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천후 농부학교 강의 때문에 자료를 준비하다가 논과 관련한 옛날 사진들이 있어 올립니다.

쭉 보시면 농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모르겠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논을 준비하는 쟁기질입니다. 쟁기의 모양이 보은에서 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요.

보은의 쟁기는 아마도 밭에서만 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소도 다르지요. 이놈은 수소입니다. 배 부분에 거시기가 보이죠!

쟁기질하는 뒤편으로 푸릇푸릇한 곳이 보입니다.

그곳은 못자리를 하고 있는 곳이겠고, 이미 모를 낸 곳도 있네요. 

논두렁의 모습도 잘 뜯어보세요.

 

 

두세 번의 쟁기질이 끝나면 써레질로 들어갑니다. 군포 일대에서는 써레를 쓰레라고 불렀습니다.

정용수 본부장 님의 발음을 잘 들어보면 그러십니다.

이렇게 논을 삶는 것을 '써린다' 또는 '쓰린다'라고 합니다.

참, 위와 아래의 사진은 닐 마샬로프라는 주한미군이 1968년 안양에 주둔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혹시 위와 아래의 소가 같은 소가 아닐까 해서입니다.

고추의 모양을 자세히 보세요~ 하하, 고추는 그만 보시고... 아저씨가 똑같은 사람 같지요.

애벌갈이가 생땅을 뒤집는 일이라 가장 힘들고 오래 걸린다 하고, 두벌, 세벌은 상대적으로 쉽다고 합니다.

그리고 물을 대놓고 하는 써레질은 더 쉽구요. 하지만 쉽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고도의 경험으로 논바닥의 고르기를 일정하게 맞춰야 하거든요.

지난 토요일 볍씨를 심은 곳은 트렉터로 로타리를 친 곳인데, 그 상태를 굳이 이 과정으로 비유하자면.

물을 대지 않고 써레질을 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흙의 고운 정도는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쟁기질에는 아래와 같은 쟁기질도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인데, 이렇게 소 2마리로 쟁기질하는 것을 '겨리'라고 합니다.

제가 번역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의 취재에 따르면 '결의結義'에서 온 말이 아닌가 하더군요.

결의가 겨리로 되었다... 나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현재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쟁기질은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 주로 썼다고 합니다.

 

 

같은 겨리질이지만 사진으로도 한 번 보지요. 소가 1마리일 때와 비교하여 그 위용이 대단하지요.  

논두렁 옆으로는 쟁기질을 할 수 가 없어 사람이 쇠스랑 등으로 뒤집어엎습니다.

 

 

본논이 준비가 되면 얼른 모를 내야지요. 모를 내려면 먼저 못자리에서 모를 쪄야 합니다.

지금처럼 모판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 물 대기 좋고 기름진 곳을 골라 바로 논에다 못자리를 만들었지요.

모를 찌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귀의 힘이 많이 들지요.

그도 그럴 것이 외떡잎식물인 벼가 뿌리를 깊이 내렸을 테니까요.

아래 사진을 보시면서 모가 얼마나 큰지 유심히 보세요.

요즘 기계로 모를 내는 것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납니다.

 

 

가끔은 못자리의 병충해를 없애고자 약을 치기도 합니다.

이 당시 농약과 비료는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건 본부장 님께 물어야 합니다. 걸어다니는 영상실록이란 별명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못자리에서 모를 찌고 나면 바로 모내기로 들어갑니다.

황소의 뒤쪽에 서 있는 지게에 모를 쪄서 지고 나릅니다.

이 논에서는 부부가 함께 일하고 있네요. 이때만 해도 이농 현상이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논이 많은 곳에서는 마을마다 두레패가 조직이 됩니다. 함께 일하는 조직이지요.

그래서 공동 못자리를 만들어서 관리하는 경우도 있고, 보통 모내기며 김매기, 수확까지 함께하지요.

그런데 이곳은 어찌된 연유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부부가 함께하네요.

