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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8일. 아침 7시 30분에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밥을 먹다가 걸려온 전화에 화들짝 놀라 얼른 나갔다. 7시에는 만나야 시간 안에 갈 수 있던 걸 착각하고 있었다.

8시 넘어 괴산으로 출발. 먼저 지난번에 찾은 청참외를 확안하고자 상리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 이름과 유래가 적힌 비석을 촬영.

 

 

 

 

윗시몇의 시몇은 수미터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라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동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수밑, 숨밑과 비슷한 발음을 하시던데 혹시 숲밑은 아닐지?

 

 

 

 

마을 유래비에서 바라본 윗시몇 마을 전경. 마을 유래비 내용을 보면 어느 도인이 좋은 수맥을 찾아주어 마음 편히 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 유래비처럼 이 마을은 물이 좋다.

 

 

지난번 찾은 참외로 연출한 사진. 꽃과 잎과 줄기와 열매까지 모두 한자리에 나온다.

 

 

우리에게 줄 참외를 찾고 계신 이종윤 어르신. 

 

 

지난번에 본 대한이란 벼의 교잡종. 빨간 까락이 보인다. 연풍 지역의 논에서는 이러한 교잡종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너무 많아서 지저분해 보일 정도다. 볍씨 갱신할 때가 다 되어서 그런가?

 

 

산에서 끊임없이 찬물이 흘러 내려온다.  

 

 

'대한'이란 벼를 심은 논. 찬물이 흘러 들어오기에 뒷도구(물을 돌려서 수온을 올린 다음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도랑)를 쳤다.

 

 

논 바로 옆에 있는 우물. '우물 안에 내가 있소. 하늘이 들어 있소.'

 

 

다음으로 드디어 연풍면으로 넘어갔다. 처음 찾은 곳은 갈길 마을. 하지만 별 다른 것은 찾지 못하고 다음 금대 마을로 넘어갔다.

 

 

 

 

갈길 마을과 금대 마을. 이 두 마을을 합하여 갈금리라고 한다. 칡 갈 자에 가야금 금 자. 그걸 그대로 풀어 칡덩굴이 가야금의 현과 같다고 하는 해석도 있다. 헌데 우리나라에 '갈'이란 지명이 여기저기 있는 걸 보아서는, '갈'이란 고어의 뜻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금대 마을의 모습. 다리 난간은 참깨 말리는 곳으로 전환되었다.  

 

 

금대 마을 입구에 자리한 수수밭. 온갖 종류가 뒤섞여 있는 좋은 학습장이라고 한다. 키가 큰 놈, 작은 놈부터 이삭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키 작은 수수와 키 큰 수수의 차이. 

 

 

금대 마을에 들어가 정자에서 쉬고 계시던 분들께 정보를 얻어 18대째 살고 있다는 집을 찾았다. 

 

 

고추 말리기가 한창이다.

 

 

이 집에 사시는 할머니께서는 지난해까지 옛날 자주감자를 심다가 매상도 안 해주고 힘도 들어 그만 없애셨단다. 지난해에만 왔어도 괴산 토종 자주감자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대신 완두와 엇그루팥을 얻었다. 엇그루팥은 그루팥의 일종인데, 알이 좀 더 굵은 느낌이다. 이것 말고 잔그루팥이라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진짜 오래된 것인데 그것도 사라졌다고. 잔그루팥은 말 그대로 자잘하다는 뜻이겠지.

 

 

동네에서 얻어다 심는다는 완두콩.

 

 

엇그루팥.

 

 

엇그루팥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려고 밭을 찾아 나섰다.  

 

 

밭으로 가다가 죽어 있는 새끼 뱀을 보았다. 개미의 먹이가 되고 있는 중. 자연은 감정이 없다. 그저 돌고 도는 순환의 고리일 뿐.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나무에 날아와 쉬고 있다. 

 

 

엇그루팥을 찾다가 이상한 동부를 발견했다. 이 동부의 주인을 찾으려 동네를 뒤진 결과 다시 그 18대째 살고 있다는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토종의 법칙을 확인할 수 있다. 있는 집에는 이것저것 많이 있다. 

