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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에 만연한 '상호불신 문화'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에 대해 분석한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거 한국도 해당하는 것 같아서 찌릿찌릿하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정확히 옮기지는 못하겠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악명 높은 노예 무역이 횡행했다. 그런데 노예 무역 말기가 되면, 유럽인에 의해서만이 같은 마을의 사람이나 이웃, 게다가 친척과 가족에 의해서도 노예가 되어 경매에 부쳐졌다고 한다. 어떤 방법을 통해 노예가 조달되었는지에 대한 체계적 자료는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지만, 1840년 어느 독일인 선교사가 시에라리온에서 거래되는 노예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긴 자료가 있다고 한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144명의 노예 가운데 40%가 납치, 24%가 전쟁, 20%가 친척과 친구에 의해, 16%는 재판에 의해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마지막 두 방식으로, 이것이 바로 '지역사회 내부의 사람'에 의해 노예화가 자행된 결과이다. 이러한 가까운 사람에 의한 배신이 시에라리온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노예 공급지에서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나 게임 이론의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신이 최적의 생존전략이 되며, 사회적으로는 상호불신이 이른바 '균형' 상태가 되어 안정화된다. 일단 그러한 균형 상태에 이르면, 거기에 강한 외부 충격이 주어지지 않는 한 그 상태는 변화하지 않으며 지속되어, 그것이 결국 '문화'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는 세대를 넘어 계승되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연구는 이처럼 노예 무역의 결과 지역사회 내부에서도 '노예 사냥'이 행해졌고,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으며 경험적으로 정착된 상호불신이 지금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널리 관찰되는 것임을 입증한 것이다.



조선 말기의 극도로 혼란한 상황, 일제강점기의 민족 탄압, 한국전쟁의 동족 상잔, 이후 군부독재 시기라는 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한국 사회에는 어떤 크나큰 상처가 남은 것일까?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문다고 하지만 그 흉터까지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명목상 문민 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부터 조금씩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이제 불과 30년 정도 되었을 뿐이다. 이 상처가 잘 아물 수 있도록 관리를 잘해야겠다. 아직도 상처가 제대로 아물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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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thetomorrow.kr/archives/10107?fbclid=IwAR2xc7LvgT6PWCusQEonXOy0gd-yCQFti8kENt2Ts0YKVe6nDQnXY6L8BN0



역자 주:

사회생태농업이라는 표현은 신향촌건설운동 진영이 근년에 쓰기 시작한 용어이다. 10여년전 안전한 먹거리를 찾는 도시 소비자와 유기농 생산자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채소꾸러미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일본과 서구의 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커뮤니티 지원 농업) 실천방법을 중국에 소개할 때, 社區支持農業이라는 직역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보통 특정한 관행을 지칭하는 것으로 많이 사용되는 영문 CSA를 차용하면서도 마치 ‘빅텐트’처럼 하나의 용어안에서 다양한 실천과 이론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그 의미를 확장시켜 나갔는데,  소비자와 생산자가 일방의 수혜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社區互助農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초 협의의 CSA가 신향촌건설 운동의 내용을 담기에 무리가 있었기에, 사회생태농업社會生態農業이라는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자의 기억으로는, 2015년 연말 세계CSA대회를 베이징에서 개최하면서 이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엄밀히 확인된 주장은 아니다. 사회생태농업에서 사회라는 표현은, 당초 원톄쥔 교수가 강조하듯, 삼농의 문제가 단지 농민이라는 특정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사회 전체와, 문명 차원의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채택되고 있다. 즉, 이 주제에 대해서 그 참여대상과, 활동의 폭이 전체 사회를 아울러야 한다는 뜻이다. 생태농업은 당연히, 환경과 먹거리 안전, 그리고 지속가능한 문화 차원에서의 방법적 선택지가 유기농 혹은 보다 광의의 생태농업이기 때문이다.

이 소논문에서, 저자들은 市民下鄉 즉, ‘귀농귀촌’ 흐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중국에서 귀농귀촌이 시작된 것은 사실 이미 10년도 더 됐고, 어찌보면 신향촌건설운동 15년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전에 흔히 사용되던 표현은 返鄉青年 즉 고향에 돌아온 청년이라는 단어이다. 당초 신향촌건설 운동에 참여하거나 관여했던 농촌 출신의 대학생/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유기농업에 종사한다든가, 일종의 마을만들기 사업 (우리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보는 시민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하는 활동보다는, 이전 세대의 농촌이나 지역 사업, 즉 초기 새마을 운동이라든가 빈곤구제적 성격도 있는)을 벌여 온 것을 일컫는다. 이후, 도시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던 30대 이상의 중산층과 가족들이 이 흐름에 동참하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新農民이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2017년경부터는 이를 보다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정책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市民下鄉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보다 정확히 이 하향 下鄉의 흐름을 분류하자면, 이 논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우선 도시 중산층, 혹은 대졸 이상 청년들의 귀농귀촌이 있다. 둘째로는 경기하락으로 도시에서 일자리를 잃은 농민공들의 귀향 흐름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세대의 농민공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교육 수준도 꽤 높고, 스마트폰/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문화, 시사 등을 늘 접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큰 조망은 없을지 몰라도, 밑바닥 세상 물정은 누구보다 잘알고 있다. 사실 중국도 교육 인플레이션으로 직업학교, 전문대학, 혹은 지명도가 떨어지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중산층 진입의 전제가 되는 선호직종 보다는, 공장 노동자 등의 육체 노동 혹은 콜센터와 같은 단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농민공과 농촌 출신 도시 엘리트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측면도 있다. 그리고, 확실히 이들은 도시의 생활문화를 선호한다. 回不去的農村,留不住的城市 (돌아갈 수 없는 농촌, 남아있을 수 없는 도시)라는 표현은 도시와 농촌 어느 곳에도 제대로 귀속감을 느끼기 힘들게 된, 이들의 이중적인 정체성을 잘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자본의 하향이 있다. 더 이상 도시에서 특히 부동산 개발에 의한 막대한 투자 이윤을 챙기기 힘들어진 다양한 자본들이 ‘일대일로一帶一路’와 같은 정책에 힘입은 해외가 아니면 ‘향촌진흥鄉村振興’ 정책 대상이 되는 농촌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결국 정부의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농촌이 그들에게 새로운 엘도라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중국 사회와 정부는 사실 놀라울 정도로 친자본적이다. 중국인들의 전통적으로 상업에 대한 실용적 관점이 정서적인 거부감을 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자본을 혐오하는 소위 구좌파는 중국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다. 역자는 며칠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돼 매우 충격을 받았다. 역자가 거주하는 城邊村 (도시에 속하는 교외지역) 에 속하는 광저우廣州의 션징深井마을은 농촌과 도시 풍광이 뒤섞여 있는 곳이다. 그런데, 중국의 대도시에는 농촌대상의 향촌진흥 못지않게 城市更新 즉,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지방정부의 대규모 재정하에 수행되고 있다. 션징마을에도 수백억대의 재정이 투자된 프로젝트가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데, 션징 마이크로 스튜디오 深井微工作坊라는 단체가 소위 도시재생/ 마을만들기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광저우 시정부와, 중산中山대학교 도시계획학과, 그리고 기업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당연히 이 단체는 일종의 NGO나 사회적 기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활동의 수준이 많이 떨어지고 열정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중산대학교의 교원들을 삐딱하게 평가하게 되는 나름, 나의 편견의 근거가 됐다.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활동 주체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며칠전에는 아예 광저우 부동산협회라는 사람들을 끌어 들여서 워크숍을 벌이기에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미 남의 일이 아닌, 중국 대도시의 현실에 비추어 제정신이 아니지 싶었다. 그런데, 며칠전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실은 이 단체가 기업, 그것도 20년 역사의 제법 규모가 있는, 소재벌급(중국에서는 흔히 集團이라고 부른다) 혹은 중견 부동산 평가 기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한국에서도 농촌이든 도시이든, 이런 정부 사업에 ‘업자’들이 들어 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학교원이든 기업이든, 선을 긋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의 역할과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대자본형 ‘업자’가 주체가 돼서 이런 커뮤니티형 정부 재정 사업을 벌인다는 것은, 중국 지방정부의, 이 사업에 대한 시각의 수준이나 업계와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실제로 중국 정부가 향촌진흥 정책을 펼치기 이전부터 이미 부동산 기업들이 농촌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수년이 경과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파괴한 농촌과 도시의 모습을 다시 보게 돼, 공익적인 목적으로 이런 사업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하며 자선사업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하고, 실제 관련된 공익재단을 만들어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놓고 장삿속인 경우도 있는데, 역시 명확하게 선을 긋기 힘든데다, 중국인들의 상인/ 기업가에 대한 중립적인 감수성 때문에, 일도양단해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신향촌건설 운동 진영의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은 이들을 매우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이 독점한 자본과 인재, 다양한 자원에 불가불 기대지 않을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 원톄쥔은 자본을 컨트롤하기 위해, 시민하향이 빠르게 이루어지길 원한다. 시민과 농민이 대등한 관계로 이니시어티브를 쥐게 하는 것이, 자본의 약탈적 개입을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논문의 마지막 제안중 하나인 소위 민간조직의 활성화 주장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조직중에는 신향촌건설 운동에서 파생한, 사회적 기업이나 NGO등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경험이나 가용자원 측면에서 보건데 여전히 중국 사회에서 너무나 미약한 존재들이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과의 연대 없이, 자본과의 경쟁에서 이들이 주도권을 쥘 확률은 매우 낮다라는 현실적 전망을 내놓으며 해설을 마무리한다.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키면, 농민의 생산과 생활에 내재된 본래의 다양성을 활용하게 되고, 농촌의 자연과 인문 요소에 의탁하여, 도시민을 대상으로한 휴한休閒농업 (역자 주 – 레저와 휴식을 제공하는 농업 서비스, 중국에서는 용어와 사례 모두, 대만을 많이 참고하고 있다 )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농작업 체험과 과일 수확, 숙박 및 요식, 리조트 및 요양/ 힐링 등의 사업이 이에 해당한다. 농촌에서 이전에 생산요소 범주에 들어가지 않던 생태환경및 인문, 경관 등의 다양한 자원을 살리게 된다. 이것이 농업공급측개혁의 주요한 방향이 되고, 또한 신농촌건설과 도시와 농촌의 공진화, 즉 서로 도우며 발전하는 좋은 순환 메커니즘을 수립하는 방법이 된다.

 

1. 사회생태농업 발전의 필요성과 긴급성

(1) 산업화된 농업의 효율저하 및 외부효과 극대화

전통적인 관행 농업 생산방식은 단순히 규모의 확대를 통해, 생산량을 증가시킬뿐 아니라 단일한 상품의 생산을 추구한다. 농민은 오로지 경작 규모의 확대를 통해서만, 끊임없이 기계화율을 높이고, 농약 사용량을 늘리고, 비료와 항생제 등을 사용해서 증산을 달성한다.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품의 부가가치는 떨어진다. 농업은 본래 시장 리스크와 자연재해의 리스크를 안고 가는 산업이다. 단순히 규모와 생산량을 추구하는 행위는 농민에게 있어 시장 리스크를 증가시킬뿐 아니라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생산상의 큰 손실도 떠안게 만든다. 또, 각종 화학제품의 남용에 의해 농업이 환경오염원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식품안전 문제도 초래한다. 관행농업의 저효율, 외부효과 극대화라는 결과는 농업이 공급측 개혁을 긴급히 추진하고,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사진: 관행농업의 하우스 재배 (원문)

 

(2) 도시중산층이 느끼는 전체적 불안감이 완화되어야 한다

도시생활의 빠른 리듬과 많은 업무, 경제적 부담이 도시의 화이트 컬러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 주고, 심지어 건강을 해치게 하기도 한다. 그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할만한 환경과 장소가 절박하게 필요하다. 그외에도, 도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환경오염이 발생하고, 교통체증과 같은 도시문제와 식품안전문제가 발생한다. 종합적으로 도시 중산층 생활의 질이 낮아지고 있고 그래서 중국의 일부 중산층들은 이민을 선택한다. 다른 한편, 중국 경제의 구조적 개혁에 의해, 금융과 부동산 시장의 등락으로 도시 중산층은 재테크의 포트폴리오를 다양하게 하기 위해, 새로운 안정적 투자처를 모색하고 있다. 도시 중산층들의 전체적인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서,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심신의 건강과 안정을 찾을 수 있고, 또 소비 생활수준을 제고하고, 자산 가치 보전과 증식이 가능한 새로운 투자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3) 경제 하강이 농민공의 귀향을 급증시키고 있다

국제경기의 침체로 외수가 부진해져서, 연해지역의 노동집약형 산업과 수출가공업이 이미 생산을 중단하거나, 크게 감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국내에서 공급구조개혁을 실시하면서, 광산업, 철강산업등은 생산 능력을 줄이고, 부동산, 건설업은 거품을 억제하고 있다. 내외경기 부진요인이 더해지는 가운데, 농민공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은 고향에서 새로운 취업기회를 찾아야 한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많은 80년대, 90년대생 농민공들에게 출구를 제공해야 한다. 그들중 상당수는 교육수준이 높아, 단순한 농업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도시에 남아 있을 방법도 없다. 그러므로,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키고, 6차산업을 전개해서 다업종, 신업태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만이, 귀향하는 농민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특히, 상당 수준의 학식과 자질을 겸비한 청년 농민공들의 취창업을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해결 수단이다.

 

2. 사회생태농업발전의 주요방법 – 시민하향市民下鄉 (귀농귀촌)

사회생태농업의 주요한 발전 방법은 ‘농산물을 도시로 올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시골로 내려오게’(귀농귀촌)하는 것이다.

 

(1) ‘도시민의 귀농귀촌’이 농촌의 가격 요소를 높일 수 있다. 

귀농귀촌을 추진함에 따라, 농촌의 토지와 노동력이 모두 도시소득 수준을 참고하여 새롭게 가격을 결정할 기회를 갖게 된다. 도시민들이 농민의 토지를 임대하면서, 비교, 참고하는 것은 도시의 레저문화산업 용지에서 얻을 수 있는 비즈니스 기회와 이에 상응하는 가격 수준이 된다: 농민이 도시민의 토지경영을 도우면서, 비교하게 되는 것은 역시 도시민의 소득수준이다. 도시와 농촌간의 요소가격 차이가 크기 때문에, 농민의 요소 수익이 도시의 산업화 경영에 비하여 크게 성장할 상당한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2) 귀농귀촌이 농촌의 6차산업발전을 촉진한다

도시민의 귀농귀촌이 농업에 대해서 파생시키는 수요는 다종다양하다. 사회생태농업의 전문성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자신만의 특성을 갖춘 서비스도 늘리게 된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거리를 좁힐 뿐 아니라, 농산품의 중간 유통 단계를 줄여서, 유통원가를 낮추고, 식품안전 리스크도 감소시킨다. 또 과거에 생산요소에 포함되지 못하던, 생태자원, 인문자원을 활성화시켜서, 농업의 6차산업 (역자주 – 농업의 1차, 2차, 3차 산업을 곱셈과 같은 방식으로,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는 표현,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발전의 의미와 가치를 증가시킨다. 즉, 6차산업 발전을 촉진한다.

 

(3) 귀농귀촌은 식품안전문제와 농촌환경오염문제를 개선하는데 유리하다. 

생태효익 차원에서 보건데, 중등수입수준의 도시민이라면, 식품안전과 품질에 대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요구를 가지게 된다. 그들이 귀농귀촌하여 농민과 농산물의 품질 수준에 대하여 합의를 하게 되면, 천연식품, 친환경제품일수록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농업생산이 품질과 안전이 기본이 되는 방향을 취하게 된다. 농축산물 생산에 있어, 농약, 항생제, 비료 등의 화학제품 사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이는 산업화된 방식으로 농산물을 과도하게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식과는 다르다. 사회생태농업은 안전성을 부가가치 제고의 요소로 삼는다. 농업의 환경파괴 효과를 줄이는 동시에,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생태문명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성취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4) 귀농귀촌은 생산 요소가 농촌으로 회귀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사회효익 측면에서, 중국 농촌의 노동력, 자본, 토지는 농촌에서 도시로 단방향으로 움직이는 장기적 흐름을 보여왔다. 결과적으로 농업은 효율이 저하됐고, 농민은 가난해졌고, 농촌은 쇠락해 갔다. 귀농귀촌은 소비와 투자를 촉진한다. 농촌의 인기를 높일뿐 아니라, 도시 자본이 농촌으로 향하도록 한다. 그래서 고정적인 수익도 만들어 낸다. 귀농귀촌은 사회생태농업이 강조하는 6차산업의 발전방법이기도 하다. 생산위주의 단조로운 농업에서 현지화된 종합농업으로 발전해나가게 된다. 경기가 하강하는 가운데 귀농귀촌하는 농민공에게 수많은 취업기회를 제공한다. 또, 일반 대중의 창업 열기가 높은 가운데, 매우 우수한 창업영역을 개척하도록 돕는다. 사회생태농업에 참여한 농민공은 비교적 높은 수입을 얻을 뿐 아니라 도시에 일하러 가면서 남겨 놓은 노인과, 아이들 문제 (역자주 – 留守兒童,留守老人 농촌에 노인과 아이만 남아서 제대로 돌봄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생긴 심각한 사회문제)가 불러 온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된다.

 

(5) 귀농귀촌은 도시 중산층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유효한 방법이다

귀농귀촌을 통해서 사회생태농업을 발전시킴으로써 도시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도 있다. 귀농귀촌을 하는 화이트 컬러와 중간소득 계층은 자연 친화적인 생활을 하고, 노동을 경험하면서 몸과 마음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전체적인 사회의 압력도 감소시킬 수 있다. 스스로 논밭을 일구고, 경영하면서 자신과 가족의 식품 안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농촌에 투자하고 경영하는 것은, 도시 중산층이 도시 경제의 호황-불황사이클을 겪는 상황에서 재산을 보호하거나 혹은 자산을 증대시킬 수도 있는, 새로운 수단이 된다. 귀농귀촌을 통해, 전체적으로 도시 중산층의 불안감을 완화시킬 수 있다. 사회의 압력과 불안정 요소를 줄일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도 외국 이민을 희망하는 이들이 대신에 귀농귀촌을 선택함으로써, 인력과 자본의 해외 유출을 줄일 수 있다.

사진: 논일 체험에 참여하는 중국 시민들 (원문)

 

3. 사회생태농업 발전의 현실 조건

사회생태농업의 발전은 그 자체로 필요성과 긴급성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10여년간 국가가 ‘삼농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입한 막대한 자본에 의해 그 발전의 기초도 이미 확보돼 있다. 도시의 중등소득계층그룹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서, 사회생태농업 시장은 이미 기초적인 수준으로 성장돼 있다. 인터넷을 이용한 각종 서비스 등 신경영 모델도 이미 실현되어 있기에, 사회생태농업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아이디어와 업태를 제공받는다.

 

(1) 신농촌건설은 농촌의 인프라 설비를 개선했다

중국 공산당의 16대 전당대회 이래, 중국은 지속적으로 전면 소강사회 건설을 추진해왔다. “공업이 농업에 은혜를 값고, 도시는 농촌을 지지한다”라는 전략이다. 특히 2005년 중앙정부는 신농촌건설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고, 산업의 과잉생산능력 압력을 완화시키는 동시에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 이후, 중앙정부의 삼농관련 재정투입액은 매년 평균 1조위안을 상회해왔다. 이러한 투자는 근본적으로 농촌의 기초설비와 기본 복지 서비스를 개선해왔고, 전국 대부분의 농촌지역이 전화/전기, 상수도, 인터넷, 포장 도로의 혜택을 보게 됐다. 이렇게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농민들이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숙식과 휴식을 제공하는 농촌관광 비즈니스를 경영하기 위한 기본조건을 갖추게 됐다. 한편으로는 귀농귀촌을 원하는 시민들을 위한 편의가 제공되기도 한 것이다.

 

(2) 중등소득계층의 사회생태농업 발전 지원의 지속적 확대

2016년 10월 사회과학원 보고서에 의하면, 중국은 이미 중상층 등급의 고소득 국가 대열에 들어섰다. 중국의 중등소득계층 인구수는 계산방법에 따라서 차이가 크게 나긴 하지만,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주로, 도시에 모여 있고, 소득수준,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추구하는 생활수준도 높은 편이고, 특히 다양한 소비를 원한다. 2015년 중국의 휴한농업과 농촌관광의 이용객은 연인원 기준 22억명을 넘어섰고, 영업수입만해도 4천4백억 위안에 이르렀다. 대부분은 도시의 중등수입계층이 기여한 결과이다.

 

(3) 인터넷 연계산업의 발전은 사회생태농업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업태를 제공한다

인터넷 연계산업의 빠른 발전은 이미 도시와 공업영역에서 새로운 경영 아이디어와 업태를 형성했다. 수많은 일반 대중의 창업과 혁신을 가져왔다. 사회생태농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가치있는 새로운 경험이 된다. ‘인터넷+관광’, ‘인터넷+대중문화’와 같은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와 입소문에 의한 마케팅 등이 효과를 거두면서, 지역에서 이목을 끄는 소재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 지역에 맞는 다양한 업종과 업태의 비즈니스가 늘어나고 있으며, 지역의 농특산품, 자연경관과 인문풍속의 개발과 영업을 촉진하고 있다. 지역 특색의 재배와 목축/ 양식, 레저와 힐링, 재배와 수확, 자연교육, 지역문화 체험, 수공업 및 숙식을 결합하여, 6차산업을 발전시키고 있고, 현지자원의 활성화와 자원수익의 내부화를 촉진하고 있다.

