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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말쟁기질 교사가 남긴 것

 

 

시작하며

 

에도시대의 농경도 말이나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찍은 농사 풍경에는 종종 '코잡이'나 '입잡이'를 하는 2인 말쟁기질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쟁기를 누르는 '쟁기꾼' 역할 외에 입 근처의 재갈에 대나무 장대를 묶어 말을 유도하는 '코잡이' 역할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말을 똑바로 걸어가게 하거나, 방향 전환을 시키거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코잡이'는 써레질이나 흙덩이 부수는 작업에도 많이 행해졌는데, 이는 말이 얼마나 쟁기나 말괭이 등의 견인식 농기구에 대한 길들여지지 못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농기구 사용은 사람에게도 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고, 나름의 수련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쇼와 중기 무렵까지에는 2인 말쟁기질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쟁기를 짊어지고 온 일본을 돌아다녔던 '말쟁기질 교사'라는 이름의 사람들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가 식산흥업의 일환으로 농업의 근대화를 모색하던 와중에, 더 풍토에 적합한 개량을 추진하기 위해 재래 농법의 역사를 답습하는 게 중요시되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란 메이지 16년 농업기술의 개량, 보급을 목표로 했던 노농의 한 사람, 하야시 엔리林遠里의 사설 권농사가 후쿠오카에 설립되었던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볍씨의 저장법이나 제초 기술, 그중에서도 습논의 건논화에 따라 일어나는 수확고의 증수가 명확한 목표였습니다. 건논에서는 뿌리를 깊게 내려 비료를 주기 위한 깊이갈이가 필수이고, 그 때문에 쟁기질과 암거배수 기술을 보급, 지도하기 위한 사설, 군, 현, 시험장, 나아가서는 쟁기 제작소 등에서 파견된 말쟁기질(소쟁기질)의 기술전문가들의 모습은 1950년대 전후의 무렵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후쿠오카현 권업시험장의 장이었던 무렵의 요코이 토키타카横井時敬 등도 각지에서 오는 요청에 응하여 말쟁기질 교사 또는 벼농사 개량 실업교사를 추천하고 파견했습니다.

 

사진1 큰괭이를 끄는, 입잡이식 2인 말쟁기질 풍경(Le Japon Illustre 1915년에서)

 

사진2 말을 '코'에서 코잡이하고, 써레질 작업을 한다. 1957년(촬영:菊池俊吉)

 

 

사진3 말 그림 <말쟁기질>. 1887년 야마가타현山形県 츠루오카시鶴岡市 구마오카熊岡 신사 소장(사진: 이타바시구板橋区 향토자료관 제공). 메이지 시대에 들어 후코오카에서 적극적으로 말쟁기질 교사(또는 개량 실업교사)를 초빙한 쇼나이 평야를 중심으로 한 곳에서는 건논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들의 공헌에 감사한 마을사람들이 봉납한 말 그림에는 모두 소소하게 후쿠오카 쟁기(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쥐고 있는 말쟁기 교사가 그려져 있다.

 

 

일찍부터 건논화가 진행되고, 좋은 말의 산지이기도 했던 규슈에서는 후쿠오카, 구마모토, 사가의 평야 일대가 말쟁기질의 선진지였습니다. 한편, 칸토우에서는 말괭이를 사용한 써레질을 말로 행하는 지방도 있었는데, 논이 많고 깊이갈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대한 쟁기는 일부 밭농사 지역에서 사용되었지만, 매우 불안정하고 깊이갈이는 어려워 칸토우 명물 2인 말쟁기질이 나쁜 관례로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서쪽 소 동쪽 말'이라 이야기되듯이, 칸사이에서는 말보다 습논 작업에 안정감이 있는 소를 써레질 작업에 이용할 수 있었기에, 1인이 부리는 기술이 일찍부터 정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큐슈 고향의 경려회競犁會에서 솜씨를 연마한 말쟁기질 교사들은 건논화가 늦어지고 있던 도호쿠, 칸토우 지방에 파견되는 일이 많았는데, 후쿠오카의 재래 쟁기(안아 쥐고 서는 쟁기)에서부터 다이쇼 시기에 만들어진 근대 짧은바닥쟁기로의 획기적인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그것의 보급이나 농기구의 변화에 따른 쟁기질 방법을 가르칠 필요성도 생겨, 칸토우에 한정하지 않고 칸사이도 포함해 전국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의 경려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3회 거두면 군의 말쟁기질 교사에 추천되고, 한층 실적을 쌓으면 현에서 인정된 말쟁기질 교사가 되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는 지역의 학교장보다 명사 대접을 받는 등 사람들이 동경하는 새로운 직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측이었던 마을 사람에게도 처음에는 "어려운 말(성질이 사나운 말)"을 순식간에 제압해 낯선 쟁기질의 시연을 실시하는 신기한 기술을 구사하는 "말꾼"이기도 했습니다. 

 

사진4 시즈오카의 여자 말쟁기질 강습회에서, 산 모양의 모자와 조끼 차림으로 지도하는 후지노 토쿠오藤野徳雄씨. 나라의 명을 받아 최신 기술을 전하는 지도자의 풍격과 기개가 감돈다. 쇼와 초기 (사진: 말 박물관 제공)

 

 

말쟁기질 교사 중에는 전국을 쟁기 1대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면, 모범논을 만들어 그 성과를 보여주면서 오랜 세월 자리잡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도호쿠 지방에 남은 봉납 말 그림에는 근대 농법 보급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씩씩하게 말과 쟁기를 조종하는 말쟁기질 교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 그림은 성과를 얻은 마을사람들의 감사의 증표였습니다. 

"최후의 말쟁기질 교사"라고 이야기되었던 후지노 토쿠오藤野徳雄 씨는 1900년 말쟁기질 선진 현인 후쿠오카현의 가스야군粕屋郡 시메마치志免町에서 태어나 사이타마현에서 죽었습니다. 1971년에는 축력 이용의 개선지도와 농기구의 개량에 전력을 다 한 것에 대하여 공훈 5등 서보장瑞宝章을 서훈했습니다. 당시의 가스야군은 말 육성이 성행해 망아지를 3-4세가 되기까지 기른 뒤, 야마구치 지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이 군에서는 후지노 씨 이외에도 많은 말쟁기질 교사가 배출되었습니다.

후쿠오카 번사였던 할아버지도, 농민이었던 아버지도 말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도 취학 전부터 말괭이를 손에 들고 경작을 시작했습니다. 1915년 농학교 3년(중학교 3학년) 때에는 시멘무라志免村에서 말쟁기질 경려회에 뛰어들어 참가해 줄을 선 청년들을 누르고 우승합니다. 후쿠오카 농학교를 졸업한 뒤, 시즈오카현 농림기술시험장에서 근무하고, 그 뒤 사이타마현 시험장으로 옮깁니다. 대일본 농회農會, 일본 마사회 및 각 현 주최의 말쟁기질 강습회나 연성회, 경려회 등을 통하여 말의 길들이기나 쟁기의 경운방법을 계속 지도했습니다. 실제로 약 20만 마리의 말을 길들이고, 50만 명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만년에는 카와사키, 후나바시船橋, 우라와浦和, 오오이大井의 경마장에서도 근무했습니다.

그림1 도도부현별 말 경작면적의 추이. 농림성 통계표를 바탕으로 작성. 다이쇼 14년: 우마 경작면적, 쇼와 17년: 말 경작면적

 

 

1931년 연성회에서 국립 종마 육성소장 사와라 케이지佐原敬二 씨(전 육군 기병 대좌)와 함께 길들이기 솜씨를 선보인 것이 큰 자신감이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술회했습니다.

 

후지노 씨의 일은 크게 구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건논화와 깊이갈이를 목적으로 하는 쟁기질 보급 지도. 특히 2인 말쟁기질의 관행을 개선해 1인 말쟁기질로 만든 점.

2. 농기구, 특히 멍에의 개량에 의한 효율 좋은 말쟁기질 지도.

3. 두둑짓기의 개선 등을 수반한 사이갈이 제초의 지도.

4. 시험장에서 쟁기, 괭이, 고무래, 사이갈이 도구, 멍에 등의 비교시험을 개선.

 

말쟁기질 교사가 활약했던 시대는 일본 말의 대변혁기이기도 했습니다. 메이지 시기에 일본에 주재하던 서구인들이 놀라며 기록했듯이, 일본 말의 대부분은 서양의 시점에서는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였습니다. 무사가 전장에서 타는 준마는 '성질'이 강한, 거친 말이었습니다. 메이지 초두 관리들의 승마조차도 말과 함께 좆아 달리는 마부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말도, 국가의 마필 개량사업에 의해 양상이 달라져 갑니다.

메이지부터 종전까지는 군용마의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 '말 정책 1차 및 제2차 계획(1906-1945년)'이 시행되었습니다. '일본 말의 개량' 즉 재래종의 잡종화는 심상치 않은 속도로 진행되어 쇼와 시대 초기에는 국내 말의 90%가 교잡종이 되었습니다. 세계 표준에서 보면 조랑말 유형의 일본 재래 말(체고 약 100-135cm)를 서양종과 교배해 대형화(체고 약 145-165cm)하는 것이 우선 희구되고, 다음으로 승용, 수레용, 짐용으로 그 개량 방침도 용도별로 세분화했습니다. 그리고 종전 뒤에는 범용성이 높은 중간종의 농사용 말이 일반적으로 선호되었습니다. 

당연히 말쟁기질 교사들이 다루는 말도 재래종에서 교잡종으로 변해 갔습니다. 앵글로 노르만종, 헤크니종, 브르통종 등의 서양 품종의 피가 섞여 기질면에서도 온순해졌습니다. 또, '마필 거세법(1901년)' '종마 통제법(1939년)'의 집행에 의해 수말의 거세술이 널리 보급된 점도 다루기 쉬움을 조장한 것입니다.  

'말 길들이기'의 단계부터 시작해야했던 초기의 말쟁기질 교사들과 대개 사람에게 익숙해진 말에게 쟁기를 연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던 후기의 말쟁기질 교사들 사이에는 노고가 달랐음을 상상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태우는 것과 쟁기나 말괭이를 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일로 새로운 일에 말은 저항을 나타냅니다. 특히 바로 뒤의 사각지대에 연결된 불안정한 쟁기는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이 공포를 없애도록 길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길들이기가 부족한 말이 작업중에 놀라서 쟁기를 끌고 다니면서 논에서 논으로 달려 도망치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었던 듯합니다.

 

표1. 소쟁기질, 말쟁기질의 경작면적, 능력 비교

 

                          쟁기질 시간(시간)    /   평균속도(cm/초)

습논 :      소                3.8                           59.94

               말                4                              89.91 

 

건논 :      소               2.3                            73.26 

               말               1.6                          145.32

 

습논 경작면적 : 약 1,180㎡

건논 경작면적 : 약  992㎡

「牛耕ト馬耕比較試験」 『畜力利用講義』, 社団法人 大日本農会(昭和9年)을 바탕으로 작성

 

 

길들이기의 비법

후지노 씨는 자신이 실시하는 말 길들이기의 방법은 오직 자신의 경험과 공부에 의지한 자기류이기에, 기본(뼈대)만 배우는 것이 좋고 결코 모양 등에 구애되지 않도록 아래와 같이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1. 최초의 첫걸음이 중요하기에 신중히 행한다. 최초에 실패하면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

   2. 음성과 태도를 능숙하게 사용한다. 온화한 음성으로 말에게 안심감을 주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격려 또는 꾸짖음. 친숙하면서도 의연한 태도로 임한다. (당시 음성에 의한 신호가 장려되어 널리 보급되고 있었습니다.)

   3. 어루만지기와 위엄의 길들이기. 엄연한 태도로 어루만지기도 징벌도 행한다. 채찍의 사용 등 육체적 고통은 공포감을 심어주기 때문에 행하지 않고 음성으로 꾸짖는다. 

   4. 길들이기는 말에게 적당한 운동을 시킨 뒤, 말의 기분이 가라앉고나서 행한다.

