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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말쟁기질 교사가 남긴 것

 

 

시작하며

 

에도시대의 농경도 말이나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찍은 농사 풍경에는 종종 '코잡이'나 '입잡이'를 하는 2인 말쟁기질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쟁기를 누르는 '쟁기꾼' 역할 외에 입 근처의 재갈에 대나무 장대를 묶어 말을 유도하는 '코잡이' 역할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말을 똑바로 걸어가게 하거나, 방향 전환을 시키거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코잡이'는 써레질이나 흙덩이 부수는 작업에도 많이 행해졌는데, 이는 말이 얼마나 쟁기나 말괭이 등의 견인식 농기구에 대한 길들여지지 못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농기구 사용은 사람에게도 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고, 나름의 수련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쇼와 중기 무렵까지에는 2인 말쟁기질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쟁기를 짊어지고 온 일본을 돌아다녔던 '말쟁기질 교사'라는 이름의 사람들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가 식산흥업의 일환으로 농업의 근대화를 모색하던 와중에, 더 풍토에 적합한 개량을 추진하기 위해 재래 농법의 역사를 답습하는 게 중요시되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란 메이지 16년 농업기술의 개량, 보급을 목표로 했던 노농의 한 사람, 하야시 엔리林遠里의 사설 권농사가 후쿠오카에 설립되었던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볍씨의 저장법이나 제초 기술, 그중에서도 습논의 건논화에 따라 일어나는 수확고의 증수가 명확한 목표였습니다. 건논에서는 뿌리를 깊게 내려 비료를 주기 위한 깊이갈이가 필수이고, 그 때문에 쟁기질과 암거배수 기술을 보급, 지도하기 위한 사설, 군, 현, 시험장, 나아가서는 쟁기 제작소 등에서 파견된 말쟁기질(소쟁기질)의 기술전문가들의 모습은 1950년대 전후의 무렵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후쿠오카현 권업시험장의 장이었던 무렵의 요코이 토키타카横井時敬 등도 각지에서 오는 요청에 응하여 말쟁기질 교사 또는 벼농사 개량 실업교사를 추천하고 파견했습니다.

 

사진1 큰괭이를 끄는, 입잡이식 2인 말쟁기질 풍경(Le Japon Illustre 1915년에서)

 

사진2 말을 '코'에서 코잡이하고, 써레질 작업을 한다. 1957년(촬영:菊池俊吉)

 

 

사진3 말 그림 <말쟁기질>. 1887년 야마가타현山形県 츠루오카시鶴岡市 구마오카熊岡 신사 소장(사진: 이타바시구板橋区 향토자료관 제공). 메이지 시대에 들어 후코오카에서 적극적으로 말쟁기질 교사(또는 개량 실업교사)를 초빙한 쇼나이 평야를 중심으로 한 곳에서는 건논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들의 공헌에 감사한 마을사람들이 봉납한 말 그림에는 모두 소소하게 후쿠오카 쟁기(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쥐고 있는 말쟁기 교사가 그려져 있다.

 

 

일찍부터 건논화가 진행되고, 좋은 말의 산지이기도 했던 규슈에서는 후쿠오카, 구마모토, 사가의 평야 일대가 말쟁기질의 선진지였습니다. 한편, 칸토우에서는 말괭이를 사용한 써레질을 말로 행하는 지방도 있었는데, 논이 많고 깊이갈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대한 쟁기는 일부 밭농사 지역에서 사용되었지만, 매우 불안정하고 깊이갈이는 어려워 칸토우 명물 2인 말쟁기질이 나쁜 관례로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서쪽 소 동쪽 말'이라 이야기되듯이, 칸사이에서는 말보다 습논 작업에 안정감이 있는 소를 써레질 작업에 이용할 수 있었기에, 1인이 부리는 기술이 일찍부터 정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큐슈 고향의 경려회競犁會에서 솜씨를 연마한 말쟁기질 교사들은 건논화가 늦어지고 있던 도호쿠, 칸토우 지방에 파견되는 일이 많았는데, 후쿠오카의 재래 쟁기(안아 쥐고 서는 쟁기)에서부터 다이쇼 시기에 만들어진 근대 짧은바닥쟁기로의 획기적인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그것의 보급이나 농기구의 변화에 따른 쟁기질 방법을 가르칠 필요성도 생겨, 칸토우에 한정하지 않고 칸사이도 포함해 전국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의 경려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3회 거두면 군의 말쟁기질 교사에 추천되고, 한층 실적을 쌓으면 현에서 인정된 말쟁기질 교사가 되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는 지역의 학교장보다 명사 대접을 받는 등 사람들이 동경하는 새로운 직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측이었던 마을 사람에게도 처음에는 "어려운 말(성질이 사나운 말)"을 순식간에 제압해 낯선 쟁기질의 시연을 실시하는 신기한 기술을 구사하는 "말꾼"이기도 했습니다. 

