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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평예(坪刈; 농작물의 작황을 검사할 때 평균적으로 된 곳의 한 평 내지 몇 평을 베어 전체의 소출을 셈하는 방법) 시험
코우사카 기사부로(向坂幾三郞)
조선에서는 경지면적을 말할 때 몇 마지기 또는 며칠갈이로 계량하는데, 그 한 마지기 또는 하루갈이로 부르는 것도 가는 곳마다 서로 다르다. 혹은 두 마지기로 하여 이전에 1단보에 해당하는 면적임에도 세 마지기나 네 마지기로 부르던 것이라서 처음으로 이런 계량 단위를 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한 마지기에 몇 말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몇 섬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결코 이를 토대로 전체를 추론할 수 없다. 특히 도량형 제도 역시 통일적이지 않은 오늘날, 몇 섬 몇 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가는 곳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통계가 유래한 근거를 알지 못한 채 조사의 필요성도 인정하지 않으므로 농민은 해마다 자기의 경지는 물론 생산되는 수확물의 수확량마저 자세히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정확한 수확량은 스스로 자기들이 조사하지 않는 한 도저히 이를 분명히 할 수 없어서 농업경영자들이 늘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점으로, 경영방침과 개량법을 쉽사리 확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이제 일본과 조선 양국 공통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조선 농업에 뜻을 둔 사람이 날로 많아지는 때를 즈음하여, 경지의 생산력을 알아야 할 필요가 더욱 간절하다고 믿는다. 이 모범장은 지난 1906년, 우선 전라북도 군산과 경기도 수원의 두 지역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농사짓는 곳을 선정해 정밀한 평예를 함으로써 두 나라의 벼 품종별 수확량을 조사하여 다음의 성적을 얻었기에 보고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다음의 성적에 의하여 두 지역 논의 수확량을 개략적으로 알게 되었고, 일본 품종이 상당한 차이로 조선 품종보다 우수하여 단보당 수확량이 400kg 이상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이로 보아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선의 재래종 대신 일본 품종으로 대체하는 것만이 조선의 쌀 생산량을 뚜렷하게 증가시킬 수 있음은 추호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무튼 품종을 장려하고 보급하기 위해서는 아주 신중한 조사가 필요하므로 단순히 다음의 성적에만 의존하여 결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 모범장에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연구조사를 반복, 빨리 좋은 품종을 찾아 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권업모범장 1907년 사업보고서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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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ustrial agriculture could be hitting fundamental limits in its capacity to produce sufficient crops to feed an expanding global population according to new research published in Nature Communications.
The study by scientists at the University of Nebraska-Lincoln argues that there have been abrupt declines or plateaus in the rate of production of major crops which undermine optimistic projections of constantly increasing crop yields. As much as "31% of total global rice, wheat and maize production" has experienced "yield plateaus or abrupt decreases in yield gain, including rice in eastern Asia and wheat in northwest Europe."
The declines and plateaus in production have become prevalent despite increasing investment in agriculture, which could mean that maximum potential yields under the industrial model of agribusiness have already occurred. Crop yields in "major cereal-producing regions have not increased for long periods of time following an earlier period of steady linear increase."
The paper makes for ominous reading. Production levels have already flattened out with "no case of a return to the previous rising yield trend" for key regions amounting to "33% of global rice and 27% of global wheat production." The US researchers concluded that these yield plateaus could be explained by the inference that "average farm yields approach a biophysical yield ceiling for the crop in question, which is determined by its yield potential in the regions where the crop is produced." They wrote:
"... we found widespread deceleration in the relative rate of increase of average yields of the major cereal crops during the 1990–2010 period in countries with greatest production of these crops, and strong evidence of yield plateaus or an abrupt drop in rate of yield gain in 44% of the cases, which, together, account for 31% of total global rice, wheat and maize production."
Past trends over the last five decades of perpetually increasing crop yields were "driven by rapid adoption of green revolution technologies that were largely one-time innovations" which cannot be repeated. These include major industrial innovations such as "the development of semi-dwarf wheat and rice varieties, first widespread use of commercial fertilizers and pesticides, and large investments to expand irrigation infrastructure."
Although agricultural investment in China increased threefold from 1981 to 2000, rates of increase for wheat yields have remained constant, decreased by 64% for maize and are negligible in rice. Similarly, the rate of maize yield has remained largely flat despite a 58% investment increased over the same period. The study warns:
"A concern is that despite the increase in investment in agricultural R&D and education during this period, the relative rate of yield gain for the major food crops has decreased over time together with evidence of upper yield plateaus in some of the most productive domains."
