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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 바로 위쪽은 안산읍성과 관아가 있던 곳이다. 수암봉으로 오르는 길 쪽으로 해서 관아터에 들어섰다. 별 관리도 없어 풀이 어지러이 자라 황량하기만 하다. 이런 데 뭐가 있었으리라고는 그저 지나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 수 없을 정도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재 우리의 상태가 아닐까? 예전에도 그랬지만 옛것보다는 새것, 정신과 문화보다는 물질과 돈에 휩쓸려 다니고 있는 상태이니 말이다.

 
 

 

 

저 멀리 안산이라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김정경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같은 것이 서 있다. 한 650년이 가까이 되었으니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한다. 김정경이 1345년 태어났으니, 20살쯤에 심었다면 얼추 비슷비슷하다. 뭐, 누가 심은 것이 크게 중요하랴. 여기 이렇게 아직도 은행나무가 살아 숨 쉰다는 게 더 중요하다.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금수나 식물에도 못하는 면이 많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질 일이다.

 

 

 

 

발길을 기단 쪽으로 돌렸다. 이곳에는 정자나무로 자주 쓰이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옆에는 향나무도 보이는데, 이건 일제강점기 관아 자리에 면사무소를 지으면서 심은 것이란다. 역사는 끊이지 않고 흘러왔지만, 우리가 배우고 느끼는 역사는 군데군데 마디가 잘려 있다. 그것은 근현대사로 오면 더 심해진다. 학교 다닐 때는 역사 교과서의 마지막 부분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머리가 굵은 뒤에는 그건 다른 데 목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요즘 시에서는 돔구장에 올인하고 있는 듯한데, 돔구장에 앞서 돈이 안 되더라도 이곳부터 잘 정비했으면 좋겠다. 안산은 이렇게 흘러와 지금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잘 알려주시길 바란다. 돈에 따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게 아니라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건강히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제 수암에서 볼 마지막 노거수를 찾기에 앞서 안산초등학교를 먼저 들렀다. 안산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안산 공립보통학교로 시작한 무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학교다. 그래서 혹시나 이곳을 찾아가면 그때 그 시절의 파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찾았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모처럼 휴일을 맞은 아이들이 공도 차고, 연애도 하고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2층짜리와 오른쪽으로 1층 건물이 보인다. 2층은 아무래도 새로 지은 것일 테고, 저 위에 있는 1층짜리가 옛날 교사가 아닐까 추측했다. 학교 관계자에게 확인하고 싶었지만, 교육감 선거로 한산하기만 해서 그냥 이 정도로 그쳤다.

 

 

 

 

건물을 돌아보는데 재밌는 비석이 2개 서 있다. 안산초등학교의 교가를 새겨 놓은 비석인데, 하나는 옛날 교가이고 다른 하나는 요즘 만든 교가이다. 옛 교가는 1912~1973년까지 썼다고 하는데, 전문을 옮겨 보겠다.

“옛 고을 안산읍 한복판에
넓고 넓은 황해를 앞에다 두고
장엄하게 서 있는 우리 배움터
길이 길이 빛내자 우리 안산교”

노래에 많은 게 나온다. 먼저 이곳이 안산 읍의 한복판이었다는 점, 수암 앞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듯한 암시가 그것이다. 음까지 알면 더 재밌겠지만, 오늘은 누가 이 노래를 기억하고 계신지 찾을 길이 없다. 아쉽지만 여기서 발길을 돌린다.

 

 

 

 

이제 수암의 마지막 노거수를 찾는 일만 남았다. 몇 번 지나다니며 본 적이 있는데 막상 찾으려고 하니 헷갈린다. 골목을 돌고 돌아 마침내 마지막 느티나무를 찾았다. 느티나무 앞에 자리한 이발소가 정겹다. 요즘은 남자들도 다 미장원에 다닌다. 외국영화를 보면서 이발소의 모습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느낀 건 여자들이 미장원에서 수다를 떨듯, 남자들은 이발소를 중심으로 삶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우리네 이발소도 그랬지 않을까? 어린 시절 한두 달에 한 번씩 머리를 자르러 가면 그런 분위기를 느낀 기억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요즘 남성의 여성화를 환영하기도 하고, 우려하기도 하는 목소리가 있다. 청소년이나 20대 초반을 보면, 참 얘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유니섹스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구별은 하되 차별은 하지 말라고 했다. 헌데 지금은 차별은 하되 구별은 하지 않는 시대가 된 듯하다.

동네 한복판에 이런 느티나무가 자리하면 시골에서는 자연스레 마을회관이나 정자나 평상을 가져다 놓고 여름 한낮의 땡볕을 피하기는 휴식이 장이 되기도 하고, 서로 만나 대소사를 이야기하는 사교의 장이 되기도 하고, 풍년을 기리거나 마을의 안녕을 비는 종교의 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안산 수암의 느티나무는 그런 모든 기능을 잃었다. 그저 이제는 이곳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전부가 된, 박제가 되어 버린 모습에 씁쓸할 뿐이다. 그래도 그 앞에 이발소가 그 전통을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 이 동네에 오래오래 사신 토박이가 되어 가는 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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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은 신도시가 아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아오던 곳이었다.

그러던 곳을 새로 개발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신도시인 양 생각한다.

공장 많은 곳, 범죄율 높은 곳, 뜨내기 많은 곳... 이런 평가가 현재 안산의 모습이다.

 

그러나 안산은 그 역사가 무지 오래된 곳이다.

물론 시화방조제를 만들면서 안산의 역사는 새로 시작되긴 했다.

옛 마을을 쓸어 버리고 새로운 집을 만들고, 개막은땅에는 공장들이 들어서고, 이제 아파트며 전국 곳곳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넘친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이가 있으니, 바로 이 느티나무이다.

한대역에서 중앙역 사이에 있는 이 느티나무는 나이만 무려 400살이 되었다.

이건 이제 하나의 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하지 않은가?

들어서는 길조차 없어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덕분인지 어마어마하게 가지를 뻗은 것이 나이보다 훨씬 건강해 보인다.

사람들의 왕래와 손길이 많이 닿는 나무보다는 훨씬 행복하다고 할까?

뭐든 사람이 많이 끼면 문제가 된다.

 

 

얼마나 더 물러나야 온전한 모습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금만 더 가면 굴러떨어질 것 같아 이쯤에서 찍었다.

나무 둘레는 어른 4~5명이 둘러안아야 할 정도로 굵다. 

 

 

1982년에 370살이라고 추정했으니, 벌써 20년도 더 지났다.

400살...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나이다.

 

 

옆에 꼽사리처럼 자라는 나무는 밤나무다. 어디서 씨가 굴러왔나보다.

보통은 자기 새끼를 치는데, 이 느티나무는 맘씨 좋게도 밤나무를 불러왔다.

 

 

원래 이곳은 바닷물이 들락거리던 곳이다.

지금은 시화방조제 덕에 너른 땅이 생겨, 예전에는 농토로 썼지만 지금은 모두 돈이 되는 건물들뿐이다. 

새만금 공사가 끝나면 아마 그곳도 이렇게 되리라.

그래도 좀 다른 것이 그곳은 수도권이 아니라 이 정도까지는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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