사진을 보니 모는 한 그루에 2~3포기 정도 심는 듯합니다.

볍씨를 곧뿌림하며 말씀드렸듯, 늦게 모내기하는 것을 한자로는 '만이앙晩移秧'이라 합니다.

여기서 만이앙 - 마니앙 - 마냥이란 단어가 탄생했습니다!

우리말을 자세히 보면 농사일과 관계된 말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잘 찾아보세요.

 

 

아버지가 홀로 마지막 부분에 모를 심고 있는 뒤로 아이들이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레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웠을 겁니다.

텃밭을 처음 시작하는 분이라 해도 시골에서 농사짓는 집에서 자랐다면, 농사일을 많이 하지 않았더라도 금방 일에 익숙해집니다. 바로 어깨 너머 교육의 효과가 아닐까요.

요즘은 교육을 교육기관에서 교육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집안에서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이 더 많고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를 내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김매기로 들어갑니다.

김은 보통 2~3번 맵니다. 일찍 심은 논은 세벌까지 매고, 늦게 심은 논은 두벌만 매도 되는 이치입니다.

처음 김을 매는 걸 아이맨다, 아시맨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두벌, 세벌 이렇게 세고, 마지막을 만물이라 합니다. 만물 다음에는 한두 번 정도 피사리를 합니다.

논의 김매기는 한두 번은 논호미로 벼 사이의 흙덩이를 떠서 뒤집어엎는데, 아래 사진이 그 모습입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지요. 허리는 계속 굽혀야 하고 흙은 찐덕거려서 잘 떠지지도 않고...

그래서일까요? 두레패에 여자는 끼워주지 않는답니다. 논일도 시키지 않구요. 이건 남녀를 차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여자는 논일에는 맞지 않으니 밭으로 보낸 것이겠지요.

쩝, 뭐 그래도 여자가 일을 더 많이 했겠지만 말입니다.

 

 

논호미는 밭호미와 다르게 생겼습니다. 흙을 많이 잘 뜨기 위해서 호미날과 자루 사이를 이어주는 부분인 슴베가 더 굽어 있고, 날도 밭호미에 비해 훨씬 큽니다. 아래 사진에 슴베 부분은 나오는데 날이 안 나오네요. 그건 숙제입니다. 스스로 찾아보세요.

 

 

아래는 논 제초기의 모습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량생산기지로 만들려고 했지요. 그래서 발달한 일본의 농업을 조선에 심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합니다. 모범이란 이름에서도 그 뜻이 잘 엿보입니다.

아무튼 그것이 1920년 산미증식계획이 세워지며 농사시험장으로 바뀌고, 해방이 된 뒤에는 중앙농업기술원이 되었다가 현재의 농촌진흥청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6년 농촌진흥청에서는 개청 100주년 기념 행사를 했더군요. 이게 참 씁쓸합니다.

100년 전인 1906년은 일제가 권업모범장을 설치한 해인데, 앞뒤 사정도 안 따지고 그때는 대한제국이 살아 있을 때이니 그때부터 계산하면 100년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래저래 정신 없는 농촌진흥청입니다. 아무튼 다시 농사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모내기하는 모습이 있었지요. 그걸 다시 한 번 보세요. 어떻게 모를 내는지...

아마 못줄이 없을 겁니다. 그런 방식을 '막모'라고 합니다.

그리고 못줄을 띄우고 심는 걸 줄모라고 하고요. 어느 시골에 가면 가끔 판때기나 자 같은 도구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판모, 잣모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막모, 즉 사람의 경험과 눈대중과 감으로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걸 일본놈들이 보고 경악을 했지요. '아니, 이렇게 미개할 수가! 벼 수확량을 늘리려면 똑바르게 심어야 한다. 어서 조선에 줄모를 보급하라.'