The study criticises most other yield projection models which predict compound or exponential production increases over coming years and decades, even though these "do not occur in the real world." It notes that "such growth rates are not feasible over the long term because average farm yields eventually approach a yield potential ceiling determined by biophysical limits on crop growth rates and yield."
Factors contributing to the declines or plateaus in food production rates include land and soil degradation, climate change and cyclical weather patterns, use of fertilisers and pesticides, and inadequate or inappropriate investment.
The new research raises critical questions about the capacity of traditional industrial agricultural methods to sustain global food production for a growing world population. Food production will need to increase by about 60% by 2050 to meet demand.
A report out this month from the Dutch bank Rabobank recommends cutting food waste by 10%, as over 1 billion tonnes - half of which is related to agriculture - ends up being wasted. More efficient use of water is necessary, the report says, such as micro-irrigation, to address a potential water supply deficit of 40% by 2030. Currently, agriculture accounts for 70% of global water demand. The report also calls for a reduction in dependence on fertilisers using 'input optimisation' methods designed to reduce the amount of energy and water required. As 53% of fertiliser nutrients remain in the ground post-harvest, fertilisers contribute to soil degradation over time due to groundwater contamination, leaching, erosion and global warming.
The Rabobank obsession with focusing on improvement of existing industrial methods - without quite grasping the scale of the problems facing industrial agriculture - is, however, a serious deficiency. Two years ago, a landmark report by the UN Special Rapporteur on the Right to Food demonstrated that agroecology based on sustainable, small-scale, organic methods could potentially double food production in entire regions facing persistent hunger, over five to 1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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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군포에 소재한 귀농운동본부의 실습 논. 여기만 총 600평이다. 이 정도만 해도 까마득하지 않은가? 사람들이 주르륵 늘어서서 그렇게 보이지, 기계로 하면 금방이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보(3000평)-단보(300평)-무보(30평)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면적 개념으로, 일본이 서양의 면적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생긴 단위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는 섬지기-마지기-되지기가 있었다고 넘어가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마지기의 경우 1말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넓이로 지역마다 다르며, 특히 기름진 농지일수록 작물 사이의 간격을 드물게 심고 척박할수록 간격을 배게 심는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였다.
실제로 논의 경우 150~300평을 1마지기라 하고, 밭은 100~400평까지를 1마지라고 본다. 지역의 토질과 비옥도, 경사도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넓이가 달라지는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동네라도 어디는 1마지기에 150평인 반면, 어디는 200평인 사례도 있으니 말 다했다. 이렇게 마지기의 평수가 들쭉날쭉하니 정량화, 계측화가 필요한 현대적 토지 개념에서는 죽을 맛인 것이다. 그래서 일제가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부리나케 토지조사사업을 벌였을 것이다. 그래야 근대적 개념의 토지 소유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참고로 민족문화대백과에서 마지기에 대한 정의에는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마지기당’의 면적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논의 경우 전국적으로 한 마지기가 80평·100평·120평·130평·150평·160평·180평·200평·220평·230평·250평·300평 등 12개 유형이 있으며, 이 중 200평을 한 마지기로 적용하는 지역이 전국의 75% 가량이고 150평을 한 마지기로 쓰고 있는 곳은 17%, 나머지 10개 유형은 불과 8%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 논의 한 마지기당 면적은 200평이 표준이며 주로 평야부에서 많이 쓰고 있고, 200평 이외의 규모는 산간부나 도서지방에서 사용되고 있다.
밭의 마지기당 평수는 전국적으로 30평·40평·50평·60평·70평·75평·80평·100평·120평·150평·200평·230평·250평·300평·400평 등 15개 유형이 있으나 이 중 200평 한 마지기를 사용하는 지역이 전국적으로 43%이며, 100평 한 마지기가 24%, 500평을 쓰고 있는 지역이 9%, 300평을 쓰고 있는 지역이 8%, 기타 11개 유형이 16%의 지역에서 잡다하게 사용되고 있다.
밭에서도 논에서와 같이 200평 이외의 면적 규모를 사용하고 있는 지역은 주로 밭면적 비율이 높은 산간지대나 도서지역이다. 따라서 밭에서도 한 마지기당 사용 빈도가 높은 규모는 200평 규모이나 그 사용 빈도는 43%로서 논의 75%보다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기름진 농지일수록 마지기의 평수가 더 넓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강원도의 평수가 전라도의 평수보다 더 넓은 것인가? 왜지? 왜일까?
그것 때문에 4시간 넘게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렸다.
