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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평예(坪刈; 농작물의 작황을 검사할 때 평균적으로 된 곳의 한 평 내지 몇 평을 베어 전체의 소출을 셈하는 방법) 시험



코우사카 기사부로(向坂幾三郞)



조선에서는 경지면적을 말할 때 몇 마지기 또는 며칠갈이로 계량하는데, 그 한 마지기 또는 하루갈이로 부르는 것도 가는 곳마다 서로 다르다. 혹은 두 마지기로 하여 이전에 1단보에 해당하는 면적임에도 세 마지기나 네 마지기로 부르던 것이라서 처음으로 이런 계량 단위를 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한 마지기에 몇 말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몇 섬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결코 이를 토대로 전체를 추론할 수 없다. 특히 도량형 제도 역시 통일적이지 않은 오늘날, 몇 섬 몇 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가는 곳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통계가 유래한 근거를 알지 못한 채 조사의 필요성도 인정하지 않으므로 농민은 해마다 자기의 경지는 물론 생산되는 수확물의 수확량마저 자세히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정확한 수확량은 스스로 자기들이 조사하지 않는 한 도저히 이를 분명히 할 수 없어서 농업경영자들이 늘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점으로, 경영방침과 개량법을 쉽사리 확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된다.

이제 일본과 조선 양국 공통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조선 농업에 뜻을 둔 사람이 날로 많아지는 때를 즈음하여, 경지의 생산력을 알아야 할 필요가 더욱 간절하다고 믿는다. 이 모범장은 지난 1906년, 우선 전라북도 군산과 경기도 수원의 두 지역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농사짓는 곳을 선정해 정밀한 평예를 함으로써 두 나라의 벼 품종별 수확량을 조사하여 다음의 성적을 얻었기에 보고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다음의 성적에 의하여 두 지역 논의 수확량을 개략적으로 알게 되었고, 일본 품종이 상당한 차이로 조선 품종보다 우수하여 단보당 수확량이 400kg 이상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이로 보아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조선의 재래종 대신 일본 품종으로 대체하는 것만이 조선의 쌀 생산량을 뚜렷하게 증가시킬 수 있음은 추호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무튼 품종을 장려하고 보급하기 위해서는 아주 신중한 조사가 필요하므로 단순히 다음의 성적에만 의존하여 결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리 모범장에서는 이 문제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연구조사를 반복, 빨리 좋은 품종을 찾아 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권업모범장 1907년 사업보고서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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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이 지금과 같은 자리(수원)에 세워진 것은 그 역사가 1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슬픈 역사이긴 하지만 그걸 말하려면 일제를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대한제국에게 농업 연구를 권장한 결과, 1906년 이곳에 권업모범장이란 기관을 설치한다.

그게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였는가는...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로 이 기관이 예속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때부터 일제는 자신의 발전한 농법을 조선에 보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힌다.

'모범적인 농업을 권한다'는 기관의 이름에서 바로 그것이 잘 드러난다.

 

지금도 농촌진흥청에 가면 그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농촌진흥청에 들어가 왼쪽으로 보면 이러한 비석이 서 있다. 잘 보면 이는 이정표임을 알 수 있다.

이쪽 건물은 권업모범장, 뒤쪽에는 다른 건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건 대정 oo년이라 새겨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하는 상징물인지 모르겠다. 

 

 

일제시대에 세워진 연구동. 아직도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지금까지도 쓰는 걸 보면 참 일본놈들 무섭다. 

 

 

일제시대 건물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원래 입구 쪽은 거의 쓰지 않는다. 앞으로 큰길이 뚫려 그곳으로는 통행하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건물 안 계단에서도 옛 향기를 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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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1910년 8월 경술국치와 함께 권업모범장은 총독부 관할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기사 10명, 서기와 기수 35명을 두고, 농림학교를 부속시켜 일본농법을 이식하는 참모 기구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출장소를 지장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대구, 평양, 독도, 용산, 목포에 지장을 설치했다. 임시목화재배소를 합병해 목포지장에 인계하고, 독도원예모범장, 용산여자잠엄강습소, 농림학교를 병합했다. 이를 통해 권업모범장은 본장 하나에, 지장 다섯, 학교 하나로 구성되었다.

1914년 3월 31일로 대구지장과 평양지장을 폐지해 대구지장은 경상북도로, 평양지장은 평안남도로 사업과 설비를 이전한다. 또 원산출장소는 규모를 확장해 덕원德源지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용산지장은 3월 31일로 폐지하고 새로 원잠종제조소를 설치하고, 여자잠업강습소는 수원으로 옮긴다. 이때 세포洗浦출장소를 새로 만들어 양치기 사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해 8월 관제를 개정해 권업모범장의 기사를 11명에서 9명으로, 기수와 서기 26명을 24명으로 줄인다.

 

이러한 개편을 단행해 농업을 수탈하려는 기반을 구축한다. 식민지 초기 주먹구구식으로 농업을 시험하고 조사하던 것에서 체계적으로 시험과 연구를 진행했다. 곧 1915년부터 정규 육종사업을 시행해 일본에서 도입한 조신력과 다마금 등의 순계 도태를 행하고, 인공교배 육종도 이때부터 조금씩 시작한다. 또 1916년 농업기술관회동 � 권업모범장은 '순계선택시행표준협정의 건'을 제출하고, 종묘장에서 쌀의 순계선택 표준을 정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일이 늘어나자 1916년 4월에 기수와 서기를 24명에서 26명으로 늘렸다. 1917년 6월 16일에 이전 출장소였던 난곡을 목마지장으로 승격시켰다. 동시에 원잠종제조소를 잠업시험소로 고치고, 각 지장의 이름을 목포목작지장, 독도 및 덕원원예지장, 세포목양지장이라고 고쳤다.

