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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지도를 보았다.

기후변화에 따른 연도별 벼 불임률 지도.



 
지도를 보면, 그러니까 2060년 정도 되면 지금과 똑같은 벼 품종으로는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농사가 되긴 되는데 평균 20% 정도는 이삭이 제대로 맺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 북쪽이나 현재의 고랭지에서는 괜찮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인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마 이러한 기후 조건에 알맞은 새로운 품종을 육종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농법 등으로 난관을 타개하려 노력하겠지. 가만히 앉아서 위기를 맞아하지는 않으리라 예상한다. 

그도 아니면, 지금 품종으로 더 북쪽에서 농사지을 수도 있겠다. 물론 통일이든 남북 경제협력이든 하는 형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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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량

  • 소요량 : 4~8㎏/300평

    • 일찍 심기 : 드물게 뿌림
    • 늦게 심기 : 배게 뿌림
      ※ 봄 심기 6, 비닐피복 8㎏/300평

파종 적기

  • 여름 재배 : 4월 중하순
  • 가을 재배 : 7월 중~8월 상순
    ※ 가뭄이 극심할 때 대파작물로 활용

시비

  • 콩 전용복비 (8-14-12)
    • 25~50㎏/300평

재식거리

  • 줄뿌림

    • 18~20×5㎝
  • 일반재배 : 60×15㎝
  • 파종 깊이 : 2.5~5㎝
    ※ 파종 깊이 5㎝ 이상은 입모율 저하

재배관리

  • 습해 우려지역 : 높은두둑 재배

병해충

  • 병해 : 뿌리썩음병, 줄기썩음병 등
  • 충해 : 거세미, 진딧물 등

수확

  • 종실 75~80% 정도 성숙했을 때 수확
    • 수분 함량이 16% 이하
  • 종실 건조할 때 45℃ 이하로 건조시킴





http://www.nongsaro.go.kr/portal/ps/psb/psbl/workScheduleDtl.ps;jsessionid=CROXM61PmjKd1debCfEfZQezdcMqAaN6WMWZmrBbrnrIwnLP0ElH3kKj6dakIKZ5.nongsaro-web_servlet_engine1?menuId=PS00087&cntntsNo=30706&sKidofcomdtySeCode=210005&totalSearchY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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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사는 지역에 따라, 그리고 그곳의 환경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농촌진흥청에서 권장하는 건 다음과 같다.


최근 기후변화 때문에 콩을 재배하는 방법도 바뀌고 있다는데, 그래서 수원과 청원, 밀양, 익산 등지에서 2009년부터 3년에 걸쳐 실험을 했단다. 과연 언제쯤 콩을 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지 말이다.  

그 결과, 경기와 강원을 포함한 중북부 지역은 기존의 5월 중하순보다 늦어진 6월 상순이 콩을 심기에 알맞은 시기라 한다. 또한 충청도와 영·호남 남부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다른 작물의 앞그루 재배가 없이 1년에 1회 콩만을 재배할 경우에는 6월 상중순에 심는 것이 적합하단다. 음, 난 어제 심었는데, 괜히 일찍 심었나 싶고... 무슨 농사든지 빨라지는 게 추세라서 나도 조급증이 났는가 보다. 좀 더 여유를 부렸어도 될 일이었네.
 
그리고 콩을 적기에 파종했을 때 심는 거리는 줄 간격 70cm, 콩의 포기 사이는 15cm가 알맞다고 한다. 즉, 기존 간격인 60cm, 10cm보다 더 넓게 심으라고 권장하고 있다.
 
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권장사항일 뿐.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농사는 수많은 시도와 모험 끝에 찾아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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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파리지옥에 관심을 보여 구입했다.

동네 화원에 가니 파리지옥은 여름에나 나온다고 하여 그냥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꼼꼼히 포장을 잘해서 왔기에 아무 문제 없었다. 

후기에는 화분이 손상되었다는 글도 있어 걱정했는데, 몇 번의 경험을 통해 포장법을 완성한 것 같다.


파리지옥을 데려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키울지가 난감하여 검색해 보았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파리지옥은 먼저 온도와 습도가 높은 환경을 좋아한단다. 그러니 집의 환경을 그렇게 조성해주는 게 중요하겠다.

겨울에 밖에 내놓으면 얼어 죽는다.

햇빛은 하루종일 드는 곳보다는 아침에는 햇빛이 들고 오후에는 그늘이 지는 곳이 좋단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반그늘이나 아니면 빛을 가리라 한다. 

또 통풍이 잘되게 하여 가능하면 20℃가 넘지 않도록 주의한다. 한여름에는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는 한 좀 힘들겠다.


그리고 따로 비료는 줄 필요가 없다. 물만 잘 주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파리지옥은 물을 좋아해서 화분 밑이 물에 약간 잠길 정도로 놓으면 좋단다. 습도 높은 걸 좋아하는 식물이니 집이 건조하면 수시로 물을 주는 편이 좋다고 한다. 

아, 파리지옥은 산성에 물을 잘 머금고 있는 흙을 좋아한단다. 물을 좋아하는 습성이 좋아하는 흙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니 흙을 말리지 말자. 늘 촉촉한 편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겠다.


파리 같은 벌레를 잡는 건 보통 2~3년은 자라야 한단다. 

그러니 덫 부분을 자극하여 덫이 닫히는 것을 억지로 보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라고. 식물이나 동물이나 똑같다. 애가 호기심에 장난으로 자꾸 만지고 안고 하는 건 동식물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파리지옥을 구입한 뒤 분갈이를 하는 건 사자마자 판단해서 바로 하는 게 좋단다.  혼자 할 수 있으면 혼자 하고, 불가능하면 화원에 가서 부탁하자.


참고; 파리지옥 [Flytrap]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건강 꽃 식물 재배와 이용, 2010. 3. 8., 푸른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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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1장  벼농사와 벼농사 문화의 시작  中村愼一




들어가며


2008년 1월, 중국에서 벼농사 고고학 연구의 전문가 4명을 일본에 초청해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보고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점은 중국의 벼농사 기원론이 이미 "언제, 어디에서?"의 단계에서 빠져나가 "왜, 어떻게?"의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야생 벼가 자생하지 않는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것이 자생하는 중국에서는 벼 자료의 출토=벼의 인공 재배가 아니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의 연구자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야생인지 재배인지를 분간하는 판단기준을 딱 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결과적으로 '재배종이기를 바란다'는 확신이 때로는 연구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림1-1 중국의 초기 벼 자료 출토 유적

1. 하남성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

2. 호남성 풍현澧縣 팽두산彭頭山 유적, 팔십당八十 유적

3. 강서성 만년현萬年縣 조통환桶環 유적, 선인동仙人洞 유적  

4. 절강성 포강浦江 상산上山 유적

5. 절강성 승주嵊州 소황산小黃山 유적

6. 절강성 소산蕭山 과호교跨湖橋 유적

7. 절강성 여도 하모도河姆渡 유적

8. 절강성 여도 전라산田螺山 유적

9. 절강성 동향桐鄕 라가각羅家角 유적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확실한 판단기준을 어떻게든지 수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는 야생, 여기서부터는 재배라고 딱 잘라 버리지 않고 양자를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학계에도 꽤나 퍼졌다고 느낀다. 


아시아 벼농사 기원의 문제는 완신세完新世의 환경변화에 야생 벼가 어떤 대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문화적 적응으로 그에 응했느냐는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터이다. 그를 위하여 고정도高精度의 옛 환경 복원과 동식물 유존체의 정성, 정량 분석 등 자연과학 여러 분야와 고고학의 협동이 필수이다. 본론에서는 그러한 접근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이 밝혀졌는지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 공동 연구의 성과 등도 나누면서 개관하겠다.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벼농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계에서 아시아 벼농사 기원 연구를 주도한 건 농학과 민족식물학이었다. 거기에서는 '운남-아삼 기원설'이 제창되어(渡部 1977), 한때는 정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의 증거는 그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30년 사이에 축적된 고고학 자료는 그것이 동시대의 자료인 만큼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가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그 구체적인 연대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재배종인지 어떤지 판단하는 지표가 연구자에 따라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설에 대하여 하나하나 상세히 살필 여유는 없다.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졸저(中村 2002)를 보시라 권하고, 여기에서는 개요만 소개하고자 한다.


1만 년을 넘는 오래된 벼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던 유적은 장강 중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강서성의 조통환, 선인동 유적(모두 잎의 세포화석), 호남성의 옥섬암玉蟾岩 유적(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등이다(그림1-1). 잎의 세포화석이란 벼잎의 기동세포라는 특수한 세포 안에 남아 있는 일종의 유리이다. 생리적, 화학적으로 강하고, 장기간 토양 속에서 보존된다. 토양 속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에 벼가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이 곧 재배 벼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여러 유적은 모두 동굴 유적이고, 그곳에서 벼가 살았을 리는 만무하나, 조통환 동굴처럼 주위의 평지에서 수십 미터나 위로 솟아 있다면, 마른풀이 바람에 날려 들어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완신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전에 사람에 의해 무언인가 형성된 벼의 이용 -땔감이나 깔개로 이용하는 것도 포함- 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장강 하류로 눈을 돌리면,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부터 발굴조사가 행해진 절강성의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소황산 유적(약 9천 년 전)에서는 토기의 바탕흙 안에 대량의 알곡이 섞여 있었다(그림1-2). 식물규산체가 발견된 것만으로 벼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벼의 열매=알곡을 이용했다는 건 아닌데, 이쪽은 틀림없는 알곡이다. 그것이 속의 쌀을 꺼낸 뒤의 왕겨인지 쌀이 들어 있던 채로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혼합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만 알곡을 모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먹을거리로 쌀을 이용하고 나머지 왕겨를 유효하게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일리가 있다.


