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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에는 조선 후기에 만 권의 서책을 지닌 집이 2곳이나 있었다. 하나는 청문당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경성당이라 불렸다. 두 집 사이의 거리는 50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만 권의 서책을 지닌 곳이 전국에 4곳뿐이었다는데, 그 가운데 2곳이나, 그것도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안산에서 실학이 발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책은 양식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실제로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조선 실학의 큰 별인 성호 이익 선생이 살았다. 아마 성호 이익 선생은 청문당과 경성당에서 서책을 빌려다 보며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실제로 순암 안정복은 이곳에서 서책을 빌릴 수 없겠냐는 내용의 정중한 서찰을 보내기도 하였다.

 

청문당은 텃밭을 오가며 늘상 지나다니는 곳이기도 하고, 안산시에서 새로 단장을 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은 집으로 만들어 놓아 영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경성당이나 한번 갈까 하는 맘으로 텃밭에 갔다가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이곳을 지나다닌 지 5년도 넘었건만 가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아무래도 그곳으로 갈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그냥 지나치게 되었다. 오늘 이렇게 막상 찾아가려고 하니 웬지 설렌다.

 

굴다리를 지나니 오른쪽으로 축사가 자리하고 있다. 순간 갑자기 뭐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의심이 일어났지만 그냥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러자, 눈 앞으로 오래된 집 한 채가 보인다.

 

  
▲ 나무에 가려 있는 경성당 조용하고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
ⓒ 김석기
경성당

 

가까이 다가가니 반듯하게 잘 지어진 한옥이 우렁차게 서 있다. 비록 집 앞쪽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 때문에 옛 풍광은 잃었지만, 그 풍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더 반가운 것은 청문당과 달리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어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집을 구경하고 싶으면 주인에게 청하면 가능하다고 하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을까.

 

  
▲ 멋진 누마루가 돋보이는 사랑채 가까이 다가가니 멋스러운 전통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더운 여름날 저 누마루에 앉아 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난 양반하곤 거리가 멀다. 공부하는 방에서 낮잠 잘 생각이나 하다니... 누마루 앞쪽으로 연못이 있을 만한데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 김석기
경성당

 

 

누마루에 걸린 주련柱聯을 보니 내용이 재밌다. 3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山高華帽峰下居簪纓之族村深覆釜谷中有鐘鼎之家(높은 산 화모봉 아래 빗살처럼 모여 사는 한 가문, 이들이 사는 깊은 골 부곡에는 집들이 솥발처럼 들어섰구나)

宣廟賜牌之局寸土勿輿於他人(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

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성조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하라)

 

  
▲ 경성당 앞마당 연못이 있을 만한 자리이나 그냥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저 멀리 고속도로만 아니면 정말 천하의 명당이 아닐까. 청문당보다 오히려 위치가 더 좋은 듯하다. 주련에 나오는 화모봉은 사진 왼쪽에 서 있다.
ⓒ 김석기
경성당

 

툇마루 위쪽을 보니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는 이 집을 지으면서 기록한 경성당기竟成堂記, 하나는 경성당이란 이름을 쓴 것이다. 경성당이란 현판에는 동농이란 호가 적혀 있다. 찾아보니 그 호는 김가진金嘉鎭이란 사람의 호라고 한다. 그는 1846년에 태어나 1922년 상해에서 죽었는데, 안동 김씨 집안의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인 1910년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다가 반납하고, 이후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분이 쓴 글씨니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게다. 그래도 그 필체가 정말 멋지다.

 

  
▲ 경성당 현판 동농 김가진의 글씨. 웬지 굳은 절개가 느껴지는 듯하다.
ⓒ 김석기
경성당

 

  
▲ 경성당기 이 집을 짓게 된 내력을 밝힌 내용.
ⓒ 김석기
경성당

 

내친 김에 이 집의 유래를 알아보니 柳重序(1779~1846)라는 사람이 둘째아들인 방(1823~1887)의 살림을 내주면서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김가진과는 그 둘째아들과 친분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역사 공부하는 분들이 어렵겠지만 둘의 관계를 캐서 알려주면 좋겠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따지면 200년 가까이 된 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시멘트 건물은 몇 십 년이라도 서 있으면 대단한 거지만, 나무로 지은 한옥은 어떻게 그리 오랜 세월을 버티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김가진이란 인물과 연결이 될 정도면 조선 말기까지도 이 집안의 세력이 대단했나 보다. 