 

사진4 시즈오카의 여자 말쟁기질 강습회에서, 산 모양의 모자와 조끼 차림으로 지도하는 후지노 토쿠오藤野徳雄씨. 나라의 명을 받아 최신 기술을 전하는 지도자의 풍격과 기개가 감돈다. 쇼와 초기 (사진: 말 박물관 제공)

 

 

말쟁기질 교사 중에는 전국을 쟁기 1대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면, 모범논을 만들어 그 성과를 보여주면서 오랜 세월 자리잡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도호쿠 지방에 남은 봉납 말 그림에는 근대 농법 보급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씩씩하게 말과 쟁기를 조종하는 말쟁기질 교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 그림은 성과를 얻은 마을사람들의 감사의 증표였습니다. 

"최후의 말쟁기질 교사"라고 이야기되었던 후지노 토쿠오藤野徳雄 씨는 1900년 말쟁기질 선진 현인 후쿠오카현의 가스야군粕屋郡 시메마치志免町에서 태어나 사이타마현에서 죽었습니다. 1971년에는 축력 이용의 개선지도와 농기구의 개량에 전력을 다 한 것에 대하여 공훈 5등 서보장瑞宝章을 서훈했습니다. 당시의 가스야군은 말 육성이 성행해 망아지를 3-4세가 되기까지 기른 뒤, 야마구치 지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이 군에서는 후지노 씨 이외에도 많은 말쟁기질 교사가 배출되었습니다.

후쿠오카 번사였던 할아버지도, 농민이었던 아버지도 말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도 취학 전부터 말괭이를 손에 들고 경작을 시작했습니다. 1915년 농학교 3년(중학교 3학년) 때에는 시멘무라志免村에서 말쟁기질 경려회에 뛰어들어 참가해 줄을 선 청년들을 누르고 우승합니다. 후쿠오카 농학교를 졸업한 뒤, 시즈오카현 농림기술시험장에서 근무하고, 그 뒤 사이타마현 시험장으로 옮깁니다. 대일본 농회農會, 일본 마사회 및 각 현 주최의 말쟁기질 강습회나 연성회, 경려회 등을 통하여 말의 길들이기나 쟁기의 경운방법을 계속 지도했습니다. 실제로 약 20만 마리의 말을 길들이고, 50만 명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만년에는 카와사키, 후나바시船橋, 우라와浦和, 오오이大井의 경마장에서도 근무했습니다.

그림1 도도부현별 말 경작면적의 추이. 농림성 통계표를 바탕으로 작성. 다이쇼 14년: 우마 경작면적, 쇼와 17년: 말 경작면적

 

 

1931년 연성회에서 국립 종마 육성소장 사와라 케이지佐原敬二 씨(전 육군 기병 대좌)와 함께 길들이기 솜씨를 선보인 것이 큰 자신감이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술회했습니다.

 

후지노 씨의 일은 크게 구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건논화와 깊이갈이를 목적으로 하는 쟁기질 보급 지도. 특히 2인 말쟁기질의 관행을 개선해 1인 말쟁기질로 만든 점.

