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통일벼와 한국의 농업정책에 관한 좋은 글... 한가지 지적할 점은 통일벼를 둘러싼 논란의 궁극적 원인은 밥맛은 물론 농법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김태호 박사가 미처 그것까지는 조사하지 못했는가 보다.

 

http://t.co/LyoQDbQe3S





 

통일벼는 그 육종계통상 추위에 약한 품종인데다 생육기간이 긴 만생종이었다. 그래서 모내기를 앞당길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논에서 밀과 보리의 이모작이 불가능해졌다는 사실. 농민들이 벼에만 올인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통일벼가 지닌 특징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추위에 약하다보니 못자리도 예전과 같은 물못자리가 아니라 비닐터널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농자재 비용도 당연히 같이 상승하게 되었다. 밥맛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존 농법과의 충돌도 농민이 통일벼를 기피한 무시할 수 없는 요인.

 

당시 때려잡자 공산당 식으로 통일벼 이외의 벼를 심은 논은 공무원들이 달려들어 다 밟아버렸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치 일제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듯한 풍경이었다. 관의 거센 압력으로 울며 겨자 먹기로 통일벼를 심었지만 그 울분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농정과 통일벼를 통하여 벼 생산성은 높였지만, 농업생물다양성이라든지 다각화된 영농 등 농업의 탄력성에 중요한 요소들이 싸그리 무시되고 사라지는 바람에 한국의 농업이 지금과 같은 악화 일로를 걷게 되고 농민들은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728x90

'농담 > 씨앗-작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의 토종 무 복원운동   (0) 2014.09.05
유전자변형 작물의 왕국, 미국  (0) 2014.08.29
퀴노아는 슈퍼푸드인가?  (0) 2014.07.23
작물계의 바람둥이, 옥수수  (0) 2014.07.16
옥수수의 가치사슬  (0) 2014.06.25
728x90

동족상잔이란 처참한 일을 겪은 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하나의 유령이 남북한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흰쌀밥에 고깃국"이란 이름의 신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도록 노력하자고 경주했고, 사람들은 평생 소원이 고깃국에 흰쌀밥을 말아 배터지게 먹는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북한이 앞서는 듯했다. 누구는 일제강점기 남쪽은 식량생산기지였지만 북한은 공업지대라서 그런다고 한 듯하다. 누가 그랬는지는 기억나제 않는다. 내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후회할 뿐. 아무튼 그런 헛소리가 어떻게 나왔나 모르겠다. 북한에다 2차 유럽전쟁과 미일전쟁 때 남은 모든 걸 쏟아부었다는 건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란 걸 세워 착실히 공업화의 길을 밟아 나아간 결과일 뿐이다. 그에 자극 받은 장면 정부에서도 카톨릭인가 개신교인가 쪽의 연줄을 통해 미국에서 지원을 받아 경제개발을 추진하려 했다는 얘기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한 우리의 박 장군! 소시적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는 데에는 도가 텄으니, 난 그가 여순 사건에서도 활약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라웠다. 역시나 그 탁월한 능력으로 4.19혁명 이후 아직은 어수선한 정국을 놓치지 않고 정치의 전면에 부상한다. 아, 아직도 그 한 장의 사진을 잊을 수 없다. 멋진 검은 색안경을 끼신 땅땅한 그 자태, 그리고 그 옆을 듬직하게 지키던 영화배우 김원희인가와 똑같이 생긴 차씨 아저씨의 모습을... 사진이 있나 찾아봤더니 여자배우 김원희만 잔뜩 나온다. 우씨. 참 이게 김원희 씨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름름한 자태를 보라!



이제 본격적으로 가난하고 배고픈 조국을 새롭게 바꾸기 위하여 특유의 군바리 정신, 대일본 관동군 방식으로 국민을 몰아치기 시작한다. 먼저 국내 정치 기반을 잘 닦는 한편, 1960년대에 있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닦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유명한 건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2년 5개월만에 역사하신 경부고속도로.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대하면 빨갱이~


나를 파라!



