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2장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
-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중심으로 宇田津徹郞
들어가며
도시 사회를 뒷받침하는 농업기술의 조건으로는 농지의 지속적인 이용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잉여생산물의 존재가 필수라고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기술이 유럽에서는 삼포식 농법과 노포크식 농업 등의 고도한 돌려짓기 기술체계이고, 동아시아에서는 논벼농사 기술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동아시아에서 논벼농사 기술의 성립과 전파라는 농업기술의 발달을 주제로 일본 및 중국을 주요 현장으로 조사연구를 행해 왔다. 그중에서도 식물규산체 분석법을 사용한 생산 유구遺構의 탐사와 그 유구 조사를 기축으로 논의 생산력 평가와 재배 벼의 변천 등의 벼농사 기술의 변천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생산 유구(논과 밭)는 탄화미 같이 인간에 의하여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농지가 운영된 확실한 증거가 된다. 또한 그 형태와 규모를 밝힘에 따라 당시의 기술 수준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식물규산체 분석으로 얻을 수 있는 연구성과부터 중국에서 벼농사가 전개되고 일본에 전파된 과정을 구성하여 추정해 보겠다.
잎의 세포 화석과 그 분석
잎의 세포 화석이란
벼와 조, 기장, 수수 같은 우리들에게 친근한 작물과 갈대, 억새 같은 벼과식물, 녹나무과와 참나무과 등의 식물은 토양 속의 유리(규산 SiO2)를 자신의 세포벽에 축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 식물에서는 규산의 축적이 진행되면 체내에 세포 모양을 한정시키는 유리의 껍데기가 형성된다. 이것은 식물학에서 식물규산체라고 부르고 있다.
김매기할 때, 맨손으로 억새를 뽑거나 벼베기를 도와서 볏짚을 나르면 볏짚에 닿았던 뺨이 따끔따끔한 것은 이 식물규산체의 소행이다.
식물규산체는 흙에 묻혀 있던 콜라병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체가 죽어서 분해된 뒤에도 그 모양 그대로 토양 속에 잔류한다. 이러한 식물규산체가 토양을 구성하는 입자가 된 것이 잎의 세포 화석이다. 크기는 유래한 세포에 따르지만, 20-100미크론 정도이다(1미크론은 1/1000밀리미터).
잎의 세포 화석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면, 1940년대에 우소프Oosov가 식물에서 유래하는 흙의 입자를 발견하고 스미스손F. Smisthon이 이 이름을 붙였다. 일본에서는 잎의 세포 화석이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파이토리스Phytolith, 중국어에서는 식물단백석이라고도 불린다.
잎의 세포 화석의 이용(잎의 세포 화석 분석)
잎의 세포 화석은 그 조성으로부터 화학적, 물리적인 풍화에 강하고, 조건이 좋으면 반영구적으로 토양 안에 잔류한다. 또한 유리와 거의 같은 내열성이 있고, 소성온도가 낮은(섭씨 800도 이하) 토기에 있으면 융해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할 수 있다.
잎의 세포 화석의 모양과 크기는 유래하는 식물과 세포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흙에 포함된 잎의 세포 화석을 조사하여 존재했던 식물(급원식물)을 알아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벼과식물은 잎의 기동세포 형태에 식물마다 특징이 있어(그림2-1) 이 세포에서 유래하는 잎의 세포 화석을 통해 벼 등의 작물이 존재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림2-1 벼잎의 단면과 기동세포의 위치
그림2-2 벼의 기동세포에서 유래하는 잎의 세포화석
이와 같은 잎의 세포화석의 특성을 이용하여 고대의 식생과 환경, 농경을 추정하고 복원하는 자연과학 분석을 잎의 세포화석 분석법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이 글의 내용에 관련된 농경사 연구에서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생산 유구(벼가 재배되었던 장소)를 특정한다
벼의 종자(쌀)은 수확하여 재배되었던 장소로부터 가지고 나올 수 있는데, 볏짚은 그 일부가 이용될 수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흙에 환원된다. 그 때문에 벼가 재배된 흙에는 잎의 기동세포에서 유래한 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잎의 세포화석은 건조시킨 벼의 잎 1그램(큰 벼의 잎 1장에 맞먹음)에 20만 개 정도 포함되어 있어, 벼가 일정기간 재배된 장소의 흙에는 높은 밀도로 포함되어 있다.
고대 논에서라면 지하에 이 잎의 세포화석을 포함한 층이 거의 수평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시추(지하의 토양을 가느다란 원기둥 모양의 통으로 빼냄)로 채취한 흙을 분석하여 그 장소(깊이와 범위)를 특정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방법으로 조몬시대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의 수많은 논 유구가 탐사, 발굴된다.
