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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을 너무 거하게 먹은지라 아침 7시에 일어났어도 아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길을 나서 가는 길에 식당이 보이면 먹기로 하고 모텔을 나섰다.

모텔 바로 뒤에는 오래된 지금은 텅 빈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흔적을 보니 농협으로 쓰던 건물인데 혹시 이 건물에 다카하시 노보루가 오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건물은  1980년대에는 건강보험공단으로 쓰고, 그 뒤 농협으로 쓰다가 지금은 개인소유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런 건물을 활용하여 영산포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장소로 쓰면 좋겠다.

 

 

어제 미리 동네를 산책하며 알아본 장군의 아들 촬영 거리와 동산농장의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의 집을 찾아나섰다. 장군의 아들 촬영지는 일제강점기 원정통이었던 곳으로 지금도 그 시절의 건물이 엄청나게 남아 있다. 어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본 바에 따르면, 도정업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곳이라 하니 영산포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분주히 돌아가던 정미기 소리와 쌀겨 냄새는 사라졌지만, 거의 100년이란 시간을 훌쩍 뛰어넘으며 살아남아 있는 건물들을 보면서 저절로 그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산포 원정통의 현재 모습. 일본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그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많이 낡아서 문화와 관광을 생각한다면 시에서 수리비를 지원해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새로 시원하게 뚫린 영산대교를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나주 제일의 지주 구로즈미 이타로의 집을 찾을 수 있다. 구로즈미가 떠난 뒤 개인이 소유했던 것을 현재 시에서 매입하여 새로 단장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 덕에 집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멀리 담장 너머로 쳐다볼 수는 있었다.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 일본 1873년 후쿠야마에서 태어난 그는 1905년 5월 30일 영산포에 들어온다.    

손수레를 밀며 장사를 시작했다는 그는, 경성과 나주를 오가며 눈치 빠르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경성에서 영산강 둘레에 제방을 쌓을 것이라는 정보를 발빠르게 입수한 뒤 일대의 땅을 대량으로 매입하며 농토를 개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주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은 그는 일본에서 모든 자재를 들여와 1935년쯤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는 이곳에서 쌓은 부를 바탕으로 조선농회의 이사는 물론 조선가마니회사와 금융회사, 전남전기주식회사, 조선식산주식회사, 목영 창고운수회사 등 각종 회사를 설립하여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다. 그 결과 1930년대 1100정보, 330만 평이 넘는 토지를 가진 대지주의 자리에 오르고 동산농장을 운영한다.

 

 구로즈미 이타로의 저택. 현재도 주변에는 이에 맞먹는 건물이 별로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당시 이 일대에서 단연 우뚝 솟은 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영광은 쇠락하여 마당에는 잡풀만 가득하다.

 

 

그가 설립한 동산농장이 바로 1939년 다카하시 노보루가 광주를 거쳐 제주로 가는 길에 나주로 와서 들른 곳이다. 이 농장의 장원과 함께 나주 금천면 월산리로 농가 조사에 나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산농장 사무실은 어디였을까? 이른 아침이라 어디 물어볼 곳이 없어 일단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아갔던 마을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월산리로 향하는 길에서 본 드넓은 논. 이 모두가 구로즈미 이타로의 동산농장이 소유한 땅이었다. 여기 살던 사람은 모두 소작인 신세였을 뿐...

 

 

미리 지도를 확인했을 때 월산리는 전남혁신도시인가 하는 곳으로 지정되어 개발되고 있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운기와 트렉터나 지나다녔을 법한, 잘해야 1톤 트럭이나 지나다녔을 법한 길에는 덤프트럭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수시로 지나다니고 있었다. 산은 파헤쳐지고, 농토는 갈아엎어져 앙상한 흙만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월산리를 찾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가게에서. 이제 농사를 못 지으니 대신 공사장에서 일하라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이걸 보고 씁쓸해지는 건 나뿐일까? 

 

 

한참을 달리다 허기지고 목이 말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가게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발견한 가게는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얼른 가게로 들어가 월산리로 가는 길도 묻고, 혹시나 하여 월산리에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사는지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전화번호부를 가져와 펼치는데, 순간 심봉사 눈 뜨듯이 눈이 번쩍 뜨였다. 월산리에는 모두 2명의 강씨가 살고 있었다. '강춘자'와 '강환주'. 그 가운데 '강환주'라는 이름이 이상하게 끌렸다. 내가 찾아가는 곳에서 다카하시 노보루가 만난 사람은 강신성.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얼른 볼펜을 꺼내 들고 급한 대로 손바닥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베껴 적었다. 그리고 사전 정보를 얻을 겸 이 분이 어떤 분인지 물었다. 그러니 지금은 집이 수용되어 살기는 금천면의 아파트에 살면서 농사만 여기서 짓는다고 하며,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셨다.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다. 얼른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금천남초등학교와 그 인근 민가는 이제 철거가 한창이다. 이미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학교는 본관은 철거되고 별관만 아직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받았을 충격은 어떠했을까? 내 학교가 사라지는 그 느낌은? 

