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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업 전반

나는 관행농민의 딸이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지지한다.

by 石基 2018.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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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의 아빠는 중요 항목이자 고정관념이다. 그는 미국 아이오와에서 옥수수와 대두를 재배하며 사는 62세의 관행농 농민이고, 트럼프 지지자이며, —일부 가정 하에— 시대에 뒤지고, 무식한 백인 남성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가족과 자신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내리려 노력하는 상냥하고 믿음직한 남성이다.  

나는 디모인의 동쪽 도로에서 9마일 거리에 있는 미첼빌Mitchellville이라 부르는 마을에서 자랐다. 나의 부모님은 나를 우리의 4대째 농장과 조부모의 농장 사이에 난 길을 오가게 했다. 대부분의 농장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농가외소득이 필요하여 나의 엄마는 듀폰 파이오니어를 위해 디모인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우리의 건강보험을 위해 웰스 파고Wells Fargo에서 일했다. 

나는 옥수수와 대두의 상승 시장에는 환호하고, 하락 시장에는 절망하는 부모님을 지켜보았다. 나의 부모는 1980대 농장의 위기가 시작될 때 결혼하여,  나는 대부분을 “좋은 시절” 동안 자랐지만 다음에 닥칠 위기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나의 가족을 따라다녔다. 

몇 년 동안, 중서부 농민의 딸이란 나의 지위는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자유로운 도시 공간에서 나는 보조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나의 아버지가 "지구를 오염시키면서"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에 관해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농약과 육류 소비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다.  해안 지역에서 가장 흔한 반응은 "미안합니다"이다. 

중서부의 농촌과 교외의 사람들은 종종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한다. 그는 가축이 있나요? “난 정말로 몰라요”라고 답하도록 지도를 받았다.  면적의 정확한 숫자는 순자산에 대한 이해로 해석될 수 있는데,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일러준 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내가 농사에 관해 덜 이해할수록 전문적 세계에 적응하기가 더 쉬울 것 같았나 보다. 

아버지는 나에게 기업에서 안정된 경력을 쌓으라고 권유했다. 그 대신 나는 자연보존과 농업 관련 비영리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난 가능하면 여러 관점에서 먹을거리 체계를 이해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먹을거리 체계를 바꾸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해안 지역의 먹을거리 운동을 통해 배웠다. 지역의 유기농민 지원, 관행농 농지를 유기농으로 전환, 꿀벌 살리기 등. 

모두 좋은 것들인데,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항상 운영상의 경제적 생존력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나의 작업이 먹을거리 체계에 대해 더 깊게 들어가면서, 난 "더 나은" 농사를 짓는 많은 농부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먹을거리 체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보고 난 뒤, 난 그것을 바꾸고 싶었다. 내가 만났던 다른 농부의 딸들과 마찬가지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롭고 더 나은 전망을 지닌 먹을거리 체계를 창출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아버지 같은 농민들을 뒷전으로 팽개친다고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한 투쟁에는 보충 영양 지원프로그램(Supplemental Nutrition Assistance Program)에 의존하는 농촌 가구의 높은 비율, 건강 관리 및 가까운 병원의 부재, 합성마취약 중독의 증가 속도 등이 포함된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농부의 딸로서 나는 그것이 인간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고도로 통합되고 변동성이 큰 시장의 자비로 인해 생겨난 큰 상처의 증상이란 걸 안다. 

더 많은 농지의 주인이 바뀌고 가족농이 토지에서 밀려나면서, 농민의 딸은 우리의 먹을거리 체계를 형성하고 그 체계 안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것에 관한 더 큰 담화를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이 고군분투하며 번성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먹을거리 체계에 난 구멍을 보았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불화를 일으키는 대화를 극복할 수 있는 도구와 변화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독특한 역할

내가 아는 농민의 딸들은 그런 조건의 남성보다 농장에 남을 가능성이 적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들은 도시의 지역사회로 데려가는 교육 및 직업을 추구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들은 도시 또는 기업의 세계로 통합되면, 농장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농촌의 생활을 설명하고자 노력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되돌아왔다.  

