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과 채소는 1만 년 전 농사가 시작된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는 농민들이 대를 이어 맛과 크기 같은 자신들이 바라는 형질을 인위적으로 선별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시각화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래서 호주의 화학 교사 James Kennedy 씨가 다음과 같은 몇몇 멋진 정보도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진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 중 하나에는 초기 아메리카의 야생 식물인 테오신테라고 알려진 옥수수가 있다. 9천 년의 시간을 거치며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옥수수의 진화는 재미난 이야기이다.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그것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야생종이 자라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전학자와 식물학자, 고고학자들이 열심히 추적하여 약 9천 년 전 테오신테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알아냈다. (둘은 놀랍게도 극소수의 유전자 외에는거의 비슷하다.)

중앙아메리카에서 옥수수가 길들여지자, 선발 육종을 통하여 옥수수는 급속도로 변형되었다. 초기의 농민들은 그들의 작물을 관찰하여 더 크거나, 맛이 좋거나, 가루로 내기 좋은 옥수수의 씨앗을 갈무리했다. 기원전 4천 년 무렵, 옥수수 자루의 크기가 이미 3cm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고 단 몇 천 년 만에 옥수수 자루는 몇 배의 크기로 커졌다. 

현재 지구 전역에서 옥수수가 재배되며 선발 육종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에는 유전공학과 결합되었다. 과학자들은 해충 피해를 막조가 Bt 토양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옥수수에 삽입했다. 그리고 일부 연구자들은 현재 가뭄 저항성 옥수수 품종을 개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위는 또 하나의 재미난 정보도이다. 현대의 수박은 아프리카 남부의 조상들과 닮지 않았다. 이 역시 수천 년 동안 행해진 육종의 결과이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1950~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났다. 작물학자들이 수박을 전국에서 재배할 수 있도록 질병 저항성과 두꺼운 껍질을 지닌 수박 품종을 육종한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린 여전히 새로운 유형의 수박을 생산하고 있다. 일본의 한 섬에서 재배되는 검은 덴스케 수박이 그것이다. 그리고 작물학자들은 수박의 염색체를 2배로 만드는 화학물질을 첨가하여 정상적인 수박과 수분을 시킨 결과 씨 없는 수박을 개발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Giovanni Stanchi 가 그린 유화에는 수박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다음으로 위의 복숭아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수천 년에 걸쳐 크기와 육즙을 기준으로 선발해 왔다. 복숭아의 수분함량은 6천 년 전에 비해 크게 변화했음에 주목하자.

기억할 점은, 선발 육종의 모든 시도가 잘 판명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Sarah Yager 씨가 최근 Atlatic에 기고했듯이, 미국의 사과 재배자들은 20세기 동안 가능하면 밝고 반짝이며 흠집 없이 오랫동안 진열대에 놓여 있을 수 있는 Red Delicious 사과를 육종하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는? "맛보다 외양만 좋아져, 쓴맛이 나는 단단한 껍질에 속은 무르고 단맛이 강한 사과가 되었다." 요즘 저장과 운송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Honeycrisp나 Gala와 같은 더 맛있는 사과 품종이 Red Delicious를 능가한다.

(Kennedy 씨의 블로그를 알려준 Calestous Juma 씨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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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gri-history.kais.kyoto-u.ac.jp/East-Asian2008/proceedings.pdf



P-1 岩本純明 (도쿄농업대학)

근대 일본의 공업화와 농업 부문


P-2 구자옥(전남대 명예교수), 이은웅(서울대 명예교수), 이병렬(한국 기상청)

한국의 벼농사 재배 및 품종의 변천사 ―근대화 과정을 중심으로


P-3 王思明(난징농업대학 중화농업문명연구원)

한중일 농업 현대화 비교연구


AI-1 佐藤章夫(토호쿠 대학 대학원)

근세 중・후 농업 수리시설의 부진과 유지관리를 둘러싼 藩과 村 자치 -山形五堰을 사례로


AI-2 박태식(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조선반도 삼국(백제・신라・고구려)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미 비교


AI-3 戸石七生(일본학술진흥회), 松尾美希(도쿄대학)

일본 가족은 특이한가? 공업화 이전 시대의 직계가족 제도와 촌락사회


BI-1 劉興林(난징대학)

한대 농전農田 형태 약설


BI-2 大瀧真俊(교토대학 대학원)

전시체제기의 일본에서 '만주'로 이식마移植馬 사업 -홋카이도 농법의 도입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BI-3 黄世瑞(화난사범대학)

민속풍정과 중국 전통농업 사회


AII-1 朴錫斗(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농업의 변모


AII-2 野間万里子(교토대학 대학원)