 

 

월산리로 오니 마을 표지석이 길을 인도한다. 그걸 따라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한참을 달리는데 맑은 물이 흘렀을 농수로에는 현실을 반영하는 듯 붉은 흙탕물이 가득했다. 옆으로 펼쳐져 있는 논의 푸르름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어 인상적이었다. 마치 피를 흘리듯 농수로에는 붉은 흙탕물만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마을에 다 들어왔다. 어디가 가게 아저씨가 설명해준 곳일지 가늠하면서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마을로 들어선 순간 한쪽에서 어르신 내외가 수박 줄기를 처리하느라 바쁘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가 강환주 어르신이 어디 계시지 아시는지 여쭈었다.

그 순간, "우리가 긴데 왜 그런다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찾았다. 이 분이시구나.

 

 강환주 어르신의 하우스 농사. 수박을 다 걷어내고 이제 고추를 심을 거라고 하신다. 부여에서는 벼를 심었는데 여기서는 고추가 일반적이다.

 

 

먼저 예의를 차려 인사를 드리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설명 드렸다. 

"어르신 혹시 강신성 어르신을 모르시나요?"

"우리 조부님이신데..."

"아, 그러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옛날 책이 있는데, 거기에 어르신의 할아버님께서 나오셔서 그 자료를 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상에 별일도 다 있다며 저기 농막에 시원한 데 가서 이야기하자며 그쪽으로 이끄신다. 함께 농막에 자리하고 앉으니 할머니께서는 하우스에서 다 걷고 남은 수박을 한통 가져오셔 쪼개 주셨다.

 

 강환주 어르신과 할머니. 할머니 성함은 따로 여쭈어 보지 않았다.

 

 

어느신 제가 1937년인가 38년쯤에 그 일본 사람이 여기 와서 어르신 할아버님이 농사짓는 걸 조사해 갔더라구요. 그래서 혹시 여기에 오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어요. 혹시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환주 할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 강신성 씨는 한마디로 근면성실한 분이셨다고 한다. 동산농장 사무소가 여기 들어오면서 지난 전남외국어고등학교 있는 데에 있었다면서, 그 농장에서 소작을 하셨는데 농사를 잘 지어서 상도 타고 부상으로는 명주베를 받았다고 하신다. 남들 논에는 비료를 많이 줘서 죄 쓰러지는데 할아버지는 부지런하게 풀 베다가 두엄 만들고, 외양간에서 밟혀서 꺼내 써서 그런 피해는 한 번도 없었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다 동산농장의 소작인이었는데, 그나마 소작도 못 얻은 사람은 쫓겨나다시피 만주로 갔단다. 그렇게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져 고생고생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하신다.

그래도 소작이나마 부치던 사람은 고향땅은 떠나지 않아도 됐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이 많았단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 일본놈들이 90%나 빼앗아 갔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히 먹을 게 없었다고. 농사를 잘 지어도 소작료에 비료값에 물값 등등을 떼면 내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 없는 참혹한 현실을 보며 어린 시절을 지내신 것이다. 오죽하면 측간에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벼를 묻고는 위에다 흙하고 재를 덮어놓았을까 하시며 그때 일을 회상하신다. 그렇게까지 해서 뺏기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것마저 귀신같이 찾아가곤 했단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어찌나 성실하신지, 요즘처럼 더울 때는 아침에 시원할 적에 풀 베다가 두엄도 만들고 외양간에도 넣어 두엄을 만들었다며, 비료만 쓰면 논이 박해진다고 금비는 적게 퇴비는 많이 써야 한다며 한소리하신다. 어릴 적에는 마을에 서당도 있어서 바쁠 때는 엄두도 못내고 농한기에 두 달 정도 서당에 다녔다고 하신다. 그래서인지 촌에서 농사만 지으신 어르신치고 말씀하시는 것이 정연하다.

 

강환주 할아버지의 집. 200년도 더 된 터에 80년대 집만 고쳐 지었다고 하신다. 다카하시 노보루도 이곳을 찾아왔을 게다. 