 

 

강가 귀퉁이 땅에는 부추도 계속 심어 오고 있다. 이 부추도 상시 심는 것. 거름을 많이 하면 넓적해진다고 한다.

 

 

 

 

금대 마을을 나와 적석리 쪽으로 달렸다.

 

 

후동을 찾아가려고 잠시 차를 세워 더위를 피하고 계신 어르신 두 분께 길을 물었다. 이 소나무는 200년 가량되었다. 

 

 

 

 

원래는 길 쪽으로도 가지가 뻗었으나, 썩어 부러져 가지를 쳤다고. 이 나무를 살리려 주사도 많이 줬단다.

 

 

후동과 양지 마을에서는 별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사과 과수원만 가득. 연풍이 사과로 유명한 곳임을 실감했다.

다음은 양지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음지 마을로 향했다. 음지 마을은 마을 위로 34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지나다니는 차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면 모두들 떠났을 것이다.

이 마을의 위쪽에는 사방댐이 있는데, 군에서 등산로를 개발하면서 외지 사람들이 와서 마을의 식수가 되는 그곳에서 목욕까지 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고 불만이 대단했다. 모르는 곳에 가서 함부로 서리하지 말지어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지어다. 그곳도 모두 사람이 살고 있는 곳, 그곳만의 법이 있다.

 

 

음지 마을에서 멋진 댑싸리 하나를 발견. 

 

 

간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내린 큰비로 개울물이 무섭게 불었다. 

 

 

길이 뚫리며 생긴 변화의 하나. 외지인이 산에 들어와 함부로 산나물과 약초를 훔쳐간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오래된 나무 전신주 하나가...

 

 

음지 마을에서 나와 종산 마을로 향했다. 34번 도로를 타고 적석터널을 지나 종산 마을로.

 

 

종산 마을의 어느 집. 장독대며 집 안이 정갈하다. 담장 위에서 자라는 호박이 정겨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할머니 혼자 사시며 집을 깔끔히 유지하고 계셨다.

 

 

할머니 댁의 마늘. 연풍 지역의 마늘은 유난히 알이 잘다. 추운 겨울과 관련이 있을까? 

 

 

할머니 댁에서 키 작은 자주빛 강낭콩을 발견했다. 색이 참 곱다.

 

 

종산 마을에서 발견한 대파. 내력과 유래를 찾고자 했으나 집에 주인이 없었다. 들에 일하러 가신 듯... 마당에서 주운 1만 원은 다음에 오면 깜짝선물로 찾아주겠다며 안완식 박사님이 처마 쪽에 몰래 숨겨 놓으셨다.

 

 

가지를 많이 치는 종산 마을의 대파. 

 

 

개량종 대파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슈퍼에 가서 사는 대파와 비교해 보시길... 

 

 

종산 마을에서 본 4륜 구동 트럭 세렉스. 대학 시절 강원도로 농활을 가면 흔하게 보던 트럭이다. 이곳도 산간 지대라 이런 트럭이 필요하다.

 

 

종산 마을까지 보고 연풍면 쪽으로 향하다가 2시가 넘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주인 아저씨의 취미 생활로 맛뿐이 아닌 재미를 더하고 있는 연풍가든. 우리집 개의 이름이 연풍이인데, 이곳은 어디를 가든 연풍이다. 심지어 연풍 성지까지 있다.

 

 

점심을 먹고 유하리로 향했다. 버드나무와 관련된 한자말이다. 아마 이 골짜기를 흐르는 내의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았나 보다. 1914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명을 자신들이 알아볼 수 있는 한자로 전면 제정한다. 그 이후 우리의 지명은 한자에 오염이 되어 버렸다. 오전에 갔던 후동後洞만 해도 그렇다.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는 뜻으로 부르던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후동이라 했을 것이다.

유하리 오수물에서는 별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 위쪽에 자리한 내응 마을에서는 무언가 나왔다.

 

 

내응 마을에서 찾아간 집. 앞마당에서 유월두를 말리고 있었다. 마침 할머니가 그늘에 앉아 계시길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할머니 댁 안의 예전 외양간 같아 보이는 곳에는 할머니가 달아 놓은 씨앗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솜씨 좋은 실력으로 지은 듯한 이 외양간은 이제 사용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께서는 치매가 와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신다고...