그 결과, 나의 마지기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처음부터 오류는 농민들의 실제 농사관행과 나의 고정관념의 충돌 때문에 생겼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농민들은 보통 땅이 기름지면 작물의 간격을 드물게 심고, 척박하면 배게 심는 관행이 있다. 그러니까 마지기는 1말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넓이로서, 기름진 곳일수록 넓이가 더 넓고 척박한 곳일수록 더 좁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고정관념은 기름진 곳의 마지기는 더 작고, 오히려 척박한 곳이 더 넓으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마지기라는 개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 이외의 사람들도 흔히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인데, 강원도의 마지기 평수가 호남보다 더 넓으리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 지역 안에서도 농지가 처한 조건에 따라서 마지기의 넓이가 달라진다. 그런데 경기도는 몇 평, 강원도는 몇 평, 전라도 몇 평 하는 식으로만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 고정관념이 깨지게 된 결정적 요인은 "평야의 마지기가 산간 지역의 마지기보다 넓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였다. "기름진 농지=더 작은 평수의 마지기"가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나도 그렇고 다들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투입량이 아닌 산출량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기름지기에 땅이 작아도 많이 생산할 수 있고, 그것이 곧 편리와 효율성이란 관념 말이다.
아직까지도 헷갈리긴 하고 더 자세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긴 한데, 중요한 것은 '마지기'가 "1말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넓이"를 가리키는 것이지 더 적은 농지로 더 많은 수확을 올리는 넓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뱀다리; 이에 대한 의문으로 <임원경제지> 번역팀의 홈페이지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내용이 아주 좋으니 읽어보시길 바란다. 아래 링크를 걸어두었다.
마지막으로 임원경제지 연구소의 정명현 소장이 일러주시길,
건 땅의 마지기가 더 적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수확량을 기주느로 보기 때문일 것 같네요. 수확량 기준은 조선 정부에서 쓴 '결부제'에서 사용한 방식입니다. 마지기는 파종량 기준이므로, 건 땅이 더 넓어야겠죠. 참고로 실록에는 논에는 '마지기'가, 밭에는 '~일갈이'로 구별해서 표현했습니다. 논밭에 모두 쓴 경우는 민간에서 서서히 쓰다가 요즘은 모두 쓰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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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 ㎏, %)
* (사)한국종자협회 회원사가 제출한 자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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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근대적인 벼 품종개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1906년에 대한제국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 설치되면서부터 라고 볼 수 있다. 이때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준다는 미명아래 이와 같은 기관을 설치하게 하였지만 그 속셈은 한반도를 그들의 식량기지화함과 동시에 식민지화 하고자 하는 음흉한 계획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의 벼 품종개발의 역사는 일본의 벼 품종들을 들여와서 한반도에 적응성이 높은 품종을 선발하고 이를 널리 보급하는 일로 시작되었고, 과거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심어왔던 우리의 풍토에 알맞는 수 많은 재래종들은 거의 내팽게치다싶이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두 세차례에 걸쳐서 전국에 심겨지고 있는 우리 재래종을 수집하고 주요특성을 조사하여 이를 분류 정리하는 사업을 펼쳤지만, 이 재래도를 새로운 품종개발의 육종모재로 사용하여 우리의 풍토와 기호에 알맞는 장점을 살리는 육종연구는 그때 이 기관의 책임을 맡고 있었던 일본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외면당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때 우리 재래도는 서서히 일본 품종의 침략에 잠식당하고 말았고, 우리가 오랫동안 소중하게 가꾸어온 우리 것을 계속 유지발전시키는 뿌리 있는 벼 육종연구는 처음부터 그 싹이 잘리어져 우리의 벼 육종사가 일본식민지의 굴레를 벌어나지 못하게 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심겨졌던 우리 재래도들은 대부분 까락이 많고 키가 크면서 포기당 이삭수가 적고 이삭당 벼알수가 많은 이삭이 큰 특성을 나타내며, 쓰러짐견딜성이 약하고 도열병에 약하지만 대체로 조숙이고 가뭄에는 강한 특성을 보였다. 1911년과 1913년에 권업모범장이 재래도를 수집하면서 각 지역에 보급율이 20%가 넘는 중․남부지방에 비교적 널리 재배되었던 대표적인 재래도는 맥조(麥租)․다다조(多多租)․노인조(老人租)․두조(豆租)․황조(荒租)․조동지(趙同知)․팥벼․구황조(救荒租) 등 이었다. 재래도 수집 정리자료에서 보면 찰벼 품종수가 메벼 품종수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때 당시 대부분 밥맛이 떨어지는 쌀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찹쌀을 섞어 먹었기 때문에 요즈음보다 찰벼를 많이 심지 않았는가 추측된다. 중․남부지방에 널리 재배되었던 찰벼품종은 노인나(老人糯)․조도(棗稻)․돼지찰[豚糯]․점미---(粘米)․금나도(錦糯稻)․진조(眞租) 등 이었다.