그 결과 줄모를 내게 되었답니다. 이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막모를 낸 데에는 환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비가 와야만 모를 낼 수 있는 천둥지기가 대부분이었던 우리의 논은, 비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모내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줄이나 판, 자를 쓰면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리지요. 그래서 막모가 중심이었던 겁니다.

그러던 것을 일본놈들이 강제적으로 줄모를 내게 하니 여기저기서는 몰래몰래 그냥 하던 대로 막모를 냈습니다.

그러면 관청에서 나와 모를 뽑아버리거나 그냥 밟아버렸다고 합니다.

이 행태는 고스란히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녹색혁명을 이루자며 통일벼가 보급이 되지요.

그런데 통일벼가 맛도 없을 뿐더러 추위에 약해 모를 키우기도 어려워 심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몰래몰래 토종벼를 심으면, 농촌지도소나 관청에서 사람이 나와 못자리를 전부 밟아버렸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일제에 많이 배우긴 했나 봅니다. 하는 짓까지 똑같은 걸 보면요.

줄모를 내면 벼가 똑바르게 서 있지요. 아래의 제초기로 그 사이를 쓱쓱 밀고 지나는 겁니다.

이 사진은 일본에 가서 찍은 것인데, 우리나라에도 아직 논이 넓은 곳에는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는 1935년도 사진입니다. 당시 일본놈들은 중국을 집어 삼키고자 작당을 하고 있을 때이지요. 세계공황도 찾아오고 이래저래 어지러운 시국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충남 서산의 한 마을에서는 두레패가 떴습니다. 농사꾼은 죽는 한이 있어도 농사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

일꾼들이 잠시 앉아 쉬는 사이, 풍물 치는 사람은 악기를 잡고 한판 놀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구경거리가 생겨 자리하고 있네요. 저 멀리 논둑길로는 한 아낙네가 참을 들고 오는지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벼의 자람새로 보아 한여름 김을 매는 철인가 봅니다.

 

 

교육을 받아 아시다시피 논은 계속 물을 담아 놓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를 박으라고 할 때는 한 번씩 물을 떼줘야 합니다. 그렇게 물을 뗐다가 다시 물을 대려고 할 때 천둥지기인 논에서는 어떻게 할까요?

그래서 논 한쪽에 준비하는 것이 둠벙이라는 작은 연못입니다.

아래 사진은 그 둠벙에 맞두레로 물을 퍼올리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 작업이 되게 힘들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만 맞으면 엄청 쉬운 일이라네요. 전천후 농부학교의 분들이 알려 주셨습니다.

이 일만이 아니라 가래질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1+1=2가 아니라 3이 될 수도 5가 될 수도 -1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가 봅니다. 특히나 농사에서는 어떤 사람과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구요.

아래처럼 물을 퍼올리는 도구로는 사진에 보이는 맞두레가 있고, 또 용두레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화도에 무한도전 팀이 논농사를 지어 유명해진 용두레마을이란 곳이 있지요. 그곳은 개막은땅인데 땅이 넓어 용두레를 자주 썼나 봅니다. 한번 검색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무자위라는 것도 있습니다. 물레방아처럼 생겨 사람이 올라가 발로 밟는 그것입니다.

 

 

아래는 살포라는 농기구입니다. 할아버지들이 새벽 같이 일어나시면 이거 하나 들고 뒷짐지고서 슬슬 논밭에 나갔다 오십니다.

논을 쓱 둘러보다가 여기는 물꼬 좀 터야겠다 싶으면 이걸로 툭툭 쳐서 물꼬를 틉니다. 거기에 쓰는 농기구입니다.

 

 

아래는 1968년 8월의 모습입니다. 아름답지요. 그림 같은 모습입니다.

논두렁에 풀을 깎아 놓았습니다. 저 길을 천천히 걸어보고 싶네요.

 

 

 

이제 수확철로 들어갑니다. 아래의 모습을 보세요.