 

 

 

할머니 댁에서 얻은 흰동부. 첫날 괴산 장에서 샀던 그 동부와 비슷하다. 여기도 있구만 장터 할머니도 참...

 

 

검은깨. 알이 참 굵다.

 

 

밭에서 자라고 있는 흰동부를 찾고 싶어 길을 나섰다. 흰동부는 늦게 심을수록 좋다고 한다. 6~7월이 적당한 때. 일찍 심으면 덩굴이 너무 많이 져서 좋지 않다고. 앞으로 동부는 조금 늦게 심자. 덩굴이 뻗는 것일수록 그게 좋겠다.

 

 

내응 마을의 댑싸리. 쪼로록 함께 자라니 참 예쁘다.  

 

 

내응 마을 새마을 창고.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어디선가 이런 노래가 흘러나올 듯한 분위기. 이곳이 바로 유럽 식으로 말하자면 마을 광장이다. 마을회관도 보건소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네 할머니들도 이곳에 모여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흰동부를 심으신 분과 검은깨를 심으신 분을 찾았다.

 

 

할머니를 모시고 밭을 찾아왔다. 바로 눈앞으로는 중부내륙고소도로가 뻗어 있다. 인간의 위대한 역사다! 

 

 

안완식 박사님은 꽃이 핀 모습을 찾고자 분주하시고, 할머니는 동부의 순을 질러주느라 바쁘시다. 농사일이 다 그런가 보다. 할머니는 연신 눈에 보이는 풀을 잡고, 순을 지르고... 일이 눈에 보이자 손이 잠시도 쉬지 않으신다. 

 

 

흰동부가 자라고 있는 모습. 아쉽게도 분홍빛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논두렁에 심은 흰동부. 덩굴이 그리 심하게 뻗지 않으니 이렇게 키울 수 있는 거겠지.

 

 

할머니를 다시 광장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른 할머니와 함께 검은깨를 찾아나섰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검은깨. 앞으로 며칠 뒤면 베어 말려야 하겠다. 검은깨는 키가 2m 가까이 자란다. 가지도 좀 치는 편이고. 

 

 

검은깨의 꽃. 검은깨라고 꽃까지 검지는 않았다. 자주감자는 자주꽃, 흰감자는 흰꽃이란 노랫말과는 다르다. 

 

 

내응 마을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이런 광경이 나왔다. 

 

옥수수와 참깨를 말리고 있었는데, 참깨 중 하나가 갈색이 나길래 얼른 들어가 보았다. 헍데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찾으러 가려고 차를 돌리는 사이에 도랑에 앞바퀴 하나가 빠졌다. 이런, 다행히 차가 망가지거나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어걸 어쩐다... 할 수 없이 힘을 합쳐 차를 들어올리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영차! 다행이다. 작은 차라서 그런가 쉽게 들 수 있었다. 

 

 

할머니 댁 마당에는 도꼬마리가 하나 자라고 있다. 보통 도꼬마리는 키가 작은데 이건 키가 엄청 크다. 이것도 토종의 하나라고. 며느리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 머리에 피부병이 생겨 고생했는데, 창포처럼 이 잎을 뜯어 삶은 다음 감았더니 싹 나았다고. 머리에 비듬이나 진물이 나는 등 문제가 생기신 분은 도꼬마리잎을 삶아 그 물로 머리를 감아 보시라. 우리네 민간요법이 효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차조기는 파뿌리와 대추 등을 함께 넣고 푹 고아 마시면 감기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할머니 집의 대문 앞에는 백일홍이 자라고 있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것도 개량종이 아닌 독특한 것이라고 하신다. 할머니도 이게 참 예뻐서 동네는 물론 멀리 시집을 간 딸에게도 씨를 줬다고 하신다.

 

 

 

 

내응 마을을 나와 송오와 방화 마을을 뒤졌다. 날씨가 저기압이라 그런지 무척 힘이 든다. 방화 마을을 뒤지고는 잠시 숨도 돌릴 겸 자리에 앉아 쉬었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차에 올라 쇠잿말로 향했다.