이들 재래도는 수집된 지역에 따라서 이름은 같으나 특성이 전혀 다른 경우도 있었고 이름은 다르나 여러 가지 특성이 거의 같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오랜기간 동안 채종재배도 하지 않은 상태로 심어오면서 같은 품종에 대하여 농가가 임의대로 다른 이름을 부치거나 이름이 와전되어 잘못 불리게 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추측된다.
이들 이외에 주요한 재래종으로 거론 되었던 것은 대구조(大邱租)․모조(牟租)․왜조(倭租)․미조(米租)․남조(南租)․조정조(早丁租)․연안조(延安租)․용천조(龍川租)․이조(里租)․돈조(豚租) 등 이었다.
권업모범장 초창 당시에 재래 논벼 및 밭벼를 수집하여 특성을 조사한 조선도품종일람(朝鮮稻品種一覽)을 보면 논벼 1,259품종, 밭벼 192품종으로 모두 1,451품종이나 수록되어 있지만 이들 중에는 동종이명(同種異名)이나 이종동명(異種同名)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실제 벼품종의 분화가 이렇게 다양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들 재래종 중 그동안 많은 숫자가 보존과정 중에서 잃어버렸고 현재 258품종이 벼 유전자원 저온창고에 보관중에 있는데, 대부분은 자포니카이고 그 중 한양조(漢陽租) 등 소수의 인디카 품종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들 재래종들의 소출은 정확한 통계적인 자료가 없어서 확실히 알수는 없으나 권업모범장 초창기(1907~1909)에 조사 보고된 자료에서 재래종인 조동지와 점조의 수량성으로 짐작해 보면 ha당 2.0톤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하기 시작한 1910년부터 우리의 재래종이 서서히 일본 도입품종으로 교체되기 시작하면서 일출(日出)․조신력(早神力)․곡량도(穀良都)․다마금(多摩錦)․고천수(高千穗)․도(都) 등 많은 품종들이 계속 장려되어 1920년경에 이들 도입 품종들이 전 벼 재배면적의 반을 넘게 되었고, 이후 계속하여 중신력(中神力)․은방주(銀坊主)․육우 132호(陸羽 132號) 등이 확대 보급되어 1935년에는 도입 품종의 재배면적이 약 82%까지 달하게 되었다. 이때는 단일 품종들이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는 특징을 나타내었는데 1920년경에는 조신력이 약 25만 정보를 차지하였고, 1930년경에는 곡량도가 46만 정보를, 1935년경에는 은방주가 50만 정보 이상의 재배면적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워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이 일본 도입 품종시대의 쌀 소출은 대체로 ha당 2.0~2.5톤 수준이었다.
우리가 1915년부터 처음으로 인공교배에 의한 교잡육종을 시작하였으나 초창기에는 정착단계로 별성과가 없었고 1926년 이후 교잡된 잡종집단에서부터 우량 품종이 선발 육성되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최초로 개발 보급된 품종이 1933년의 남선 13호(南鮮 13號)와 1936년의 풍옥(豊玉)․서광(瑞光) 이었다. 그후 1945년 8. 15 광복을 맞이 할 때까지 일진(日進)․영광(榮光)․팔굉(八紘)․팔달(八達) 등 여러 품종들이 개발 보급되어 서서히 일본 도입 품종과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8. 15 광복 이후의 혼란기와 한국전쟁의 와중속에서 우리의 벼 품종개발 연구사업도 잠시 주춤한 상태가 계속되었지만 고시(高矢)․배달(倍達)․새나라․수성(水成)․팔기(八起)․농광(農光)․남풍(南豊) 등이 개발 보급되었고, 1962년에 농촌진흥청이 발족되고 농업연구기관의 인원과 시설이 보강되면서 벼 육종사업도 주곡자급달성이라는 기치를 내걸로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1960년대에 탄생한 주요품종들이 진흥(振興), 재건(再建), 신풍(新豊), 호광(湖光), 팔금(八錦), 농백(農白), 만경(萬頃), 밀성(密成) 등이었으며 이들 육성품종들이 점차 일본도입품종과 대체되어 1970년경에 국내육성품종의 보급면적이 60%를 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의 쌀 단위 수량은 ha당 3.0~3.5톤 수준으로 한 단계 높아졌지만 아직도 쌀이 부족하여 매년 수십만톤의 외국쌀을 사 먹어야 했다.
병에 강한 벼 품종을 개발할 목적으로 주요 병해에 대하여 저항성인 남방계 품종을 육종모재로 사용하여 원연품종간 교잡을 시작한 것은 1963년경이었지만 원연품종간 교잡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1965년경부터 였다.