그림2-3 시추를 하고 있는 모습
벼가 재배되었던 시대를 추정한다
벼잎의 세포화석은 종자가 아닌 그 잎의 세포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의 흙에서 검출된다면 그 시대에 벼잎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벼의 잎은 교역 등으로 생산된 장소에서 멀리 운반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결과는 벼가 존재했던 것을 보여줌과 함께 일본처럼 야생 벼가 존재하지 않은 지역이라면 그 시대에 벼가 재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토기의 바탕흙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된다면, 그 토기가 제작되기 이전에 벼가 존재 또는 재배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흙의 경우 식물의 뿌리와 토양 속에서 활동하는 생물의 영향으로 다른 시대의 흙이 섞여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시대의 추정에는 토기의 바탕흙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재배되었던 벼의 종류(아종, 생태형)를 추정한다
동아시아에서 재배되고 있는 벼(Oryza sativa L.)에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라고 불리는 두 가지 아종이 있다. 이들 아종은 재배조건과 재배기술에서 차이가 있어, 아종이 밝혀지면 당시 벼농사의 모습을 아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벼잎 세포화석의 형상 사이에는 그림2-4에 나오듯이 아종에 따라 형상에 명료한 차이가 있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그 형상으로부터 아종을 판별하는 방법(판별율 80-90%)도 확립되어 있다.
이 방법을 토양과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잎의 세포화석에 사용하여 당시 재배되었던 벼 아종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림2-4 벼 아종에서 볼 수 있는 기동세포 규산체의 형상
자연과학 분석에 항상 따라다니는 문제(시료 오염)
농경사 연구에서 충격적인 자연과학 분석의 결과가 공표되면, 그 진위가 화제가 된다. 그 경우에 잘못의 원인으로 종종 상정되는 것이 '시료 오염'이다.
농경사 연구에서 활용되는 자연과학 분석에 쓰일 수 있는 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또 DNA는 현미경 등의 기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크기이다. 그 때문에 분석을 행하는 사람은 어떠한 원인으로 시료가 오염(분석에 방해가 되는 물질과 기타 시료가 섞임)되더라도 이것을 직접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은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머리 아픈 문제이다.
그 때문에 우리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사람은 시료 오염에 대한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용하는 도구와 약품은 쓰고 버리며 재이용하지 않는다'거나 '콘트롤이라고 불리는 시료 오염과 처리의 잘못을 비교검증할 수 있는 분석 시료를 작성한다'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대책에 더하여, 미처리 시료를 보관해 놓고, 다른 연구자에게 검증(크로스 체크)과 새로운 분석방법이 개발된 경우에 재분석을 행하는 것 같은 일이다(그림2-5에 토기를 시료로 하는 경우를 예시).
앞으로 이 글에서 소개하는 자료는 모두 이러한 대책과 검증을 거친 것이다.
그림2-5 분석에 쓰이는 토기의 처리 과정(좌: 미처리, 우: 절단하여 일부분을 분석에 사용)
중국에서 확인되고 있는 초기 벼농사
90년 이후 장강 중하류에 소재한 유적에서 벼농사의 존재가 잇따라 확인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벼 유물의 출토를 근거로 유물의 출토를 근거로 하는데, 호남성 성두산城頭山 유적과 강소성 초혜산 유적처럼 초기의 논이 검출되고 있다. 검출된 논의 형태는 상세하게 비교하면 그 우열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야요이 시대의 논과 다르며 자연지형을 이용한 부정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논의 검출은 그 땅에서 논벼농사가 운영되었단 확실한 증거이며, 기술 수준의 의론을 따로 한다면 적어도 현재에서 6500-6000년 전쯤에는 장강 중하류에서 초기의 논벼농사 기술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필자도 조사원으로 참가했던 초혜산 유적의 논을 소개하면서 초기 벼농사에 대하여 기술하려 한다.
그림2-6 초혜산 유적의 소재
초혜산 유적의 논
초혜산 유적은 상해 게로 유명한 양징호陽澄湖 의 남쪽, 중국 강소성 소주시에 소재한다(그림2-6). 유적 주변은 샛강이 둘러싼 저지 논 지대이다. 이 유적은 1972년에 난징박물원에서 최초로 발굴을 하고, 이후 몇 번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해당 유적이 마가빈 문화기(기원전 4050년)부터 춘추시대(기원전 450년)에 걸친 유적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1992년부터 중일 공동조사가 개시되어, 일본에서 행할 수 있는 시추에 의한 토양 채취와 채취한 토양에서 잎의 세포화석 분석으로 논 유구 탐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남서에 위치한 저지의 지표 아래 2미터 안팎에서 논 유구가 매장되어 있음이 추정되었다.
