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ri Lanka is smarting under a severe drought

  • Dry spell has resulted in 20 per cent shortage in crop yield

  • Government is pushing for alternative crops that require less water





Sri Lanka is in the throes of a possible drought, which could adversely affect its farm output this year, indicate latest updates from the government and international agencies.
 
A 15 per cent reduction in paddy production is expected during the main harvesting season that ended in April due to dry weather conditions, says a report released by the World Food Programme and Sri Lanka’s ministries of economic development and disaster management on 19 May.
 
According to the UN Food and Agriculture Organisation (FAO), the food grain output could be 3.8 million metric tons, nearly 20 per cent lower than that of 2013. This, in fact, is about eight per cent lower than the average harvest recorded in the last five years, says FAO’s latest global information and early warning system on food and agriculture.
 
“The losses are mounting because we have not had any significant rains since last November,” Rajith Punyawardena, chief climatologist, department of agriculture says.
 
“The urgent need is to come up with an integrated national policy that brings together agriculture, water resources, nutrition and healthsectors,” he says.
 
One of the worst-hit regions is the northern province. The province registered a shortfall of whopping 60 per cent as the harvest was mere 112,000 metric tons as against an estimated 300,000 metric tons.
 
“The losses were primarily due to planted area drying out for the lack of water,” Sivapatham Sivakumar, provincial director for agriculture tellsSciDev.Net.  
 
Sivakumar says harvest losses in the northern province have raised fears of deteriorating food security among its poorer sections. The FAO said that April saw rice prices soaring to record levels, 23 per cent higher than a year ago.
 
Officials at Sri Lanka's department of irrigation warn that the drought is likely to extend due to a weaker monsoon due to set in by end-May.
 
“All the major irrigation reservoirs are running well below capacity level, at around 30 or 40 per cent. If the monsoon fails, our advice will be to reduce the harvesting extent,” Badra Kamaladasa, director general, irrigation, says.  
 
The Ministry of Agriculture proposes to use 35 per cent of the 779,000 hectares of paddy-growing area to plant alternative crops such as onions, potatoes and chilies during the dry season between May and August. The government will provide high yield seeds and fertiliser at concessional rates for farmers who are ready to make the switch.
 
Sri Lanka last suffered a similar dry spell between December 2011 and October 2012, which affected an estimated 1.8 million people living in arid parts of the country's northern, eastern and southern provinces; and cut the 2012 rice harvest by seven per cent compared to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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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gri-history.kais.kyoto-u.ac.jp/East-Asian2008/proceedings.pdf



P-1 岩本純明 (도쿄농업대학)

근대 일본의 공업화와 농업 부문


P-2 구자옥(전남대 명예교수), 이은웅(서울대 명예교수), 이병렬(한국 기상청)

한국의 벼농사 재배 및 품종의 변천사 ―근대화 과정을 중심으로


P-3 王思明(난징농업대학 중화농업문명연구원)

한중일 농업 현대화 비교연구


AI-1 佐藤章夫(토호쿠 대학 대학원)

근세 중・후 농업 수리시설의 부진과 유지관리를 둘러싼 藩과 村 자치 -山形五堰을 사례로


AI-2 박태식(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조선반도 삼국(백제・신라・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미 비교


AI-3 戸石七生(일본학술진흥회), 松尾美希(도쿄대학)

일본 가족은 특이한가? 공업화 이전 시대의 직계가족 제도와 촌락사회


BI-1 劉興林(난징대학)

한대 농전農田 형태 약설


BI-2 大瀧真俊(교토대학 대학원)

전시체제기의 일본에서 '만주'로 이식마移植馬 사업 -홋카이도 농법의 도입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BI-3 黄世瑞(화난사범대학)

민속풍정과 중국 전통농업 사회


AII-1 朴錫斗(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농업의 변모


AII-2 野間万里子(교토대학 대학원)

전전 시가현에서 소 비육


AII-3 김미희 외(농촌진흥청 농촌자원개발연구소)