 

4. 사회생태농업발전을 위한 제안

(1) 생태문명이념으로 신농촌건설을 추진을 향도한다

생태문명이념이 신농촌건설 추진의 향도가 되어 전체영역을 정의하고 그 발전 개념을 수립해야 한다. 오랜 기간동안 나뉘어 있던 부문별, 산업별 구분에 의한 지원방식을 바꿔야 한다. 전역적 사회생태농업의 개념을 만들어 나간다. 하드웨어 건설에 있어, 중앙정부의 재정적 지지를 강화해야 하고 지방정부 재정의 비율을 감소시켜야 하고, 농촌 네트워크를 개선하고, 농촌의 전력공급망을 강화하고, 인터넷을 설치하고, 이를 통해 도농교류를 추진한다. 농촌교육과 의료를 개선하고, 문턱을 낮춘 보편적 금융 등 기본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도시와 농촌의 공공복리 격차가 농민들을 도시로 유인하는 결과를 만들지 않도록 한다. 소프트웨어적으로는 농촌의 전통생활문화와 유적을 보호하고, 우수한 향토의 문화를 부흥하며, 사회화농업발전을 위해 독특한 소재를 제공하게 한다. 농촌생태환경보호와 환경오염 관리를 강화한다.

 

(2) 시민과 농민이 대등한 자격으로 협상하고, 평등하게 거래하도록 한다

한편으로, ‘사회지원농업 CSA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이념과 사업의 발전을 고무한다. 농가와 도시 커뮤니티가 직접 대면하여 거래하고, 상호 신뢰할 수 있는 안정된 시장관계를 형성하도록 한다. 그리하면 농가소득이 안정되고 반대급부로 도시가구는 안전한 식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보장받는다. 또 한편으로, 도시거주민과 사회자본이 농촌으로 진입하도록 유도, 고무하고, 농촌에서 다양한 형식의 비즈니스가 생겨나게 한다. 예를 들면 도시가구가 농민으로부터 농지를 임대해서, 자급용 텃밭을 가꾼다든가, 농민이 가진 남는 농가주택을 임대해서 레저 비즈니스에 이용하거나, 민박,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을 경영하게 한다. 전문가들은 이미 대자본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약탈적 경영을 하는 현상에 대해서 경고하기 시작하고 있다. 자본의 농촌진입에 앞서, 시민들의 귀농귀촌을 통해 도시민과 농민이 직접 평등하게 협상하고 거래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이상적이다. 이런 조건에서 농민은 자주적으로 결정하고, 경영할 수 있다. 자본이 농촌에 진입해서 농촌간부와 야합을 벌일 경우, 이익을 농단함으로써, 농촌을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개발하고, 약탈성 경영을 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마이크로 거래’에 대해서, 정부는 정책, 법률, 법규와 정부 서비스를 통해 지원함으로써, 농민과 시민 모두 리스크를 줄이고, 거래 원가를 낮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 민간조직이 사회생태농업영역에서 건전하게 적극적으로 활약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전문가의 지적대로 중국은 4천년의 지속가능한 농업경작 역사를 가지고 있는 반면, 화학농업은 40여년, 산업화된 농업의 역사는 20여년에 불과하다. 대다수 농민은 스스로 사회생태농업으로 전환을 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러한 민간조직들이 모델을 만들어 제시할 필요가 있다. 도시민과 농민사이에 교량역할을 해야 한다. 현재, 이러한 민간조직들이 사회생태농업의 실천과 탐색을 통해서, 귀중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이들을 정책으로 지원하고, 세제상의 혜택을 줘야 한다. 민간조직이 앞장서서 실험한 경험을 정책과 법률에 녹여야 한다. 이들에게 적절한 정부의 프로젝트를 위탁해야 하고, 좋은 경험을 가진 민간조직이 농민들에게 사회생태농업 이념과, 기능 교육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사진: 교육에 참가하고 있는 농민과 대학생들 (원문)

 

(4) 관련된 법률, 법규, 정책을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

농촌에서 다양한 업태의 경영이 가능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이를테면, 농가 민박, 펜션, 식당업 등의 세제 혜택이라든가 신용대출 조건의 완화, 행정수속의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사회생태농업및 유기농 식품에 대해서 입법이 이루어져야 하고, 유기식품인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동시에 농촌기본 경제제도를 유지하고, 마을집체가 토지의 소유권을 지속하고, 마찬가지로 농가가 토지의 사용권을 계속 갖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안전선으로써, 농촌의 다양한 업태 경영중 발생할 수 있는 농지의 불법적인 대규모 전용, 농민의 권리를 헐값에 침탈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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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생태학: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의 생태학









24장 농업, 사회, 그리고 농생태학


1장에서 우리는 오늘날 세계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는 산업적 농업 체계의 엄청난 생산성을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하는 대가의 일부인 환경과 사회, 농업 생산성의 토대에 대한 여러 심각한 해악을 설명했다. 이들 많은 해악들 가운데 산업형 농업은 고대의 대수층을 소모시키고,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토양을 고갈시키고,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키며, 대기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추가하고, 중요한 생태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연계를 손상시키고, 먹을거리 생산의 통제권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쥐어준다. 


1장 이후의 장들에서 이 책은 산업형 농업과는 매우 다르게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접근법을 구성하는 원리, 전략, 방법을 켜켜이 구축했다. 이들 장은 모두 산업형 농업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고, 현재 받아들이기 어려운비용을 가지고 있으며, 사실상 농생태학의 토대에 기반한 체계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1980년대에 농생태학의 사고, 실천, 연구가 부상한 이후 축적된 증거에 의하면, 이러한 농업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은 실제로 산업적 접근법보다 훨씬 더 지속가능하고, 지구의 생명을 유지하는 체계를 훨씬 덜 손상시키며, 세계의 극빈층이 견디고 있는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노력과 더 일치한다고 나타난다(예, IAASTD 2009; IFAD 2013). 또한 연구는 농업에 대한 농생태학적 접근법이 현재만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도 세계의 인구를 부양할 만큼충분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견해를 뒷받침한다(Badgley and Perfecto 2007; Badgley et al. 2007).


이 책에서 농생태학의 토대를 제시하는 궁극적 목적은 더 지속가능한 세계의 먹을거리 체계로 전환하는 걸 촉진하는 일이기에, 우리는 이제 -앞의 부에서 지속가능성으로 전환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뒤- 전환의 실제 상황을 조사해야 할 차례이다. 우리가 두 체계에 관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고려하고 사람들이 가장 밝은 전망을 지닌선택지를 고르길 바란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농생태학적 접근법의 더 지속가능한 방식이 산업형 농업의 접근법을 천천히 대체하고 강력해질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한 추세는 산업국의 지역 기준에서는 분명히 나타나지만, 전반적으로 세계적으로는 반대의 일이 발생하고 있다.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알려진 농법이 일반적으로 축소되거나 대체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광하는 대상이 증가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15장에서 지적했듯이, 유전자변형 작물을 재배하는 토지의 면적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소규모 생산은 증가하는 대신 전세게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거의 모든 곳에서 벌써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대규모 단작이 그 반대가 아니라 다양한 섞어짓기를 대체하고 있다. 전 세계의 농민들은 외부 투입재를 덜 쓰는 게 아니라 그에 더욱 의존하게 만드는 농법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들 영역 각각에 대한 고무적인 반례가 있지만, 이런 방식과 다른 많은 방식으로 세계의 먹을거리 체계 전체는 1장에서 설명한 기술 집약적이고 자본 집약적이며 산업에 기반한 방식에 점점 더 의존하고 지배되고 있다(그림24.1).


그림24.1 아이오와 주에서 대규모 단작으로 재배되고 있는 유전자변형 옥수수. 유전공학과 투입재 집약적인 대규모 단작 같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농법이 더욱 확대되고 있으며, 증가하는 먹을거리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라며 여러 사람들이 옹호한다. (사진 제공 Paula R. Westerman)


 


장기적으로 볼 때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지라도 왜 인간 사회 전체는 산업형 농업의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농업 정책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답을 줄 것이다. 농업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그걸 이용하지 않으면 먹을거리 부족과 기아의 형태로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유전자변형 유기체, 대규모단작, 대량 생산 및 기타 산업형 농업의 측면이 점차 지배적으로 되고 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산업형농업의 농법은 농민이 더 많은 먹을거리를 재배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먹을거리를 늘리는 게 농업의 요점이다. 이 답은 많은 걸 충족시키지만, 1장을 읽은 사람들은 만족시키지 못한다. 첫째, 산업형 농업의 농법과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진 심각하게 부정적인 여러 결과 -와 미래의 생산성에 대한 위협- 는 다루지 않는다. 둘째, 생산성을 높이고 식량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다른 더 지속가능한 수단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를 부양하기 위해 산업형 농업에 더 밀어붙이자"는 주장의 근본적 결함을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본래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건 아니다. 세계 전체는 궁극적으로 자멸적인 먹을거리 생산의 길을 지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바로 세계가 가야할 길이라 생각한다. 분명히 더 자세히 조사할 만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제안하는 그 무언가는 신념과 정치적 공약, 경제적 이익,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사실을 해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이들 요인을 이해하려면, 우린 한 걸음 물러나 농업 그 자체를 너머농업이 운영되고 있는 더 광범위한 맥락을 조사해야 한다. 즉, 우리는 시장, 경제 구조, 정부 정책, 정치, 권력의 수준이 다른 집단들 사이에 발생하는 투쟁 및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적 틀을 검토해야 한다. 이는 모두 사회라는 지시문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접근법을 취하여, 우리는 왜 인간 사회가 농업과 관련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왜 이런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널리 퍼진 약속이라도 있는지에 대한 매우 강력한 사회적, 경제적 이유가 있음을 알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린 2장에서 농업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 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요구와 목적에 부합하는 인간이 관리하는 생태계로 농업생태계를 조사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가장 구체적인 형태의 농업생태계 -농경지 또는 개별 농장- 를 확장해, 어떻게 지방과 농촌-도시 경관을 가로지르는 농업생태계 수준을 단일하고 상호연결된 세계적 먹을거리 체계로 개념화할 수 있는지 탐구했다. 먹을거리를 생산, 유통, 소비하는 모든 명백한 사회적 활동을 고려함으로써, 농업생태계 개념은 농업을 사회적 맥락에 놓는다. 


하지만 농업생태계 개념에 구체화된 농업과 사회 사이의 관계는 주로 표면적이기 때문에, 이는 우리가 가야할 곳의 출발점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 개념은 농업과 사회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상호의존성의 내용과 그것이 사람들의 신념과 가정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조사하는 데 필요한 도구는 제공하지 못한다. 


이러한 도구를 얻는 열쇠는 농생태학이 원래 수립된 자연과학의 틀을 넘어 사회과학의 통찰력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번 장의 핵심 목적이다. 이는 농생태학이 기반하고 있는 생태학의 개념은 먹을거리 체계에 있는 많은 자연-사회의 상호연결성을 이해하는 데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반면, 먹을거리 체계의 지속가능성을 궁극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라는 세계의 고유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생태학의 개념 외에도, 신념과 가치, 추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들이 사회, 정치, 경제적 삶의 구조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고 강화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 도구도 필요하다. 농생태학의 분석적 접근법과 연구 의제에 이들 도구를 포함시킴으로써, 우리는 왜 먹을거리 체계가 계속해서 파괴적인 궤도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이해는 농생태학자가 단순히 지속가능한 대안적인 농업생태계를 설계하는 데에 만족한다면 먹을거리 체계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깨달음을 낳는다. 또한 그들은 전체 먹을거리 체계의 근본적 변화 -사회적 토대를 형성하는 신념과 가정을 포함하여- 를 지지하고 노력해야 하며, 실제로 토지에서 일하는 사람 및 그들이 생산한 먹을거리를 소비하는 사람들과 이러한 변화를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협소하게 받아들여지는 농업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기 쉬운 더 단순하고 구체적인 사물과 관계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복잡한 세계를 이해한다. 우리는 계층 구조, 인종차별, 국가 경제 같은 헤아리기 어려운 추상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대면하고 있는 상호작용, 가족, 개별적 투쟁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취하여 은유, 비유, 모델로 이용할 수 있다. 즉, 분명하게 보이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더 추상적인 생각을 매달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엄청나게 복잡한 경제활동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개별 가게주와 그의 고객들 사이의 1 대 1 상호작용을 모델로 사용한다. 이 단순한 모델을 통해 우리는 수요와 공급 같은 복잡한 현상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국가 수준의 경제와 국제무역에 적용할 수도 있다. 


사회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심지어 필수적일 수도 있음- 이와 같은 모델은 중요한 한계가 있다. 사회 조직의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을 이상화하고 기반한 그것의 특징은 사회의 수준에서 작동되는 사회 과정의 특징과 결코 완전히 평행하지 않고, 더 복잡한 수준에만 존재할 수 있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생태계와 흡사). 게다가 이들 모델은 더 높은 사회 수준에 비유되어 확장되면 우리의 개념을 형성하게 되는 특정 편견을 포함하곤 한다. 


인간이 사회와의 관계에서 농업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모델의 경우(적어도 산업국에서)가 그러하다. 여기의 기본 모델은 앞서 언급한 가게주-고객 관계와 같다.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농민이 있고 농민에게 직접 가서 자신의 먹을거리를 구매하는 사람이 있다. 농민의 고객은 "수요"로 간주되는 먹을거리에 대한 특정 요구와 욕구를 가지고, 농민은 "공급"으로 생각되는 특정한 양과 종류의 먹을거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급과 수요는 상호작용하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특정 먹을거리에 대한 더 많은 수요는 농민이 그 먹을거리를 더 많이 재배하도록 유도한다. 


더 큰 규모로 비유하여 확장된 이 모델은 우리가 "농업"이라 부르는 전체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사업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하는 기초를 형성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먹을거리 소비자부터 고위급 정책입안자까지- 이 농업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서, 기아와 먹을거리 분배를 포함하여 먹을거리와 먹을거리 생산 및 농장에서 사용되는 생산 방식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영향을 준다. 이런 개념에서, 농업은 하나의 거대한 농장과 같고, 먹을거리를 먹는 사람들(즉, 모든 사람)은 "소비자"로 함께 집단을 이루며, 둘은 개별적 농민과 그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공급과 수요에 의해 연결된다. 소비자 쪽의 수요는 농업 분야의 농민이 무엇을 얼마나 많이 재배하고 생산하는지에 영향을 미쳐, 이것이 지역, 국가, 또는 세계 전체의 먹을거리 공급을 구성한다. 이 모델은 그림24.2에 나와 있다.



그림24.2 먹을거리 체계의 개념적 모델. 먹을거리 체계를 대폭 단순화하는 이외에도, 사람들이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하여 특정한 추정을 하도록 장려한다. 




이 모델이 2장에서 설명한 대로 어떻게 먹을거리 체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농업이 생물다양성, 자연계의 과정과 그 생태적 서비스, 토지와 관개용수의 공급, 토양과 토양의 질, 인과 질소 같은 투입재, 에너지원, 기후 등등 생산의 다양한 물리적 요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농이나 토지가 없는 임대농으로 분투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은 연간 매출이 수십 억에 이르는 거대한 초국적 기업이란 사실을 무시하고, 농업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농부"와 대등한 지위에 놓여 있다. 먹을거리의 섭취자들은 식량안보가 없는 수백 만 명의 불평등을 제거하고, 단일한 하나의 구역으로 취급된다.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사람과 그를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조직체 -가공업자, 중개인, 유통업자, 제조업자, 도매업자, 소매업자로 구성되는- 는 완전히 간과되고, 그 길을 따라 낭비되는 많은 양의 먹을거리도 마찬가지이다. 광고와 기타 수단을 통해 소비자의 수요를 형성하려는 농업 쪽에 대한 농기업의 능력도 완전히 빠져 있다.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이모델에서 먹을거리 생산이 순전히 경제적 맥락에서 먹을거리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방식을 개발하고 이용한다는 그저 기술적 문제로 축소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농사 방법은 농업의 "블랙박스" 안에 숨겨진다. 그것들은 농업 관련 사업 외부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단순한 경제 모델이 농업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 틀을 제공한다면, 당신은 오늘날 세계의 농업 운영방식이 가진 많은 문제점을 보지 못하게 된다. 농업(하나의 대형 농장)이 세계의 먹을거리 소비자들의 먹을거리에 대한 전체 수요를 충족시키는 한 만사가 괜찮다. 당신이 기아와 토양침식, 농업 유출수의 오염 효과 같은 문제를 알고 있다면, 그건 본질적으로 기술적 해결책의 대상이 되는 기술의 문제이기에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으로 볼 수 있다. 세계에 기아가 있고 세계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히 농민들이 더 많은 먹을거리를 재배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유전자변형 작물 같이 먹을거리를 더 많이 늘릴 수 있는 기술을 더 널리 사용해야 한다.


앞의 설명이 암시하듯이, 특정한 작가나 사상가가 이 모델을 기반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많은 지표가 있다. 한 작가가 "농민"에 의해 먹을거리가 재배된다고 말하면(그리고 그 작가는 소규모 또는 가족농이라고 특별히 언급하지않음), 그 또는 그녀는 모든 먹을거리 생산이 가족농장과 비슷한 어떤 것의 맥락에서 일어난다는 잘못된 가정을 모델에 끼워 넣을 수 있다. 만약 그 작가가 주로 "생산성"이나 "수확량"에 관하여 관심이 있고 산업적 생산 방식의 생태적, 사회적 충격을 무시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한 경제 모델은 농업의 모든 관련 측면을 볼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을 흐리게 할 수 있다. 


그림24.2에 그려진 농업 모델이 엄청난 영향력을 갖는다는 걸 인식하기 위해 뉴스 매체에 대한 간단한 조사와 농업 정책 입안자와 전문가들의 의견 가운데 일부만 추출해도 된다. 그것은 농업과 기아, 인구 증가, 토지 이용에 대한 공개 토론의 근간을 이루는 당연시되는 많은 가정의 출처이다. 예를 들어, 이 모델로만 대중 담론이 형성되면서 2013년세계 식량상이 유전자변형 작물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세 사람에게 수여될 수 있었다. 산업형 농업의 환경과 사회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들조차 그들의 사고에 이 모델이 부과하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먹을거리 체계의 정치경제학과 생태학


체계적인 편견과 사각지대로 이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농업의 장소에 대한 더 완전한 모델은 무엇보다 2장에서 논의된 먹을거리 체계 모델의 모든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시장과 정부 정책 같은 사회적 구조를 포함하고, 시장 메커니즘과 가격이 먹을거리가 실제로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방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인식하고, 생산 과정의 다양성과 복잡성 및  농산물의 대부분이 비식품 산업형 작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농업 생산이 어떻게 자연계와 환경에 의존하며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농업이 전 세계의 실제 인간 존재의 삶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하여, 더 나은 모델은 세계 먹을거리 체계의 모든 측면에 존재하는 불평등도 고려해야 -그리고 원인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그것은 자신의 생활환경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먹을거리 체계 자체의 변화를 불러오는 국가와 지역들 사이에 있는 부의 차이, 사람들의 계층 사이에 있는 먹을거리 접근성의 차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를 검토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불평등의 모든 측면은 사회과학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인 권력의 개념으로 싸여 있다. 권력의 기본 정의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전반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개인의 속성으로 권력을 표현하는 이러한 단순한 정의는 우리가 여기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면서 권력의 핵심 특징 가운데 일부를 빠뜨리게 한다. 권력은 사회적, 문화적 구조와 관련하여 누군가의 위치에서 나오는 기능 -특히 계급, 인종, 성별에 따라 존재하는 분할- 으로, 이는 개인 수준에서 권력이 부, 지위, 집단의 회원, 지식에 대한 접근성에 달려 있음을 뜻한다. 이런 것들이 대를 이어 전해지는 한 권력은 재분배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 권력은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는 수준에도 존재한다. 권력은 개인에 의해서 못지않게 집단과 기업, 정부, 국가에 의해 행사된다.  


농업의 맥락에서, 개인의 권력에 대한 유용한 정의는 누군가의 삶에 대한 상황과 운명을 통제하는 상대적인 능력으로서 결국 먹을거리가 가장 중요하지 않은 누군가의 요구를 제공하는 데 필요한 자원(토지, 종자, 물, 다른 사람의 노동력 등)에 대한 접근과 통제에 크게 의존한다. 이 기준에 의해 전 세계 수십 억의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권력이 없는 반면, 극소수 -우리가 지배층이라 부르는- 는 너무 권력이 커서 둘을 비교하기 어렵다(그림24.3).



그림24.3 에콰도르 키토 근처의 비옥한 저지대에 있는 고투입의 기계화된 감자밭(왼쪽)과 자원이 제한된 구릉지가까이에 농민이 농사짓는 밭(오른쪽). 세계 먹을거리 체계의 참여자들은 엄청나게 다른 수준의 권력을 가지곤 한다. 




사회 내부와 사회들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는 틀림없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경험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Domhoff 2013). 마찬가지로 권력의 표현과 유지는 아마 사회가 운영되는 방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일 것이다(Mills and Wolfe 2000). 이러한 이유로, 권력에 대한 쟁점을 검토하는 건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걸 포함해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이해하는 데 엄청나게 중요하다. 특히 많은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들은 이 결론을 거의 공리처럼 받아들인다. 여러 가지 이유로, 농업을 연구하고 그것을 좌우하는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는 게 더 느렸다.   