“난 결코 트랙터를 운전하거나 실제 농장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와 달라고 요청을 받지 않았다. 나는 사업적인 면에 대해서 배운 적도 없고, 아무에게도 직접 농사짓겠냐는 질문을 받지 않았다”고 미네소타와 캘리포니아, 일본, 브라질에서 사진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며 10년을 보낸 뒤 가족의 토지로 되돌아온 아이오와의 유기농민 Wendy Johnson 씨는 말한다. 지난 8년 동안 그녀는 가족에게서 토지를 빌려 덮개작물, 꾸준한 무경운, 소규모 축산을 포함하여 점점 더 지속가능한 농법을 실천하려고 천천히 노력해 왔다. 

“난 농장이 재밌고 예뻐 보였다”고 Johnson 씨는 어린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어른으로서 사업적인 면을 배웠고, 농사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러나 그녀가 어린시절 엿보았던 아름다운 삶을 재창조하는 일이 항상 그녀를 추동하는 요소의 일부였다. 

처음 몇 년 동안, Johnson 씨는 농장에 가본 적이 없는 캘리포니아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두 새로운 세계를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가족들과 좋은 관계였지만, Johnson 씨는 다른 농민의 딸들이 직면한 어려운 현실을 경험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농업 지역사회는 고령화되어 젊은이들이 부족하다. 여러 곳에서 농사짓는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보다 존경스러운 대우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의 형제나 사촌이 가족의 농장을 물려받으면, 이러한 여성들은 토지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적어질 수도 있다.  

위스콘신 브로드헤드 출신의 Lauren Rudersdorf 씨처럼 어떤 사람은 독립해야 한다.  나처럼, 그녀는 부모님이 다각화된 가족농장을 시장의 변동성에 자산을 부속시키는 걸 지켜보았다. 그녀의 부모는 수입의 대부분을 농장 외부에서 일하여 벌었고, 농장을 포기하며 그들이 일군 삶에 분개했다. 

“나는 내면에서 망가짐과 균형잡힌 삶의 부재를 보았다”고 그녀는 최근 Midwest Environmental Advocates blog에 올렸다.  “난 그들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하며 그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걸 보았지만, 체계의 톱니처럼 느껴졌다. … 그것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난 더 나은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2013년, Rudersdorf 씨는  남편 Kyle과 함께 위스콘신 매디슨의 남쪽에서 유기농 인증, 지역사회 지원 농업 농장인 Raleigh의 산기슭 농장을 시작했다. 그녀는 또한 비영리 환경법률센터의 농장에서도 일한다. 그녀의 부모님은 농장에서 도움을 주고, 그녀는 자신들이 둘째 해에 수익을 냈을 때 부모님이 놀라고 자랑스러워했다고 말했다. 

통역하기

먹을거리와 농업에 대한 포괄적인 전망을 추진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아이오와 같은 농업 지자체의 사람들조차 농민과 농촌이 직면한 현실의 거의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Rudersdorf 씨는 채소 생산과 농장의 재정에 관해 그녀의 고객들을 교육하는 블로그에서 농장의 생활에 관한 이야기와 조리법을 공유함으로써 이러한 흐름을 바꿀 수 있길 바란다. 많은 농민의 딸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농장 생활을 더 많은 청중에게 통역하는 역할을 하곤 한다. 

Kayla Koether 씨도 더 많은 청중을 대상으로 농촌의 문제를 통역한 경험이 있다. 그녀는 Iowa House District 55를 운영하고 있는 농민의 딸이다. Koether 씨는 아버지와 함께 가축 농장에서 일하고, Grinnell College에서 국제 농업과 농촌 개발을 공부했다.

Koether 씨가 도시에서 태어난 대학생 친구들을 농장에 데려와 그녀 가족의 가축 농장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다른 농장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녀가 사는 지역의 농업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다.

“때로는 농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결국 농업을 통역하게 된다”고 Koether 씨는 말한다. “그들이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럴 기회가 없었다.”

