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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농민들의 자살 문제를 다룬 글을 보아서 서툴지만 한국어로 옮겼다.

미국의 농민들은 일반인에 비해 5배, 심지어 퇴역군인에 비해서도 2배 이상 높은 자살율을 기록하고 있단다. 그만큼 삶의 벼랑으로 몰렸다는 방증이겠다. 그나마 밀의 경우 최저가격 보장제가 있어 버티지만, 현재 가격의 5배는 받아야 수지타산이 맞는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에서는 한국의 쌀 문제가 겹쳐 보이기도 했다. 

미국은 80년대에도 이미 농장의 위기를 겪으면서 수많은 농민들이 농지를 빼앗기고 자살로 내몰린 적 있다고 하는데, 2010년대인 현재도 그러한 위기가 재현될 조짐이 보이는 것 같다. 80년대의 위기를 맞아 90년대에 유전자변형 작물을 도입하며 그 파도를 넘겼던 건가? 그럼 이제 또 어떤 수단을 동원해 위기를 돌파하려고 할까? 

자연히 미국 이야기를 보면서 한국은 어떤가 되돌아보게 된다. 90년대 한국도 자유무역 질서에 편입되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격변이 일어났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2010년대, 지금 한국의 농민, 농촌, 농업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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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자살율이 퇴역군인의 2배 이상이다. 옛 농민 Debbie Weingarten 씨가 농장 생활에 대한 내부자의 시선과 도울 방법을 전한다. 



작업장은 어두웠지만 창을 통해 빛 줄기가 흘러 들어왔다. 스패너와 스프레이 페인트, Matt Peters 씨가 앉았던 오래된 목제 의자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내가 "여기 냄새가 좋네요. 마치..."라고 말하자, 


"일하고 있는 남자요."라고  Ginnie Peters 씨가 말을 맺었다.


우린 숨을 들이쉬었다. "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날 밤, 그의 유서를 발견한 책상에서 잠시 멈추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이라고 시작해서 계속 이어졌다.“나는 고통스러웠어요.”

2011년 5월 12일, 매트 씨의 마지막 아침에 그는 농가의 부엌에 서 있었다. on the morning of his last day, 12 May 2011, Matt stood in the kitchen of their farmhouse.

그는“난 생각할 수 없어요. 마비된 느낌이야.”라고 지니 씨에게 말했다. 

농사철이었고, 스트레스가 심했다. 매트 씨는 날씨를 걱정했고, 시간을 어기지 않고 수확을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그는 사흘을 꼬박 새우며 결정을 내리고자 고심했다. 

“난 ‘당신이 아이에게 했듯이, 당신을 데리러 가서 태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걸 기억해요.”라고 지니 씨는 말한다.“그런 다음... 어디로 데리러 가지? 누가 이걸 도와줄 수 있지? 나는 혼자구나 느꼈지요.”

지니 씨는 시간이 지날수록“숨이 막힐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저녁시간에 그의 트럭이 사라졌고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유서를 발견했을 때는 어두워졌다. 지니 씨는“나는 직감했어요.”라고 한다. 그녀는 곧바로 911에 전화했지만, 구급대원들이 트럭을 찾았을 때 매트 씨는 이미 숨을 거두었다. 


Ginnie Peters 씨가 아이오와 주 Perry에 있는 농장 작업장에 돌아왔다. 그녀의 남편 매트 씨가 여기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지니 씨는 남편이 강하고 단호하며, 재밌고 사랑스러웠다고 한다. 그들은 함께 두 아이를 키웠다. 그는 마이티 마우스 노래를 부르면서 별안간 나타나“너희를 구하기 위해 왔다!”고 외쳐 모두를 웃게 만들곤 했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농법에도 진취적이어서 이 지역에서 무경운 농법을 실천하는 최초의 농가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모든 일에서 주는 사람이 되고자 했지 받는 사람이 되려 하지 않았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의 죽음 이후, 지니 씨는 매트 씨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After his death, Ginnie began combing through Matt’s things. “모든 종이조각에서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그가 죽은 날 오후, 낯선 전화번호로 20분간 전화를 건 기록이 나왔다. 

그녀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자 Mike Rosmann 박사가 전화를 받았다. 

“저는 버지니아 피터스입니다. 제 남편이 5월 12일에 자살을 했습니다.”

전화기 사이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너무 걱정했는데 피터스 부인 전화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로즈만 씨가 말했다. 

아이오와 주의 농민인 로즈만 씨는 심리학자이자, 미국에서 유명한 농민 행동건강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전화에 응답하곤 한다. 40년 동안 그는 왜 농민들이 그처럼 엄청난 속도로 목숨을 끊는지 이해하고자 연구해 왔다. 현재, 미국에서 다른 어떤 직업보다 자살율이 높다. 