권력에 대한 쟁점은 그 용어의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그것은 선거 정치와 정당의 경쟁이란 좁은 의미를 뛰어넘는다. 거시적인 정치는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를 인식하고 그에 도전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런 종류의 정치는 정부, 법률, 정책의 무대 외부에 존재하며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이번 장의 핵심 전갈은 농생태학자는 농민들 사이에, 먹을거리 섭취자들 사이에, 그리고 체계의 기타 모든 여러 구성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의 분배라는 관점에서 먹을거리 체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장은 농생태학의 학생들이 정치라는 렌즈를 통해 먹을거리 체계를 바라보길 장려한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면, 먹을거리 체계 가운데 한 가지 핵심 특징이 곧바로 눈에 띈다. 권력의 대부분은 더 부유한 국가, 농식품 기업들, 이들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과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Holt-Gimenez and Patel 2009; Hauter 2012).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권력과 권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현행 산업형 농업의 체계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신념에 매우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먹을거리 체계를 통제하는 기업

우리는 먹을거리를 "농민" -소규모 가족농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 이 생산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산업국에서 소비되는 먹을거리 대부분은 흔히 농기업이라 부르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대기업이 지배하는 세계적 체계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들의 통제는 먹을거리 생산과 분배의 모든 수준에 뻗어 있다. 생산 요인의 공급(종자, 농화학물질, 비료, 농기계 등), 토지의 소유, 가축 사료의 생산, 가축의 생산, 주요 작물 대부분의 생산, 식품 가공과 운송, 도매 유통, 소매 판매 등이 그렇다. 이 방대한 체계에서, 먹을거리는 상품으로 취급된다. 농기업의 회사와 그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부를 생성해주는 능력으로 평가를 받는 품목들이다. 그 범위 때문에 기업이 지배하는 먹을거리 체계는 모든 먹을거리를 그들의 중력장으로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먹을거리를 상품화하여 모든 먹을거리를 상품으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여전히 정확하게 "소규모 가족농"이라 부를 수 있는 농장에서 먹을거리가 생산되더라도 그 농장의 소유주가 자신의 옥수수나 브로콜리나 돼지를 기업이 지배하는 상품 지향형 네트워크의 먹을거리 가공, 유통, 판매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란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비자로서 이들 먹을거리 대기업을 지원하는 일을 회피하기란 어렵다. 예를 들어 "유기농" "생물학적" "자연" 및 "생태적"이란 상표를 붙인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기업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다국적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다(그림24.4 참조).



그림24.4 북미에서 유기농 식품 브랜드의 기업 소유권. 유기농 식품 브랜드의 대부분은 농식품 대기업이 소유하고있다. 이러한 상대적으로 소수의 기업이 소유한 모든 브랜드를 포함하면 이런 크기의 화면이 여러 장 필요할 것이다. (그림 Philip H. Howard, Michigan State University, East Lansing, MI.)





하지만 농지, 종자, 비료, 먹을거리 가공시설, 운송, 유통망의 소유권이 기업의 손에 들어가는 게 왜 문제인가? 이것이 권력 및 불평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대답은 농식품 기업들이 엄청난 양의 부를 통제하고 농산물의 물리적 및 재정적 기반의 대부분을 소유하여, 먹을거리 체계의 다른 행위자들에비해 엄청난 권력을 지니게 되는 원인이자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 세계 도매와 소매 식품 시장에서 영업하는 네슬레는 연간 매출이 약 1220억 달러로 세계 여러 국가의 국민총생산액보다 많다. 연간 매출 900억 달러를 초과하는 미국에 본사를 둔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Archer Daniels Midland는 식품 가공과 제조 및 유통을 지배한다. 그들도 몇몇 개개의 국가들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부를 통제한다. 


농식품 기업의 엄청난 부는 그들의 필요와 사리에 따라 먹을거리 체계를 형성할 수 있는 상당한 권력으로 변환된다. 그들은 정부의 법률에 영향을 주고, 인위적으로 가격을 상승시키며, 소비자의 행위를 구체화시키고, 매점을 통해 확장에 유리한 조건을 협상하고, 그들의 지배력에 대한 위협을 억누를 수 있다. 


세계 먹을거리 체계에서 기업의 역할이 너무 지배적이라 일부 연구자들은 현행 체계를 "기업의 먹을거리 체제"(McMichael 2009; Hauter 2012)로 평하지만, 기업만이 먹을거리의 생산, 유통, 소비를 통제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표면상 이윤을 만들지 못하는 왕국 외부에 있는 모든 종류의 다른 기관들과 동맹을 맺어 협력을 얻는다. 먹을거리 왕국이란 발상의 주요 지지자인 맥마이클McMichael(2009)에 의하면, 현행 기업의 먹을거리 왕국을 구성하는다른 기관들에는 정부 부처, 세계적 농업기관, 무상 토지 불하 대학들, 싱크탱크, 대형 자선단체 등이 포함된다. 이들 기관들은 모두 기업의 먹을거리 왕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으며, 먹을거리 체계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자화되지 않은 "규칙"을 시행하고자 농식품 기업과 협력한다. 또한 그들은 농업을 인지하는 특정 방식을 조장한다. 산업적 방식과 기업의 통제라는 현재 상황의 유지를 지지하고 뚜렷하게 비정치적임을 내세우는 방식이다. 






집중 광선에서 벗어난 농업의 권력 관계

많은 학자, 도시계획 설계자, 정책입안자, 공무원, 논평가, 사람들 사이에는 대개 권력과 부의 집중, 불평등의 측면에서 먹을거리와 먹을거리 생산을 보는 것을 전반적으로 꺼려하는(또는 할 수 없는) 게 있다. 앞서 논의된 "깊은 정치적" 방식으로 농업을 보는 걸 이렇게 광범위하게 거부하는 건 여러 중요한 쟁점들 -토론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건설을 위한 것도- 을 제한해 버린다. 다른 말로, 농업에 대해 만연한 비정치적 지향은 특정 쟁점, 특히 농식품 기업들의 부와 권력 및 전체 먹을거리 체계의 매우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를 우리의 의식에서 완전히 없애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먹을거리 쟁점이 때로는 "정치적"이 되는 것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시민들과 선출된 공직자들은 유전자변형 작물에서 유래된 식품에 상표를 붙여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한다. 또 다른 좋은 사례로, 미국 의회는 정기적으로 연간 농업의 예산 지출 법안에 규정된 보조금의 규모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이것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이 같은 쟁점들은 거의 항상 근본적인 쟁점은 문제삼지 않은 채 정부 기관에서 좁은 관점으로 논의된다. 물론 미국에서 생산자 보조금의 규모는 중요하지만, 보조금의 존재 여부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의회의 의원들은 일반적으로 농상품 생산의 합병을 장려하고 소농을 밀어내는 보조금의 역할은 논의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유전자변형 표시제 논쟁(그림24.5)에서, 표시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시민들에게 최근의 유전자변형 작물의 활용이 어떻게 먹을거리 생산에 대한 기업의 통제력을 높이고 농민들을 지속가능하지 않은 해충 방제의 악순환에 빠지게 하는지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 쟁점을 다루는 대신, 유전자변형 식품의 가정적인 건강 위험(경우에 따라서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표시제를 추진한다.



그림24.5 유전자변형 식품의 표시제를 요구하는 운동의 구호들. 소비자 보호에 초점을 맞추는 현실적 목표를 세웠지만, 유전자변형 작물, 기업의 농업 통제, 지속불가능성 사이의 관계는 지적하지 못하곤 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먹을거리 체계의 더 근본적인 측면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더 깊은 수준의 정치적 논쟁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먹을거리와 관련된 쟁점에 대해 협소한 정치적 취급법을 배제하고 먹을거리 체계의 쟁점과 함께 정치적 관여도가 더 깊다는 증거를 찾는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식량안보가 우수한 산업국에서는 적어도 거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깊은 정치적 지향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공공의 논쟁에서 변수를 통제하는 건 주류의 지향 -시민 대다수와 정책을 구체화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사람들- 이고, 일반적으로 여러 국가에서 주류의 관점은 먹을거리와 먹을거리 생산을 비정치적으로 생각하고 취급한다. 


미국과 많은 산업국에서 어디에나 있는 간편식을 생각해 보라. 햄버거이다. 햄버거를 원할 때 머릿속을 스치는 요인은 무엇인가? 당신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슷하다면 패티를 생산한 소가 어디에서 사육되는지, 무엇을 먹는지 등은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 그 소를 사육한 토지가 누구의 소유인지, 사료가 재배된 토지가 누구의 소유인지, 사료용 곡물이 가공된 시설이 누구의 소유인지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 햄버거에 지불한 돈이 식당의 계산대부터 고기 가공 공장의 소유자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손에 햄버거를 얻는 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분배되는지 상관없을 것이다. 당신의 생각에서 더 나아가, 소비자로서 당신의 역할은 더 작은 목장의 운영을 폐업시키거나 사육자에게 항생제를 제공하는 제약회사의 이익을 불려준다. 아니,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다면 가격과 맛, 제공량, 햄버거를 판매하는 매장의 평판이나 인상을 주로 생각할 것이다. 건강과 식이 문제가 우려된다면, 선택의 여지는 없겠지만 소고기가 풀을 먹었는지 아닌지 신경을 쓸 것이다. 간단히 말하여, 당신이 햄버거를 구매하면 소비자로서 행동하고, -햄버거를 구매할 돈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먹을거리 소비는 비정치적 행동이다. 


먹을거리 소비는 사람들이 먹을거리 체계와 상호작용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임을 기억하라. 먹을거리의 소비를 정치적 관점으로 보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먹을거리 체계가 이런 방식으로 보일 리가 없다. 


왜 먹을거리 체계와 그 산업형 농업이란 기반이 비판에 저항하며, 정책입안자와 정부 및 기업들에게 많은 암묵적, 명시적 지원을 받는지 이해하려면 그림24.2에 묘사된 농업의 모델로 돌아가서 시작할 수 있다. 이 모델에는 정치적인 것 -즉, 권력의 불평등한 분배와 관련되거나 암시하는 게 하나도 없음- 이 아무것도 없다. 소비자와 "농민"이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 모든 농민이 소농에 친화적인 것으로 특징지워져 있다. 하지만 권력을 중재하는 관계가 없다는 게 이 모델의 유일한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수요"란 표현으로 선택을 행사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오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은 우리가 논의했던 권력에 비해 사소한 것이다. 소비자의 선택이란 이 사소한 권력을 강조함으로써, 그 모델은 정말로 문제가 되는 권력의 종류를 감춘다. 


사회에서의 농업의 기능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델이 농업 정책과 개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대중이 일반적으로 먹을거리 체계를 인식하는 방법에도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 다른 말로, 왜 먹을거리가 비정치적인가?






먹을거리 체계를 통제하는 기업에 대한 위협을 포함시키기

산업국의 시민들이 기업의 통제가 어떻게 먹을거리 체계의 본질을 형성하는지 -그에 따라 자신의 삶과 자손들의 삶을 통제- 를 충분히 깨닫는다면, 특별히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상위 농식품 임원들이 손에 쥔 부의 집중과 소유권에 대한 명확한 그림, 이들 개인의 부와 권력이 미치는 범위에 대한 이해는 사람과 환경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는 산업형 농업의 관행과 먹을거리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방식에 대한 지식에 달려 있다. 이 모두가 우려와 분개,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 상대적으로 소수에게 부를 창출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농경지의 미래 생산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체계의 공정성, 윤리 및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농식품 기업에 대한 대규모 항의와 먹을거리 체계를 완전히 개조하기 위한 대중운동은 제한적이고 산발적이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지식과 의식의 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왜 그런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그림24.2에 묘사된 농업의 단순한 경제 모델의 통용을 드는 것인데, 왜 처음부터 이 모델이 그렇게 퍼졌는지 질문해 보자. 이 심오한 문제에 답하기 위해, 자주 논쟁을 초래하는 이념ideology란 단어를 도입해야 한다. 이념적 체계는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신념이자 당연시되는 가정의 집합이다. 세계에는 다양한 이념적 체계가 존재하지만, -먹을거리 체계의 현재 상태를 보호하는 것을 포함하여- 대부분은 권력과 부를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하여 사회나 사회의 배열을 안정시키는 특성을 공유한다. 


상대적으로 힘없는 다수를 희생시켜 힘있는 소수가 혜택을 얻는 권력의 분배가 특히 왜곡된 사회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힘없는 이가 이런 배치에 저항하고 반항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를 알고 힘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점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역사를 통틀어, 이는 물리력 사용의 독점을 보장하는 형태를 취해 왔다. 군주, 지배 계급, 지배 정당, 지배적인 기관 등은 일반적으로 군대와 특별 경비원, 비밀 경찰을 고용해 권력의 분배를 변경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려 시도하는 모든 국민과 속국, 시민들에게 폭력 -물리력- 을 당할 수 있다고 분명히 해 왔다. 


하지만 폭력의 위협을 유지하는 것이 힘있는 집단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세계에 존재해 온 거의 모든 힘있는 정권은 자기 주위에 사상과 신념으로 구성되는 보호 구조도 구축했다. 이러한 사상과 신념은 정권이 신성하게 지시된 질서를 부흥시키거나 유지하고 외부의 위협을 격퇴하거나, 사람들의 요구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권력의 대상들을 설득함으로써 정권의 권력을 합법화한다. 궁극적으로 사상과 신념을 합법화하는 것이 군대와 경찰보다 강력하고, 유지하기에 더 쉽고 비용도 적게 든다. 사상과 신념을 합법화하는 체계가 사회를 장악하면, 권력자가 부과한 질서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성격으로 받아들인다. 즉, 사람들은 대안을 상상하거나 근본적인 비판이나 반대를 조직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 시작한다. 합법적인 신념과 당연시되는가정의 효과 때문에, 최근 힘있는 집단은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물리력의 위협에 기초한 강제를 완전히 배제하고 사상과 신념을 통해 자기 권력의 위치를 전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과거의 정권, 제국, 독재자 -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비난하는 현재의 정권- 를 되돌아보고, 그 합법화된 신념 체계를 "이념"으로 보거나 이들 신념을 "선전"으로 세뇌하려는 더욱 명시적인 노력을 볼 수는 있지만, 우리 자신의 사회를 살펴보며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대한 기본적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사회의 신념 체계에 담겨 있고, 이들 신념은 당연히 스스로를 신념이라 광고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당연시되는 현실 묘사라고 알린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의 기업이 지배하는 먹을거리 체계가 비판으로부터 격리되고 이념에 의한 위협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는 게 반드시 사실 같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황을 설명하는 간단명료하고 정확한 방법이다. 기업이 지배하는 먹을거리 체계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적 체계는 소비자가 식품을 선택하는 사소한 "권력"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먹을거리 체계에 실재하는 권력 차이가 사회에서 매우 불평등한 결과를 강화하는 방식을 덮어 감추며, 수확량이 먹을거리 생산의 영역에서 중요한 것이라 확신시킨다. 바꾸어 말하여, 먹을거리의 증가에 관한 모든 토론 조건을 체계적으로 제한한다. 먹을거리 체계에서 기업이란 행위자는 이념적 틀이 그들을 체계의 모든 긍정적인 것에 결부짓고 부정적인 것에서 분리시키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 없다. 산업형 농업의 사회와 환경에 대한 해악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농업 접근법의 불가피한 결과라기보다는 단순한 부작용이라 여겨진다. 먹을거리 체계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적 체계는 아마 매우 강력하게 사람들이 그 체계의 생존과 원활한기능에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납득시킨다. 당신이 햄버거를 바란다면,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념적 체계가 먹을거리 체계를 둘러싸고 보호한다면, 먹을거리 체계에 단단히 박혀 있으며 서로를 강화하는 더 큰 경제적, 정치적 질서의 수준에 더욱 광범위한 이념적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합법화하는더 큰 이념적 체계는 자유시장에서 사리의 추구가 경제적 진보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 혜택의 분배를 보증한다는 널리 신봉되는 신념에 달려 있다. 먹을거리 체계에서 그 신념은 자유시장과 사적 소유, 이윤 추구가 현행 먹을거리 체계의 모든 혜택, 즉 풍요, 다양성, 선택 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 결론을 내린다. 이들이 많은 사람에게근저의 가정일지라도, 현실의 매우 중대한 측면을 무시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념적이다. 자유시장에서 이윤의 이기적 추구가 정말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에 많은 책임이 있지만, 그것이 농업에 대한 산업적 접근과 농기업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의 -먹을거리 체계로만 목록을 제한하려는- 원인이기도 하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긍정적, 부정적 결과를 모두 인정하는 일 -기업이 지배하는 먹을거리 체계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을 손상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 은 자유시장의 이념이 강력하고 사회에 널리 퍼져 있으면 어렵다. 



그림24.6 시리얼 선반에 있는 선택이란 환상. 많은 수의 시리얼 유형과 상표에도 불구하고, 주요 성분은 설탕과 몇 가지 기본 곡물이다. 먹을거리 체계를 둘러싸고 있는 이념적 체계는 소비자들이 이러한 선택을 권력의 한 형태로 찬양하고, 먹을거리 체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훨씬 많이 지닌 기업 행위자들의 중대함을 무시하도록 이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또는 그들의 사고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이념에 불편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부과한 어떤 것이라 생각해서이다. 그러나 대개 이는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신의 권력을 합법화하는 이념에게서 가장 많은 혜택을 얻는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이념의 요소들을 아무 의문 없이 받아들인다. 그들은 냉소적으로 자신이 아는 어떤 것이 거짓이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으며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일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더욱이 이념적 체계를 구성하는 사상과 신념은 일반적으로 단순히 "거짓"이라며 묵살될 수 없다. 대부분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즉, 사실은무엇이 그들을 아주 강력하게 만든다. 사상과 신념이 특정 현실을 덮어 감추고, 사회적 배치의 특정 구조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능력을 얻는 것은 이념적 체계의 다른 모든 요소와 이어질 때 뿐이다. 따라서 이념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고와 지각을 이끌기 위하여 그것이 사용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기에 강력한 효과를 지니는 모든 걸 에워싸고 있으며 대체로 보이지 않는 통합된 신념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념의 구성에 대한 사례가 이러한 사상을 설명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다국적 농식품 기업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는 스스로를 "농민과 소비자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여기고 있다. 표면적으로 그 진술은 진실하다. 이 회사는 농산물 원료를 가공하고 그걸 유통하는 데 중점을 두어서 농민과 소비자 사이의 "연결고리"라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다. 또한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의 최고 경영자가 자기 회사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신앙의 한 요소로 삼아 자랑스러워 하리란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진술은 반박의 여지 없이 이념적이다.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는 매년 소비자가 먹을거리에 소비하는 수십 억 달러를 농민이 아니라 회사의 소유자와 주주에게 돌아가도록 보장하는데, 연결고리로 봉사한다고 하여 그런 사실을 덮어 감춘다. 또한 아서 대니얼스 미들랜드는 1923년 창립 이후 이러한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는 과정에서 세계의 다른 어떤 기업보다 농업의 상품화를 촉진하고자 더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도 덮어 감춘다(Hauter 2012). 


이념은 더 잘 아는 사람들에 의해 속기 쉬운 대중에게 부과된 신념 체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사고를 길들이는 쳬계로 묘사하는 게 더 정확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념을 창출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그걸이용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당하지 않다. 그러나 세계의 먹을거리 체계에서 현행 체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가장 좋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이념으로부터 엄청나게 강력한 혜택을 받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광고와 홍보를 통하여, 그리고 앞서 언급한 동맹들의 교육, 자금 지원, 통치, 매체 활동 등을통해 이렇게 합법화된 이념의 요소들을 증진하고, 분배하고, 유지하며 강화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란 점도 사실이다. 이념이 먹을거리 체계에서 기능하는 방식에 관한 이런 현실들을 감안할 때, 가장 많은 권력을 지닌 농식품 기업과 사람들이 먹을거리 체계의 이념을 유지하는 데 분명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그들은 먹을거리와 농업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지키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것임). 그들은 항상 의식적으로 이를 하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이익과 일치하기에 그렇게 한다.  






불평등과 지속불가능성 사이의 연결

이번 장이 왜 인간 사회의 신념과 불평등 및 그 둘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왜 농생태학자인 우리가 이런 쟁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불평등은 그것이 수십 억 명에게 식량불안, 짧은 기대 수명, 낮은 삶의 질 등으로 드러나면 의심할 나위 없이 사회의 악인데, 그게 지속가능성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 질문은 농생태학 분야에서 농업의 권력과 이념의 함의에 대해 우리가 탐구를 시작하기 전에 직접 대답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번 장에 걸쳐서 "권력 구조"와 기업의 농업 통제를 1장에서 논의된 산업적 농법에 연결하여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실제로 다루었다. 이러한 연결 때문에 농업에서 불평등은 그것의 지속불가능성과 관련된다.


여러 모로, 불평등은 먹을거리 체계의 지속불가능성이란 측면의 직접적 원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토지에서 쫓겨난 농촌의 빈곤층은 생존을 위해 불모지에서 환경에 파괴적인 농법을 수행할 가능성이 더 많다(예, González de Molin 2013). 또한 이러한 빈곤의 이면 -산업국과 개발도상국에서 도시 소비자들의 상대적 풍요- 은 먹을거리 과소비와 낭비의 전제 조건이자 원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연결은 기아와 빈곤 같은 사회적 피해와 온실가스 배출과 토양 악화 같은 환경적 피해가 똑같은 근본원인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농업에서 불평등을 유지하고 악화시키는 농법들(독점 기술, 강화, 대규모 단작 등)과 이런 농법이 존재하는 곳의 경제 구조는 농업의 부정적 생태발자국을 가장 확장시키는 것과 매우 똑같다. 


또한 농업에서 기업이 식량 체제를 계속 지배한 사회적 결과는 그것의 생태적 결과만큼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예전에 세계의 농촌 지역에서 소농과 자급농에 종사하던 점점 많은 사람들이 기업들이(그리고 중국의 경우엔 정부가) 먹을거리 체계의 시장 역학으로 규정되는 우선순위를 적용함에 따라 자신의 토지에서 쫓겨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도시의 중심부에서 실업자나 노동빈곤층이 되어 이전보다 상황이 나빠지곤 한다(Holt-Gimenez and Patel 2009)(그림24.7). 그러한 추세는 특히 계속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회의 안정 없이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먹을거리 체계로부터 함께 발생하는 사회적, 생태적 피해는 그것의 지속불가능성이 명백한 위협이 될 때 미래로 체계를 인도한다. 



그림24.7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의 도시 주변 지역에 있는 쫓겨난 사람들의 주거지. 산업형 농업의 대규모 기계화된 체계가 개발도상국의 전통적 농촌 체계를 대체함에 따라, 사회적 및 생태적 비용이 모두 발생한다. 사회적 비용에는 이전 농민들이 산업형 농업 체계의 확장으로 자신의 땅에서 쫓겨나 적당하지 않은 고용 기회가 있는 도심지로 이주함에 따라 도시 빈곤의 증가하는 일이 포함된다.