 

  
▲ 연자방아에 새긴 글씨 집 앞마당에는 만수동천이라고 새긴 연자방아를 불 수 있다. 그 크기로 보아, 만약 이 동네에서 썼던 것이라면 이 일대에서 농사를 엄청난 규모로 지었다고 할 수 있다.
ⓒ 김석기
경성당

 

  
▲ 만수동천 비석 나무가 엄청나게 우거져 있다고 하여 만수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나의 텃밭이 있는 곳은 능처럼 큰 무덤이 있다고 하여 능안골이라 불린다.
ⓒ 김석기
경성당

 

  
▲ 우거진 숲 정말 만수동이란 이름에 걸맞게 아직도 나무들이 엄청 우거져 있다. 이 집을 지나 안쪽으로 쭉 걸어 들어가도 멋진 숲을 만날 수 있다.
ⓒ 김석기
경성당

 

경성당을 보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역시 집에는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거다. 사람이 살면서 자꾸 쓸고 닦고 손길을 줘야 제대로 집다운 집으로 서 있을 수 있다. 지척에 있는 청문당과 경성당을 계속 비교하게 된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었어도 예전에 청문당에 사람이 살았을 때가 더 좋았다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한다. 박물관이나 문화재를 가면 늘 드는 생각이, 그런 곳들은 아무 생명력 없이 죽어 있다는 점이다. 보존을 위한 보존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과 함께 살아 숨쉬며 공존하는 방안을 마련할 수는 없는 것인가?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지거나 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문화재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 경성당 사랑채의 기단 기단으로 쌓은 돌들의 질서정연함. 잘 지은 집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김석기
경성당

 

마지막으로 이 집을 찾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채 누마루 바로 옆에 있는 그 좋다는 옻나무 우물이다. 정말 소문대로 여러 효능이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만수동의 울창한 숲이 내뱉는 맑은 물이 예전부터 끊임없이 퐁퐁 샘솟고 있다. 물맛은 사 마시는 생수는 여기에 비할 수 없다.

 

  
▲ 옻나무 우물 우물 옆에 선 옻나무는 수령이 5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니 자유롭게 오가며 물을 떠 갈 수 있다. 여기서 물 한 병 떠서 그대로 산으로 오르는 것도 좋겠다.
ⓒ 김석기
경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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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의 가옥

 

 

(1) 서민가옥


그림 1-5는 안산시의 서민가옥인 강남호 씨 집이다(사진 1-24). 기역자형 안채와 일자형 대문채로 구성 되었으며 이것들 오른쪽에 뒷간이 있는데, 이것들의 지붕은 함석으로 되어 있다.

 


그림 1-5 안산시의 서민가옥인 강남호 씨 집의 평면도

 

 

각 한 칸씩의 문간방과 대문, 그리고 외양간으로 이루어진 대문채는 매우 퇴락해 문간방 쪽은 수년 전에 흙벽돌을 이용해 다시 세웠다. 따라서 건물의 오른쪽은 본디 모습을 지니고 있으나, 왼쪽은 새로 세운 것이어서 불균형을 보인다. 이 집은 강씨의 어머니(84살)가 10여년 전부터 혼자 기거하게 되면서 소 키우던 일을 중단해 지금은 외양간을 헛간으로 쓰고 있다.
안채는 각 한 칸씩의 안방·마루·건넌방과 한 칸 반 크기의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루의 전면은 개방되었으며, 뒷벽에 외짝문(60×90cm)을 붙이기는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살림살이들을 문 앞에 쌓아 둔 것으로 보아 자주 여닫지는 않는 듯하다.
이 집은 들보를 쓰지 않고 같은 간격으로 나란히 걸어놓은 두 개의 종도리가 서까래를 떠받치고 있다. 이처럼 들보를 걸지 않은 가옥은 대부도와 영흥도 등지의 경기 서해도서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은 들보를 외지에서 사 들여오는 경비가 만만치 않은 것이 첫째 원인이겠지만, 규모가 작아서 들보가 반드시 필요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루가 매우 좁음에도 대형 냉장고와 큰 찬장이 놓여 있고, 안방에서는 외짝여닫이를 통해 마루로 드나들며 서벽에는 채광을 위한 창(50×115cm)을 달았다.
이 집 부엌은 재래식과 현대식이 공존하고 있다. 현대식의 대표격은 가스 테이블이며 싱크대(수도가 설치되었다)와 전기밥솥도 눈에 띈다. 재래식으로는 부뚜막에 걸린 솥을 첫손에 꼽을 수 있으며, 난방을 위한 연탄 보일러도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하겠다.
부엌 남쪽의 반 칸은 본디 나뭇간으로 섶나무를 쌓아 두는 공간이었다. 이 나뭇간은 경기 서해도서 및 연안지역 가옥들이 지닌 특징의 하나이다. 앞에서 든 대부도의 백복현 씨 집(상류가옥)에서는 대문채의 한 칸에 마련하였지만, 중류 내지 서민가옥에서는 부엌 한귀퉁이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또 중류가옥의 경우에는 벽을 따로 쳐서 반 칸 규모의 공간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나뭇광’이라 부른다. 이러한 나뭇광은 경기도의 옹진군을 비롯하여 이천군·고양군 등지와 충청남도의 서해안지역에도 분포하여 127)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보인다. 강씨 집은 현재 나뭇간 자리에 찬장과 독 따위의 부엌 세간을 들여놓았다.
한편 건넌방 전면 좌우 양쪽 벽을 내어 쌓아서 아궁이에 불을 넣을 때 연기가 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효과가 없어 아궁이를 건넌방 측면으로 옮겨놓았다. 아궁이로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배려는 문간방 뒤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궁이 주위에 비닐 장막을 치고 문을 따로 붙여놓은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덧집 한 칸을 달아 이어 연탄을 쌓아 두었다. 아궁이 상부에는 채광을 위한 창(56×116cm)이 있다. 부엌 측면에 시멘트 블록으로 마련한 공간(240×200cm)에는 세탁기를 비롯해 세면대도 설치되어 있어 서민가옥에까지 밀어닥친 현대화의 물결을 실감케 한다.