전전 시가현에서 소 비육


AII-3 김미희 외(농촌진흥청 농촌자원개발연구소)

원예의 전통지식과 그 실천적 특성에 관한 평가


BII-1 魏露苓(화난농업대학)

청 말 남해안 지역의 근대화 농업교육 연구 —잠상학당을 중심으로


BII-2 小島 庸平(도쿄대학 대학원)

전쟁 시기 동아시아의 제분업과 밀 시장 ―일본 자본의 '만주' 진출을 중심으로


BII-3 張法瑞(중국농업대학)

중국 농업 현대화 과정 속의 과학과 교육 요소


AIII-1 三浦洋子(치바경제대학)

식민지 시대에 조선 북부의 대농장 경영 -난곡기계농장의 유축전작농업의 실태


AIII-2 안승택(전북대학)

식민지 조선에서 소주밀식小株密植 정책과 농민의 소식疎植 관행 ―역사생태적 지평에서 본 농업기술의 비교문화론


AIII-3 伊藤淳史(교토대학)

전후 일본의 출이민 정책 -농업정책에서의 측면 및 일본계 브라질 이민의 역사적 맥락


AIII-4 金鐘德(사당동 한의원 원장)

대나무의 성질과 효능에 관한 문헌연구


AIII-5 황대룡

한국 농촌 주민의 사회교육 참가에 관한 분석


BIII-1 加藤尚子(국립환경연구소)

한신 대수해 기념지 7책에 관한 비교서지학적 연구


BIII-2 李建萍(중국농업박물관)

근대 중국 귀저우 소황촌의 변천으로 본 민족지구 전통문화 가치의 재발견


BIII-3 中山大将(교토대학)

사할린 음식의 식민지사


BIII-4 李令福(산시사범대학)

환경보호 사업이 어떻게 白城则村의 현실과 미래에 영향을 미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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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골 똥, 서울 똥>의 원고를 검토하고 썼습니다.

그러니 책을 보시면 더 잘 이해가 될 겁니다. http://bit.ly/Z9EXqN



 


지난번에 말한 내용을 오늘 성포도서관에 가서 찾았습니다. 책은 <서유럽 농업사>(http://bit.ly/Z9EZ23)이고 350~351쪽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휴경지의 소멸과 대체로 많은 시비를 요하는 환금작물 재배로 막대한 양의 거름이 필요하게 되었다. 토양에 질소를 공급하는 나비꽃작물(콩과식물)이 새로운 윤작제에서 재배되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토양이 필요로 하는 많은 자양분 수요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또한 사료 작물의 재배를 통해서 가능해진 가축 수의 증가로도 거름의 부족란을 해소하지 못했다. 특히 플랑드르에서는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다해서 그들 토지의 수확고를 증대시킬 수 있는 거름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미 중세에 그들은 농가의 외양간두엄 외에 도시의 오물(인분)과 쓰레기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유채 재배가 확대된 후에는 착유기에서 나오는 깻묵이 거름으로 이용되었다.

 

이상입니다. 그네들이 늘 똥을 이용하지는 않았겠지만, 우리나라도 조선 초기에는 그와 사정이 비슷했으리라 짐작됩니다.

 

또 페스트 같은 전염병도 다른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말하자면,

8세기 말에 시작된 삼포제와 무겁고 땅을 깊이 가는 쟁기 덕에 농업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삼포제의 중요성은 생산량이 늘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양학적으로 균형잡힌 식탁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주로 곡류, 특히 밀을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어 탄수화물은 충분했지만 단백질이 부족했지요. 우유를 이용해 버터나 치즈를 만들고 했지만 그걸로는 다 채울 수 없었다고 하네요. 탄수화물만 먹으면 아미노 결핍증에 걸린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던 것이 삼포제 때문에 콩 농사를 많이 지으면서 단백질을 충분히 먹을 수 있어 인구가 급증했답니다.


또 콩이 가진 질소를 붙잡는 효과는 삼포제로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게 한 숨은 공신이기도 하구요. 이미 로마의 플로비우스인가 하는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글을 남겼다고 하네요. 그걸 알기는 했지만 농사에 응용한 것은 삼포제를 실시하고부터입니다. 그 사람은 "곡류보다 콩류가 더 훌륭한 음식이다"라고 했답니다. 중세의 어느 수도사는 "콩의 축복"이라 하기도 하고, 유럽에서는 콩으로 가득찼다라는 말이 활기차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밀농사 = 사막화' 공식도 위태롭습니다. '밀농사+콩농사' = '논농사+콩농사' 이런 공식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콩은 이래저래 참 좋은 식물인가 봅니다. 서양사람들도 우리처럼 다 알고 이용했네요.