  


이들 모든 관계의 근간에 있는 것이 먹을거리 체계의 근본적 측면이다. 그것은 식량 필요의 충족보다 부의 축적을 우선시한다. 농업노동자와 재배자부터 세계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체계의 모든 부분은 식물과 토양, 인간의 노동력, 기계, 화석연료 에너지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그것을 주주와 소유주에게 끌어올려 옮기는 과정에 참여한다. 이 체계에서는 이윤 창출이 필수적이라, 토양의 장기적 건강 유지, 건강한 먹을거리의 제공, 농장 노동자에 대한 공정한 대우 등을 포함한 모든 것을 무색하게 한다. 


부의 생성을 최대화하는 것은 특정 목표와 수단을 수반한다. 제조업 -산업형 농업의 모델- 과 마찬가지로 인건비절감, 원재료의 통제, 환경과 사회적 비용의 외부화, 최대한 생산을 효율화, 높은 가격의 유지 등을 통해 가능하면 최고의 이윤을 가져온다. 이런 목적과 수단으로부터 1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회적, 생태적 피해를 불러오는 산업형 농업의 관행들이 비롯된다. 부를 축적하고 이를 위에 집중시키는 먹을거리 체계의 경제 논리가 요구되는 한, 산업형 농업의 모델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산업형 농업이 먹을거리 체계를 지배하는 한, 세계의 빈곤층과 지구의 생명을 유지하는 체계는 계속 그것의 비용을 짊어져야 하고 결국 그 결과가 모두에게 미칠 것이다. 







농생태학의 관점을 확산시키기 

 

이번 장을 연 질문을 떠올려보자. 왜 인간 사회는 농업에서 지속불가능한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더 잘 대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 답은 상호연관된 부분들을 가진다. 


•현행 먹을거리 체계의 지속불가능성은 체계의 핵심 역학에서 많은 부분이 비롯된다. 그것은 사적 이윤의 추구 및 사회와 자연계(공공 영역)에 대한 비용 전가에 입각해 구성된다.  

•이윤 추구와 부의 축적을 우선시하는 체계이기에, 먹을거리 체계는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에게 불균형적으로 헤택을 준다. 그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생산과 유통 수단을 통제하며, 체계를 지배하는 기업을 소유한다. 

•모든 사람이 먹을거리 체계의 이러한 핵심 측면을 인식한다면, 먹을거리 체계는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평등을 일으키고, 권력과 부를 집중시키며, 먹을거리 생산이 의존하는 자연계를 악화시킨다.

•부분적으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체계가 기능하는 방식에 큰 몫을 가지기 때문에 신념과 사상의 체계 -이념- 가 먹을거리 체계를 중심으로 성장해 사람들이 그것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측면을 보지못하게 감추었다. 

•먹을거리 체계의 이념은 먹을거리 체계를 합법화시키기 위해 작동하여,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만들고 그 지배력에 심각한 도전으로 연합될 수 있는 사고의 종류를 체계적으로 제한한다.  


이런 부분들을 종합하면, 우리는 농생태학자들과 동맹한 분야의 사람들이 이 궤도가 아무도 바라지 않는 미래로 인도할 것이라고 지적했음 -확실한 증거로 뒷받침되었음- 에도 불구하고 왜 먹을거리 체계가 현재의 궤도에 계속 머물러 있는지 알 수 있다. 먹을거리 체계를 합법화하는 이념적 체계가 도전을 받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한, 그리고 먹을거리 체계가 그것을 유지하고 이념적 체계가 의존하는 표면 수준의 혜택을 넘겨주는 이윤을 계속하여 생성할 수 있는 한, 그것은 현재의 길을 계속 갈 것이다. 


이 결론은 한 분야로서 농생태학에 대한 뚜렷한 함의를 갖는다. 농생태학이 먹을거리 체계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한다면, 생태학의 관점에서 그 체계의 지속불가능한 특성을 지적하거나 더 지속가능한 기술을 설게하는일 이상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의 먹을거리 체제를 보호하는 이념적 체계에 도전해야 하고, 먹을거리 체계가 운영되는 방식의 핵심에 놓여 있는 권력의 집중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Holt-Gimenez and Patel 2009; González de Molin 2013).  






세계 먹을거리 체계를 비합법화시키기

앞서 논증했듯이, 신념과 가정의 체계 -이념적 체계-  는 도전으로부터 기업이 지배하는 먹을거리 체계를 격리시킨다. 이는 주로 먹을거리 체계에 대한 기업의 통제와 산업형 농업의 관행을 완전히 합법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이루어진다. 즉, 공익을 증진하기 위해 올바르고, 적절하며, 필요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먹을거리 체계가 나아갈방향을 바꿀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먹을거리 체계와 그 현상 유지를 보호하는 이념적 체계의 신념과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 있다. 이런 방식으로 먹을거리 체계는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비합법화되고 이해될 수 있다. 먹을거리 체계의 이념에 구명을 뚫는 직접적인 방법은 그 본질을 구성하는 당연시되는 가정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들 가정에는 다음과 같은 게 포함된다.  


•먹을거리가 충분하다면, 누가 어떻게 우리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수확량은 먹을거리 필요의 충족을 검토할 때 고려해야 할 유일한 변수이다. 

•전 세계의 먹을거리 부족은 현대의 농업 기술과 서구식 시장을 비효율적이고 불안전하게 적용한 결과이다.

•기아를 없애기 위하여 농업 생산성이 증가해야 한다. 

•세계의 도시 거주자의 소비가 경제 성장을 추동하기에, 그들이 더 많을수록 좋다.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하기 위한 노동 -흙으로 누군가의 손을 더럽히는 일- 은 모든 사람을 해방시켜야 할 천역의 한 형태이다. 

•우리의 시장에 기반한 경제에서 경쟁은 먹을거리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생산되게 하여 가격을 낮추고 공급을 늘리는 걸 보장한다. 

•소비자의 수요와 시장은 먹을거리 생산자가 하는 모든 것을 추동하고, 그것이 옳다. 

•농업 영역에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 


이와 같은 가정들에 도전하는 건 두 가지 수준에서 일어난다. 첫째는 개인적이고 내부적인 수준이다. 당신은 특정 가정이 현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당신의 사고를 제한하고 현실을 불완전하게 묘사하며 당신의 사고를 제한하는 더 큰 이념적 체계의 일부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두 번째 수준은 외부적이고 명확히 정치적이다. 공공 영역에서 가정을 논박하고, 그것이 까발려져야 할 권력의 관계를 숨긴다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런 권력 관계가 실제로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하며, 의식적으로 먹을거리 체계에서 당신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인터넷 자료와 읽을거리에 열거된 자료 가운데 일부는 이 두 수준에 모두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념적 체계에 도전하는 일은 늘 어렵다. 도전을 받고 있는 신념을 보유한 사람은 명백한 이유로 자신의 세계관이 뒤집힐 때마다 저항할 것이고, 당신이 뚜렷한 전망을 지니고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당신이 오만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산업형 농업을 지지하는 이념적 체계에 대하여 비판적 관점을 취하는 것은 당신이 그 체계의 외부에 있으며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지는 않다. 또한 그것이 당신이 다른 이념적 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수반하는 건 이념에 대한 자각과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사람들의 사고(당신 자신을 포함하여)에 영향을 미치는 체계적 방법과 권력의 관계에 기반한 체계를 지원할 때 담당하는 역할- 이다.  






먹을거리 체계를 바꾸기

먹을거리 체계에 대한 심도 있는 정치적 분석과 그것을 보호하는 이념에 대한 이해는 체계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하긴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다. 일단 근본적인 쟁점을 이해하고 나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와 전략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정치적 분석과 비판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치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학술 분야나 학과 이외에도 농생태학이 사회운동이 되도록 만드는 농생태학의 목표와 관점의 상당한 확장을 수반한다. 


사회와 먹을거리 체계의 구체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느리고 점진적일 수 있지만, 현행 세계의 먹을거리 체계와 그것의 기업 통제, 산업형 농업 관행에 대한 의존을 비합법화하려는 노력을 지원하는 중요한 효과가 있다. 진정한 대안들이 만들어짐-또는 제안되고 옹호되기만 해도-에 따라 사람들은 현행 체계의 결함을 더 쉽게 볼 수 있고, 먹을거리 체계 전체가 다르게 구조화될 수 있다고 인식할 수 있다. 


농생태학이 먹을거리 체계를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회운동으로서 채택해야 할 전략과 목표를 수립하는 건 큰 주제이다. 우리는 이 주제를 다음 두 개의 장에서 더 깊이 탐구할 것이다. 농생태학에서 사회운동 접근법의 기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농민이 만든 농생태학 지식에 의존하라. 어떻게 이런 지식이 산업형 농업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는 더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부분인지 이해하라(Altieri 2004; Altieri and Toledo 2011; Gliessman 2013; Martinez-Torres and Rosset 2014) 

통학문적 접근법을 채택하라.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학문과 지식 체계(토착 지식과 전통지식을 포함한)를 연계하고 통합하라(Wilken 1988; Altieri 2004; Fish et al. 2008; Francis et al. 2008; Méndez et al. 2013). 

연구와 활동을 통합하라. 현실적 연구가 사회 변화의 노력을 알리는 반복적 과정에 적극적인 참여자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참여시키고, 그러한 노력이 더 많은 연구 등등에 영감을 주는 새로운 지식으로 이어진다(Bacon et al. 2005; Eksvärd et al. 2009; Méndez et al. 2013). 

오늘의 축소판에서 내일의 먹을거리 체계를 구축하라. 지역사회 지원 농업과 기타 수단을 통하여, 생계 수단으로 농사를 활성화하고 소비자와 농민을 서로 더 가깝게 만드는 지역의 먹을거리 연결망을 창출하라(25장 참조). 

먹을거리 정책에 대한 대중의 의식을 높인다. 사람들이 소비자 감성을 극복하고, 모든 소비 행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결과를 자각하는 먹을거리 시민이 되도록 장려한다(25장 참조). 

먹을거리 정의 운동을 발전시킨다.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통해, 현재의 대안 먹을거리 운동이 모든 사람에게 저항과 먹을거리 정의를 위한 힘이 될 수 있다(Borras et al. 2008; Goodman et al. 2011).


엄청나게 탄력적인 사회경제적 구조에 먹을거리 체계가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이해하여 불안을 일으킨 결과는 근본적인 방식으로 먹을거리 체계를 변화시키는 일이 매우 어려울 것이란 인식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인간이 자연과 토지, 자원, 지구의 생물상 및 서로서로 관련되는 방식을 바꾼다는 걸 의미하기에, 먹을거리 체계를 바꾼다는 건 큰 명령이다. 하지만 인류가 기후변화와 광범위한 생태적 붕괴, 인구 증가로 야기되는 과제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려면 이들 관계가 어쨌든 변화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농생태학은 장기적인 인간 생존을 목표로 하는 더 큰 운동의 일부이다. 






포섭을 피하기

기업이 지배하는 먹을거리 체계는 변화에 대한 요구를 진정시키고 흡수할 수 있는 엄청난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표면적인 수준에서 요구를 충족시키고, 체제의 더 근본적인 특징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운동의 맥이 빠지게 충분한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포섭 과정을 통해 수행된다. 유기농 먹을거리 운동이 좋은 사례이다(Guthman 2004). 유기농업이 비롯된 운동이 중대한 도전의 근원으로 남아 있을지 몰라도, "기업의 체제"는 유기농으로 재배된 먹을거리에 대한 요구를 개인의 건강과 선택의 문제로 전환시켜 운동의 모든 에너지를 그 영역으로 보내고 먹을거리는 어떤 종류의 투입재든지 더 적게 쓰고 더 작은 규모로 재배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요구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포섭의 직접적 신호는 대부분의 유기농 재배자, 유통업자, 가업업자가 더 큰 농식품 기업에 매입되어 유기농 식품이 소비자의 선택 가운데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Howard 2009; 그림24.4 참조).이는 진정으로 근본적 방식으로 체계를 바꾸지 않고도 대부분의 소비자를 만족시킨다. 먹을거리가 유기농 인증의규칙에 따라 생산되지만, 그럼에도 그건 산업적 생산의 궤도에 들어가 버렸다. 대규모의, 집약적이고, 주로 다양성이 부족하며, 투입재에 의존한다(그림24.8).



그림24.8 유기농 당근을 심고 대체 투입재로 관리되는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카운티의 쿠야마 계곡에 있는 대규모 농경지. 이 작물은 "유기농"의 법적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만, 산업형 농업의 기본 방식에 따라 생산된다. 




먹을거리 체계에 대한 심도 있는 정치적 비판의 권력은 그것이 포섭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심도 있는 정치적 비판은 전체 체계의 변환 없이는 변경할 수 없는 체계의 근본적 특성 -부의 집중, 불평등한 권력의 분배, 이윤 창출의 피할 수 없는 사회적 및 생태적 비용- 에 초점을 맞춘다. 더 건강한 먹을거리, 또는 농약 없이 생산한 먹을거리에 대한 요구는 기업의 먹을거리 체제에 의해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대지에 살며 대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먹을거리 생산을 되돌리라는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 후자와 같은 유형의 요구는 기업의 먹을거리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권력을 보유한다. 그것은 먹을거리 체계의 이념적 은폐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대안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다른 관점인 대안적인 패러다임을 활성화한다.  










생각거리


1. 이른바 "녹색혁명"은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업의 일부 부문에서 상당한 작물 수확량을 가져왔지만, 오늘날 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의 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왜 녹색혁명은 기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가?


2. 웬델 베리는 자신의 저서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1990)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먹는 건 농업의 행위이다. ... 거기엔 어떤 정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유가 포함된 먹을거리의 정치가 있다. 우린 아직(때로는) 우리의 마음과 목소리가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는 먹을거리와 그 근원이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면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이해하는 일을 게을리했다. 먹을거리에 대한 소극적인 소비자의 상태는 민주적인 상태가 아니다. 책임감 있게 먹는 한 가지 이유는 자유로이 사는 것이다." 베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3. 농생태학자들은 과학에서 배우듯이 농민에게 배울 것이 많다. 농민들은 순수하게 과학적 연구에서 얻기 어려운 먹을거리 체계를 더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에 관한 어떤 종류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가?


4. "먹을거리 민주주의" 활동에 대한 사례를 기술하라. 당신이 직접 경험한 것(예, 지방 선거)이나 당신이 읽은 것에 관한 내용일 수 있다. 당신의 사례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번 장에서 설명된 깊은 의미에서 그 사례는 어느 정도까지 농업을 정치화했는가? 


5. 패러다임의 전환은 중요한 이념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이야기된다. 먹을거리 정의가 먹을거리 체계의 패러다임전환 가운데 일부가 되기 위해서, 이념에서 어떤 종류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


 








인터넷 자료


Civil Eats 

http://www.civileats.com 

Civil Eats is a daily news source for critical thought about the American food system. It publishes stories that shift the conversation around sustainable agriculture in an effort to build economically and socially just communities. 


Food Democracy Now! 

http://www.fooddemocracynow.org 

A grassroots movement of more than 650,000 farmers and citizens dedicated to building a sustainable food system that protects our natural environment, sustains farmers and nourishes families through the organization of both online campaigns and in-person actions across the country. 


Food First/Institute for Food and Development Policy 

http://www.foodfirst.org

The Institute for Food and Development Policy/Food First analyzes the root causes of global hunger, poverty, and ecological degradation and develops solutions in partnership with movements working for social change. 


Food Politics by Marion Nestle 

http://www.foodpolitics.com 

The blog site for Dr. Marion Nestle, one of the world’s leaders in linking nutrition and health. Her research focuses on how science and society influence dietary advice and practice. 


Global Development and Environment Institute at Tufts University, Medford, MA 

http://www.ase.tufts.edu/gdea

An academic research center that emphasizes ecological health and the correlation between social and economic well-being. Recent work has focused on what is required to promote socially and environmentally just and sustainable development. 


Organic Consumers Association 

http://www.organicconsumers.org

Through this website, the OCA publishes a weekly newsletter (“Organic Bytes”) aimed at educating consumers about issues of health, justice, and sustainability in the food system, and how being an organic consumer can motivate change.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http://www.ucsusa.org/food_and_agriculture/

A direct link to the food and agriculture programs of this important organization. UCS is a leader in efforts to transform US agriculture in a sustainable and healthy direction. Their expert analysis provides a scientifically grounded perspective that helps shape better food policy.







읽을거리


Elton, S. 2013. Consumed: Food for a Finite Planet.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IL. 

An in-depth exploration of the corporate takeover of the soil and the seeds of our food system that is balanced with a powerfully hopeful set of stories of how we can replace the industrial food system with something that makes sense for the planet and its people. 


Gottlieb, R. and A. Joshi. 2010. Food Justice. MIT Press: Cambridge, MA.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the food policy literature that describes in detail why the current food system is unjust to everyone from farmworkers to food eaters, and the political action needed to bring justice, fairness, and real health to all communities. 


Hauter, W. 2012. Foodopoly: The Battle over the Future of Food and Farming in America. The New Press: New York. 

A compelling account by a food activist of how our food systems have been captured by corporate agribusiness, the food crisis this has generated, what we can do about it, and the urgency for effective action. 


Patel, R. 2008. Stuffed and Starved: The Hidden Battle for the World Food System. Melville House: New York. 

A penetrating exposé of the power struggles going on in world food systems, with a focus on tracing the development of the current social and economic injustices that have been cre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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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1


중세에서 보는 쌀과 고기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중세라는 시대

일본의 중세는 국가 지배가 성립을 보았던 고대와 그 체계가 완성을 보았던 근세의 사이에 끼어 있던 시대이며, 고대와 근세가 통일집권적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지방분권적인 성격이 짙은 사회였다. 즉 중세 전기에는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라는 율령제의 토지 소유와 사적 대토지 소유인 장원제가 병존하여, 율령법 이외에도 장원법이란 이중 규범이 존재했다. 또한, 그 이후 시기에는 수호守護 다이묘1와 전국戰國 다이묘2가 이른바 다이묘 영국제領國制3를 시행하여, 그것이 이윽고 분국법分國法을 가지는 데에 이르는 등 통일적인 확고한 정치체계가 존속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지극히 대략적인 개념 규정에 따라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는 권문체제라는 지배양식이 채택되고, 경제적으로는 장원공령제莊園公領制라는 사회 체계가 중세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즉 쿠게公家, 부케武家, 지샤케寺社家가 각각 국가 의식儀式, 군사경찰, 종교행사를 담당하여 분담하는 것과 동시에 각각이 상호보완적으로 정치체제를 지탱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케가 돌출해 나온 시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상급 부케를 지배하는 사무라이들이 장원과 국아령國衙領4 등의 단위에서 재지영주제라는 지역 지배를 행하는 것과 함께, 그들을 통할하는 형태로 쿠게, 부케, 지샤케가 정점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중세란 각지에 독자적 정권이 존재할 수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했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적이라고 하여 중세 일본에서 국가 그것이 분열되어 있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또몇 가지 우여곡절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적 가치관의 방향성이라는 점에서는 일관성을 찾을 수 있다. 즉 쌀에 대한 고집과 고기의 배제였는데, 그것은 꽤나 오랜 시간을 거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오히려 중세라는 시대를 거치며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라는 대항관계가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와 일본의 특수성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쌀과 고기는 모순 없이 공존한다. 쌀은 습윤온난한 기후를 좋아하기 때문에, 상당한 물을 필요로 한다. 논에는 물을 담을 수 있는 외에, 비탈의 화전 벼농사 지대에서도 우기에 내리는 방대한 비가 중요하여, 골짜기의 저지에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하천과 호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물고기가 있어, 이들은 쌀과 한 묶음이 되어 벼농사 지대에서 식생활의 기본을 이루어 왔다.

게다가 한 시기에 대량으로 확보된 어류는 이것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 어장이란 맛있는 조미료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사용하여 맛을 내는 것이 조리의 주류를 이룬다. 이 어장이 대두의 발상지라고 생각되는 중국의 강남을 통과할 때 어쩌면 물고기 대신에 대두를 사용한 곡장을 만들어내, 이것이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어장과 함께 널리쓰이는 조미료가 되었다. 중국 및 조선반도에서는 곡장, 어장은 활발히 사용되어, 예를 들면 조선반도의 김치 담그기에서는 젓갈이란 어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다만 일본에서는 이미 고대에 어장에서 곡장으로 전환이 진행되었는데, 그래도 노토 반도의 이시루아키타의 숏츠루 등으로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즉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사회에서는 쌀과 물고기가 주요한 식량인데, 그밖에도 중요한 동물성 단백질원이 존재했다. 그것은 돼지로, 논벼농사와 함께 쉽게 사육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중국 등의 희생 공물에는 돼지가 쓰이는 일이 적지 않아, 돼지고기를 함께 섞어 지은 밥은 중요한 의례 음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의 벼농사 사회에서는 이 돼지가 빠지는 매우 진귀한 현상이 발견된다. 이 의미에서 일본의 쌀 문화는 상당히 색다른 모양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최근 동물고고학의 성과에 의하면,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도 돼지가 사육되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야요이 유적에서는 멧돼지가 아닌 돼지의 유골이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다. 즉 논벼농사의 수용에 따라, 틀림없이 돼지의 사육법도 이입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요이 사람들은 논벼농사를 행하며, 물고기와 함께 돼지도 식용으로 제공했다고 생각되는데, 어느 시대부터인가 육식의 금기가 재앙을 피하기 위한 조건이 되었다. <위지魏志 왜인전>에는 왜인은 금기와 재계 등을 할 때 고기를 멀리한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분 시대 이후에 더욱 일반으로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돼지뼈의 출토 사례가 감소하는 일이지적된다. 어쨌든 논벼농사를 행하면서 간단하게 사육할 수 있는 돼지의 식용이 서서히 감소했던 걸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다이카大化 전대의 관제에는 저사부猪飼部 같은 부민제도가 보이며, 저사야猪飼野라는 지명 등이 남아 있는 바로부터 정치 체계의 일부에서나 돼지의 사육이 여전히 행해졌다는 데에는 주목할 만하다.