 


사진 1-24 강남호 씨 집의 앞모습.
기역자형 안채와 일자형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1-6 김종근 씨 집의 평면도.
평면이 디귿자형으로 구성되어 잇는 전형적인 중류가옥이다.

 

 

(2) 중류가옥

그림 1-6은 안산시 사사동(48-1)에 위치한 김종근 씨 집이다. 이 집은 평면이 디귿자형으로 이루어져 전형적인 중류가옥의 양태를 보인다. 이 같은 디귿자형 집(사진 1-25)은 역시 강화도를 비롯한 경기도 옹진군 일대와 연안지역인 인천시 소래면과 김포군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평면을 디귿자형으로 꾸미는 가장 큰 이유는 겨울철 서해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서이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김씨의 집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4칸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디귿자집 평면을 보이고는 있으나 내부는 모두 현대식으로 개조되어 겉모습만 예전 형태를 지니고 있다.

 


사진 1-25 김종근 씨 집 안채의 모습. 디귿자형 안채는 겨울철 찬바람을 막는 데 매우 유리하다

 

 

이 집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안방과 부엌, 그리고 건넌방과 광을 각기 터서 한 공간으로 만든 점이다. 이에 따라 싱크대를 비롯한 주방시설과 화장실도 이들 공간에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개는 안채의 왼쪽 절반(안방 쪽)을 남에게 세를 내준 데서 비롯되었다. 세입자와 주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보기 드문 타협을 하였다. 즉 세입자는 내부를 생활에 편리하도록 뜯어고치되, 이사를 할 때에는 주인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종근 씨로서는 집을 헐고 새로 지을 생각이었으므로 보상금 지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입자는 2년여를 살다가 떠났고 약속은 지켜졌다.
세입자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옛 부엌과 광을 한 공간으로 터 놓는 한편, 각 공간의 바닥을 한 평면으로 만들었으며 남쪽 끝에 좌변기를 설치하였다. 방을 새로 도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각 공간 바닥에는 비닐 장판을 깔았다. 그리고 방에는 침대를 들여놓고 옛 부엌 자리 한 귀퉁이에도 싱크대를 놓았다. 이로써 완전한 ‘서양식 입식 생활’이 이루어졌다.
낡은 집을 이렇게 개조하는 데에는 수백만 원이 들었을 것이다. 주인에 따르면 세입자는 안산공단에 근무하는 근로자였다고 한다. 불과 2년여의 거주를 위해서 수백만 원을 쓴 이 사람을 통해서 오늘날 젊은이들의 과소비적 성향을 짐작케 된다. 더구나 그는 침대를 비롯한 가재도구까지 그대로 두고 떠났다.
이 집의 오른쪽(건넌방 쪽)의 변화는 외지에서 살던 30대 중반의 김씨가 고향의 옛집으로 돌아온 1994년에 일어났다. 김종근 씨 자신도 ‘헐어서 다시 지을 집’에 많은 경비(약 5백만 원)를 들여 개조한 것이 사실이지만, 앞의 경우처럼 이를 단순히 과소비적인 현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김씨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인 데다가 실생활의 편리를 추구하는 심리 자체를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편의 위주로 개축을 한 나머지 한 채의 집이 지니는 품격이나 분위기가 산산이 부서진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건넌방에서 남쪽으로 3칸을 모두 터서 한 공간이 되게 하고 그 끝에 좌변기를 설치한 화장실을 둔 것은 세입자의 개조방식 그대로이다. 그러나 마루 한쪽에 방을 들인 것은 새로운 면모이다. 세 자녀를 둔 김씨 내외는 별도의 방이 필요했던 것이다. 방을 들이면서 한쪽에 붙박이장을 설치한 점은 매우 돋보인다. 이 방에 침대는 물론이고 책상과 탁자도 놓였으며 창틀도 알미늄 새시로 바꾸었다.

