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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雜다한 글

아내와 함께 나주 자전거 여행 - 둘째날

by 石基 2009.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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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을 너무 거하게 먹은지라 아침 7시에 일어났어도 아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단 길을 나서 가는 길에 식당이 보이면 먹기로 하고 모텔을 나섰다.

모텔 바로 뒤에는 오래된 지금은 텅 빈 건물이 한 채 서 있었다. 흔적을 보니 농협으로 쓰던 건물인데 혹시 이 건물에 다카하시 노보루가 오지는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건물은  1980년대에는 건강보험공단으로 쓰고, 그 뒤 농협으로 쓰다가 지금은 개인소유로 넘어갔다고 한다. 이런 건물을 활용하여 영산포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장소로 쓰면 좋겠다.

 

 

어제 미리 동네를 산책하며 알아본 장군의 아들 촬영 거리와 동산농장의 대지주 구로즈미 이타로의 집을 찾아나섰다. 장군의 아들 촬영지는 일제강점기 원정통이었던 곳으로 지금도 그 시절의 건물이 엄청나게 남아 있다. 어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본 바에 따르면, 도정업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곳이라 하니 영산포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겠다. 분주히 돌아가던 정미기 소리와 쌀겨 냄새는 사라졌지만, 거의 100년이란 시간을 훌쩍 뛰어넘으며 살아남아 있는 건물들을 보면서 저절로 그 당시의 모습이 떠올랐다.

 

영산포 원정통의 현재 모습. 일본인은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그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다. 많이 낡아서 문화와 관광을 생각한다면 시에서 수리비를 지원해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새로 시원하게 뚫린 영산대교를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나주 제일의 지주 구로즈미 이타로의 집을 찾을 수 있다. 구로즈미가 떠난 뒤 개인이 소유했던 것을 현재 시에서 매입하여 새로 단장하려고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 덕에 집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멀리 담장 너머로 쳐다볼 수는 있었다.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 일본 1873년 후쿠야마에서 태어난 그는 1905년 5월 30일 영산포에 들어온다.    

손수레를 밀며 장사를 시작했다는 그는, 경성과 나주를 오가며 눈치 빠르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경성에서 영산강 둘레에 제방을 쌓을 것이라는 정보를 발빠르게 입수한 뒤 일대의 땅을 대량으로 매입하며 농토를 개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주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은 그는 일본에서 모든 자재를 들여와 1935년쯤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는 이곳에서 쌓은 부를 바탕으로 조선농회의 이사는 물론 조선가마니회사와 금융회사, 전남전기주식회사, 조선식산주식회사, 목영 창고운수회사 등 각종 회사를 설립하여 어마어마한 부를 쌓는다. 그 결과 1930년대 1100정보, 330만 평이 넘는 토지를 가진 대지주의 자리에 오르고 동산농장을 운영한다.

 

 구로즈미 이타로의 저택. 현재도 주변에는 이에 맞먹는 건물이 별로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당시 이 일대에서 단연 우뚝 솟은 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영광은 쇠락하여 마당에는 잡풀만 가득하다.

 

 

그가 설립한 동산농장이 바로 1939년 다카하시 노보루가 광주를 거쳐 제주로 가는 길에 나주로 와서 들른 곳이다. 이 농장의 장원과 함께 나주 금천면 월산리로 농가 조사에 나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산농장 사무실은 어디였을까? 이른 아침이라 어디 물어볼 곳이 없어 일단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아갔던 마을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월산리로 향하는 길에서 본 드넓은 논. 이 모두가 구로즈미 이타로의 동산농장이 소유한 땅이었다. 여기 살던 사람은 모두 소작인 신세였을 뿐...

 

 

미리 지도를 확인했을 때 월산리는 전남혁신도시인가 하는 곳으로 지정되어 개발되고 있는 걸 확인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운기와 트렉터나 지나다녔을 법한, 잘해야 1톤 트럭이나 지나다녔을 법한 길에는 덤프트럭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수시로 지나다니고 있었다. 산은 파헤쳐지고, 농토는 갈아엎어져 앙상한 흙만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월산리를 찾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가게에서. 이제 농사를 못 지으니 대신 공사장에서 일하라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이걸 보고 씁쓸해지는 건 나뿐일까? 