고대에 이루어진 쌀의 추진과 고기의 부정

문헌 사료에서 육식의 부정이 명확해진 건 고대 율령국가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덴무天武 천황 4년(675) 이른바 육식금지의 조칙이 나와 소, 말, 개, 닭, 원숭이에 대해서는 4월부터 9월까지 죽이거나 먹거나 하지 말라는 성지가 명령으로 내려진다. 그러나 일본인이 가장 먹어 왔던 동물은 사슴과 멧돼지였다. 니쿠는 육肉의 음독이며 그 뜻은 고기인 점에 유의하면, 이것은 그 자리에서 납득되는 듯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 이 법령을 엄밀하게는 육식금지령이라 부르는 데에 무리가 있다.

소와 말은 물자의 운반과 노동력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개와 닭은 가까운 가축이다. 또 원숭이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로, 사냥꾼들도 원숭이를 공격하는 일에는 저항감이 있다고 한다. 모두 식용과는 관계가 먼 동물들이다. 게다가 금지 기간이 4-9월이란 것도 주목해야 할 점으로, 이것은 논벼농사의 농경 기간에 해당한다. 또한 이 조칙과 동시에 덴무 천황은 앞으로 풍해로부터 벼를 지키기 위한 타츠타龍田 풍신風神과 농업용수를 관장하는 히로세広瀬 수신水神의 제사를 매년 행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더욱이 이 조칙의 2년 전에는 농사지을 때는 논농사에 열심히 일하고 '미물美物'(고기를 포함한 요리)과 술을 삼가하도록 하며, 그 16년 뒤에도 장마가 이어졌기 때문에 관리에게 '술과 고기(酒宍)'를 끊게 하고 승려에게 경을 읽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하여 비가 그치고 벼가 열매를 맺는다고 믿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덴무 천황 4년의 조칙은 육식금지령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살생금단령이라 할 만한 것으로, 동물의 살생을 경계함으로써 논벼농사가 원활히 추진되는 걸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고대 율령국가는 반전수수법班田收受法을 채용하고 밭을 고려하지 않고 논만 조세의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채택해,쌀을 그 사회적 생산기반으로 자리잡도록 했다. 그 때문에 100만 헥타르의 논 개간 계획을 세우거나, 삼세일신三世一身5의 법과 개간한 농지의 영세사재법永世私財法을 정하여 쌀 중심의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국가의 정점에 선 천황은 최고의 벼농사 제사자로서 쌀을 천계에서 지상계로 전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황조신으로 삼고 그 신에게 감사하며 쌀의 풍작을 기원하기 위한 신상제新嘗祭를 해마다 집행하는 존재가 되어, 쌀은 신성한 먹을거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고기는 벼농사의 장해가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불결한 존재로 차츰 부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물론 육식 그것을 부정하는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에도 실제로는 육식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육식이 불결함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겨진 것도 사실로서, 관리라면 궁중으로 입궐할 때는 육식을 금하고, 일반 사람들도 신사에 참배할 경우에는 일정 기간만 육식을 행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관청에서도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연희식延喜式>6부터는 육장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대 율령국가는 겉으로는 고기를 금지했는데, 그 배경에는 논벼농사의 추진이란 사정이 있어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라는 도식이 성립한 것이다.


중세의 쌀과 고기의 상극

신성한 쌀에 의한 불결한 고기의 부정은 중세라는 오랜 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사회적으로 침투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명월기明月記>에는 사무라이들이 열심히 육식을 하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외에, 귀족에서도 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천하게 간주되고 있다. 물론 에외는 있는데, 장원 영주인 귀족과 승려는 연공으로 쌀을 입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쌀을 좋아하고 고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상층계급 정도는 쌀을 먹고, 하층계급 정도는 고기를 식용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세를 거치며 논 개간은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흉작과 기근도 드물지 않았다. 쌀의 생산을 위해서는 한해와 수해에 강하고 일찍 익으며 거름이 적게 필요했던 적미赤米(점성미, 대당미, 당법사)가 도입되어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연공미가 되지는 않았고, 흰쌀만을 상납하고 적미는 농민의 식용으로 쓰였다. 또한 장원 영주와 재지 영주들은 장거리 용수로를 뚫거나 하여 농업생산력의 확대를 도모했는데, 농민들 대부분은 밭작물에 의지하거나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 동식물 등을 식재료로 구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카마쿠라 시기에는 쌀을 수탈하는 입장에 있는 장원 영주들은 남도불교南都仏教와 천태·진언의 옛 불교에 의지했는데, 반대의 입장에 있는 농민은 법연法然과 신란親鸞 등이 주도했던 새로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법연은 신자가 고기를 먹는 일은 나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방법이 없는 일이라고 답한다. 또 신란의 정토진종 문도에는 장사꾼과 사냥꾼 등 논벼농사 이외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고, 제자인 유이엔唯円이 이야기했던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은 어쩔 수 없는 살생을 계속하는 사냥꾼들조차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는 그대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식생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기에 의한 불결함 의식은 중세에 뚜렷하게 사회적으로 침투했다. 물론 불결함은 육식만이 아니라 죽음과 태어남 등에도 관계되는 것인데, 고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꺼리고 혐오하게 되었다. 중세에는 신사 등에서 물기령物忌令이라 부르는 규정이 정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육식의 경우에는 사슴고기를 먹으면 100일 동안 불결하다고 하여, 그동안은 신사에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더구나 이 불결함은 전염되는 것이라 생각해 A가 사슴고기를 먹으면 물론 100일 동안 불결한데, 그 지인 B가 불결한 동안에 마찬가지로 불로 조리한 것을 먹는다고 하면 B는 21일 동안 불결하게 된다. 게다가 A와는 전혀 관계 없는 C가 B가 불결한 동안에 마찬가지로 함께 식사하게 되면 C까지 7일 동안 불결하게 된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고대에도 불결함은 의식되었지만, <연희식>에서 사슴고기의 육식은 3일 동안 불결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중세에는 100일까지 확대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에게까지 불결함이 전염된다고 간주된 건 육식에 대한 기피가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중세라는 시대를 거치며 신성한 쌀이 불결한 고기를 쫓아낸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논의 양적 확대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벼농사 기술도 진보하여 질적 향상이 뚜렷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고기를 얻기 위한 수렵은 점점 쇠퇴의 길을 가고, 사회적인 규모에서 육식의 금기의식이 높아졌다. 


근세의 쌀 사회의 성립

고대 율령국가가 지향했던 쌀을 사회의 생산적 기반으로 삼는 이상은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했던 중세 사회를 빠져 나가서 근세 막번幕藩 체제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서 천하통일을 실현했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이른바 타이코우太閤 검지檢地 정책을 실시하여 병농분리에 의한 사무라이와 농민의 거주지 분리에 성공했다. 즉 정치의 지배거점인 도시=성시에는 사무라이가 살고, 농업생산의 현장인 각지의 마을들에는 농민만 거주하는 정치적 행정촌이 되었다. 검지 실시에 의하여 마을마다 생산력을 파악하고, 논만이 아니라 밭도 대지도쌀을 기준으로 한 수확량으로 표시하도록 하며, 모든 것을 쌀의 견적생산력으로 치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원칙을 세워 쌀로 연공을 납입하도록 의무화되었다. 마을의 수확량만이 아니라, 다이묘의 경제력도 모두 쌀의 계량 단위인 섬으로 환산하게 되었다. 이른바 석고제石高制라는 경제 체계가 완성되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고대 국가의 이상 실현이라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히데요시 사후, 패권을 장악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치적으로는 막번 체제라는 막부와 번에 의한 지배 체계를 구축하여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쌓아 올렸는데,  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 바로 신성한 쌀이었다. 

막부는 강대한 권력을 배경으로 새로운 논 개발 정책을 실시하고, 대규모 개발사업을 실행했다. 논과 밭이 맞버티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중세와는 달리, 근세 중기에는 논이 밭을 상회하게 되었다. 중세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적미는 17세기 무렵에는 어지간히 쫓겨나고, 논 생산력은 중세에도 증가하여 향상했다. 근세의 말기에는 일찍이 벼농사를 전해 주었던 조선반도보다 재배기술이 뛰어나 파종량은 동시기의 조선보다 훨씬 적어도 완료되는 상황이었다. 그 배경에는 마을마다 농민들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기술의 향상에 노력하고, 그 토지마다 적합한 농업생산의 이상적 방식을 연구하여 방대한 농서를 남기는 등, 마을 수준에서 열심히 쌀농사에 힘쓴 사실이 있다. 

이 때문에 육식에 대한 금기는 최고조에 이르러, 마을마다 고기를 먹으면 눈이 보이지 않고 입이 돌아간다는 등 미신이 퍼졌다. 또한 동물의 처리에 관련된 사람들을 백정으로 차별하는 불합리한 신분제도가 엄격해졌다. 그 대신 쌀은 불사리에 비유될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중시되어, 쌀밥이 무엇보다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중세란 이러한 쌀 사회를 준비하는 오랜 기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의 직책 이름인 수호는 원래 각 지방의 치안과 경비 등을 담당했으나, 이후 강대해지며 영주화되었다. [본문으로]
  2. 100년 동안 전국시대가 계속되면서 수호 다이묘를 쓰러뜨리고 스스로 다이묘가 되어 새로운 영국의 지배자가 된 전국시대의 다이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제후가 영토를 소유하는 제도. [본문으로]
  4. 장원이 아닌 정부 소유의 땅. [본문으로]
  5. 새로 관개 시설을 만들어 경지를 개척한 자에게는 본인·아들·손자의 3대 동안, 기존의 관개 시설을 이용한 자에게는 본인 1대에 한하여 그 경지의 보유(사유)를 인정한 것. 이는 한정된 기간이기는 하였으나 공지공민제의 원칙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헤이안(平安) 시대의 율령 시행 세칙.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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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4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풍토 

        -풍토론의 가능성을 열며          쿠라타 타카시鞍田崇






풍토는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를 꿰뚫는 핵심어의 하나이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과 그 주변의 각지에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또 기후와 지형 같은 자연조건과의 관련 안에서 자연히 그 성격을 형성해 온 것이기도 하다. 풍토란 우선 그처럼 다양한 문화의 성립에 관련된 자연조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풍토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먼저 떠올리는 건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주저 <풍토>(1935)일 것이다. 이 책에서 와츠지는 문화 생성의 외적 제약이 되는 단순한 자연조건인 풍토가 아니라, 자연환경과 인간활동의 상관성을 명시하는 풍토라는 독자적 시점을 제기한다. 와츠지는 사회와 개인, 공간과 시간, 신체와 정신 같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에 주목하여 이들 두 항목의 어느 쪽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쌍방을 연결하는 이중성을 이중성으로 떠맡는 '사이(間)' 혹은 '관계()'란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독자의 윤리학을 수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和辻 1934). 그의 풍토 개념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바로 그러한 '사이'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론에서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생업문화, 특히 농경과 그 역사가 풍토와 어떻게 관련된 것인지를 요즘의 지구환경문제도 응시하면서 그려본 것인데, 다른 면에서 각 권의 제목에 '계절풍' '사막' '목장' 같은 와츠지의 풍토론 용어를 채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을 비교문화론적인 시점에서 눈여겨 본 그의 시선을 실마리로 삼는다. 따라서 시리즈의 시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와츠지가 말한 풍토란 어떠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확인함과 함께, 지금 풍토를 문제 삼는 의의와 그 가능성에 대하여 약간 검토해 두는 건 쓸데없지 않을 것이다.


와츠지의 원풍경原風景과 풍토론  

와츠지로 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그의 온화한 풍모이다. 특히 만년의 용모이다. 만년의 와츠지 데츠오를 찍은 사진은 몇 장 있는데, 그중에서 유명한 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가 촬영한 서재에서 서성거리는 와츠지의 사진일 것이다. 수북이 쌓인 도서의 그림자 너머로 겨우 어깨를 웅크리고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노인이 그곳에 있다. 그 시선이 참으로 온화하여 어딘지 천진난만할 정도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드러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온화한 풍모는 아무리 봐도 온화한 하리마播磨 출신의 사람다운 데가 있다. 더구나 도시민보다는 교외의 마을 사람다운 목눌한 멋이 있다. 와츠지 데츠로의 풍모는 하리마의 농촌 풍토에서 배양된 그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와츠지의 의론에서 생업문화, 특히 농경에 관한 기술이 표면화하지 않았다고 기술했지만, 이것은 약간 졸속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풍토>에서는 농경을 시작으로 하는 생업문화는 주제로 논하지 않는다. 그의 직접적 관심은 예술과 종교의 풍토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와츠지는 농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반슈播州 히메지姬路의 교외에 위치한 농촌, 옛 니부노仁豊野 마을에서 태어난 그에게 차라리 농경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노동활동이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장 만년에 저술한 <자서전의 시행(自叙伝の試み)>(1961)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파도가 밀려오기 직전, 1887-1906년(메이지 20년대부터 30년대) 지방 가정의 정경 -즉 차 덖는 일부터 베짜기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대부분의 용품을 직접 제조하여 마련하던 과거의 지방 가정의 모습이 참으로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농경에 관한 기술도 빈번하게 나온다. 예를 들면, 어린 와츠지의 눈에 비친 이런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아이인 나의 기억에는 모내기가 끝나기까지는 마을사람들이 별로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노동의 괴로움을 뚜렷하게 보인 건 모를 내고 1-2주 뒤에 시작하는 논의 김매기 노동이었다. 그것은 7월 중반부터 8월 상순에 걸쳐서 여름의 삼복 시기로, 그 기간에 심은 모의 뿌리 주변의 흙을 뒤집어서 잡초가 번성하는 걸 방지한다. 이 김매기를 3번쯤 반복하는 사이 벼는 맹렬한 기세로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경작자들은 땡볕 아래의 논 안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것을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 논의 옆에서 보고만 있지 못하고, 역시 마을 의사의 아들로서 이 노동으로 생기는 급병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위, 즉 일사병의 여러 가지 형태였던 것 같은데, 대개는 밤중에 명렬한 복통 등을 일으키고 너무 급하면 의사를 부르러 왔다. 논의 김을 매는 계절에는 매일 밤 한 명이나 두 명의 급병인이 발생했다. 그러한 관계로부터 나에게는 농경 노동 가운데 논의 김매기가 가장 맹렬한 노동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와츠지 데츠로 <자서전의 시행>)

와츠지의 생가는 '경작자'가 아니라 마을에 유일한 의사의 집이었다. 그 의미에서 농작업을 경험한 그의 시선은 결국 방관자의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환자의 대부분이 농가였던 '마을 의사'의 아들이었다면, 농업이 정말로 자연과 대치하는 인간활동이란 것을 일상적으로 깊이 느끼지 않았을까. 성인들의 가혹한 농경 노동을 지켜본 어린 와츠지의 긴장감은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이란 문장 안에도 남아 있다.

<자서전의 시행>에서 적고 있는 니노부의 일상은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의 원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부키와 아야츠리조우루리(操浄瑠璃)>를 시작한 뒤 그의 저작에는 니노부에서 보낸 어린 나날의 실제 체험에 근거한다고 생각되는 주제와 에피소드가 때때로 얼굴을 내민다. <풍토>도 또한 그렇다. 예를 들면, 앞에 인용한 것 같은 일본 농작업의 가혹한 '김매기'에 대해서는 <풍토>의 안에서도 유럽의 목장 같은 풍토의 특성을 일본의 풍토 그것과 비교하며 다음처럼 기록한다.

이처럼 (유럽에서) 여름의 건조함과 겨울의 습윤함은 잡초를 몰아내 온땅을 목장답게 한다. 이것은 농업 노동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농업 노동의 핵심을 이루는 건 '김매기'이다. 잡초의 제거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경지는 금세 황무지로 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김매기는 특히 '논의 김매기'란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일본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 -따라서 일본의 주택 양식을 결정하는 시기, 즉 폭염이 가장 심한 삼복 무렵에 꼭 그때를 번성기로 삼는 꿋꿋한 잡초와 싸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 싸움을 게을리하는 건 농업 노동을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마침 이 잡초와의 싸움이 필요하지 않다. 토지는 한번 개간되면 언제까지나 고분고분한 토지로 인간을 따른다. 틈을 보아 스스로 황무지로 전화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농업 노동에서는 자연과의 싸움이란 계기가 빠져 있다.

'김매기'를 잡초와의 '싸움'이라 하고, '일본 농업 노동의 핵심'이라 하는 와츠지의 기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사실을 전한다. 그렇지만 이 조금 단언적인 기술의 배경에 풀섶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여름의 니노부의 논두렁에서 어린 그가 숨을 죽이고 응시하던 광경이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와츠지의 <풍토>가 이 책을 집필하기 직전 유럽에 유학할 때의 견문에 기반하여 생생한 기술로 가득하다는 것이 이 책을 펴서 읽으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위의 두 가지 인용에서도 명확하듯이, 그 시선의 근저에는 유아기부터 소년기에 걸쳐서 그가 목격한 일본 농촌의 기억이 원풍경처럼 가로놓여 있다. 분명히 와츠지는 <풍토>에서 농경을 주제로 논하지 않았지만 유럽이든, '사막'이라 불리는 건조와 반건조지대이든 각각의 지역과 그 문화적 특성의 비교검토는 자신의 원풍경에 근거한 농경문화라는 시점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경문화론으로서 풍토론은

<풍토>의 권두에서 와츠지는 "인간 존재의 구조 계기로서 풍토성을 밝히는 일"을 이 책의 목적으로 하고, 그 구상의 배경으로서 베를린에 유학하며 우연히 만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든다. 즉 <존재와 시간>이 인간의 '주체적 존재 구조'로서 시간성을 논하면서도 공간성의 문제가 완전히 다루어지지 않는 것에 불복한 와츠지는 <존재와 시간>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풍토성이란 개념에 착목한 것이다. 사상사적으로는 이후에 레비 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1962)로 갔듯이, 시간에서 공간으로 좌표를 전환하는 것을 재빨리 시도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中村 1989).

그렇지만 이러한 점으로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오로지 추상적인 철학적 의론으로 가득찬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 <풍토>의 제1장 '풍토의 기초 이론'에서는 하이데거도 관여하는 당시 더없이 융성했던 현상학에서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에 관한 분석을 근거로 한 이론적 고찰이 전개되며, 말년의 대저 <윤리학>의 하권(1949)에서 <풍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재론했을 때의 의론도 또한 형식적, 윤리적인 느낌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와츠지의 저작을 손에 넣은 독자는 곧 깨닫는 바인데, 그러한 철학적 의론에서조차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때때로 통속적이란 생각이 들 만큼 알기 쉽다. 이 알기 쉬움이 무엇보다도 와츠지 저작의 매력인데(와츠지는 '일본어와 철학의 문제'(1935)에 한 문장을 남겨, 번역어로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본어로 철학하는 일의 가능성을 늘 추구했다), 그것은 의론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구체적 사례에 의한 것이다. 그 하나로 앞에 지적했듯이 농경문화에 관한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와츠지의 의론이 생업인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에 대하여, 이미 시마다 요시히토嶋田義仁의 명쾌한 의론이 있다(嶋田 2000). 시마다는 와츠지가 말한 풍토의 유형 가운데 하나인 '계절풍'을 '더위와 습기의 결합'으로 특징짓고, 그 선에서 일본적 풍토의 유형이라기보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의 열대 계절풍을 의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처럼 서술한다.

와츠지는 무슨 이유로 일본적 풍토를 열대 계절풍의 그것과 동일하다 보았을까? 그것은 '와츠지의 계절풍이란 것은 순수한 기후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논'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인간 존재의 주체적 표현이 되는 풍토 개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마다 요시히토 '풍토 사상의 가능성 -일본적인 근원적 반성-')

농경문화의 시점에서 다시 의론을 전개하면 똑같은 계절풍이라도, 예를 들어 인도에 대해서는 같은 사례로 논할 수는 없으며, 거꾸로 '사막'과 목장을 같은 맥류 농경권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없을 것이다(이 책의 서론 및 대담도 참고할 것). 그러나 어느 쪽이든 농경문화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와츠지의 풍토론은 지리학과 민속학은 물론, 농학과 민족식물학, 게다가 환경고고학과 연결되며 그 역사적 의의가 판명된다. 시마다는 야나기다 타쿠니오柳田國男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등에게서 발단하는 '벼농사 문화론', 우에야마 슌페이上山春平와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등에 의한 '조엽수림 문화론', 또한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제기된 '너도밤나무, 졸참나무숲 문화론',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와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에 의한 '숲의 문화'론 등 일본의 일련의 풍토론적 문화론을 개관하고 그 전개에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을 자리매김한다.

와츠지가 고향의 선배 야나기다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상세하게 조사하지 못했는데, 와츠지의 <풍토>는 야나기다의 벼농사 문화론을 근거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벼농사라는 건 풍토 그것이라 말하기보다도 어느 풍토에 입각한 농업기술이며 생업기술이다. 벼농사에 대응하는 풍토가 존재한다. 와츠지는 그것을 '계절풍'으로 인식하고, 다시 세계사적 시야 안에 넣어 '사막'과 '목장'을 함께 풍토의 세 유형으로 다시 파악했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논문)

시마다에 의하면, 이러한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의 공헌은 영역에 한정되어 오로지 일본의 사정으로 시종일관한 벼농사 문화론을 환골탈태시키고, 풍토론을 비교문화론적 의론의 장으로 전환시킨 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면에서, 철학자인 그의 의론에서는 취약했던 '자연과학적 기초'를 근거로 하여 그 뒤 조엽수림 문화론 이후의 풍토론에 의해 새로운 전개가 가능해진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개괄하는 시마다가 제기한 시점은 자칫하면 와츠지의 철학적 고찰에 질질 끌려 그 구체적 내실에 대해서 좀처럼 명로한 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기존의 해석에 대해, 와츠지만이 아니라 풍토론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명쾌한 자리매김을 가져왔다. 시마다는 또 최종적으로 개인에게 귀착하는 정신의 자유를 중시하는 나머지, 걸핏하면 풍토론을 단순히 환경결정론으로 멀리하려는 서양 근대사상에 대하여 평평하여 균질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거주 환경에 응하여 공간의 이해가 중층적으로 전개된 결과 자연히 관심이 '자기 이외로' 향해 온 일본의 풍토론적 발상의 의의를 위상적으로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새로이 '산이 많은 나라의 풍토론'을 제기한다. 그 시점과 문제 의식은 이 시리즈에서 풍토를 문제로 삼는 데에도 시사적이라 해도 좋다. 