 

 

혹시 실례일지 몰라 조심스럽게, 옛날 기록을 보니 할아버지께서 묘지기도 하셨다는데 사실인지 여쭈었다. 그랬더니 허!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획 쳐다보시더니, 여기 뒷산이 원래 주인이 자기 선산을 못 찾고 있는 걸 광주까지 찾아가서 할아버지께서 찾아주고 이걸 관리하셨단다. 못된 사람이었으면 주인이 없는 산이라고 함부로 했을 텐데, 그걸 끝까지 수소문해 찾아가 주인을 찾아주고 한 걸 보아도 강신성이란 분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 자연히 그럼 어르신의 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셨냐고 묻게 되었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시면서, 일제시대에 징용에 끌려가 탄광인가에서 일하고 돌아온 뒤로는 시름시름 앓다가 본인이 19살 때 돌아가셨다고 하신다. 그걸 본 식구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뼈골 빠지게 농사지으면 먹을 것도 없이 쓸어가, 사람은 데려다가 진빠지게 일을 시켜 시름시름 죽게 만들진 않나... 이래도 일제시대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르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인들을 월남에 보내 그 돈으로 경제 성장을 시킨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 그 논리대로라면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지.

  

 

위 두 문서는 일제강점기 강신성 씨의 서명이 들어 있는 문서다. 위는 금융조합에 돈을 잘 갚겠다고 서약서를 쓴 것이고, 아래는 대출금을 갚았다는 영수증이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경제 제도가 들어온 일제강점기 현금이 없는 농민은 금용기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 이후 미군정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똑같다. 요즘도 농협만 제대로 해도 농민이 덜 힘들 것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현재는 5000평의 농사땅에서 농사를 지으시는데, 어떻게 소작을 하다가 땅을 가지게 되셨는지, 부지런하셔서 돈을 많이 모으신 것인지 여쭈었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그 땅을 농사짓던 소작인에게 10~20년 상환제로 자기가 농사짓던 땅에서 계속 농사짓게 해주었단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던 사람은 그나마 자기가 소작하던 땅에서도 쫓겨났다고 한다. 이게 그 유명한 이승만 정권의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흔적인가?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전쟁 시절의 인민군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당시 다도면은 모두 산인지라 인민군들의 본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밤이면 마을에 나타나 밥이며 소며 먹을거리를 가져갔다고. 그러고 낮이 되면 경찰이 나타나 누가 인민군 도와줬냐며 마을 사람들을 족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민군은 경찰 간부나 앞잡이 아니면 사람은 해하지 않았는데, 경찰은 사람들을 엄청 괴롭혔다고 회상하신다. 낮에 나타나 마을사람들 괴롭힐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인민군 소굴에 가서 걔네를 족쳐야지 애꿎은 사람들만 괴롭혔다며 당시 경찰의 무능력함을 꾸짖으셨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거라며 전쟁은 다시는 있으면 안 되는 일인데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정말 힘들 거라고 하신다. 꼭 짚어 세계평화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힘든 기억으로 저절로 반전주의자가 되셨나 보다. 사람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그걸 내 관점에 다른 사람을 맞추려고 시작하면 싸움이 끝도 없을 것이다. 서로 남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강환주 어르신 댁을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 바로 옆에서는 혁신도시 개발구역에 들어가 공사가 한창이다. 혁신도시가 들어서면 이 주변 땅들은 어떻게 될까?  

 

강환주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이 산을 배매기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까지 물이 들어와 배를 맸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이곳도 인간의 끝없는 노동으로 만든 땅인가 보다. 

 

 

혁신도시로 월산리 바로 옆에는 한전이 들어온다는데, 원래 있던 산을 깎아서 새로운 산을 만들어 조경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큰 도로가 뚫리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붉은 속살은 드러낸 땅이 안쓰러웠다. 이곳에 어떤 도시가 들어설까? 나중에 개발이 끝나고 나면 그때도 다시 한 번 와야겠다. 물론 강환주 어르신도 만나고 말이다.

 

혁신도시로 개발하고 있는 곳을 빙 돌아 광주로 가는 길에. 아내는 이런 여행이 처음인지라 너무 힘이 들다고 하여 원래 계획했던 일정의 반만 소화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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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5일. 아침 6시 30분쯤 일어나 씻고 연풍이와 마지막 산책을 다녀왔다. 밖에서만 똥오줌을 싸니 귀찮아도 나갔다 와야 한다. 돌아와 준비를 마친 아내와 김밥을 3줄 사다가 먹고, 8시 드디어 집을 나섰다.