1967년 9월에 농촌진흥청 작물시험장과 국제미작연구소(IRRI)간에 벼 품종육성을 위한 협력연구를 실시하기로 정식합의를 본 이후 병에 강하고 키가 작은 인디카 다수성 품종들을 활용한 원연교잡(遠緣交雜)이 많이 이루어 지게 되었고, 이러한 연구 성과가 1971년에 처음으로 키가 작고 잘 쓰러지지 않으면서 병에 강하며 직립초형(直立草型)으로 다수성인 “통일(統一)”이라는 품종개발로 나타났다. 이 통일품종은 기존 일반품종의 쌀소출 3.5~4.0톤/ha에 비하여 특히 비료를 많이 주어 소출을 올리고자 할 경우에 30%이상의 획기적인 증수를 나타내어 쌀 소출을 4.5톤/ha이상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쌀 자급자족의 기반을 마련한 한국 녹색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통일품종은 저온에 약하고 벼알이 잘 떨어지며 쌀의 상품성과 밥맛이 떨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벼 육종연구진은 이 단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통일에 이어 유신(維新)․밀양 23호․금강(錦江)벼․만석(萬石)벼․노풍(魯豊)․밀양 30호․밀양 42호․태백(太白)벼․한강(漢江)찰벼․청청(靑靑)벼 등 1980년까지 10년동안 무려 25개의 통일형 품종을 개발 보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벼 육종연구진의 노력으로 1976년에 드디어 오랜 숙원이었던 주곡의 자급을 이루게 되었고 이어서 1977년에는 우리의 쌀 생산량이 유사이래 최고인 660만톤에 이르게 되었고 ha당 쌀소출이 4.94톤으로 세계최고기록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는 1960년대 초 우리쌀 생산량이 300~350만톤에 불과하였던 것과 비교해 보면 재배면적은 별 변동이 없는데 무려 2배에 가까운 엄청난 수확량을 올린 것이다. 이러한 통일형 다수확 품종은 그 재배면적이 ‘78년까지 급속도로 증가되어 전 벼 재배면적의 약 76%에 달했다가 그후 ’80년 냉해에 의한 커다란 타격과 쌀의 시장성 열세로 인하여 급속도로 그 재배면적이 줄어 들게 되었고 드디어 ‘92년부터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쌀의 자급이 계속 유지되고 점차 양질미를 선호하는 소비패턴으로 빠르게 변화되면서, 내냉성이나 미질면에서 개선된 많은 통일형 내병충성 양질미 품종 즉 남풍(南豊)벼․풍산(豊産)벼․삼강(三剛)벼․중원(中原)벼․칠성(七星)벼․용문(龍門)벼․용주(龍珠)벼 등이 개발 보급되었지만,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일반 양질미 품종에게 밀려나게 되었고 통일형 품종개발도 1986년 용주벼와 남영(南榮)벼를 끝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일형 품종개발 연구는 중단되지 않고 앞으로 쌀이 부족되는 시기에 대비하는 동시에 값싼 가공원료미 공급을 위하여 수량성이 월등히 높은 초다수성 품종개발연구로 전환하여 계속 추진되었다.
이 통일형 다수성 품종도 미질, 내병충성 및 내냉성 등이 계속 개선되면서 수량성도 통일 품종개발 당시 4.5~5.0톤/ha에 불과하던 것이 ‘80년대 후반에는 6.0톤/ha까지 높아졌다.
‘80년대에는 동진(東津)벼를 비롯하여 많은 일반 양질미 품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여 삼남(三南)벼․상풍(常豊)벼․오대(五臺)벼․섬진(蟾津)벼․화성(花成)벼․팔공(八公)벼․금오(金烏)벼․진미(珍味)벼․장안(長安)벼․계화(界火)벼 등 34품종이나 개발 보급되어 통일형 품종들의 자리를 매꾸면서 쌀의 지속적인 자급을 유지시키는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에 개발 보급된 일반 양질미 품종들의 수량성은 대체로 4.8~5.2톤/ha 수준으로 높아졌고 전국 평균단수도 4.4~4.8톤/ha 수준을 유지하였다.
‘70년대 말부터 꽃가루배양에 의한 벼 품종육성이 시도되어 드디어 1985년 “화성벼” 개발로 그 막을 열게 되면서 실용화가 정착되고 그후 계속하여 화청(花淸)벼․화진(花珍)벼․화영(花嶺)벼․화중(花中)벼․화남(花南)벼․화신(花新)벼․화선(花鮮)찰벼 등을 육성․보급하게 되었고 벼 품종개발 기간을 10~12년에서 5~6년으로 단축시켰다.