예전에 저는 아리조나 주에서 채소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도 로즈만 씨에게 전화를 걸었죠. 저는 우울함, 불행한 결혼생활, 새 엄마, 농장 운영을 위해 진 부채에 짓눌려 있었죠.

우린 먹을거리를 재배하고 있었지만, 그걸 구매할 경제력이 없었어요. 일주일에 80시간을 일했지만, 치료사는 물론이고 치과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죠. 늦서리로 피해를 입었을 때, 돈 때문에 계속 다투고 한낮에 빛이 벽을 가로지르는데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농업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요인을 생산자가 통제할 수 없기에, 농사는 늘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이었습니다.”라고 로즈만 씨가 Behavioral Healthcare 저널에 기고했다.“가족농과 목장주의 정서적 안녕은 이러한 변화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지난해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연구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농민, 농업노동자, 목장주, 어민, 임업노동자를 포함하는– 의 자살율이 다른 직종보다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자료에서는 17개 주 농업노동자의 자살율이 일반 인구의 5배에 이른다고 한다.

연구가 발표된 뒤, 뉴스위크 지는 농민의 자살율이 퇴역군인의 2배 이상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아이오와를 포함해 몇몇 주요 농업 주들을 누락한 자료에 바탕을 한 것이기에 과소평가된 결과이다. 로즈만 씨와 다른 전문가들은 알려지지 않은 숫자의 농민들이 자살을 농장의 사고로 위장하기도 하여 농민의 자살율은 더 높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미국 농민의 자살 위기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훨씬 큰 농민의 자살 위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호주의 농민은 4일에한 명 꼴로 자살을 한다. 영국에서는 일주일에 한 명이 자살을 한다. 프랑스에서는 이틀에 한 농민이 자살을 한다. 인도에서는 1995년 이후 27만 명 이상의 농민이 자살했다. 


2016년, 아이오와 주의 농경지 276억 평 가운데 약 절반에 옥수수를 재배했다. Photograph: Audra Mulkern





2014년, 나는 결혼생활과 농사를 그만두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는 농촌 농업의 열렬한 축하를 탐구하는 걸 목표로 했지만, 우리의 생존에 농민이 절실히 필요함에도 우린 그들의 안녕과 복지를 잊어 버리며 산다.

농민으로서 로즈만 씨를 만난 지 4년 뒤, 나는 미국의 농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살 위기를 이해하고자 사진가와 함께 아이오와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렸고, 우린 로즈만 씨 댁의 현관에 서 있었다. 

“신발을 벗을까요?”하고 우리가 물었다. 마이크 씨의 아내 Marilyn 씨가 손을 내저었다. “농가잖아요.”흐렸던 그날, 농가는 따뜻하고 깔끔했다. 마릴린 씨는 밝은 조명의 부엌에서 크랜베리 바를 굽고 있었다.

마이크 씨가 상냥하고 둥근 얼굴에 안경을 얹고, 흰머리와 허연 콧수염이 난 중서부의 산타클로스처럼 나타났다. 1979년, 마이크와 마릴린 씨는 샬럿빌에 있는 버지니아 대학의 교편을 마치고 마이크 씨가 어릴 때 자란 농장 근처인 아이오와 주 Harlan에 약 23만 평의 토지를 구매했다. 그가 동료들에게 농장 생활을 위해 학계를 떠날 거라 이야기하면 믿지 않았다고 한다. 

“전 농민이 멸종위기종이라 말했는데, 우리의 생계를 위해 그들을 필요로 했죠. 다른 아무도 하지 않기에 저는 농민들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라고 로즈만 씨는 말한다. 아이오와 주로 돌아와 로즈만 씨는 옥수수와 대두, 귀리, 목초를 심고 순혈종 소와 닭, 칠면조를 사육했다. 마이크 씨는 심리학 업무를 시작하고, 마릴린 씨는 간호사로 일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   

비가 그치자 마이크 씨는 바지 위로 장화를 올려 신었고, 우린 밖으로 나왔다. 그는 약간 절룩거린다. 1990년 귀리수확기에“순간의 부주의”로 콤바인에 발가락 4개를 잃었고, 그 사건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우린 집 뒤편에 있는 옥수수밭으로 젖은 풀을 헤치며 걸어갔다. 그가 목을 길게 빼며“송아지가 우는 소리가 들리나요?”물었다. “걔들은 막 젖을 뗐어요.” 우린 멈추어서 소리를 들었다. 송아지가 들판을 가로질러 울부짖는 사춘기 소년 같은 소리로 괴로운 듯 울고 있었다. 