어째 사진에서 보이는 구호가 4대강 뚫는다는 요즘 모습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아 씁쓸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쥐박이 대통령께옵서도 색안경 끼고 나오면 이상하게 비슷하더군. 하지만 길은 뚫린다. 길이 뚫리고 심장부터 발끝까지 혈관이 새로 뚫린 듯 자동차가 화물이 무섭게 하나둘 달리기 시작한다. 

새것과 헌것의 공존.




이제 슬슬 고민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 쉬발~ 길도 뚫고, 일본한테 빌어서 돈도 구해오고 공장도 짓고 하는데, 일할 새끼들이 안 보이네?' 지금 같으면 외국사람들 데려다 시키겠지만, 거기도 지금처럼 이렇게 일하러 올 사정은 되지 않고... '아! 농사꾼들이 있었지. 일단 값싸게 그놈들 먼저 데려오자.' 이렇게 하나하나 옆집 철수 형, 우리 영희 누나가 도시로 도시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보내오는 도시의 신기한 물건들은 아이들에게 '도시에 나가면 흰쌀밥에 고깃국도 실컷 먹고, 테레비에서 재미난 것도 많이 보고...' 하는 엄청난 환상을 심어준다.




그때 시작된 새마을운동. 아직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확실한 건 미신 타파! 새로운 마을 조성! 을 외치며 중국의 문화혁명 못지 않게 농촌 마을에 엄청난 바람이 불어닥친다. 그것이 결국 이농과 공업화, 농촌의 식량 생산기지화와 맞물려 있는 건 아닌지...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메이지정부는 후쿠오카의 발달한 논농사 방법을 온 일본으로 퍼뜨리기 시작한다.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경.제.성.장! 이다. 그때는 흰쌀밥에 고깃국! 이라는 구호가 그것을 대변하고, 지금은 국민소득 2만 딸라 이상의 선.진.국! 일본의 메이지정부도 그걸 놓치지 않고 우리가 막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세운 이유는 여러분에게 흰쌀밥을 실컷 먹게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해야 했기에, 후쿠오카의 농법에 기반하고 서양의 발달한 농법을 접목- 줄모, 긴네모꼴 못자리, 말 쟁기질, 소금물 가리기, 화학비료, 품종개량 등등 -하여 생산량 증대와 경작지 확대를 위해 노력한다. 

 

사실 일본도 그 이전에는 강 하구의 평야지대에서나 논농사를 지었지 대부분은 밭농사나 산에서 먹을거리를 구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농지 정리나 관개법 등은 중국이나 서양을 시찰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 들여오지 않았을까 하는데, 밭농사 중심의 생활이다 보니 바닷가의 수산물과 산간 지방의 농림산물을 서로 교환하는 형태로 먹고 살았다. 더구나 평야에서 논농사를 짓는다는 건 자기 목숨을 내걸고 해야 하는 일... 전란이 많았던 일본에선 전시가 되면 농민이 군인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목숨 걸고 논농사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자유롭게 산으로 다니며 화전이나 부쳐 먹는 게 더 속이 편했을 게다. 그래서인지 일본 박물관이나 자료를 뒤지면 화전에 대한 기록이 참 많이 나온다. 그 나라의 자연조건이 또 거기에 알맞기도 하고... 그래서 일본 한자에서 밭은 우리의 田이 아니라 畑이지 않은가? 밭에다 불을 놓은 형상이 밭이고, 우리의 밭 전 자가 논두렁으로 구획이 나누어지는 논이다.

