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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이와 산책길에 화림선원에 들어가 보았다.

지리산 밑에 사는 사람이 지리산에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리 가까운 데 있는데 5년 만에 처음 들어가 보았다.

 

 

 

 

들어가는 길은 이렇다.

 

 

 

작은 탑이 소담하니 서 있고,

 

 

 

탑의 한쪽에는 이런 불교 관련 작은 인형들이 잔뜩 있다.

 

 

 

길가에는 꽃들이 가지각색이다. 

 

 

 

 

 

탑이 있는 곳에서 돌아서서 조금만 오르면 바로 대웅전이 나온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보살님. 무슨 기원을 하는 것일까?

 

 

 

화림선원의 연혁이 적힌 푯말도 서 있다.

 

 

 

기도하는 보살님 뒤로 연풍이가 휭 하고 지나간다.

 

 

 

화림선원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장독대. 구수한 된장 냄새가 허기진 배를 찌른다.

 

 

 

요사채 앞 작은 물동이에는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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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의 첩보기관에서 작성한 조선 지도.

그 가운데 안산 지역만 따로 이어 보았다.

 

 

이 지도를 보면 현재 내가 사는 일동은 점성(占星)이라 불렀다.

영동고속도로가 있는 부곡동 쪽이 신골(新村)이라 한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성포동은 성머리(城頭), 그 바로 아래 송호(松湖)가 자리하고, 현재 한양대 앞 역의 화원이 있는 곳은 양평(陽坪)이라 했다.

또 상록수역 일대를 구룡동(九龍洞)이라 불렀다.

월피동 쪽은 그대로 월피(月陂), 그 아래 현재 다농마트 쪽을 부로리(富老里)라 했다.

마지막으로 안산시청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좌우를 월입피, 고잔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자료를 100% 믿을 수 없다는 점이 발견된다.

현재 둔대라고 불리는 곳의 위치가 잘못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는 적당히 비교할 것이지, 이게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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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안개가 자욱하다.

바다의 안개 때문이라고 한다.

아래에서는 장마전선이 올라오고 있고, 그 영향인지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그 안개가 내륙까지 올라와 뿌옇다.

덥고 습하고 뿌옇기까지... 불쾌지수 만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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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 살면서 5년 만에 오늘 처음으로 청룡사에 갔습니다.

성태산 밑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현재 안산1대학의 뒷편입니다. 이곳까지는 자가용으로 갈 수도, 걸어갈 수도, 301번을 타고 갈 수도 있습니다. 헌데 301번을 타려면 요금이 1500원(카드로)이나 하니 조금 아깝군요. 멀리서 오신다면 상록수역에서 슬슬 걸어가셔도 됩니다. 15분이면 충분합니다.

 

안산1대학 옆쪽의 안골길이란 곳으로 쭉 들어가면 청룡사 표지판이 나옵니다. 

 

이 절이 생긴 지는 50년 정도일 거라 추정합니다. 그걸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절 주변에 서 있는 송덕비에 있습니다. 그 송덕비에 따르면, 의림이공진환선생송덕비義林李公鎭煥先生頌德碑라고 적혀 있습니다. 당연히 이진환이란 분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지요. 그 뒷면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원래 이곳 일동一洞 안산1대학을 둘러싼 일대는 인근의 수리산에서 산세가 시작하여 명당 자리로 알려져 왔겄다. 그래서 예전에는 구룡九龍골이라 불리었으니, 아홉 용이 여의주 하나를 둘러싸고 꿈툴거리는 형상의 지세地勢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조선 말기쯔음 이곳에 타성붙이들이 슬그머니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디! 아마 철종 때부터 안동 김씨들이 여그를 장악하면서 오랫동안 여그의 대성大姓인 이씨 집안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 송덕비의 주인공 의림 이진환 선상이 외지에 나가 사업에 크게 성공해부렸지. 아마 건축가로 60년대 이후 군사정권의 국가발전계획과 대규모 건설사업에서 엄청난 실적을 쌓았지. 그래서 이 선생이 자기가 번 큰돈으로 안동 김씨에게 빼앗겼던 땅을 다시 사들이고, 청룡사라는 절까지 지어서 부처님께 바쳤다고 하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헌디,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로는 안동 김씨의 묘지를 이장해 가라고 공고를 냈는데도 옮기지 않은 무덤은 그냥 파서 골짜기 어느 한곳에 모다서 화장했다고 하네요. 또한 안동 김씨 세력을 약하게 하려고 마약을 풀기도 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돕니다. 그런 걸로 봐서 뭔가 평탄하게 일이 추진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아무튼 안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절이니 한 번 찾아볼 만합니다.