그리고 불요불굴의 정신, 책임감, 자기의 기술을 믿는 것, 동물 애호의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질 있는 말에게는 각설탕이나 당근으로 길들이는 것도 좋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쇼와 초기 무렵에는 목소리, 이른바 음성에 의한 신호나 구호를 중앙마사회 등이 체계화해 농사용 소와 말이나 마차용 말의 길들이기나 사역 용어로 전국에 보급시켰습니다. 원래는 농사용 말의 길들이기에 거간꾼이나 농민이 옛날부터 이용하던 언어였다고 생각되는데, 지역에 따라 약간의 사투리가 있었던 듯합니다. 발진 "마헤", 가속 "하이하이", 오른쪽 직진 "세에", 왼쪽 직진 "사시", 정지 "도오", 후퇴 "아또", 진정이나 어루만지기 "호오라" "오오라", 발 들기 "아시" 등입니다. 경작 작업이나 마차 등은 승마와 같이 직접 몸에 닿지 않고 말을 다루기 때문에 고삐의 유도 이외의 언어 신호가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후지노 씨도 이러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직접 물리적인 힘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성립하는 관계보다 다른 차원의 상호이해를 구축하는 것이 아닐까요. 

말쟁기질 교사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강습회에는 여러 성질 나쁜 말이 끌려 왔습니다. 그가 남긴 자료에서도 역시 성질 나쁜 말을 길들이는 도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기업 비밀이라 할 수 있는 도구로부터 현장에서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말쟁기질 교사들의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말의 급소에 대한 효과가 계산된 얼핏 단순해 보이는 도구는 성질 있는 말을 순식간에 다스리는 오오츠보류大坪流 등의 옛날식 마술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질 있는 말을 교정하는 도구로는 아래와 같은 걸 들 수 있습니다. 

 

1. 입 벌리기 끈 : 재갈의 위에서 입속으로 넣고 당겨서 제어했다. (주머니에 이 끈을 숨겨둔 말쟁기질 교사는 많았던 듯합니다.)

2. 입 벌리기 새끼줄(굵은줄) : 1과 똑같은 목적의 새끼줄.

3. 혀 결속끈 : 아마 혀가 재갈을 넘는 버릇이 있는 말에게 사용했던 끈.

4. 입 벌리기 쇠고리 : 목을 드는 광분하는 성질이 있는 말의 입에 끼우고, 복대에 매는 끈으로 연결했다. 주로 마차용 말에 썼다.  

5. 재갈 : 가느다란 것이나 결이 있는 것은 제어작용이 강해 교정 재갈로 이용되었다.

6. 코끝 결속끈 : 말의 급소 가운데 하나이다. 코끝(윗입술)을 묶어 말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현재는 코 나사 등으로 윗입술을 비트는 것으로, 뇌속 엔돌핀이 분비되어 심박수가 내려가고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것으로 해명되었다.)

7. 귀덮개 : 소리를 무서워하는 공포벽이나 광분벽이 있는 말에게 사용하는 천. 심하게 광분하는 성질이 있는 말에게는 귀 고막을 찢어 외부의 소리를 단절시키는 교정법을 쓰는 경우도 있다.

8. 귀 결속끈 : 귀를 묶어 비틀면 말이 얌전해지기 때문에 성질 있는 말의 제어에 사용했다. (귀 나사와 똑같이 억제신경이 움직인다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사진5 굵은줄과 입 벌리기 끈. 후지노 씨가 사용한 교정도구 길이(왼쪽): 172cm. 말 박물관 소장

 

사진6 연결시킨 혀 결속끈과 재갈. 말 박물관 소장

 

사진7 광분하는 말에게 쓰는 입 벌리기 쇠고리. 말 박물관 소장

 

 

 

말의 힘을 쟁기에 효율 좋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견인 저항과 견인점이 고려된 적절한 멍에와 쟁기의 연결도구에 장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울러 적절한 멍에 깔개를 써서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면 말의 피로는 줄어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후지노 씨는 멍에나 멍에 깔개의 개량과 보급에도 시행착오를 계속했습니다. 

실제로 멍에는 길마(짐 안장)→산 모양 가로목 1단→산 모양 가로목 2단→후방 별도 분리로 개량을 거듭해 나아갑니다. 멍에 뼈대의 전방과 후방 사이에 있는 연결목이 2단이 되는 것으로 하단에 복대, 흉대, 당김줄을 연결하고, 상단에 고삐 걸이나무(고삐류의 길이 조정 도구)를 매달 수 있어 멍에 자체도 튼튼해집니다. 후방 멍에 뼈대의 상방이 별도 분리된 모양은 말 몸통의 굵기가 앞쪽과 뒤쪽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 말 몸에 부하를 줄이며 멍에가 장착되도록 합니다. 멍에로 인한 상처를 방지하기 위한 멍에 깔개는 볏짚부터 차차 보리짚으로 변하고, 보리짚을 묶어서 짠 것 등이 이용되었는데, 그 크기도 말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길이 등이 개량되어 나아갑니다. 멍에 만들기에 능한 후지노 씨는 멍에 깔개용으로는 간수나 소금물을 사용해 보리짚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농업 개량을 위한 범국가적 지식과 힘의 집결이 "말쟁기질 교사"라는 모습으로 구현화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림2 멍에의 개량(후지노 토쿠오 씨가 지은 <農耕馬の利用は終>에서).

 

그림3 멍에 깔개 만드는 법(후지노 토쿠오 씨가 지은 <農耕馬の利用は終>에서).

 

 

<참고문헌>

馬の畜力利用, 岡部利雄, 養賢堂, 1959

絵馬と農具にみる近代, 板橋区立郷土資料館, 1990

大絵馬ものがたり1, 稲作の四季, 須藤功, 農村漁村文化協会 2009

写真でみる日本生活図引1, たがやす, 須藤功編, 弘文堂, 1988

畜力利用講義, 社団法人大日本農会, 1934

畜産発達史, 農林省畜産局, 中央公論事業出版, 1966

農耕馬の利用は終る(稿本), 藤野徳雄, 1981, 말 박물관 소장

馬耕および馬耕鞍の製作法(稿本), 藤野徳雄, 1981, 말 박물관 소장

「馬耕教師群像」, 香月洋子, 『宮本常一とあるいた昭和の日本3 九州2』, あるくみるきく双書

田村善次郎・宮本千春 편찬, 農山漁村文化協会 2011

馬耕教師の旅 - 「耕す」ことの近代, 香月洋一郎, 法政大学出版会, 2011

働く馬, 財団法人馬事文化財団, 2002

Lagelweij E, Nelis PC, Wiegant VM and Van Ree JM. The twitch in Horses: a variant of acupuncture, Science, 225 (4667) :1172-4,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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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쟁기

 

1.  쟁기의 기원

 

 

 

쟁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괭이가 기원인지 가래가 기원인지 세계적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가래 안에는 (그림1-A)①처럼 가래에 부착한 끈을 도우미가 당겨서 경운을 돕는 것이 있고, 그것을 ②처럼 사람이 앞쪽으로 끌어서 인걸이가 생기며, ③처럼 소에 멍에를 지워 소갈이 쟁기가 발생한다는 설도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보습의 변화에 주목하면, B그림처럼 괭이는 콱 찍어 넣어 흙을 일으키고 찍어 넣어 일으키는 걸 반복하고, 가래도 밟아 넣어 흙을 일으키고 밟아 넣어 일으키는 걸 반복하여, 날끝은 공중-땅속을 왕복하는 "간헐 경운"인데 반해 쟁기의 보습은 C그림처럼 소가 끌어서 땅속을 잠수함처럼 잠항하는 "연속 경운"이라 기술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계통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쟁기는 괭이나 가래와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림2 쟁기의 기원

 

 

"인걸이 쟁기 → 소갈이 쟁기"라는 전개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걸이 쟁기는 그림2의 AB와 같이 일본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점재해 있는데, 그것들은 호리쟁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이 무언가 사정이 생겨 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할 수 없이 사람이 끌기 시작했다고 생각되며, 이는 소가 끄는 쟁기의 '파생형'으로 '원형'은 아닙니다.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라는 발전 패턴이 예상되지만, 간단한 것에는 퇴행적인 파생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최초의 형은 D그림 같이 겨리쟁기로 긴 성에를 2마리 소의 머리에 걸쳐놓은 멍에에 묶어서 당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2마리 소의 머리에 걸친 멍에와 긴 성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달구지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달구지는 C그림처럼 큰 바퀴를 갖춘 이륜차로서, 이 달구지가 주행하는 걸 바라보던 사람들 가운데 차체 대신 철제 날을 부착한 자루를 부착하면 소의 힘으로 연속해 경운할 수 있겠다는 발상을 떠올려 D그림 같은 겨리쟁기가 탄생했다고 생각됩니다.  

 

 

2. 겨리쟁기에서 호리쟁기로

 

 

 

<그림3>처럼 서아시아, 인도 서북부에서 발생한 겨리쟁기는 서쪽으로 나아가 이집트와 로마 등 지중해 주변으로 퍼졌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들어간 쟁기는 게르만 민족의 손에 의해 중후한 바퀴쟁기로 개량되어 4마리가 끄는 쟁기도 나타나며 중세 유럽 사회를 뒷받침했습니다. 

중앙아시아부터 실크로드를 경유해 중국 화북지방으로 들어간 겨리쟁기는 진과 한의 중국 통일을 생산력 면에서 뒷받침하고, 또 동쪽으로 나아가 조선 북부의 고구려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유라시아, 북아프리카는 겨리쟁기권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무렵부터 호리쟁기가 출현했습니다. 3세기 초에 황하 유역은 유목민에게 점령되어 진晉나라가 멸망하고, 화북에서 쫓겨난 한족은 장강 유역으로 달아나 남조를 건설하는데, 이 과정에서 화북의 밭농사 용구는 강남 지방의 논에서 논농사용으로 개조되어 호리쟁기의 굽은성에긴바닥(曲轅長床) 쟁기가 태어났습니다. 조선반도에서는 고구려에서 남쪽의 백제와 신라로 전해지는 과정에 호리쟁기의 곧은성에삼각틀바닥없는(直轅三角枠無床) 쟁기가 태어났습니다. 이리하여 동아시아는 호리쟁기권이 되고, 여기에서 일본으로 호리쟁기가 전해졌습니다. 

 

 

3. 쟁기의 형태와 분류

 

호펜의 다섯 분류

 

그림4 호펜의 다섯 분류

 

 

H. J. 호펜은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발행한 책에서 쟁기의 골격구조를 기준으로 다섯 분류를 제시했습니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기에 <그림4>에서 소개해보겠습니다.

(A) 성에 쟁기는 소를 향해 쭉 뻗은 성에(beam)가 기본 골격=본체가 되고, 거기에 쟁기날을 붙인 쟁기술이 끼워진 쟁기.

(B) 술 쟁기는 쟁기날을 붙인 쟁기술(body)가 본체가 되고, 거기에 성에가 끼워진 쟁기.

(C) 바닥 쟁기는 쟁기바닥(sole)이 본체가 되고, 성에와 쟁기날이 붙은 쟁기술이 따로따로 끼워진 쟁기. 바닥은 신발바닥의 sole과 동어로 일본에서는 쟁기바닥이라 부르는데, '바닥(床)'은 원래 사각의 침상을 가리키는 한자이기에 '쟁기바닥'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농학에서도 쟁기바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 형태는 인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중해 지역 등에서 쓰여 왔던 겨리쟁기입니다.

(D) 사각틀 쟁기는 성에, 쟁기바닥, 한마루, 자부지라는 네 부재가 사각틀을 구성하는 쟁기.

(E) 삼각틀 쟁기는 한마루와 쟁기자루가 교차하여 삼각틀을 만드는 유형으로, 모두 중국에서 발생한 호리쟁기입니다. 다만 삼각틀 쟁기는 동아시아에서는 F에 나오는 역삼각틀을 갖춘 조선반도의 삼각틀바닥없는 쟁기(三角枠無床犁)가 주류로 E 유형은 소수파입니다.

일본에서는 조선반도에서 F의 삼각틀 쟁기를 5세기 후반 이후에 도래인이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타이카大化 개신改新 정부는 견당사遣唐使에게서 D의 사각틀 쟁기를 손에 넣어 전국에 모형을 배포해 재래 쟁기가 되었습니다.  