토기 바탕흙의 혼합재로 왕겨를 이용하는 일은 조금 늦게 장강 중류에서도 시작된다. 호남성 풍현에 있는 팽두산 유적과 팔십당 유적 같은 팽두산 문화(8000-7000년 전)의 토기가 그것이다. 토기 종류의 구성을 보아도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상당히 분화가 진행된 데다가, 명확하게 요리도구라고 할 수 있는 '솥'의 수량이 많아진다. 식물질 먹을거리 의존도가 증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1-2 상산 유적 출토 토기. 단면에 검게 보이는 것이 혼합재의 왕겨.



거의 동시대에 놓인 하남성의 가호 유적과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에서는 왕겨가 토기의 혼합재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유적에서는 탄화미, 붉게 탄 흙(紅燒土)에 알곡 압흔, 그리고 잎의 세포 화석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벼 자료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현재 있는 고고자료로 미루어 보는 한, 지금으로부터 8000년쯤 전에 벼 이용이 강화된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약 7000년 전쯤 되면, 장강 하류에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가 전개된다. 토기의 종류 분화는 더욱 진행되고, 쌀 조리에 특화된 종류인 '시루(=찜기)'가 출현한다. 또한 농기구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뼈삽날(骨耜)도 다수 출토되고, 이외에도 벼농사 의례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되는 기물도 적지 않다. 논의 검출 사례는 현재로서는 약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후기까지로만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으로 오래된 사례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즉, 여러 가지 상황증거로 미루어 보는 한, 하모도/마가빈 문화기에는 그 이전부터의 채집에 더해 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 7000년 전이란 연대를 중국 벼농사 개시의 하한년대로 잡는다(나의 이러한 견해는 학계에서 '신중론'이라 친다. 벼농사의 시작을 1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학계의 추세라는 점을 굳이 덧붙여 놓는다). 그에 대하여 일찍이 아시아 벼농사의 원향이라 여겨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연대는 그보다도 몇 천 년 늦다. 구체적으로, 인도 아대륙에서는 5000년 전쯤,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는 4000년 전쯤이다.


중국으로부터 일원적으로 이들 지역에 벼농사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벼농사 보급의 파도가 운남과 광서 같은 화남의 주변부에 도달한 연대는 오래되었다고 어림잡아도 5000년 전이다. 특히 인도의 경우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변부에 도달하는 연대와 거의 동시에 벼농사가 시작된다. 동심원적인 파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인도, 그리고 가능성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시기를 달리 하여 저마다 벼의 재배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전 벼농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이다. 그곳에서 중국의 대지를 무대로 전개된 인간과 벼의 관계의 역사를, 환경고고학과 식물고고학의 시점을 섞어 넣으면서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빙하기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빙상에 덮힌 한랭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다. 빙하기라 해도끊임없이 추위가 계속된 것은 아니고, 한랭한 시기와 온난한 시기가 반복하여 미세하게 변동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질시대에서 가장 새로운 빙기는 뷔름 빙기(아메리카에서는 위스콘신 빙기)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부터 약 1만5천 년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바닷물에서 증발된 수분이 눈이 되어 육지에 내려 쌓이는데, 그것이 녹지 않고 곧바로 빙하로 발달한다. 증발한 물이 되돌아오지 않기에 해수면은 낮아진다. 뷔름 빙기의 가장 한랭기(1만6천 년 전쯤)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미터나 낮았다고 여겨진다.


이 최종 빙기가 종언을 고한 뒤 기온이 단숨에 상승했는데, 그 뒤 재차 '영거 드리아스기'라고 부르는 추위가 1300년 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추위도 1만1600년 전을 경계로 급격한 온난화로 뒤바뀐다. 지질시대라 말하는 완신세의 시작이다. 그 뒤 기온은 상승의 한 길을 걸어, 6000년 전쯤에 최고온기('힙시서멀기' 또는 '기후적기'라 부른다)를 맞이한다. 이 시기, 예를 들어 중국의 장강 하류에서는 기온이 현재보다 2-3도 높고, 강수량은 500-600mm 많았다고 복원되어 있다(王, 張 1981).


중국 장강 유역에서 벼의 채집이 시작되어, 이윽고 재배로 진전된 건 영거 드리아스기와 힙시서멀기 사이의 기후격변기의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의 옛 환경과 지리에 관한 정밀한 복원 연구는 매우 부족하기에 여기서부터는 상상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나는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완신세 전반의 급격한 온난화는 비가 자주 오도록 만들었다. 최종빙기에는 낙엽수의 숲과 건조한 초원이 탁월하던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가 광대한 늪과 호수와 습원으로 순식간에 그 모습이 변했다. 기온이 높은 비가 많이 오면, 야생 벼에게는 절호의 생식환경이다. 최종빙기에는 추위로부터 도망와 화남과 동남아시아에 후퇴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야생 벼가 나갈 차례가 도래했다.


재배 벼의 선조에 해당하는 Oryza rufipogon이란 야생 벼, 그중에서도 특히 자포니카형인 것은 여러해살이의 경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폭넓은 변이가 존재하여 한해살이에 강하게 기운 그룹도 있다. 아마 그러한 그룹이 그 탁월한 이주능력을 무기로 재빨리 북상을 시작해 곧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에 대규모 군락을 형성했을 것이다. '쌀알만큼'이라 하면 작은 것의 예이다. 한 알, 두 알 먹는 걸로는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벼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그때 해수면의 급속한 상승으로 육지면적이 맹속력으로 감소했다. 동중국해에 면한 절강성과 강소성 부근에서는 6000년 정도 사이에 해안선이 500-700킬로미터나 내륙으로 후퇴했다. 즉, 해마다 100미터씩 육지가 수몰되어 사라졌다고 계산된다. 거주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이 좁아지면 야생 먹을거리 자원에 대한 인구압이 높아진다. 그때까지는 먹지 않던 야생 벼의 종자가 수렵채집민의 눈에 매력적인 먹을거리로 비춰지게 되었다.


단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장강 중하류의 대습원지대, 예를 들면 고대에 '운몽택雲夢澤'이라 부르던 양호 평야(호북성의 강한江漢 평야와 호남성의 동정호 평야)의 중심부 등에서는 끊임없이 수위가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정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홍수의 피해를 받는 일이 없고, 또 습지와 산야의 양쪽에 접근할 수 있는 저지/구릉의 이행지대나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강서성 조통환과 선인동, 호남성 옥섬암, 절강성 상산과 소황산 등의 여러 유적은 바로 그러한 입지에 있다.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건 아직 매우 한정적인 일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8000년-7000년 전쯤이 되면 물 환경이 불안정한 저지로 진출하는 선구자가 나타난다.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과 하모도 유적(모두 해발고도는 약 4m)이 그 대표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일본의 연구진이 베이징 대학,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와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절강성 전라산 유적에 대하여 소개하려 한다.


영소寧紹 평야의 동단 근처에 위치한 이 유적은 하모도 문화에 속하여, 중심적인 문화층의 연대는 약 7000-6500년 전으로 짐작된다(그림1-3). 유명한 하모도 유적에서 7킬로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다. 하모도 유적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저지대 유적이고, 인골과 동물뼈, 목재, 식물 종자 등의 유기질 유물의 보존상황은 꽤나 양호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나라 교육대학의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가 행한 규조 분석의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金原 최근 출간).



그림1-3 전라산 유적 원경(가운데 돔이 유적 박물관)




규조란 단세포의 조류로, 바닷물과 민물, 그리고 일부는 토양에서도 생식한다. 그 이름은 규산질의 단단한 껍질을 가진 데에서 유래하는데, 규조 본체가 죽어도 그 껍질만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남아 있는다. 또 똑같이 바닷물이어도 난바다, 내만, 개펄 등에 생식하는 종류가 다르다. 껍질의 크기나 형태, 표면의 모양 등을 조사하여 종을 동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와 비율에 따라 규조의 껍질이 퇴적된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유적에 사람이 거주하기 직전의 시기, 그곳에는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해수면 높이는 현재보다 1미터 정도 낮았다고 추정된다. 그 뒤 해수준은 마이너스 2.0미터 이하까지 낮아진 걸로 보이고, 이 땅은 육지화되어 인간의 거주가 시작된다. 당시 유적은 해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강가 습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해수면이 다시 상승을 시작해 최고기에는 현재보다 약 2미터 높아졌다(힙시서멀기의 최고 해수준). 토지는 해면 아래로 가라앉고, 마을은 방기되었다. 즉 이 유적은 완신세의 해진기에 영위된 유적인데, 해진기에도 해수면이 변동하여 끊임없이 계속 상승하던 해수면이 일단 조금만 물러난 시기에 출현했던 육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유기라 하더라도 그곳은 민물 유역의 가장자리여서, 습지 같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 전라산 유적에서도 하모도 유적에서도 주거는 고상식(역주; 마루를 높게 쌓은 형태)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저습지에 거주하기 위한 하나의 적응 수단이었다. 고상식 주거의 주변에는 수많은 목제품이 남아 있다. 건조한 지면 위에 남아 있던 목제품은 거의 곤충, 균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분해되어 버려서 몇 년만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많은 목제품이 양호한 보존상태였던 건 마을 자체가 저습지 안에 있어 버려진 목제품이 늘 물에 잠긴 상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덧붙여서, 고상식 주거의 근처에서 목제 노가 8점 출토된 것은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통나무배가 애용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유감스럽게도 이 유적에서는 통나무배 자체가 아직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 유적보다도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 통나무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하모도 문화기에 통나무배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고상식 주거와 통나무배라는 두 가지 물품, 그것은 저습지에 정주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호교 유적에서 검출된 집터는 흙벽을 세운 평지식 주거였는데(절강성 문물고고학연구 외 2004), 이 유적에서는 나무 하나로 만든 사다리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거 부분은 2층이었거나 또는 적어도 먹을거리 창고는 고상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저습지로 진출하는 데에는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벼도 도토리도 종이 한 장 차이