원예의 전통지식과 그 실천적 특성에 관한 평가


BII-1 魏露苓(화난농업대학)

청 말 남해안 지역의 근대화 농업교육 연구 —잠상학당을 중심으로


BII-2 小島 庸平(도쿄대학 대학원)

전쟁 시기 동아시아의 제분업과 밀 시장 ―일본 자본의 '만주' 진출을 중심으로


BII-3 張法瑞(중국농업대학)

중국 농업 현대화 과정 속의 과학과 교육 요소


AIII-1 三浦洋子(치바경제대학)

식민지 시대에 조선 북부의 대농장 경영 -난곡기계농장의 유축전작농업의 실태


AIII-2 안승택(전북대학)

식민지 조선에서 소주밀식小株密植 정책과 농민의 소식疎植 관행 ―역사생태적 지평에서 본 농업기술의 비교문화론


AIII-3 伊藤淳史(교토대학)

전후 일본의 출이민 정책 -농업정책에서의 측면 및 일본계 브라질 이민의 역사적 맥락


AIII-4 金鐘德(사당동 한의원 원장)

대나무의 성질과 효능에 관한 문헌연구


AIII-5 황대룡

한국 농촌 주민의 사회교육 참가에 관한 분석


BIII-1 加藤尚子(국립환경연구소)

한신 대수해 기념지 7책에 관한 비교서지학적 연구


BIII-2 李建萍(중국농업박물관)

근대 중국 귀저우 소황촌의 변천으로 본 민족지구 전통문화 가치의 재발견


BIII-3 中山大将(교토대학)

사할린 음식의 식민지사


BIII-4 李令福(산시사범대학)

환경보호 사업이 어떻게 白城则村의 현실과 미래에 영향을 미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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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던 것은 6~7년 전쯤이었다. 논에 붙어 있거나 논 안의 한 귀퉁이에 있는 웅덩이에서 물고기나 개구리를 잡아서 먹었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던 것이 비로소 제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역마다 덤벙(경북), 둠뱅·툼벙(전남), 둠벙(경기, 충청, 경남)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둠벙은 논이나 그 주변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물웅덩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둠벙은 원래 농업용으로 만들어져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수리시설이 좋지 않았던 시절에는 논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물,’ 즉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긴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논에 물이 좀 난다 싶은 곳에는 꼭 둠벙을 팠다. 이에 대해 전남 담양군 시목마을의 신현만 이장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옛날에는 샘(관정)이 없으니까 물 쓰려고 논마다 팠지. 지금은 저수지가 안골 하고 쇳대에 2개나 있고, 샘을 파서 참 발전했지. 그전에는 물 땀시 농사 못 지었어요. 물 없어 논 못하는 곳은 서숙(조) 갈고 메물(메밀) 심고 그랐어요.”


과거 수리시설이 부족했을 때에는 가능한 곳에서는 그렇게 둠벙을 팠기에 거의 모든 논에 둠벙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둠벙을 파 놓으면 그나마 물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둠벙의 물을 모내기에 맞추어 농업용수로 활용하려면 맞두레를 이용해 논바닥으로 퍼야 했는데, 그 일은 손이 잘 맞는 사람끼리 해야 했다.


그러다가 관정을 뚫기 시작하면서 양수기로 지하수를 마음껏 퍼 쓰고, 커다란 저수지가 생기며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근대적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둠벙의 효용가치는 크게 떨어졌고, 쓸모를 잃은 둠벙은 결국 경지정리와 함께 농촌의 경관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쓸모없는 둠벙을 유지하기보다는 논을 조금이라도 늘려 벼 한 포기라도 더 심어 먹는 것이 훨씬 이롭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래서 현재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둠벙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는 전라남도의 친환경농업과에서도 이 사업의 초기에는 애를 많이 먹었다. 전라남도 친환경농업과의 이춘봉 계장의 말을 들으면, “전남에서는 생명식품생산 2차 5개년 계획(2010~2014년)을 실시하여 무농약과 유기농을 전체 농업의 45%까지 끌어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중 공약의 하나로 생태둠벙을 2014년까지 500개 조성하려고 합니다. … 처음에는 주민들이 파려고 안 했습니다. 둠벙 하나에 30평쯤 할애하는데, 그걸 싫어해서 동네 땅에나 하지 내 땅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담양군 시목마을의 둠벙. 2004년에 전남도의 지원으로 조성된 이곳은 마을에 오폐수처리시설을 설치하며 생긴 마을땅에 만들어졌다.