 


사진 1-26 강종근씨 집의 건넌방. 현대식으로 편리하게 개조하였다.

 

 

건넌방에는 침대와 옷장 외에 소파도 들여놓았고(사진 1-26), 화장실과의 사이에는 싱크대를 비롯한 주방기구와 대형 냉장고 등을 배치했다. 또한 김씨는 동쪽의 3칸을 개조하기 위해 벽을 헐고 다시 쌓았으며, 이때 반 칸을 내어 각 공간이 그만큼 넓어졌다.
건물의 양쪽 날개 끝에서 대문을 좌우에 낀 벽 사이에도 간이벽을 세워 창고로 썼고 보일러도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대문 우측에 2칸의 시멘트 블록집을 이어 달아 한 칸은 창고, 다른 한 칸은 바깥변소(재래식)로 이용하였다. 김씨의 집은 우리네 전통가옥이 서양식의 이른바 양옥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양태를 보이는 전형적 예라고 할 수 있다.

 

 

 

(3) 상류가옥

1) 청문당
그림 1-7은 부곡동釜谷洞에 위치한 유씨네 집(현재는 성산공파星山公派 종친회의 소유이다)으로 예부터 ‘청문당淸聞堂’이라 불려 왔다.


사진 1-27 일명 청문당이라 불리는 유씨네집 전경.
진주 유씨의 16세손인 유시회가 지었다 한다.

 

 

 



그림 1-7 안산시 부곡동에 위치한 청문당 평면도


 

 

이 집은 진주 유씨네의 16세 손인 유시회柳時會(1562~1635)가 지었다고 한다. 본디 충청북도 괴산에서 살아오던 유씨네가 이곳으로 옮아온 것은 시회의 조카인 적Z(1595~1619)이 선조의 아홉째 딸인 정정貞正 옹주의 부마로 뽑힌 것이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이 정혼을 하고 혼인에 이르기 전, 적의 아버지인 시행時行이 사망하자, 어린 사위가 300리가 넘는 길을 오갈 것을 걱정한 선조가 한양에서 100리 안쪽에 묘를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묘지를 부곡동 새터에 잡게 되었고, 선조로부터 넓은 사패지賜牌地를 받기에 이르러 그 뒤부터 유씨네가 세거해 온 것이다.
이곳의 유씨네는 많은 인물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 또한 번성하여 조선 시대 중기에는 명문거족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고, 청문당은 당시 학자 및 예술가들의 교유交遊에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다(이에 대해서는 ‘주거생활’에서 따로 설명한다).
청문당은 디귿자형의 안채 및 사랑채 우측에 일자형의 아래채가 들어서서 미음자형을 이루었다. 사랑채와 아래채 사이에는 중문을 세우고 안채와 아래채는 샛문으로 연결시켰다. 중문(118×166cm)은 안채로 드나드는 여인들이 이용하였고 샛문은 사당과 뒤란의 출입문이다. 안채는 팔작지붕에 기와를 덮었다.
안방은 근년에 입식으로 개조하여 옛모습을 찾기 어렵다. 오른쪽으로 한 칸을 넓혔고 윗방 자리에 수세식 화장실과 안방 윗목에 싱크대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부엌 자리를 방으로 꾸몄고, 나뭇광 자리에는 보일러를 놓았다. 이에 따라 안방 왼쪽 담도 밖으로 물려 쌓는 외에 철문까지 새로 달았다. 이것을 보면 세를 들이기 위해 안채 왼쪽 날개를 개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의 안방은 장지문을 달아 아랫간·윗간으로 나누었으며, 골방에는 몸종이 기거하였다. 그리고 부엌의 안마당 위쪽에는 찬방이 있었다. 안방의 옛 모습 지닌 것은 마루로 드나드는 네짝세살문과 툇마루로 통하는 두짝세살문(110×123cm)뿐이다.
대청의 가구架構 형식을 보면, 들보 위에 매우 짧은 동자주를 세우고 이 위에 종보를 얹은 다음 사다리꼴 대공을 세워 종마루를 받게 하였다. 대청은 6칸으로 중앙부 뒤쪽으로 반 칸을 내어 벽장을 달고, 좌우 양쪽에는 세살문을 붙였다. 그리고 전면과 툇마루 사이의 문은 네짝세살문으로 필요한 경우 접어 들쇠에 얹을 수 있게 하였다.
대청에서 건넌방으로 드나드는 문은 두짝세살문(108×183cm)이며 방 앞의 툇마루 사이에도 같은 문(108×122cm)을 달았다. 툇마루는 누마루로 꾸몄으며, 이 방과 샛문 쪽 벽 사이에는 창(65×56cm)이 있다.
사랑채의 지붕도 팔작지붕이며 기와를 덮었다. 이 건물은 각 한 칸씩의 대문(본디는 나뭇광에 이어달렸었다)·일꾼방·부엌과 각 2칸의 사랑방과 서고로 구성되었다. 부엌에는 큰사랑과 일꾼방의 아궁이가 있었고, 전면에는 사랑방과 같은 크기의 툇마루가 놓였었다.
큰사랑방은 장지로 위아랫간을 나누었고, 안채외 서고로는 외짝여닫이로 드나든다. 한편 큰사랑방 전면에는 두짝여닫이와 미닫이가 시설되었으나 서고 쪽에는 네짝세살문을 달아 여름철에는 들어올릴 수가 있다. 2칸 규모의 서고에는 만 권의 서적이 들어차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귀중본이어서 경상도 일대의 학자들에게도 ‘안산 유대감 댁 서책’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800권 남짓만 남아 있다.
아래채 또한 변개가 심하다. 북으로부터 2칸 규모의 광과 반 칸의 마루, 그리고 칸반의 뜰아랫방이 들어서 있었고 양기와를 덮었다.
뒤란의 북쪽 오른편에는 3칸 규모의 사당이 있고, 왼쪽에는 거대한 모과나무(높이 14m, 둘레 3.4m)가 솟아 있어 청문당의 오랜 역사외 옛 영화를 말해 준다. 이 나무는 안산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번호 5-9-2-2).