그렇지만 정말로 위상적인 의론으로 귀착하는 것에 의하여 시마다의 의론은 뜻밖에도 풍토론의 한계를 드러낸다고도 생각한다. 그 한계는 또한 농경과의 관련에서 본 풍토론이란 자리매김에 잠재해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그점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 풍토를 문제로 삼는 것의 의의와 가능성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하겠다.


풍토론의 가능성

언젠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창으로 보이는 교외의 동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과연 이곳에 풍토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한 적이 있다. 형형색색의 네온이 반짝이고, 콘크리트 건물이 겹겹이 무질서하게 이어지며, 지면은 아스팔트로 덮이고, 하늘에는 전선이 종횡으로 내달리고 있다. 특별히 오사카 근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어디에나 있는 풍경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풍토>에서 와츠지도 지적하고 있듯이, 풍토는 옛날에는 또 수토水土라고도 하여 자연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단어이다. 가지각색 인간의 생업도 또한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인간 문화와 관련된 자연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마을의 옆으로 개울이 흐르고, 바람이 지나가며, 기름진 들이 펼쳐진다. 이것이 풍토의 올바른 인상일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위에서 묘사한 것 같은 현대의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풍경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이 단어에서는 이야기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앞에서 와츠지의 '원풍경'에 대하여 지적했는데, 아직도 풍토론을 받아들이려는 시도 안에는 때때로 어딘가 목가적이기까지 한 전원 풍경으로 풍토의 상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그러한 풍경을 원풍경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현대의 우리에게 풍토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참으로 저 어수선한 현대 교외의 길거리에 풍토적 현상은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풍토와 같이 인간 활동과의 관계성에 기반한 자연을 표현하는 '마을'과 '마을 산'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도시에서 괴리된 지역을 지시하는 장소적 한정을 수반한 단어이며, 생태계 전체에 걸친 인위적 관리를 전제로 하는 그 실태에서 보면 현대의 교외에는 이미 예전 같은 마을 산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라는 현상은 그러한 파악 방식으로 충분히 보아 온 것일까?

기존의 풍토론이 어느 쪽이냐 하면 도시보다 전원이나 농촌 같은 '시골'의 대상을 가장 자신있어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시마다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문화연구의 대부분이 벼농사 문화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고 있으며, 최근의 풍토론 재평가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지리학자 오귀스텡 베르크Augustin Berque가 예외적으로 벼농사 문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풍토론은 역시 시골에 조명을 비추는 데 주목하는 제약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론은 이러한, 말하자면 장소적 한정과 한계의 근원에 머무는 것일까?    

노마 하루오野間晴雄가 지적하듯이 문제는 단순히 장소적 한정과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토론에는 '역동적인 경제관계'에 관한 의론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野間 2005).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진전을 고려하면, 농촌이든 도시든 경제문제를 빼놓은 채로는 충분한 의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하다. 그렇지만 다시 물음을 거듭하면, 기존의 풍토론에 경제적 시점을 보완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론을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와츠지가 열었던 비교문화론적 관점을 다루었던 풍토론의 가능성은 장소적 한정은 처음부터 굳이 말하자면 표층적인 자연과의 관계조차도 뛰어넘는 곳에 있던 건 아닐까? 그 범위 안에서, 교외는 물론 도시의 한복판에도 풍토는 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측면이 실은 이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와츠지의 <풍토>는 부제에 '인간학의 고찰'이라 하듯이 단순히 자연조건의 열거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을 객체화하고, '자기 인식의 전형'이 되는 풍토를 밝히는 것이며, 단순히 객관적 대상으로 기상과 환경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의 관점을 제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원초적인 자연을 무시하고 인간화하며 왜곡된 자연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경험에 근거한 근본적인 자연과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일상생활과 자연의 관계이다. 그 의미에서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자연의 반대점에 있는 인위적 산물인 건축에 대하여 말한 다음의 이야기는 시사적이다. 

건축이란 진짜 자연에 쌓아 놓는 제2의 자연이다. 건축을 직업으로 삼는 자가 환경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렌조 피아노 <항해일지>)   

          
만약 우리에게 친근하다는 범위에서 도시의 건축 공간도 또한 '자연'이라 부른다면, 여기에도 또 풍토는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농경문화로 상징되는 시골 지역을 논하는 그것이 문제인 건 아니다. 그곳에서 적출된 의론을 어떻게 현대의 우리 일상생활의 문제와 접속시킬 것인가? -그러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도 풍토론에서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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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서장  계절풍 농경권의 사람들과 식물






들어가며



왜 지금 농경인가


인간은 왜, 농경이라 하는 '귀찮은' 일을 시작한 것일까? 그 전의 생업인 '수렵채집'과 어째서 결별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답은, 사실 필요 없다. 여러 가지 가설은 있지만 모두 '넘고처지어' 결정적으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이 물음은, 말하자면 연구자의 놀이 같은 것이라 어떠한 결론을 내려도 일반 사회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농경이라는 생업은 -여기에서는 목축을 포함하여 농경이란 용어를 쓴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다시는 그만둘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금단의 사과에서 '금단'이란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농업을 시작하고 난 뒤 1만 년 사이에 인간 집단은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며 인구의 대부분이 사라지거나 사회가 큰 혼란에 빠져 생산활동이 마비되어 버리는 '붕괴'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게다가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해 왔다. 예를 들면, 사막의 풍토(와츠지和辻 1935)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왕조(우르 제3왕조) 무렵부터 염해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Maekawa(1974)에 의하면, 인간은 염해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에 필요한 대처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염해를 입어 붕괴한 사회가 잇따랐다. 2000년 전쯤 루란 왕국도 염해로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루란 왕국의 사람들은 우르 제3왕조의 붕괴에 대해 몰랐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객관적으로는 잘못을 되풀이한 셈이다. 인류는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역사라는 개념을 갖추어, 과거의 선배들이 저지른 이상한 실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농경의 역사를 아는 것은 단순히 교양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떻게 했을 때 농업생산이 붕괴되었는지를 아는 길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 될지, 혹시 가령 불행하게도 붕괴가 찾아왔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등을 알 수 있다. 


그 뒤쪽 끝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인류는 제2차대전 이후 반 세기 이상 지역적인 재해와 사회적 혼란은 이외에 큰 붕괴를 경험하지 않았다. 반 세기 이상이란 시간은 현재 인류의 평균수명으로 보면 한 세대를 넘는 것이다. 즉,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큰 붕괴 현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붕괴가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되면 붕괴라는 사실은 구전되든지 문서에 기록되든지 하는 것 말고 영원히 잊혀진다.




농경 -그 연구사  


농경과 목축에 관하여 포괄적인 연구를 행한 연구자가 세계에 몇 명 있다. Sauer(1952)와 나카오中尾(1996)은 세계의 농업 체계를 분류하는 작업을 행했다. Harlan(1975)도 유사한 연구를 행했는데, 나카오 등에게 없었던 점은 농업 이전 인류 집단의 생업에대하여 거론한 바이다. 20세기 말쯤부터 농업이 환경의 개변과 문명 발상에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농업의 기원을 종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도가 몇 번이나 행해졌다. 콜린 텃지는 농경의 기원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현생 인류) 사이의 생태적 지위를 둘러싼 불화라고 파악한다(텃지 2002).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문명붕괴>, 피터 벨우드Peter Bellwood의 <농경 기원의 인류사>도 분야를 횡단하는 시각으로 쓰여진 훌륭한 저작이다.


재배식물과 가축의 기원, 전파에 관하여 연구한 연구자는 각론을 포함하면 여러 명이다. 오래된 것은 <재배식물의 기원>(de candolle 1953)을 시작으로, 그 뒤를 이은 같은 이름의 책(바빌로프의 <재배식물의 기원에 관한 연구(1928)>) 등이 고전으로 꼽힌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Food는 인용이 좀 오래된 것이지만 비주류 작물까지 다룬 좋은 책이다. 벼에서는 가토 시게카네加藤茂苞에 이어 岡彦一과 그 공동연구자가 행한 품종의 유전적 분화에 관한 일련의 연구가 있다(Oka 외, 1953). 또 중국에서는 周拾錄(1957), 丁頴(1961) 등이, 특히 중국의 벼 기원에 대하여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1980년대부터 일련의 분자생물학 성과도 벼의 기원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그 상세한 내용은 이 책의 石川隆二, 中村郁郞 등의 논문에서 다룬다. 밀에 대해서는 水原均과 그 공동연구자들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다. 보리는 세계에서 생산량이 4위인 작물로서, 高橋隆平과 그 공동연구자가 많은 연구를 남겼다. 먼저 이른바 '맥麥'에 대해서는 2009년 봄 맥류 연구의 전문가들이 직접 <맥의 자연사(麥の自然史)>라는 책을 홋카이도 대학 출판회에서 간행했다. 이외에도 서류에 대해서는 <서류와 인간(イモとヒト)>(吉田, 堀田, 印東 2003)과 Salaman(1949)의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the Potato 등의 훌륭한 저작이 있다. 


세계를 석권한 가축 종의 수는 아마 주요 곡물 종의 수와 같을 정도로 소수일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소, 양, 염소, 돼지, 말 5종을 '주요 5종'이라 부른다. 이외에도 분포 지역이 제한된 가축(다이아몬드는 남미의 알파카, 라마 2종과 낙타, 순록, 당나귀, 물소 등14종을 들고 있다)이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도 분자유전학의 수법을 이용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에서 기원한 농경의 요소



농경은 녹말과 단백질을 얻기 위한 한 수단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에너지 공급원인 당분과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이다. 당은 보존이 꽤 어렵기 때문에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당의 분자가 중합되어 생성된 '녹말'을 쓴다. 그 때문에 필요한 영양소는 녹말과 단백질이라 바꾸어도된다. 녹말원으로는 쌀, 밀 등 곡류나 타로, 바나나, 백합 등의 뿌리채소류, 밤, 도토리 등의 견과류가 알려져 있다. 단백질원으로는 가축과 그 야생종인 포유류, 어패류, 조류, 곤충 등이 이용되고 있다.


어느 토지의 녹말원과 단백질원을 결정하는 것은 그 토지의 기후와 풍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후와 풍토에 의하여 규정되어 온 생태계이다. 농경 이전의 사회에서는 그 토지에 살고 있던 동식물이 이용되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에는 여기에 가축과 작물이추가되었다. 가축도, 작물도 그 풍토에 살던 야생의 동식물을 인간이 가축화(재배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라시아 각지의 녹말원과 단백질원이 어떻게 조합되는지에 대한 佐藤(2008a)의 작업을 그림 1에 실어 놓았다. 그림에 보이듯이, 녹말원과 단백질원의 조합은 토지마다 뚜렷하게 다르다. 



그림1


흥미로운 점은 그 조합의 지역성이 크게는 和辻(1935)가 주장한 풍토와 매우 합치한다는 것이다. 계절풍 풍토에서 성립된 녹말과단백질의 기본적인 조합은 '쌀+물고기"이다(佐藤 2008a). 인도는 여기에 특수하게 '잡곡+콩'이 조합된다. 다른 곳에서는 단백질원으로 쓰인 동물성 단백질이 종교적 이유 때문에 쓰이지 않고, 대신 고단백질의 콩류가 활용되고 있다. 한편,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에서 생긴 것은 '밀+고기·젖'의 조합이다. 목장의 풍토에서 북쪽에서는 녹말 공급원으로 16세기 이후 감자가 추가되었다.또 북유럽에서는 보리·감자+물고기라는 조합이 등장한다. 유라시아의 북쪽에서는 '잡곡+고기·물고기'라는 조합도 볼 수 있다. 일본 열도의 동북부도 역사적으로는 이러한 지역에 속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녹말의 공급원은 크게 변천해 왔다. 그 일반적 경향으로는 (1)영양번식하는 것에서 종자번식하는 것으로, (2)목본을 시작으로 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에서 두해살이 초본으로라고 하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녹말의 특성은 그 운반과 보존이 쉬운 성질이 장점이다. 이 두 가지에 뛰어난 것이 옮겨져 결국 세계에 퍼진 것이다. 이 두 특성이 식물의 진화 방향과 비슷해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덩이줄기를 이용하는 감자는 유럽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한편 단백질 공급원은 썩기 쉽고(보존성이 떨어짐), 또 운반도 어렵다. 그 때문에 최근까지 그 토지에 고유한 단백질 공급원이 있었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영국의 고고학자였던 고든 차일드는 인류사를 고찰하여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전환한 시점을 신석기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는 산업혁명에 대비될만한 인류 역사의 대변혁이란 의미이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사이에는 인간 활동에 확실히 크나큰 차이가 있다. 특히 토기의 등장은 먹을거리의 저장과 조리와도 관련되어, 인류의 식생활을 크게 바꾸었을 것이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먹을거리의 저장이 농업의 발달에 따랐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의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체계의 변화, 토기의 등장과 보급, 식생활의 변화라고 하는 대변혁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지에 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있다.


일찍이 佐佐木은 인류가 농경을 받아들인 과정을 '프로세스'라고 불렀다(佐佐木 1993). 즉 佐佐木은 농경문화의 수용이 혁명과도같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수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천천히 진행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중국 장쑤성의 룡큐쩡龍虬莊 유적에서는 7000년 전에서 5200년 전까지 1800년에 걸쳐서 수렵채집 경제로부터 벼농사 경제로 이행한 경향을 살필 수 있다(龍虬莊 1999). 그와 같은 점은 밀의 진화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Tanno와 Willcox(2006)는 서아시아 네 곳의 유적에서 출토된 밀(아마 사배성 밀로 여겨짐) 이삭의 가운데 축에 남아 있던 탈립의 자취를 상세하게 살펴, 주력이 야생형(탈립형)에서 재배형(비탈립형)으로 이행하는 데에 30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발표했다. 그러하다면, 농업을 수용하는 과정이 '프로세스'라는 佐佐木의 지적은 동아시아 벼에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서아시아의 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된다.


'프로세스'론은 농업을 수용하는 과정을 일직선으로 점점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다. 왔다리 갔다리 하는 과정을 엉성한 그물코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에 일직선의 과정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의 학문에서는 그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지를 말할 뿐 정확히는 아직 모른다.


또한, 룡큐쩡 유적의 자료와 그 해석에 대해서는 졸저 <벼의 역사(イネの歴史)>(佐藤 2008b)에 상세하게 기술했기에 거기에서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농경이 기원하기 이전 시기


대저 현생인류가 생겨 그 한 무리가 아프리카를 떠난 것이 10만 년 전에서 15만 년 전 무렵이다. 아프리카를 떠날 당시 인류에게 농경 문화는 없었다. 그 뒤 그들은 급속하게 온 세계로 퍼졌지만, 그들의 행선지마다 선주민들과 만나 여러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그들의 일파가 서아시아, 곧 레반트 회랑 일대, 투르크 동남부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원류부 일대에 도달한 것은 몇 만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篠田 2007). 텃지에 의하면, 이때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다만 그 시기는 추위와 더위가 자주 오락가락하고, 지금의 페르시아만도 육지였다고 한다. 현생인류는 그 뒤 사방으로 이동해, 동으로 이동한 한 일파는 5만 년 조금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순다랜드라고 불리는 남중국해 일대에도 이르렀다.


텃지는 인류가 최초로 농경과 비슷한 행위를 행한 곳이 네안데르탈인과 만났던 페르시아만부터 서아시아가 아닐까 한다(텃지 2002). 도대체 인류는 왜 이동한 것일까? 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인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을 채택하려고 한다. 보통 생태계 안에서는 거기에 사는 동물과 식물의 수가 엄밀한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선주하던 인류도 또한 순수하게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지금은 '현생인류'라고 불리는 집단이 침입해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유사한 생태적 지위에 있던 선주민과 현생인류 사이에 긴장관계가 발생했다. 그러나 두 집단이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것은 아니다. 텃지는 현생인류의 승리는 그들이 더 농경과 목축에 가까운 생업 양식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현생인류는 토지의 한 귀퉁이를 점유하고 그곳을 갈아엎거나 간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동물의 새끼를 기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밀고 들어간 생태계는 현생인류의 '체취가 풍기는' 생태계가 되었다. 그곳은 어쩌면 야생동물에게도 선주민에게도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 같다. 신인류의 시치미 떼고 대수롭지 않게 하는 행위가 선주민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일이 현생인류가 가는 곳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현생인류가 그와 같은 일, 즉 농경과 목축의 선구와 같은 생업을 확립할 수 있었다면, 그 성공담의 숫자만큼 '농경 기원'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쨌든 현생인류는 순수한 수렵채집인이었다기보다 유용한 식물에 눈을 돌려 그것을 확보하거나, 또는 길들이기 쉬운 동물을 길들이거나 새끼를 사육하는 일을 통하여 차차 주변의 생태계를 만들어 바꾸어 나갔다고 생각한다. 야생동물과 선주인류의 집단은 점점 현생인류의 영역에서 점점 멀어져 가지 않았을까 한다. 



농경의 완성까지 지난 길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농경이란 작업을 완성했을까? 이에 대해 몇몇 연구자가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하고 있다.


완성된 농경이란 먼저 (1)사람들에게 동식물을 관리한다는 명확한 의도와 지식이 있고, (2)그에 필요한 도구와 장치를 사회적으로 지니며, 또한 생활에 필요한 자재 가운데 적어도 일부를 그 행위에 의하여 획득하고, 더하여 (3)이러한 행위에 적응하는 전용 동물과 식물(곧 가축과 작물)을 지니고 있을 것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아마 인류가 가장 먼저 손에 넣은 것은 첫 번째 조건, 즉 동식물을 관리하는 의도와 지식이었을 것이다. 농경의 첫 번째 단계는 사람에 의해 동식물이 관리되는 것이다. 다만 이 단계는 이전의 수렵, 채집과 고고학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2)의 도구와 장치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덫이나, 숲과 초원에 불을 놓아서 식물의 발아를 유인하거나 그에 의하여 동물을 꾀어내는 행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새끼를 포획하여 사육하는 일 등도 이 단계에 들어갈지 모른다. 이러한 행위는 고고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조몬繩文 시대의 일본과 신석기시대의 중국에서는 멧돼지 새끼의 뼈가 출현하는 빈도가 높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內山 2007, 龍虬莊 1999). 이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의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최초의 두 단계까지는 생태계의 개변이 정주에 의하여 느리지만 착실히 진행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면 인류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가축과 작물이 무게 중심이 되면, 수렵·채집 경제로 회귀하는 일은 절망적일 정도로 어렵다. 그것은 가축과 작물은 사람의 손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그 무렵에는 인류의 주변에 수렵·채집의 대상이 되는 식량자원이 바닥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다.




풍토·기후와 농경


풍토와 기후


농경은 이전 시대인 '수렵과 채집'이란 생업을 이어받아 성립했다고 생각한다. 수렵과 채집은 완전히 자연에 의존하는 생업 형태이기에, 그곳에 어떠한 양식의 수렵·채집이 성립하는지는 자연식생과 마찬가지로 그 토지의 기후에 의하여 거의 일차적으로 정해진다. 기후학자 쾨펜Köppen은 이 관계를 기초로 하여 식생 등을 가미하면서 세계를 31개의 기후구분대로 나누는 발상을 발표했다(발견은 1920년 무렵). 이것은 지금도 쓰이는 개념으로, 교과서 등에 종종 등장한다. 또 키라吉良(1949)은 식생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온도(기온)을 들어 '따뜻함의 지수'(온량지수라고도 함)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뒤에는 여기에 추위의 지수도 추가해, 이들을 조합하여 온도의 월 변화라는 자료로 식생을 설명하는 방책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발상으로 '추위의 지수'도 고안된다. 따뜻함(추위)의 지표란 달마다 평균기온이 5도 이상(이하)이 되는 달에 대하여, 각각의 월 평균기온으로부터 5를 뺀 값(5에서 월 평균기온을 감한 값)의 합이라고 정의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도 키라의 온량지수도 모두 식생을 온도와 강수량이라는 간단한 지표로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각각 그에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와츠지가 <풍토>의 집필을 시작한 것이 1928년 무렵으로, 이는 쾨펜보다 약간 늦다. <풍토>는 와츠지가 유럽 유학(1927~1928년) 때 견문한 각지의 모습을 기초로 썼는데, 이 유럽 유학 중에 쾨펜 또는 그의 학설과 접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풍토>에는 구체적인 기후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토>가 규정하는 세 가지 풍토는 쾨펜을 시작으로 하는 기후지리학의 구분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그 정도까지 기후를 구분하는 경계가 명확하고, 또 그것이 자연식생만이 아니라 토지에 살고 있는 인간 집단의 농경과 문화를 규정하고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풍토는 -그것을 기후 구분이라는 의미로 쓰든지 인간적 고찰과 와츠지 자신이 고안한 '풍토'라는 의미로 쓰든지- 각각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농경이란 요소를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와 농경


농경이 성립하고 나서도 기후가 농경의 요소를 규정한다는 골조에 큰 변화는 없었다. 예를 들면 벼는 냉대에서는 최근까지 재배되지 않았고, 또는 보리가 열대 평야에서 재배되는 일도 없다. 