 

청룡사에 오르면 안산이 한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바로 앞의 큰 건물이 안산1대학, 앞산이 구룡공원이 자리하고 있는 구룡산입니다. 그러니 거기부터 여기까지 구룡골이라 불린 것이지요. 왼쪽으로 보이는 아파트의 물결은 원래 바다였을 것입니다. 맑은 날 오르면 산세까지 훤히 볼 수 있을 테니 더 좋겠네요.

 

 

이곳에는 200년 가까이 된 느티나무도 서 있습니다. 일동에 있는 보호수가 어디에 있나 했더니 여기에도 한 그루 자리잡고 있었네요. 그 옆으로는 잘 어울리게도 산신각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성태산의 산신께서 굽어살피시고 계십니다.

성태산은 한자로는 城台山이라고 합니다. 성이란 뜻과 별이란 뜻이지요. 왜 그런지 몰라도 일동 쪽에는 별과 관련된 한자 지명이 많습니다. 제가 사는 점성占星골도 그렇고 이곳의 태台도 그렇습니다. 점성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여러 의견이 많습니다. 이곳이 바닷가였던 만큼 큰 무당이 많았고, 그래서 점을 치는 사람이 많다는 뜻에서 점섬(占島)이라고도 하고, 별을 보고 점을 치던 곳이라고 점성占星이라 하기도 하고, 저는 한때 점심을 먹는 곳이라 점섬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이상 제대로 기록된 문헌자료도 없어 알기 힘듭니다. 원래 부르던 지명도 한자로 옮겨적으면서 본뜻이 흐려진 경우도 많구요. 지명을 제대로 추적하려면 고어도 많이 알아야 하기에 어렵기만 합니다. 어쨌든 일동에는 별과 관련된 지명이 참 많습니다. 제가 이 동네 사는 것도 다 그런 뜻이 맞물린 것은 아닐지...

 

150년된 느티나무. 안산의 보호수는 대부분 이 정도 나이입니다. 수암 쪽은 역사가 깊은 만큼 더 오래된 나무가 몇 그루 있지요. 하지만 철저한 개발 도시 안산의 다른 곳에서는 100~200년 정도 된 나무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그런 나무가 서 있는 곳은 개발에서 소외된 곳, 옛 마을이 있던 자리들뿐이지요. 그래서 더더욱 노거수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는 20그루 정도인데 더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저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나무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어울려 그늘도 주고 푸르름과 단풍도 안겨 주는 나무로요.

 

나무 뒤편으로는 산신각 바로 옆에 조그만 제각이 또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서 무슨 제사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시간에 쫓겨 무엇 때문에 준비하고 있는지 물을 새도 없이 후다닥 산으로 올랐습니다. 

 

 

처음 오르막길이 가팔라서 그렇지 그 길만 올라서면 오르기 쉬운 길이 이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태산은 150m 정도의 작은 산이기 때문이지요. 보통으로 걸을 수 있기만 하다면 산책길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옛 산성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전에 안산문화원장을 했던 분께서 성태란 이름에서 성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이곳을 뒤져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돌이 많구나'라고 생각하고 지나갔을 곳인데, 아는 사람에게는 그런 게 보이나 봅니다. 

 

성태산 정산 부근에 굴러다니는 성벽의 돌들. 그냥 돌이 많은 곳 아니야? 라고 생각하신다면 오산. 이 돌들로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이 산성은 그 축성 양식으로 보아 신라의 축성 기술이라고 합니다. 신라가 중국과 교역하는 통로를 확보했을 무렵 쌓은 것인가 봅니다. 허나 그 규모로 보아 전투를 위한 성이라기보다는 감시초소 정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이 서해를 감시할 수 있는 전략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저기 현재 열병합발전소가 서 있는 곳의 별망성이 그렇고, 잿머리 성황당이 그렇고, 모두 서해를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의 장소였습니다. 이곳도 그 연장선이 아닐까 합니다. 혹시 군포의 봉수골과 이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안산이 중요한 해안 방어 기지이자 수산물 생산 기지였을 당시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게 몇 장의 사진을 볼까요.