그 뒤 발굴에 의해 그림2-7에 있는 것처럼 논이 검출되었다. 논 토양을 재료로 한 탄소연대측정의 결과 이 논이 대략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중기의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된 논은 한 배미의 면적이 몇 평방미터인 부정형한 논이 지형의 골짜기 지역을 따라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그림2-7, 그림2-8).
그림2-7 초혜산 유적에서 검출된 논(위: 항공촬영, 아래: 유구 전경)
그림2-8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
논은 생흙이라 불리는 황토가 퇴적된 생땅층을 15-40cm 파고들어가 만들었다(그림2-9). 생땅층은 치밀한 실트질 점토이기 때문에 물이 거의 침투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강우 등으로 가져온 물은 지하로 침투되지 않고 지표수로 논과 주변의 더 저지대에 남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발굴 구역의 낮은 부분에서는 우물 모양의 구덩이(지름 약 1.5미터, 깊이 약 1.5미터)가 검출되고 여기에는 지하로 침투되지 않은 지표수가 남아, 둠벙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추정된다.
그림2-9 유구 단면의 모식도
논 유구에는 두렁과 물꼬가 있어, 논의 기본적인 특징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 논은 자연지형의 골짜기 지역을 인위적으로 확장하고 결합시켜 만든 것으로 '선'의 퍼짐새는 가지고 있지만 '면'의 퍼짐새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발굴된 조몬 만기-야요이의 논과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유구 안의 토양(논 토양에 해당)은 유기물이 많은 흑갈색 점질토이고, 물로 씻어내 탄화미를 검출하고 있다. 또한 ㅇ ㅠ구 주변의 토양에서는 우렁이와 가막조개의 껍질도 발견되고 있다. 유구 안의 토양에 포함된 벼잎의 세포화석 밀도를 조사한 바, 흙 1그램당 5000개 이상이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수치는 일본 야요이 시대의 안정된 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일본과 중국의 토양 퇴적 속도와 환경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이 논이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장기간(아마 몇 백 년의 규모) 이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초혜산 유적에서 검출된 논은 생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까
발굴조사의 결과로부터 6000년 전의 논이 생산시설이라 불릴 만큼 기본적인 조건을 만족시킴이 밝혀졌다. 또한 농기구 또는 흙을 파는 도구인 뼈보습의 출토(그림2-10)와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밀도 등에서도 당시의 벼농사 기술이 기존에 상정하던 것보다 높은 단게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그림2-10 출토된 뼈보습
그러나 그 한편, 자연의 골짜기 지역을 확장하고 연결하여 '선형'으로 확대한 논에서는 그림2-8을 예로 들면 발굴 면적의 30% 정도밖에 이용되지 않아 토지이용이란 점에서는 효율이 나쁘다.
따라서 당시의 논벼농사가 생업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점하고 있었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영상화하려면 '선형' 논의 퍼짐새를 파악해야 했다.
이미 서술했듯이, 발굴된 논 유구는 생땅층에 직접 판 것이다. 해당 유적의 생땅은 황토로 불리는 퇴적층이며, 지질학적으로도 장강 하류의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생땅의 식별은 비교적 쉬워, 그 바로 위의 토층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면 똑같은 유구의 존재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킬로미터 사방의 범위를 대상으로 시추에 의한 광역 논 유구 탐사를 실시하고, 이번에 발굴된 논 유구의 퍼짐새를 파악하려 시도했다.
그림2-11은 조사 범위와 시추 지점을 표시한 것이다. 시추의 간격은 100미터를 기본으로, 측량의 기준으로 삼은 비석을 중심으로 여덟 방향, 합계 55지점에서 행했다.
그림2-11 시추 지점의 분포
벼잎의 세포화석 검출지점의 분포와 그 검출밀도에서 보면, 당시의 논이 유적을 거의 중심으로 북으로 600미터, 남으로 500미터, 동서 방향 각각 200-300미터의 범위로 퍼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었다. 물론 이 결과는 탐사 자료에 의한 것으로, 층위의 동일성과 시대의 확인 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하지만, 검출된 논 유구와의 거리로부터 살펴서 당시 논의 퍼짐새를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생땅의 바로 윗층과 그 윗층을 비교하면(그림2-12), 검출밀도 및 동서 방향으로 검출지점이 증가하는 것이 발견되기에 해당 유적에서 벼농사가 발전하면서 동서 방향으로 확대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림2-12 벼의 생산 범위와 양의 변화
그러나 이 정도의 범위로 논을 만들어 수확까지 관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조방한 재배였지만 당시의 벼농사가 생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 시작했다는 건 틀림이 없다.
초기 논벼농사의 모습
논의 형태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가 검출되었던 당시는 이것이 논인지, 또는 이와 같은 생산 유구가 이 유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중국의 고고학자가 발굴조사하여 강소성 소주 징호 유적(송택 문화)과 강소성 곤산 작돈綽墩 유적(마가빈 문화)부터 똑같이 논 유구가 검출되어(그림2-13)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가 초기의 논 가운데 하나의 형태임이 분명해졌다.