 

 

 

4. 유전자의 발견

일본의 농기구가 각지에서 모양이 다른 건 예전부터 알려져 있어, 대대로 농민들이 그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맞추어 개량한 결과 다양한 형태로 부화했다는 "지형, 토질 결정론"이 믿어져 왔습니다. 쟁기의 기원에 대해서도 농학자들은 "도구는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하여 <그림 5A> <그림 5B>와 같이 일본 국내의 발달계통도가 몇 가지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이들은 현지조사를 행하지 않고 그린 계통도로서 근거가 희박하고, 거의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림5 농학자에 의한 쟁기의 일본 국내 발달계통도

 

그런데 쟁기는 "카라스키からすき"라는 호칭으로 보아도 일본의 발명이 아니라 카라(당나라, 한국), 즉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며, 일본 국내에서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지의 재래 쟁기를 조사해 보면, <그림6>에서 보는 것처럼 후쿠오카현의 안아 쥐고 조종하는 쟁기(抱持立犁)는 조선계의 삼각틀바닥없는 쟁기, 간사이 지방의 굽은술긴바닥 쟁기는 중국계의 사각틀긴바닥 쟁기로, 전래의 계보에 의하여 각지의 재래 쟁기의 모양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6 후쿠오카현 쟁기는 조선계, 나라현 쟁기는 중국계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농기구는 파손되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복사됩니다. 가령 쟁기의 내용년수를 20년이라 한다면 100년에 5번, 1000년에 50번 갱신되는데, 똑같은 형태로 복사된 결과 개체는 교체되어도 형태는 1000년을 넘어서 계승되기 때문에, 그 땅에 조선계 도래인이 와 있었는지 어떤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민간의 도구에도 유전자가 있던 것입니다.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지방 서민의 사정은 써 있지 않지만, 재래 쟁기의 전국 조사를 하면 발굴하지 않아도 시정촌들의 고대사가 복원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민간의 도구를 통한 역사학"이라 명명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5. 민간의 도구 조사에서 본 쟁기의 일본 전래

민간 도구의 조사로부터 일본으로 쟁기가 전래된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림7>을 보러 가지요.

 

삼각틀 쟁기는 도래인이 가지고 옴 ;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은 4세기 말-5세기 초의 제1기, 5세기 후바부터 6세기에 걸쳐 제2기, 7세기 후반의 제3기로 분류되는데, 조선반도 남부의 호리쟁기의 성립이 늦었기 때문에 소와 쟁기를 가지고 온 것은 제2기 이후의 도래인이라 생각됩니다.

타이카大化 개신 정부가 중국계 긴바닥 쟁기를 도입함 ; 중국계 긴바닥쟁기는 큐슈부터 간토우까지 확인할 수 있고, <와묘루이쥬쇼和名類聚抄>에 인용된 8세기 초두의 "양씨楊氏 한어초漢語抄"라는 고사서에는 쟁기바닥의 기술이 있기에 7세기에는 전해졌단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는 아직 중국과 일본 사이의 민간 교류가 없어 견수사, 견당사의 외교 시대이기에 정부에 의한 기술 도입이라 생각됩니다. 일본의 긴바닥쟁기는 쟁기들의 형태로 보아 강남계이고, 7세기 후반에 강남 지방에 갔던 견당사는 661년 하카다에 되돌아왔던 제4차 견당사뿐이라 이때 중국계 긴바닥쟁기를 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기본으로 다이카 개신 정부는 500대 정도의 정부 모델 쟁기를 만들어 각지의 코오리노카미評督(이후의 군지郡司)에게 보내 복제하게 하여 보급을 시도했다고 생각됩니다.

혼혈형 쟁기의 탄생 ; 이미 쟁기를 사용하고 있던 마을에서는 중국계 긴바닥쟁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기에 손에 익은 조선계 쟁기와의 혼혈이 일어납니다. 조선-중국 혼혈형 쟁기는 각지에서 검출되고 있습니다. 

조선계 그대로인 난민 쟁기 ; 663년의 백제 멸망, 669년의 고구려 멸망 시기에는 많은 난민이 일본으로 왔습니다. 정부의 모델 쟁기 배부는 이미 끝났기 때문에, 난민들이 제작한 쟁기는 혼혈형이 되지 않고 조선계 그대로입니다. 난민의 쟁기는 키타큐슈나 시가현滋賀県, 야마나시현山梨県에서 검출되고 있습니다. 

7세기 후반에 성립된 다양한 쟁기는 망가져도 동일한 형태로 갱신되어 민간 도구에까지 계승되었습니다. 

 

그림7 민간 도구의 조사를 바탕으로 한 쟁기의 전래 연표

 

 

6. 쟁기 농학자의 3분법과 지역사를 읽고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3분법

일본의 농학에서는 메이지 이래 <그림8A>처럼 쟁기바닥의 유무, 장단에 의하여 "바닥없는쟁기(無床犁)" "짧은바닥쟁기(短床犁)" "긴바닥쟁기(長床犁)"라는 3분법이 널리 쓰여 왔습니다. 안아 쥐고 조종하는 쟁기로 대표되는 바닥없는쟁기는 안정성이 나쁘고 다루기 어렵지만 깊이갈이가 가능한 데 반해, 긴바닥쟁기는 안정성은 좋지만 얕이갈이밖에 할 수 없는 단점을 가짐. 이 양자의 장단을 취합한 것이 근대 짧은바닥 쟁기라는 분류입니다. 이 분류법에서는 깊이갈이가 가능한지 어떤지를 결정짓는 것은 소와 말의 견인력이라는 중요한 점이 누락되어 있는데, 농업의 생산력 향상에서 근대 일본을 뒷받침했던 농학계의 불타는 의욕을 반영한 분류법으로 이제는 문화재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쟁기는 1950년대 중엽부터 경운기로 교체가 진행되어, 지금은 박물관이나 자료관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들 제1선을 은퇴한 도구류는 '민간 도구'라 부르고 있으며, 민간 도구가 된 쟁기의 역할은 토지를 경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를 후세에게 전하는 이야기꾼으로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쟁기의 역할이 지역 역사의 이야기꾼이라면 그것에 상응하는 분류법이 있을 터입니다. 그리 생각해 제기한 것이 <그림8B>에 나오는 '조선계 삼각틀 쟁기' '중국계 사각틀 쟁기' '조선, 중국 혼혈형 쟁기'라는 "새로운 3분법"입니다. 이들은 6-7세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재래 쟁기의 형태를 알 수 있다면 그 지역의 6-7세기 역사를 복원할 수 있고, 다음과 같은 "쟁기 형태로부터 지역 고대사를 복원하는 공식"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조선계 삼각틀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백제, 고구려 난민이 건너와 개척한 땅과 그 주변

중국계 사각틀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정권을 지지하는 지역 또는 도래인이 오지 않았던 지역

한중 혼혈형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5-6세기 제2기 도래인이 건너와 개척한 땅과 그 주변

 

그림8 쟁기의 3분법

 

다음 장에서는 이 공식을 단서로 도쿄 농업대학이 수집한 쟁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 도쿄 농업대학이 수집한 쟁기

도쿄 농업대학의 민간 도구는 이른 시기에 전국 규모로 수집했기 때문에 좋은 자료가 모여 있습니다. 그 뒤 시정촌 합병이 진행되었는데, 수집지를 세밀하게 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옛 시정촌으로 표기하겠습니다.

 

●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중국계 사각틀 쟁기

 <그림9>에 게재된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쟁기는 성에, 한마루, 자부지, 쟁기바닥의 4부재로 구성된 사각틀긴바닥 쟁기로 E의 강남 쟁기가 모델입니다. 강남 쟁기의 특징인 무지개 같이 구부러진 굽은성에는 F그림처럼 소의 목과 쟁기 끝을 연결한 힘의 작용선까지 견인점을 낮추어 안정된 자세로 주행할 수 있도록 한 고안입니다. 

나라현 쟁기의 성에, 손잡이의 교점에 4개의 쐐기가 겹쳐 보이는 건 D그림의 경운 깊이의 조절장치로, 현상에서 4개의 쐐기는 성에의 윗쪽에 박아 넣기 떄문에 성에 끝쪽의 견인점은 올라가 소가 끌게 하면 쟁기 끝은 내려가서 깊이갈이하는 경향이 되고, 그 반대로 쐐기를 아랫쪽에 박아 바꾸면 얕이갈이하는 경향이 되는 이치입니다.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쟁기에서 서로 다른 것이 손잡이의 모양. 나라현 쟁기는 T자형 손잡이로 타카이 개신 정부가 보급한 키나이畿内의 정부 모델 쟁기의 충실한 복제로서, 정권 측근의 정권 지지율이 높았던 걸 반영합니다. 교토 쟁기의 손잡이가 위로 늘어난 것은 조선계 삼각틀 쟁기의 자부지를 모방한 것. 아마 이 주변에는 도래인이 와 있어서 삼각틀바닥없는쟁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 익은 조선계 손잡이를 남긴 것으로, 중국계 90%, 조선계 10%의 혼혈형입니다. 와가야마현 쟁기는 별도의 자재로 손잡이를 붙였는데, 이것도 자부지의 뒤에서 잡는 방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중국계 90%, 조선계 10%의 혼혈형입니다.

90%가 중국계, 즉 정부 모델 쟁기 계통이란 것은 정권 지지율이 높다는 반영으로, 탄바丹波도 키이紀伊도 키나이 주변 지역으로 7세기 아스카飛鳥 정권의 지지자들이 있었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9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중국계 사각틀 쟁기

 

 

●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徳之島의 사각틀긴바닥쟁기

<그림10A>은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의 쟁기로, 사탕수수밭의 사이갈이 김매기용으로 1950년 무렵까지 사용되던 것. 전장 131cm의 작은 것으로, 위의 나라현 쟁기의 전장은 281.5cm와 비교해 절반 이하로 작습니다. 이 유형의 쟁기는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부터 오키나와沖縄 본섬, 사키시마先島 제도까지 널리 쓰였으며 "남쪽 섬(南島) 쟁기"라고 불렸습니다. 그럼 이 쟁기는 어떤 사정으로 생겼던 것일까?

남도 쟁기는 성에, 한마루, 자부지, 쟁기바닥의 네 부재로 구성된 사각틀 쟁기로서, 이것은 중국계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남도의 사람들이 중국에 나갔다면 보았을 쟁기가 <그림10B>의 강남 쟁기로 똑같은 쟁기가 가고시마현의 일부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남도 쟁기와는 상당히 형태가 다릅니다. 중국 쟁기는 무지개 같이 구부러진 성에를 가지고 있는데 남도 쟁기는 비스듬히 상향한 곧은성에입니다. 상향한 곧은성에는 C그림처럼 소의 멍에를 겨냥한 각도로, 남도 쟁기의 제작자는 중국 쟁기의 실물 견본이 수중에 없이 막연한 이미지에 바탕해 재현 제작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상향한 곧은쟁기를 소에게 끌게 하면 C그림 같이 쟁기 몸체는 앞으로 젖혀지게 되고,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자부지를 앞으로 당겨야 하며, 그에 적응한 자부지가 ②의 앞으로 기운 자부지입니다. B그림의 강남 쟁기에서는 흙덩이를 오른쪽으로 넘기는 볏이 달려 있는데, 남도 쟁기에는 볏이 없습니다. 

⑥은 펜촉형 보습으로 중국 쟁기는 주물의 껍질이 붙은 삼각판이지만, 남도 쟁기는 단조품으로 모양도 다릅니다. 쟁기 제작제가 중국 보습의 견본을 보지 않고 대장간에서 두드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남도에서는 소가 먼저 부려졌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는 소로 논밭을 갈고 있으니 이것에 쟁기를 끌게 하자"라고 생각해, 어슴푸레한 기억에 기반하여 재현 제작한 쟁기가 이 남도 쟁기로서, 그것이 아마미오시마부터 오키나와 본섬과 사키시마 제도까지 퍼졌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10 가고시마 도쿠노지마의 사각틀 쟁기

 

 

카가와현香川県의 외다리바닥있는쟁기

<그림11A>는 카가와현 미토요군三豊郡 오노하라쵸大野原町(현 칸논지시観音寺市)에서 사용되던 쟁기로 호칭은 소괭이. 이 쟁기는 윗부분은 성에, 자부지, 한마루의 삼각틀로서 조선계 삼각틀 쟁기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랫부분에는 길이 93.7cm의 완전한 쟁기바닥이 붙어 있어, 이 쟁기바닥은 중국계 사각틀 쟁기의 기본적인 부품입니다. 즉 오노하라 쟁기는 C그림에서 보듯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의 구조에 중국계 쟁기바닥을 붙여준 전형적인 혼혈형입니다. 중국계 사각틀 쟁기는 한마루와 자부지가 쟁기바닥과 접합되어 사각틀을 구성하고 있는데 반하여, 이 외다리바닥있는 쟁기가 가진 정보로부터 카가와현의 6-7세기 역사를 복원해 보겠습니다. 