 

그렇게 인구가 급증하면서 인구밀도가 올라가고, 또 땅이 모자라서 개간을 하려고 북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해 예전에 살던 곳도 새로 사는 곳도 도시가 되면서 상업이 활성화됩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는 상인들이 있을 수 있는 건 십자군 원정과 성지순례 경험 때문이겠지요. 아무튼 인구 폭발에 상인들은 뻔질나게 드나들고, 거기에다 페스트가 창궐할 무렵 몰아닥친 가뭄 같은 재해 때문에 엄청 굶주려 면역력도 떨어진 상태이고, 위생 상태도 한몫 거들긴 하겠지요. 하지만 앞의 요인이 더 주요한 것 같습니다. 똥이나 위생은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고, 기근과 인구 폭발에 따른 밀집이 결정적일 겁니다. 똥이 결정적이라면 그 전이나 후에는 멀쩡한대 왜 그때만 그런지 설명이 안 됩니다.

 

또 다른 것으로 일상 음식은 역시 밀로 만든 빵이었다고 합니다. 호밀과 귀리는 말 사료로 쓰고, 이것도 삼포제 덕에 생산량이 늘어나 말을 많이 키우고 자주 이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말이 많아지고 자주 쓰다보니 역시 소보다는 빠르다는 특징이 있으니 교통수단이 엄청 발달하지 않았을까요?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그래서 상인들이 그렇게 이 도시 저 도시로 오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상업의 발달에는 역시 삼포제로 남는 생산물이 생기고, 또 그 덕에 말을 쉽게 부릴 수 있었던 배경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튼 빵이 주식이고, 거기에 빵과 같이 먹는 것(companaticum)이라 하여 고기, 푸성귀, 과일을 곁들였다고 합니다. 지방은 지중해에서는 올리브 기름으로, 북부에서는 돼지기름이나 치즈, 버터로 먹었다고 하네요. 중세 말기가 되면 확실히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육류를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기 먹은 사람의 똥이 페스트가 창궐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많이 먹었다고 해도 지금보다는 적을 것이고, 일부 신분 높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그네들도 우리의 보릿고개처럼 여름에 수확하기 직전 곡식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빵 대용품으로 푸성귀를 먹었다고 하네요. 감자가 들어와 값싼 식량으로 이용하기 전까지는요. 우리가 나물 뜯어다 죽 쑤어 먹은 모습이랑 어쩌면 이리도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중세 말기에는 그때 동양에서 쌀도 수입해다 먹었다고 하는데 아마 인도쪽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가난한 사람은 완두, 콩, 푸성귀를 먹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입니다. 중세 말이 되면 인구 폭발과 밀집 때문에 도시의 행정기관에서 오물 처리를 두고 고심했다고 합니다.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해자와 배수로를 이용한 공중변소가 있었다고 하네요. 15세기 뉘른베르크 같은 도시에는 집 뒤에 한줄로 나란히 강으로 흘러가는 하수구를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도시에서는 이렇게 요강에 싸서 하수구에 버리거나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게 강이나 해자로 흘러가면 물이 낮아지는 때 쌓인 오물을 정기적으로 퍼다 수레에 실어 성벽 밖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럼 그걸 인근에 사는 농민들이 수레를 끌고 와서 가지고 가거나 사 갔겠지요. 또 확인하니 수도원이나 교황청 같은 건물에는 화장실이 다 있더군요.


이상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책과 <사생활의 역사>(http://bit.ly/Z9F71k),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http://bit.ly/Z9F7P7) 등에서 본 내용입니다.



이 내용과 함께 함께 보면 좋은 글... 인간과 가축의 똥을 재활용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농업의 핵심 http://blog.daum.net/stonehinge/8728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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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 근대 100년의 역사



정조대왕은 화성(지금의 수원)을 성역화하기 위하여 1789년 수원부 읍치를 이전하고 백성들을 모으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대규모 상인들을 유치해 경제를 활성화하고 수원부 백성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고 수원에 모여들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만으로 수원에 사람이 모이게 하기는 어려웠다.