 

아래는 노적봉에서 본 고잔동 쪽의 모습입니다. 아파트가 가득 들어선 곳 모두 물이 들고나는 바다였습니다.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롯데마트를 중심으로 시선을 조금 더 왼쪽으로 옮겼습니다. 군데군데 불쑥불쑥 솟은 산 말고 바닥은 모두 바닷물이 들고나는 곳이었을 겁니다. 이것이 그대로 일동까지도 이어졌겠지요.

 

 

아래는 잿머리성황당에서 바라본 시화공단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곳도 모두 바다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일동, 성포동 쪽보다는 더 드넓은 바다였지요. 이곳에서 지나다니는 배를 감시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제일골프장 뒷산에 올라 찍은 것입니다. 높은 건물이 들어선 곳은 원래 다 바다였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럼 대략 지형이, 그리고 바다가 머릿속에 그려지시지 않나요?

 

아마도 아래와 같은 모습이었을 겁니다. 물론 산세가 더 이어져 있었을 테고, 그래서 바다가 이만큼 넓지는 않았겠지요. 이 사진은 탄도에서 바라본 누에섬입니다. 지금은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다고 하네요.

 

 

성벽이었던 돌무더기를 보고 살살 걸어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반월저수지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난 길을 택해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점성고개가 나옵니다. 그곳에는 아래와 같은 표지판이 서 있지요.

 

 

네, 이곳에서 수암봉까지 걸어갈 수도 있고, 바람들이 농장까지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냥 중앙병원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반월저수지로 가도 괜찮지요. 선택은 자유, 마음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십시오.

 

 

 위 사진을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보이시나요. 한 1km 정도 15분 거리라고 나옵니다. 길게 잡아도 20분이면 청룡사에서 점성고개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가까운 쉬는 날, 날이 좋으면 한 번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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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성동→일동, 구룡동→이동, 시곡동→사동?
김석기의 <노거수>를 찾아서 ② 안산의 ‘옛 모습’ 아세요?

 

한동안 안산의 옛 모습은 어떠했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시화방조제를 쌓아 개막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시로 개발되기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래서 안산에서 오래 살았다는 어르신을 만나면 꼭 이와 관련해 물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암만 들어도 머릿속에 그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또 안산에서 10년 이상 산 사람은 꼭 ‘사리 포구’를 이야기하며 좋았다고들 하는데, 거기도 가본 적이 없으니 무엇을 떠올릴 수 있으랴! 그래서 자연히 옛 지도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충 머릿속에 안산의 옛 모습을 그릴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지도가 자세하지 않아 여전히 목이 말랐다. 그러다가 우연히 일본이 1915년 무렵 작성했다는 첩보지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이 지도를 찾으려고 몇 주일 동안 사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라는 제목으로 영진문화사에서 나온 지도책이 서울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고생 끝에 지도책을 펼친 순간, 확실히 조선에서 만든 지도와는 다르게 정확하게 지형이 표현된 지도를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일동은 점성동, 이동은 구룡동, 사동은 시곡동으로 바꾸면 안 될까?

 

그러니까 현재 가장 번화한 중앙동이라는 곳이 바닷가였고, 고잔동 일대는 모두 개펄이었겠구나. 주변부에 자리한 상대적으로 덜 번화한 곳들이 원래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는 걸 알았다. 참,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원래 점성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일동이라고 부르지? 어디다가 일동에 산다고 하면 숫자 1인지 일인지 다들 헷갈려 한다. 그럴 때마다 뭔가 찜찜해 죽겄다. 조선시대 지도에서도 그렇고 일본이 만든 지도에서도 점성이라고 하니, 일동은 점성동으로, 이동은 구룡동으로, 사동은 시곡동으로 바꾸면 안 될까? 동네 이름을 바꾸려면 연판장이라도 돌려야 하려나 모르겠다. 누가 방법 좀 알려주면 좋겠다.