5세기 말부터 6세기 무렵, 카가와현의 평야부에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이 정착했습니다. 야마토 정권 아래 조선반도로 출병했던 현지 호족들이 초빙한 것이겠죠. 그들은 소와 삼각틀바닥없는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말로 말괭이를 끌게 하던 현지 사람들은 처음 본 쟁기를 '소괭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7세기 후반, 타이카 개신 정부는 반전수수班田収授를 실행하기 위하여 관련 정책으로 중국계 사각틀 쟁기의 실물 모형=정부 모델 쟁기를 각지의 코오리노카미(이후의 군지)에게 보내 보급을 명했습니다. 정부 모델의 긴 쟁기바닥은 보기에도 안정감이 좋을 듯하여, 사람들은 손에 익은 삼각틀바닥없는 쟁기에 쟁기바닥을 붙였다. 혼혈형 외다리바닥있는 쟁기의 탄생입니다. 평야부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헤이안 시대 무렵, 분가해 이주함에 따라 산간부의 개척이 왕성해졌습니다. 도쿠시마현, 에히메현과 접한 산간의 오노하라 마을에는 이 시기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겠지요.

B그림의 코토히라쵸琴平町 쟁기도 같은 형태의 외다리바닥있는 쟁기로, 이쪽은 한마루가 철제 볼트인 개량형입니다.

 

그림11 카가와현 외다리바닥있는쟁기

   

 

사이타마현埼玉県과 도치키현今市市의 널판지 볏 부착 삼각틀 쟁기

<그림12A>의 사이타마현 가조시加須市의 쟁기는 전장 281cm인 장대한 몸체로, 구조를 보면 조선계 삼각틀이지만 쟁기날의 뒷면 부근은 길이 54cm의 쟁기바닥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조선계 삼각틀 쟁기에 쟁기바닥을 더한 혼혈형입니다. 또한 경운되는 흙덩이를 왼쪽으로 뒤집는 널판지 볏이 붙어 있는데, 이 목제 볏도 정부 모델 쟁기인 일목一木 볏의 각색으로 조선계 70%, 중국계 30%의 혼혈형입니다.

 

가조시 쟁기는 삼각틀 쟁기로 조선계이지만, 쟁기 몸체는 장대하며 그 원인을 D그림으로 보러 가겠습니다. 조선반도의 삼각틀바닥없는쟁기는 자부지가 서 있어 보습은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아 있습니다. 이 조선반도 쟁기의 보습은 주조품으로 뒷면은 껍질로 되어 있어, 나무 부분인 자부지를 꽂아 쐐기로 고정하기 때문에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아도 경운할 수 있습니다. 자부지가 서 있기에 쟁기 몸체는 짧은 쟁기가 됩니다. 짧은몸체 쟁기에 익숙한 도래인은 일본에 와서 보니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주조 보습이 없고, 단조 보습만 손에 넣을 수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단조 보습은 목요공 괭이처럼 나무 부분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끼워넣기 때문에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으면 떨어져나갑니다. 그래서 얕은 각도로 지면에 닿도록 한 결과, 쟁기 몸체가 길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긴몸체삼각틀 쟁기는 조선반도에는 없는 모양으로, 도래 제1세대의 노고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림12B>의 도치키현 이마이치시今市市의 쟁기는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쟁기 몸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몸체가 누워 보습은 얕은 각도로 지면에 닿아 있으며, 도래 당시의 단조 보습에 맞춘 것입니다. 

A의 가조시 쟁기도 B의 이마이치시 쟁기도 현재는 C그림처럼 주조 보습이 붙어 있습니다. 이거슨 14-15세기 무렵에 주조꾼이 농촌을 영업하며 돌아다녀 주조 보습으로 교체된 것으로, 단조 보습의 모양이 남아서 큰 표지가 되었습니다. 중국과 조선반도의 주조 보습에는 큰 목덜미 선이 없습니다.  

 

그림12 사이타마현과 도치키현의 삼각틀바닥있는쟁기

 

 

 

군마현群馬県 다카사키시高崎市의 카이형甲斐型 쟁기

<그림13>의 AB 모두 다카사키시 카미나미에上並榎의 쟁기이고, 어느쪽이든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정부 모델인 사각틀긴바닥쟁기의 영향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회성인 정부 모델 쟁기의 배포가 끝난 뒤에 도래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며, 마지막 도래의 파도인 백제, 고구려 멸망에 따라 난민이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됩니다.

다카사키시의 쟁기는 2대 모두 큼직하고,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의 자부지 높이가 100cm 안팎인데 반하여 A쟁기의 자부지 높이는 128cm로 이상한 크기입니다. 사실 이것과 흡사한 쟁기가 C그림처럼 야마나시현에서 많이 보입니다. 유사점은 ①순수 조선계 삼각틀 쟁기이고, ②자부지의 높이가 120-130cm에 이른다는 점, ③성에와 자부지의 교차점의 약간 아래에 짧은 좌우 손잡이가 있는 점, ④자부지의 하부는 귀이개 모양 보습인 점 등으로부터 다카사키 쟁기 AB는 카이국에서 온 이주민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마나시현에서 이 큼직한 삼각틀 쟁기는 '부부 쟁기'라 부르며, 아내가 소 대신 어깨끈으로 끌고 남편은 자부지를 감싸안듯이 어깨에 걸치고 좌우 손잡이를 쥐고서 쟁기를 조종하면서 앞으로 기운 자세로 넘어질듯이 쟁기를 밀며 쟁기질했습니다. 남편이 자부지를 감싸안기 때문에 자부지는 길고 높아졌습니다. 이로부터 카이국에서의 개척은 당초 소와 말을 구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말로도 끌게 했지만, 큰 쟁기 몸체는 그대로 20세기까지 계승되었습니다. 

야마나시현에 분포된 중심은 남알프스 산록으로 고마군巨麻郡(고려군高麗郡)이라 불렀던 지역입니다. 고대에 고려라고 하면 고구려로서, 고구려 난민이 소와 말을 구하지 못한 와중에 개발한 것이 야마나시현의 큼직한 부부 쟁기입니다. 전국시대에 반농반무半農半武의 지방 토착 무사는 무장을 따라서 각지를 옮겨다니며 싸웠습니다. 다카사키시의 카이형 쟁기는 그러한 전국시대 무사가 이동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림13 군마현 다카사키시의 카이형 쟁기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와 그 전파

<그림14>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 부르는 키타큐슈계의 쟁기이고, <그림13>의 카이형 쟁기와 똑같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정부 모델인 사각형긴바닥쟁기의 영향은 전혀 볼 수 없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따라 난민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됩니다. A는 나가사키현의 쓰시마에서 사용되던 재래 쟁기로 작은 조선계 삼각틀 쟁기입니다. 이 삼각틀바닥없는쟁기는 후쿠오카 평야에도 널리 분포하고 있어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 불러 왔습니다. 지리적 위치로 미루어보면, 663년에 멸망한 백제의 난민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됩니다.

메이지 초기의 일본에서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율은 서고동저로, 도호쿠 지방에서는 소와 말 쟁기질을 행하지 않고 츄우부中部와 칸토우関東 지방에서도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율은 낮았으며, 또 쟁기를 쓰지 않는 습논도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후쿠오카현 독농가 하나시온리林遠里는 현지에서 사용해 왔던 안아 쥐고 서는 쟁기가 깊이갈이에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이를 보급해 근대 일본을 지탱하고자 사설 칸노우샤(勸農社)를 결성, 젊은이를 모아 말 쟁기질 교사를 육성하고 '마른논 말 쟁기질'이란 구호 아래 말 쟁기질 교사를 전구으로 파견해 쟁기질의 보급에 힘썼습니다.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쟁기질이 없던 도호쿠 지방이나 보급율이 낮았던 츄우부와 칸토우 지방에서 환영받아 소와 말 쟁기질이 침투해 나아갔습니다. 

도쿄 농업대학에서는 이 시기에 동일본에 퍼졌던 안아 쥐고 서는 쟁기가 수집되어 있습니다. B는 아키타현 유리군由利郡의 것, C는 이바라키현茨城県 미토시水戸市, D는 니이가타현新潟県 사도군佐渡郡의 것입니다. 근대 일본을 짊어지고 각지로 향한 말 쟁기질 교사의 활동 흔적을 수집된 쟁기로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이 도쿄 농대 수집품의 훌륭한 점입니다. 

D의 배경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안아 쥐고 서는 쟁기에는 긴 수평 막대가 좌우로 튀어나와 있고, 좌우의 손을 바꿔 쥐며 흙덩이를 좌우로 뒤집었습니다.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미흡하지만 양손용 쟁기였습니다. 또한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바닥없는쟁기의 대표처럼 이야기되지만, 짧은바닥 쟁기 유형도 있었던 점을 수집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림14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와 그 전파

 

 

 

근대 짧은바닥쟁기

<그림15>에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대신해 근대 쟁기질의 주역이 된 근대 짧은바닥쟁기를 모아 보겠습니다. 큐슈에서는 고대 이래 바닥없이 안아 쥐고 서는 쟁기 외에 짧은바닥 쟁기 유형의 쟁기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1900년 쿠마모토현 오쓰 스에지로大津末次郎가 짧은바닥 쟁기 유형의 재래 쟁기를 기반으로 D그림 같이 한마루를 철제 볼트로 만들고 나사를 조여 깊이갈이와 얕이갈이의 조절이 가능하도록 하며, 성에와 자부지의 접합부는 철제 접합부로 만들어 나사로 쟁기질 너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근대 짧은바닥 쟁기를 개발, 특허를 받았습니다. 

볼트 한마루의 나사를 조이면 성에 끝의 봇줄걸이가 내려가고, 소와 말이 끌면 성에의 끝은 끌어올려져 그와 연동해 보습이 올라가 얕이갈이하게 된다. 그 반대로 나사를 풀면 깊이갈이하게 됩니다. 철제 접합부의 나사를 움직여 성에의 근원을 중심위치로부터 벗어나게 하면, 성에의 끝이 좌우로 틀어지기 때문에 소와 말이 끌면 보습은 약간 좌우로 벗어나게 되어 쟁기질 너비가 넓어집니다. 

오쓰의 특허는 A유형의 왼쪽 뒤집기 전용 고정형 쟁기였는데, 이듬해에는 나가노현의 마츠야마 하라조松山原造가 지렛대를 움직여 좌우 어느쪽으로도 뒤집을 수 있는 B와 같은 전환형 쟁기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근대 짧은바닥쟁기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대신하는 근대 쟁기가 되어, 다이쇼大正와 쇼와昭和 시기에 서서히 안아 쥐고 서는 쟁기나 재래 쟁기를 대신해 나아갔습니다. 

E의 사진에서 보면, 고정형 쟁기에서는 쟁기꾼이 왼손으로 자부지 상단을 쥐고 오른손으로 비스듬한 손잡이를 아래에서 잡고 들어올리는 듯이 하여 쟁기 몸체를 왼쪽으로 기울이면서 주행해 흙덩이를 왼쪽으로 뒤집어 나아갑니다. 전환형 쟁기에서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로부터 계승한 수평 손잡이가 있어 쟁기꾼은 지렛대로 볏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자부지 상단과 수평 손잡이를 쥐고서 자부지를 기울여 좌우 어느쪽으로도 뒤집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C는 깊이갈이를 목표로 한 3단 갈이 쟁기. 일반적으로는 2단 갈이 쟁기이지만 이것은 3단으로, 근대 짧은바닥 쟁기의 궁극적인 형태입니다. 

 

그림15 근대 짧은바닥쟁기

 

 

● 개량 재래 쟁기

메이지 말기에 개발되어 다이쇼, 쇼와 시기에 보급된 근대 짧은바닥 쟁기는 재래 쟁기에 비해 작고 회전 반경이 작으며 다소 경운 깊이가 깊어지는 이점이 있는 반면, 안정성에서는 재래 쟁기 특히 사각틀긴바닥쟁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맥류의 두둑짓기도 재래 긴바닥쟁기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없었습니다. 학계에서는 근대 짧은바닥쟁기의 등장으로 재래 쟁기가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운기가 출현할 때까지 근대 짧은바닥쟁기와 재래 쟁기를 구별해 사용하던 지역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재래 쟁기에는 근대 짧은바닥쟁기에 없는 장점도 있었기에, 근대 짧은바닥쟁기의 장단을 취하는 형태로 개량된 개량 재래 쟁기가 각지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림16>의 A는 도야마현에서 제작된 미치즈카三塚 쟁기로, 보습을 앞뒤 반대로 장착하여 볏으로 만든 건 안아 쥐고 서는 쟁기의 아이디어입니다. B는 후쿠이현에서 사용되던 쟁기로, 성에를 굽은성에로 바꾸기만 한 미치즈카 쟁기의 모방 쟁기. 평판이 좋았던 미치즈카 쟁기의 복제 쟁기입니다.