앞에 기술했듯이, 벼를 이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저습/구릉의 이행지대와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절강성의 유적을 예로 들면, 상산 유적과 소황산 유적은 전라산과 하모도 등의 하모도 문화기의 유적과 그보다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 비하여 훨씬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표고도 50미터 안팎으로 상당히 높다. 과호교 문화와 하모도 문화의 시기, 사람들은 산간의 분지를 떠나 해안 근처의 평야부로 진출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 1만 년 전의 해안선은 현재의 그것보다 몇 백 킬로미터나 난바다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해안 근처에 사람의 거주가 있었더라도 그 유적은 깊은 해저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보면 찾아낼 길이 없다. 그러한 불확실함이 남아 있는 건, 어느 시기부터 '물가'라는 경관이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일본과 중국 공동 프로젝트에서는 출토 종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했다(傳, 趙 최근 출간).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전라산 유적에서는 확실히 벼의 종자도 수없이 출토되지만, 마름의 알곡과 도토리(대부분은 개가시나무) 쪽이 수량에서는 벼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출토 종자의 수에서는 벼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종자의 크기를 고려하면 가시연 알곡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출토된 종자의 숫자 비율이 각 식물이 당시의 식생활에서 점했던 비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니더라도, 벼가 출토되었다는 걸 곧바로 날마다 쌀만 먹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현대에 갖다 붙인 해석이어서 그러한 선험적 발상은 확실히 위험하다. 장강 유역에서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모도 문화기에 이르기까지 벌써 몇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벼는 아직 '보물의 하나'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벼농사의 기원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장기에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는 걸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결과에 눈을 돌려 보자. 꽃가루도 또 산과 알칼리에도 침범되기 어려운 단단한 외막으로 덮여 있어, 흙속에서 장기간 보존된다. 토양 표본 안에 포함된 꽃가루의 식물종 수량비를 통해 당시의 식생을 복원하는 것이 꽃가루 분석의 원리이다.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사람이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이다. 유적이 거주하고 있던 당시의지층에서는 부들과와 벼과 식물의 꽃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벼과 식물은 꽃가루의 형태만으로는 종까지 특정하기 어려운데, 잎의 세포 화석 분석 결과 등을 감안하면 그 대부분은 갈대와 벼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부들도 갈대도 벼도 습지의 식물이며, 규조 분석의 결과와도 부합한다. 이러한 물가 식물과 함께 많이 산출된 것이 북가시나무 아속을 주로 하는 조엽수의 꽃가루이다. 습지를 에둘러싼 높이 100미터 정도의 좀 높은 산들은 조엽수가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걸 말한다. 그곳에서는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달았을 것이다(개가시나무도 북가시나무 아속인 식물이다).


갈대와 부들이 습지의 가장자리에 군락을 형성하는 데 반해, 조금 수심이 잎은 곳에는 마름과 가시연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유적에서는 잉어와 붕어 같은 민물고기, 거북과 자라 같은 파충류, 오리와 기러기 같은 조류의 뼈도 무수히 출토되었는데,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늪과 못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수렵의 대상이었던 포유류로는 물소와 각종 사슴 종류가 주체를 점하였는데, 이들도 물가에 모이는 습성을지닌다. 이미 벼의 재배도 시작되고 돼지도 사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물가의 환경에서 수렵, 어로,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식생활의 대부분을 점하며 도토리 같은 산야의 산물이 그것을 보충하는 생업경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생업경제의 상태를 고고학, 인류학의 분야에서는 '다각적 경제(broad-spectrum economy)'라고 부른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최후의 빙하기를 극복한 뒤에 비로소 이 다각적 경제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반 독자는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통해 탄수화물을 얻고 물고기와 물새의 고기에서 단백질을 얻는 식생활은 기껏해야 1만 년 정도의 역사밖에안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신기원이었다.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이 시작된 건 특히 중요하다. 그 결과 일어난 물질문화의 커다란 변혁이 토기의 발명이며, 사회적인 크나큰 변혁이 정주생활의 개시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아울러 가장 일찍 농경이 시작되었던 서아시아에서 토기는 출현 당초 주로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 같다.  그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취사의 도구로 시작되었다. 중국 남반부에서는 벼, 북반부에서는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이 우선 재배되었는데, 그 이전 단계인 채집단계에서도 녹말을 알파화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열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토기에 넣고 펄펄 끓이는 것이다. 도토리의 경우 생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모밀잣밤나무와 개가시나무) 가열하면 맛이 좋아지고 해충이 구제되고 오래 보존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며, 탄닌을 많이 포함해서 떫어 먹을 수 없는 종류의 도토리에서 떫은맛 제거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토기 제작의 개시는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용되는 식물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다. 일본에서 도토리 종류에 더해 밤, 칠엽수 같은 견과류와 좀처럼 증명하긴 어렵지만 각종 근경류가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한편 중국에서도 일본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견과류와근경류가 존재했는데, 거기에 벼와 조, 기장 등의 벼과 초본과 대두(중국 동북지방부터 화중에 걸친 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높음)가 더해져 있었다. 그 뒤의 두 가지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식물질 먹을거리에 대한 의존이 강해진 결과 정주화가 촉진되고, 인구는 증가한다. 그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전에상세히 서술했기 때문에(中村 2002),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특히 정주 마을의 형성이란 점에서는 중국보다 일본 쪽이 선행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인구는 변동을 반복하면서도 서서히 우상향으로 계속 증가해 머지않아 국가의 형성과 도시의 발생 -문명의 탄생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은- 으로 우여곡절 끝에이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기원전 4천년대의 후반부터 3천년대의 후반까지 1천 년 사이에 각지에서 그것이 달성되었다. 일본의 조몬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한다. 확실히 일본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에는 수많은 마을이 경영되어 이 시기의 인구도 상당히 많아졌다고 추정된다(今村 1997). 환경조건에 혜택을 입었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affluent forager)'의 한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기에 정점에 이르른 조몬인의 번영도 오래가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면 적어도 동일본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었던 것이 출토 주거터 수의 분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명확한 건 아니지만, 힙시서멀기 이후 기후의 한랭화, 건조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은혜에 전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렵채집민의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완신세 당초부터 식물질원의 이용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벼, 조, 기장, 대두 같은 한해살이 초본의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 열도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견과류와 근경류였다. 견과를 다는 목본류는 종자번식이라 하여 생장이 느리고, 근경을 이용할 수 있는 초본류는 영양번식이었다. 인간이 활용하기 좋은 형질을 선택하고 그것을 재배종으로 고정시켜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오래 채집 단계에 멈출 수 없었다. 도토리를 먹든지 벼를 먹든지 출발점에서 차이는 종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재배화가 가능한 야생의 한해살이 초본의 유무가 몇 천 년의 시간을 거쳐 일본과 중국 두 곳의 사회 진화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벼의 재배화에 성공했던 중국에서는 관개논의 창출에 의하여 기후의 악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인구가 급감한 조몬시대 후기의 일본 열도에서는 주술에 관한 각종 기물이 성행한다. 거기에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주술에 침잠하여 자연의 은혜에 매달리려 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일본 열도의 주민이 자연의 위력이 지닌 주문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는 데에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열도의 밖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이주를 기다려야 했다. 



① 야생 벼의 채집 -토기, 석제 갈판, 목제 절구

② 야생 벼 종자의 인위적 파종


③ 재배 벼 형질(비탈립성)의 출현


④ 재배 벼 형질의 확립(=야생 벼와 유전적 격리) -논


⑤ '벼농사 문화'의 성립 -벼농사 제사 관련 유물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

그림1-4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로




벼농사 사회 성립까지 지나는 길


채집에서 재배로


벼가 출토되면, 당시 사람들이 벼(쌀)를 주식으로 삼았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의 위험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벼가 재배된다고 하면 그 문화는 '벼농사 문화'이고, 그 사회는 '벼농사 사회'라고 하는 것도 대단히 난폭하고 안이한 의론이다.


그림1-4는 벼 이용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화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인간에 의하여 식용이된 야생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벼과 식물처럼 종자가 작고, 또 먹기 위해 전처리가 귀찮은(왕겨를 벗기고, 게다가 가열해야 함) 경우는 대량으로 채집하기가 쉬워야 한다. 광대한 초원에서 여기 한 포기, 저기 또 한 포기 식으로 자라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완신세 전반의 온난화 시기에 장강 유역에서 대규모 야생 벼의 군락이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야생 벼를 채집하는 데에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야생 벼는 탈립성을 지니고 있다. 탈립성이란 익은 알곡이 자연스럽게 훌훌 이삭에서 떨어지는 성질이다. 알곡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벼 포기를 밀어 헤치면서 익은 알곡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모으는 게 좋다. 그럼 효율이 나쁘다고 하면, 큰 소쿠리라든지 천을 마련하여 이삭을 쳐서 그 안에 알곡을 모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돌칼이나 돌낫 같은 도구는 필요 없다고 하기보다 쓸데가 없기 때문에 유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야생 벼의 채집 단계는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꽤나 성가시다. 다만, 상황증거가 되는 것이 탈부脫稃(왕겨를 제거하는 일)를 위한 목제 절구나석제 갈판 같은 도구류와 쌀을 가열하는 데 쓰인 토기의 존재이다. 토기와 갈판은 완신세의 개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장강 유역에도 출현한다. 지금으로서는 쌀을 끓이고, 알곡을 찧는 도구 등의 유물 자체를 직접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모순은 없다. 