상록수역 앞으로 가서 수원역까지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다. 수원역까지는 버스로 30분 정도. 나주행 기차 시간은 9시 23분이다.

수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면서... 의기양양한 아내의 모습

 

 

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싣고 얼른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막힘없이 내달려 8시 40분 수원역 정거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수원역까지는 조금 걸어야 한다. 한 200m쯤 되는데 아내의 자전거가 이상이 생겼다. 일단 간단히 응급조치를 하고 얼른 역으로 들어갔다.

마침 철도노조에서 준법투쟁에 들어가 열차가 연착된다는 방송이 나온다. 법대로 하면 이렇게 늦어지는구나. 그럼 그동안 빨리빨리 시간 맞춰서 어떻게들 일했을까? 그렇다면 사고가 나거나 연착이 생기는 건 구조적인 문제라가 아니할 수가 없다. 입으로는 안전이 최고라면서 기관사를 줄이고, 열차 편성을 조정하고, 노후된 시설과 열차를 바꾸지 않아 사고가 생기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열차는 제 시간에 도착해 열차에 올랐다. 재미난 것이 여수와 목포행 열차가 함께 붙어서 가다가 익산에서 서로 분리해 저마다 갈 길을 간단다. 그래서 열차 호수를 잘못 타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내릴 수 있으니 조심해서 타라고 주의 방송을 한다. 목포행이 아니라 여수행을 타면 그냥 그대로 통영 쪽으로 방향을 잡아도 좋으리라.

 

나주역에 도착해서... 한껏 들뜬 아내의 표정. 그러고 보니 진짜 둘이 여행을 온 것이 한 2~3년 만이다. 

 

 

나주역에 도착해 자전거를 다시 조정하고 바로 자전거에 올랐다. 도착 시간이 13시 5분쯤인지라 점심부터 먹고 시작하기로 했다. 헌데 난 가는 길에 그냥 이것저것 둘러보며 가고 싶었을 뿐이고, 아내는 밥부터 먹자고 성화였고, 결국 둘의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아내는 참지 못하고 빽 성질을 낸다.

배고픈 건 마찬가지니, 나도 그럼 밥을 먹자며 방향을 잡았다. 아니 그런데 가는 길에 볼 만한 건물이 하나 떡하니 서 있지 않은가. 얼른 다가가 잠깐만 보고 가자고 꼬셨다. 가까이 다가가니 옛 나주경찰서 건물이라고 한다.

 

옛 나주경찰서. 일제강점기부터 나주경찰서로 쓰다가 해방 이후에도 얼마 동안 경찰서의 기능을 유지하다가 소방서로 바뀌고, 현재는 여러 시민사회단체의 사무실이 운집해 있다. 일제의 경찰서가 그대로 미제의 경찰서가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뻔하다. 미국은 왜, 일제 앞잡이들을 다시 자기의 개로 내세웠을까? 이유야 뻔하다. 이거 참 씁쓸하구만...

 

 

이 건물은 1920년 5월에 일본인이 세웠다고 한다. 건물을 돌아다니면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던 유치장 등이 있다고 하는데 남의 집 들어가 들쑤시는 것 같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현재 이 건물은 2002년 5월 31일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상태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치밀했냐면, 처음 이 건물을 지을 때 원래 조선의 상징이던 관아를 굽어살피는 위치를 선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서 앞에는 본원사라는 일본 신사를 지어 조선의 정신까지 빼앗고자 했다. 현재 신사는 사라졌지만 경찰서 건물이 남아 그 시절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배고프다는 성화에 얼른 자전거에 올라 나주 금성관 앞을 향해 달렸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나주 곰탕집인 '하얀집'이 있다. 전부터 나주에 가면 곰탕을 먹자고 노래했던지라 별 망설임 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아직도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곰탕을 시켰다.

가마솥에서 계속 곰탕을 몽근한 불에 끓이고 있는지라 잠시의 틈도 없이 바로 곰탕이 나왔다. 일단 모습부터가 심상치 않다. 입에서는 군침이 꿀꺽 넘어간다. 고명으로 얹혀 있는 소고기와 달걀, 그 위에 뿌려진 고춧가루를 잘 섞고, 맞다. 후추도 살살 치고 드디어 한 숟가락 듬북하니 떠서 한입에 쑥 밀어넣었다. 입안에 은은히 퍼지는 국물향과 혀의 오돌토돌한 맛세포를 깨우는 그 구수한 맛이란! 이것이 곰탕이다. 여느 집에서 나오는 국물이 뿌연, 뿌옇다 못해 우유를 탄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그런 국물과는 전혀 다르다. 이 집의 국물은 가마솥에서 약한 불로 끓이며 끊임없이 기름과 핏물을 건져내는 데 비결이 있다. 그래서인지 국물이 말갛다.