둠벙이 기르던 생명들


그런데 둠벙의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둠벙이 논을 둘러싼 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을 풍부히 하는 동시에, 농민들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의 역할도 했다는 사실이다. 둠벙이 단순히 농업용수만 확보하는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영양분이라면 크게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들 수 있다. 탄수화물이야 곡식을 통해서 구한다지만, 단백질은 콩이나 고기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헌데 그 옛날 고기 한 번 구경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 바닷가가 아닌 내륙에서 농사를 지으며 단백질을 공급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다야 조금만 나가면 물고기며 어패류 등이 널려 있어 흉년이 와도 굶어죽는 일은 없었고, 산간 지역에서는 그래도 덫이나 올무를 놓든 사냥을 하면 고기 냄새라도 맡을 수 있었다.


내륙의 농업지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콩이란 좋은 단백질 공급원은, 사실 어디 동물성 단백질에 비하랴. 남의 살인 고기의 그 짜릿한 맛에 콩이 비할 바가 못 된다. 애기들한테 콩과 고기를 놓고 먹여보면 대번에 고기에만 입을 뻐끔뻐끔 벌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고기에 대한 갈증을 그나마 해소시켜주었던 것이 둠벙이다. 다양한 생물들 ㅡ미꾸라지를 필두로 붕어, 새우, 심지어 민물장어까지ㅡ 이 깃들어 살던 둠벙에 대한 기억을 시목마을의 노농들에게서 들어보자.


“둠벙에는 미꾸라지가 그렇게 많았어. 가을에 벼갈이(벼베기)하고 잡아서 추어탕 끓여놓으면 그렇게 겁나 맛있어. 미꾸라지는 찬바람이 나야 제맛이 나. 샘(둠벙) 밑에 물을 조금만 푸면 한 빡께쓰씩 잡았어. 붕어, 피리(피래미), 중태기도 있고, 자라에 장어까지 살았지. 새우도 겁나 많고. 그걸 산태미(삼태기)를 대고 풀을 질근질근 밟아서 확 들어 잡고 했지.”


농민들은 둠벙이 품어 키운 물고기며 새우 등으로 고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며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의 남부 지역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벼논양어’라는 형태로 논에서 벼와 함께 물고기를 키워 먹는 문화가 남아 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노농들이 기억하고 있는 일과 하나도 다름없이 꼭 들어맞는다. 하지만 이제는 도처에 널린 게 고기이고, 그것도 너무 값싸게 생산되어 고기 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니 둠벙의 그런 가치도 사라져 버렸다. 둠벙이 제공하던 단백질도 쓸모없어졌다는 말이다. 결국 둠벙은 대대적인 경지정리 사업과 함께 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경지정리 사업으로 논이 반듯하고 커지며 농기계를 이용한 작업이 수월해졌다. 그로 인해 생산성은 급증했으나 논의 다양한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논에 사는 긴꼬리투구새우. 논에서 농약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사라졌다가 최근 친환경농업이 확산되면서 다시 논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때는 멸종위기종으로까지 지정되었으나 다시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해제되기도 했다. 이놈들이 아침이면 분주하게 논바닥을 훑고 다녀 흙탕물을 일으키는데, 그 덕에 풀이 덜 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이들의 똥은 좋은 거름이 되었을 테고,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둠벙, 생태계의 연결고리