 

 

쇠잿말 길가의 어느 집에서 자라고 있는 황기. 진딧물에 개미들이 찾아와 단물을 빨고 있다. 

 

 

꽃마다 흔하게 찾아오는 곤충이 따로 있다고 한다. 황기에는 뒤엉벌이 그런 관계인가 보다. 

 

 

황기를 심으신 분을 찾다가 한 동네 할머니를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꺼내서 보여주신다. 

 

 

괴산의 특징은 집에 이런 상자텃밭을 많이 키운다는 점이다. 밭의 활용도도 무척 높다. 도무지 놀리는 땅이 없을 만큼 촘촘하게 자투리 땅도 활용한다. 이 지역의 농사법을 조사하는 것도 무척 재밌는 일이 되겠다. 

 

 

할머니가 보여주신 덤불양대. 인천에서 맛있다고 얻어온 종류는 금방 상해 버리는 데 반하여, 이 덤불양대는 가을에 수확을 못해 겨우내 달려 있어도 전혀 상하지 않는다고. 그뿐이 아니라 맛까지 좋다고 하니 금상첨화이다.

 

 

냉장고에서 적두팥을 꺼내와 보여주시는 할머니. 농민은 가장 알맞은 보관법을 찾아낸다.

 

 

할머니 마당 한켠에 자라고 있던 조선오이. 그물망이 쫙쫙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이꽃. 

 

 

다 쓴 물건이라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다. 닳아서 못 쓰게 된 댑싸리 비는 이렇게 다시 묶어서 계단 등을 쓰는 빗자루로 활용한다.

 

 

대문 입구 쪽에서 자라고 있는 덤불양대. 

 

 

쇠잿말에서 오늘의 마지막 마을인 요동으로 가기 전, 길가에 특이한 수수가 눈길을 잡아 끈다.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마을 주민분께 물으니 옛날에는 방맹이 수수라는 것이 있었다고. 이건 신품종이란다. 실제로 송오 마을에 살고 있는 주인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물으니 장연 쪽에서 얻어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토종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수수. 그렇지만 재밌게 생겼다.

 

 

이 분들에게 더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이 왜 쇠잿말인가?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르셨지만 이 분들의 말을 듣고 유추하면 이렇다. 옛날에는 수안보에서 장이 크게 섰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는 방앗간이 없어서 곡식을 가지고 전부 수안보로 가서 찧어 왔다. 그런데 그곳에 바로 우시장도 섰다고. 그러니까 여기는 소를 사거나 팔아서 끌고 넘나들던 옛 고갯길인 셈이다. 그래서 쇠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재미난 것은 쇠잿말이 이곳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고개 하나 넘으면 장연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수안보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도 쇠잿말이다. 궁금하신 분은 3차 수집 조사 편을 참고하시라. 장연면 면사무소가 있는 곳 근처에 1000년이 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는데, 그곳 바로 위가 쇠잿말이다. 장연에서는 그쪽 고개를 넘어 수안보로 소를 사거나 팔러 다녔을 게다. 마지막으로 더 재미난 사실은 장연의 쇠잿말도 그렇고 이곳의 쇠잿말도 그렇고 큰 도로가 이어져 뚫려 있다는 사실.

 

 

가운데 보이는 산을 중심으로 오른쪽 골로는 수안보로 넘어가고, 왼쪽  골로는 장연으로 넘어갔다. 동네 주민의 말에 따르면 30분이면 수안보까지 갔다는데, 그건 뻥 같고 1시간 반에서 2시간쯤 걸리지 않았을까 한다. 방앗간이 없어 수안보로 다닐 때 버스에 곡식을 실어서 보내고 사람은 이 고개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가면 당시에는 길이 좋지 않아서 버스보다 사람이 더 먼저 도착했다고. 사람이 많이 다닐 때는 지금처럼 수풀이 무성하지도 않고 길도 잘 닦여 있어서 말 그대로 대로였단다. 지금은 이리로 아무도 넘나들지 않는다.