 

일본의 메이지정부가 야심차게 쌀 생산량 증대를 꾀하면서 쌀까지 배급해 주기에 이르니, 이런저런 걸 통해 쌀맛을 본 사람들이 이거 쌀 아니면 못 먹겠다며 쌀에 환장해 버린다. 그러니 자연히 생산량이 새로운 농법의 도입으로 늘었다지만 그 수요를 다 맞출 수 없게 된다. 거기다가 전쟁까지 벌이러 꿍꿍이를 세우니 군량미 등으로 얼마나 많은 쌀이 필요하겠는가. 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보상해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용할 양식이니 말이다. 결국 조선과 대만은 일본의 식량 생산기지로 전락한다. 일본이 권업모범장-농사시험장을 세워 조선의 농업을 발전시킨(?) 이유는 다 그런 꿍꿍이에서 나왔을 게다. 조선의 근대화? 그것도 더 말하면 잔소리!

 

쌀맛은 참 기가 막히다. 요즘도 현미잡곡밥을 먹다가 어디 식당에 가서 흰쌀밥,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흰쌀밥을 먹으면 그냥 밥이 꿀떡꿀떡 넘어간다. 진짜 꿀떡이 따로 없다. 몇 숟가락 안 떠 먹었는데 밥은 어디로 다 사라지고 없다. 당시 일본도 그러지 않았을까? 잡곡밥 위주로 먹던 사람들에게 메이지정부는 흰쌀밥의 맛을 일깨워준다. 조국의 근대화란 이런 것이다! 보아라, 그리고 먹어라~! 너희를 구원하는 건 이 메이지 정부다!

 

그리고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일본을 통해서 흰쌀밥을 접하게 된다. 그것도 뼈에 사무치도록... 어르신들 만나 일정 때 이야기라도 꺼낼라 치면, 대뜸 그놈들이 얼마나 독한지 땅 파고 묻어 놓은 것까지 다 뺏어 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야 다들 잡곡밥을 주로 먹었을 테고, 나랏님이나 양반님네들이나 그런 높고 귀하신 분들이나 흰쌀밥을 먹겠거니 했다. 그리고 논농사도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넓지 않았을 테고, 넓었다고 한들 내가 부쳐먹을 땅이 있으니 소작을 해서 양반님네한테 바친다손 쳐도 내 식구 먹을 떼거리는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 판에, 나라의 마마까지 일본놈들한테 죽는다고 하지 않나, 나랏님도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지를 않나 흉흉한 소문에 팍팍한 세상살이가 되었겠지. 그런 판국에 이놈들이 뭐 빠지게 일해서 농사지어놨더니 이런 도둑놈들도 도둑놈이 없지, 농사지은 거에 비료값이다, 종자값이다, 무슨 값이다 하면서 다 제하면 30% 떨어지면 잘 떨어지는 것이니 열받지. 그래도 꾹꾹 참으며 농사꾼이 땅파먹지 않으면 뭐해 먹겠냐, 다른 걸로도 끼니나 때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농사만 지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이 벌어지고,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미일전쟁까지 일으키면서 생활은 참담해진다. 그러면서 뼛속 깊이 새겨진다. 내 꼭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세상을 한번이라도 봤으면 좋겄네! 그리고 그게 그 뒷세대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 박정희는 그 민심을 읽고, 내가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여주마! 나를 따르라~ 대신 조용히 해. 아무것도 묻지도 말고 따지지 마.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까라면 까고, 맞으라면 맞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 그런데 어디 사람이 그런 존재인가. 모두 자신의 자유의사가 있고, 누구나 자유롭다는 헌법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참 어두운 시대였다. 

 

박정희는 결국 1977년 식량자급율 100% 달성이라는 발표를 하고 조국의 녹색혁명을 완수한다. 하지만 그의 공업화와 녹색혁명으로 잃은 것들... 마을 단위의 공동체 정치와 문화생활, 작물다양성을 비롯한 생물다양성, 지속가능성, 지역 균형발전, 고르고 균등한 분배, 동등한 출발선,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기본권 등등이지 않을까?   