둠벙이 사라지면서 논의 생물다양성은 감소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둠벙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둠벙의 역할 중에는 벼를 심고 한 달 반쯤 지나 실시하는 중간물떼기 때, 논에서 살던 수생생물들이 잠시 피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도 있다. 이제는 그런 수생생물이 혹여 논에서 살더라도 어디로 도망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농약과 화학비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점점 친환경농업이 확산되면서 이러한 부분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무엇보다 생태계의 연결고리가 파괴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시멘트로 발라버린 농수로에서는 수초도 살지 못하고, 그러니 자연히 수초에 꼬이는 플랑크톤 등도 사라지고, 그를 먹이로 삼는 물고기 등도 사라진 지 오래이다. 또한 물고기들이 오갈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만들어진 저수지와 하천의 둑도 생태계의 연결고리를 무참히 끊어놓았다.


“지금은 미꾸라지를 구경도 못해. 이 미꾸라지가 개울에서부터 올라와요. 지금은 다 막아 버려서 올라올 수가 없어, 물만 내려가지. 쬐까 뛰어봐야 벼룩이여. 장마철에 비가 오면 막 뛰어올라서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어. 길가에 막 튀어오르고, 집 앞마당까지 막 떨어졌다니께.”


장마철이면 하늘에서 미꾸라지가 쏟아지기라도 한 듯 펄떡펄떡 뛰는 미꾸라지들이 앞마당까지 떨어졌다는 노농들의 추억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인간이 사는 집도 철저히 고립된 인공의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생태계의 일부였다는 말일 것이다. 하늘이 비를 내리면 이를 숲이 머금었다가 샘과 계곡으로 내뿜고, 이를 인간이 집 안으로 끌어들여 생활용수로 활용한 다음 농수로와 개울로 내보내면 수생식물이 이를 정화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물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수생동물들이 모여 살았다. 이렇듯 인간의 집도 자연생태계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막히거나 끊이지 않고 하나로 이어졌다. 논이나 둠벙은 그 연결고리 안에 존재하던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연결고리가 거의 모두 끊어져 버렸다. 집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는 오폐수처리시설로, 사람과 가축의 똥오줌은 정화조로 들어가 격리되어 처리된 뒤 버려진다. 농수로는 시멘트로 발라져 숲과 집과 논을 연결하고 다양한 생물들의 서식지 기능을 잃고 물만 전달한다. 이처럼 각개격파 당한 듯 곳곳에 끊어져버린 물의 생태체계로 인해 둠벙을 조성하더라도 하나의 고립된 섬으로만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관정과 농수로 현대화. 이로 인해 논과 그를 둘러싼 생태계는 고립된 섬으로 남게 되었다.



둠벙은 죽었다?


물론 둠벙에 대해 낭만적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현재 농민 인구는 29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8%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 둠벙이 논마다 존재하던 시절의 농민 인구는 전체의 60~70% 정도에 이르렀다. 더구나 지금의 농민들 가운데 35% 정도는 고령층이다. 즉 그때만큼 일손이 많지도 않은데 둠벙처럼 관리에 품이 필요한 또 다른 일을 벌이기가 어렵다. 또한 조금이라도 생산량을 늘려야 했던 시대의 요구가 있었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이런 상황에서 둠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새로운 볼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하는 수준일까? 물론 관광자원의 역할도 현재의 농촌을 생각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이다. 사실 그것이 현재로서는 둠벙의 가장 주요한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2012년의 봄가뭄은 둠벙의 잃어버린 가치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수리시설이 취약한 산간, 도서 지역의 경우 둠벙 덕에 가뭄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보고가 이루어지며 전남에서는 현재 그러한 지역을 중심으로 둠벙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늦었지만 둠벙이 수질을 정화하며 생물다양성을 풍부하게 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연구들이 하나둘 발표되고 있다. 문명의 이기의 등장, 농촌사회와 농업 생산환경의 변화 등으로 둠벙의 실용적 가치는 현재 그 쓰임이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둠벙의 완벽한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다시 그 가치가 주목받을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둠벙은 죽지 않았다. 다만 사라졌을 뿐이다.”