 

 

쇠잿말에서 흙살림의 윤성희 이사님이 합류했다.  시간은 6시가 다 되었을 무렵. 마지막 마을인 요동으로 함께 향했다.

 

 

요동 입구에서 발견한 배나무. 안민동에서 이야기를 들은 청배의 특징과 비슷한 모습이다. 혹시 이것이 청배가 아닐까 하여 동네를 뒤졌지만 찾은 답은... 지난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도 나가셨다고 한다. 이 배의 유래는 알 수 없는 것일까? 다음에 다시 찾기로 기약했다.

 

 

 

 

청배의 주인을 찾고자 산골짜기까지 올랐으나 끝까지 갈 수 없었다. 괜히 갔다가 옴짝달싹 못하게 될 수도 있기에...

 

 

돌아 내려오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 산비탈이 모두 밭으로 개간이 되어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

 

 

하늘에는 달이 빛나고,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요동을 나와 점심을 먹었던 곳에서 7시가 넘어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11시. 피곤하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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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2일, 괴산 지역 토종 수집에 앞서 두 번째 조사에 나섰다. 오늘은 감물면이 그 대상 지역이다. 아침 7시에 출발했는데 도로에는 출근하는 차량으로 가득하다. 다음에는 더 일찍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연풍이 자식 산책시키는 게 더 힘들어지는데 걱정이다.

 

화성 봉담에 사시는 안완식 박사님을 태우고자 달렸다. 이쪽은 출근하는 차량이 더욱 많아 길이 막힌다. 지체하게 생겼구나. 도로를 달리는데 옆으로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출신 때문인가, 온 나라 안이 공사장이다. 이 아파트 공사 때문에 안완식 박사님도 이사를 가게 생기셨다. 요즘 미분양이 넘친다는데 왜 그리 기를 쓰고 공사를 벌이는지 모르겠다. 혹시 최후의 발악?

 

 

10시 조금 넘어 괴산에 도착하여 변현단 선생님을 기다린다. 오는 길에 지난 1차 때 미처 다 보지 못한 불정면의 일부 지역을 둘러보고 왔다. 역시 안완식 박사님이 계셔서 그런가 사전조사에도 안정감이 생겼다. 안철환 선생님이 변현단 선생님을 부르는 호칭이 참 재밌다. "변 선생" 또는 "변 대표"라고 부르신다. "변"이란 성씨 때문에 그런가 보다. 흙살림 교육장 마당에서 10여 분 정도 기다리니 변 선생님이 단양에서 달려와 마치 카레이서처럼 부앙~ 하며 들어선다.

 

 

 

오늘은 감물면의 계담 서원이 자리한 계담이란 동네부터 시작한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첫 집부터 깔끔하니 맘에 들었다. 차에서 내려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지난 번에는 그냥 차 안에서 둘러보기만 했는데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구나.

 

몇 가지 토종 작물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주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을에 씨를 받으면 그때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밭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주소를 적었다.

 

아래는 토종 땅콩이다.

 

 

배추처럼 속이 찬다는 배추상추.

 

 

텃밭의 어느 한 곳도 그냥 허투루 놀리는 법이 없다. 이 밭은 땅콩밭인데, 먼저 마늘을 심어 수확한 뒤에 땅콩을 심었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옥수수를 심어 한 번 거두어 먹고, 다시 베어낸 옥수수 옆에는 녹두를 심었다. 도대체 몇 가지 작물을 돌리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농사법도 꼼꼼하게 물어 기록하면 좋겠다. 다음에는 놓치지 말고 묻도록 하자.

 

 

텃밭의 전경. 서로 다른 작물이 제자리를 차지하며 어우러져 함께 자란다.

 

 

계담을 나오는 길에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카메라를 들었다. 밑으로는 괴산의 주요 농작물인 담배밭이 펼쳐져 있다.

 

 

이후 차를 타고 열심히 이 마을 저 마을 돌았다.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뜨겁고, 차 안에서 에어컨을 틀어도 시원하지도 않고, 이런 날은 그냥 그늘에 앉아 바람이나 기다리는 게 상책일 터. 하지만 쉴 수 없다. 부지런히 돌아야 오늘 안으로 감물면의 사전조사를 마칠 수 있다.