대저 야생 벼가 탈립성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익은 알곡이 언제나 이삭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동물에게 먹혀 버려 자손을 남길 수 없다. 운 좋게 동물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알곡이 그대로 달린 이삭이 지면에 이르면 한곳에서 많은 종자의 싹이 나게 되어 이후 생장에 불리해진다. 그러므로 익은 알곡은 저절로 지면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야생 벼가 탈립되는 장치는 벼알가지와 붙어 있는 알곡의 아랫부분에 떨켜라는 조직이 생김으로써 작동한다. 알곡이 익으면 그곳에서 맥없이 떨어진다. 그때 알곡의 아랫부분에는 표면의 매끄럽고 얕은 우묵한 곳이 남는다. 그에 반하여 탈립성을 잃은 재배 벼는 이삭에서 알곡을 억지로 잡아당겨 뗄 경우에 알곡의 아랫부분에 작은 혹 모양의 돌기가 남는다. 


이런 알곡 아랫부분 형상의 차이에서 야생 벼와 재배 벼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 책의 감수자인 사토 요이치佐藤洋一 씨였다(佐藤 1996). 사토 씨는 하모도 유적에서 출토된 벼 알곡을 전자현미경으로 공들여 관찰하고, 그곳에 야생형과 재배형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걸 밝혔다. 이 판별법은 그뒤 중국인과 미국인 연구자에게 이어져, 절강성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을 대상으로 활발한 연구가 행해지게 된다.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정위엔페이鄭雲飛 씨 등은 전라산 유적과 그와 거의 동시기의 동향라가각 유적(마가빈 문화)에서는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며, 이 두 유적보다 1000년쯤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는 약6대4의 비율이라고 보고한다(鄭, 孫, 陳 2007). 정씨 등에 의하면,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은 현재의 자포니카형 재배 벼의 그에 합치한다고 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자포니카형과 인디카형의 재배 벼는 각각 독립하여 재배화되었을 것이고, 중국 장강 유역에서 가장 일찍 재배화된 것은 자포니카형이라는 상정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또 정위엔페이 씨는 다른 논문에서 상산 유적의 출토품을 다루어, 그곳에서도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을 지닌 알곡이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鄭, 孫 2007). 매우 흥미로운 자료인데, 표본의 수가 지극히 적은 것 같아 결론을 내기에는 조금 더 비슷한 사례의 증가를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미국인으로 현재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일하는 D. 풀러(중국 이름 博稻鎌) 씨 등도 전라산 유적 출토 알곡의 분석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들은 1185알의 알곡을 조사해, 그 가운데 39%가 야생형, 24%가 재배형, 그리고 나머지대부분(25%)은 야생형인지 재배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미성숙 알곡이라고 한다.


미성숙 알곡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풀러 씨 등의 생각은 이러하다. 야생 벼의 등숙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알곡이 완전히 익는 것을 기다려 채집하려고 하면 이미 그때에는 대부분의 알곡이 떨어지게 된다. 효율 좋게 대량으로 모으려면 일부는 거의 익었지만, 미성숙인 것도 꽤 남아 있는 단계에 채집하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채집한 알곡 안에는 미성숙인 것이 일정량 섞이게 된다. 


미성숙인 알곡까지 함께 훑어 버린 듯한 야생 벼의 수확법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진화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벼가 아닌 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힐먼 등의 외알밀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등숙 시기 직전의 외알밀을 계속 베어 그 가운데 일부를 파종하면 몇 십 년이란 단기간에 탈립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배종'이 출현하는 일이 나타난다(Hilman and Davies 1992). 이것이 벼에도 해당된다고 하면, 야생 벼를 채집하는 선사인의 평범한 욕심쟁이가 우연히 야생 벼에서 비탈립성이란 형질의 진화를 재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게다가 그것은 매우 단기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야생 벼 채집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재배종'이 출현했다고 적어도 겉보기는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암시한다. 즉, 그럼1-4의 ①-③의 여러 단계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 순서로 연달아 일어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빠른 연쇄반응으로 단기간에 연속하여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고자료로 완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탈립성을 잃은 재배형이 출현해도 그주변에 아직 많은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다면, 선사인들은 변함없이 그 두 가지를 계속 수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유적에서도 두 유형이 남아 있다. 전라산 유적과 하모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알곡이 이삭에 달린 채로 남아 있는 포기 쪽이 더 많은 종자를 회수할 가능성이높기 때문에, 재배형의 비율은 서서히 증가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재배형이 늘어나더라도 야생종과 혼재하는 상태에 있는 한 수확된 알곡에 야생종의 그것이 일정량 포함되는 일은피할 수 없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고 기본적으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만, 약간은 자연교잡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야생 벼의 탈립성 형질은 재배 벼의 비탈립성 형질에 대하여 우성이기 때문에, 둘이 교잡할 경우 다음세대의 포기는 탈립성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배종과 야생종이 같은 장소에서 자라고 있으면, 재배종의 종자만 수확하는 일이 곤란하고 그렇게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재 장강 유역의 벼농사 지대를 다녀도 실제로 보이는 건 논에 심는 재배종뿐이다. 논 안은 물론, 농수로의 주변과 늪과 호수 주위에도 야생 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모도 문화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7000년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6000년 전쯤을 정점으로하는 온난기, 힙시서멀기 이후 기온이 서서히 냉량, 건조해지면서 야생 벼의 군락은 완신세 초기에 북상했던 것과 반대로 서서히 남하하여, 이윽고 장강 유역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원래 야생 벼가 번성했던 토지가 논과 양어장으로 조성되어 간신히 남아 있던 군락도 '잡초'로 여겨져 구제되어 버렸다는 인위적 영향이다. 아마 이 두 가지가 야생 벼의 소멸에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적에 남아 있던 알곡의 형상을 조사하여 이 문제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있는 고고자료는 아직 그것을 허락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의 경우에는 또 다른 선입관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 선입관이란 마을 주변의 자연습지에는 아직 야생 벼가 생육하고 있더라도 이미 그것을 채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오직 인공 논에서 재배된 재배종만 수확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유적에서는 재배종의 알곡밖에 출토되지 않는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다. 꽃가루의 수명은 몇 분 정도로 짧아 멀리까지 날아가서 다른 꽃을 수분시킬 수는 없다. 이삭 패는 시기가 같은 품종이어도 20미터 떨어져 있으면 교잡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배형의 포기를 야생종이 자생하는 자연습지가 아닌 그것과는 별도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농지 -이곳을 '논'이라 불러도 좋다- 에 재배하게 되면, 탈립성이란 형질도 유전적으로 고정된다. 또한 인공 농지가 있으면 물높이도 조절할 수 있고, 벼와 경합하는 잡초도 제거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연습지에 야생 벼와 섞어 심는 경우와 비교하여, 더욱 안정적으로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사람의 쪽에서 바라보면, 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투하하는 노동력의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수확한 알곡을 봄에 습지에 파종한 다음 가을의 수확을 기다릴 뿐과 같은 정도라면 일다운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익은 알곡을 수확하는 것도, 마름과 가시연의 열매를 모으거나 산에서 도토리를 줍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야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감상이지 자신들이 만들어 냈다는 의식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그에 반하여 인공 농지=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걸 생각하면, 먼저 그 조성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차이이다. 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 수로와 논두렁을 수복하거나, 물높이를 조절하거나,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상적인 작업의 연속이다. 자연히 쌀은 다른 채집 식물 먹을거리와는 별개로 특별해지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란 의식이 싹텄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벼농사 문화란 '벼농사를 영위하는 민족 사이에서 대부분 공통으로 인정되는 벼농사와 복합된 문화 요소, 즉 생산기술과 사회양식, 신앙과 의례, 생활양식 등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진 하나의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渡部 1987). '벼농사 문화'란 단어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논에서 인공 재배를 개시한 이후가 되어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베어 거둘 뿐, 그것을 벼농사의 '생산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신앙과 의례'에 대해서는 한술 더 뜬다. 벼농사 농경민은 1년을 통틀어 벼농사에 관한 제사를 집행한다. 정원의 예축의례를 시작으로 파종과 모내기, 벌레 쫓기, 베어 거두기와 절일마다 그를 행한다. 이와 같이 하나로 이어진 의례의 배경에는 벼의 풍양을 관장하는 신들의 체계가 있고, 그 유래를 이야기하는 신화가 있다. 그래야 벼농사에 관한 '신앙과 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논농사가 시작되어 벼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생업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단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문화'가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단 그 단계가 되어도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을 벼(쌀)에만 의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야의 식물을 모으고, 동물을 잡고, 물고기를 붙잡는 일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에 따라 다른 생업이 점하는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더욱더 급해져 갔다.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급해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한 가지는 농지의 확대이다. 마을 주변은 이윽고 벼이삭이 파도를 치는 논으로 가득해졌다. 그 이상으로 경작 적지를 얻을 수 없게 되거나, 구할 수 있어도 거기까지 거리가너무 멀거나 하면 마을사람 가운데 일부가 신천지를 구하러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벼농사의 '전파'라든지 '확산'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새로 마을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 결과이다. 