1980년대 미국에서는 가족농의 위기가 시작되어 계속 이어졌다. 미국 농촌에 철거용 쇳덩이가 휘둘러졌고, 당시는대공황 이후 농업 경제가 최악의 위기를 맞았다. 시장 가격이 폭락했다. 대출이 접수되었다. 금리가 밤새 2배로 치솟았다. 농민들은 농장을 청산하고 자신의 땅에서 퇴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곡물 엘레베이터에서 항의하며 싸우고, 지역 은행에서 총격을 당했다. 자살율이 급증했다.  

캔자스 농민연합의 대표이자 농민인 Donn Teske 씨는“1980년대에 겪은 농장의 위기는 지옥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지독한 지옥이었다는 뜻이다.”



아이오와 주의 농민이자 심리학자 Mike Rosmann 씨는 농민 행동건강과 미국 농민의 자살 위기에 관해 미국에서 유명한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 Photograph: Audra Mulkern


1985년 봄, 미국 농업운동(AAM)의 대표이자 FarmAid의 역사가인 David Senter 씨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농민들이 워싱턴 DC로 몰려갔다. 몇 주 동안 농민들이 백안관 주변을 점거하고 펜실베니아 애비뉴를 따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농민들은 미국 농무부 건물로 행진하여 검은 십자가 –차압을 당하거나 자살한 희생자의 이름을 적어– 수백 개를 던져 땅바닥에 몰았다. 센터 씨는“무덤 같아 보였지요.”라 회상한다.

로즈만 씨는 농민들의 정신건강 문제 증상을 해결하고자 무료상담을 진행하고, 서비스를 추천하며, 지역사회 행사를 열었다. “사람들이 호의적이지는 않았어요.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요.” 라 로즈만 씨는 말한다. 

농장의 위기가 고조되는 동안 농업이 주인 주에서는 전화상담이 시작되었다. 

“그 영향은 어땠나요?”

“우린 여기에서 자살을 멈추게 했어요.”그는 아이오와에 있는 자신의 지역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그리고 전화상담을 하는 모든 주에서 농업 관련 자살자 수가 줄었습니다.”

1999년, 로즈만 씨는 위스콘신 주에서 시작된 희망의 씨앗 심기(SSOH)라는 운동에 참여하고, 중서부 7개 주에서 보험이 없거나 부분 보험에만 가입한 농민들을 저렴한 행동건강 서비스에 연결시켜 주었다. 2001년, 로즈만 씨는 전무이사가 되었다. 14년 동안 그 단체는 농민들에게 약 50만 건의 전화를 받았고, 1만 명의 농촌 행동건강 전문가를 육성했으며, 10만 이상의 농가에 행동건강 관련 보조금을 제공했다.  

로즈만 씨의 프로그램은 매우 성공적으로 평가되어 Farm and Ranch Stress Assistance Network(FRSAN)라는 전국적인 프로그램의 모델이 되었다. 로즈만 씨와 그 동료들은 농민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길 바랐다. – 하지만 그 프로그램은 2008년 미국 농업법의 일부로 승인을 받긴 했으나 자금 지원은 받지 못했다. 

Tom Harkin 상원의원과 여러 지지적인 의원들이 FRSAN에 예산을 책정하려 했으나, 외면을 당했다. 로즈만 씨는 하원과 상원의 몇몇 의원들이 – 대부분 공화당원– “겉과 속이 달랐다”고 이야기한다. 로즈만 씨는 이메일로“나와 FRSAN를 지원하고자 접근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지원을 약속했지만, 막상 투표를 할 때는 … 예산 지원을 지지하지 않았다 … 건강한 농민이 농업 생산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하면서 국가의 채무를 늘리는 불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한다.”고 보내왔다.

지역과 전국적인 전화상담 서비스를 만들고 농민에게 상담을 제공하는 이 프로그램에는 연간 1800만 달러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추산된다. 로즈만 씨는 자살로 잃어 버리는 농민들이 금전과 농지, 식량이란 형태의 국가 안보 이외에 훨씬 많은 가족과 전체 지역사회의 감정적, 재정적 피해를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2014년, 로즈만 씨의 희망의 씨앗 심기에 대한 연방의 자금 지원이 끊기고 그 프로그램은 종료되었다.



캔자스 주 Onaga에 있는 자신의 농장을 바라보는 John Blaske 씨.  Photograph: Audra Mulkern





9월 하늘은 회색빛이며, 잠시 비가 내린다. John Blaske 씨의 소들은 울타리에 줄지어 있다. 나무에는 매미가 울고 있다. Missouri Farmer Today를 구독한 지 1년이 지났는데, 로즈만 씨가 쓴 기사를 보고 깜짝 놀라 멈추었다. 