반계 유형원 선생이 극찬했던 팔달산 주위 넓은 들녘과 광교산에서 흘러내리는 버드내(하천)까지 갖춘 지역이면서 교통의 요지였지만, 토양이 척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않았기에 당시에는 이런 땅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 리 없었다. 이에 정조는 수원 지역의 농토를 가장 비옥한 땅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원으로 모여드는 백성들에게 대대적인 퇴비 증산을 지시했다. 너무도 척박해 거들떠보지도 않던 땅이 3년 동안 퇴비를 넣자 마침내 최고의 토양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물을 걱정하지 않고 농사지을 수 있도록 1795년에 만석거萬石渠, 1798년에 만년제萬年堤 등의 저수지를 축조하고, 주변에 만년둔萬年屯과 대유둔大有屯이라는 국영농장을 만들어 농사짓게 했다. 농사를 위해 의도적으로 축조한 최초의 저수지가 만석거萬石渠라는 학계의 의견을 보면 정조의 저수지 건설은 혁신 그 자체였다.


만석거와 만년제의 축조를 통해 저수지를 이용한 선진 농법에 자신감을 얻은 정조는 현재는 서호로 더 잘 알려진 축만제祝萬堤라는 저수지를 축조하고, 축만둔祝萬屯 또는 서둔西屯이라고 부르는 둔전屯田을 만들어 농사를 장려했다. 서호西湖는 단순히 제방을 쌓아 물만 저장한 게 아니라 물길을 조성하고 물길을 따라 논을 배치하여 가뭄에도 안정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했다. 이상과 같은 정조 시대 선진농법을 통해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수원 지역에 농업기술을 개발하려고 1906년 통감부 관리로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설치했다. 이듬해인 1907년에는 우리 정부로 이양하여 1907년 5월 15일에 농촌진흥청의 전신인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이 정식 개장되어, 실험농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권업모범장 설치의 사료적 요약



1900년 : 농상공무 소속하에 잠업시험장蠶業試驗場설치

1904년 : 상공학교에 농과農科를 증설, 학부직할의 농상공학교 설립

         - 부속 농사시험장을 뚝섬에 설치

1905년 : 원예모범장 설치(뚝섬)

1906년 : 농상공학교의 각과를 분리

1906년 : 통감부 관리하에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을 수원에 설치

         - 현대식 농업시험연구기관의 형태를 갖춤

1907년 : 권업모범장 한국정부로 이관, 농상공대신 주관아래 둠

1907. 5. 15. : 한국정부 권업모범장 정식개장, 현대식 농사시험 연구기관 정식 개장

1907. 1 : 농림학교는 수원 서둔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사

1908. 10. 2. : 순종황제 권업모범장 방문, 농림학교에 150원 하사




농업연구기관과 농업교육 기관 설립 연대기


1904. 4 : 농상공학교 설립(서울 수송동)

        - 농과農科 증설 

1905 : 원예모범장 설치(서울 뚝섬)   

1906. 4 : 통감부 권업모범장 설치(수원 서둔동)   

1906. 9 : 농림학교 창설

        - 농상공학교를 각 과별로 분리 

1907. 1 : 농림학교 이전(서울농대 전신)

        - 수원 서둔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 

1907. 5 : 한국정부 권업모범장 개장식

        - 현대식 농사시험연구기관 정식 발족

          ※ 권업모범장장이 농림학교 교장 겸임   

1908. 3 : 종묘장 관제발표

        - 전북, 전남에 종묘장 설치   

1908. 10 : 순종황제 권업모범장 행차

         - 농림학교에 150원의 하사금 배수拜手   

1910. 10 : 대구, 평양, 목포에 지장설치   

1916 : 농림전문학교로 개칭(농림학교 부치附置) 

1918. 3 : 서선지장 설치(황해도 사리원)   

1920. 4 : 수원농림전문학교 분리 

1920. 9 : 수원농림고등학교로 개칭 

1922. 3 : 임업시험장 설립   

1922 : 권업모범장을 농사시험장으로 개칭   

1922. 9 : 남선지장 설치(전북 이리)   

1930. 3 : 북선지장 설치(평북 갑산)   

1932. 3 : 도 종묘장을 도 농사시험장으로 개칭   

1943. 4 : 농사시험장 및 도 농사시험장을 농업 시험장으로 통합 

        - 지장支場 설치 : 경기, 대구, 광주, 이리   

1944. 4 :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개칭 

1946. 7 : 국립서울대학교 신설로 통합 

1947 : 농사개량원 산하 국립농사시험장으로 개칭   

1949 : 중앙농업기술원으로 개칭   

1957. 6 : 농사원農事院 발족 - 본원 및 6개 시험장 체제로 출범

- 9개 도 농사원, 시군 농사교도국 설치   

1962. 4 : 농촌진흥청 발족, 본청 및 11개 시험장(임업시험장 포함) 9개 도 농촌진흥원, 시·군 농촌지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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