D그림에서는 고삐걸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호쿠리쿠北陸 지방은 말쟁기 지대로 에도시대부터 말에게 재갈을 물리고 2개의 고삐로 조종했습니다. 고삐가 늘어지면 말의 다리에 걸려 위험하기에 한마루를 꿰는 나무못을 직사각형 널의 고삐걸이로 삼고, 왼쪽 고삐는 구멍을 통과시키고 오른쪽 고삐는 벗어나는 걸 방지하는 갈고리가 달린 가로대로 받치고 있었는데, 귀여운 물고기 모양도 나타났습니다. 물고기 모양은 이로리囲炉裏의 냄비 갈고리에 자주 사용되는 디자인으로, B의 후쿠이 쟁기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C는 다카사키의 개량 재래 쟁기로 수수한 쟁기이지만 판자 볏으로 바꾸어 철제 곡면의 볏을 일으켜세운 점과 2.5m를 넘었던 재래 쟁기의 전장을 1.7m 안파의 크기로 줄인 점이 개량점이겠지요.

이외에도 효고현兵庫県 이타미시伊丹市에는 재래 긴바닥쟁기에 철제 접합부를 붙인 개량 긴바닥쟁기가 있고, 시가현 고토湖東의 좀 작은 가을갈이 쟁기 등 각지에서 개량 쟁기가 제작되어 현지의 경제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림16 개량 재래 쟁기

 

 

 

8. 민간 도구는 역사자료

지금까지 재래 쟁기와 근대 짧은바닥쟁기, 개량 재래 쟁기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도쿄 농업대학 수집자료의 훌륭함은 전국 각지의 쟁기를 모은 것이기에 도쿄 농업대학 자료만으로도 고대부터 근대까지 일본 각지의 쟁기질 역사, 농업기술사, 나아가서는 지역 고대사나 전국시대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재래 쟁기로부터 지역마다의 개성 있는 고대사를 복원할 수 있었던 건 "민간 도구를 통한 역사학"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의 농기구가 각지에서 모양이 다른 건 그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맞추어 개량을 거듭한 결과라는 "지형, 토질 결정론"이 믿어져 왔습니다. 그것이 실수라는 걸 깨달은 각지의 자료관 수장고를 조사해 역학적으로 불합리한 쟁기를 개량하지도 않고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보고나서입니다. 왜 개량하지 않은 걸까, 그것은 전통적 농촌사회에서는 농기구가 망가지면 동일한 모양으로 갱신한다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간 도구 유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전국적인 재래 쟁기 조사로부터 타이카 개신 정부의 긴바닥쟁기 도입 정책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타이카 개신 정부는 견당사에게 입수한 쟁기를 바탕으로 중국계 사각틀 정부 모델 쟁기를 만들어 각지의 코오리노카미(이후의 군지)에게 보내서 보급을 도모했습니다. 그 때문에 쟁기질의 처녀지에서는 정부 모델 쟁기가 계승되어 도래인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를 쓰고 있던 지역에서는 혼혈형이 탄생하고, 정책 시행 뒤에 도래한 백제와 고구려 난민이 정착한 곳에서는 정부 모델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조선계 삼각틀 쟁기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민간 도구는 지금까지 유형민속문화재로 취급되어 조부모 시대의 삶을 전하는 민속자료로 여겨져 왔는데, "민간 도구를 통한 역사학"에서 재래 쟁기의 형태로부터 시정촌별 개성 있는 고대사가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민간 도구는 역사자료입니다. 지역 유산으로서 모두의 손으로 지켜 나아갑시다. 

 

 

 

코우노 미치아키河野通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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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농기구란? 그 역사

 

 

온고지신 - 일본인은 메이지 시기까지는 중국, 메이지 이후는 서양, 그리고 전후에는 미국의 문화를 도입한 것이 일본의 근대화라고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그때 좁은 일본에서 오래된 도구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은 선진국의 기술, 도구를 도입하는 데 곤란을 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1957년 池田 내각 시대는 농가의 소득이 도시 급여소득자의 절반쯤입니다. 그래서 농가의 소득도 급여소득자와 마찬가지로 높이려 하여 농가의 소득 배증을 어떻게 할까. 1960년에 농업기본법이 제정되어 이에 기반하여 1962년에 전국에서 제1차 농업구조개선사업이 개시되었습니다. 농작업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해 농지의 경지정리, 습지의 암거 구축, 두렁의 정비, 용배수로의 정비, 관개시설의 설치, 농기구의 정비 등이 행해졌습니다. 이때까지 동력원으로서 인력과 축력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경지정리에 의하여 동력원이 석유발동기나 가솔린엔진을 휴대한 경운기, 트랙터 등을 도입해 작업의 효율화와 하나의 경지당 재배면적이 확대되었습니다.

 

벼농사를 보면 1945년 전반까지는 물못자리에서 온탕소독과 싹틔우기를 행하고 수온이 20도 정도가 되고나서 파종을 행했습니다. 그 뒤 기름종이에 파종한 모판에 왕겨훈탄을 뿌려 그 위를 덮었다. 그에 의하여 서리 피해를 막고, 모의 발육을 촉진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종래보다도 10일에서 20일 모내기를 일찍 할 수 있었습니다.

 

보온 절충 못자리의 최초인(나가노현 카루이자와軽井沢 하기와라 토요지萩原豊次 씨가 1931년에 개시) 기름종이는 1회나 2회밖에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 폴리에틸렌 필름이 도입되어 몇 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뒤 1955년 전반에는 농업용 비닐 필름이 도입되어 대나무대를 이용해 비닐 터널 재배로 변했습니다. 보온 절충 못자리가 도입되고나서부터 손모내기 모는 파종 뒤 45일 전후에 모내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약 1달 정도 모내기가 빨라졌습니다. 모든 농작업도 빨라져 태풍이 오는 철을 약간 피할 수 있게 되어 수확량 증대가 예상된 한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 뒤 농촌의 생활양식에도 변화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생활개선의 일환으로 정월에 장식용 소나무를 없애고 종이에 소나무 그림을 인쇄해 그걸 대용으로 붙였습니다. 농작업복은 일본식에서 서양식으로 변했습니다. 주거도 서서히 고쳐 지어서 일본식에서 서양식으로 일부는 남았지만 변화했습니다. 

 

주거나 농막의 개조에 의하여 사용하지 않게 된 농기구는 폐품이 되어 철제품은 철 부스러기로 재이용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이를 모아 문방구 등의 구입비로 충당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종래 사용되었던 농기구는 급속히 소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작물 재배, 가축의 사육에서는 그 기본이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크게 변화한 것은 동력원이 인력과 축력에서 동력으로 변화한 것, 또 플라스틱 필름이 개발되어 농업에 도입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농기구 기능은 바야흐로 "옛것을 찾아 새로운 것을 안다." 이것의 기본이 되는 도구가 옛 농기구입니다. 1967년 제2차 농업궂개선사업이 개시되고, 더욱 농촌이 정비되어 잉여노동력은 도시노동자로 이행되었습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줄어들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농촌의 자연환경은 서서히 부정적 방향으로 향한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논에서 물이 사라져 마른논이 되어 종래의 겨울 담수 논은 사라졌고, 많은 생물들이 서식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농작업의 효율화, 농산물의 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한 농업이 지금 재검토되고 있습니다.

 

농기구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 속의 일원으로 공생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크게 통감할 수 있습니다.

 

 

 

우메무로 히데오梅室英夫 

    

 

 

2장   그림에서 보는 땅을 가는 농업기술

 

농서는 근대 농학이 성립하기 이전의 농업기술이나 농민의 생활에 대한 저작물입니다. 근대 이후는 농학서이지 농서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농서의 성립은 중국 농서의 영향을 받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조선과 류큐의 농서가 성립되는 데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받아 왔습니다. 

 

남북조 시대인 6세기 전반의 북위北魏에서 성립한 가사협의 <제민요술>은 밭농사 농업의 기술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나라 시대의 육구몽陸龜蒙의 <뢰사경耒耜經>은 강남의 논에서 사용한 역축 농기구의 해설입니다. 1154년에 남송南宋에서 간행된 진부陳旉의 <농서農書>는 논 농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313년 왕정王禎의 <농서農書>는 화북, 화중의 농법을 비교한 재래 농기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639년 간행된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는 고래의 농학자의 설과 당시 유럽의 농업기술을 소개한 농정의 집대성입니다. 이상이 중국의 논과 밭농사에 관한 농기구를 일본에 소개한 농서입니다.

 

한편, 일본에서 농서의 성립은 16세기 후반인 1629년부터 1654년 사이의 전국시대 이요伊予의 무장 도이키 요요시土居淸良가 마츠우라 소우안松浦宗案에게 농업에 대하여 설문하여 그에 답한 것을 마츠우라가 적어 올린 <청량기淸良記> 30권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특히 제7권은 농업에 대하여 기재되어 이를 <친민감월집親民鑑月集>이라고 별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1682년에는 미카와三河, 엔슈遠州 지방의 농업기술을 정리한 전15권 작자 미상의 <백성전기百姓伝記>. 1684년에 사세 요지에몬佐瀬与次右衛門이 지은 <아이즈농서会津農書>는 상권은 벼농사, 중권은 밭농사, 하권은 농가경영의 3권으로 구성되어 아이즈의 농업기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697년 미야자키 야수사다宮崎安貞가 지은 <농업전서農業全書>는 키나이畿内를 중심으로 해 산요우도山陽道, 키이紀伊 지방 등을 조사해 농민에게서 듣고 적은 걸 바탕으로 전10권을 저술하여 일본 최초의 종합적 농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농학자 서광계의 영향을 받아 농기구 그림은 그려놓았지만 그 사용법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에도江戶 시대의 3대 농학자(미야자키 야수사다,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의 한 사람인 오쿠라 나가츠네는 미야자키 야수사의 영향을 받아, 1822년에 각지를 여행한 견문에 기반하여 42종류, 110점의 농기구에 대하여 <농구편리론農具便利論>(그림1)을 저술했습니다. 그 내용은 농기구의 각 부분의 치수, 각도 및 무게와 지면에서부터 자루의 끝까지의 길이, 사용처의 토성까지 농기구와의 관계를 농민도 읽기 쉬운 가나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용법이 난해한 농기구에 대해서는 그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없던 획기적인 농서로 메이지明治 30년대까지 복각간행되었습니다. 그 이후도 서양 농기구에 관한 서적이 출판되었는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농구편리론>(그림2)이 인용되어, 명저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1
그림2

 

 

이 이전에 사츠마薩摩 번주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의 의향에 의해 1804년 소한曾槃이 지은 <성형도설成形圖說>은 농업의 백과전서라 불리는데, 그곳의 해설은 만엽집과 농정전서로부터 인용하고, 번의 식산흥업을 위한 서적이기도 하며, 무사의 교양서라고도 불렸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농업에 정통한 지방의 독농가, 즉 메이지 시대의 3대 노농의 하나인 <노농만경록老農晩耕錄>의 저자 이시카와 리치노스케石川理紀之助는 아키타현秋田県 센보쿠仙北 지방의 가난한 마을에서 구제 지도를 행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벼농사, 밭농사 등에 대하여 다수의 농서가 간행되어 농업기술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 근대까지, 농민은 풍년만작豊年滿作(그림3)을 염원하고 사계절마다 벼농사의 농경방법을 그린 <사계경작도四季耕作圖>가 그림의 첫머리에 받아들여져 각지의 신사에 봉납되어 그 몇 개인가가 현존해 있습니다. <타와라카사네たわらかさね 경작 두루말이 그림>(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두, 작자 미상)은 성형도설과 마찬가지로 다이묘와 무가의 자제에게 농업의 과정을 가르치기 위하여 농경의 연중행사를 그렸습니다. <광익국산고広益国産考>(1844년 오쿠라 나가츠네 저)는 전7권, 그의 생애의 견문이 집대성된 서적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6년 일본은 4월부터 8월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각 부현에서 박물국에 제출된 출품물의 도설을 박물국  여러 산물의 제조과정을 중심으로 도해한 <교초敎草>(그림 4, 5)가 있습니다. 