이담리를 지나 오창리로, 다시 백양리와 구월리로, 또 살짝 걸쳐 있는 장연면 방곡리 일부까지, 자리하고 있는 마을마다 쑤시고 다녔지만 특별히 사진으로 남길 만한 것은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괴산은 산골짜기가 많으니 그곳에 살고 있는 분들이 토종을 꽤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지도에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으면 그곳에는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다. 아니면 한두 집이 남아 돈벌이작물만 아주 넓게 심어 먹고 살았다. 또 그리고 큰길이 나면서 집들도 싹 새로 뜯어고치거나 새로운 문물이 들어가면서 옛것은 설 자리를 잃었다. 처음 생각보다 수집 품목이 적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시간은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잠시 땀도 식히고 배도 채울 겸 식당으로 들어섰다. 오늘 수고한 차는 그냥 햇볕 아래에 놓았다.

 

 

변현단 선생님과...

 

 

안철환 선생님... 둘 다 얼마나 입심이 센지 모른다. 조사하는 내내 심심하지 않게 다니고 있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농업기술센터로 찾아가 황용하 소장님을 만났다. 이제 정년이 1년 남으셨다는데 퇴직 이후에는 토종을 키우고 널리 알리려는 일을 하시려 한단다. 지금도 꽤 많은 종류의 토종을 농장에 심고 있으시다. 소장님께 가지고 계신 토종 목록과 기억하고 있는 괴산만의 토종이 있으면 내용을 정리해 나중에 전해달라 부탁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괴산읍을 가로질러 칠성면 쪽을 통해 다시 감물면으로 들어섰다. 맹이재를 넘는데 여기에도 골짜기에 마을 표시가 있었으나 실제 마을은 찾을 수 없었다. 

다음은 매전리로 향했다. 매전리는 예전 토종 수집단 발대식 때 감물면 신리에 사시는 강영식 님이 매전의 안민동에는 뭐가 많을지 모른다고 언급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로도 엄청 산골짜기이다. 그 끝에는 무심사라는 절도 하나 있어 겸사겸사 그곳으로 향했다.

양산목이란 곳에 도착하니 이런 곳에도 논이 있다. 산골이지만 들이 꽤 있어 농사짓고 사는 집이 아직도 많다. 몇몇 집을 keep해 놓고 다시 위로 올랐다.

 

 

 

드디어 길의 끝에 이르렀다. 이곳에 자리한 무심사. 주변으로는 화전민들의 집이었던 곳이 꽤 보인다. 예전에는 농사땅으로 썼을 법한 곳도 여러 곳 눈에 띈다. 무심사는 "인간극장"이란 프로그램에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사연 많은 동자승들이 있다는데 오늘은 그들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니 땀만 식히고 목을 축인 다음 서둘러 길을 나섰다.

 

 

땀을 식히는 사이.

 

 

 

무심사 뒷편으로 펼쳐진 파란 하늘.

 

 

 

다음은 안민동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처음 보이는 집에서 한 할머니가 누가 이런 골짜기에 들어오나 쳐다보고 계신다. 슬그머니 다가가 이런저런 것을 묻고 확인한 다음 사진에 가지깨를 담았다. 다음에 오면 수집 대상이다.

 

 

조금 위로 오르니 마을회관이 있다. 그 앞에 어울리지 않게 소화전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까지 마을의 누군가가 텃밭으로 쓰고 있었다. 이 땅의 농민들은 땅 한 조각도 그냥 놔두는 법이 없다. 참으로 부지런하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서너 명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한 분. 그 가운데 한 할머니가 집으로 향하시길래 따라나섰다. 그 집에서 아래와 같은 배추상추를 보았다. 

 

 

또 토종 아욱도 있었다. 이건 잎이 작고, 잎의 모양도 시장에서 보던 아욱과는 달랐다. 이것도 나중에 수집 대상.

