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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간밤에 비와 함께 눈이 내렸다. 제주에서 눈을 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이건 상서로운 조짐일 게다. 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강풍에 주의하라고, 더구나 산간으로 가는 사람들은 체인 없이는 미끄러져 책임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니 시작부터 떨린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든든히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오늘은 조천읍을 돌아, 저 성산 쪽까지 달릴 예정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간간이 바닷가에도 눈보라가 휘날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어디로 가는지, 뭐 하러 가는지 의미도 찾지 못하고 눈보라에 휩쓸려 길 잃은 나그네 꼴이다. 신촌리라는 곳에 도착하여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다고 생각한 순간, 한 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걸 보았다. 얼른 가서 사정을 말하는데, 아침 출근길이라 아줌마가 바쁘시다. 아이까지 데려다줘야 한다고 하며 난 모르겠으니 우리집 어머니와 이야기하라며 찬바람 부는 날 찬바람처럼 쌩 가버린다. 야속한 아줌마. 젊으면 저런 걸까? 난 저러지 말아야지. 아무튼 할머니께서도 잠시 마당에 뭘 하러 나오셨는데, 귀가 너무 많이 어두우시다. 아무리 크게 외쳐도 잘 못 알아들으신다. 더구나 예전에 귀가 어두워지셔서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본토박이 제주말이다. 허! 허! 웃음만 나온다. 한 나라에 살아도 이렇게 다르구나!

그래도 어찌어찌 손짓발짓 섞어가며 간신히 뜻은 통해 보리콩을 조금 얻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별 시원찮다. 벌레가 다 쪼사 놓은 것이 할머니가 문물에 밀려 찬밥 신세가 된 듯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씁쓸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봉투에 잘 챙겼다.

 

다시 차에 올라 열심히 달렸다. 어째 여기는 감귤밭만 보이고 사람 사는 집은 보이질 않는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사전 조사가 중요하다는 걸 느꼈다. 물론 이렇게 뒤지다 남들이 찾지 못한 귀한 걸 발견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얼마 없는 상황에서는 사전 조사가 무엇보다 중요하겠다.

아무리 달려도 비바람만 거세고 사람은 없고, 선흘리 돗바령이란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 드넓은 밭에 누가 심었는지 모를 적팥과 수수가, 그나마 저절로 떨어져 자란 것이라 초라하게 몇 그루 남아 있다. 오전 내내 달려도 제대로 된 집을 찾지 못했으니 이거라도 소중하다. 일단 수집. 

다음으로 선흘리 1012번지 사시는 부옥례 할머니를 간신히 만나 육십일깨를 얻었는데,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물론 기록도 별로 없고, 사진도... 날씨도 궂고 그만큼 힘도 빠져서 그렇다.

 

여기저기 샅샅이 뒤지는 길에 잠시 동백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끈다. 요즘 한창 동백을 수집하시고 자료를 모아 글을 쓰고 계신 안완식 박사님께서 오줌도 쌀 겸 몸도 풀고 내리자고 하신다. 그러고는 바로 동백 앞으로 달려가셔서 사진을 찍으시고 품평을 하시느라 바쁘시다. 박사님 눈에는 하나만이 아니라 몇 개가 동시에 보이나 보다. 길을 지나며 지나치는 식물 하나도 놓치지 않으신다. 이번 수집을 따라나서며 안완식 박사님의 모습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느낀다.   

 

이런 동백만이 아니라 참 신기한 색의 동백이 많았다. 안완식 박사님 덕에 동백 구경은 눈알이 충혈되도록 잘했다. 

 

 

이럴 때는 잠깐 쉬는 것도 좋다. 때 늦은 점심을 해결하며 잠시 숨을 돌리고, 어제 일을 생각하며 중산간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물론 일기예보에서는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혹시 모른다. 괜찮을 수도 있으니 부딪쳐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게 뭐람! 조천읍은 웬만하면 감귤밭이 전부이고, 중산간쯤 가면 목장뿐이다. 마을이라고 표시된 곳을 찾아도 이제 사람은 거의 살지 않는다. 제주시에 가까워서 그럴까? 다들 시에 모여 살면서 여기는 일만 하러 오나 보다. 보람은 없고 고생만 직싸라게 했다.