728x90

'농담 > 농업 전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여성 농민의 고충  (0) 2011.01.25
목화와 식량안보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0) 2011.01.18
새마을 규약  (0) 2011.01.16
기업농과 소농의 차이  (0) 2011.01.10
식량주권이란?  (0) 2011.01.10
728x90

'박정희' 하면 흔히들 굶주림과 배고픔을 해결한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사람이 꽤 많다. 하지만 난 다르게 본다.

 

당시 우리의 상황은 이렇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에서 엄청난 수탈과 강제징용 등을 행해 국내 생산 여건은 파탄이 난 상태.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전쟁이란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그러면서 더욱더 국내 생산 여건은 피폐해진다. 그렇게 30여 년, 보릿고개란 말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여기저기 굶주리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렇듯 우리만의 생산 여건으로는 버티기 힘들어, 철의 장벽이란 말로 대표되는 공산권과 자본주의권이 갈린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남한에서는 이승만이란 사람이 그 상황을 자신의 권력욕과 잘 버무리면서 자리를 지킨다. 그러다 터진 사건이 바로 4.19혁명. 혁명이 일어났지만 모두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댈지 논의만 하다가 그 기회를 틈탄 박정희에 의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여기서부터 박정희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 경제개발을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일로 삼는다. 공업 부문은 차치하고, 농업 부문만 살피자면. 배고픔의 해결은 주식인 쌀의 자급자족에 있다고 외치며 다수확 품종을 육종하여 보급한다. 그 논리는 어떻게 보면 식량생산기지 역할을 잘하려면 다수확이 최고라고 외치던 일제와 비슷하기도 하다. 아무튼 그 결과 누구나 아는 통일벼가 탄생하고, 통일벼가 아닌 다른 벼는 수매를 막거나 아예 못자리 때부터 밟아 버리거나 다른 벼를 심으면 간첩으로 몰았다. 그처럼 엄청나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통일벼'가 우리 농촌에서 통일을 이룩한다. 그러면서 생긴 결과는, 그나마 살아 있던 우리 토종이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어디 그뿐인가. 배고픔의 해결 = '다수확'이란 표어는 화학비료와 농약, 그리고 농기계를 엄청나게 투입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생물다양성은 물론 농촌에는 환자들과 중독으로 숨지는 사람들이 생기고 밥상에는 안심하고 먹을 만한 것들이 사라진다. 오죽하면 내가 먹을 거에는 농약을 덜 치거나 안 친다는 사람이 생기기까지 했겠는가.

또 그로 인해 발생한 가장 큰 문제인 이농 현상. 배고픔의 해결을 농촌의 자생력에 맡긴 것이 아니라 외부 투입 자재에 맡기고, 거기서 생긴 잉여 노동력은 공업 개발에 투입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모두들 도시로 도시로 나가게 되고, 도시는 과밀화 현상으로 달동네가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생긴다. 농촌은 그런 도시의 임노동자들의 하루 끼니를 책임지는 곳으로 전락, 더이상 농촌에는 사람도 문화도 살 수 없는 공간이 되어 가도록 방치되었다. 물론 이 부분은 배고픔 해결과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하려다 보니 생긴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더구나 당시는 북한과 엄청나게 경쟁하던 때가 아니던가.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치며 농촌은 죽고 도시 과밀화 현상이 진행되면서, 또 몇몇 대기업에 의한 수출주도형 산업이 우리 경제를 책임지면서 수입의존도, 특히 농산물 분야의 수입의존도는 어쩔 수 없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자화상은 식량자급률 25%. 그나마 박정희가 강조한 '흰 쌀밥에 고깃국'을 빼고 나면 자급률은 5%대까지 곤두박질친다. 이것이 녹색혁명의 결과이다.

 

녹색혁명, 그 취지는 이해한다만 그걸 이룩하는 방법은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박정희에 비판적인 이유이다. 박정희도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산물, 이제는 박정희의 방법과 다른 방법론을 펼칠 사람이 필요해지는 시대가 다가왔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