그림2-13 작돈 유적의 논 유구
초혜산 유적에서 중국과 일본의 공동조사 대표였던 후지와라 히로시藤原宏志 미야자키 대학 명예교수는 이용했던 논을 '자연지형 이용형 논'이라 불러, 그 경관의 모습으로 당시 유적 주변에서 볼 수 있던 샛강을 따라 지형을 이용하여 운영했던 줄논(Manchurian wild rice)을 들고 있다(그림2-14).
그림2-14 샛강을 따라서 전개된 줄논(위: 전경, 아래: 한 배미를 확대)
당시 논의 생산성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의 형태와 규모부터, 당시의 논벼농사의 모습을 그려 보자. 먼저 물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발굴된 논은 투수성이 낮은 생땅층을 파서 만들어 증발산을 제외하면 공급된 물의 손실이 매우 적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 주변의 아주 조금 높은 땅에서 지하로 침투한 물은 생땅층에 가로막혀 논이 만들어진 골짜기 부분으로 모여서, 그와 같은 물이 논에 인접한 우물 모양의 구덩이로 모이고 관개수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물이 부족한 일은 적었고, 오히려 배수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현대의 논으로 말하면 '습논'에 해당한다. 습논에서는 논 토양 속의 산소가 부족하여, 이른바 '뿌리썩음' 등 벼의 발육에 장해를 일으키기 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벼의 생산량은 구체적인 검토가 어렵지만, 배수가 곤란한 상황 등을 고려하면 야요이 시대의 생산량(300평당 100킬로그램 정도)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벼를 재배했을까
이미 서슬했듯이 잎의 세포화석 형상으로 벼의 아종을 판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그림2-15에 나오는 각 부위의 길이를 측정하고, 판별식에 따라 아종을 판별하는 기존이 되는 판별득점을 구한다. 이 수치가 올바르다면 자포니카, 틀리다면 인디카가 되며, 경계치인 0에서 더 멀어지는 만큼 전형적인 아종임을 나타낸다.
그림2-15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측정 부위
마가빈 문화기의 토양에서 검출된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분포는 현재 중국과 아시아의 자포니카(중국에서는 메벼에 해당) 분포에 포함되어(그림2-16), 유적에서 재배된 벼는 자포니카였다고 추정된다(이 결과는 탄화미의 DNA 분석과도 부합한다).
그림2-16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분포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 인디카가 재배되기 시작한 건 언제쯤일까?
유적의 토양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은 그 토양이 퇴적되는 사이에 재배되었던 모든 벼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그 형상은 중심적으로 재배되었던 아종을 반영하게 된다. 따라서 판별득점이 감소해 간다면, 그것은 인디카에 가까운 자포니카와 일정 비율로 인디카가 재배되었다는 가능성이 있다.
토층에 따른 판별득점의 변화를 보면, 3층 이후에 급격한 감소가 발견된다(그림2-17). 3층은 송나라 시대로, 이 무렵부터 인디카인 벼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알 수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현재의 베트남 쪽에서 인디카 계통인 점성도占城稻가 도입되었다고 전해진다. 둘을 단순히 결부시켜 생각할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일치이다.
그림2-17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변화
재배 방법(파종과 모내기)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재배 관리의 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광역 논 유구 탐사에 의해 당시의 논이 북으로 600미터, 남으로 500미터, 동서로 각각 200-300미터의 범위로 펼쳐져 있었다고 추정되었다. 논은 이 범위 안에 불규칙하게 분포하는 골짜기 부분과 움푹 패인 땅을 이용하여 운영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관리작업은 효율이 나빠 당시 사람들에게 큰 노동부담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세세한 재배관리를 행하기 어려워 조방한 재배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파종과 모내기 문제에 대해서는 직파 재배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직파의 경우에는 파종 이후의 제초 작업이 필수이며 전체적인 노동부하를 감안하면 모내기 재배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본격적인 논벼농사의 성립은?