“농민의 자살율이 다른 집단보다 더 높다는 CDC가 보고하다”란 제목을 읽었다.  

“난 그 기사를 12번인가 15번은 읽었어요.”라며 아내 Joyce 씨와 식탁에 앉은 블레이스크 씨가 말한다.  “과감하게 정곡을 찔렀어요.” 

이 집의 벽이나 선반의 공간은 6명의 자녀와 13명의 손주들의 기념품과 사진으로 가득하다. 주방의 라디오에서는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손에 억양 변화가 거의 없는 다소 답답한 목소리를 지닌 블레이스크 씨는 키가 크고 극기심이 강하다. 로즈만 씨가 우리를 연결했을 때 우린 겨울 이후 전화로 이야기해 왔다.  “거기 아리조나 날씨는 어때?”하고 전화를 할 때마다 물었다. 그가 몇 년 동안 견뎌 온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농민들에게 공통의 일이란 사실을 깨닫고서, 건강상의 우려와 입원을 통해 여러 번 블레이스크 씨를 따라갔다. 

처음 대화를 나누면서 블레이스크 씨는 나에게“지난 25-30년 동안 자살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라고 이야기했다.

CDC 보고서는 미국 농민들의 자살율이 높은 원인을 제시했다.  거기에는“사회적 고립, 재정적 손실 가능성, 정신건강 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과 꺼려함, 치명적인 도구에 접근하기 쉬움”등이 포함되어 있다.

농민에게 토지의 상실은 죽음보다 더 깊은 상처가 되기에 블레이스크 씨는 직접적으로 공감한다. 1982년 추수감사절, 블레이스크 씨의 난로에서 불똥이 신문상자로 튀었다. 불이 커텐으로 번졌고, 문을 녹이고 집을 모두 태웠다. 블레이스크 씨는 노숙자가 되었다. 

화재 직후 농장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은행은 금리를 7%에서 18%로 인상했다. 블레이스크 씨는 은행과 대부업체를오가며 대출 조건을 재협상하려고 시도했다. 합의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블레이스크 씨는“그들은 우리가 배수로에 사는지 어떤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 가족은 파산을 신청하고 약 32만 평의 토지를 상실했다. 이때부터 블레이스크 씨가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이스와 존 블레이스크 씨가 농장의 헛간 입구에 서 있다.  Photograph: Audra Mulkern


블레이스크 씨가 상실한 농지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는 4만2천 평의 농지 길 건너편에 있다.  블레이스크 씨는“난 우리가 잃어버린 땅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날 수 없어요”라고 중얼거렸다. “그게 어떻게 날마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나를 좀먹고 있어요.”

로즈만 씨는 자신이 농업 긴요설(agrarian imperative theory)이라 부르는 걸 개발했다 –그가 다른 심리학자들의어깨를 누르고 앉았다고 말하기 쉽지만. 그는“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먹을거리와 옷감, 보호처와 연료 같은 인간의 삶에 필수인 물품을 공급하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러한 물품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그들의 토지와 기타 자원을 움켜쥐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한다.

농민이 이런 본능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 절망을 느낀다. 따라서 그 이론에는 중요한 역설이 있다: 농민이 성공하도록 만드는 추동력이 때로는 자살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실패를 심화시키기도 한다. 기사에서 로즈만 씨는 농업 긴요설이“농민이 농업 생산자가 되게 하는 동기이자 때로는 자살에 이르게 하는 그럴듯한 설명”이라고 작성했다.


2013년 이후, 미국 농민의 순농가소득은 50% 감소했다. 2017년 중위 농가소득은 마이너스 1325달러(negative $1,325)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농업 패리티가 없으면(본질적으로 농산물 최저가격제), 대부분의 농상품 가격은 생산비 이하로 유지된다. 

이메일에서 로즈만 씨는 “(농민의) 자살율은 경제적 안녕이란 조건에 따라 오르내린다. … 자살은 현재 현행 농업 경기침체 때문에 늘어나고 있다.”고 적었다.