 

 

한참을 달리다 허기지고 목이 말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가게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발견한 가게는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얼른 가게로 들어가 월산리로 가는 길도 묻고, 혹시나 하여 월산리에 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사는지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전화번호부를 가져와 펼치는데, 순간 심봉사 눈 뜨듯이 눈이 번쩍 뜨였다. 월산리에는 모두 2명의 강씨가 살고 있었다. '강춘자'와 '강환주'. 그 가운데 '강환주'라는 이름이 이상하게 끌렸다. 내가 찾아가는 곳에서 다카하시 노보루가 만난 사람은 강신성.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얼른 볼펜을 꺼내 들고 급한 대로 손바닥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베껴 적었다. 그리고 사전 정보를 얻을 겸 이 분이 어떤 분인지 물었다. 그러니 지금은 집이 수용되어 살기는 금천면의 아파트에 살면서 농사만 여기서 짓는다고 하며,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셨다.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다. 얼른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금천남초등학교와 그 인근 민가는 이제 철거가 한창이다. 이미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학교는 본관은 철거되고 별관만 아직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받았을 충격은 어떠했을까? 내 학교가 사라지는 그 느낌은? 

 

 

월산리로 오니 마을 표지석이 길을 인도한다. 그걸 따라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한참을 달리는데 맑은 물이 흘렀을 농수로에는 현실을 반영하는 듯 붉은 흙탕물이 가득했다. 옆으로 펼쳐져 있는 논의 푸르름과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어 인상적이었다. 마치 피를 흘리듯 농수로에는 붉은 흙탕물만 흐르고 있었다.

 

 

 

이제 마을에 다 들어왔다. 어디가 가게 아저씨가 설명해준 곳일지 가늠하면서 천천히 자전거를 몰았다. 마을로 들어선 순간 한쪽에서 어르신 내외가 수박 줄기를 처리하느라 바쁘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가 강환주 어르신이 어디 계시지 아시는지 여쭈었다.

그 순간, "우리가 긴데 왜 그런다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찾았다. 이 분이시구나.

 

 강환주 어르신의 하우스 농사. 수박을 다 걷어내고 이제 고추를 심을 거라고 하신다. 부여에서는 벼를 심었는데 여기서는 고추가 일반적이다.

 

 

먼저 예의를 차려 인사를 드리고,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설명 드렸다. 

"어르신 혹시 강신성 어르신을 모르시나요?"

"우리 조부님이신데..."

"아, 그러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옛날 책이 있는데, 거기에 어르신의 할아버님께서 나오셔서 그 자료를 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세상에 별일도 다 있다며 저기 농막에 시원한 데 가서 이야기하자며 그쪽으로 이끄신다. 함께 농막에 자리하고 앉으니 할머니께서는 하우스에서 다 걷고 남은 수박을 한통 가져오셔 쪼개 주셨다.

 

 강환주 어르신과 할머니. 할머니 성함은 따로 여쭈어 보지 않았다.

 

 

어느신 제가 1937년인가 38년쯤에 그 일본 사람이 여기 와서 어르신 할아버님이 농사짓는 걸 조사해 갔더라구요. 그래서 혹시 여기에 오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어요. 혹시 할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환주 할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 강신성 씨는 한마디로 근면성실한 분이셨다고 한다. 동산농장 사무소가 여기 들어오면서 지난 전남외국어고등학교 있는 데에 있었다면서, 그 농장에서 소작을 하셨는데 농사를 잘 지어서 상도 타고 부상으로는 명주베를 받았다고 하신다. 남들 논에는 비료를 많이 줘서 죄 쓰러지는데 할아버지는 부지런하게 풀 베다가 두엄 만들고, 외양간에서 밟혀서 꺼내 써서 그런 피해는 한 번도 없었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다 동산농장의 소작인이었는데, 그나마 소작도 못 얻은 사람은 쫓겨나다시피 만주로 갔단다. 그렇게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만주에서 소련으로, 중앙아시아로 뿔뿔이 흩어져 고생고생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하신다.

그래도 소작이나마 부치던 사람은 고향땅은 떠나지 않아도 됐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이 많았단다. 그도 그럴것이 여기서 농사를 지으면 일본놈들이 90%나 빼앗아 갔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히 먹을 게 없었다고. 농사를 잘 지어도 소작료에 비료값에 물값 등등을 떼면 내 몫으로 떨어지는 것이 없는 참혹한 현실을 보며 어린 시절을 지내신 것이다. 오죽하면 측간에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 벼를 묻고는 위에다 흙하고 재를 덮어놓았을까 하시며 그때 일을 회상하신다. 그렇게까지 해서 뺏기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것마저 귀신같이 찾아가곤 했단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어찌나 성실하신지, 요즘처럼 더울 때는 아침에 시원할 적에 풀 베다가 두엄도 만들고 외양간에도 넣어 두엄을 만들었다며, 비료만 쓰면 논이 박해진다고 금비는 적게 퇴비는 많이 써야 한다며 한소리하신다. 어릴 적에는 마을에 서당도 있어서 바쁠 때는 엄두도 못내고 농한기에 두 달 정도 서당에 다녔다고 하신다. 그래서인지 촌에서 농사만 지으신 어르신치고 말씀하시는 것이 정연하다.