또 다른 한 방법은 집약화이다. 인구가 2배로 늘었다고 해서 반드시 논 면적도 2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같은 면적에서 지금까지보다 2배의 수확량을 올릴 수 있다면 따로 농지를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 단숨에 2배라고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벼는 그러한 인간의 방자함에 답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돌연변이에 의하여 생긴 다수성의 계통을 찾아내, 그것을 보호하면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을 다른 채집식물과 수렵동물에게도 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주변의 나무 가운데 2배의 열매를 다는 도토리 나무가 때마침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늘리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뽑아 버리고 대신에 그 도토리를 심는 일 등을 누가 시도할까?아무튼 산이 그 도토리의 숲으로 덮이는 데에는 10년이나 20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수렵과 어로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의 경우는 더욱 곤란하다. 사람들이 지금의 2배로 사슴을 얻고 싶다고 염원해도 도대체 어떤 방책이 있을까? 다른 일을 팽개치고 날마다 사슴 사냥에 몰두하면 단기적으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항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슴의 수는 해마다 감소 일로를 걸을 것이다. 


집약화가 가능하다는 이 특성이야말로 벼를 비롯한 한해살이 초본 작물의 최대 이점인 동시에, 두려운 올가미이기도 하다. 인구의 증가와 작물에 대한 의존도 증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미지옥'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머지않아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그와 같은 사회의 상태를 '벼농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림1-4로 되돌아가 정리하도록 하자. ③의 단게에서 재배 벼의 형질이 출현하는데, 이것은 논에서 벼를 재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날마다 쌀만 먹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획기적이라 부르는 건 다음 ④의 단계이다. 출토 알곡의 형상이 재배형으로 거의 통일된 건 벼의 재배가 야생 벼의 생식지에서 공간적으로 격리된 결과 생식적인 격리도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 전용 농지, 이른바 논은 기술문화사의 큰 혁신이며, 문화 전반의 양상도 차례로 벼농사 중심으로 편성되어 나아간다. 그것을 일러 ⑤'벼농사 문화'의 성립이라 한다. 벼농사라는 생업은 자기증식적으로 비대화되어, 어느 사이에 벼농사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이다. 이 ④의 단계부터 ⑥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도 자연계의 여러 변동과 이변에 따른 대폭적인 인구 감소가 아닌 한 비교적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①부터 ③까지와 ④부터 ⑥까지가 각각 하나의 결말이 되어 그 둘의 사이에는 몇 천 년이란 상당히 오랜 시간적 동떨어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벼농사 문명으로 가는 길


여기에서는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실제 고고자료에 대조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절강성에서 최근 들어 점점 구석기시대 유적의 탐색이 시작된 참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태호 서남의 구릉과 저산지대에 몇 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시대적 자리매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토기와 간석기를 가진다는 의미를 지닌 신석기 문화는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포강浦江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승주嵊州 소황산 유적(약 9000년 전)이 있다. 모두 토기 바탕흙에 대량의 벼 알곡이 섞여 있으며 유적 토양에서도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먹을거리로 벼를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재배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나뉘고 있다. 대량으로 출토된 석제 갈판과 갈돌이 벼의 알곡을 가는 데 쓰였는지, 또는 견과 등을 갈아 으깨기 위하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다수를 점하는 건 입구가 크고 밖으로 벌어지는 세면기 같은 모양으로, 표면에는 붉은색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는 끓이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적에서 주먹 크기의냇돌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그것을 달구어 '세면기'에 넣어 끓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의 농촌 요리 등에도 있는 이른바 스톤 보일링이란 방법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국을 끓이는 데에는 적합하더라도 밥을 짓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산과 소황산 두 유적이 표고 50미터 정도의 산간 분지에 위치하는 것에 대하여, 약 8000년 전부터 거주가 시작된 소산蕭山 과호교 유적의 현재 지표면의 높이는 불과 표고 4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당연히 당시 거주면의 높이는 가장 낮아진다. 이 유적은 가을의 사리일 때 바닷물이 역류하는 것으로 유명한 전당강의 바로 옆에 있다. 8000년 전이라면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유적은 7000년 전쯤까지는 바다 속에 잠겨 버렸다. 그것을 굳이 저지대에 마을을 이룬 건 '물가'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생업양식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출토된 동물뼈를 보아도 포유류로는 사슴류와 물소(야생이라 생각됨), 파충류로는 거북류와 양자강 악어, 조류로는 기러기와 오리류 및 두루미가 주체를 점하고 있어, 그 상정을 뒷받침한다. 출토된 식물의 씨앗을 보아도, 남방멧대추, 복숭아, 각종 견과류 같은 산의 산물과 함께 마름과 가시연이 출토된다.


벼도 마름이나 가시연과 마찬가지로 '물가'의 채집 식물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정위엔페이 씨 등은 알곡의 형상에 대하여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약 6대4라고 보고한다. 재배형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탈립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고, 채집을 계속하면서 자연히 출현할 수 있는 형질이다. 기본적으로는 벼도 모두 채집된 것이라 생각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상산과 소황산을 비교하면, 토기의 기종 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명확하게 끓이는 용도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기종인 '솥'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식생활에서 식물질 먹을거리 중에서도 쌀의 비중이 꽤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인공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가능성도버리지 못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7000-5500년 전이라 연대를 부여하는 하모도 문화이다. 하모도와 전라산 같은 유적이 늘 물에 잠길 듯한 저습지에서 경영되었다는 건 앞에서 서술했다. 기본적으로 과호교 문화와 마찬가지로 '물가'의 생업 전략을 취했다. 벼잎의 세포 화석 밀도가 높은 토층이 몇 층이나 발견된다는 것을 중시한다면, 이 시기에 이미야생 벼의 생식지로부터 공간적으로 격리된 '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에 대해 말하면 '솥'이 주체를 점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지만 쌀을 찌기 위한 전용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시루가 출현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로서 쌀의 중요성이 다른 채집 식물에 비해 한 등급 위의 존재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하면 곧바로 상기되는 것이 물소와 사슴의 견갑골로 만든 '뼈보습'이다. 이것은 기둥 구멍과 저장 구덩이의 굴삭, 물가의 둑 등의 토목작업에도 쓰인 도구로서 일괄적으로 농기구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는데, 흙을 쌓아 올려 간단한 두둑을 만드는 농작업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모도 문화가 그것 이전의 여러 문화와 크게 다른 점은 정신생활에 관한 기물이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토제와 골제 상 또는 토기 표면의 선각화로 직접 지각할 수 있는 형태의 동식물과 인물의 묘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그림1-5). 토제 동물상에는 돼지(멧돼지), 양(?), 물소, 코끼리, 새, 물고기 등이 있다. 토기 표면에 선각된 사례와 함께 그들 동물이 가축 또는 수렵 대상으로 많이 구할 수 있기를 기구하는 유감주술에 관한 주물이라 생각한다.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발의 외면에 묘사된 '벼이삭 문양'(그림1-5의 7)은 벼의 풍년 기원에 관련된다. 이른바 '오엽 문양'(그림1-5의 8)에 대해서는 제사용 길상물인 '만년청 분재' 또는 어떠한 약초라는 견해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삭 패는 시기의 벼이삭이라 하는 설이 있다. '물고기와 물풀 문양'(그림1-5의 9)에 대해서는 짝을 이루는 동물이 새인지 물고기인지 견해가 나뉘는데, 적어도 오른쪽 그림에 대해서는 물고기와 벼를 같은 화면에 묘사해 둘 모두 풍부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란 설이 옮게 여겨진다. 식물 중에는 특히 벼가 중시되었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림1-5. 하모도/ 마가빈 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3, 6 라가각 유적, 기타는 하모도 유적)




하모도 문화가 항주만 남쪽 기슭의 영소寧紹 평야에 전개된 데 비해, 항주만 북쪽 기슭의 항가호杭嘉湖 평야는 마가빈 문화의 분포 구역이다. 연대로 보면 7000-5800년 전으로 둘 수 있다. 이 지역은 영소 평야와는 달리, 산과 구릉이 거의 없는 낮은 평지이다. 한번 홍수라도 일어나면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보는 한, 생업경제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하모도 문화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물가' 그리고 벼로 기울어짐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 확실한 '논'이 이 마가빈 문화의 후기(6000년 전쯤)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초혜산草鞋山과 곤산시昆山市의 작돈綽墩 유적이다. 상세한 건 이 책에 실린 우다 노츠宇田津 논문을 보시길 바란다. 물론 이 연대는 늦어도 그 시기까지에 '논'이 출현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이 1000년 또는 2000년 더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마가빈 문화 전기의 유적인 동향 라가각 유적에서는 토제 남성 전신상이 출토되었다(그림1-5의 6). 그 과장된 남성기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농지를 여성, 경운도구를 남성이라 보는 성적 상징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Eliade 1968).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는 특이한 목제품으로 '남경형'이란 기물이 있다. 문자 그대로 남근을 본뜬 것인데, 이것도 똑같은 상징주의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村 1999). 그러한 점에서 마가빈 문화 전기까지로 논의 창시가 거슬러 올라가 수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에 이어지는 것이 송택崧澤 문화로 5800-5300년 전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동물 유존체에수렵대상 짐승이 점하는 비율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가축인 돼지의 비율이 증가한다. 저습지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물질 유물이 남기가 나쁜 데에도 기인할 것인데, 벼 이외의 채집 식물의 검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점은 생업형태가 다각적 경제에서 벼농사 전업 경제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에 보조를 맞추듯 쌀 조리 전용 도구인 시루와 세발솥이 끓이는 용도의 토기를 주로 점하게 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징호澄湖 유적에서는 논터가 검출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데, 논 한 배미당 면적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정신생활면으로 눈을 돌리면,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에서 성행하던 토제상과 토기 회화가 거의 모습을 감추는 것과 함께, 형상 토기(그 일부에 동물과 인물을 본뜬 토기)와 채색 토기, 그리고 토기 표면의 추상부호가 눈에띈다. 채색과 조소, 선각이 장신된 것은 이질泥質 회도灰陶(불순물을 제거한 점토를 써서 환원염소성한 회색 토기)또는 흑피도(이질 회도의 표면에 탄소를 부착한 흑색 토기)의 두, 호, 관 같은 저장, 공헌供献 토기류이다. 아마 벼의 풍작을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에 관련된 기물이라 생각한다.


