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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천도를 결정한 일본국 환무왕.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고 한다. 

그는 광인왕光仁王의 첫째 아들인데 어머니의 뿌리가 백제계로 그 지위가 낮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원래 왕위계승자가 따로 있었는데 아버지인 광인왕의 부인인 井上 內親王(聖武王의 딸)이 왕을 저주했다는 게 밝혀져 그 아들과 함께 유폐되는 바람에 왕세자가 되었다고 한다.

 

781년 왕이 된 환무왕은 이듬해 성무왕의 딸 중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不破 내친왕과 그 아들을 모반 혐의로 잡아다 죽여버린다. 이처럼 그의 왕권에는 시작부터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수도를 옮길 구상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처음으로 옮긴 곳이 지금의 교토 서남쪽에 자리한 나가오카長岡이다. 이곳은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아라시야마의 강이 흘러내려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의 건설을 책임진 藤原種繼가 살해되지를 않나, 환무왕의 동생인 왕세자 早良 親王이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밝혀지지를 않나 하여 10년에 걸친 도시 건설이 물거품이 되고 다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권력층의 사람들이 얼마나 수도 천도에 반대를 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마치 정조의 화성 천도 계획을 막고자 했던 조선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가? 그만큼 수도를 옮긴다는 일은 기존의 권력과 새로운 권력이 크게 충돌하는 일인가 보다. 한국도 행정수도 옮긴다고 할 때 들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라. 아무튼 나가오카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으니, 아라시야마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이 빈번하게 범람했다는 점이다. 농사짓는 입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도시를 경영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히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래서, 환무왕은 다시 한번 천도를 결정하고, 그렇게 옮긴 곳이 지금의 교토이다. 

이 도시를 건설하는 초기에 크게 힘을 발휘한 것이 신라계인 하타秦 씨라고 한다. 지금의 광륭사 일대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하타 씨는 당시로서는 주조와 목공 등의 첨단 기술을 독점하고 광업 및 상업을 통해 크게 부를 일군 사람이라고 한다. 광륭사는 지금도 미륵반가사유상으로 한국인에게 잘 알려진 사찰이다. 아무튼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광륭사 부근에는 太秦이란 지명까지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가 물심양면으로 환무왕을 지원해 교토의 건설을 도왔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환무왕의 모친 다카노노니이가사高野新笠를 살펴보자. 고구려계였던 것일까 고씨라고 볼 수 있을라나? 아무튼 그녀는 백제 도래인의 후손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 일본왕이 자신은 백제의 후손이라고 밝힌 일이 있는데, 그 뿌리가 그녀에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환무왕의 조정에서 여러 도래인들이 활약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라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백제의 왕씨였다 한다. 나라 시대의 조정에서 활약했던 백제 王敬福의 딸인 王明信은 환무왕 후궁의 상시로 일하며 환무왕의 아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백제 왕씨는 백촌강 전투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인의 후손으로 그 선조는 바로 공주에 남아 있는 무령왕릉의 주인공 무령왕이라 한다. 이들 백제 왕씨의 본거지는 오사카 난바難波 百濟郡과 카외치河內 交野郡인데, 카타노의 북쪽이 나가오카이다. 그래서 환무왕이 처음 나가오카 쪽으로 천도를 결정한 게 다 그런 영향일 것이라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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