 

 

 

메이지 벼농사 농법은 토지개량에 의한 습논의 건논화, 쟁기를 이용하던 우마에 의한 깊이갈이, 시비 기술의 개량, 볍씨의 소금물가리기나 좁고 긴 장방형 물못자리 등이 보급되어 종래에 비해 그 수확량과 노동생산성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이 농법을 교초에 의하여 보급하려고 시도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1838-1916)입니다. 또 다나카는 일본에 박물관을 탄생시킨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다나카 요시오(농대의 전신 도쿄 고등농학교의 초대 교장)은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물에 즉한 지식의 개명"으로, 더 상세한 자료정보의 제공방법으로 서적이나 그림(그림 6, 7, 8, 9, 10)이 필요하다고 기술합니다. <교초>는 그에 해당하는 것의 하나입니다. 올바른 정보란 실물과 활자와 그림이 조합되어야 진실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사상은 농대의 도서관 창설 당시부터 표본(실물자료), 도서, 도해(족자에 탁본, 현재는 사진, 영상)의 세 기둥으로 정보가 성립된다는 점을 개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학을 최우선으로 삼는 농학, 농업에서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으로,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합니다. 

 

 

 

농업의 발전에는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걸 안다"는 이념에 따라 전통의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독창적인 실학이 되는 것입니다(그림 11, 12, 13).

 

 

 

 

 

 

 

제3장   괭이

 

   1.  괭이의 기원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 년 전에 농경 기원의 하나로 뿌리채소 농경문화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얌이나 타로를 재배, 수확하기 위한 도구로 봉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뒤지개掘棒(하라노 코오조原野耕三 씨에 의하면 동남아시아의 화전 농경을 행하는 소수민족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음)라 부르고, 현재도 사용하는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현재의 괭이는 이 뒤지개의 끝부분이 넓어지고 현재의 발쟁기(踏鋤) 형태가 된 뒤, 결국은 자루에 날판(刃床) 부분이 덧붙여진 괭이가 되었습니다.  그뒤 뿌리채소 재배는 서남아시아에 도달하고, 맥류 농사와 우마의 가축화가 행해져 말과 소에 의한 쟁기질에 의한 경작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그럼 일본에서는 언제쯤부터 괭이가 존재했을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1400년 전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 농경이 존재했습니다. 야요이 시대의 전기에는 목욕통(날판 부분)에 구멍을 뚫고, 곧은 자루를 장착한 괭이가 후쿠오카현의 이타즈케板付 유적, 시즈오카의 토로登呂 유적, 미에현 츠시津市의 노소納所 유적, 비사이시尾西市 오카시마岡島 유적, 토요하시시豊橋市 우리고爪郷 유적, 토요타시豊田市 가와하라川原 유적 등에서 목제 괭이가 출토되었습니다. 아이치현 기요스시淸須市의 아사히朝日 유적(중기 후엽)에서 출토된 괭이에 양끝을 접어 구부린 철날을 장착한 흔적이라 생각되는 목욕통 부분이 보고되었습니다. 이들 출토품의 재질은 북가시나무, 가시나무, 주목 등입니다. 현재도 날판 부분의 철을 제하면 목욕통과 자루의 재질은 야요이 시대와 바뀌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타즈케 유적에서 발굴하다 도랑의 벽면에서도 철날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로 변천했다고 합니다만, 일본에서는 청동기 시대(야요이 후기부터 일본제 청동기가 나타남)가 없이 야요이 시대에 철기문화가 벼농사와 함께 한반도로부터 이입된 것이라 합니다. 

 

그럼 야요이 문화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물으면 오카자키 타카시岡崎敬 씨의 고고학적인 자료에 기반하면 양자강 하류(강남 지방)에서 해안을 따라 북상하고, 산동반도, 조선의 서남해안을 거쳐서 북규슈에 전해졌다는 설이 정설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설을 이시게 나오미치石毛直道 씨는 돌칼을 이삭 자르는 데 사용하며 이는 동남아시아에는 없는 도구이고, 세계에서 동아시아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석기라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또, 야요이 시대에는 목제의 괭이는 갈이용과 진흙을 뒤섞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 것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키노시타 타다시木下忠 씨의 일본의 고고학 3권 <농구農具>에 의하면 경운용 찍는괭이(打鍬)는 자루와 날판 사이 부분의 폭이 좁고 두터우며 자루가 이루는 각도는 60-80도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인 진흙을 뒤섞고 고르는 데 쓰는 건 자루와 날판 사이 부분의 폭이 찍는괭이에 비해 넓고 얇으며, 자루가 이루는 각도는 40도 정도의 당기는쟁기(引鍬)입니다. 이외에 날이 몇 개인 갈래괭이(股鍬)나 흙의 이동, 구멍 파기 등에 쓰는 발쟁기 등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출토품은 모두 목제입니다.

 

그럼 언제쯤부터 철이 괭이나 낫에 쓰였는가 하면 츠데 히로시都出比呂志 씨에 의하면 1세기 말에 한반도에는 그 유사품이 없고 일본 독자의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에서는 철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이입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일반에는 보급되지 않고 일부의 계층만이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5세기가 되면 한반도의 삼국시대(신라)의 철제 낫과 같은 것이 일본에도 존재했습니다. 중국 화북의 전국시대에는 철제 농기구가 이미 존재하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도래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중국의 가래(鋤)는 일본의 괭이에 해당하고, 괭이는 거꾸로 가래로서 의미가 정반대입니다.

 

 

   2.  괭이의 형태

괭이는 용도나 흙의 성질에 의해, 날판 부분의 모양과 자루의 길이, 자루의 각도, 무게 등이 그 형태를 다르게 만든다고 합니다. 기본으로 하는 모양은 괭이 자루의 끝이 지면에서부터 사용자가 직립한 자세로 허리 높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업을 계속해도 쉬이 피곤해지지 않는 자세입니다. 즉 어떤 각도를 가진 괭이라도 이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다만 어떤 일에도 예외가 있듯이, 히고肥後 괭이나 사츠마薩摩 괭이는 날판 부분과 자루의 길이가 동일하든지, 또는 자루의 길이가 조금 깁니다. 자루의 끝은 허리의 위치에 있지만 허리를 구부려 쭈그린 자세의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날판 부분의 재질과 형태에 의한 분류(그림14)

 

 

 

-나무 괭이 ... 목욕통, 자루는 가시나무나 북가시나무, 주목, 참가시나무, 밤나무. 일부 지역에서는 두렁치기용으로 사용(그림15).

 

-목욕통 괭이 ... 날끝은 철로 자루 및 목욕통은 목제. 두둑짓기, 북주기, 사이갈이 김매기, 경운, 수확, 두렁깎기, 두렁치기, 옮겨심기, 흙 다지기 등

 

-삽괭이 ... 자루는 목제이고 날 부분은 철. 또 날 부분에 2-3개의 구멍이 있어 이것을 창문괭이라 한다. 용도는 목욕통 괭이에 준한다(그림16).

 

-빗츄備中 괭이 ... 자루는 목제이고 날 부분은 철로 2-5개의 갈래. 주로 논의 경운, 흙부수기, 두렁치기할 때 진흙을 두렁에 붙인다. 점토질의 밭, 논의 경운

 

 

   3.  특수한 용도

 

-죽순 캐기 ... 삽괭이

-나무 심기, 개간용 괭이 ... 날판 부분은 두텁고 은행잎 모양을 하며, 날끝은 포물선을 그린다(그림17).

 

 

-연근 캐기 ... 목욕통 쟁기로 자루가 짧고 자루의 각도가 예각

-고구마, 토란 캐기 ... 빗츄 괭이를 쓰고, 줄기 부분의 손상을 막습니다. 

-벼 그루 자르기 ... 벼 그루를 한 그루씩 지면으로부터 잘라 해충 등의 월동을 방지하는 삽괭이

-땅 다지기 행사, 나무심기 행사, 건축의 지형 ... 나무 괭이

-점토와 자른 볏짚을 반죽해 흙벽을 만든다 ... 삽괭이

-석회, 마, 종이 등의 여물과 바닷풀을 쪄서 반죽해 회반죽을 만든다 ... 나무 괭이

 

 

 

   4.  자루와 날 부분의 각도에 의한 분류

-찍는괭이 ... 경운, 개간, 모종의 옮겨심기를 목적으로 하고, 그 자루의 각도는 60-70도, 자루 길이는 60-120cm, 자루의 끝은 두꺼워져 미끄러짐을 방지합니다. 삽괭이에 속하고, 중점토나 모래자갈에 적합합니다. 

-당기는괭이 ... 가볍고 다루기 쉬우며, 자루의 각도는 40-45도이고 약간 사질토양에 적합한 괭이입니다. 

-찍고당기는괭이 ... 주로 밭의 두둑짓기를 하고(그림18), 흙 붙이기, 사이갈이 김매기를 목적으로 한 괭이로, 자루의 각도는 50도 정도이고 자루 길이는 40-150cm.

 

 

   5.  특수한 형태의 괭이. 아마쿠사天草 괭이, 사츠마薩摩 괭이

 

특수한 형태의 괭이 아마쿠사 괭이, 사츠마 괭이는 목욕통 괭이에 속하고, 주로 논밭의 경운, 밭의 사이갈이 김매기, 두둑짓기를 목적으로 합니다. 자루의 각도는 20-35도이고 자루 길이는 40-60cm로 날판 부분과 자루의 길이가 동일합니다(그림19).

 

 

 

   6.  토양 성질에 의한 괭이의 형태

토양 알갱이의 조성에 의하여 입자를 아래와 같이 분류합니다.

-거친 모래 : 0.25-2mm ... 목욕통 괭이, 삽괭이의 찍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당기는괭이 모두 사용 가능. 

-가는 모래 : 0.05-0.2mm ... 당기는괭이, 찍는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미세 모래 : 0.01-0.05mm ... 당기는괭이, 찍는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의 사용 가능.

-점토 : 0.01mm 이하 ... 찍는괭이, 빗츄 괭이가 적합합니다.

-가는흙 ... (굵기 2mm 이하의 토양 입자) 내부의 점토 함량에 의한다. 

-모래흙 ... 12.5% 이하 ... 찍는괭이, 당기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목욕통 괭이, 삽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사양토 ... 12.5-25% ... 찍는괭이, 당기는괭이, 찍고당기는괭이, 삽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양토 ... 37.5-50% ... 찍는괭이, 빗츄 괭이의 사용이 적합합니다.

 

 

   7.  괭이의 무게에 의한 분류(총중량)

-찍는괭이 ... 2.8kg 이상 ... 빗츄 괭이, 목욕통 괭이

-당기는괭이 ... 1.3kg 이상 ... 삽괭이, 목욕통 괭이

-찍고당기는괭이 ... 앞 두 가지의 중간 ... 빗츄 괭이, 목욕통 괭이

*남성과 여성이 사용하는 괭이의 중량 차이는 여성이 약 10% 가볍다. 

 

 

   8.  괭이를 사용하는 사람의 진행방향에 의한 분류

-전진 ... 논밭의 경운(그림20), 밭의 김매기, 벼의 포기 자르기, 두렁치기(그림21), 논의 쟁기질한 흙 부수기, 뿌리채소의 수확 등 ... 찍는괭이, 빗츄 괭이, 삽괭이, 목욕통 괭이를 사용.

 

-후퇴 ... 두둑짓기(그림22), 북주기, 뿌리채소의 수확, 옮겨심기 등 ... 찍고당기는괭이, 당기는괭이, 목욕통 괭이, 삽괭이, 빗츄 괭이를 사용합니다. 

 

*습논 경운을 할 경우, 진흙이 앞으로 튀어 자루와 사용자에게 걸려 작업효율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빗츄 괭이의 날 부분 끝보다 약간 큰 구멍의 대나무로 짠 판 모양의 것(치바에서는 다테라고 함)을 자루의 아래쪽에 장착하고, 진흙이 튀는 걸 막습니다(그림23). 종려나무의 잎자루를 장착하는 지역도 있습니다. 

 

 

 

 

   9.  괭이의 사용법

 

-찍는괭이 ... 오른손잡이 ... 왼손으로 자루의 끝(미끄럼 방지 부분)을 잡고 오른손은 왼손에서 어깨너비 정도 떨어진 부분을 잡으며 괭이를 휘두릅니다. 지면에 괭이가 박히는 동시에 오른손은 왼손의 앞으로 미끄러집니다. 두발은 어깨너비의 1.5배로 벌립니다. ... 빗츄 괭이, 목욕통, 삽괭이

                    왼손잡이 ... 오른손잡이의 반대가 됩니다.

 

-찍고당기는괭이 ... 오른손잡이 ... 왼손으로 자루의 끝을 잡고 오른손은 왼손에서 어깨너비의 위치를 잡으며, 괭이로 흙을 1 또는 2회 정도 파고 날 부분에 흙을 얹어 오른쪽으로 흙을 북돋아 두둑짓기를 행합니다. 발은 두둑 너비로 벌리고 오른발을 앞으로, 왼발을 뒤로 하고서 후퇴하면서 북돋우기를 합니다. ... 목욕통 괭이, 삽괭이, 창문괭이를 사용합니다.