이처럼 신석기시대에 확인된 논에서 경영했던 벼농사는 논벼농사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그 면적과 물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충분한 수확량을 확보하지는 못하여 생업이 농경으로 완전히 이행한 단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초혜산 유적에서는 사슴과 멧돼지 등의 짐승뼈가 여럿 출토되어 채집수렵이 생업을 뒷받침하는 요소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현재로도 이어지는 본격적인 논벼농사가 성립된 것은 중국의 어느 시대였을까? 그 후보로 현재 필자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절강성의 양저 문화기(기원전 3050-1050년)이다. 이 시대가 되면 봉분을 쌓은 묘지가 만들어지고,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옥기라고 부르는 연옥을 가공한 여러 가지 장신구와 제기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것으로부터 이 시대에는 사회의 계층화와 분업화가 진행되어 일정 정치권력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를 지탱하는 데에는 생산활동에서 해방된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잉여'가 필요하다. 양저문화기를 대표하는 양저 유적군은 항주만으로 이어지는 장강 삼각주에 소재하는데, 이 '잉여'를 가져올 수 있는 생업으로는 그 입지를 두고 생각하면 야요이 시대에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수로를 갖추고 토지가 평균화된 논(그림2-18)에서 운영된 벼농사 이외에는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의 논벼농사 성립에 대해서는 현재도 국내외의 연구자가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시기에 양저문화기의 논이 명확해지리라 기대된다.
그림2-18 야요이 시대의 논(아오모리현 타레야나기垂柳 유적)
중국에서 벼농사의 퍼짐새와 일본으로의 전파
초혜산 유적을 시작으로 하는 논 유구의 검출에 의하여 기원전 4050-4550년에는 장강 중하류에서 초기 논벼농사 기술이 성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초기의 벼농사는 농경사회를 지탱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자연지형을 개변하여 생산시설을 조성하는 기술의 성립은 벼농사의 확산에 큰 탄력을 가했을 것이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기에서는 그 뒤 장강 중하류의 벼농사 퍼짐새와 일본으로 전파된 것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벼잎 세포화석 분석이 파악한 벼농사의 북상
신석기시대의 논이 검출된 이후 중국 각지에서 벼 유물(탄화미, 알곡 압흔, 잎의 세포화석) 등이 검출되는, 이른바 벼농사 유적의 발견이 이어졌다. 이는 중국 고고학자의 생산 유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짐과 함께 '과학기술 고고'라 불리는 고고학 분야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의 적극적인 활용이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자신도 이와 같은 벼농사의 확산에 대하여 강소성 안의 각지에 소재한 일곱 군데의 신석기시대 유적(표2-1, 그림2-19)를 대상으로 그 출토 토기에 대하여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행하고, 강소성 벼농사 유적의 분포를 검토하려 시도했다.
유적 이름 | 유적의 시대 |
句容丁沙地 유적 | 약 기원전 4550-5050년 |
鎭江 丹徒鎭四脚墩 유적 | 약 기원전 3050-4050년 |
沐陽 萬北 유적 | 약 기원전 3050-4550년 |
泗洪梅花趙荘 유적 | 약 기원전 2050-2550년 |
連雲港 朝陽 유적 | 약 기원전 3050-4050년 |
海安 靑墩 유적 | 약 기원전 3550-4050년 |
南京 北月陽菅 유적 | 약 기원전 3050-4050년 |
표2-1 토기 바탕흙 분석을 실시한 유적과 시대
그림2-19 토기 바탕흙 분석을 실시한 유적의 분포
분석은 각 유적에서 출토된 그곳의 토기(그 유적에서 제작된 토기)에 대하여 시행했다.
분석 결과, 구용정사지 유적, 진강 단도진사각돈 유적, 연운항 조양 유적, 해안 청돈 유적, 남경 북월양관 유적의 토기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었다(그림2-20). 이미 기술했듯이 분석의 대상이었던 벼잎의 세포화석은 벼잎의 세포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 유적에서 벼농사가 운영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림2-20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이상의 결과에서 기원전 4050년-3050년 단계에는 강소성의 북쪽까지 벼농사가 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신석기시대에 재배되었던 벼에 대해서는, 이미 기술한 토양과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형상을 조사해 보면, 모두 중국의 토종 벼(메벼=자포니카)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자포니카는 인디카와 비교하여 저온 저항성이 뛰어나 이것이 회하 이북의 연운항 조양 유적에까지 벼농사가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북상한 벼농사는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최근 중국에서 발굴조사한 결과,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벼 유물이 여럿 검출되었다고 보고되어 동시대에 이미 장강 하류의 벼농사가 진령秦嶺 회하淮河 선을 넘어 북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검출된 벼 유물에 대하여 자연과학 분석(DNA 분석,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한 결과에서는 당시 재배되었던 벼는 자포니카이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자포니카 벼는 저온 저항성에서 우수하여, 벼농사가 북진해 나아가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에서는 진령산맥과 회하를 연결하는 진령 회하 선을 경계로 하여 그 기후와 식생, 토양의 성질에 큰 차이가 난다. 진령화하선의 남쪽은 강수량과 기온, 토양의 성질 등이 벼농사에 이로운 환경이지만, 북쪽에서는 연간 강수량이 감소하기(750mm 이하) 때문에 논벼농사는 물론 벼농사에는 가혹한 환경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에서 벼농사가 확산된 것에 대해서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고려함과 함께 벼를 수용했던 현지 농경기술과의 관련에서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북진한 벼가 어떻게 재배되었을지에 대하여 밭과 논 같은 생산 유구와 화전 등의 생산 공간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는 현재로서는 벼농사 유적을 기술적인 계보에 놓고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용산문화는 그 기술적인 계보로부터 화북의 건조지역에 적응한 잡곡 농경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잡곡 농경기술에서 벼를 받아들인다고 하면, 벼는 논벼농사 기술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돌려짓기 작물로 재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벼는 조와 기장 등과 비교하여 필요로 하는 비료의 양이 많고, 건조함과 저온에도 약한 작물이다. 따라서 힙시서멀기 이후의 기후 한랭화를 고려하면 인디카에 비교하여 저온 저항성에서 뛰어난 자포니카였어도 그 재배 위험은 적지 않으며, 안정적인 수확이란 점에서는 의문도 남는다.