경지정리된 마을의 논을 바라보며 옛일을 회상하는 시목마을의 어르신들.




함께 보면 좋을 글


<논 중간 낙수기에 미꾸라지 피난처로서 둠벙의 기능 평가>, 김재옥 외

“고맙다, 둠벙”, 농민신문, 이승환·임현우

민물새우 사는 생태연못 둠벙을 아십니까?”, 과학동아, 윤신영

논 생태계의 보물창고, 둠벙”, 농촌진흥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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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벼농사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청동기시대 이래 농경사회에서 물을 이용하는 기술의 필요성이 불가피하였으며, 수전경작 이후 필연적으로 수리(水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수리관개(水利灌漑)시설을 촉진시켰다.


 오늘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양수 시설로는 맞두레, 용두레, 수차(무자위), 물풍구 등이다. 이러한 도구의 제원을 살펴보면, 먼저 맞두레는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로 두 사람이 양쪽에서 새끼줄에 매단 두레박을 이용하여 물을 퍼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하고 힘도 많이 든다. 그래서 혼자서도 쉽게 물을 퍼올릴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 용두레이다.


 용두레는 긴 장대를 삼각뿔 모습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나무를 파서 만든 기다랗게 생긴 두레박을 새끼줄로 매달고 지렛대 원리를 활용하여 혼자서도 힘들이지 않고 물을 퍼올리는 장치이다. 이 삼각뿔 장대는 요즈음 카메라의 삼각대처럼 자유자재로 그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삼각구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이 발달되어 발로 밟아 물을 퍼올리는 수레바퀴 모양의 무자위를 만들어 내었다.


 무자위는 무넘이가 아주 얕은 곳에서 대량으로 물을 대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물을 자아올린다 하여 '무자위'라고 부른다. 지방에 따라 '무자새'(경남)·'물자새'·'자새'(전라남북도)·'수리차'(충남)·'수차(水車)'·'수룡(水龍)'·'답차(踏車)'라고도 불린다. 문헌에 보이는 무자새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물자새'(훈몽자회)·'무자애'(재물보·사류박해)·'자애'(농가월령가)등을 들 수 있다.


 무자위는 수레나 물레의 바퀴모양으로 한 개의 축을 중심으로 주위에 많은 나무판(발판) 날개를 나선형(螺旋形)으로 붙이고, 중간 가장자리 부분에 물길을 내었다. 사용방법은 먼저 발판이 물에 잠기도록 설치한 뒤 받침대 끝에 설치되어 있는 긴 작대기 2개를 잡고 올라서서 발로 나무판을 밟고 걸으면, 바퀴가 돌면서 물을 퍼 올리게 되는데, 퍼 올려진 물은 물길을 통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의 논이나 밭에 끌어 올린다.


 이 무자위는 물레방아의 원리와 비슷하지만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동력을 얻는 대신에 거꾸로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물의 위치를 바꿔주는 것이 다르다. 특히 무자위는 논이나 밭의 높이가 물의 높이보다 더 높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통 너른 들이나 평야지대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염전에서는 바닷물을 퍼 올리는 데 사용하고 있다.


 무자위는 무넘이의 높이가 1m인 경우, 200여 평의 논에 물을 대는 데 약 두 시간 정도 걸리며, 무넘이의 높이가 30㎝인 곳에서는 1시간에 50~60t의 물을 댈 수 있다.