                              왼손잡이 ... 오른손잡이와 반대로 합니다.

 

-당기는괭이 ... 오른손잡이, 왼손잡이 ... 찍고당기는 괭이에 준합니다. ... 목욕통 괭이, 삽괭이, 창문괭이를 사용.

 

*괭이자루의 잡는 위치와 발의 위치 관계

경운(논밭) ... 주로 쓰는 손은 괭이자루의 끝에서 어깨너비를 잡고, 다른 손은 괭이자루의 끝을 잡아 고정합니다. 괭이의 날 부분이 흙에 꽂히는 시점에는 주로 쓰는 손은 끝을 잡은 손과 가까이 인접해 있습니다. 또 괭이를 휘두르는 시점에는 주로 쓰는 손을 어깨너비의 위치로 되돌려 휘두릅니다. 즉, 주로 쓰는 손은 내리꽂을 때마다 다른 손과의 사이를 왕복하며 움직입니다. 

두발의 위치는 경운 진행방향으로 어깨너비의 1.5배로 벌리고 평행하게 섭니다. 괭이는 순차적으로 120cm 정도의 너비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또는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한 괭이씩 경운합니다.

이외에 오른손잡이는 논의 경운에 빗츄 괭이를 사용하는 경우, 두둑 3개를 기준으로 왼쪽의 4번째 그루를 일으켜 뒤집고, 다음으로 오른쪽의 2번째 그루를 일으켜 뒤집습니다. 이렇게 연속하며 전진하기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옵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와 반대로 시작점으로 되돌아와 전진합니다. 

또한 1년 내내 물이 있는 논의 경운 방법으로, 두둑 4개를 기준으로 왼쪽 그루를 1그루씩 뿌리부터 자르며 2그루를 하나로 겹쳐 앞쪽으로 북돋으면서 전진합니다. 오른쪽 그루도 똑같이 합니다.  이 작업의 그루 북돋우기는 왼쪽과 오른쪽을 교대로 행하기 때문에 주로 쓰는 손의 지점이 바뀌어 양손잡이가 아니면 효율적으로 경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괭이는 목욕통(치바현 도가네시東金市에서는 갑페라カッペラ라고 부름) 괭이입니다. 

갑페라

 

 

두둑짓기, 북돋우기(밭). 주로 쓰는 손은 경운의 자루 쥐는 법과 동일하지만 다른 손과의 사이를 왕복하는 건 별로 없고 거의 고정됩니다. 오른손잡이는 오른발을 두둑짓기가 종료된 고랑의 앞쪽에 놓습니다. 다른 발은 고랑을 교차하는 위치에서 오른발에서의 보폭과 같은 위치에 놓습니다. 즉, 왼발은 괭이 끝보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고, 두둑을 넘은 자세로 후퇴합니다. 

오른손잡이는 흙으로 오른쪽에 북돋우기를 하고, 한 두둑을 마칠 때마다 시작점으로 되돌아갑니다. 왼손잡이는 왼쪽으로 북돋우기를 하며 반복해 시작점으로 되돌아갑니다. 요령 좋은 양손잡이는 시작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왕복하여 효율적입니다.

 

두렁치기(논두렁치기) ... 물이 새거나 무너진 두렁은 삽괭이, 목욕통 괭이로 풀 등을 깎아내고, 경운하지 않은 두렁 아래의 벼그루와 진흙(단단할 경우에는 발의 측면에서 가닥을 붙이면 블록 모양을 취하기 쉬움)을 빗츄 괭이로 두렁의 측면과 윗면에 놓습니다. 또, 그 뒷면을 사용해 진흙을 평평하게 하며 벼그루는 진흙 속으로 밀어넣습니다. 그런 다음, 삽괭이 또는 목욕통 괭이의 뒷면을 사용해 진흙을 문질러 평평하게 만듭니다. 맑은 날 작업하면 진흙이 건조해지기 쉬워서 신속해 작업해야 합니다. 만약 마른다면 다리로 물을 끼얹어 수분을 보충해 부드럽게 만든 다음 평평하게 합니다. 

 

 

 

   10.  괭이의 유지

괭이의 수리 ... 괭이의 날 부분은 바탕쇠에 강철을 연결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용 빈도가 높으면 날끝 양단의 마모는 흙과의 마찰로 서서히 둥글어지고 강철이 사라집니다. 날끝 강철 부분의 너비는 약 9cm 정도입니다. 또한 자갈이 섞인 농지를 갈면 날끝이 자갈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와 같을 경우 대장간에서 오래된 날끝을 제거하고 새로운 강철의 날끝으로 교환합니다. 이를 날걸이(先掛け)라고 합니다(그림24, 25).

그림24 원래 날은 점선까지 있었지만 닳아 없어져 날걸이를 한다

 

 

 

괭이는 신품을 한번 구입하면 날걸이로 수리하며 대대로 이어가게 됩니다. 괭이를 사용한 뒤에는 녹 방지를 위하여 흙을 털어내고, 수분을 제거합니다. 보관은 땅에 세워두지 않고, 벽에 걸대를 만들어 그곳에 걸어놓는 것이 최선입니다. 장기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철 부분에 기름을 칠하여 녹을 방지합니다. 괭이는 사용하면 사용하는 만큼 번쩍입니다. 녹슨 괭이는 흙일에 나쁘고, 점질 토양에서는 날 부분의 앞뒤, 자루와 날 부분의 연결부 안쪽에 흙이 붙어 작업 효율이 떨어집니다. 달라붙은 흙을 떼어내려면 대나무 주걱 등으로 떼어냅니다. 주걱은 괭이자루의 아랫부분에 철사를 감아서 꽂아놓습니다(그림26). 또 괭이의 사용자가 허리에 끈을 매고 그 끝에 주걱을 묶어 놓습니다.

그림26 흙 제거용 주걱

 

 

 

   11.  갈이용 도구인 발가래(踏鋤)

발가래는 뒤지개에서 발달한 도구입니다. 뒤지개 끝부분의 너비를 넓힌 도구입니다. 뒤지개는 씨뿌리기, 옮겨심기, 수확 등에 사용하는데, 발가래는 뒤지개의 기능 이외에 경운, 흙의 이동, 구멍 파기, 주걱 등으로도 사용합니다. 발가래는 자루와 날판 부분이 일체이고 그 자루의 각도는 180도-160도이며 손잡이가 자루에 접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우슈江州 가래(오우미近江의 나라), 교우京 가래 등이라 불렸습니다(그림27). 발가래는 현재의 가늘고 긴 삽에 해당합니다. 자루와 목욕통이 일체화되어 그 끝에 날을 끼웠습니다. 이 형태의 발가래는 주로 습논의 경운, 배수용 도랑 파기 등에 사용됩니다. 또 나무 심을 때 옮겨심기, 캐기, 구멍 파기 등에도 쓰입니다. 사용법은 가래날의 어깨 부분을 발로 밟으면서 날끝을 흙에 찔러넣고, 자루 끝의 손잡이를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틀며 앞면으로 쟁기를 넘어뜨립니다.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순차적으로 이동하고, 후퇴하면서 사용합니다. 날판 부분은 길이가 40-50cm이고 깊이갈이할 수 있습니다. 시가현滋賀県의 코토湖東에서는 고우슈 가래라 부르며 남자가 논을 경운하는 면적은 하루에 150평이었습니다. 이 지방에서는 경운을 깊이갈이, 거친갈이, 써리기의 3단계로 나누어 각각 발가래, 빗츄 괭이, 고무래(柄ぶり)로 행합니다. 그 뒤 말린풀(마른풀, 풋거름 등)을 갈아 넣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는 평년작으로 300평당 10가마의 수확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림27 발가래

 

 

나막신 빗츄 가래

충적지의 논 경운에 사용합니다. 날판 부분의 길이는 60cm, 날 너비는 24cm, 자루 길이는 60cm, 날판 부분은 44cm. 날판 부분을 흙에 꽂아넣습니다. 

오른발 또는 왼발로 옆의 밟는 부분인 길이 60cm의 끝부분(나막신을 고정)을 밟고, 자루를 앞으로 끌어내리면서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비틉니다. 즉, 지레의 효과입니다. 여성도 깊이갈이하기가 쉽습니다(그림28).

그림28 나막신 가래

 

 

 

 

발가래

발가래는 밭의 전면을 경운할 때 사용합니다. 자루 각도는 60-20도. 자루 길이는 110-230cm. 날판 부분의 길이는 80-110cm. 날 너비는 15-27cm. 날끝은 주물 또는 강철을 사용합니다. 자루와 날판 부분은 자루와 턱을 괴는 곳, 새끼줄(철사)로 고정합니다(그림29, 30).

그림29 여자아이의 발쟁기

 

그림30 개량 발가래

 

사용방법은 오른손잡이는 오른발로 날판 부분의 오른쪽 어깨를 오른발로 밟고, 오른손은 자루의 앞쪽을, 왼손은 자루의 뒷쪽에서 어깨 위치의 높이로 쥐고 흙에 밟아 넣습니다. 자루를 앞쪽으로 밀어올리고 왼쪽으로 뒤집습니다. 

왼손잡이는 발쟁기의 쥐는 방법, 뒤집는 방법도 오른손잡이와 거꾸로입니다. 작업 자세는 거의 똑바로 서서 하기 때문에 다른 괭이에 비해 피로가 덜합니다. 자루괭이, 큰괭이, 주조 괭이, 손괭이, 삽, 텐가天鍬 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가래(타니히키谷引き, 텐가, 두둑짓기畝立て, 겐고헤에源五兵衛<사츠마> 가래, 통자루가래ずんがら鋤, 인걸이二挺掛け)

자루의 길이 150-180cm, 가래판의 길이 40-90cm, 한 줄기의 가래판 너비 9-15cm, 두 줄기의 가래판 너비 35cm, 용도는 사양토, 사토 지대의 밭 경운, 두둑짓기, 사이갈이 등에 손잡이를 쥐고, 후퇴하면서 사용합니다(그림31).

그림31 <농구편리론>에서

 

<참고문헌>
飯沼二郎, 堀尾尚志, <ものと人間の文化史 「農具」 > 1976년 재단법인 法政大学出版局
菊池俊彦, <図譜江戸時代の技術上> 1988년 주식회사 恒和出版
熊本日日新聞社編集局編集, <農魂 熊本の農具> 1977년 熊本日日新聞
東京農業大学図書館標本室 소장, <古農器具類写真目録> 1978년 東京農業大学図書館
埼玉県立歴史資料館, <麦作りとその用具> 1985년
長野県教育委員会 편집, <信州の民俗> 1969년 第一法規

 

 

참고

 

-일본 괭이의 변화상

 

 

-일본의 괭이별 날의 너비와 자루의 각도

 

-일본의 발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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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수메르인들이 제작했다는 청동상이다.

먼저 소를 이용했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쟁기의 형태가 매우 흥미롭다. 

멍에도 없이 소에게 짊어지게 하고, 또 성에와 쟁기술의 각도가 직각에 가깝다. 

그것은 즉, 이곳의 흙이 매우 부슬부슬한 상태였는가 추측하게 만든다. 


너무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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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년 사이에 일본에서 거주했다는 한 미국인이 찍은 사진으로,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에서 쟁기의 모양이 흥미롭다. 쟁기의 술(보습이 달리는 대)과 성에(한마루와 성에를 부착하는 대)의 각도가 매우 작다. 이는 아마 논에서 쓰는 쟁기여서 그럴 것이다. 논흙이 찐덕찐덕하기에 술의 각도가 컸다가는 부러지기 쉽기 때문에, 힘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설계했을 것이다.

한국의 밭호미와 논호미가 보여주는 날과 슴베의 각도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푸석푸석한 밭흙에서 일하는 호미와 찐덕찐덕한 논흙에서 일하는 호미는 서로 다르게 생겼다.

왼쪽 두 개는 밭호미, 오른쪽 세 개는 논호미이다.




마지막으로 모내기를 마친 논의 모습도 흥미롭다. 그루당 간격이 듬성듬성하고, 모의 길이가 긴 모습이다. 옛날 농법은 대개 그러했던 걸까? 이 논에 심은 품종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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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재一齋 김윤보金允輔(1865~1938)가 그린 벼농사 관련 풍속화.



1. 겨리 쟁기로 쟁기질하고 쇠스랑으로 땅을 고르는 모습.
평양 출신이라더니 평안도 지역에서는 겨리 쟁기가 흔한 모습이었을까? 