 

해발 400m쯤 오르자 바닷가에서는 비바람이 진눈깨비로 바뀌었다. 위로 오르고 오르면서 이거 이대로 올라도 될까? 내가 괜히 천국행으로 이끄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강화도에서 황청까지 다녀온 몸, 안완식 박사님을 믿으며 갈 수 있는 데까지 올랐다.

 

하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눈만 쌓여 있고 사람은 살지 않는다. 대신 목장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다. 결국 한 목장까지 올라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걸 끝까지 확인한 뒤 차를 돌렸다. 만약 확인하지 못했다면 언젠가 다시 가야 할 곳만 남기는 큰 숙제가 되어 머릿속에 맴돌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는 끝까지 올라갔다가 돌아오길 잘했다. 암~ 목숨을 걸고 다녀오긴 했어도.

 

이대로 돌아봤다 아무 성과가 없겠다고 판단하신 안완식 박사님의 지령으로 단지무를 찾아나섰다. 단지무는 영평이란 곳에 있다고 하여 동부산업도로를 타고 영평동으로 향했다. 한창 도로 확장 공사에 여념이 없었는데, 눈이 내려 그런지 제주 사람들은 이 길로 잘 다니지 않았다. 멋모르는 외지인만 이런 곳으로 다니지 않을까? 

 

 

자 단지무다. 단지무를 찾으러 가는 게다. 영평 하동이란 곳에 안완식 박사님이 이전에 조사해서 찾은 분이 단지무를 심고 있다 한다. 전화통화를 몇 번 시도한 끝에 어떻게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데, 그분이 오늘 장날이라 자신은 집에 늦게 들어온다고 하신다. 이런... 하지만 오늘을 이렇게 끝낼 수 없어 대충 위치만 알려주면 물어물어 찾아보겠다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어려울 텐데..." 하시며 알려주셨다. 대략 그 정보만 가지고 영평동에 뛰어들었다.

 

제주는 밭과 무덤이 함께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참, 그러고 보니 강화에서도 자주 보았다. 섬이라는 특징인가? 농토가 부족한데 무덤을 쓰려면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영평동에 도착하여 이곳저곳 뒤지다가...

 

 

한참을 뒤지고 뒤지다가 어떤 무밭을 발견했다. 혹시 이곳이? 인간 네비게이션이 되어 지도를 들고 길을 안내하지만 참 난감하다. 표지판도 없고, 그 길이 그 길 같고, 머릿속에 그린 것처럼 나타나지는 않고... 답답하지만 어찌어찌 이 무밭까지 왔으니 일단은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허나 이곳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 산이 아니라신다.

 

꼼꼼히 단지무를 찾아 돌아보시는 안완식 박사님. 추운 날씨도 그 열정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단지무를 찾는 일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날씨도 궂으니 오늘은 작전상 후퇴를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 내일을 위해 구좌읍 평미리 사무소로 가 제주도 동부의 농업 현황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기로 했다. 해안도로로 내려오니 바람만 심하지 길은 괜찮다. 바람을 가르며 씽씽 달려 구좌읍 평미리 사무소에 도착해, 제주 여성농민회 사무처장 문경숙 선생님을 만났다. 아래는 문경숙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제주 동부에서는 밀감을 하다가 폐원하면서 이제는 거의 없다. 일조량이 부족한 환경 때문에 당도도 안 나오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신 당근이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이 하며 감자도 많이 한다. 당근은 한그루짓기로 끝인데, 동부 쪽으로 오면 대농이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토종 종자가 있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제주의 동쪽이 바람이 더 세다고 한다. 그래서 모래땅이 많다. 조천읍을 돌면서 느낀 것이지만 서부와 달리 사람도 별로 없고 땅도 척박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 때문이었나 보다. 문경숙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래서 서쪽에서는 동쪽으로 딸들 시집도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살기가 팍팍하다는 뜻. 그래서 산간에 가도 마을이나 사람이 없다. 어음리가 있던 서부의 중산간과 달리 동부의 산간은 황무지에 가깝다. 그렇다고 수심이 깊은 것도 아니여서 어항도 어판도 별로 형성되지 않았고, 성산이나 가야 겨우 있을 정도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산남과 산북은 일조량에 차이가 너무 크다. 일조량은 물론 바람과 토질, 고기잡이 등 동쪽은 확실히 살기 팍팍하다.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듣고 성산으로 가서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었다. 하루 종일 찬바람을 맞았더니 저녁을 먹으며 확 풀어진다. 오늘 묵은 숙소는 아주머니가 아직도 물질을 한단다. 흥미롭긴 하지만 그냥 오늘은 이불 덮고 푹 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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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날씨가 흐리고 공기가 차갑다. 바람도 좀 분다. 남쪽나라 제주도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안 되겠다. 일단 옷부터 단단히 챙겨 입어야지.