 

강환주 할아버지의 집. 200년도 더 된 터에 80년대 집만 고쳐 지었다고 하신다. 다카하시 노보루도 이곳을 찾아왔을 게다. 

 

 

혹시 실례일지 몰라 조심스럽게, 옛날 기록을 보니 할아버지께서 묘지기도 하셨다는데 사실인지 여쭈었다. 그랬더니 허!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획 쳐다보시더니, 여기 뒷산이 원래 주인이 자기 선산을 못 찾고 있는 걸 광주까지 찾아가서 할아버지께서 찾아주고 이걸 관리하셨단다. 못된 사람이었으면 주인이 없는 산이라고 함부로 했을 텐데, 그걸 끝까지 수소문해 찾아가 주인을 찾아주고 한 걸 보아도 강신성이란 분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 자연히 그럼 어르신의 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셨냐고 묻게 되었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시면서, 일제시대에 징용에 끌려가 탄광인가에서 일하고 돌아온 뒤로는 시름시름 앓다가 본인이 19살 때 돌아가셨다고 하신다. 그걸 본 식구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뼈골 빠지게 농사지으면 먹을 것도 없이 쓸어가, 사람은 데려다가 진빠지게 일을 시켜 시름시름 죽게 만들진 않나... 이래도 일제시대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르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인들을 월남에 보내 그 돈으로 경제 성장을 시킨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 그 논리대로라면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지.

  

 

위 두 문서는 일제강점기 강신성 씨의 서명이 들어 있는 문서다. 위는 금융조합에 돈을 잘 갚겠다고 서약서를 쓴 것이고, 아래는 대출금을 갚았다는 영수증이다. 이렇듯 자본주의적 경제 제도가 들어온 일제강점기 현금이 없는 농민은 금용기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 이후 미군정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똑같다. 요즘도 농협만 제대로 해도 농민이 덜 힘들 것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현재는 5000평의 농사땅에서 농사를 지으시는데, 어떻게 소작을 하다가 땅을 가지게 되셨는지, 부지런하셔서 돈을 많이 모으신 것인지 여쭈었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그 땅을 농사짓던 소작인에게 10~20년 상환제로 자기가 농사짓던 땅에서 계속 농사짓게 해주었단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던 사람은 그나마 자기가 소작하던 땅에서도 쫓겨났다고 한다. 이게 그 유명한 이승만 정권의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흔적인가?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전쟁 시절의 인민군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당시 다도면은 모두 산인지라 인민군들의 본거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밤이면 마을에 나타나 밥이며 소며 먹을거리를 가져갔다고. 그러고 낮이 되면 경찰이 나타나 누가 인민군 도와줬냐며 마을 사람들을 족쳤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민군은 경찰 간부나 앞잡이 아니면 사람은 해하지 않았는데, 경찰은 사람들을 엄청 괴롭혔다고 회상하신다. 낮에 나타나 마을사람들 괴롭힐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인민군 소굴에 가서 걔네를 족쳐야지 애꿎은 사람들만 괴롭혔다며 당시 경찰의 무능력함을 꾸짖으셨다. 그러면서 젊은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거라며 전쟁은 다시는 있으면 안 되는 일인데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이나 정말 힘들 거라고 하신다. 꼭 짚어 세계평화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전쟁에 대한 힘든 기억으로 저절로 반전주의자가 되셨나 보다. 사람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그걸 내 관점에 다른 사람을 맞추려고 시작하면 싸움이 끝도 없을 것이다. 서로 남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 

 

강환주 어르신 댁을 중심으로 드넓게 펼쳐진 논. 바로 옆에서는 혁신도시 개발구역에 들어가 공사가 한창이다. 혁신도시가 들어서면 이 주변 땅들은 어떻게 될까?  

 

강환주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이 산을 배매기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까지 물이 들어와 배를 맸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이곳도 인간의 끝없는 노동으로 만든 땅인가 보다. 

 

 

혁신도시로 월산리 바로 옆에는 한전이 들어온다는데, 원래 있던 산을 깎아서 새로운 산을 만들어 조경을 하느라 정신없었다. 큰 도로가 뚫리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저기 붉은 속살은 드러낸 땅이 안쓰러웠다. 이곳에 어떤 도시가 들어설까? 나중에 개발이 끝나고 나면 그때도 다시 한 번 와야겠다. 물론 강환주 어르신도 만나고 말이다.

 

혁신도시로 개발하고 있는 곳을 빙 돌아 광주로 가는 길에. 아내는 이런 여행이 처음인지라 너무 힘이 들다고 하여 원래 계획했던 일정의 반만 소화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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