동네 이름과 관련해서 우리 동네는 아니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 하나 있다. 4호선을 타고 오다 보면, 평촌이라는 곳이 그렇다. 내 기억에 처음에는 벌말이었는데, 왜 그 좋은 벌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한자로 평촌(平村)이라 바꿨는지 모르겠다. 그게 더 부동산 가치를 올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쁘고 뜻 깊은 자기 이름을 버린 동네라는 오명은 떨칠 수 없을 게다.

 

 

 

 

 

 

내 사는 곳 점성(占星), 이익선생 호 성호의 星은 점성에 땄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인 점성占星이란 이름은 참 별나다. 별을 보고 점을 치던 곳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여기서 특별히 별이 더 잘 보였을 리는 없다.

성호(星湖) 이익 선생님의 호는 점성의 성과 송호의 호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고 하는데, 이 동네가 별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누군가는 이익 선생님이 별을 보면서 천문을 공부한 곳이라 첨성이 맞다고도 하지만, 그게 맞는 얘긴지 확인할 길은 없다. 또 우리나라의 무당은 별점을 치지는 않았으니 분명 다른 뜻이 있을 터이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소금장수나 새우젓장수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 군포 속달에 사시는 동래 정씨 집안 어르신께 이야기를 들었는데, 옛날부터 안산의 생선장수와 소금장수 같은 봇짐장수가 중앙병원 뒤쪽에 있는 점성고개를 넘어(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반월저수지가 나온다) 장사하러 왔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야 새벽부터 짐을 지고 나가 오전에 장사를 마치고 돌아왔을 테니, 이 고개를 넘을 때쯤이면 점섬(점심) 먹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점섬, 점섬 하다가 그걸 한자로 표기하면서 점성으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

지금도 점성인지, 첨성인지, 아니면 점섬인지 확실하지 않아 옛 지도를 보면 점성이라 하고, 이익 선생님 관련해서 찾아보면 첨성리에 살았다 하고, 현재 이곳에 있는 공원은 점섬공원이라 한다.

 

 

 

 

노거수 만나러 떠나는 길, 귀한 인연을 고대하는 길

 

이렇듯 땅이름은 그 유래가 명확하지 않다. 이 사람한테 물으면 이렇게, 저 사람한테 물으면 저렇게 이야기해 준다.

젊은 날 가슴 시리게 사랑한 첫사랑 그나 그녀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웃는 얼굴은 어땠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지만 그 이름 석 자만큼은 기억에 남듯이, 땅이름도 그러하다. 덕분에 뒤에 남은 사람은 그 이름 석 자만 가지고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재미도 있지만.

아무튼 안산의 옛 모습도 살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노거수를 보러 떠나야겠다. 첫 목적지는 안산의 옛 1번지, 수리산 밑자락에 자리한 수암(현 안산동)이다.
 
여기는 관아와 읍성이 있던 군사, 정치, 행정,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교통편도 불편하고 중심부와 너무 동떨어진 한적하다 못해 낙후된 곳으로 인식되지만 말이다. 그나마 안산동이란 이름이 옛 흔적을 남기고 있어 다행이다.

이 일대가 중심지였다는 것은 이곳에 남아 있는 노거수의 수로도 엿볼 수 있다. 현재 수암에 무려 4그루, 장하동과 장상동에 1그루씩 모두 6그루가 이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노거수는 그냥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나오는 뜻은 노거수(老巨樹)라 하여 단지 “나이가 많고 커다란 나무”라고만 한다.

하지만 그 나무와 얽힌 추억과 기억들, 잎이 피고 지듯 피고 져간 주변 사람들의 삶, 시간과 공간의 흐름과 떨림, 흥망성쇠와 상전벽해는 오직 그 주변에서 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기억에서 기억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질 뿐이다.

오늘 노거수를 만나러 길을 떠나지만, 그와 함께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단순히 풍경을 그리는 데 그칠 수 있다. 그런 귀한 분을 만날 인연이 있을까?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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