2. 농기구, 특히 멍에의 개량에 의한 효율 좋은 말쟁기질 지도.

3. 두둑짓기의 개선 등을 수반한 사이갈이 제초의 지도.

4. 시험장에서 쟁기, 괭이, 고무래, 사이갈이 도구, 멍에 등의 비교시험을 개선.

 

말쟁기질 교사가 활약했던 시대는 일본 말의 대변혁기이기도 했습니다. 메이지 시기에 일본에 주재하던 서구인들이 놀라며 기록했듯이, 일본 말의 대부분은 서양의 시점에서는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였습니다. 무사가 전장에서 타는 준마는 '성질'이 강한, 거친 말이었습니다. 메이지 초두 관리들의 승마조차도 말과 함께 좆아 달리는 마부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말도, 국가의 마필 개량사업에 의해 양상이 달라져 갑니다.

메이지부터 종전까지는 군용마의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 '말 정책 1차 및 제2차 계획(1906-1945년)'이 시행되었습니다. '일본 말의 개량' 즉 재래종의 잡종화는 심상치 않은 속도로 진행되어 쇼와 시대 초기에는 국내 말의 90%가 교잡종이 되었습니다. 세계 표준에서 보면 조랑말 유형의 일본 재래 말(체고 약 100-135cm)를 서양종과 교배해 대형화(체고 약 145-165cm)하는 것이 우선 희구되고, 다음으로 승용, 수레용, 짐용으로 그 개량 방침도 용도별로 세분화했습니다. 그리고 종전 뒤에는 범용성이 높은 중간종의 농사용 말이 일반적으로 선호되었습니다. 

당연히 말쟁기질 교사들이 다루는 말도 재래종에서 교잡종으로 변해 갔습니다. 앵글로 노르만종, 헤크니종, 브르통종 등의 서양 품종의 피가 섞여 기질면에서도 온순해졌습니다. 또, '마필 거세법(1901년)' '종마 통제법(1939년)'의 집행에 의해 수말의 거세술이 널리 보급된 점도 다루기 쉬움을 조장한 것입니다.  

'말 길들이기'의 단계부터 시작해야했던 초기의 말쟁기질 교사들과 대개 사람에게 익숙해진 말에게 쟁기를 연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던 후기의 말쟁기질 교사들 사이에는 노고가 달랐음을 상상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태우는 것과 쟁기나 말괭이를 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일로 새로운 일에 말은 저항을 나타냅니다. 특히 바로 뒤의 사각지대에 연결된 불안정한 쟁기는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이 공포를 없애도록 길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길들이기가 부족한 말이 작업중에 놀라서 쟁기를 끌고 다니면서 논에서 논으로 달려 도망치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었던 듯합니다.

 

표1. 소쟁기질, 말쟁기질의 경작면적, 능력 비교

 

                          쟁기질 시간(시간)    /   평균속도(cm/초)

습논 :      소                3.8                           59.94

               말                4                              89.91 

 

건논 :      소               2.3                            73.26 

               말               1.6                          145.32

 

습논 경작면적 : 약 1,180㎡

건논 경작면적 : 약  992㎡

「牛耕ト馬耕比較試験」 『畜力利用講義』, 社団法人 大日本農会(昭和9年)을 바탕으로 작성

 

 

길들이기의 비법

후지노 씨는 자신이 실시하는 말 길들이기의 방법은 오직 자신의 경험과 공부에 의지한 자기류이기에, 기본(뼈대)만 배우는 것이 좋고 결코 모양 등에 구애되지 않도록 아래와 같이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1. 최초의 첫걸음이 중요하기에 신중히 행한다. 최초에 실패하면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

   2. 음성과 태도를 능숙하게 사용한다. 온화한 음성으로 말에게 안심감을 주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격려 또는 꾸짖음. 친숙하면서도 의연한 태도로 임한다. (당시 음성에 의한 신호가 장려되어 널리 보급되고 있었습니다.)

