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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글이란 걸 부탁을 받아 써 보았다.



추천의 글




세상일의 변천이 심함을 일컬어, 뽕나무밭이 변하여 바다가 됨을 가리키는 상전벽해라는 말이 있다. 한국 사회, 특히 농업의 변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말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연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 문제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잘 살아보세’로 대표되는 1960-1970년대에 있었던 산업화를 만나게 된다. 


당시 한국 사회가 추진한 산업화를 달성하느냐 못하느냐의 근간에는 농업생산성 향상이란 과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즉, 일정한 재배면적에서 더 적은 노동력으로, 더 많은 수확을 올리는 일이 그것이다. 그래야 더 많은 농민을 노동자로 끌어낼 수 있고, 그들에게 더 싼 값에 더 많은 농산물을 공급해 배를 불려 힘을 내서 일하도록 하며, 그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여 산업역군이란 칭호만 붙여준 노동력을 꾸준히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정책적, 제도적으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토종 씨앗을 비료와 농약을 적용하여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개량종 씨앗으로 대체하는 일을 시작으로, 등고선을 따라 구불구불하고 층층이 존재하던 다락논을 밀어버리고 반듯반듯하고 드넓은 공간으로 바꾸는 농지정리 사업을 추진하고, 사람의 노동력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농사일을 강력하고 어마어마하기까지 한 농기계가 대신하도록 하며, 가정에서 자급을 목적으로 생산하던 농산물을 시장판매용으로 재배하게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농촌 공동체와 농민, 농법 등 관련된 모든 조직과 인간 및 생산방식 들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농사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농기계와 각종 농자재에 의존하는 비중은 더 커지고, 그러면서 농가에서 짊어지는 부채의 규모도 과도해져 그를 이기지 못하고 농지를 떠나거나 심할 경우 세상을 등지는 일도 비일비재해졌다. 이상하게도 농사일은 편해졌지만 살림살이는 쪼그라들었다. 화학농자재에 길들여지며 농지의 토양과 생태계는 피폐해지고, 사람도 농약이나 비료 가루를 뒤집어쓰고 픽픽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기까지 했다. 이웃집 숟가락 숫자까지도 알며 마을의 대소사에 너 나 할 것 없이 참여하던 농촌 공동체의 삶은 점점 도시의 그것처럼 변해갔다. 직접 좋은 씨앗을 선별하여 심고 가꾸는 일은 물론, 좋은 농토를 판별하고 농지와 그 주변의 곤충을 비롯해 식생까지도 빠삭하게 알던 상일꾼들이 그저 전문가들의 조언과 농자재를 받아 작물만 재배할 줄 알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어디 그뿐인가. 어지간한 농기구는 물론이고, 창고나 집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고 짓던 장인의 한 사람이었던 농민들의 손재주와 기술도 사라졌다. 


일찍이 석가모니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설파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농업과 관련되어 일어난 변화들이 모두 옳은 것인지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자화자찬하는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이다. 그를 통해 지금과 같은 물질적 풍요를 이룩하여 나름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성과는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즉 국가가 주도하여 급속도로 이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도 많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농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60년대 이전 한국은 농경국가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국민의 60-80%가 농민이었던 사회였다. 국가 주도의 고도성장 과정에서는 이러한 농민들을 노동자로 변화시키는 일이 시급했고, 여러 시책을 통해 그들을 농촌 공동체에서 끌어내 도시의 공단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그러한 일이 농민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농민을 위해, 또 농촌 공동체를 위해 시쳇말로 “나라에서 해준 게 무어가 있는가?” 오히려 농민과 농촌 공동체가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추진해 온 여러 사업을 방해하고 억압한 측면은 없는지 따지고 싶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농민과 농촌을 자발적인 주체로 보기보다는 무지몽매하여 계몽해야 하는 객체로 여기며 그들을 계도하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고삐를 틀어쥐고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았는지 말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표현처럼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과 찾아야 할 것들”을 살펴보고 있다.  한다. 나는 저자의 그러한 시도에 동의한다. 망국의 이념이라며 배척을 당한 유가의 가르침가운데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이지신이나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법고창신의 정신은 지금과 같은 첨단 산업의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잊은 사람들에게는 미래도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 옛것을 낡은 것, 일고의 가치도 없이 폐기해야 할 것으로만 취급하며, 새것을 무조건 좋은 것, 억지로라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과거 농촌 공동체의 품앗이와 두레 같은 노동조직은 농업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재의 농촌에서 협동조합이라든지 농기계임대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그 구성과 작동 원리를 재고할 만하고, 각종 계와 같은 사회조직은 국가의 복지제도가 아직도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농촌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방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토종 씨앗이나 과거의 농법은 또 어떠한가? 쌀 생산량이 소비량에 비해 너무 많다며 이를 농민의 잘못과 책임으로만 몰아가는 현재, 이를 통해 그렇게나 강조하고 있는 고품질 고부가가치의 다양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잠재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잠재성들을 어떻게 했는가? 낡고 쓸모없는 것이라며 쓰레기더미에 그냥 버리지는 않았는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목적지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의 길이 존재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선택은 결국 우리의 몫일 것이다. 나는 저자의 글을 인용하며 추천의 글을 마치려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농부의 철학과 세계관, 나아가 나라의 농업정책과도 긴밀하다. 한 사회의 문화·정치·경제적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김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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