고명으로 얹힌 소고기는 또 얼마나 부드럽고 맛이 좋은지 모른다. 신선하고 좋은 고기를 썼다는 게 부드럽게 씹히는 맛에서 증명된다. 냉장고에 미리 삶아서 썰어 놓은 고기를 넣는 집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고기는 퍽퍽하기만 하고 맛이 없지만 이 집의 고기는 다르다. 둘만 아니라면 수육까지 시켜서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시작부터 배만 채우고 눌러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국밥만 뚝딱 해치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더 앉아 있다가는 퍼질러 앉게 될 것 같아서...

 

부른 배와 기가막힌 맛에 감탄하며 바로 앞에 있는 금성관에 들어갔다. 배불리 잘 먹었으니 잠시 쉬었다 가도 좋으리라. 금성관은 아직 공사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는데,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쇠락한 조선처럼 금성관의 신세도 처량해졌다. 금성관에 들어오는 입구에는 그 시절의 사진이 있다. 사진을 보고 확실히 알았다.

 

커다란 건물이 바로 나주의 관아였던 금성관이다. 그 앞을 가로막은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나주군청이다. 이 모습에서  경복궁 앞에 세운 조선총독부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나주 땅의 생김이 한양과 닮아 작은 서울이란 뜻의 소경小京이라고도 불렀는데, 어찌 이곳에 해 놓은 짓까지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그놈들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서익헌에 대청마루에 앉아 뜨거운 햇볕을 피해 시원한 바람을 즐겼다. 잠시 더위를 피하며 관아 마당을 내려다 보았다. 저 멀리 망화루望華樓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번화한 모습을 바라본다는 뜻도 되겠고, 번화하기를 바란다는 뜻도 되겠다. 망화루에서는 율령도 반포하고 했으니, 그 앞에 자연스레 장이 들어섰을 게다. 곰탕집은 그때 장터에서 먹던 국밥이 그대로 자리를 잡아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나주羅州는 통일신라 때부터 진산인 금성산錦城山에서 이름을 따 금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곳 금성관의 금성도 거기서 온 이름이다. 비단 금이나 비단 라나 그 비단이 비단이니, 그만큼 먹고살기 좋았던 곳이란 뜻이다. 옛부터 나주가 전라남도의 중심이었다는 말만 들었지 그 실체는 몰랐는데, 이곳 나주목의 행정지인 금성관에 와 보니 그 말을 실감하겠다. 이렇게 큰 지방 관아는 아직껏 보지 못했다. 처음 관아 마당에 들어서서 느낀 장대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망화루의 뒤에 서 있는 삼문은 현재 복원 공사를 마친 상태다. 앞서 말했듯 일제강점기에 군청사를 지으면서 망화루와 삼문을 싹 밀어 버렸다. 망화루에서 삼문까지는 종묘 같은 곳에 가면 볼 수 있는 왕의 길이 깔려 있다. 가운데 볼록하게 솟은 길은 왕의 길, 그 좌우에 있는 가운뎃길보다 좀 낮은 길은 오른쪽이 문신의 길, 왼쪽이 무신의 길이다.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잘 복원했다.

 

손님이 오면 묵었다는 서익헌의 대청마루에 앉아 바라본 관아 마당. 가장 앞에 망화루, 그 뒤에 삼문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왕의 길은 아쉽게도 보이지 않는다. 대청마루는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이렇게 중요하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금방 무너지고 만다. 망화루 너머에는 일제강점기 때의 건물이 몇 채 더 있으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관공서가 아니여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이 일대에 아직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건물은 대부분 병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날에는 이런 데 가만히 누워서 퍼지게 낮잠을 자야 제격이지만, 그럴 짬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잠에서 깰 겸 뒷뜰로 슬슬 걸어가보니 금성관의 역사와 함께했을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봐도 보통 나무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신목은 살려 놓았구나. 일본인들은 커다란 나무를 신성시하는 습성이 있다. 몇 년 전 일본에 갔을 때 그런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뭐 이렇게 큰 나무라면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 신성시할 것이다.