조이스 블레이스크 씨가 사업부에서 일하게 된 새로 리모델링을 마친 onaga 지역사회 병원의 햇살 가득한 로비에서, Nancy Zidek 박사가 막 회진을 마치고 왔다. 가정의학의로서 그녀는 농민 환자들에게서 행동건강 문제를 자주 발견하는데, 농업에 내재된 스트레스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농장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면 우울해지고 식탁에 음식을 준비하는 일도, 아이들 대학에 보내는 일도 걱정하게 될 겁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회진을 마치고 돌아온 Nancy Zidek 박사가 새로 문을 연 지역사회 병원의 출입문 앞에 서 있다.  Photograph: Audra Mulkern


2017년 8월, 농민이자 포니 카운티 캔자스 농민연합의 대표인 Tom Giessel 씨는 "밀가루 1부쉘로 살 수 없는 10가지 물건"이란 제목의 짧은 동영상ideo을 제작했다. 지젤 씨는 1부쉘당 3.27달러에 "내가 생산하고 수확하는 곡물이 나의 '통화'이며 그건 받아야 하는 가격의 1/5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밀 1부쉘보다 비싼 소비재들 사진을 보여준다: 잉글리쉬 머핀 6개, 화장지 6롤, 빵 한 덩어리. 

지덱 박사는 농민의 복지가 농촌 지역사회의 건강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곡물 가격이 낮아요. 농민들은‘난 농지에서 이 물건을 얻어야 한다. 내가 그걸 팔지 못하면 내년에 농사지을 수 없다. 빚을 갚지 못해 파산하게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지역사회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친다. 농민이 구매력을 잃기 때문이다. 식료품점, 철물점, 약국도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실제로 토요일 오후인데 Onaga의 시내는 텅 비었다. 주류 판매점, 학교, 몇몇 교회, 피자 가게, 청소년 센터, 가게 몇 곳만 있다. “농촌 지역사회 -학교, 교회, 병원 등- 를 유지하려면 가족농이란 구조가 필요하다.”고 캔자스 농민연합의 돈 테스크 씨는 말한다. “나는 농업 부문의 산업화와 미국 농촌의…캔자스 농촌의 인구감소를 매우 우려스럽게 지켜보고 있어요. ”라며 “아마 전쟁은 패배할지도요.”라고 덧붙였다.

Missouri Farmer Today에서 그 기사를 발견한 뒤 존 블레이스크 씨는 로즈만 씨에게 연락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기사는 웹사이트에 올려졌고, 그는 컴퓨터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도서관에 가서 사서에게 자기 대신 로즈만 씨에게 이메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블레이스크 씨가 트랙터를 몰고 갈 때 로즈만 씨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어요.”라고 블레이스크 씨는 말한다. “누군가는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신경을 써야 합니다.”

1980년대 농장의 위기 이후, 로즈만 씨는 전문가들이 농민들을 지원하는 방법에 관해 더 많이 학습했다고 말한다. 기밀 위기 통신 체계 -전화나 인터넷- 는 효과적인데, 담당자가 농업의 현실과 언어에 정통해야 한다. 

“치료법을 아는 치료사에게 갔지만 그가 농사에 대해 잘 모른다면, 치료사는‘좀 쉬세요. 그게 최선이겠네요.’할 겁니다. 그럼 농민은 ‘하지만 내 소는 주5일근무를 하는 게 아니예요.’라고 할 겁니다.”



인구 700명의 캔자스 Onaga 시내의 토요일 오후 모습.  Photograph: Audra Mulkern


경제적인 치료는 중요하고 자금을 제공하기에 비싸지 않다. -로즈만 씨는 노동자 지원프로그램과 비교하여 여러 문제가 5회 미만의 과정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의료 제공자가 농민의 신체 및 행동 건강의 취약성에 관하여 교육을 받아야 하기에 로즈만 씨가 동료들과 함께 노력하고 있다. 

존 블레이스크 씨는 그림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감정이 북받칠 때면 그는 상세한 농장 경관고 함께 육중한 톱날을 그린다. 상담과 약물도 도움이 되었지만, 자신의 경험을 함께 나눌 농민들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그는“난 무엇에 관해서든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이 배에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오판하게 된다. 그건 노아의 방주 같다.”

농가 안에서 블레이스크 씨는 나의 손에 잡지 두 개를 주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 맨발로 마을을 걸어다녀 밤에 어머니가 발에서 가시를 뽑아주던 추억으로 가득하다. 몇 년 동안 곡물 엘레베이터에서 상근직으로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어둠 속에서 플래쉬를 비추며 농사일하고 소의 숫자를 셌다.

어둠을 비추듯이 농장에 대한 블레이스크 씨의 기억은 강렬하다. “때로는 배터리가 떨어져 빛이 그리 밝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잃어버렸던 소를 찾았을 때, 새로 태어난 송아지를 보았을 때 밤의 어둠이 훨씬 밝아질 겁니다.”라고 적었다.


https://www.theguardian.com/us-news/2017/dec/06/why-are-americas-farmers-killing-themselves-in-record-nu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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