‘90년대에 들어와서 특히 밥맛이 좋으면서 병에 견디는 힘도 강하고 소출이 많이 나는 양질미 품종개발에 역점을 두면서 쌀의 용도를 넓히기 위한 특수미 품종개발에도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90년대에는 밥맛에 있어서 일본의 양질미인 고시히까리를 능가하는 일품(一品)벼의 개발을 필두로 서안(西安)벼․안중(安中)벼․진부(珍富)벼․만금(萬金)벼․화영(花嶺)벼․대야(大野)벼․대안(大安)벼․금남(錦南)벼․일미(一味)벼 등 많은 양질미 복합내병성 또는 내재해성 품종을 개발 보급하였고, 직파재배에 알맞는 농안(農安)벼․주안(周安)벼․안산(安産)벼 등과 보통쌀알의 1.5배가 되는 대립벼 1호, 양조용 심백미인 양조(釀造)벼, 구수한 냄새가 나는 향미(香米)벼 1호와 향남(香南)벼 등 가공용 특수미를 개발하였으며, 쌀 부족시대를 대비하여 초다수성인 다산(多産)벼와 남천(南川)벼도 개발하였다.
이제 자포니카 양질미 품종의 수량성도 5.0톤/ha을 대부분 넘어서게 되었고, 초다수성벼는 7.0톤/ha을 넘어서는 수준까지 수량성을 끌어 올려 놓았으며 앞으로 2004년까지 10톤/ha을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우리의 단위면적당 쌀 소출은 이미 1976년부터 일본을 제치고 꾸준히 세계최고의 자리를 거의 지키고 있으며, 농가답에서 세운 다수확 기록은 지난 70년대부터 이미 8~9톤/ha 수준을 넘어섰고 ‘84년에 삼강벼로 세운 쌀수량 10.06톤/ha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세계최고의 다수확기록으로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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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1933년도까지의 쌀생산과 관련한 당시 일본인의 논문이 있어 그 논문에서의 그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년도 | 쌀생산량 (만석) | 단보당 생산량(석) | 일본반출량 (만석) | 반출율 | 조선내 쌀소비량(만석) | 1인당 연간 쌀소비량(석) | |
일본 | 조선 | ||||||
1914 | 1,413 | 0.952 | 114 | 8% | 1,299 | 0.98 | 0.69 |
1915 | 1,285 | 0.858 | 221 | 17% | 1,064 | 1.11 | 0.72 |
1916 | 1,393 | 0.917 | 126 | 9% | 1,268 | 1.08 | 0.68 |
1917 | 1,369 | 0.895 | 113 | 8% | 1,256 | 1.13 | 0.73 |
1918 | 1,529 | 0.988 | 206 | 13% | 1,323 | 1.14 | 0.68 |
1919 | 1,271 | 0.826 | 280 | 22% | 991 | 1.13 | 0.73 |
1920 | 1,488 | 0.957 | 199 | 13% | 1,290 | 1.12 | 0.62 |
1921 | 1,432 | 0.935 | 339 | 24% | 1,094 | 1.15 | 0.66 |
1922 | 1,501 | 0.964 | 314 | 21% | 1,188 | 1.10 | 0.65 |
1923 | 1,518 | 0.979 | 405 | 27% | 1,112 | 1.16 | 0.63 |
1924 | 1,322 | 0.839 | 486 | 37% | 836 | 1.12 | 0.60 |
1925 | 1,477 | 0.932 | 475 | 32% | 1,003 | 1.13 | 0.52 |
1926 | 1,530 | 0.964 | 578 | 38% | 953 | 1.13 | 0.53 |
1927 | 1,730 | 1.080 | 646 | 37% | 1,084 | 1.10 | 0.52 |
1928 | 1,351 | 0.890 | 701 | 52% | 650 | 1.13 | 0.54 |
1929 | 1,370 | 0.840 | 578 | 42% | 792 | 1.10 | 0.45 |
1930 | 1,918 | 1.154 | 516 | 27% | 1,402 | 1.08 | 0.45 |
1931 | 1,587 | 0.948 | 903 | 57% | 685 | 1.13 | 0.52 |
1932 | 1,635 | 0.995 | 748 | 46% | 887 | 1.01 | 0.41 |
1933 | 1,819 | 1.072 | 789 | 43% | 1,031 | 1.10 | 0.41 |
자료에 의하면 친일반역사상의 헛소리에도 불구하고 단위면적당 쌀의 생산량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왜놈들은 늘어나는 조선의 농민들을 더 노동집약적(!) 농사를 시켜
묵힌땅의 개간 등으로 쌀 농사가 가능한 논을 더 많이 확보했다고 합니다.