   3. 어루만지기와 위엄의 길들이기. 엄연한 태도로 어루만지기도 징벌도 행한다. 채찍의 사용 등 육체적 고통은 공포감을 심어주기 때문에 행하지 않고 음성으로 꾸짖는다. 

   4. 길들이기는 말에게 적당한 운동을 시킨 뒤, 말의 기분이 가라앉고나서 행한다.

그리고 불요불굴의 정신, 책임감, 자기의 기술을 믿는 것, 동물 애호의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질 있는 말에게는 각설탕이나 당근으로 길들이는 것도 좋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쇼와 초기 무렵에는 목소리, 이른바 음성에 의한 신호나 구호를 중앙마사회 등이 체계화해 농사용 소와 말이나 마차용 말의 길들이기나 사역 용어로 전국에 보급시켰습니다. 원래는 농사용 말의 길들이기에 거간꾼이나 농민이 옛날부터 이용하던 언어였다고 생각되는데, 지역에 따라 약간의 사투리가 있었던 듯합니다. 발진 "마헤", 가속 "하이하이", 오른쪽 직진 "세에", 왼쪽 직진 "사시", 정지 "도오", 후퇴 "아또", 진정이나 어루만지기 "호오라" "오오라", 발 들기 "아시" 등입니다. 경작 작업이나 마차 등은 승마와 같이 직접 몸에 닿지 않고 말을 다루기 때문에 고삐의 유도 이외의 언어 신호가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후지노 씨도 이러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직접 물리적인 힘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성립하는 관계보다 다른 차원의 상호이해를 구축하는 것이 아닐까요. 

말쟁기질 교사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강습회에는 여러 성질 나쁜 말이 끌려 왔습니다. 그가 남긴 자료에서도 역시 성질 나쁜 말을 길들이는 도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기업 비밀이라 할 수 있는 도구로부터 현장에서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말쟁기질 교사들의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말의 급소에 대한 효과가 계산된 얼핏 단순해 보이는 도구는 성질 있는 말을 순식간에 다스리는 오오츠보류大坪流 등의 옛날식 마술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질 있는 말을 교정하는 도구로는 아래와 같은 걸 들 수 있습니다. 

 

1. 입 벌리기 끈 : 재갈의 위에서 입속으로 넣고 당겨서 제어했다. (주머니에 이 끈을 숨겨둔 말쟁기질 교사는 많았던 듯합니다.)

2. 입 벌리기 새끼줄(굵은줄) : 1과 똑같은 목적의 새끼줄.

3. 혀 결속끈 : 아마 혀가 재갈을 넘는 버릇이 있는 말에게 사용했던 끈.

4. 입 벌리기 쇠고리 : 목을 드는 광분하는 성질이 있는 말의 입에 끼우고, 복대에 매는 끈으로 연결했다. 주로 마차용 말에 썼다.  

5. 재갈 : 가느다란 것이나 결이 있는 것은 제어작용이 강해 교정 재갈로 이용되었다.

6. 코끝 결속끈 : 말의 급소 가운데 하나이다. 코끝(윗입술)을 묶어 말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현재는 코 나사 등으로 윗입술을 비트는 것으로, 뇌속 엔돌핀이 분비되어 심박수가 내려가고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것으로 해명되었다.)

7. 귀덮개 : 소리를 무서워하는 공포벽이나 광분벽이 있는 말에게 사용하는 천. 심하게 광분하는 성질이 있는 말에게는 귀 고막을 찢어 외부의 소리를 단절시키는 교정법을 쓰는 경우도 있다.

8. 귀 결속끈 : 귀를 묶어 비틀면 말이 얌전해지기 때문에 성질 있는 말의 제어에 사용했다. (귀 나사와 똑같이 억제신경이 움직인다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사진5 굵은줄과 입 벌리기 끈. 후지노 씨가 사용한 교정도구 길이(왼쪽): 172cm. 말 박물관 소장

 

사진6 연결시킨 혀 결속끈과 재갈. 말 박물관 소장

 

사진7 광분하는 말에게 쓰는 입 벌리기 쇠고리. 말 박물관 소장

 

 

 

말의 힘을 쟁기에 효율 좋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견인 저항과 견인점이 고려된 적절한 멍에와 쟁기의 연결도구에 장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울러 적절한 멍에 깔개를 써서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면 말의 피로는 줄어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후지노 씨는 멍에나 멍에 깔개의 개량과 보급에도 시행착오를 계속했습니다. 