 

700살이 된 은행나무 두 그루. 하나는 암나무, 다른 하나는 수나무일까? 나란히 자라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성균관대학교 안에 명륜당에 가면 그곳에도 은행나무 2그루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은행은 이렇게 암수 2그루를 심는 것이 원칙이었다. 가을에 다시 와서 맛있는 곰탕과 함께 은행잎을 즐겨야겠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데, 돌틈에서 어성초가 자란다. 밭에서만 보다가 여기서 보니 너무 반갑다. 더군다나 하얀꽃까지 달고 있어 더욱 그렇다. 어성초는 잎을 건드리면 비린내가 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솔직히 난 이게 비린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좀 비린내에 민감하기는 한데, 이건 처음에만 비린내 비슷하지 가만히 맡고 있으면 향이 참 좋다. 내가 성격이 이상한 변태라서 그럴까?

 

돌틈에서 꽃을 피운 어성초. 누가 관아 뒷마당에 어성초를 심은 걸까? 아니면 저절로 자라고 있는 걸까?

 

풀처럼 살자.

풀처럼 살아야 한다.

뜯기고 밟히고 버려져도

자라고 자라고

또 자라고

말간 꽃을 피워 씨를 날리는,

풀처럼 살자.

풀처럼 살아야 한다. 

 

 

금성관을 나오며 새로 복원한 동·서익헌의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금성관의 현판 글씨도 참으로 절필이로세. 이 건물이 100평 가까이 된다니 그 크기가 상상이 되시는가! 일제는 이 건물을 관청으로 쓰다가 공간이 좁아서 그랬겠지만 바로 앞에 콘크리트로 2층 건물을 지은 것이다. 역사니 전통이니 문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실용만 따진 행태이리라. 그네들 입장에서는 뭐 그런 걸 따질 필요도 없었겠지.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금성관. 용케도 그 많은 전란을 피해 살아 남았구나. 장하다!

 

 

금성관을 나와서 나주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지방 소도시의 한가로움이랄까, 언제나 그렇듯 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보니 여기는 이발소가 많다. 외국영화에서 보면 이발소는 꼭 남자들의 잡담소 같은 곳으로 나온다. 그렇다, 이발소는 여자들의 미장원과 같은 곳이다. 헌데 요즘은 남자들도 다 미장원에만 가니 왜그런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요즘 남성이 여성화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조금만 가면 나오는 이발소의 모습에 아직도 공동체의 전통이 살아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사람이 산다면 이런 곳에 살아야 한다. 서울은 정말이지 사람이 살 곳이 아니다. 특히 아파트는 더 심하다.

 

시내를 한바퀴 돌고는 옛 나주역사를 찾아서 방향을 잡았다. 동점문을 지나쳐 나주천을 정비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다가가 길을 여쭈었다. 어찌나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지 눈을 감고 찾아가도 되겠다. 나주천 옆에 얕으막한 동산이 있어 그늘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하천 정비 때문에 일부러 물을 막아 놓아서 그런지 바닥에서 물비린내가 짙게 올라온다. 동점문이 자리한 위치와 이 동산을 연결해 지도를 보며 이어보니 옛 읍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성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쌓았다.

 

동점문을 바라보며 쉬면서... 동네 어르신이 지나가시다 사진에 찍혔다. 동점문은 복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주는 동학혁명 때도 동학군에 함락되지 않을 정도로 굳건한 곳이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살기 좋은 곳이었던 만큼 지배층도 튼실했을 것이다. 더구나 전라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었던가. 전라도는 전주와 라주에서 따온 이름이란 데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말기 불꽃 같은 의병 항쟁으로 이어졌고, 일제에게 초토화된 뒤 한풀 꺾인다. 그 때문에 3.1 운동 때에는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기세가 훨씬 덜했다고 한다.

 

 

나주역은 꼭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내가 보는 다카하시 노보루의 자료에 나주를 방문한 기록이 나온다. 그때 틀림없이 기차를 타고 나주역으로 왔을 것이다. 옛 나주역사는 이제 한적한 곳에 버려져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여기를 중심으로 모든 상권이 몰려 있었을 테지만, 새 역사를 지으면서 이곳은 버려졌다. 지난번 대천에 갔을 때도 원래 쓰던 역사를 버리고 새 역사를 지었던데, 요즘 이게 추세인가 보다. 도시는 더 성장해야겠고, 기존 역사를 이용하기에는 어려우니 도심 외곽에 새 역사를 짓는다. 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옛 나주역사. 이곳에서 발단해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제는 드센 나주 유림을 피해 광주를 신도시로 선정해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교육기관이 광주에 몰려 그곳으로 통학하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다툼이 발단이 되어, 천황 생일기념식을 기점으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다.