 

8시 40분 어음리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기 전 봉성리를 지났으나 거기는 별 거 없었다. 봉성리는 다들 큰 읍내로 출퇴근을 하시는가 보다.

 

결국은 찾은 어음리... 어음 2리 3129번지에서 일단 보리콩을 구했다. 뭍과 다르게 보리콩이란, 보리를 거둘 때 거두는 콩인지, 보리를 심을 때 심는 콩인지 잠시 헷갈린다. 뭐였더라???

 

 

 

이렇게 보리콩만 얻고 끝날 줄 알았다. 집이 워낙 정결하고, 뭐 알아볼 수도 없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끝날 수 없는 곳이란 걸 금방 깨달았다. 집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수확의 흔적들... 아래에 보이는 콩가리도 그렇다. 높이 쌓지는 않았지만, 두 분이 사시면서 이런 콩가리를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더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역시나 할머니에게서는 이것저것 있는 곳이 있으니 가자며 곳간으로 이끄셨다.누가 알았을까? 이곳에서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종자의 거의 절반을 다 보았다.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양혜옥(74) 할머니. 평생 농사만 지으신 할머니이신지라 사람이 찾아오는 일도, 사진을 찍는 일도 어색하시기만 하다. 그냥 할머니... 그냥 할머니시다.

그렇다고 할머니만 이런저런 씨앗을 보여주신 건 아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낯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농사를 다 보여주셨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낯선 사람...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씨앗을 보여달라고 채근하는 것이라 느낄 만도 한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보여주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마운지 이번 일을 통해서 새삼 절실히 깨닫는다.

 

 

계속 농사짓는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강형준(74) 할아버지. 늦더라도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집에 들어오면서 본 오이의 모습도 심상치 않다.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이것도 토종이라고 하신다. 물론 꼭 집어 토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지만, 여름에 더울 때 생채를 해 먹는다며 짤막한 것이 외이고, 길쭉한 것이 오이라며 우리에게 차이를 꼭 집어서 설명해 주신다. 아, 그래도 이렇게 봐서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걸 어쩌랴? 일단 사진에 한 방 남겼다.

 

 

다음 더 재밌는 일이 남았다. 이건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내 평생 처음 갔지만 정말 큰 배움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건이다.

정말이지 난 이걸 통해 제주도의 반은 다 돌아봤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이 집에서 개발시리를 배운 일이다.

농사짓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할아버지 할머니가 농사짓는 이야기로 넘어갔고, 곳간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조 이야기를 했는데, 검은흐린조를 심고 거두어서 먹는다고...

그래서 묻다 보니 답답하다 하시며 씨를 하려고 남긴 이삭을 들고 나오신다.

아~! 그래서 검은흐린조구나! 이게 검은개발시리조구나~!

 

 

시리는 ~처럼, ~같다는 뜻의 우리말이란다. 요즘은 이런 말도 안 쓰고 그런데 안완식 박사님이 넌지시 일러주셨다. 그러면 개발 닮은 조라는 뜻이라고 풀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개발이다. 개발 닮았다. 우리네 조상은 풀이름을 그 생김이나 특성을 닮은 한마디로 지었다는 것이 새삼 생각난다. 뭐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어음리에서 만난 토종 농가. 결국은 맛과 습관으로 계속 토종 농사를 짓는다는 말을 들었다.

 

 

 

제주도에서 이렇게 많은 토종으로 농사짓는 집을 만나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지으시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씨앗을 받아 놓으신 거며, 농기구며, 집짐승으로 보면 정말 제대로 찾아온 듯하다. 어디를 가서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날지 모르겠다.

여기서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대파니, 산두(밭벼)의 메벼와 찰벼니, 두줄보리(맥주보리), 메밀, 들깨, 시불콩(세벌콩) 두 가지, 백편두, 제비콩을 얻었다.