이들 특이한 토기류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데, 그러한 무덤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같은 초현기初現期의 연옥 제품이 동반되는 일이 많고, 또 그와 같은 무덤이 공동묘지 안의 한 구획에 집중되어 설치된 경우가 많다. 즉, 이 시기에는 제사의 복잡화와 제사집행자가 되는 특정집단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동묘지는 하모도 문화, 마가빈 문화의 시기부터 존재하는데, 그 단계에서는 무덤의 배열, 부장품의 종류, 많고 적음, 정교함과 조잡함 등으로 집단의 차이를 유추하기가 곤란했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송택 문화의 물질문화를 계승하여 5300년 전쯤에 시작되고, 그로부터 800년 정도 이어진 것이 양저良渚 문화이다. 무덤에 대량의 옥기(=연옥 제품)를 부장한 집단은 자신들만의 묘지를 영위하게 된다. 그것은 종종 대규모 봉분(흙을 쌓아 올린 흙더미)과 대상묘(산비탈을 깎아낸 테라스)의 형태를 취한다. 제사를 집행하는 집단이 일반 서민과 동떨어진 지위를 손에 넣고 묘지의 조성에 대량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옥기에는 매우 정세한 문양이 새겨진다(그림1-6). 아직 금속기가 없던 시대이다. 석영 같은 단단한 돌조각이라든지 상어의 이빨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한 점의 옥기를 제작하는 데에만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무덤에 그것을 수십 점이나 넣기도 했기에, 전문 공인이 언제나 그 제작에 종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도의 전업생산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옥기만이 아니다. 복잡, 정치한 음각선 문양을 장식한 토기류와 각종 석기류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공인에 의한 수공업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벼농사 농업의 집약화였다. 돌쟁기는 송택 문화기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양저 문화기에는 대형화되어 그중에는 길이 6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가축(아마 물소)이 견인하지 않았을까 한다. 쟁기를 끌고 다니려면 작은 면적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 논에서는 사정이 나쁘다. 현대의 논과 그만큼 차이가 없는 논이 이 시기쯤에는 출현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확 도구인 돌낫이 널리 분포하게 된 점의 의미도 크다. 논 안에는 이미 탈립성의 그루는 존재하지 않고 품종개량의 진전에 의하여 벼의 익음때도 균일화되어 벼 그루를 묶음으로 잡아서 밑동을 벨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돌쟁기와 돌낫 등의 석기에 대해서도 특정 생산지에서 전업생산이 이루어졌으리라 상정할 수 있는데, 석제 농기구의 생산과 분배를 정치적 지배자가 좌지우지하고, 공납품으로 받는 벼의 증산을 도모했을 가능성까지 있다. 그 보상으로 지방의 지배층에게 하사한 것이 각종 옥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Nakamura 2005).


이 시기의 제사, 종교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신인수면문神人獸面紋(신의 체구와 괴수의 안면을 본뜬 문양)'이다(그림1-6의 2). 주로 옥기에 도상으로 등장하는데, 상아기와 토기에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것은 흉악한 짐승 신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천공을 비약할 수 있는 신성神聖 왕=현인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신인수면문 옥기의 분포는 양저 문화 분포지역의 전체에 퍼져 있다. 물론 시대적 변천은 있지만, 옥기의 형태, 문양의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성은 일관되게 계속 유지된다. 양저 문화기에 신 관념이 통일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크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즈 메리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면(메리엄 1973), 신인수면문은 지배를 시각적으로 납득시키는 일종의 미란다 원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림1-6. 양저 문화의 옥기(모두 절강성 여항 반산 유적 출토)





옥기와 석기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정치적 지배자가 거주한 곳이 절강성 항주시의 서교에 전개된 양저 유적군이다. 동서 약 10킬로미터, 남북 약 6킬로미터의 범위 안에서 지금까지 130여 곳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면적 약 30평방미터의 막각산莫角山 토대, 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산塘山 토루, 거기에 반산反山 봉분, 요산瑤山대상묘 등의 옥기 후장묘는 특히 유명하다. 


이 양저 유적군에서 최근 큰 발견이 있었다. 막각산 토대와 반산 봉분을 둘러싼 위치에 동서 1500m, 남북 1800m, 면적 270헥타르의 흙을 쌓은 위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 규모는 산서성의 도사陶寺 유적과 견줄 신석기시대 중국 최대의 위벽 마을이다.(연대로는 도사 유적보다 몇 백 년 빠를 가능성이 높다). 양저 유적군의 경우 위벽 밖에도 유적이 농밀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실제 거주 구역은 더욱 넓을 것이 확실하다. 그 넓이는'하왕조'의 왕도로 보이는 하남성 이리두二里頭 유적(기원전 1750-1520년쯤)의 300헥타르를 능가한다. 이것을 도시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문명(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civilis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엇보다 도시(civitas)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다(伊東 1985). 그 도시란 농업이 집약화되어 어느새 직접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잉여'(=도시민)이 생겨나는 곳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양저 문화의 돌쟁기와 돌낫 같은 농기구를 그냥 단순히 농업기술사의 관점으로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특별히 사회, 정치사적인 검토 과제라 할 수 있다. 


금속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옥기가 최고의 예기로 기능했다. 그 제작과 사용을 전단하는 자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 옥기 분배를 통하여 정치적 권력을 수중에 넣었다. 그와 같은 정권의 상태를 나는 '옥의 왕권'이라 부른다(中村 2003). 장강 하류에서 꽃이 핀 그 신석기시대 문명은 말할 것도 없이 벼농사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다. 그것은 결국 장강 유역의 다른 지역만이 아니라 황하 유역으로도 파급되어 나아갔다. 그곳은 원래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의 재배지대이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는 힙시서멀기 이후의 서늘하고 건조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농사는 북상하고 있었다. 벼농사 인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이주라고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아마 벼(쌀)는 종교의례에 필수 요소로서, 바꾸어 말하면 문명의 한 요소로서 전해졌던 것이다(中村 2006). 여기에서 우리는 벼농사의 전파와 확산이라고 하는 현상에는 인구학적인 메카니즘과는 또 다른 정치, 종교적 메카니즘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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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유전자변형 작물의 재배가 금지된 국가.

아프리카 대륙; 2개국

알제리(2000년부터)
마다가스카르(2002년부터)


아시아 대륙; 4개국

터키
키르기스스탄
부탄
사우디아라비아


아메리카 대륙; 4개국

벨리즈
페루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유럽 대륙; 28개국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몰타
키프로스
그리스
불가리아
러시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덴마크
헝가리
몰도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슬로베니아
아제르바이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룩세부르크
우크라이나
노르웨이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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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특징

감자는 자잘한 잔뿌리가 발달한다. 이 뿌리는 기껏해야 60cm 정도이다. 그래서 120cm 정도의 뿌리를 내리는 곡식 종류에 비해 감자의 뿌리는 얕은뿌리이다. 그래서 감자는 땅속 깊이 있는 수분이나 양분을 빨아들이기 어렵다. 

감자는 토양의 온도가 10-35˚C일 때 뿌리가 활발히 성장하고, 뿌리의 발달이 최고조인 건 토양의 온도가 15-20˚C 사이일 때이다.

잎(줄기)의 성장은 7-30˚C 사이일 때 일어나는데, 최적인 온도는 20-25˚C에서이다. 기는줄기(포복지)가 성장하는 데에 최적인 온도도 이와 비슷하다.


토양의 온도가 뿌리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


감자의 덩이줄기는 기는줄기가 팽창한 것이다. 이러한 덩이줄기는 짧은 낮의 길이(광주기)로 촉발되어 발달하기 시작하며, 성장호르몬을 분출한다. 토양의 온도가 더 낮으면 더욱 빨리 덩이줄기가 발달하고, 더 많은 덩이줄기가 만들어진다. 덩이줄기에게 최적인 토양 온도는 15-20˚C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감자는 짧은 기는줄기와 싹 들을 가지게 된다. 긴 낮의 길이는 덩이줄기의 발달을 늦추지만, 기는줄기와 싹의 성장에는 이로운 조건이다. 높은 온도도 덩이줄기가 형성되는 걸 방해한다. 만생종은 긴 낮의 길이나 높은 온도에 더 민감한 경우가 많다.  

감자 식물체에 질소가 적고 자당이 많으면 덩이줄기가 더 많이 생긴다. 