작물의 번식, 즉 개화와 결실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온도와 함께 일장(낮의 길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야생식물에게도 공통인데, 식물에게는 크게 단일식물과 장일식물의 차이가 있다. 앞의 것은 가을에 해가 짧아지는 것에 감응하여 꽃을 피우고, 뒤의 것은 봄에 해가 길어지는 것에 감응하여 꽃을 피운다. 낮의 길이는 그 토지의 위도에 따라서 엄밀하게 결정된다. 그 때문에 위도대를 횡단하는 방향(즉 남북 방향으로)으로 식물을 이동시키면 개화하는 시기가 변하여 큰 어려움이 따른다. 식물은 동서 방향으로는 비교적 쉽게 이동하지만 남북 방향으로는 쉬이 이동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작물의 품종개량을 거듭하여 몇몇 작물에서는 위도대를 뛰어넘는 일이 가능해지는 큰 유전적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벼가 기원한 곳은 북위 20도에서 30도 사이의 아열대 지역인데, 현재는 적도 바로 아래에서부터 북위 45도에 이르는 냉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이것은 '일장중위성日長中位性' 또는 '불감광성'이라 하는 단일성(또는 장일성)을 잃은 특수한 유형의 출현에 따르는 바가 크다. 나중에 기술할 '북쪽 회랑'에서는 가을에 심어서 추위를 겪고 나서 꽃을 피우는 것이 본래의 성질이었던 보리의 종류에 '춘파'라고 하여 여름철에 생육하는 특수한 품종군이 분화되어 있다.


인간에 의한 품종개량은 저지대부터 고산지대에까지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곡물이 이에 해당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고산에서 살았던 작물이 산을 내려온 사례도 있다(예를 들면 감자). 원래는 반건조지대에서 기원한 보리인데 습윤에 강한 '동아시아형'이 분화된 것도, 또 원래는 수생식물이었던 벼가 밭벼라고 불리는 밭농사용 품종으로 분화된 것도 인간의 노력으로 품종개량이 된 바이다. 이러하면 어떠한 작물(또는 품종)이 어디에 적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인간 집단의 선호와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동물에도 식물과 비슷하게 일장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일장 시간이 길어지는 시기에 번식 시기가 겹치는 동물을장일동물(말 등)이라 하고, 또 그 반대의 동물을 단일동물(양, 염소 등이 해당됨)이라 부른다. 또한 그들도 위도대를 넘어가는 이동은 번식 시기를 변경시키게 되어, 그에는 큰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다. 유라시아는 본래 동서로 긴 대륙이라서 동물과 식물도 주로 동서 방향으로 이동하고 남북으로는 이동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장, 나아가 위도를 넘어가는 일의 어려움 때문이다.



풍토의 개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풍토란 단순히 기후풍토라는 의미의 풍토(영어로는 climate)가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하면서 기후의 요소에규정되는 각각의 생태적 요소와 나아가서는 그러한 자연의 요소에 의하여 강하게 규제를 받는 인간 사회의 구조와 문화, 그에 더하여 인간 집단의 자연관, 종교 등 사상도 포함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이 풍토관은 말할 것도 없이 와츠지 테츠로우和辻哲郎가 말하는 '풍토'를 의식한 것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와츠지의 풍토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풍토>에 '인간적고찰'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풍토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기질까지도 근본적으로 설명하려는 조금은 거칠다고 말할 수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와츠지의 이 사상은 그 이후의 연구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바타 토요노鯖田豊之의 <육식의 사상>, 스즈키 히데오鈴木秀夫의 <삼림의 사고·사막의 사고>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들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러한 인과관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와츠지의 풍토론을 참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 세 가지 풍토가 농경과 농경사의 지역성을 논할 경우에는 참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년 강수량 400mm의 선을 넣어 놓았다. 물론 와츠지 본인은 세 가지 풍토의 경계선 등은 넣지 않았다. 그러나 편의상 이 선을 세 가지 풍토의 경계선으로 놓겠다. 


다음의 '계절풍' '사막' '목장'이란 세 가지 풍토의 농경에 대하여 그 역사와 함께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계절풍 풍토와 농경



계절풍 농경의 중심은 벼농사 


와츠지의 풍토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이 계절풍 풍토이다. 이곳은 대략적으로는 일본 열도의 남반부부터 중국의 남반부,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며 인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벼, 그것도 자포니카 벼의 기원지가 있는 곳이자, 또 그 대부분이 벼농사 지대인 곳이다. 벼의 다른 종류 가운데 하나인 인디카의 기원지는 아직 불명확한데 아마도 열대 아시아에 있다고 한다면, 계절풍 풍토는 벼의 벼의 풍토이며, 또한 온대지역과 열대지역 가운데 산간의 화전지대가 자포니카의 풍토이고 열대 평지가 인디카의 풍토라고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열대 도서의 벼는 전통적으로는 자포니카의 지대인데 최근의 개량종에는 인디카에 속하는 것이 많다(盛永, 1959).


화전지에서는 벼 외에 최근에는 옥수수와 율무의 재배가 성행한다. 화전지에서 벼농사는 벼농사라고는 해도 여러 가지 작물을 섞어짓기해 왔다. 섞어짓기하는 것은 조 등의 잡곡, 메론과 호박 등의 박과 작물 외에, 바나나와 참깨 등의 유지작물, 허브 종류 등 다채롭다. 다만 화전은 겉으로 볼 때 생산성이 낮은 데 더하여, '숲 파괴'와 '환경에 나쁘다'는 등의 이유 없는 비판으로 급속히 그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열대 저지대에서는 뜬벼라고 부르는 것을, 수심이 몇 미터나 되는 땅에서 농사짓고 있다. 뜬벼만큼은 아니어도, 우기에는 수심이 1미터 가까이 되는 곳이 많다. 이러한 곳에서는 현재 벼논양어가 행해지고 있다. 


미얀마 중부와 인도의 데칸 고원에는 약간 건조한 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잡곡이나 잡곡과 콩의 농사가 전개되고 있다. 



계절풍 풍토의 농경사


온대의 계절풍 풍토는 1만 년에 이르는 벼농사 지역이지만, 자세히 보면 농경의 양식에 큰 지역차가 있다. 일본 열도에서 벼농사를 수용한 것은 조몬시대 후기는 확실시되고 있지만, 열도의 동반부(이세만伊勢湾-와카사만若狹湾을 연결한 선의 동쪽)에서는 더디게 수용했다. 중기 이전의 일본 열도의 조몬문화는 초원의 농경과 수렵·채집을 조합한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도 기술하겠지만, 농경의 요소는 중국으로부터가 아니라 북쪽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 논농사의 수용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잡초 방제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온대 계절풍에 속하는 일본 열도에서는(특히 그 남서부에서는) 농경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잡초이다. 사람들은 잡초 방제에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러나 결국에는 논에 납작 엎드려 뽑는 것 말고는 유효한 수단이 없었다. 땅에 여유가 있던 중세까지는 잡초의 대책으로 아마 지금은 휴경 또는 경작방기라고 하는 일을 행하였을 것이다(宇野 2001, 佐藤 2003). 또 고대 이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벼농사로 회귀하는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대의 왕조는 종종 포고를 통해 육식의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면서도 실은 벼농사의 비중을 높이려는 일종의 경제정책이었다고 한다(原田 2005). 그것은 걸핏하면 이동이 따르는 수렵과 채집 경제로 회귀하는 일을 막는 측면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구조를 벼농사로 전환하는 일에는그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장강 유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벼농사가 행해져 온 지역으로, 그 역사는 1만 년을 넘는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조차 벼가 사람들의 주요한 전분 공급원이 된 것은 양저문화기 이후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저문화기 무렵에 장강 유역은 중국에서 북쪽의 문명이던 황하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로서, 깊이 파고들어 이야기하자면 이 시기가 되어 처음으로 현재의 논벼농사의 원형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현대의 논을 방불케 하는 장치가 최근에는 장강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많이 발견된다. 이는 논이라는 장치가 나중에 이야기할 황하문명의 강한 영향을 받아 발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 이전의 '벼농사'는 아마 매우 조방한 양식을 띠고 있었다. 논벼농사의 시초에 대하여 후지와라藤原(1998)는 장쑤성의 초혜산草鞋山 유적(약 6400년 전)의 논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논벼농사의 기원을 이 시기에서 찾고 있는데, 여기에는 의론이 있다. 왜냐하면 '논'이란 장치를 오로지 벼농사를 위해 물을 담기 위한 논두렁과 관개를 위한 수로 등을 수반하는 구조물이라고 고려한다면, 그러한 장치는 일본 열도에서도 근세에 이르기까지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논이 지극히 한정적이며, 벼를 심을 수 있는 논은 다른 수생동식물이 공존하는 다양한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중국이라는 풍토


계절풍의 농경을 생각하면 특필할 만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중국'이다. 와츠지 또한 중국을 '계절풍 풍토의 특수 형태'로 취급한다. 중국 농경의 기원과 전파를 고려할 때, 회하 또는 장강을 경계로 남북의 차이가 당연한 문제가 된다. 이 경계의 남북에서는 지금도 '북쪽의 맥류, 남쪽의 벼'라고 할 정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생긴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남북'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변함이 없었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선의 남쪽은 벼농사 지대이며 계절풍 풍토에 속하고, 북쪽은 밭농사 지대인 데다 그 서쪽은 방목 등을 수반하는 건조, 반건조 지대를 지나 사막의 풍토로 이어진다.


이 밭농사 지대의 작물은 옛날에는 조, 수수 등의 여러 잡곡이었다. 이들은 황하문명의 옛 유적에서도 출토되며, 최근에는 요녕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출토되는 일이 보고되고 있다. 다만 조와 수수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설이 없다.특히 수수는 여전히 불명이다. 또 피도 동북아시아에서 기원한 잡곡이라고 하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사카모토阪本의 '일본 열도기원설' 이외에는 뚜렷한 논고가 없다(佐々木 2007을 참조). 여기에서 열거한 잡곡류는 맥류와 같이 한해살이인데, 여름농사라는점에서 맥류와는 매우 다르다. 


아무튼 황하문명은 그 뒤 차례로 그 주곡을 잡곡에서 밀로 바꾸어 간다. 이 전환은 밀이 생산성에 더 뛰어났다는 사정이 있는지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앞에 서술했듯이, 여기에서 재배되었던 잡곡은 모두 여름작물인데 이 지방에서 밀은 겨울작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의 전환은 인더스 문명기의 하라파Harappa 유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Weber 1991). 관개 체계 또는 물의 수입과 지출을 고려하면, 이 전환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전환을 가져왔을지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밀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서아시아에서 기원한다. 그것은 5000년 전쯤에 육로, 지금의 신장 위구르를 통하여 중국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그곳은 중국 문화가 아직 미치지 않았던 시대이다. 밀이 도래한 당시의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포함하여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


더구나 최근 중국에서 행한 농경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는 민족주의를 시사하는 듯한 '하나의 중국론'에 입각한 논조가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허난성의 가호賈湖 유적(8000년 전)에서 볍씨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이 야생 벼인지 재배 벼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만약 거기에 야생 벼가 있는 동시에 그곳이 벼농사의 기원지 가운데 하나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벼농사의 기원지는장강 유역에서 단숨에 황하 유역에도 이를 만큼 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고려하면, 가호 유적 일대에 야생 벼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열대에서 벼농사의 개시


열대 계절풍 풍토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도서 지역의 열대우림으로 이어지는 '우록림雨綠林'의 풍토이다. 이곳은 우기와 건기가 비교적 뚜렷하게 구별되어, 건기에는 상당히 건조하다. 이 강한 건조함이 우록림의 나무들이 건기에 낙엽이 지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버마(미얀마)부터 서부 지역에서는 똑같은 열대 계절풍이라 해도 기후 요소가 꽤 다르다. 왜냐하면 인도차이나 반도는 그 위도가 북위 20도에서 10도에 넓게 걸쳐 있는 데 반하여, 버마부터 서부 지역은 남단이 북위 8도에서 인도차이나 반도와 늘어서 있으면서 북으로는 북회귀선(북위 23.5도)을 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벼는 갠지스 유역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남부는 데칸 고원의 반건조지대이다. 


그러나 열대 아시아에서 농경의 시작은 온대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진다고 생각한다. 열대 아시아의 고고학 유적의 발굴이 온대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고 해도, 농경의 증거를 남긴 옛 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간의 집단이 큰강 하구의 삼각주에서 침입했던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태국에서는 지금의 수도 방콕이 개발된 것은 겨우 18세기의 일이었고, 그전에는 정치경제의 중심이 70킬로미터 북쪽의 아유타야였다. 아유타야 이전에는 차오프라야강을 더 거슬러올라간 수코타이가 수도였다. 아유타야 왕조 시절에 아유타야는 운하를 통하여 곧바로 바다로 나갔다. 방콕 평원이 지금처럼 된 것은 겨우 200-3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일이 메콩강 삼각주에서도 있었다. 메콩강 삼각주는 현재 개발되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인데, 여기에 사람들이 이주한 건 불과 200-300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다. 인도차이나에서 인간 집단은 강의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했을 것이다.


인도차이나 대륙부에서는 전통적으로 화전으로 벼농사를 행해 왔다. 단, 고고학적으로 화전을 증명하기란 어려워서 그것이 어느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에서 농경을 시작한 걸 고고학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앞으로의 큰 과제이다. 


인도차이나부터 열대 도서에서 농경은 아마 4000년 전쯤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파퓨아뉴기니에서는 9000년 전쯤 인간이 활동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어 지금까지의 학설이 확 바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을 출발해 태평양으로 확산된 몽골로이드 이전 인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과 몽골로이드에 의한 원시적 농경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갠지스강 유역의 이른바 강가Gaṅgā 평원 북서부의 유적에서 8600년 전쯤의 볍씨가 출토되어 그것이 재배 벼인지 야생 벼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있다.




사막의 풍토와 농경



사막의 풍토

 

와츠지의 '사막'은 꽤나 개념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았던 '사막'은 아덴 부근(즉, 아라비아 반도의 아주 일부)의 사막이어서, 유라시아 내륙부의 사막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막의 풍토'는 이 책에 끼워 넣은 지도의 연 강수량 400mm 선 안쪽의 건조, 반건조 지대이다. 


이 지대 안에는 예를 들면 다클라마칸 사막 같이 연 강수량이 겨우 몇 밀리미터에서 몇십 밀리미터인 극단의 건조지대가 있어서, 식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사막'의 경관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그곳보다는 강수량이 많은 토지도 있어 약간의 식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이른바 사막은 건조만이 문제인 토지가 아니라, 그 강한 염성에 의하여 식생의 생육을 방해받는 토지가 많다. 


사막의 풍토에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경이 유목이다. 이는 약간의 식생을 필요로 하여, 양 등의 무리를 이루는 가축을 이동시키면서 사육한다. 더구나 사막의 풍토에서는 양과 염소 외에 소와 말, 낙타 등 다른 대형 가축이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 강수량이 400mm 이하면 밀을 재배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보리는 300mm 정도인 곳에서는 재배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기장과 조 등의 잡곡은 더욱 소량의 강수로도 재배할 수 있다.


사막의 풍토가 지닌 한 특징은 오아시스이다. 오아시스는 지하에 있는 수맥이 지표에 이르는 곳에 생기는 녹지로서, 큰 오아시스에서는 벼농사까지 이루어진다. 


한편, 토양의 염성화를 불러온 이유로 유력한 설의 하나가 염해이다. 그것은 관개수에 포함된 미량의 염분이 농경지에 축적되거나,아니면 태고부터 지하에 괴어 있었던지 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염해가 생기면 그 토지는 염분을 씻어내지 않는 한 농경지로 사용할수 없다. 중앙아시아의 아랄해 주변에서는 옛소련이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아무다리야강의 물을 끌어다 대규모 면화밭을 개간했다.그로 인해 아랄해로 흘러들어오는 수량이 줄어 호수의 면적이 뚜렷하게 감소했다. 또 면화밭에서는 토양의 염성화에 의해 광대한 면적이 사막화되었다. 그렇게 하여 사막의 면적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 사막의 풍토


다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근처에서 발견된 소하묘小河墓 유적(3000여 년 전)은 묘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미라가 담긴 관이 발견되었다. 그 관은 호양나무(야생 포플러)의 나무판을 짜맞추어 만든 것으로, 그 뚜껑 부분은 살아 있는 소의 생가죽으로 덮어 놓았다. 관 안에는 풀로 엮은 바구니가 있고, 그 바구니 안에 보통 밀과 기장으로 여겨지는 식물의 씨앗이 들어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3000년 전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밀 등과 소, 양 등을 조합한 복합적인 농업+목축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문헌에서도 과거 2000년에 걸쳐서 건조화가 진행되었음이 밝혀졌다. 뒤에 서술하듯이, 풍토에는 역사성이 있어 그 기후와 생태계의 상태는 시간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조금 대담한 추측을 더하자면, 사막의 풍토 가운데 적어도 그 일부는 지금과 같은 건조 상태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은 누란왕국의 발굴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누란왕국은 기원전 4000년 전쯤에 기록에 나타나, 그 뒤 약 800년에 걸쳐서 존속했다고 한다. 누란왕국의 위치는 고고학적으로 엄밀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공작강孔雀川의 하류에서 발견된 몇 곳의 유적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른바 뤄부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일찍이 호수의 기슭이었다. 누란왕국은 인구가 1만4천 아니면 1만7천이라고 기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에 상당하는 규모의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스웨덴의 탐험가 S. 헤딘이 탐험할 때 카누로 내려갔던 공작강에는 이제 거의 물이 없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의 건조화는 이 100년 사이에도 진행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타클라마칸에서부터 1500킬로미터 동쪽의 헤이허 유역에서는 이 1500년 사이 강물을 이용을 둘러싸고 유목민과 농민의 이해 대립이 있었다(日高, 中尾 2006). 반건조지대에서는 이처럼 수리권을 둘러싼 다툼이 늘 발생한다.  



고대 문명과 염해


그런데 '사막'의 풍토에서 사막화는 어떻게 하여 발생하고, 또 진행되는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부분은 오랜 기간의 기후변동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사막화는 인위적인 요인이 크다는 설도 있다.


Maekawa(1974)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기(우르 제3왕조)에 앞에 언급한 메카니즘에 의해 염해가 발생해 겨우 25년 사이에 그때까지 경작할 수 있었던 밀을 재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염해설을 지지했다. 그와 같은 일은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도 일어났다고 한다. 또 누란왕국이 쇠망한 원인으로 이 염해를 드는 연구자도 있다(山田 2006). 다만, 예를 들면 오사카교육대학의 이토 토시오伊藤敏雄 씨와 같이 이에 이론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인더스 문명의 범위에서도 특히 남부의 구자라트 지방에서 토양의 염성화가 심각하다고 한다. 누란왕국의 쇠망처럼 염해가 인더스 문명이 붕괴한 직접적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그것과 인과관계가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장래의 기후변동 등에 의하여 강수량이 늘어났던 곳에서 풍요로운 대지가 회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확실하다.


이러한 과거의 염해가 정말이었다면, 토양의 염화에 의한 사막화는 인위적 색채가 짙은 현상이었던 셈이다. 사막화와 같은 전 지구수준의 환경문제는 지금까지 걸핏하면 기후변동 등의 자연현상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재검토하고 있다. 





목장의 풍토와 농경



목장의 풍토


목장의 풍토는 대개 유럽과 겹친다. 유럽에서 농경의 확산은 벨우드(2008)에 의하면 1만 년 전에 시작되어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7600년 전쯤에, 영국에서는 6000년 전쯤에, 그리고 북유럽에서는 2500년 전쯤에 전해졌다. 이러한 시간차와 함께, 재배되었던 작물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는 지금도 사배체인 듀럼밀이 널리 재배되고 있다. 미국 농무성의 통계에의하면, 지중해 지방에서 가장 마카로니밀을 많이 생산하는 곳은 이탈리아(연간 약 400만 톤), 터키(230만 톤), 스페인(210만 톤), 알제리(200만 톤), 프랑스(140만 톤) 순이다. 이에 대하여 같은 유럽에서도 독일은 겨우 2톤밖에 안 된다. 한편 빵밀 쪽은 전 유럽에서 대개 널리 재배되고 있다.


마카로니밀과 대조되는 것이 감자이다. 감자의 생산량은 유럽에서 우크라이나, 독일, 폴란드, 벨라루시, 네덜란드, 프랑스 순으로서 '북고남저'의 경향이 뚜렷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특히 북유럽에 전해진 건남유럽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감자 이전의' 유럽, 특히 북유럽에서 주곡은 보리와 호밀, 귀리 등 이른바 '맥류'라는 잡곡의 무리였다(벨우드 2008).


그러나 목장의 풍토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목축이다. 목장의 풍토에서 그 근간이 되는 생업은 이른바 '무리 가축'이라는 큰 무리를 단위로 이동하는 가축을 이용한 목축이다. 이것은 원래 서아시아에서 발단한 일이다.



목장의 풍토를 바꾼 신대륙의 농경 요소


목장의 풍토는 16세기까지 맥류+젖, 육류가 조합을 이룬 풍토였다. 그러나 그 생산성이 반드시 높은 건 아니고, 특히 북유럽의 식량생산은 비참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16세기에 도입된 감자였다. 감자는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신대륙의 '발견'에 의하여 유럽에 전해진 신참 식량이다. 신참이지만 감자는 유럽의 풍토에 잘 적응했다. 밀레의 '만종'에는 저녁에 교회 종소리에 기도를 드리는 농부들의 발 밑에 감자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자는 생산성이 매우 낮았던 유럽 북부에서는 남부보다 아주 빨리 전파되었다. 다만 감자는 그 덩이줄기에 의하여, 즉 영양번식에 의하여 자손을 늘리게 된다. 물론 씨앗으로 번식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싹 부분을 남기며 자른 씨감자로 늘리게 된다. 씨감자로 늘어난 각 개체는 말하자면 복제물로서,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한 집단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셈이다.