사진 1-28 청문당의 마루와 안방.

사진 1-29 청문당 대청의 가구 형식.

사진 1-30 청문당의 안채

 

 


2) 경성당
그림 1-8은 진주 유씨네 21세손이자 차종손인 유신(1748~1790)의 아들인 중서重序(1779~1846)가 둘째아들 방(1823~1887)이 살림을 날 때 지은 집으로 인근에서는 경성당竟成堂이라 불린다.


사진 1-31 김가진이 쓴 경성당의 현판.

 

 


사진 1-32 경성당의 사랑채.
안채는 2백여년, 사랑채는 170여년이나 되었다.

 

 



그림 1-8 경성당의 평면도. 당주는 안산문화원 상임위원으로 있는 유문형 씨이다.

 

 

당주인 유문형柳文馨(65세) 씨에 따르면 안채는 200여 년 전에, 그리고 사랑채는 그보다 30여 년 뒤에 세워졌다고 한다. 집터에 대해서는 따로 전해지는 말은 없으나, 지난 봄 고조부(1823~1887)의 산소를 옮길 때 (안산-수원간 고속도로 건설로 혈맥이 끊겼기 때문에) 공주에서 초빙해 온 풍수가 오 아무개가 “수십 대를 이어가면서 보전해야 할 자리입니다. 재벌 정 아무개의 재산과 바꾸어도 아까울 만큼 좋은 자리입니다”라는 극찬을 남겼다고 한다. 또 유씨는 안채 뒤에 파 놓았던 방공호가 뒷산에서 흘러내린 정기를 끊어놓았다는 그의 말에 따라 이것을 메웠다고 한다.
경성당 사랑채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서쪽 끝에 한 칸의 누마루를 내어 지었다(사진 1-32 왼쪽). 누마루 뒤쪽에 각 한 칸씩의 방(작은사랑)과 마루가 있었으나, 몇 해 전 마루를 반으로 줄이는 대신 방을 그만큼 넓혔다. 이 방은 유씨의 막내아들(대학생)이 공부방으로 쓰는데, 서쪽 끝에 채광을 위해 세살문여닫이(94×108cm)를 달았다.


 

사진 1-33 경성당의 큰사랑 내부.
선비의 방다운 분위기가 감돈다.
사진 1-34 경성당의 안채.
전통 한옥의 옛스런 향기가 가득하다.