 

 

 

 

오늘은 씨를 조사하고 얻는 것을 그쳤지만,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농사짓는 법을 하나하나 꼼꼼히 듣고 싶다. 그날이 올까? 굳이 내가 아니여도 좋은데... 꼭 다시 찾아가 뵙고 싶다.

 

 

다음 집을 찾으러 나가다 배추를 씻는 아주머니가 계신 걸 보고 차에서 내려 언제나 그렇듯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마침 아저씨도 계셔 슥 나오셔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네 집에 아쉽게 토종은 없으니, 혹시 모르니까 저쪽 할머니 집으로 가보자며 우리를 이끄신다. 오고 보니 아까 바로 그 집 바로 밑에 집이다.

이곳은 어음리 3039번지 이문자(84) 할머니 댁이다. 이제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신 듯하셨는데, 집 안은 깔끔하지만 집 밖은 미처 손이 다 가지 못한 느낌이다. 

 

이문자 할머니. 얼굴과 달리 고운 손을 보며 젊으셨을 땐 참 곱지 않으셨을까 생각했다. 

 

 

할머니는 시집 와서 계속 심었다는 고추를 꺼내 보여주셨다. 크기가 무척 작다. 이제와서 고추를 보니 맵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더운 나라 고추일수록 크기가 작던데 크기는 작으면서 무지 매울 걸 보면 매운 정도가 응축이라도 되는 걸까? 할머니는 고추를 음력 3월이면 심는다고 하신다. 나는 씨로 심으면서 곡우 무렵에 심으니 그럼 음력 5월쯤일 텐데, 따뜻한 곳이어서 그런지 빠르긴 참 빠르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오래사신 만큼 집 안에도 오래된 물건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화로다. 변택호라고 써 놓은 화로는 내 기억 속의 그것과 달리 옹기 종류였다. 겉에는 페인트를 칠한 것인지, 아님 제주의 옹기가 원래 이런 색인 것인지 참 오묘했다. 아직도 불을 담아 쓰셔서 그런지 반질반질하게 보존상태가 참 좋다. 뭐든지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면 뽀얗게 먼지가 앉다가 스러져 사라지는 법.

 

예전에 제주 허벅 전시회에 갔을 때 느꼈던 제주 특유의 옹기가 생각났다. 제주는 흙이 달라 그런지 옹기도 참 별나다. 

 

 

이제 어음리를 뜰 시간이 왔다. 또 다른 곳에 있을 토종을 만나러 가야 한다. 안완식 박사님은 못내 아쉬우신지 나중이라도 여기를 꼭 다시 한 번 들르고 싶다고 하신다. 박사님의 그 바람을 일단 뒤로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나섰다. 아니 근데 나가다 보니 나중에 또 오더라도 이곳은 한 번 들러야겠다는 곳이 보였다. 다시 차에서 내려 그 집으로 찾아들어갔다.

 

어음리 2963번지 부창(70) 할아버지 댁. 더 많은 걸 기대했으나 할아버지께서 알고 계신 것만 꺼내서 보여주었다. 검은콩(쥐눈이콩)은 보통 것보다 크고 눈도 검다. 올해는 드물게 심었는데, 아무튼 많이 달린다고 하신다. 밥에 섞어 먹기도 하고, 그냥 갈아 콩국도 먹고 하는데, 콩나물은 안 된다. 6~7월쯤 늦게 심어도 빨리 익어서 좋다고 한다. 그 다음 백천이란 콩이다. 주남에 있던 것인데, 이건 그렇게 많지 않다. 이걸로 콩나물을 길러 먹는단다. 마지막으로 열 몇 살 때부터 심던 줄콩까지 얻었다.

 

부창 할아버지 댁의 맞은편 집. 형식은 제주의 옛날 집인데, 사람은 살지 않았다. 농막 정도로 쓰고 있었는데, 태극기를 꽂아 놓은 모습이 신기해 한 장 찍었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까?

 

 

이제는 진짜 어음리를 떴다. 토종이 엄청났던 그 집. 아마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최고가 아닐까 한다. 역시 두 내외분이 함께 농사를 지으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남자나 여자 혼자 살면 그렇게까지 가지고 있기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다.