1980년대 감자는 영국부터 아일랜드에서도 주요 작물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감자에 역병이란 질병이 발생했다. 질병은 순식간에 섬 전체로 퍼지고, 감자를 파멸시켰다. 절반이 감자였던 섬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기근에 빠졌다. 역병은 이듬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발생하여 혼란이 이어졌다. 이후 몇 년 동안 아일랜드를 빠져나온 난민이 200만을 넘었다고 한다(Zuckerman 2003).


그밖에도 남미 원산으로 세계를 돌아다닌 식량이 있다. 옥수수와 토마토, 고추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감자와 마찬가지로 겨우 400년 사이에 세계를 돌아다녔다.



목장의 풍토와 사막의 풍토가 갖는 일체성


풍토에는 역사성이 있다. 즉 영원히 불변하는 풍토란 없다. 와츠지는 '풍토의 역사성'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썼듯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과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는 건조함이 지금에 비하여 아주 경미했다. 현장 3세의 여행기에서도 그 행보가 이르른 곳에 나라가 있거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長沢 1998). 사막의 풍토의 전역이 그러했는지 어땠는지, 일찍이 그곳은 농업, 목축업이 행해진 풍토였던 것을 살필 수 있다.


그곳에 있었던 작물과 가축이 현재 목장의 풍토와 유사한 걸 보면, 사막의 풍토가 예전에는 목장의 풍토와 유사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또 그림1에 보이듯이, 중국 북서부에서는 마치 사막의 풍토와 계절풍의 풍토에 끼어 있는 모양으로 목장과 비슷한 풍토를 볼 수 있다. 상상을 마음껏 한다면, 사막의 풍토는 3000년쯤 전에는 현재 목장의 풍토 같은 경관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어떤 이유로 인해 바다에서먼 일부 지역에서 건조함이 진행되어 지금 같은 사막의 풍토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점에 대한 상세한 건 앞으로 연구할 주제의 하나로 남겨두고 싶다. 또 이 시리즈에서는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를 합쳐서 '맥류의 풍토'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에서 계절풍의 풍토와 맥류의 풍토에 있는 농경 요소를 비교해 보자.


먼저 곡류에 대하여. 계절풍 풍토에서 곡물은 먼저 뭐니뭐니 해도 벼이다. 다음 메밀도 중국에서 생겼다고 한다. 백합, 칡 등 일부 뿌리식물도 계절풍에서 생겼을 것이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 생긴 것은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여러 '맥류'이다. 콩과에 대해서는 대두, 팥 종류가 계절풍 풍토에서 생긴 콩임에 대해, 맥류의 풍토에서는 누에콩, 병아리콩 등이 생겼다.


가축으로는 계절풍에서 생긴 건 무리를 이루지 않는 여러 '집 가축'인 돼지나 가금류 외에 물소, 인도 혹소 정도이고, 나머지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는 세계의 주요한 무리 가축의 주축인 소, 말, 양, 염소가 기원하고 있다. 


식품의 보존기술의 하나인 발효에 대해서도 두 풍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계절풍 풍토에서 발효는 대부분 곰팡이 종류인 누룩곰팡이가 쓰인다. 이 지역의 양조주와 증류주(모두 곡물을 원료로 함) 대부분은 이 방법으로 만든다. 또 된장, 간장, 청국장 같은 고유한 발효식품도 대부분이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법으로 만들고 있다. 다만식해나 어간장 같은 식품에서는 그 방법이 조금 다르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 발효법은 유산균을 이용하거나 또는 체내의 효소를 이용하는 것이 중심이다. 이집트에서 기원한 맥주는 엠머밀의 빵을 설구워서 그대로 살아남은 아밀라아제의 힘을 이용하여 녹말을 당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맥주를 만든다.




남단과 북단의 풍토



북쪽 회랑


유라시아의 북단은 북극해에 접한 매우 추운 땅이다. 토지는 영구동토이고, 지표에는 지의류 이외의 식물은 거의 없다. 여기는 쾨펜의 기후구분도에 따르면 한대(E 지역)이다. 여기에서는 순록을 사육하는 것 말고는 농경의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남쪽에는 타이가라고 부르는 침엽수를 중심으로 한 숲이 펼쳐진다. 쾨펜의 냉대(D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서는 봄밀, 호밀, 순무, 메밀 등이 재배되어 왔다. 겨울철은 어떠한 경작도 할 수 없고, 여름철도 짧다. 봄밀이란 초봄에 심어서 여름철에 생육하고, 가을에 수확하는 재배방식을 취하는 밀로서, 그 전용 품종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계절풍 북부에 농경이 건너오게 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몇 가지 재배식물이 여기를 통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운송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북쪽 회랑'이라 부르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작물의 이름을 들자면, 순무와 보리, 우엉, 메밀 등이다. 이 가운데 보리와 순무는 다른 위도대에서 적응하는 여타의 품종군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여러 경로를 거쳐 전파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세한 건 '일본의 풍토'에서 이야기하자.




인도의 풍토와 농경


인도의 풍토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의 하나이다. 인도는 계절풍 권역이지만, 그 광대함과 기후, 지형의 다양성 때문에 한마디로 '계절풍'이라고 묶을 수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반건조지대에 걸쳐 있는 남인도에서는 이곳 고유의 작물이 옛날부터 재배되어 왔다.  또한 이 지역은 일찍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작물을 유라시아에 최초로 들여온 장소라고 지목되며, 독자의 농경문화를 형성해 왔다. 


와츠지는 인도를 '계절풍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토지'라고 하는데, 그의 풍토론과 마찬가지로 풍토에 주목하여 비교문명론의 논의를 전개한 우메사오 다다오梅棹忠夫는 인도를 동양과 서양에 대비해 '중양中洋'이라고 불러 두 지역과 구별한다.


계절풍 풍토의 벼, 사막과 목장, 즉 맥류 풍토의 맥류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풍토를 특징하는 작물을 들자면 '잡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 피, 기장 등의 종으로 대표되는 'millet' 외에 인도 고유의 잡곡도 있다. 또 콩 종류에서도 인도 고유의 종이 있다(前田, 1987). 특히 다양한 콩 종류는 그 종교적 금지에 의하여 육류(때로는 알까지도)를 입에 대지 않는 많은 인도 사람들에게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콩과작물과 벼과작물을 섞어심는 재배양식이 있다고도 한다. 콩과식물의 대부분이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시키는 '질소 고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콩과작물이 지주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질소 성분의 공급을 받아서 자라는 벼과작물을 함께 재배하여 서로 돕는 관계를 구축하는 독특한 농법이다. 벼농사에 대해 말하자면, 인도에서도 벼농사가 행해졌는데 인도의 벼농사는 계절풍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논할 수 없다(이 점에 대해서는 이 책 말미의 대담에 나온다).


인도의 '중양적' 성격은 그 지리적 위치와도 관계가 있다. 우리들의 프로젝트와 같이 지구연에 속한 '인더스 프로젝트'의 오사다 토시키長田俊樹 교수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은 벼와 맥류를 모두 수용한 문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도의 독자적 풍토에 대해서는 농경과의 관련성부터 더 상세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대 도서부의 풍토와 작물의 진화


열대 도서의 농경 풍토는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라고 말할 것이다. 그곳은 토란, 얌 등 덩이줄기 식물, 빵나무와 바나나, 판다누스 등의 보고임과 함께 그것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곳이 원산지이다. 이러한 식물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다. 그것은 계절풍이나 맥류 풍토의 주요 작물, 특히 맥류가 한해살이 작물인 것과 대조적이다. 


한해살이 작물은 1년에 1회, 반드시 번식을 행한다. 종자는 통상 3년쯤 지나면 발아력을 잃기 때문에, 어느 종의 품종이나 종자인 채로 오래 놔둘 수가 없다. 종자를 저온, 건조 등의 조건으로 놔두면 장기간 보존할 수 있다는 건 20세기 후반에 발명된 기술이다. 게다가 한해살이 식물의 종자는 뿌리면 다음 농사철에는 반드시 죽기 때문에, 그 농사철의 마지막에 파종했던 것에서 다음 세대의 종자를 확보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 즉 어느 문화가 한해살이 작물을 가지고 있다는 건 파종과 채종의 주기를 끊임없이 계속 행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한해살이 작물의 농경이 일단 시작되면 이제 원래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동시에 이런 점은 한해살이 작물이 1년에 1회의 유성생식으로 급속히 진화하는 기회를 획득한다는 걸 의미한다. 한해살이 식물 가운데에는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과 딴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이 있다.  이 가운데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은 많은 품종을 만들어내기 쉽고, 그만큼 환경이 상이한 여러 지역에 전파되기 쉽다.


한편 여러해살이 풀은 극단적으로 말해 몇 백 년, 몇 천 년에 걸쳐 유성생식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으로는 몇 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적으로는 이동도 느리고, 높은 토착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풍토



일본의 남북


일본 열도의 문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지적은 이미 상록활엽수림 문화를 둘러싼 논의 안에서 발생했다. 이 지적은 일본의 숲이 동북부의 낙엽활엽수림대와 남서부의 상록활엽수림대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농경 문화에 대해서도 이 지적은 그대로 해당된다. 다만 남북(또는 동서라 하는 것이 적당할지 모름)을 나누는 선은 문화 요소에 따라 조금 다르다. 남북의 다른 농경 요소와 그에 관련된 요소를 그림2에 표시해 놓았다.



그림2


요소

경계

동(북)

서(남)

조몬 벼농사

순무 품종

보리 품종

보리 품종(겉보리)

파 품종

잠재식생(숲의 수종)

생쥐의 계통


매우 드묾

서양종 순무

W형이 있음

겉보리

흰파(카가加賀 파)

낙엽수림

식용(E. crus-galli)

mus 형

있음

일본 순무

E형

쌀보리

청파(9줄 파 등)

상록활엽수림

잡초 피(E. oryzicola)가 많음

castaneus 형


'남북'의 경계가 가장 북쪽에 있는 요소로는 생쥐, 왕대 등이 있다. 왕대 분포의 북방한계는 아키타현 부근이라든지, 쓰가루 해협이라든지, 또는 후쿠시마현 부근이라 일컬어진다. 경계선이 그 다음으로 북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 순무, 파, 보리 등이다. 순무를 예로 들면, 순무에는 아종 수준에서 2가지 품종군이 있다. 이 가운데 서일본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품종은 일본 순무라고 부르며, 잎 등에 가느다란 털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북일본 등에 분포하는 품종은 서양종 순무라고 부른다. 야마가타현의 쇼나이庄内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되는 이른바 '붉은 순무'가 그 전형이다(靑葉, 2000). 파의 분포도 이와 유사하여 북(동)일본에는 이른바 흰파가, 반대로 남(서)일본에는 9줄 파 형의 녹색 부분이 많은 유형이 분포해 있었다. 경계선이 가장 서(남)쪽에 있는 것이 피, 수종 등이다. 조몬 토기의 한 유형인 돌대문 토기의 분포도 이 선과 같다. 또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고 생각되는 사투리의 동서 차이, 간장의 기호성 차이 등도 대체로 이 선이거나, 약간 동쪽 지역에 경계를 가진다고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 열도에서 남북(서동)의 요소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유라시아에서 동서의 요소와 일치하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서양종 순무의 분포역은 시베리아에서 더 서쪽에 이른다. 한편 일본 순무의 분포역은 중국의 강남 지방이 중심이다. 거의 마찬가지로 보리도 이에 해당한다. 즉, 이러한 재배식물들을 똑같은 순무, 보리라고 하지만, 실은 두 가지 다른 유형이 건너와 적어도 하나는 중국의 강남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각각 따로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 열도의 풍토는 그 남(서)반분은 계절풍 풍토이고 북(동)반분은 훨씬 목장의 풍토와 유사성을 나타낸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은 일면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일본(いくつもの日本)>(赤坂, 2000)이란 발상은 풍토의 입장에서도 정당성을 갖는다.



일본에서 농경의 시작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시작은 언제로 잡으면 좋을까? 이전에는 고고학을 중심으로 조몬시대는 수렵채집의 시대, 야요이시대 이후는 논을 수반한 농경의 시대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왔다. '조몬 농경론'도 되풀이하며 나왔지만, 지금까지는 어느 것도 세상에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점점 '조몬-야요이'를 재검토하자는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조몬 농경론에 부정적인 견해는 주로 논의 유적이 조몬시대의 만기의 종말기까지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농경이라 하면 벼농사, 게다가 논벼농사라는 견해가 마치 상식인 것처럼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말하자면 '벼농사 지상주의'라고 할 만한 무대에서 조몬 농경에는 의론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홋카이도에서 피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지적되는 점, 아오모리현과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서 밤나무의 재배에 대한 연구 등에 의하여 농경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의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서일본(여기에서는 와카사만과 이세만을 잇는 선의 서쪽)에서는 조몬시대 후기에 들어오면 여러 유적에서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벼농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동일본에 언제 벼농사가 전해졌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앞에서 기술했듯이 조몬시대의 일본 열도는 크게 남북(동서)으로 양분할 수 있고, 북쪽 조몬은 훨씬 맥류의 풍토와 상관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풍토와 지구 환경문제



풍토에 적응하기


앞에서 와츠지의 풍토론이 지닌 문제점의 하나로 사람의 기질이나 사상 같은 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기질과 사상이 그 풍토의 기후, 생태계나 농업 등의 영향을 완전히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아니, 기질이나 사상 같은 것은 확실히 그 풍토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또 풍토에 적응한 생활이나 농경문화의 생성에도 관여해 왔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착 애니미즘적인 자연관과 세계관의 영향이 뿌리 깊었다고 생각하는데, 고대 이후에 건너온 불교는 이 애니미즘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독자적 불교를 형성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일본 특유의 사상이 적어도 중세까지 사람들의 넉넉함, 또는 자연에 따르는 생활방식의 기반이 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시리즈 5권에서 소개하는 오사카부의 이케시마池島와 후쿠만지福万寺 유적에서 검출된 중세의 '시마바타島畑'는 그 구체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시마바타는 특히 큰 홍수 이후 등에 퇴적된 모래를 쌓아올려 두렁을 만들고 밭작물을 심고, 또 낮은 곳에는 벼를 심을 수 있도록 한 장치이다. 홍수라는 자연의 맹위를 헤어나기 위한 '견딤의 기술'이라 해도 좋다. 현대의 발상으로 홍수의 방지는 오로지 치수사업에 의한 것인데, 실제로 나중에는 이케시마와 후쿠만지 유적의 부근에서도 '자주 넘치는 강'이란 이명을 가지고 있던 야마토강을 바꾸어 놓는 공사가 행해져(1703년) 홍수 피해는 경감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형 공공투자를 할 수 없었던 시대에는 시마바타는 흔히 생각할 수 있던 '견딤의 기술'이었다.



농학적 적응과 공학적 대응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에서도 '견딤의 기술' 같은 방식이 있다. 그 좋은 예가 '뜬벼'이다. 뜬벼는 앞에서도 적었듯이, 동남아시아 평야부에서 우기에 몇 미터나 되는 수심에서도 살아가는 벼이다. 벼는 그 줄기에 생기는 마디와 마디의 사이에 있는 분열조직의 세포를 늘려서, 그로 인해 수심에 따라 키를 변화시킨다. 교토대학 동남아시아 연구센터에 있던 타카야 요시카즈高谷好一 씨는 이러한 벼가 지닌 적응력을 이용한 적응 방법을 '농학적 적응'이라 불렀다. 한편, 이외에도 댐을 만들어서 수량을 조절하거나 배수로를 만들어서 물빠짐을 좋게 하면 일반적인 벼를 농사지을 수 있다. 이것을 농학적 적응에 대비해 '공학적 적응'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태국의 방콕 평원에서는 지금까지 광대한 뜬벼의 논이 펼쳐져 있었다. 즉 농학적 적응을 하여 사람들은 벼농사를 영위해 왔다. 최근 이곳을 흐르는 차오프라야강의 상류에 거대한 댐을 만들어 홍수를 일으키지 않고 토지를 '유효하게' 사용한다는 시도가, 곧 공학적 적응이 검토되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정말 평원의 광대한 토지는 우기와 건기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고, 계속해서 벼농사도 가능하다. 생산성도 향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학적 적응이 도입됨에 따라 기존의 뜬벼를 심던 논에 성립되어 있던, 사람들의 삶과 이어져 있던 생태계는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뜬벼의 논은 어로의 장으로 사용되어 거기에서는 벼만이 아니라 잉어과나 메기과의 담수어 등을 잡았다. 또 그들의 배설물이나 물에 녹은 영양분이 뜬벼의 논에서는 거름이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공급되었다. 뜬벼를 폐지하면 이와 같은 체계를 단숨에 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공학적 적응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우수한 적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투자되는 에너지도 많아지는 데다가 예기치 않은 재해 등에는 적응할 수 없는, 유연성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에 반하여 농학적 적응에서는 생산성은 낮지만 생태계의 안정을 손상시키지 않고, 높은 지속성을 가지고 생산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두 풍토에 적응하기라 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이 풍토의 실태에 꼭 맞는 것인지는 명확할 것이다. 


농학적 적응이 계절풍 풍토의 고유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훨씬 예전에 쓸모없어진, 유럽의 중세에 널리 행해졌던 '삼포식 농업'도 일종의 농학적 적응이었다. 그럼 공학적 적응은 단순히 근대화의 산물로 도입된 것뿐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을 비롯한 계절풍 풍토에서는 애니미즘 사상을 현재에 이어받아, 그만큼 농학적 적응을 이어받으려는 행동규범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풍토의 사상적 우열을 이야기할 요량은 아니지만, 풍토와의 관련에서 생긴 사상이 풍토에 적응하기란 방식에 대하여 지닌 의의를 새로이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지구 환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처음에 적었던 농업 생산의 모순과 붕괴로 가는 길은 풍토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물을 둘러싼 문제를 예로 들자면 계절풍 풍토처럼 남아도는 물이 홍수와 습해를 일으키는 곳도 있다면, 사막의 풍토처럼 물의 절대량이 부족하건, 그것을 완화하기 위한 관개가 가져온 염해로 고생하는 곳도 있다. 또한 같은 계절풍 풍토에서도 홍수의 상습 지대(일본에서는 수향水郷 지대나 키소산센木曾三川 지대)도 있다면, 반대로 여름철의 적은 비로 가뭄의 피해를 받기 쉬운 지대(일본에서는 사누키讃岐 평야나 오사카 평야의 남부)도 있다. 문제는 매우 지역적이다.


기후변화, 특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온난화에 대해서도 어느 작물의 재배 적지가 고위도 지대로 이동해 버린다는 문제가 있는 토지(일본처럼 남북으로 긴 나라는 그렇다)도 있다면, 빙하의 해빙으로 홍수가 빈발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지역도 있다. 강수의 패턴이 변하여 작부체계에 영향이 나타나는 지역도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지구 환경문제는 그 근본은 동일한 원인에 지배되더라도, 나타나는 바는 풍토에 따라 여러 모습이 된다.


해결을 목표로 방책을 채택하는 법도 또한 풍토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뜬벼의 체계를 채택해 온 열대 계절풍의 사람들은 해마다 홍수에 대해 체념하는 듯한 대응을 채택한다. 2008년 여름, 나는 라오스의 비엔티엔에 있었다. 40년 만에 메콩강의 홍수가 난다 하였는데, 사실 일부에서는 제방이 터져 무너져 침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엔티엔 시당국은 군을 동원하여 제방 위에 모래부대를 쌓는 대책을 채택했는데, 시 안에서는 양동이와 바가지를 사서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위가 예상을 뛰어넘으면 재산의 일부를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강이 범람하면 물고기가 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각하지 않게 고기를 잡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관공서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예전에는 짚신을 신고 통근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의 규범의 문제 등이 아니라, 언제 물이 넘을지 모르는 풍토에 사는 사람들이 적응한 모습이었다. 


한편, 공학적으로 적응해 버렸던 일본에서는 일단 홍수가 일어나면 넘친 물도, 고기도, 토사도 모든 것이 재해의 원인이 된다. 물이나 아스팔트 위의 모래는 교통의 장애가 되고, 물고기는 죽어서 부패해 위생 문제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적응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처가 바뀐다는 걸 우리는 깨닫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지구 환경문제의 역사도,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 왔느냐 하는 인간의 역사도 잘 모른 채로 현재에 이르렀는데, 지금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풍토에 적응하는 방식 하나만 해도 이미 크게 변용하려고 하고 있어서, 올바르게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되는 앎을 획득하려 한다는 역사적 시점의 의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해도 좋다. 풍토와 그 역사라는 관점(이것을 환경사의 관점이라 해도 좋다)에서 환경문제를 재검토하는 일은 지구 환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한 중요한 과제이다.




마치며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는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연구 프로젝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일환으로 프로젝트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의 연속 공개강좌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서적의 형식을 위하여 새롭게 저술을 부탁한 부분도 많다. 프로젝트의 이름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주제는 조금 역설적인 말이지만, 인간에 의한 농업(목축을 포함)이란 행위와 주위의 환경, 특히 생태계와 관계를 맺어 온 역사를 연구하려고 한 것이다. 근저에 있는 발상은 우리들은 이 관계에 대하여, 특히 그 역사에 대한 긴요함을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역사의 연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연구 대상으로 한다. 역사 연구의 기초에 있는 문서만으로는 이 '관계'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 여러 가지 자연과학의 방법과 조합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문자가 없는 시대의 일은 고고학의 방법이 유력하다. 이와 같이 농업과 환경의 관계사의 해명에는 분야의 제한을 넘어 학문의 융합이 필요하다. 


지구연의 프로젝트는 그 대부분이 이러한 분야를 횡단하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도 모두 80명 정도의 연구자가 있는데, 그 전문 분야는 여러 갈래이다. 분야의 제한을 넘는 건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보다어려울 때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뛰어넘어 기대한 바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분야의 장벽을 넘은 대화를 시도했다. 이 시리즈도 또한 그러한 대화를 시도한 하나로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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