2. 손모내기하고 새참을 나르는 모습.
모를 내는 사람들은 역시 못줄을 띄우지 않고 그냥 막모를 내고 있다. 줄모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농법. 새참으로 여성은 광주리에 음식을 나르고, 남성은 지게에 술단지를 나른다. 



3. 타작마당으로 볏단을 옮겨 낟가리를 쌓는 모습.
낟가리의 높이가 높아 아래에서 볏단을 집어던지는 모습과 걱정이 되어 나와 보는 주인의 모습이 대조되어 재밌다. 알곡이 떨어지는 걸 주워먹는 닭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옛날에는 논이 질척거리는 경우가 많아 볏단을 마당으로 옮겨 낟가리를 쌓은 뒤, 날을 잡아 벼를 떨었다고 한다. 농사의 규모가 있는 집에서는 타작마당을 만드는 일도 꽤나 어렵고 중요한 일이었다고.



4. 타작마당에서 개상질로 벼 낟알을 떠는 모습.
일제에 의해 족답식 탈곡기(일명 와릉와릉 탈곡기)가 들어오기 전, 보리든 밀이든 벼든 절구통이나 통나무, 돌 등을 놓고 거기에 단을 후려쳐서 알곡을 떠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탈곡 관행은 아마 토종 곡식들이 대개 야생성이 강하여 탈립이 잘 되었던 것도 한 요인이었을 것 같다. 화면 가운데에서 두 사내가 개상질을 하면 보조로 한 사내가 갈퀴로 낟알을 긁어 모으고 있고, 왼쪽에선 풍구와 키를 이용해 날려고르기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런 식으로 벼를 떨면 쭉정이나 까락, 껍질, 심지어 돌 등 많은 잡것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어릴 때 밥을 먹다 돌을 씹기가 예사였던 일을 기억하는가? 이남박에 쌀을 박박 잘 닦은 뒤 조리질을 잘해야 돌을 잘 골라낼 수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조선시대 사람 취급을 당하곤 했다. 아무튼 여기에서도 닭들이 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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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보다는 어찌 보면 극젱이에 더 가까운 모습.

이 지역은 논이 없고 비탈밭만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손잡이는 '작댕이', 보습을 끼우는 술 부분은 '귀쌔기', 한마루는 '선말'이라고 부르는 점이 특이하다.

 

보습은 예전에는 '솥전'에서 사기도 하고 벼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철물점에서 1년에 1개씩 7천 원에 사다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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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의 발명은 인류가 단단하고 돌이 많은 땅에서 작물을 심을 수 있게 만든 반면, 여성을 노예의 상태로 전락시켰다고는 주장이 미국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나왔다. 불평등의 뿌리가 우리가 흙을 다루는 방법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쟁기를 사용하는 공동체와 괭이를 사용하는 공동체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주요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흙을 갈아엎는 두 가지 기술이 현대 사회에서 주요한 경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바드 대학의 알베르토 알레시나 등이


쟁기로 농지를 준비하는 사회의 여성들은 오늘날 국회의원이 되거나 회사를 다니거나 하는 외부 활동이 적다. "전통적으로 쟁기를 사용한 사회의 후손은 오늘날 여성의 사회 참여 비율이 낮고 성적 불평등도 더 많다." 미국 경제연구에서 출간한 논문에서 주장한다.


쟁기는 넓은 지대에서 밀이나 보리, 귀리와 같은 작물을 기를 때 땅을 준비하며 사용한다. 이에 반해 괭이는 수수, 조, 덩이뿌리나 나무에 의지하는 공동체에서 사용한다. 이러한 작물은 경사지나 바위가 많은 흙에서 땅이 덜 필요하고 얕게 갈 수 있다


먼 옛날 여성은 종종 땅을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쟁기가 도입되면서 남성이 이익을 차지했다. 쟁기와 짐승을 부려 일하는 것은 많은 힘이 필요하다. 여성은 부업과 가사로 밀려났다. 전형적인 쟁기 사용 국가는 파키스탄, 인도, 이집트에서 발견된다.


대조적으로 괭이를 쓰는 나라는 브룬디, 르완다, 케냐와 같은 아프리카 나라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여성은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은 괭이질로 땅에서 일하기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브룬디에서 여성은 국가의 농업 노동 가운데 90%를 담당한다. 반면 파키스탄에서는 16%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연구는 세계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1200개 이상의 집단에 대한 연구이다. 쟁기를 쓰는 나라는 남성이 더 나은 정치적 지도자와 직업을 우선적으로 고른다. 서양으로 이민을 가도 이는 그대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늘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다. 서양에서 많은 국가들은 쟁기를 섰지만 성의 역할 사이에 분할과 같은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들의 주장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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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여러 장의 사진을 마련했습니다. 좀 길지만 재밌게 봐 주세요. 우리의 농기구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비슷한지 보시면 재밌을 겁니다.

 

먼저 아래의 사진은 수확용 농기구입니다.  

 

가장 위의 명찰은 '가루카마', 곧 베는 낫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왜낫이라 부르는 그 종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왜낫보다는 자루가 더 긴 듯합니다.

그 다음은 주걱이란 뜻의 '헤라'입니다. 설명서를 보면 대나무로 만들어 이삭을 자르는 데 쓴다고 합니다. 이삭을 자르는 대나무칼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삭만 자르기도 하는 조나 기장을 수확할 때 쓰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면 적은 양의 벼를 수확할 때도 썼을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야스리'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지요. 무엇을 가는 데 쓰는 줄입니다. 이걸로 앞에 본 대나무 주걱 등의 이삭용 나무칼을 갈았다고 하네요.

맨 아래에 있는 것도 이미 설명한 주걱입니다.

 

다음은 밥그릇과 같은 다양한 공기입니다. 우리랑 발음도 비슷해서 '고키'라고 부릅니다. 혹시 한반도에서 넘어간 문화의 흔적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이 사진은 일본의 지게입니다. 솔직히 이걸 발견하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 지게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일한 도구인지 알았거든요. 미군이 한국전쟁 때 A프레임이라며 감탄했다느니, 세계에 이런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운반도구가 없다느니 하는 말에 혹~했지 뭡니까. 이제 그런 우월성이랄까 그런 걸 벗어 던져야겠습니다. 세상에는 나만 잘난 건 없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쓰면 저기서는 저기에 맞게 저렇게 쓸 뿐...

 

 다음은 괭이입니다. 왼쪽의 것은 부대밭을 경작할 때 쓴다는 넓은날 괭이입니다. 오른쪽의 것도 부대밭을 갈 때 쓰는데, 날이 좁은 걸로 봐서 돌이 좀 있는 곳에서 쓰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특히 이 구마모토 지역은 화산토로 이루어진 곳이라 흙이 부슬부슬합니다. 그 때문인지 우리의 괭이가 주둥이가 뾰족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 특이합니다.

 

 

다음은 오른쪽부터 쟁기와 '아와마키', '데스키', '츠치이레'라는 농기구입니다.

쟁기는 워낙 유명하니 다들 아실 테지만, 가만히 보면 흙밥을 한쪽으로 넘기는 역할을 하는 볏이 나무로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예 처음 만들 때부터 일체형으로 한 것인지, 다른 나무를 깎아 만들어서 붙인 것인지는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 못하여 아쉽게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볏을 쇠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런 형태는 처음 보았습니다.

다음 '아와마키'는 글자 그대로 풀면 '조를 감음'이란 말입니다. 조를 뿌린 다음에 이걸로 흙을 긁어서 덮는 데 쓰는 농기구입니다.

'데스키'는 밀, 보리나 채소를 기를 때 이걸 써서 고랑의 흙을 퍼서 뿌리에 북을 주는 데 씁니다. 우리나라에는 따로 이런 농기구가 있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호미나 괭이, 아니면 후치로 사이를 갈아서 했을 일입니다. 아래 사진으로 조금 더 자세히 보시죠.

 

마지막으로 아래는 '츠치이레', 곧 흙넣기라는 농기구입니다. 이건 제가 번역하고 있는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에도 자주 나옵니다. 이것 때문에 뭔지 몰라서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모릅니다. 결국 인터넷이란 문명의 이기에 도움을 받아 일본사이트를 뒤지고 헤맨 끝에 찾았지요. 찾고 나서도 뭐라고 번역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습니다. 지금도 정확히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잠깐 쓰이다 사라졌기에 그렇습니다. 아무튼 이건 밀, 보리 농사를 지을 때 잘 자라도록 고랑의 흙을 퍼올려서 밑동에 북을 주는 데 쓰는 농기구 입니다. 앞의 뾰족한 부분을 통해 흙을 퍼 올린 다음, 망이 있는 부분에 올라온 흙을 밀, 보리 위에서 탁탁 털면 절로 밀, 보리 위로 떨어져 북을 주는 원리가 아닐까 합니다.

 

위의 사진의 농기구는 콩을 심는 파종기입니다. 저 통에 콩을 넣고, 주둥이를 땅에 푹 쑤셔 박은 다음 흔들거나 하여 또로록 콩을 흘려 넣었을 겁니다.

 

다음은 위에서부터 '옹바',  '야마코',  '오코'라고 부르는 농기구입니다. 야마코와 오코는 전체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냥 대충 설명하자면, 짐을 나르는 도구인데 양쪽에 물건을 매달고 등에 지는 도구입니다. 물통 옮기는 모습을 떠올리시면 될 겁니다.

옹바는 곡물을 탈곡할 때 이걸로 두드려서 껍질을 벗기는 농기구라고 합니다. 저는 처음에 생김새만 보고 흙덩이를 부수는 데 쓰는 줄 알았는데, 일본의 흙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떠올리고는 그렇구나 했습니다.

 

다음은 망태기입니다. 일본에서는 '후고'라고 부르네요. 

 

키와 씨앗을 담아 놓는 통입니다.  

 

이게 아주 재밌는 농기구입니다. 우리의 도리깨와 똑같은데, 오른쪽에 통나무를 달아 놓은 것은 콩이나 팥을 떨 때 쓰는 것이고, 왼쪽의 것은 일반적으로 쓰는 도리깨입니다. 용도에 따라 도리꺠를 달리 썼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로만 다 하는데 말입니다. 

 

풍구와 매통입니다. 풍구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농기구의 하나입니다. 날려고르기를 하는 데 쓰는 것이죠. 매통은 곡물의 껍질을 벗기는 데 쓰는 농기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쓰던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홀태 또는 그네라는 농기구입니다. 일본 이름으로는 千齒라고 하여 이가 많다는 뜻으로 불렸습니다. 이게 들어왔을 때 작업효율은 기존에 하던 방식에 비해 훨씬 좋은데, 상하는 벼나 덜 떨리는 것이 많이 생긴다고 하여 꺼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건 벼를 베는 데 쓰는 낫입니다. 벼베기 전용 낫이라고 할까요. 벼 베는 데 맞게 특화된 것인가 봅니다. 낫의 날을 보면 톱니를 넣어 놓아 줄기를 쉽게 벨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세심한 일본인의 특성이 이런 농기구에서도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건 '오테'라고 부르는 농기구입니다. 아래의 사진과 한 묶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벼에 벌레가 생기면 먼저 아래의 도구로 물에 훅훅 석유를 뿌립니다. 그럼 논물 위로 기름막이 형성됩니다. 거기에다 이 오테라는 도구라 벼를 휙 쳐서 거기에 붙은 벌레들을 기름막에 떨어뜨려 죽이는 농기구입니다. 지난 여름 산청에 임봉재 선생님을 만나고 왔을 때, 거제에서도 석유를 이용해 벼에 생기는 벌레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는 그냥 석유를 깡통에 넣어 허리에 차고 숟가락으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더 효과적으로 그 일을 했네요.

 

 

 아래의 사진은 써레입니다. 우리의 써레와 이도 좀 다르고, 형태도 좀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구마모토 특유의 괭이인 거름뒤집는 괭이입니다. 설명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괭이는 사용하는 토지에 따라서 여러 형태를 가집니다. 구마모토의 화산재 토지에서는 특색 있는 거름뒤집는 괭이를 썼습니다. 그 형태는 잛은 자루에 폭이 넓은 날을 붙인, 자루와 날이 이루는 각도도 매우 작습니다. 사람들은 대지에 발을 버티고 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힘껏 괭이질을 합니다. 기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일해서 '기는 괭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뭐라 하든 메마른 '검은 머슴'을 깊이 가는 데에는 가장 쓰기 좋은 괭이입니다."  

아무튼 자루도 짧고 각도 작아서 이걸 쓰려면 허리 한 번 제대로 펴기 힘들었을 듯합니다. 아니면 산비탈에서 썼다면 오히려 편했을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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