물론 조선인의 땅이 아니라 왜놈들의 땅으로 말입니다.
이렇게해서 더 늘어난 농지로 인하여 초기에 비해 좀 더 생산된 쌀을 모조리 일본으로 가져갑니다.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절반이나 왜놈들이 가져갑니다.
친일반역사상에서는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여 농민들이 돈벌었다는데 헛소립니다.
일제식민지하에서 농사지어서 돈벌었다면 추운 만주땅에 농사지으러 떠나는 사람들은 바보였을까요?
이 시기를 지나면서 조선인 자작농의 숫자는 줄어들고 소장농은 늘어만 갑니다.
일하는 농민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조선내 쌀 소비량을 보면 조선인들이 1년간 소비하는 쌀의 총량은 더 줄어듭니다.
마찬가지로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의 급격히 감소 합니다.
biin님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쌀이 넘쳐났다고 주장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친일반역자들을 제외하고는 굶주릴 수 밖에 없었고
갈수록 소작쟁의가 늘어나는 이유가 통계자료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 통계에서 빠진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일제 강점 초기에는 관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소규모 자작농들의 수확과 소비가 빠져있습니다.
이때 빠진 통계는 나중에 거의 대부분 포함하게됩니다.
실제로는 변화가 없어도 통계상으로는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음 그래프는 일제시대 경지면적의 증가에 관한 것입니다.
총독부의 통계연보에 나오는 수치에 의한 경지면적입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경사도가 급합니다. 경지면적이 82%가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아주 완만한 증가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불도저로 산을 깍아서 논밭을 만든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급작스레 늘었을까요?
1918년은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는 해 입니다.
친일반역사상가들은 이것을 토대로 일본의 도움으로 토지가 이만큼 늘었다고 개소리를 합니다.
인구증가에서도 마찬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일제강점기의 초기에는 왜놈들이 조선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장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토지나 인구에 있어서 누락분이 많았던 것입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토지대장에 등록되면서 통계수치만 늘어난 것입니다.
엉터리 통계로 경지면적을 일본이 늘려줬으니 고마워하라고 헛소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며칠전 신문에 우리나라에 토지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주인없는 섬 1419개가 토지대장에 등록시킨다고 합니다. 이중에는 6만평이나 되는 섬도 있다고 하더군요. 이 섬들을 등록하면 없는 땅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되나요?
다음으로 일제 강점기 기간동안 조선의 인구가 2배나 늘었다는 거짓주장을 박박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근대적인 인구조사가 없었습니다.
호패제도가 있었기는 하지만 이는 군역 등 을 위한 것이지 인구통계 등이 목적일 수 없었고
관을 피해 살아가는 하층민들은 대량으로 누락될 수 밖에 없었기에 정확성을 믿기가 힘이듭니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후 년말상주인구를 매년추계치로 작성하였습니다.
변동사항을 바탕으로 조사하는 것이며, 조선총독부가 초기에는 전국적인 수준에서의
행정장악력이 부족하였기에 누락된 인구가 많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1925년에 이러러 근대적인 인구조사인 조선국세(國勢)조사를 하기시작하면서 정확성을 갖추게 됩니다.
| 년말상주인구 (추계치) | 5년간 증가율 | 국세조사 |
1910 | 13,128 | - |
|
1915 | 15,957 | 22% |
|
1920 | 16,916 | 6% |
|
1925 | 18,543 | 10% | 19,020 |
1930 | 19,685 | 6% | 20,438 |
1935 | 21,248 | 8% | 22,208 |
1940 | 22,954 | 8% | 23,547 |
단위 천명
표에서와 같이 2925년이 되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지 15년이 지난뒤에도
두가지 인구조사는 5%에 가까운 오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1910년에서 1915년까지 5년 사이에 무려 22%라는 엄청난 인구 증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인구가 5년사이에 22%가 증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일제강점 초기에 전국의 방방곡곡을 세밀하게 장악하지못한 일본인들이 초기에 잘못된 인구총계를 만들었고 5년뒤에는 1010년의 기록에서 빠진 인원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 친일반역사상을 선동하는 자들은 일제강점 초기의 부실한 data를 이용하여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인구가 2배나 늘었으니 일본에게 감사하라는 개소리를 합니다.