 


큰사랑과 툇마루 사이에는 두짝여닫이(57×130cm)와 미닫이가 설치되었고 동쪽 끝에는 벽장을 붙였는데, 벽장문은 네 짝으로(각각 69×133cm) 매화·난초·죽 등의 그림을 붙여 선비의 방다운 고졸한 분위기가 풍긴다(사진 1-33). 큰사랑 다음 칸은 본디 부엌이었으나 이곳에 보일러실을 꾸미고 전면의 툇마루에는 화장실을 두었다.
큰사랑 전면 상부에는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1846~1922)의 현판(사진 1-31)과 유씨의 증조부(遠聲)가 썼다는 경성당기竟成堂記가 걸려 있다. 이 밖에 사랑채 기둥마다 걸려 있는 22개에 이르는 주련柱聯도 흥미롭다. 이 가운데 누마루에 걸린 3개의 주련만 소개한다(왼쪽부터).
“山高華帽峰下居簪纓之族村深覆釜谷中有鐘鼎之家(높은 산 화모봉 아래 빗살처럼 모여 사는 한 가문, 이들이 사는 깊은 골 부곡 마을에는 집들이 솥발처럼 들어섰구나.)”
이것은 원성이 73세에 쓴 것으로 화모봉은 사랑채 건너편의 봉우리이다.
“宣廟賜牌之局寸土勿輿於他人(선조께서 내려주신 땅, 한 줌이라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
“星祖定礎之基十世相傳于後裔(성조<14대조의 아호가 星山이다>께서 터를 잡으신 곳이니 후세까지 보전해 나가라.)”
대문 옆의 방은 일꾼방으로 본디 전면에 큰사랑처럼 툇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방의 일부로 꾸몄다. 이 방 북쪽의 공간은 마루방으로 벼 4~5가마들이의 뒤주와 여러 연장들을 갈무리하였다.
마루방에서 북으로 1칸씩의 작은 광과 외양간, 그리고 2칸의 광으로 구성된 아래채가 이어달려 있어, 경성당의 안채·사랑채·아래채는 완전한 미음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채는 13년 전 안채와 함께 철거되고, 그 자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물러난 자리에 시멘트 건물 한 채가 들어섰다(2년 전). 이 건물의 아래칸(320×290cm)은 유씨의 작업실(그는 전각예술인으로, 대청의 주련도 선친의 글씨를 그가 새긴 것이다.)이고 윗간(295×290)은 창고이다. 안채는 13년 전에 새로 지었다. 초가였던 안채 부엌 서쪽으로 각 한 칸씩의 헛간과 뒷광이 이어달려 있고, 이에서 북으로 꺾여 역시 한 칸씩의 뒷방·뒷대문·안뒷간이 이어져 있다. 뒷광에는 김치·짠지 등이 담긴 독을 두었고, 뒷대문은 행랑 출입을 위한 것이다.
안채를 짓는 데 쓰인 재목은 서울 미아리와 종로구 당주동에 있던 헌 한옥의 것을 많이 썼고, 들보는 인천에서 수입목(미송)을 사서 대신하였다. 미아리의 헌 한옥은 37평 크기로 당시 600만 원에 사들였다. 공사를 맡은 목수가 이 집 외에도 평택 및 김포에도 공사를 벌여 놓은 까닭에 공기가 1년 8개월이나 걸렸고, 건축비도 평당 130만 원이나 들었다(현재의 안채는 30평이다). 이때 기와는 앞의 두 집 것을 그대로 썼으나 겨울에 터지는 등의 부작용이 많아 암키와·수키와를 한 장으로 구운 현대식 시멘트 기와로 바꾸어 덮었다.
대청 지붕틀은 무고주칠량無高柱七樑 형식으로 걸었으며, 전면에는 6짝의 분합문을 달았다. 새로 지은 안채와 재래식과의 다른 점은 건넌방 옆에 수세식 화장실을 붙인 점과 부엌을 입식으로 바꾼 점, 그리고 안방의 난방을 보일러식으로 개량한 점 등이다. 이 밖에 건넌방의 붙박이장도 종래의 한옥에는 없던 것이다. 안방 서측에는 툇마루가 달렸고 대청과의 사이에는 4짝의 미닫이를 붙였다(한 짝 크기 63×179cm). 부엌 천장에는 안방 쪽에서 드나드는 다락을 시설하였다. 건넌방 출입문도 안방 쪽처럼 4짝의 미닫이이지만, 가운데의 두 짝에는 띄살을 먹였다. 한편 부엌 남쪽에 부엌방을 들이고 그 뒤쪽에는 광을 만들었다.