 이러한 무자위와 함께 풀무의 원리를 이용하여 통 안에 장치된 피스톤을 왕복시켜서 물을 품어내도록 한 물풍구가 사용되었다. 이 물풍구는 굵은 대나무의 속을 파내거나 판자로 통(실린더)을 만들고, 그 속에 활대(피스톤)를 끼워 사용하였는데, 시간당 10~20t의 물대기를 할 수 있었다. 요즈음의 양수기도 전기모터를 이용한 고속회전으로 많은 물을 쉽게 퍼 올릴 뿐 그 기본원리는 옛 도구들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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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일제가 행한 수리관행조사, 수리현황조사는 소유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를 중점적으로 조사했다. 수리시설이 국유인지 민유인지를 정확히 파악해 토지조사사업을 하며 자신들의 관리 아래 두려고 했다. 그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제언

합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남

함북

80(49)

122(110)

355(214)

513(483)

397(360)

1793(1237)

221(221)

40(40)

7(4)

2589(237)

241(24)

19(1)

7(7)

1215(153)

687(624)

612(547)

1784(396)

6997(642)

1902(632)

803(578)

1118(1101)

373(95)

850(213)

3873(87)

298(46)

195(162)

1295(202)

809(734)

967(761)

2297(879)

7394(1002)

3695(1869)

1024(799)

1158(1141)

380(99)

3439(450)

4114(111)

317(47)

202(169)

6384(2987)

20707(5276)

2,7091(8263)

괄호는 고쳐야 할 곳


조사 결과 일제는 대개 제언은 국유이고, 보는 공유라는 것을 확인했다. 제언은 공공사업의 일환으로 쌓아 국유주의 원칙으로 이용했고, 보는 덕을 보는 사람들이 냇물을 쓰기 위해 함께 쌓아 이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는 수리시설의 공공성 때문에 소유권보다 공동이용권이 우선이었던 현실은 그냥 무시해 버렸다. 제언 국유를 주장하던 일제는 무너진 제언을 수축하고 소유권을 주장했다. 조선 말기 국력이 약해지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제언은 관리되지 못해 황폐해지고 그 중심이 보로 옮겨 간 것 같다.




1920년대 수리조합 사업 추진


1906년 3월 일제는 ‘수리조합조례’를 발포한다. 이 조례에 따라 조합원은 토지를 소유한 사람으로 한정된다. 기존 수리시설을 기반으로 조직된 수리단체에는 관행대로 소작인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수리조합을 통해 새로 수리시설을 개발하면 거기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또 수리조합은 사업비를 빌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리금은 총독부에서 지불을 보증하는 혜택도 있었다. 이는 지주 중심의 수리개발을 염두에 둔 일제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초기에는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제는 아직 많은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고, 지주층은 무리하게 새로 토지개량 사업에 투자하기보다 40~50% 소작료가 보장되는 토지 소유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1917년 7월 ‘조선수리조합령’을 공포한다. 이는 모두 41조인데, 수리조합사업을 추진하는 데 차질이 없도록 최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3조는 조합원이 될 사람의 반이 조합 설립을 반대해도 그들이 소유한 토지가 예정 구역의 1/3을 넘지 않으면 반대할 수 없도록 명문화했다. 또 조합은 조합원에게 강제로 조합비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하지만 일제는 조합장을 비롯한 조합의 주요 간부는 도지사가 임명하거나 인가를 받도록 하고, 조합의 재산 처분도 인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1918년 일본의 쌀 폭동 이후 1920년부터는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다. 총독부와 각 도는 토지개량사업 계획을 세우고 그 실행에 박차를 가해 100~200정보 이상의 대규모 토지개량사업은 수리조합을 조직해 수행시켜 토지개량 실적의 80% 이상을 수리조합이 달성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의 자금 사정이 악화되고, 조선의 고금리, 물가 등귀에 따라 사업비가 증가해 의욕에도 불구하고 토지개량사업은 정체되었다. 이에 1926년부터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실시했다. 갱신된 계획에 따라 총독부가 저리 자금을 알선해 토지개량 자금의 이자율을 떨어뜨려 사업자의 부담을 줄이고 토지개량사업 실행 기구를 강화하여 위에서부터 강력하게 토지개량사업을 추진했다.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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