 

 

나주역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생긴 역은 대개 이렇게 생겼다. 색도 상아빛에 연청색으로, 어디나 똑같은 색이다. 그래도 나주역은 다른 역보다 규모가 2~3배는 된다. 그 규모의 차이는 이용객의 많고 적음에서 생겼을 것이다. 역사 안에는 당시 학생의 모습과 역무원을 복원해 놓은 인형이 있다.

바로 옆에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시간은 14시가 조금 넘어 너무 뜨거워 시원하게 쉴 겸 기념관 안을 보기로 했다. 자전거를 기념관 앞에 세우고 들어가니, 한적한 곳에 자리해 그런지 나주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참 한산했다. 방명록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2층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나주 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의 사진을 보니 참 앳된 모습이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는데 왜 그리 어려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리라. 20대 초반 전경이나 군인을 보면 참 늠름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는데, 이제 그런 사람을 보면 참 어리다. 저런 사람이 무슨 나라를 지키냐는 생각이 먼저 드니 말이다. 당시 독립만세를 이끈 학생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주에는 특히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진출해 있었다. 1900년대 초반부터 영산포에 진을 치기 시작했으니, 1929년 나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30여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더군다나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에서는 20년쯤, 차별과 천대, 수탈과 억압에서 오는 수치심과 분노가 쌓일 만큼 쌓였을 시간이다. 그러던 차에 일본인 학생과 충돌이 있었으니, 가뜩이나 잘 말라 있는 장작에 불씨만 필요했을 청년들의 가슴에 불이 났을 게다. 이후 전남 일대에 들불처럼 번졌을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결과 단숨에 무언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 하나하나가 가슴속에 살아 남아 이후 삶을 사는데 커다란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운동이란, 혁명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눈에 보이게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결을 보듬고 새로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개개인의 선택과 또 사회 환경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본 영상물. 학생독립운동 시위 및 백지동맹을 주도했다는 이광춘 할머니. 몸은 많이 불편하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증언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한참을 관람하고 있는데, 이 기념관의 전시기획팀장 박진우 선생님이 다가와 멀리서 오셨다며 말을 건네셨다.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주에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렸다. 그러니 참고하라면 자료집을 하나 주셨다.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나도 갈 길이 있고 이번은 여행이 목적이라 준비를 많이 못한지라 그냥 이 정도에서 작별을 고했다.

 

이후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영산포로 향했다. 나주 시내보다 영산포에서 더 일본인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영산포 자체가 일본인이 개발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나주학생운동기념관에서 얻은 좋은 정보. 일제강점기 영산포의 분포도.

 

 

영산포로 건너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산대교를 건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산교를 건너는 것이다. 영산대교보다는 영산교가 더 오래된 다리라 생각해 그리로 향했다. 아내는 연신 지도를 확인하고 가라고 난리다. 어디를 불쑥 불쑥 찾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꽉 짜인 경로와 프로그램에 따라서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 그에 반해 난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가고 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다니는 편이라 함께 어디를 다닐 때마다 부딪치곤 한다. 이제 슬슬 이해할 때도 됐는데, 아마 이렇게 평생 가야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하고 넘어가려나 보다.

 

영산교에서 바라본 영산강의 모습. 고려시대부터 포구로 개발되기 시작해 조선시대 세곡 운반을 위해 영산창을 설치한 이후, 근대 일제강점기에는 일대의 쌀을 일본으로 내가는 창구 역할을 하다가 해방 이후 1977년 마지막 배를 바다로 떠나보낸 뒤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지금은 4개의 댐과 하구둑을 쌓으면서 물의 양도 팍 줄어든 것이라 한다.

 

 

영산강은 바다와 통하는 창구였다. 지금은 상류에 4개의 댐을 짓고 하구에 둑을 쌓으면서 물깊이도 얕아졌지만, 예전에는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분주하게 드나들던 포구였다. 세곡선이며 젓배, 여러 상품을 실은 배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지금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 그치지만, 그렇게 배들이 드나들던 때는 정말 볼 만했으리라. 이명박 정부에서 지금 4대강 살리기라는 명목으로 영산강을 운하로 개발하겠다고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냥 놀고 있는 건설경기를 부흥하려는 큰 부흥회 같아 보인다. 배가 드나들려면 먼저 하구둑을 부숴야 하고, 댐도 처리해야 한다. 그런 건 그대로 두면서 4대강 살리기를 해 배가 드나들도록 만든다? 말도 되지 않는다. 눈가리고 아웅해도 유분수지.