 


사진 1-35 경성당 대청의 지붕틀.
무고주칠량 형식이다.
사진 1-36 경성당의 대청.
대청에서 안방 쪽을 바라본 것이다.

 


경성당에는 사랑채 동남쪽에 각 1칸씩의 잿간과 뒷간, 그리고 3칸의 헛간으로 구성된 헛간채가 따로 있었고, 노비들이 기거하던 4채의 행랑채가 있었다. 또 사랑마당 남쪽에 1백여 평에 이르는 넓은 연못이 있었으나 사랑채 누마루 곁에 있는 우물물이 줄어들어 급수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30여 년 전에 밭으로 만들었다.
이 집에서는 안채 뒤란에 터주와 업을 함께 모셔놓았는데, 해마다 음력 시월 초하루에서 사흘 사이의 하루를 골라 떡시루를 바친다. 떡 위에는 쌀이 담긴 주발을 놓고 가운데에 촛불을 박아 둔다. 이때 유씨는 재배만 올리고 비손은 하지 않는다. 집안 식구들은 특별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나 이들 집지킴에 관심이 없어서 유씨 혼자 받든다고 한다. 왼쪽의 터줏가리에는 해마다 단지에 햅쌀을 갈아 넣으며, 업에는 이엉을 틀어 덧씌운다.


사진 1-
37 경성당의 터주와 업.

 

 

 

3) 명안공주 묘막
그림 1-9는 조선왕조 현종縣宗(1659~1674)의 셋째따님이자 숙종의 누이 동생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묘막墓幕으로 지은 집이다.
명안공주는 해주 오씨 가문의 17세손인 두인斗寅(1624~1689)의 셋째아들 태주泰周(1668~1716)와 1679년에 혼인하였으며, 그녀의 무덤을 안산시 사사동沙士洞에 쓰게 되자 그 부근에 이 집을 지은 것이다.

 

 


그림 1-9 명안공주 묘막의 평면도. 명안공주는 조선왕조 현종의 셋째 따님이자 숙종의 누이동생이다.

 

 

12살 때 부마로 뽑힌 태주는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조지서제조造紙暑提調를 지냈으며, 특히 서예에 뛰어나 왕실의 옥책玉冊·신판神板·유지幽誌 중에는 그가 쓴 것이 적잖다. 또한 시문에도 능해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태주의 부친인 두인은 공조판서·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로, 파주의 풍계사豊溪祠와 광주의 의열사義列祠, 안성의 덕봉서원德鳳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그리고 태주의 조부인 숙(1592~1634) 또한 문장이 뛰어났으며 경상도 및 황해도의 관찰사가 되었다.
이 밖에 태주의 아들인 원瑗(1700~1740)은 승지와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명석하고 문장 또한 간결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태주의 손자 재순載純(1727~1792)과 5대 후손인 준영俊泳(생몰년 모름)과 6세손인 정근正根(1868~?) 등도 큰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이 같은 오씨 가문은 안산에서 대를 이어 살아오지 않은 듯하며, 현재 묘막은 다른 성씨(최씨)의 관리인이 돌보고 있으나 퇴락의 정도가 매우 심하다.
이 건물은 묘직이를 위해 지은 까닭에 기역자형 안채와 일자형 대문채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주추나 기둥, 마루의 가구架構 등의 형식을 보면 격식을 갖춰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기둥은 굵기가 22cm(가로×세로)에 이르며, 주춧돌 또한 사다리꼴로 반듯하게 다듬었다. 크기도 일반 주택의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어서 높이 46cm, 바닥 47×`42cm, 윗부분 39×40cm에 이른다. 그리고 댓돌 또한 일매지게 정성껏 다듬어 놓았다. 대청의 가구架構 형식도 들보 위에 짧은 동자주를 세우고 이 위에 다시 종보를 얹은 다음, 사다리꼴 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치도록 하였다. 이들 부재 가운데 들보와 종보가 상류가옥의 그것보다 크고 굵은 것은 물론이고, 치목治木 또한 빈틈없이 마감되었다. 안채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사진 1-38 명안공주 묘막의 주춧돌과 기둥.
지금은 퇴락했으나 당시는 제대로 격식을 갖춘 집이다.
대문채는 각 한 칸씩의 대문과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대문의 하인방은 무지개처럼 굽은 나무를 놓아서 드나들기 쉽도록 하였다. 대문채는 높이 1m쯤 되는 축대 위에 세워졌다. 좌우 양쪽의 방바닥에 마루를 깔고 두짝열개의 널문을 붙인 것을 보면, 이들 공간은 제기 따위의 기물을 보관하는 수납공간으로 이용한 것이 분명하다.
안채는 2칸의 안방과 4칸의 대청, 칸반의 건넌방, 2칸의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방과 마루 사이에는 세 짝의 세살문을 달고 뒤란 쪽으로는 같은 형식의 두짝문을 붙였다. 안방 북쪽의 반 칸은 벽을 치고 골방으로 썼을 것이다. 그리고 부엌 위쪽에 다락을 들였다.
대청 북벽 상부에 각 두 짝씩의 널창을 붙인 것은 매우 특이하다. 이들 창은 매우 작아서 채광이나 통풍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건넌방의 뒤창문이 이들보다 더 큰 점으로도 충분히 짐작된다.
부엌에서 마당 쪽으로는 두짝널문을, 뒤란 쪽에는 외여닫이를 달았다. 부엌 아래칸 서쪽에는 찬장을 놓았으며 오른쪽은 나뭇광으로 썼는데, 나뭇광의 안마당 쪽 벽에 네 짝의 세살창을 붙인 점도 눈을 끈다.
건넌방과 마루 사이에는 안방과 달리 두 짝의 세살문을 달았고, 전면의 누마루 사이에도 같은 형식의 문이 있다. 누마루 아래에는 일반 상류가옥처럼 부뚜막을 놓았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집은 대문채와 안채만으로 구성된 소규모 가옥이지만, 왕가 공주의 묘막으로 지었던 만큼 좋은 재목과 부재를 써서 격식을 갖추어 지었다는 점에서 18세기 상류가옥의 건축양식을 살피는 데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현재 폐가 상태에 있어 주거생활 등을 알 수 없으므로 매우 아쉽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묘막에는 명안공주 자신과 그의 아버지 현종, 그리고 오라버니이자 뒤에 임금이 된 숙종과 관련된 전적과 서화, 고문서, 생활용품 등 당시의 궁중생활을 살피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 유품들이 적잖이 보존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들은 1979년 애석하게도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 일부가 강릉시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이 유물들이 귀중한 것임은 이 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45점이 1995년에 보물 1220호로 지정된 사실로도 충분히 입증되는 터이다.
이러한 귀중품들이 안산시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아쉬운 일이지만, 그나마 한 박물관에 적잖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보물이 45점에 이른다면 이것만으로도 한 박물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에 충분한 양이다. 실제로 궁궐의 유물을, 그것도 한 시대의 일괄 유물을 갖춘 박물관은 강릉시립박물관 한 곳뿐이다(문화체육부에 딸린 궁중유물전시관의 유품은 여러 시대의 것을 모은 것이다).