논벼농사에서는 심수 재배로 대표되듯이 물을 대어 기온 저하의 영향을 줄일 수 있다. 또한 피논으로 대표되듯이 피는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으며, 더욱이 벼에 비교하여 수온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정상적으로 발육할 수 있다. 벼만이 아니라 피까지 수확의 대상으로 본다면, 북진한 벼를 논벼농사 기술과 함께 수용한 잇점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산동 용산문화기에 논벼농사가 운영되었다고 한다면, 해당 지역에서 밭농사 기술과 논벼농사 기술이 토지이용에 걸맞게 병존했다는 것의 증명이 된다.
자, 이 문제에 대한 접근법인데 벼는 밭에서도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기 때문에 출토된 벼 유물의 조사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얻기가 어려우며, 벼가 생산되었던 장소(생산 공간)의 입지를 통해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벼농사 유적인 양가권楊家圈 유적에서 논 유구 탐사가 실시되었다.
산동 용산문화기에 논은 존재했을까? (산동성 양가권 유적에서 행한 논 유구 탐사)
생산 유구 조사는 2004년부터 산동대학, 큐슈대학, 에히메대학, 미야자키대학의 연구자들의 국제 공동연구로 실시되었다. 조사는 산동반도의 벼농사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양가권 유적에 대하여 행해졌다. 이 조사연구는 문부과학성 과학연구비 보조금을 받아 "일본 논벼 농경의 기원지에 관한 종합적 연구"(연구 대표자 미야모토 카즈오宮本一夫)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양가권 유적은 연태시의 남서, 산동성 서하현栖霞縣에 소재한 대문구大汶口 문화부터 산동 용산문화의 유적이다(그림2-12). 산동성 문물고고연구소와 베이징대학에서 발굴조사를 행하여, 용산문화기의 퇴적층과 재구덩이에서 조와 왕겨가 발견되었다.
그림2-21 양가권 유적의 소재
중국은 야생 벼가 존재하는 지역이다. 그 때문에 논 유구 탐사에서는 발굴조사에 의하여 생산 유구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야생 벼를 파악할 가능성을 고려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양가권 유적이 소재하는 지역은 과거의 기후변화를 고려해도 야생 벼가 분포할 가능성이 낮고, 일본과 똑같이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면 벼농사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유적은 청수하淸水河 서쪽 단구段丘 위에 입지하며, 그 남북에는 청수하에 연결되는 작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지에서 청취 및 시추로 지하의 퇴적 상황을 조사하여, 유적의 북쪽 골짜기 부분을 조사구로 설정했다(그림2-22). 조사구는 수수와 토란 등이 재배되어 밭으로 이용되었다(그림2-23). 생산 유구 탐사는 조사구를 남북 및 동서 방향으로 덮은 모양으로, 시추로 시료 채취와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행했다.
그림2-22 양가권 유적과 주변의 지형
그림2-23 조사구의 전경
탐사 결과, 지표 아래 1.5미터 안팎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는 지점이 확인되었다.
검출된 세포화석의 밀도는 가장 높은 곳이 흙 1그램당 3000개를 넘었다. 이 수치는 토양의 퇴적 속도를 감안하여 평가해야 하지만, 일본에서 행한 탐사, 발굴의 사례에 비추면 논 유구의 존재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분석 결과와 시추로 옛 지형을 복원한 결과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산 유구의 매장 구역으로는 그림2-24에서 타원으로 보이는 범위(수로의 양쪽 부분)이 가장 유망하다고 추정되었다.