통역자가 되려면  양쪽의 경계에 있는 청중들에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종종 도시의 소비자와 정치인들이 미국 농촌의 투쟁을 이해하도록 도우라고 강요를 받는다. 대부분의 도시민은 기본적인 필수품을 구하러 근처 도시로 가야 하지만, 도시민들은 농촌의 이웃과 상호작용 없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 내가 디모인에서 보낸 불량스런 십대 시절의 경험에 대한 에세이를 제출했을 때 작문 강사는, “난 네가 시골에서 자랐다고 생각했어?”라고 했다.

나는 “네. 이 두 가지 모두 사실이예요.”라고 했다.

각 가족마다 복잡한 역학관계가 있으며, 모든 농민의 딸이 농장을 서로 다르게 경험한다. 그러나 그건 틀림없이 독특한 성장 과정이다. 

Carolyn Van Meter 씨는 전화로 나에게 “나는 농장의 위기가 있던 1980년대 그 시기에 왔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도 아이오와에 머물 방법이 없었다. 농업과 관련이 없는 직업을 가지려 해도 일자리가 별로 없었다. 우린 모두 떠났다.”

Van Meter 씨는 결국 플로리다 주피터Jupiter에서 세금 준비, 부동산 및 재무 계획 사업을 했다. 61세의 Van Meter 씨는 5년 동안 아이오와의 농지를 소유했으며, 그녀의 어린시절 친구들이 가족 농장을 상속받고 구매하는 걸 보기 시작하고 있다.

Van Meter 씨가 가족에게서 토지를 상속받겠다는 걸 확인했을 때, 그녀는 자원을 찾았다. 그녀는 부모님과 상당히 공개적으로 농장의 전환을 논의했는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12월에 그녀는 농업에 종사하거나 그만두거나, 농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공인된 국제농장전환네트워크(IFTN)의 코디네이터가 되었다. 농민의 딸로서 깊은 고뇌나 조상의 유대 같은 농장 전환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농장이 집일 뿐만 아니라 생계와 생활방식이란 사실을 알고 있다. 

동정과 공감

동시에 두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농민의 딸이 지닌 능력은 정치 토론에서도 나타난다. 

난 최근 디모인의 술집에서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변호사였고, 나처럼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의 지지자였다. 그는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통행증”을 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나에게 트럼프 나라의사람들에 관한 여러 기사를 읽으라고 했다. 그는 그들과 그들의 투쟁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의 인종차별은 변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난 그에게 워싱턴 포스트에 있는 누군가에 관한 기사를 읽는 것과 당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그것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익 진영에서 자란 괴상한 여성으로서, 나는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을 인간으로 이해하기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인종차별적인 농민”이란 틀에 누군가를 맞추는 게 훨씬 쉽다. 우린 도시-농촌의 경계를 성장과 이해의 기회보다는 논쟁거리처럼 이야기한다. 사람들의 경계의 양쪽에 앉아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가정할 때, 우리 모두는 고통을 겪는다. 

아무도 나의 아빠보다 비관행적인 사랑에 관해 가르쳐준 사람이 없다. 우린 항상 동의하지 않고 그에 감사드린다. 

난 지난 대선 때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그와 나는 모든 토론을 함께 보았다. 분노, 좌절, 고함이 있었다. 웃음과 진심 어린 대화도 있었다. 우린 어떻게 먹을거리 체계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노동자를 지원하지 않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그 체계에서 필수적인 톱니바퀴가 되는지 논의했고, 나는 가슴이 아픈 답을 들었다.  “난 다른 식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난 너무 늙었다.”

내 책상 위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있다. 거기에서 우린 콤바인에 앉아 있는데, 아마 내가 6살 때일 것이다. 아빠는파란색 플란넬 셔츠를 입고 있으며 콧수염을 길렀다. 아마 샤니아 트웨인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나는 아빠의 운전석 옆에서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소박한 관계였으며, 산업형 농업에 관한 그의 생각보다 나의 그림과 인형에 대한 그의 의견에 더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농약 사용, 육류 소비, 농업보조금, 수질 같은 일들에 관해 늘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린 여전히 중요한 유대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건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 체계에 대한 나의 이해를 향상시켰고,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저자와 아버지. (Photo courtesy Ash Bruxvoort)



https://civileats.com/2018/05/07/i-am-the-daughter-of-a-conventional-farmer-and-a-sustainable-ag-advo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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