본부장님의 말씀처럼 논둑을 이용해 벼를 말리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둥지기라서 논을 바짝 말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벼를 베면 논둑으로 옮겨 말렸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보실 것은 논둑에 있는 볏단의 이삭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는 겁니다. 본부장 님이 늘 강조하시죠.

 

 

다행히 비가 오지 않고 해가 쨍쨍하다면 일주일에서 열흘 뒤에는  마당질에 들어갑니다.

옛날 농가에는 꼭 안마당과 앞마당이 따로 있었습니다. 안마당은 생활하는 곳이요, 앞마당은 여러 농작물을 갈무리하는 곳이었지요.

이렇게 마당질을 하려면 여름에 일이 없을 때는 산에서 부지런히 흙을 져다 날라야 했습니다.

흙을 져다 잘 밟고 골라 판판하게 만들어 놓아야 가을에 쉽게 일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아래 사진은 마당질을 끝낸 볏단을 다시 묶어서 한곳에 모아 놓는 과정인 듯합니다.

 

 

아래처럼 했겠지요. 이 도구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도구입니다. 처음에는 회전식 도급기라 불리다가 둥근 통이 돌아간다고 궁글통, 발로 밟는다고 족답식 탈곡기, 돌아갈 때 소리가 난다고 와릉 탈곡기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아마 지역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부를 겁니다.

이 일도 두 사람의 호흡이 무지 중요합니다. 발로 밟는 박자와 벼를 건네는 순간이며 나중에 해보시면 알 겁니다.

 

 

탈곡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래처럼 낟알을 떨었습니다. 이걸 개상질이라 하지요.

나무 절구통이나 통나무를 가져다 거기에 단을 후려치는 겁니다. 이게 참 힘든 일이라 합니다.

저는 해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잘못하면 골병든다고 하네요.

 

 

이제 마지막 사진입니다. 2008년 12월 초에 강화도로 토종 종자 수집을 나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불은면의 어느 집에 갔는데 벽에 벼 이삭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걸 보고 신주단지의 변형인가?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인가?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께 물으니 해마다 가장 잘된 벼를 골라 그 이삭을 매달아 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다섯 개니까 5년 동안 벼농사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큰 걸 보니 그해에 농사가 아주 잘 되었나 봅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건 볼품이 없네요.

농사짓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농사는 징글맞은 일이 될 수도, 정말 재밌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렇겠지만, 농사를 따라올 수 있는 일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듯합니다.

벼이삭과 함께 찍은 감과 커피는 아주머니의 대접입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그냥 보낼 수 없다면 자꾸 뭔가 주십니다.

이런 집에 가면 기분도 좋아질 뿐더러, 토종도 많습니다. 토종이 살아 있는 집은 그런 마음씨의 분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이상 지루하게 긴 글을 다 읽으시느라 욕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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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부모임에서 잠깐 이야기가 나왔던 모를 찌는 모습입니다.

이 사진은 1968년 5월 닐 마샬로프라는 주한미군이 안양 인근에서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기계보다는 손모내기가 주요 방법이여서 모가 지금보다 훨씬 큽니다.

적어도 40~50cm는 되어 보이네요. 요즘은 이렇게 길게 키우면 기계에 걸리기 때문에 더 어릴 때 옮겨 심습니다. 왜 아이도 이사 다니면 적응하기까지 몸살을 좀 앓듯이 모도 그러지 않을까 합니다.

 

 

못자리도 지금은 그냥 모판에 씨를 붓고 비닐로 터널을 만들어 키우는 반면, 이때만 해도 그냥 못자리논에다 바로 키웠습니다. 그래서 모를 쪄야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지요.

모를 쪄서는 모내기할 때 들기 쉬운 만큼의 분량씩 볏짚으로 묶어 놓습니다.

그럼 아래 사진에 있는 지게에다 이걸 실어서 본논에 옮기면 됩니다. 

 

이 사진을 통해 1968년까지만 해도, 그것도 서울 인근인 안양에서도 아직 논에다 못자리를 만들고, 모를 찌고, 손모내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참 귀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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