 

 

그리고 할아버지와 이야기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배에 대해 슬쩍 물었다. 그랬더니 이 동네에 그 나무가 있다며 우리를 이끄셨다. 지금은 방치되어 과실도 잘 달리지 않고 다른 나무에 치이고 있었다. 100년쯤 되었을 거라는데, 어릴 때는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며 기억을 떠올리신다. 귀한 나무인 줄 알았으니 앞으로 손보고 관리하시겠다는데 다음에 올 때는 어떤 모습일지 자뭇 궁금하다.

 

 

청배는 청실리라고 한다. 한자로는 靑實梨 푸른 열매의 배나무라는 말이다. 간혹 청실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무튼 익어도 이건 누렇게 되지 않고 푸릇푸릇하며, 오히려 누렇게 되면 껍질이 두꺼워져 맛이 떨어진단다. 예전에 먹었을 때 당도가 무지 높았다고 하는데, 기억은 상대적인 것이라 요즘처럼 단 것이 많은 세상에서는 어떤 맛일지 모르겠다.

 

 

과실이 제대로 달리지 못하고 많이 떨어졌는데, 그래도 몇 개가 달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완식 박사님이 알려주신 좋은 구도로 사진에 담았다.

 

 

이곳도 대부분의 땅은 외지인이 소유하고 있단다. 전원주택으로 개발하려나? 땅은 땅의 가치로 그냥 놔두면 좋겠다. 소유와 매매의 가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아는 사람 중에 감평사로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 바람대로 될려면 그 사람의 직업이 사라져야 하겠구나.

청실리가 서 있는 집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이다. 그래서 이 나무를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 할머니께 들으니 이 마을의 대부분이 70~80대라고 한다. 가장 젊은 사람이 60대라니 말 다했다. 초고령 마을이다. 앞으로 10년 뒤, 아니 5년 뒤만 되어도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떠나시겠지...

 

 

 

청실리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목에서...

 

 

 

안민동을 떠나 광지실로 나갔다. 너른 땅의 마을이란 뜻일 게다. 실제로 지도로 보면 주변 산들 사이의 너른 땅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곳에 자리한 마을이 광지실이다. 허나 이런 너른 땅은 축사 등을 많이 한다. 괴산 지역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다지 볼 게 많지 않았지만, 댑싸리 한 장 찍고 다음 마을로 넘어갔다.

 

 

배나무여울이란 곳을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뱃사공이 마을사람과 길손을 건너다 주었겠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여져 배나무여울이란 이름만 남았다. 제대로 관광지를 만들려면 그 다리부터 부숴야 한다. 찾아가기 어렵게, 또 찾아갔으면 하루 이상은 머물게 만들어야 관광지가 뜬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그 반대다. 찾아가기 쉽게 길부터 잘 닦고, 음식점이나 마구 난립하게 만들어 아무 특색도 맛도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에 사람이 붐비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토종도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이제 돌아가는 길에 진짜 마지막으로 오창리의 유창이란 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박과 조롱박을 발견하고 기록에 남겼다. 주인 할머니를 찾아가 이것저것 묻고 싶었으나, 옥수수 출하로 정신 없이 바빠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하도 귀찮게 파리처럼 딴 데 가지도 않고 서 있으니 그제야 몇 가지 일러주신다. 지금이 한창 바쁠 때라 그럴 게다. 그렇게 보면 수집조사는 겨울이 가장 좋지 않은가 한다. 여름에는 이렇게 사전조사 다니며 살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겨울에는 수확도 끝났겠다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서는 방법이 좋겠다. 허나 예산을 지원하는 곳에서는 예산을 결산하기 전까지 결과를 보길 원하니 맞추기가 어렵다. 이번 수집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그 기간 조정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아래는 박의 수꽃이다. 

 

 

그리고 암꽃에는 이렇게 작게나마 박이 달려 있다.

 

 

유창 3리에서 가지깨.

 

 

유창 3리에서 해질 무렵에 바라본 마을 앞 논. 논두렁에는 콩이 자라고 있다. 

 

 

 

마지막 조사지를 나오고 있는 안완식 박사님.

 

 

시간은 6시가 넘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출발하자는 의견에 목도 다리 부근의 매운탕집에서 밥을 먹었다. 집에 돌아오니 11시가 다 되었다.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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