은 1년에 약 1만5천 달러를 버는데, 4인가구의 최저생활비보다 훨씬 적고(2012년 2만3492달러) 3인가구의 빈곤 수준보다 더 적다.


이 냉혹한 그림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빈곤한 상태로 매우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경제 체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워싱턴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다. 


이는 미국이 일하려던 방법이 아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유명한 1941년의 “네 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그는 모든 미국인이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포함하여 특정한 기본권을 가져야 한다고 공표했다. 이 개념은 이후 충분한 식량에 대한 권리를 기술하기도 한 세계인권선언에서 국제사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이러한 기본적인 경제적 인권을 옹호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면서 —채택하는 방법으로— 미국 내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수백만 미국인의 높은 빈곤 수준으로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을 충족하려면 정부에 의지해야 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숫자는 엄청난 경기 침체의 시작과 함께 극적으로 증가했다. 푸드스탬프를 받는 미국인의 숫자는 2007~2013년 사이 80%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미국인들 대부분이 엄밀히 말하면 빈곤층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필요의 깊이에 미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2012년, 푸드스탬프 수혜자 5명 중 2명은 총소득이 빈곤선의 절반 이하였다. 그 프로그램으로 그들이 얻는 양은 매우 작아 수혜자 1인당 하루 4.39달러이다. 이는 살아남기에 충분치 않을 것 같지만, 그걸 받는 사람들의 생활에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예산정책우선센터(Center on Budget and Policy Priorities)는 2010년 푸드스탬프가 400만의 빈곤한 미국인 구제했다고 추산한다. 


기아와 영양부족에 대처하기 위한 기존 프로그램의 부적절성을 감안할 때, 그리고 엄청난 경기 침체의 여파로 인한 빈곤층의 규모를 감안할 때, 우리는 식량안보를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하원의 공화당 간부회의의 구성원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 같다. 불충분한 공공 교육을 제공받고 시장성 있는 기술이 부족한 빈곤층, 그리고 열심히 일을 찾지만 궁지에 빠진 경제 체제 때문에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는 미국인 7명 가운데 1명만 그걸 얻는다. 이러한 문제의 영향을 경감하기는 커녕, 공화당의 제안은 궁핍과 불평등을 강화할 것이다.


그리고 공화당 제안의 비참한 효과는 심지어 국경을 넘어서 이르를 것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푸드스탬프의 삭감과 결합된 농업보조금은 세계의 빈곤과 기아를 증대시킨다. 이는 미국의 소비를 감소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생산을 증가시켜 불가피하게 식량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수출은 세계의 가격을 하락시켜 세계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다. 농업은 세계의 농촌 지역, 특히 개발도상국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빈곤층의 생계에서 70%를 차지하는 주요한 원천이다. 


공화당의 제안을 채택하는 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경제에 울려퍼질 것이다. 간단히 자원이 감소된 빈곤한 가구는 성장이 막혀 버릴 것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공화당의 농업법은 불평등을 심화시킬 것이다. 부유한 농민에게 즉각적으로 수여되는 것에 상응하여 빈곤층은 삭감된다. 영양이 부족한 아이들은  —기아 상태나 나쁜 식단으로 질병을 지닌— 더 나은 먹을거리만이 아니라 학습을 못한다. 


푸드스탬프를 삭감함으로써 우리는 불평등의 영속을 보장하고, 그것은 기회의 불평등이란 최악의 상황 중 하나로 나타난다. 내가 이전 시리즈에서 썼듯이, 미국은 기회와 관련하여 놀랄만큼 나쁜 일을 하고 있다. 우린 자신의 잠재력에 걸맞게 살지 못하는 하층의 많은 사람들을 놔두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그들이 국가 전체의 번영에 기여를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이러한 식량정책—우리 미래에 대한 관심, 특히 우리 아이들에 대한 국가 부채의 영향— 에 찬성하는 부정하고 몹시 냉소적인 주장인 공화당의 논점에 드러난다. 부채숭배의 강화에 힘쓰고 있다(하바드의 경제학자 Carmen M. Reinhart와 Kenneth S. Rogoff에 의해 부채-G.D.P에 성장둔화가 연결된다고 폭로됨. 90% 이상의 비율). 또한 공화당의 농업법은 미국의 어린이들과 세계를 다양한 방법으로 해친다.


이러한 제안이 법이 된다면 국가는 도덕적, 경제적으로 실패할 것이다. 



http://opinionator.blogs.nytimes.com/2013/11/16/the-insanity-of-our-food-policy/#more-150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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