초기 data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고있는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의 일제강점 초기의 인구를 여러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년도 | 석남국 | 김철 | 권태환 (신용하) | 국세조사 |
1900 |
|
| 17,082 |
|
1905 |
|
|
|
|
1906 |
| 14,733 |
|
|
1910 | 15,474 | 16,309 | 17,427 |
|
1915 | 16,484 | 17,027 | 17,656 |
|
1920 | 17,532 | 17,629 | 18,072 |
|
1925 | 18,797 | 19,020 | 19,020 | 19,020 |
1930 | 20,218 | 20,438 | 20,438 | 20,438 |
1935 | 21,890 | 22,208 | 22,208 | 22,208 |
1940 | 23,341 | 23,547 | 23,547 | 23,547 |
1944 | 24,917 | 25,120 | 25,120 |
|
인구증가 | 61% | 54% | 44% |
|
단위 천명, 2001년 길인성의 논문에서 재인용 함.
석남국 : 1966년 일본 논문
김철 : 1965년 일본 논문
권태환, 신용하 : 1977년
일제하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인구조사인 국세조사와 함께 검토해봤을때
석남국의 주장은 사실과 가장 많이 떨어진 것입니다.
김철의 주장은 일제 강점기 기간동안 54%의 인구증가가 있었고
권태환의 주장에는 44%의 인구증가가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요즘은 학계에서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인구변화를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은 권태환과 신용하(유명하신분이죠)의 추정치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식민지시기의 인구증가가 2배라는 것은 엉터리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친일반역선동가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강점을 찬양하기위해 엉터리 수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2UG8&articleno=11827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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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가 지적하듯 "솔직하게 인정하자. " 유기농업의 생산량은 관행농업의 생산량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량만 놓고 따졌을 때 그러할 뿐, 여타의 조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 관행농업이 가져오는 생태적, 환경적 손실만이 아니라 관행농으로 생산된 값싼 농산물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전체적으로 살펴보며 따져보면 과연 간행농이 더 생산적인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생산량 단 하나만 놓고 봤을 때는 분명 유기농업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산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더 냉정하고 철저하게 유기농업이 왜 더 생산적인지를 입증할 수 있는 논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By Parke Wilde
게시물은 원래 미국 식품정책에 게재되었다.
Nature 지는 최근 유기농업의 생산량에 관한 흥미로운 메타분석 —또는 양적 문헌조사— 을 실었다. 거기에서 “유기농법은 별로 충분하지 않다”고 하며, 첨부된 요약에서 “관행농업이 대부분의 조건에서 더 많은 수확량을 낸다”고 한다. 이는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환경론자조차 그 연구에 과잉반응하고 있다. 최근 Bryan Walsh 씨가 TIME 지의 별난 블로그에 올린 글은 제목이 “왜 유기농업이 그렇게 지속가능하지 않는가”이다.
그 글은 두 가지 좋은 지적으로 시작하지만, Walsh 씨가 내놓은 증거는 그 제목을 지지하는 데 실패한다: 유기농업은 종종 단위면적당 더 적은 식량을 생산한다(위의 Nature 지의 글을 보라). 그리고 환경론자들은 효율성에 관해 유념해야 한다.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산출을 내는 것은 환경보전에 좋다.
그렇지만 대부분 Walsh 씨는 관행농업의 장점에 대해 일반적인 과장을 반복한다. 그는 “관행적인 공업형 농업은 식량 토대에 대한 단일한 토지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화학비료, 기계화, 관개 덕분에 미국의 농부 각각이 전 세계 155명 이상을 먹여살린다”고 적었다.
그러나 환경론자들은 또한 관행농업이 몇몇 주요 주제를 기억해야 한다고 논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실제적이고, 정당한 이유가 있는 유기농업 지지자들은 이미 수확량 교환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은 이미 가치효율성이 있다. 예를 들어 몇 년에 걸친 Rodale의 연구는 더 적은 화학적 투입재 비용이 많지 않은 수확량의 차이를 상쇄한다고 늘 주장해 왔다 —새로운 Nature 지의 연구와 거의 일치할 수 있는 주장.
나는 때때로 수확량과 효율성을 거부하는 유기농을 시작하는 농부를 만난다. 그러나 나는 5년 동안 사업에 종사하며 수확량과 효율성을 거부한 채로 남아 있는 유기농 농부는 결코 만나지 못했다.
유기농을 지지하기 위한 이러한 전체 논의에서 한 가지 교훈이 있다. 수확량의 차이와 효율성에 관하여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 Walsh 씨는 실제적이고, 정당한 이유가 있는 유기농법에 대한 연구에 충분히 정통하지 않은 듯하지만, 대신 일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문 유기농 홍보 이야기를 읽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홍보문이 Nature 지의 연구에 의해 반박되었을 때, Walsh 씨는 과민반응했다. 처음부터 솔직하고 정확하게 생산방법을 둘러싼 환경적으로 상대적인 이점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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