그림2-24 검출 상황과 추정 매장 구역
이번 탐사로 파악된 생산 유구 범위의 토양에서는 벼에 수반해 갈대속의 잎 세포화석이 검출되어, 하천의 물과 샘을 이용하던 논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 유구 탐사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검출 밀도는 1000개 정도인 지점이 많아, 이것은 이용 기간의 짧음과 재배의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산 유구의 모습으로는 물이 풍부한 때는 물을 대어 재배하고, 물이 적을 때는 하천에서 침투한 수분 등에 의존하여 벼를 재배하는 천둥지기 같았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논이 존재했을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발굴 조사를 기다려야겠지만, 이 결과에서 적어도 유적 주변의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경영되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며, 토지 이용이란 시점에서는 기존의 밭농사 계보의 농업 기술과 논벼농사 또는 저습지 벼농사 기술이 공존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의 혜택을 입은 장소는 논으로, 그렇지 않은 장소는 밭으로 이용하는 토지이용의 발상은 지금의 산동성에서도 볼 수 있다(그림2-25). 또한 논의 존재를 보강하는 것으로 산동반도의 교주膠州 조가장 유적에서 용산문화기의 논 유구가 검출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림2-25 산동성에서 볼 수 있는 토지이용
더구나 이 결과는 벼가 동시에 돌려짓기 작물로 수용되었단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걸 덧붙여 놓고 싶다.
'농업 기술의 공통성'이란 시점에서 생각하는 일본으로의 전파 경로
벼농사 전파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술을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의 시대적 앞뒤 관계가 전파 경로의 존재 여부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보내는 쪽과 받는 쪽에서 '농업 기술의 공통성'도 필수조건임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로서, 논벼농사 이전의 일본에서 벼농사는 화전 등의 밭농사 계보의 재배 기술에 따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농업 기술의 공통성'이란 점에서 이 기술을 보내는 쪽으로는 화전을 현재도 볼 수 있는 하문廈門 등으로 이어지는 남부의 산악지대와 화북의 잡곡 농경기술을 가진 산동반도 등이 그 후보지라고 들 수 있는데, 후자는 벼농사의 존재가 그 성립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가권 유적에서 행한 생산 유구 탐사의 결과와 교주 조가장 유적에서 나온 논 유구의 검출에 의하여, 적어도 산동 용산문화기에 벼농사가 존재한 것은 거의 확실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의하여 조몬시대에 볼 수 있는 일본 벼농사의 전파 경로로, 산동반도에서 직접 또는 조선반도를 경유하는 것이 상정된다.
또한 이 경로가 올바르다면, 일본에서 조몬 벼농사에 대해서도 화전에 더하여 저습지 벼농사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금 검증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일본 벼농사의 변천에 대하여
중국의 벼농사 전재와 일본으로의 전파에 대하여 이야기를 진행해 왔는데, 마지막으로 벼농사 전파 이후 일본에서 벼농사가 어떻게 변천했는지에 대하여 현재까지 얻을 수 있는 벼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재배 벼의 변천에 대하여
논과 밭은 토목기술과 치수기술의 발달과 함께 그 입지가 변해 왔다. 이러한 변화는 물골을 변경하는 등의 현대에 통하는 토목공사가 행해지게 되었던 근세 이후는 적어진다. 그러나 그 한편에서 근세의 논을 탐색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그곳은 현재도 논으로 이용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몬, 야요이 시대부터 근세, 근대까지 논이 연속적으로 남아 있는 장소가 개발에 따른 발굴조사의 대상이 되는 건 여러 가지 조건에서 은혜를 입는 경우로 한정된다.
운이 좋게도 필자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두 가지 유적에서 벼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실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사카모토坂元 A 유적과 이케시마池島, 후쿠만지 유적이다(그림2-26)
그림2-26 유적의 소재
그림2-27 조몬시대 만기의 논(사카모토 A 유적)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조몬 만기-근세, 이케시마와 후쿠만지 유적에서는 야요이 시대-근세의 논이 남아 있었다. 또한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미나미큐슈에서 가장 오래된 조몬시대 만기의 논이 검출되고 있다.
이들 두 곳의 유적에서 각 시대의 논 토양에서는 각 시대에 재배된 벼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세포화석의 형상 변화는 재배되어 온 벼의 변화에 의해 생긴 것이다.
두 곳의 유적에서 나타나는 형상의 변화를 보면, 몇 가지 큰 변이가 생기는 시점을 판단할 수 있다(그림2-28, 그림2-29).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는 그 시점이 헤이안과 가마쿠라 시대로 중세에 해당하고,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조몬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 헤이안부터 중세, 또 중세부터 근세로 변하는 시기가 해당된다. 또한 두 유적 모두 중세 이후는 형상의 변화가 적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또 이들 형상에 따라 앞에서 서술했던 아종 판별을 행하면, 재배되어 온 벼는 모두 자포니카였다.
그림2-28 사카모토 A 유적에서 나타나는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변화
그림2-29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 나타나는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변화
야요이 시대는 본격적으로 논벼농사가 보급된 시대이다. 헤이안과 가마쿠라는 율령제도가 정비되어 개간이 진행된 시대이며, 또 옛 기상으로도 한랭화 등의 변화가 지적되는 시기이다. 중세부터 근세는 말할 것도 없이 농업 기술(특히 재배기술과 치수기술)이 크게 발달한 시기이다.