실제로 멍에는 길마(짐 안장)→산 모양 가로목 1단→산 모양 가로목 2단→후방 별도 분리로 개량을 거듭해 나아갑니다. 멍에 뼈대의 전방과 후방 사이에 있는 연결목이 2단이 되는 것으로 하단에 복대, 흉대, 당김줄을 연결하고, 상단에 고삐 걸이나무(고삐류의 길이 조정 도구)를 매달 수 있어 멍에 자체도 튼튼해집니다. 후방 멍에 뼈대의 상방이 별도 분리된 모양은 말 몸통의 굵기가 앞쪽과 뒤쪽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 말 몸에 부하를 줄이며 멍에가 장착되도록 합니다. 멍에로 인한 상처를 방지하기 위한 멍에 깔개는 볏짚부터 차차 보리짚으로 변하고, 보리짚을 묶어서 짠 것 등이 이용되었는데, 그 크기도 말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길이 등이 개량되어 나아갑니다. 멍에 만들기에 능한 후지노 씨는 멍에 깔개용으로는 간수나 소금물을 사용해 보리짚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농업 개량을 위한 범국가적 지식과 힘의 집결이 "말쟁기질 교사"라는 모습으로 구현화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림2 멍에의 개량(후지노 토쿠오 씨가 지은 <農耕馬の利用は終>에서).

 

그림3 멍에 깔개 만드는 법(후지노 토쿠오 씨가 지은 <農耕馬の利用は終>에서).

 

 

<참고문헌>

馬の畜力利用, 岡部利雄, 養賢堂, 1959

絵馬と農具にみる近代, 板橋区立郷土資料館, 1990

大絵馬ものがたり1, 稲作の四季, 須藤功, 農村漁村文化協会 2009

写真でみる日本生活図引1, たがやす, 須藤功編, 弘文堂, 1988

畜力利用講義, 社団法人大日本農会, 1934

畜産発達史, 農林省畜産局, 中央公論事業出版, 1966

農耕馬の利用は終る(稿本), 藤野徳雄, 1981, 말 박물관 소장

馬耕および馬耕鞍の製作法(稿本), 藤野徳雄, 1981, 말 박물관 소장

「馬耕教師群像」, 香月洋子, 『宮本常一とあるいた昭和の日本3 九州2』, あるくみるきく双書

田村善次郎・宮本千春 편찬, 農山漁村文化協会 2011

馬耕教師の旅 - 「耕す」ことの近代, 香月洋一郎, 法政大学出版会, 2011

働く馬, 財団法人馬事文化財団, 2002

Lagelweij E, Nelis PC, Wiegant VM and Van Ree JM. The twitch in Horses: a variant of acupuncture, Science, 225 (4667) :1172-4,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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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마력짜리 콤바인.

1902년 미국 워싱턴 주에서 찍었다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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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책이 한국에서도 출간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린 말이 아니라 소가 되겠지. 그래서 이런 외국도서를 번역해서 출간하기가 힘든 것이다. 참고하는 수준은 되겠지만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띠 아니할쌔"와 같은 경우랄까.

아무튼 아래의 두 책은 참 재미나겠다.

말로 농사짓는 농장: 소규모 지속가능한 생계농을 위한 도구와 체계 http://www.amazon.com/The-New-Horse-Powered-Farm-Small-Scale/dp/1603584161


21세기에 말로 농사짓기: 유기농민을 위한 도구, 방법, 관리 가이드 http://www.amazon.com/Horse-Powered-Farming-21st-Century-Management/dp/16035861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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