영산포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자리하며 산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그 전에는 세창은 있어도 사람이 살지는 않았다. 사람은 나주에 살았을 게다. 나주에 자리잡지 못한 새로 들어온 일본인들이 자연스레 나주 건너편 영산포에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도정업자들이 선창의 주역으로 자리했다. 그리고 이 일대의 어머어마한 땅을 차지한 일본인 지주가 자리하고, 여러 공장과 그에 소속된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을 것이다. 그렇게 대규모 일본인 주거지가 형성된다.

 

영산포하면 홍어를 빼 놓을 수 없다. 고려 말기 흑산도 부근에서 잡힌 홍어를 항아리에 넣어 옮기다 발효, 숙성된 것을 먹기 시작한 게 효시라고 한다. 실제로 목포 근처에서는 숙성시킨 홍어보다 날것을 더 좋아한다. 숙성 홍어는 바다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영산포였기에 태어날 수 있는 음식이다. 영산교 건너편에는 이런 홍어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영산포를 꼼꼼히 돌아보고 싶었지만, 오늘 이렇게 오랫동안 자전거를 처음 탄 아내가 슬슬 퍼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영산강 강가에 마련되어 있는 마을 주민들의 정자에 퍼질러 누워버리기까지 했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한 난, 아내에게 맞춰 숙소를 잡기로 했다. 동네를 슥 한바퀴 돌면서 괜찮은 숙소가 없을까 둘러보았다. 그리곤 강가에 있는 부영모텔이란 곳으로 숙소를 결정했다.

먼저 방을 잡고 자전거와 짐을 올린 뒤, 씻고 옷을 빨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어느덧 시간은 6시가 조금 넘었다. 나중에 인터넷지도를 이용해 오늘 이동한 거리를 알아보니 15km 정도다. 5시간 동안 15km를 참 알차게 다녔다. 속도 이런 건 중요치 않다. 오늘 보고 듣고 느낀 바에 비하면 말이다.

 

영산포 등대로 알려진 내륙 등대. 처음 이 등대는 일본인들이 자주 넘치는 영산강의 물높이를 재려고 세운 것이라 한다. 등대 뒤편으로 보이는 벽이 바로 영산강의 범람을 막으려고 세운 제방이다. 이 제방이 있어 그나마 일본인의 주거, 상업용 건물이 무사했을 것이다. 영산강을 따라 오르면 이런 제방을 많이 볼 수 있다. 제방을 쌓고 그 너머에는 주로 논농사를 짓는다. 이런 제방이 없던 조선시대에 이곳은 그냥 습지나 범람원, 충적평야가 자리했을 것이다. 쌀에 눈이 먼 일본인에게 이런 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실제로 그들은 조선인을 동원해 서둘러 제방을 쌓고 농경지를 확보해, 다시 조선인에게 소작을 주고 그 소작료로 일본에 수출해 엄청난 부를 쌓는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는 거의 그런 식으로 부를 이루었다. 기존 농경지는 조선인 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어 끼어들기 어려워 선택한 길이다.

 

 

영산포 거리에는, 특히 영산강 가의 거리에는 홍어 냄새가 가득하다. 강가를 따라 걷노라면 홍어 냄새가 어느새 내 몸을 감싼다. 암모니아란 놈에 중독된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는 법, 홍어는 대표적인 암모니아 먹을거리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김치에 중독된 것도 그 안에 있는 여러 균의 맛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홍어도 발효음식인데 거기에 김치라는 발효음식까지 곁들여 먹으니 이건 소화가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얼른 홍어로 저녁이나 먹자고 들어간 집에서 정식을 시켰다. 둘이 배가 터지도록 먹고 어두운 영산강 가를 거닐며 바람을 쏘이며 배를 꺼트렸다. 토할 것 같은 배부름은 트림 대여섯 번으로 꺼트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아갔던 나주군 금천면 월산리 월정마을을 갔다가 담양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그런데 조금 걱정스럽긴하다. 아내가 첫 여행이라 너무 무리하면 안 될 듯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일 사정에 맞춰서 여정은 조정하면 되겠지. 뉴스가 끝나고 10시가 조금 넘어 잠자리로 날아갔다.

 

뱀다리... 배 터지게 먹은 홍어는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새벽에 부스스 일어나 화장실로 직행! 변기를 깨부수고 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서도 또 한 번. 점심을 먹고도 또 한 번.

 

홍어의 애 먹는 아내. 오늘 참 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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