덩이줄기는 한번 생기면 빠르게 자라 온대 기후에서 최대 567kg/1200평/일에 이른다. 아래의 도표를 참고하라. 

발아 이후 덩이줄기의 성장



생리학적 숙성

싹이 튼 씨감자를 심으면 작물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다. 이러한 반응의 정도와 수확량 증가의 효과는, 심을 때 씨감자의 생리학적 연령이 어떠한지와 관련이 있다. 

씨감자의 저장 온도는 생리학적 숙성을 조절하는 핵심이다. 저장 온도를 4˚C 이상으로 올리면 씨감자가 휴면에서 깨어나 싹의 성장이 촉진된다. 

이렇게 휴면에서 깨어난 날이 축적될수록, 씨감자를 심을 때 덩이줄기의 생리학적 연령이 결정된다. 

씨감자를 심기 이전에 원하는 수준으로 숙성시키는 정도는 품종별로 다르다.

오래 숙성된 덩이줄기는 조생종을 심을 때나 재배기간이 짧을 때 유리하다. 

최소한으로 숙성시킨 덩이줄기는 수확량을 최대로 올리고자 감자를 재배하는, 재배기간이 긴 지역에 적합하다.

싹이 난 씨감자를 심을 때는 감자 식물체의 간격을 확보해 최적의 성장을 보장하고, 싹에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싹의 숫자와 길이(최대 2cm)를 조절해야 한다. 



토양의 유형과 관리

감자는 보수력이 저마다 다른 모래흙부터 찰흙까지 다양한 토양에서 재배된다. 감자를 재배하기 이상적인 토양은 뿌리가 적절히 숨을 쉴 수 있고, 뿌리의 질병 감염을 최소화하여 덩이줄기가 발달할 수 있는 물빠짐이 잘 되는 구조의 토양이다. 

감자는 pH 5.5-7.0이며 염도가 낮은 토양을 좋아한다. 그러나 감자는 실제로는 pH 4.5-8.5의 토양에서 재배되어, 특정 영양분의 가용성에 뚜렷하게 영향을 미친다. 토양의 pH가 너무 지나치면 여러 방법으로 조정해 주는 것이 좋다.


토양의 pH가 양분의 가용성에 미치는 영향


낮은 pH(산성)에서 감자는 알루미늄과 기타 중금속의 독성만이 아니라, 제한된 인 또는 몰리브덴 가용성으로 고생할 수 있다. pH 7.5 이상(알칼리)에서는 영양분의 가용성, 특히 인과 미량원소가 토양에 충분히 있더라도 그 가용성이 떨어지게 된다. 석회로 토양을 개선할 수 있는데, 적어도 감자를 심기 6개월 전에 뿌려서 산성인 토양을 확실하게 개선해야 한다. 높은 pH의토양에서 재배된 감자는 일반적으로 더뎅이병이 많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농기계로 석회 살포


두둑짓기와 북주기

감자는 두둑이나 둔덕에 심는데, 이는 물빠짐과 통기가 잘 되게 하여 작물의 성장을 돕기 위함이다.

차가운 토양에서 두둑짓기는 토양의 온도를 높여 싹이 더 빨리 트고 초기 성장이 좋아지게 한다.

웃거름을 주면서 덩이줄기 주변의 토양에 비료를 넣고 북을 주면서 두둑을 다시 손보게 된다. 

또한 북주기는 덩이줄기가 최대로 퍼지도록 도우며 빛을 받아 푸르게 되는 걸 막고, 덩이줄기가 더 잘 형성되고 크기가 균등하게 잡히도록 하며 손상의 위험도 줄인다.  

감자 북을 주는 농기계


북을 주어 물빠짐도 잘 되게 하고, 수확도 쉽게 만든다.



물 관리

감자가 커질 때는 1주일에 약 3cm 정도로,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다수확을 위해서는 관개를 하는 게 유리하다.   

물 관리는 덩이줄기의 문제를 최소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덩이줄기가 발달할 때 두둑에 수분을 유지하면 더뎅이병이 생기는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농사철 막바지에 덩이줄기 근처에 물이 너무 많으면 흰가루반점병이나 피목이 생기기 쉽다. 

더뎅이병


물이 너무 많아 피목이 발생


두둑 안의 토양 수분 상태가 고르지 않으면 덩이줄기의 모양이 울퉁불퉁해지고, 기형과 갈라짐이 발생한다. 토양 수분 상태에 10%만 차이가 있어도 심각해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점적관개를 활용할 때는 두둑 상단에 설치해야 한다. 

줄기와 잎을 관리하는 일도 물의 효율성을 최대화하는 데 중요하다. 고온의 환경에서는 토양 표면에서 수분이 증발되어 손실되는 걸 최소화하기 위하여 잎과 줄기가 자라 빨리 그늘이 지도록 관리해야 한다.

토양 수분이 불균등하면 덩이줄기에서 2차 성장이 시작될 수 있다.


물이 너무 많으면 감자가 갈라진다.


감자의 보호

겹무늬병과 잎마름병이 감자에 치명적인 주요 질병이다. 

무늬병


겹무늬병은 잎부터 어린 덩이줄기에 퍼지는데, 특히 조생종에게 큰 문제가 된다. 잎을 심각하게 말려 버리는데, 제대로 관리하면 감염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잎마름병은 차고 습한 조건에서 발생하고, 통제가 안 되면 덩이줄기로 빠르게 퍼져 덩이줄기가 갈변하고 썩어 버린다.

또 다양한 모자이크 바이러스도 감자 잎의 성장에 영향을 미쳐 수확량을 떨어뜨린다. 진딧물과 이를 옮기는 매개체도 통제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독립생활 선충 들과 감자 시스트 선충도 치명적인 손상을 불러올 수 있다. 감자의 손실을 최소화하려면 다양한 작물을 돌려짓기하는 게 좋다. 

흑지병이 뿌리를 손상시킴

흑지병이 퍼진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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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우 5대 식량작물인 벼, 보리, 콩, 옥수수, 감자는 정부에서 육종을 주도하여 생산과 보급까지 책임진다. 세계의 2대 유전자변형 작물인 콩과 옥수수가 한국 시장에서 재배되지 못한 까닭 -곡물사료와 식용원료로 대량으로 수입되기는 하지만- 이 여기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연구기관인 농촌진흥청에서 유전자변형 벼를 개발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시끌벅적하다. 정부 측에선 일단 원천기술 확보와 밥쌀 이외의 산업용 원료로 상용화하겠다는 방침이나, 시민단체 등에선 그와 같은 입장이 언제 급변할지 모른다며 반대 중이다.

유전자변형 작물의 최대 재배지인 미국의 사례와 한국의 상황은 좀 다르나, 개발도상국인 남미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를 생각하면 시민단체의 우려가 현실화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유전자변형 작물의 재배를 왜 반대하는지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관점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단순히 공포에 의지한 반대는 무지의 장막이 걷히며 언제든 부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참 어려워 머리가 복잡하고 아프다.

한 예로 이런 연구도 반대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전자변형 작물의 재배에 찬성하는 입장의 의견 가운데 하나로, 유전자변형 작물의 재배가 농약의 사용을 줄임으로써 그렇지 않은 작물의 재배보다 더 '친환경'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유전자변형 옥수수의 경우 그렇지 않은 작물보다 살충제의 사용량이 11.2%, 제초제의 사용량이 13년 동안 1.3% 감소했다. 하지만 대두의 경우 그렇지 않은 작물보다 28%의 제초제를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유전자변형 작물의 맞춤형 제초제인 글리포세이트에 내성이 생긴 이른바 슈퍼잡초가 증가하였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제초제 저항성 잡초가 증가함으로써 오히려 환경에 더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은 물론, 농민의 수익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옥수수의 경우에도 점차 내성을 지닌 슈퍼잡초가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즉,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해치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변형 작물의 재배를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이러한 '지속가능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의 농업 관행이다. 유전자변형 작물이 아니더라도 현행 농업은 제초제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슈퍼잡초를 양산하고 있다. 몇 년 전 충북 농업기술원의 발표에 의하면, 충북의 논에서 발견되는 잡초 가운데 제초제에 내성이 생긴 것들이 약 26% 정도 된다는 발표를 한 바 있다.


그러니 현행 농업 관행을 그대로 두면서 단순히 유전자변형 작물의 환경 유해성만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셈이다. 전희식 선생님이 [소농은 혁명이다]에서 현재의 농업관행을 전환하여 생태적 농사를 짓는 소농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러한 이유들로 그 근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농업의 다원적 혜택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실제 그러한 혜택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농법도 전환되어야 타당성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농업이 뿌리를 내리고 실천되는 곳이라면 유전자변형 작물을 이용한 농사의 도입도 막아낼 근거가 마련되지 않을까? 유럽의 사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이와 유사한 상황인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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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한국의 농업 관련된 사람들을 흥분시켰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의 발견. 