권업모범장이 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18년 3월 30일 관제를 다시 고치면서부터이다. 이에 따라 기사 9명을 10명으로 늘리고, 농림학교를 권업모범장 관할에서 뺐다. 이에 따라 농림학교는 농림전문학교로 승격해 4월 15일 개교했다. 어렇게 권업모범장이 연구기관으로 정착하는 과정에 일제의 농업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1918년 일본에서 일어난 "쌀 폭동"이다. 1918년 일본에서 쌀값이 폭등하고 쌀 독점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전국적으로 쌀 폭동이 일어났다. 이는 곧 수습되긴 했지만 이를 통해 일제는 많은 걸 깨우쳤다. 안정적인 식량 공급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조선의 농업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총독부 농무과장인 靑木戒三은 "장래 일본에서 쌀 자급이 곤란하면 조선과 대만에서 그것을 보충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며 조선에서 대규모로 쌀을 생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를 시행하기는 어려웠다. 조선의 농업 조건인 천둥지기의 존재와 수리시설과 비료의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럴 수 없기 �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4월 22일 다시 관제를 개정해 기사 2명, 기수 5명, 서기 2명을 늘렸다.

 

 

 

1920년대

 

1920년 1월 권업모범장 관제를 개정해 기수 2명을 늘리고, 그해 3월 27일 권업모범장 지장 및 출장소를 증설했다.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 4월 13일 서선지장을 설치하고, 4월 14일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에 용강면작출장소를 설치했다. 서선지장의 장으로는 武田總七郞 기사를 임명하여 밭농사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게 하고, 용강면작출장소의 장으로는 河野龍三 기수를 임명해 목화농사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산미증식계획을 실현하려면 많은 기술적인 문제에 부닥치는데 이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연구기관을 확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1919년 말 2대 장이 된 橋本左五郞도 권업모밤장을 연구기관으로 위상을 강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단지 1922년 5월 관제가 개정되어 기수 8명이 늘었을 뿐이다. 이것도 1923년 5월에는 기사 1명과 기수 3명이 줄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해 3월에는 덕원원예지장이 폐지되고, 용강면작출장소는 목포지장에 속하여 목포지장용강면작출장소로 바뀐다.

 

본장 - 경기도 수원 - 1906.4 - 보통농사, 토지개량, 축산, 농예화학

서선지장 - 황해도 봉산 - 1920.3 - 밭작물 일반

목포면작지장 - 전라남도 목포 - 1906. 7 - 목화농사

용강면작출장소 - 평안남도 용강 - 1920.3 - 재래면농사

독도원예지장 - 경기도 독도 - 1906. 8 - 원예

덕원원예지장 - 함경남도 덕원 - 1912. 3 - 원예

세포목양지장 - 강원도 세포 - 1914. 3 - 양치기

난곡목마지장 - 강원도 난곡 - 1917.6 - 말치기

잠업시험소 - 경기도 수원 - 1909 - 잠업

여자잠업강습소 - 경기도 수원 - 1910 - 여자잠업강습

 

1923년 3월 3일에는 3대 장으로 규슈제국대학 교수인 大工原銀太郞이 취임한다. 그는 농예화학자로 일찍이 독일에 유학하며 토양학과 비료학을 연구했지만, 조선의 농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권업모범장의 성격도 마땅히 연구기관이란 이름에 걸맞게 연구에만 종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취임한 시기는 신미증식계획이 실시되며 급속하게 토지 개량과 우량품종을 보급할 때라 비료에 대한 요구가 폭발하고 있을 때였고, 그것은 자연히 화학비료로 나아가는 추세였다. 그러나 화학비료는 잘못 쓰면 오히려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토양학과 비료학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러한 조선 농업의 현실이 그를 장에 임명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절 권업모범장은 1924년 12월 다시 기사 5명, 기수 9명이 주는 등 실질적인 지도기관의 역할을 할 수 없도록 축소된다. 이와 함께 독도와 세포의 지장도 폐지되었다. 이는 쌀을 많이 생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농사를 개량하는 일은 자연히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권업모범장의 기능과 역할도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산미증식개획은 농사개량이 뒷받침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간다.

일제는 농사개량을 주축으로 1926년부터 2차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한다. 이와 함께 4대 장으로는 加藤茂苞가 취임한다. 그는 1903년부터 농상무성 기내畿內지장에서 일하면서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일본에서 가장 처음 벼 품종을 인공교배한 사람이다. 그 뒤 농학박사로 규슈제국대학 교수로 일하며 1923년 2월 총독부 3회 농업기술원강습회에 초청 강사로도 참석하고, 권업모범장의 촉탁으로 조선을 돌아다니면서 벼농사를 조사한 적도 있었다. 그가 장이 된 데에는 우량품종 육성이라는 농사개량을 통해 산미증식계획을 실현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26년 12월 권업모범장 주최의 전선지주간담회에서 그는 권업모범장의 위상을 시험연구기관이라고 연설했다. 이를 위해 1927년 7월 기사를 11명에서 14명으로, 기수를 22명에서 25명으로 늘렸다. 1929년 들어서는 남선도작시험장 기사 1명과 기수 1명, 남선우시험 기수 2명, 잠업시험장북부출장소 기수 1명을 늘렸다. 그리고 벼 품종 육성과 비료를 많이 줘도 견딜 수 있는 품종을 육성하려고 김제만경평야 근처 이리에 남선지장을 설치했다. 1929년 9월 17일부터는 실질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농사시험장으로 조직을 개편해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으로 이름을 바꾸기에 이른다.

 

 

 

출처 : 돌터
글쓴이 : 金石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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