 

다음으로 찾은 동네는 애월읍 납읍리라는 곳이다. 요즘 제주 올레길 걷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올레길을 제대로된 동네 골목길을 참 많이도 걸었다.

 

옛 올레. 사실 제주에서도 이제 이런 곳은 흔하지 않다. 차가 드나들기 좋게 시멘트로 바른 길이 더 많고 이런 길은 어쩌다 마주칠 뿐이다. 이 골목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떠오른다. 좁고 긴 구불거리는 골목, 그 옆으로 늘어선 낮은 담장. 이 길의 반대편에 있던 막다른 집에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살았다면 이 길은 사라졌을 게다.

 

 

그 올레의 한쪽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가 얼마나 마당을 예쁘게 가꾸셨는지 모른다. 문 앞에 다가가 조심스레 사람을 찾으니 한 아주머니께서 나오신다. 이야기를 들으니 원래 이 집 주인은 방 안에 계신 할머니인데, 이제 나이가 많으셔서 거동이 편하지 않으시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가 100세나 되셨다고 한다. 대신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양계생(96) 할머니만큼 나이를 먹었을 집. 자식들은 다 뭍으로 나가 살고 할머니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마저 이곳을 떠나시면 집도 스러질 날이 오겠다. 앞에 분홍색 바가지를 올려놓은 곳이 물구덕에 물을 길어와 등에 져 나른 뒤 올려 놓는 곳이다. 땅에 내려놓다가 깨질 우려도 있고 힘도 더 드니 이런 구조가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이곳을 물팡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엌에는 큰 물항아리를 두고 일상용수로 썼다.

 

언뜻 보기에도 여기저기 씨앗이 널려 있었다. 당뇨에 달여 먹으면 좋다고 하는 염주, 강낭 또는 태주부루기라고 불렀다는 옥수수, 차나룩(찰벼)이라 부르는 산디, 강낭깨라는 제주식 이름의 해바라기, 보리, 결명자 씨앗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력이나 설명은 할머니께서 방 안에 누워계셔 듣지 못했다. 그건 아쉽지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방 안으로 남자 셋이 불쑥 들어가 휘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몸조리 잘하시라 밖에서 이야기만 드리고 집을 나왔다.

 

다음으로 간 집은 납읍리 1825번지의 양찬기(81) 할아버지 댁이다. 이 집에 오기 전 바로 앞집을 들렀는데 사람이 없었다. 그 집도 참 오래되어 보이는 번듯한 집이었다. 대문 바로 옆에 창고에 옛 물건들이 한가득 쌓여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사진만 한 장 찍었다.

 

멍석이 엄청 많은 걸 보니 농사 규모가 꽤 크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 보았다. 천장에는 쟁기도 보인다. 꺼내 내려놓고 싶었지만 이것도 주인이 계시지 않아 구경만 하고 말았다.

 

 

아무튼 그래서 찾은 집이 양찬기 할아버지 댁이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곳에 와서도 예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다. "혹시 옛날부터 심던 배추 없어요?" 아니 그랬더니 여기서도 그게 있다며 따라오라신다. 할아버지를 따라 광으로 들어가니 선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께서는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제 홀로 남으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씨앗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 뭐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할머니가 보통 이 부근에 씨를 놓고 썼다며 뒤적이신다. 안타깝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대가 끊길지 모를 씨앗을 가져가 보존하고 퍼트릴 테니 다행이다.

이 배추는 옛날에는 국도 끓여 먹고 김장도 해 먹던 것이란다. 100년쯤 됐을 것이라 기억하시는데,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 심었던 기억이 난다고 그러셨다. 그러면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심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는데, 그건 정확하지 않으니 일단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기록. 그것 말고 시금치와 무 씨앗도 얻었다. 사람은 가도 씨앗은 남았다. 이 씨앗도 지금에서 시간이 더 가면 사라지겠지만, 오늘은 우리가 가져가 보존할 수 있을 게다.

 

양찬기 할아버지 댁의 광에 있는 곳.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이곳에서 이런저런 씨앗이 많이도 나왔을 텐데...

 

 

이제 차를 타고 납읍리를 떠나 상가리로 향했다. 상가리에 들어서니 커다란 폭낭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에서도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한참 뒤로 물러나 찍었는데도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다. 이 나이의 나이는 놀라지 마시라. 무려 1000살을 추정하고 있단다. 1000살. 이 어마어마한 시간을 한자리에서 보냈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자체로 신이라 할 수밖에...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무가 1000년을...