이처럼 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통해 보면, 이러한 농업기술과 농업을 둘러싼 환경과 사회의 변화에 응하여 재배 벼가 변천해 온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자연과학 분석의 검증을 기다려야 하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곳의 유적에서 어느 정도 일치하는 걸 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열대 자포니카의 재배에 대하여
자포니카 벼에는 논벼농사에 적응한 벼인 '온대 자포니카'와 생산성이란 점에서는 온대 자포니카보다 떨어지지만 화전부터 논벼농사까지 다양한 재배에 대응할 수 있는 '열대 자포니카'란 두 가지 생태형이 알려져 있다. 최근 필자 등의 연구에 의해, 벼잎의 세포화석 형상이 "세로 길이가 길고(40mm 이상) 판별득점이 2.0 이상인 것"의 대부분이 열대 자포니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림2-30 온대 자포니카와 열대 자포니카에서 볼 수 있는 잎의 세포화석
두 가지 유적에서 세로 길이와 판별득점에 대하여 정리하면, 어느 시대도 세로 길이는 40mm 이상이다. 따라서 판별득점의 변화에서 열대 자포니카가 존재했던 시대를 살피면, 두 유적 모두 중세에 해당하는 토층까지는 열대 자포니카가 재배되었다고 추정된다.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 대해서는 도중에 판별득점이 2.0을 밑도는 시대가 있는데, 종자의 갱신과 존속이란 농업기술의 시점을 더하면 중세까지는 열대 자포니카 벼가 재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 판별득점의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기에 재배의 중심이 온대 자포니카로 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결과는 앞에서 기술한 형상 변화에서 본 재배 벼의 변천과도 잘 부합한다.
그림2-31 사카모토 A 유적에서 나타나는 판별득점의 변화
그림2-32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 나타나는 판별득점의 변화
마치며
이 장에서는 잎의 세포화석 분석에 의하여 얻은 연구성과부터 중국 및 일본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 또는 그 뒤의 벼농사의 변천이 어떠했는지 추정해 보았다.
동아시아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가 어떠했는지 그 실상에 다가가는 데에는 다른 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고고학의 조사연구, DNA 분석, 더 나아가서는 종자 분석과 꽃가루 분석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비교검증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의 분석결과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에 대하여 어떠한 모습을 구성하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이 과제에 관한 연구자와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밝히는 일도 실상에 다가가는 걸음을 확실하게 하는 데 중요할 것이다. 이것이 이 장을 쓴 동기였다고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연구의 진전에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잎의 세포화석 분석과 생산 유구 탐사에 대한 과제 및 그에 대한 대처를 소개하며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잎의 세포화석 분석의 과제
잎의 세포화석은 그 조성부터 종자와 꽃가루에 비교하여 잔류성이 뛰어나다는 이유가 있지만, 그 때문에 벼농사의 존재를 보여주는 근거가 잎의 세포화석뿐이라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분석 시료의 채위부터 현미경 분석에까지 이르는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틀림없는 결과이겠지만, 생각하지도 않은 원인으로 시료 오염이 생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나 자신도 잎의 세포화석 분석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이상 억지로라도 '생각하지도 않은 시료 오염'을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역시 이 문제를 검증하는 궁극의 방법으로는 잎의 세포화석으로부터 연대측정을 행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잎의 세포화석이 지닌 화학 조성을 분석하면 그 주성분은 유리인데, 실은 탄소도 그에 버금가는 성분으로 포함되어 있다. 최근 분석기구가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잎의 세포화석을 일정량 모아서 이 탄소로부터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도 현재 이 방법의 확립에 몰두하고 있다.
생산 유구 탐사의 과제
중국에서는 이미 기술했듯이 양저문화기의 논이 탐사, 발굴되어 어떠한 형태와 규모를 갖추었는지 밝히는 일이 과제가 되어 앞으로 중국에서 행할 조사가 기다려지는 바이다.
일본에서는 논벼농사 이전의 조몬 벼농사가 어디에서 어떻게 경영되었는지 하는 확실한 증거, 즉 조몬 벼농사의 생산 공간 입지를 밝히는 일이 과제일 것이다. 화전인지, 산동성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토지이용이라면 저습지의 벼농사도 존재했는지 흥미롭다. 화전에 대해서는 잎의 세포화석에 의한 탐사 사례도 있고, 조사 수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목표가 세워져 있으며, 저습지 벼농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논 탐사의 수법을 응용할 수 있다. 현재 여러 가지 대처가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 고고학과 자연과학이 협동하여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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