사진 1-39 묘막대청의 가구.
부재가 상류가옥보다 우수하다.

강릉시립박물관에서는 1996년 7월에 개관 4주년을 맞아 ‘명안공주 관련 유물 특별전’을 마련하는 한편 도록을 내었는데, 이들 유품들이 지닌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들은 조선 시대 초기 후반에서 중기에 이르는 여섯 임금의 유품들, 즉 선조로부터 시작해서 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 등 6대를 이어 내려왔다(광해군 제외)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선조 때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큰 불행을 겪었고, 그 이후 점차 힘이 되살아나 숙종과 영조 대에는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민문학과 예술이 꽃피는, 문자 그대로 조선 시대 문화의 발흥기를 맞았다. 따라서 앞의 여섯 임금이 재위한 시기는 격동기와 번영기가 이어지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들 유품이 지니는 가치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들 임금의 편지들 가운데는 현종과 그의 비인 명성왕후明成王后, 숙종, 그리고 명안공주의 것이 있는데 이것들은 인간적인 성품을 드러내는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현종이 남긴 한글 편지 6점 가운데 3점은 효자로 이름난 그가 눈병 치료를 위해 온천에서 휴양 중에 문안편지를 올린 것이고, 나머지 3점은 딸(명안공주)에 대한 애정이 듬뿍 실린 편지로서 임금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딸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이 절절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명성왕후의 한글 편지 3점도 몸이 약한 딸을 걱정하는 애틋한 내용이 전부이다. 어린 딸 둘(명선·명혜)을 일찍 잃었던 임금 내외는 고명딸인 명안공주에게 각별한 관심과 걱정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숙종과 명안공주의 각 1점씩의 한글 편지는 오라비와 누이가 주고받은 편지이다. 위에 소개한 전체 11점의 한글 편지에는 한 가족이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묻는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매우 큰 흥미를 자아낸다.
셋째, 이들 11점의 한글 편지는 조선 시대 한글의 변화·발전을 연구함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라는 점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한 시대 한 가족이 남긴 이만한 양의 한글 자료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기에 더욱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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