 

 

 

이 나무를 감상하고 앉아 있을 시간은 없어 사진에만 담고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이곳 1768번지 김창생(80) 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호박 하나를 얻고, 그 집 골목에 있던 피마자의 씨를 채집하고, 돌고 돌았으나 별 다른 것은 더 없었다. 상가리에서는 나무 구경 하나 잘했다. 1000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상가리에서 장전리로 가는 길에 허름한 집에 들렀다. 할머니께서 마침 어딜 다녀오셔 만날 수 있었다. 보관하고 계신 많은 씨를 보여주셨는데 특이한 것은 없어 수집하지는 않았다. 이곳을 나와 거문덕이라는 곳에 올라가다 피마자 하나를 수집했을 뿐.

 

 

상가리를 떠나 장전리로 접어들었다. 꾸물거리던 날씨는 부슬비로 바뀌었다. 날씨도 꾸물거리고 어음리 이후에는 마땅한 곳도 없고 지친다. 일단 차를 세우고 오줌이나 싸면서 쉬려고 내렸다. 그런데 밭에 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게 또 심상치 않은 것인가 보다. 안완식 박사님이 얼른 이 무밭 주인이 누구인지 주변 좀 수소문해 보라고 하신다. 박사님께서 기다리던 것을 만났나 보다.

 

 심상치 않은 크기의 무. 옛날 제주의 단지무라는 것이 있었다. 오강단지처럼 짧고 불룩한 생김인데, 제주 사람은 그걸 먹었단다. 지금은 사라져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다니다 그걸 만나면 그 복원작업을 한결 손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을 게다.

 

그렇게 찾은 집이 장전리 전 이장을 하셨던 양성진 아저씨의 집이다. 농진청에도 몇 번 오간 적이 있다며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커피까지 한 잔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수소문해 주셨다. 장전 197번지에 사는 강창하란 사람을 찾으라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일러주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서 찾아갔는데, 길을 잘못 들어섰다. 인간 네비게이션의 실수. 그래서 유수암리라는 곳까지 올라갈 뻔했다. 유수암리는 이따 들르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왜 벌써 왔을까나. 다시 내려가 처음부터 짚어 나갔다.

근사하게 지은 양옥집을 가지신 강창하 씨 댁에 도착해 말씀드리니, 단지무는 아니고 장에서 사다가 심은 것인데 남은 씨가 감귤밭에 있다며 함께 가자신다. 감귤밭에 도착해 씨를 찾아오시는 동안 피마자와 들깨 씨를 채집했다. 이 들깨는 키가 2~2.5m는 되는 것이 뭘 먹고 이리 큰지 모르겠다. 율무도 있길래 얼른 씨를 챙겼다.

남은 무 씨를 들고 나오셨는데, 영광무라는 종류였다. 영광무... 이후 일정에서 자꾸 만날 이름인지 이때는 몰랐다. 이 무가 사진에 있는 것보다 더 불룩해져서 자꾸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장전리에서 볼일을 다 마치고, 아까 가려고 했던 유수암리로 향했다. 부슬비는 계속 내리고 사기는 떨어지고 해가 넘어갈 시간도 다가오고... 이제 오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수암리는 생각보다 작은 동네였다. 중산간이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람은 별로 살지 않았다. 그나마 감귤이 집하장이 많아 더 그랬을지 모른다. 이곳에는 제주에서는 흔하지 않은 샘이 콸콸 나오는 곳이었다. 날이 을씨년스러워 그런가 맑은 날 보면 예쁘고 시원했을 샘이, 시커멓고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무섭다. 물은 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뭐든 다 그렇지만 물이 성을 낼 때 보면 엄청 무섭다.

유수암리에서는 1939번지에서 강인자(67) 할머니를 만나 집 앞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던 수수와 꼭두서니를 얻었다. 이것 말고는 다른 건 다 사다 먹거나 심는다고 하신다. 이 일대만 해도 감귤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이후 소길리로 갔다가 더 이상 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시고 차를 돌렸다. 소길리에 가서도 별 게 없었다. 비만 내리고... 해안 쪽으로 내려가 숙소를 잡고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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