물론 그것이 의미는 있으나 가장 오래된 재배 벼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그 볍씨를 가지고 한반도가 최고의 벼농사 지역이었다는 둥, 그래서 우리 민족이 대단하다는 둥 하는 류의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란다. 그러니 너무 흥분하지 마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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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ygo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35644


소로리볍씨 비해 가와지볍씨는 확실한 재배벼
소로리볍씨는 반재배단계와 초기농경단계 사이 순화벼
[1190호] 2014년 09월 18일 (목) 12:04:03이병우 기자  woo@mygoyang.com

1회 가와지볍씨, 발굴에서 출토까지 
2회 벼농사 기원, 청동기에서 신석기로
3회 3천년 여주 흔암리볍씨와 뭐가 다른가  
4회 1만5천년 청원 소로리 볍씨와 뭐가 다른가   
5회 5천년 가와지볍씨, 지역문화브랜드를 향해

<기획> 5천년 가와지볍씨, 한반도 벼농사 기원을 밝히다

1991년 일산신도시 문화유적조사(단장 손보기)로 발굴된 가와지볍씨 12톨은 약 5020년 전의 것으로 밝혀진 볍씨로 큰 브랜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지난 3월에는 ‘고양 가와지볍씨 박물관’을 개관해 시민들에게 가와지볍씨를 알리면서 브랜드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고양 가와지볍씨는 1991년 6월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가와지 유적의 신석기시대 토층에서 발굴된 4340전인 B.C 2300년 경의 자포니카 볍씨 4톨로, 미국 베타연구소의 연도측정 결과 5000년 전의 볍씨임이 확인됐다. 

고양시는 이 가와지볍씨가 ‘한반도 최초의 재배볍씨’임을 뒷받침하는 여러 연구논문과 함께 한반도에서 독자적인 벼농사 가능성까지 열어주는 연구결과와 고고학적 성과들을 발표하며 발빠른 콘텐츠 선점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청원 소로리볍씨가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고 오래된 볍씨로 학계에 주목을 받아왔다. 이에 고양 가와지볍씨와 청원 소로리볍씨는 어떤 다른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본다. 

소로리볍씨, 가장 오래된 볍씨 확인돼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볍씨가 출토됐다. 바로 청원 소로리 볍씨다. 청원 소로리 볍씨는 1997~1998년 오창과학산업단지 건설 예정지인 옥산면 소로리 문화유적 지표조사 과정에서 발견됐다. 당시 출토된 볍씨는 고대벼 18톨, 유사벼 41톨 등 모두 59톨로 확인됐다. 볍씨뿐만이 아니라 이 유적 일대에는 찍개, 긁개, 홈날, 몸돌, 격지 등의 구석기 유물이 넓은 범위에 걸쳐 수습됐다.

  
▲ 고대볍씨(자포니카)의 출토 상태 모습



특히 출토된 볍씨는 바로 서울대학교 AMS(방사선탄소연대측정) 연구실과 미국의 지오크론(Geochron Lab)연구실로 보내져, 1만3000년 ~ 1만5000년 전의 절대연대값을 얻어 청원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볍씨임이 판명됐다. 

청원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고고학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알려진 것은 중국 호남성 옥첨암 동굴의 순화볍씨였다. 청원 소로리 볍씨는 이보다 3000~4000년 전의 볍씨로 밝혀진 것이다.  

소로리 볍씨가 1만 5000년전 것으로 판명되자 일부 학계에서 의문이 제기됐다. 그 의문은 크게 2가지였는데, 하나는 ‘1만 5000년 전은 구석기말 빙기의 끝무렵인데 한반도에서 아열대 식물로 알려진 벼가 추운 기후에서 자랄 수 있었을까’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또 그 벼가 야생벼인지, 재배벼인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 소로리볍씨의 소지경이 잘라진 모습.


그 고증을 얻기 위해 당시 청주MBC 취재팀이 국립 작물시험장 춘천출장소에서 냉해실험을 통해 벼가 자랄 수 있는 온도를 실험한 결과, 벼가 자연상태에서 최저 발아온도가 섭씨 20도로 알려졌지만, 실험결과 13도에서도 70%이상이 발아되어 생성되는 연구 결과를 얻게되었다. 냉해실험을 통해 따뜻한 기후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벼가 기후적응을 잘하는 식물로 1만5000년전의 학설이 긍정적으로 무게가 실려진 것이다.

이융조 교수 “재배벼 단정할 수 없다”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는 고대벼의 소지경 형태는 야생벼의 길쭉하고 뾰족한 것과는 다르게 짤림이 잘 되지 않았다. SEM 촬영결과 외부의 힘에 의해 잘라진 특징이 관찰되어, 재배벼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이융조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는 그동안 1만3920bp(before present)의 연대값을 기초해 ‘약 1만5000년 전’으로 발표했으나, 이를 다시 미국 캠브리지대의 세계 공용 측정프로그램으로 계산한 결과 BC 1만5118년전으로 밝혀져 그 연대를 ‘약 1만7000년 전’으로 수정한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또한 “지금까지는 학명없이 ‘소로리볍씨’로만 불렀으나 ‘Oryza sative coreaca(오리자 사티바 코레아카)’ 즉, ‘한국의 고대벼’ 라는 학명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이융조 이사장은 청원 소로리 볍씨에 대해 “재배벼의 특징은 가지고 있지만 재배벼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단지 재배벼 이전 단계인 ‘순화벼’라는 명칭을 청원 소로리 볍씨에 부여했다. 이 이사장은 “소로리 볍씨의 연대가 1만7000년 전으로 측정된 것, 아생벼와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보이는 소지경의 절단면이 SEM으로 관찰된 점, 토탄 출토지점 옆에서 많은 구석기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 등 반재배단계와 초기 농경단계 사이의 순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벼라고 생각된다. 즉 소로리 볍씨는 한국 재배벼의 조상이며,순화초기의 벼라고 보는 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조용구 충북대 식물자원학과 교수는 “현재 국내에는 잡초벼가 있을 뿐 벼의 선조라고 할 수 있는 야생벼가 존재하지 않는 점, 또한 소로리볍씨는 현존하는 유적 실물 중 가장 연대가 높은 점 등을 비추어 볼 때, 이는 인간이 야생상태의 벼로부터 차츰 파종하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자연 선발되는 단계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서학수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는 “청원 소로리 볍씨의 DNA분석 결과, 현재의 재배벼·유사벼와는 다른 39.6%의 낮은 유전적 유사성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소로리볍씨와 야생벼와는 57% 정도의 유사도를 보이는 연구도 있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야생벼는 낟알이 소지경으로부터 자연적으로 잘 떨어지는 탈립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야생벼의 소지경은 매우 매끄럽다. 이에 반해 재배벼는 소지경 상태가 매우 거칠다. 가와지볍씨의 소지경 상태를 전자주사현미경(SEM)으로 촬영한 결과 재배벼의 특성인 거친 단면이 나타났다.  
이러한 모든 점을 고려할 때 청원 소로리 볍씨는 재배벼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재배벼라고 단정할 수 없다.  

  
▲ BBC 뉴스(인터넷판)에 소개된 "세계 최고의 벼가 발견되다"(2013.10.21)
  

 

소로리볍씨가 가와지볍씨로 맥 이어져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을 비롯해 고 박태식 박사,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은 비록 적은 개체수이긴 하지만 온전한 청원 소로리 출토 볍씨 13톨과 고양 가와지 출토 볍씨의 크기와 볍씨 형태를 비교했다. 그 결과 소로리 출토 볍씨는 유전적으로 변이가 크게 분포하고 있으며,고양 가와지 출토 볍씨보다 약간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소로리 볍씨는 자포니카(japonica)에 가까운 편이었고,인디카(indica)에 가까운 것이 1톨,자포니카(javanica)로 추정되는 것이 1톨이었다.

  
▲ 볍씨의 유입경로(이융조, 박태식, 우종윤. 2013)
자포니카(japonica) 쌀은 모양새가 둥글고 굵은 단립형 쌀이다. 자포니카 쌀은 한반도, 일본, 중국 북부에서만 주로 소비가 되며,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쌀 중 10% 가량뿐이다. 이에 반해 인디카(Indica) 쌀은 전 세계 쌀의 90%를 차지하는, 쌀의 대표적인 품종으로 ‘안남미’라고도 부른다. 태국쌀, 필리핀쌀, 베트남쌀 등이 모두 안남미이다. 인디카는 모양이 길쭉하고, 찰기가 없어서 밥알이 분리된다. 따라서, 밥그릇을 한 손으로 들고 기다란 나무젓가락을 사용해 마시는 방식으로 먹는다. 

이들 연구자들은 소로리와 가와지의 두 출토 볍씨 사이에 있던 긴 공백에도 소로리 출토 볍씨가 가와지 출토 볍씨로 맥이 이어져 약간 작고 약간 긴 쪽으로 균일화되었다고 추정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에 의한 선택, 또는 벼를 재배해야 할 충분한 생존의 압력이 작용했으리라 추정되지만 앞으로 좀 더 많은 유물이 또 여러 곳에서 나와야 보다 확실한 추론이 가능하다고 본다고 여겼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들 연구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남쪽지방에서 유입된 여러 가지 벼(고대벼와 유사벼의 4종류)가 우리 선조의 지혜와 자연선택에 의하여 자포니카에 가까운  재배벼인 고대벼로 종의 분화에 이르른 가와지벼는 당시 사회변화에 큰 영향을 주어 고조선을 비롯한 여러 국가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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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을 잘 키우려면 흙을 건강하게 잘 살려야 한다. 
우리가 물과 비료를 주는 건 순간적이지만, 건강한 흙이 물과 양분, 공기를 붙들고 조절하는 건 지속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논어, 맹자에서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수없이 들은 것처럼 지엽과 말단이 아니라 근본에 힘써야 한다.

유기농업에 대한 비판은 유기농업이 근본이 아닌 지엽과 말단에 치중하면서 일어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유기농업을 버려야 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근본에 힘쓰도록 하면 될 것이기에.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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