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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너무 가보고 싶었던 순천 왜성을 다녀왔다. 


순천 왜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구릉 지대에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성이다. 이 성이 자리한 신성리新城里라는 마을 이름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붙인 것이다. 이름 그대로 새로운 성이 있는 곳이란 뜻이겠다. 





이 성은 1597년 말, 정유재란 때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그렇다. 그 유명한 소서행장小西行長이다.)가 왜군의 호남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3-4개월에 걸쳐 쌓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축성 주체에 대해선 아직 불명이긴 하다. 


이 왜성은 왜교성倭橋城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성의 방어를 위해 해자를 파고 다리를 설치해 오가도록 만들었기에 그렇다. 

그림에 보이듯이 내성과 외성 사이에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해자가 보인다. 여기에 다리를 설치해 왕래했겠다. 

 


원래 성벽은 외성 3첩과 내성 3첩으로 쌓았다는데, 현재는 내성만 흔적이 분명하고 외성은 불분명한 상태이다. 이곳에서 1598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사이에서 최대의,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특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전투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의해 순천 왜성을 시작으로 남해 왜성 - 사천 선진리 왜성 -  창원 왜성 - 양산 왜성 - 울산 왜성 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이 구축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축성한 장소를 일직선으로 연결해 보았다. 이것이 당시 왜군이 설정한 방어선이자 전진선이 되겠다. 본국과의 연결을 중시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선택한 것 같다. 왜성의 숫자와 위치, 축성자, 년도 등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면 된다. https://ko.wikipedia.org/wiki/왜성_(건축)



조금 걸어 올라가면 성문 터와 해자 터를 볼 수 있다. 

해자를 건너 내성의 성문 앞에 도달하면 성벽의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만들어놓은 구조이다. 이 성을 공략하기란 정말 골치 아팠겠다. 


일본에 놀러 가서 본 성벽이 떠오르는 각도. 심혈을 기울여 쌓은 일본에 있는 성들보다는 높이라든지 각도가 좀 덜하긴 하다. 그만큼 급하게 축성했기 때문이겠지. 



내성의 성문에 연결된 성벽을 오르면 이렇게 해자 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내성의 천수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을 둘러싸고 있는 물. 예전엔 여기 일대가 바다였지만, 현재는 간척하여 호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내성의 첫 번째 성문을 지나 조금 오르면 두 번째 성문 터를 만나게 된다. 여기도 성벽을 ㄱ 자로 꺾어 놓아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게 만들며 공격을 더 받도록 설치했다. 전쟁의 기술이란 다 그렇겠지.  






두 번째 성문을 지나면 화장실이 하나 보이고, 가파른 언덕길 위로 드디어 천수각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볼 수 있다.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참으로 여러 장치를 해 놓았다. 




천수각이 있는 꼭대기로 가는 길에 또 험난한 구조를 설치해 놓았다. 아래와 같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진격해야 한다. 



험난한 길을 따라 꼭대기에 오르면 이와 같은 경관이 펼쳐진다. 예전에는 바다였던 곳이 현재는 간척되어 공단으로 쓰이고 있다. 



아래 보이는 산 같이 볼록볼록한 곳이 장도라는 섬이라고 한다. 이 일대에서 1597년 음력 10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되었다는 명나라의 유정이 지상군을 움직이지 않고 순천 왜성을 바라보며 대치하고 있자,조선의 이순신과 명나라의 진린이 이끄는 수군만 단독으로 왜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했으며, 왜군 3,000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 장도 해전을 이순신 장군 최후의 승리라고도 한다. 노량 해전에서는 승리하긴 했으나 목숨을 잃었으니... 그런데 이 해전에서 조명 연합 수군의 피해도 커서 명나라의 전선 30척이 격침을 당하고, 명나라의 수군 2,300명이 전사했으며, 왜군에게 포위된 명군을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 휘하의 조선군 130명도 전사했다고 한다.




정유재란 최후의, 최대의 격전지였던 순천 왜성과 장도, 그리고 노량 해전의 상황도.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이 바로 왜장이 머물고 있는 천수각이다. 현재 건물은 사라지고 그 기간과 터만 남아 있긴 하다. 





기단만 봐서는 상상이 잘 안 될 수도 있으니 <征倭紀功図巻>에 나오는 당시 순천 왜성의 천수각 모습을 한 번 살펴보자. 



해자를 건너고 성문을 여러 개 지나 어렵사리 천수각이 있는 곳까지 도달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질렸을 것 같다.  



하지만 수비하는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든든한 성이겠는가. 



 마지막으로, 충무사를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무명을 떨친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여기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그 휘하에 있던 정운과 송희립 장군을 기리고 있다. 이 사당의 건립과 관련된 재미난 설화가 하나 전해 온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100년이 지난 어느 날, 신성리에는 서씨, 이씨, 김씨 등이 현지에 거주 하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밤마다 마을 앞 바다에서 들려오는 귀곡성으로 생활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다. 그래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여기에 충무공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자 그런 일이 사라졌다고 한다. 



진짜 귀신 소리가 울려퍼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순천 왜성 천수각 기단에 올라 충무사를 바라보면, 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건립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끔찍한 전란을 겪은 뒤 남아 있는 흉물스런 왜성의 모습과 기운을 왜란을 겪으며 수호신이 된 이순신 장군의 힘을 빌려 억눌러 사라지게하려던 당시 사람들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풍수지리적으로도 중요한 자리임이 한눈에 보인다. 더구나 바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늘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자신들을 지켜줄 신령스런 존재가 더욱더 필요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을 모신 것이겠지. 여기저기 임경업 장군이나 최영 장군이 신격화되어 자리하고 있듯이 말이다. 

천수각 기단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앞의 야트막한 작은 산이 충무사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현대제철의 위세가 더 드높다. 




마지막으로... 참고자료로 예전에 구마모토에 가서 본 가토 기요마사가 성심을 다해서 축성했다는 구마모토성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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