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소농이다. 소농을 이야기하자.
전통적으로 농부들은 병해충을 방제하고, 땅심을 돋우며 작물에 양분을 공급하고, 토양의 침식을 막고자 여러 작물의 사이짓기와 섞어짓기, 돌려짓기 같은 농법만이 아니라 농경지에서 풀과 나무를 함께 가꾸기도 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농경지에 작물만이 아니라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그리고 그에 기대어 살아가는 수많은 곤충과 새 같은 동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농경지가 그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많은 농경지가 그러했을 것이다. 요즘은 그런 모습을 ‘농업경관(Landscape of agriculture)’이라 부르며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하던 농업의 풍광이 어느 날인가 확 달라져 버렸다. 농경을 중심으로 하던 시대에 산업의 논리가 뒤덮이면서 농사가 농업으로 변모함에 따라 차츰 더 대규모의 농경지에, 상품성 있는 더 소수의 작물만 살아남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도 ‘농사’와 ‘농업’이란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려 한다. 농사는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가꾸고 기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면, 농업은 직업이나 산업의 하나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농사가 농업이 되며, 가족들이 집에서 먹을 다양한 작물들이 재배되던 농경지에는 최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작물 한두 가지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여타의 식물들은, 심지어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임에도 '잡초' 등의 낙인이 찍히며 제초제 같은 화학약품에 죽임을 당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몰아낸 농경지의 동식물들이 잡스럽고 해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러한 동식물들은 농업생태계 안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다. 지렁이는 식물의 생장에 이롭게 흙을 가꾸는 역할을 담당하고, 미생물이 풍부한 흙은 작물들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효과들을 가져왔다. 또 풀과 나무들 역시 여러 곤충과 미생물에게 서식처를 제공하고, 심지어 작물과 다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분을 공급하기도 했으며, 비바람에게서 흙을 지켜주는 역할도 담당했다. 그렇게 다양한 동식물이 어우러져 살면서 건강한 흙은 보수력과 배수력 등이 좋아 가뭄과 폭우에도 작물을 더 잘 보듬는다는 사실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들이 쫓겨나면서 그러한 기능과 효과들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른바 흙이 죽어 버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농경지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이나 행위를 투입했다. 화학비료와 농약, 비닐, 양수기, 경지정리 등이 그것이다. 농업의 현대화란 이름으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농사의 규모가 확대되고, 작물 생산의 효율성과 상품성이 강화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농민의 주머니는 갈수록 얄팍해져갔다. 주머니만 얄팍해진 것이 아니다. 시간적인 여유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는 사시사철 밤낮 없이 일해야 겨우 먹고살 만한 그런 형편이 되었다. 결국 농민들 대다수는 빚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땅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는 일까지 있었다. 농사가 적정한 규모를 넘어서며 그를 감당하기 위하여 외부에서 농자재를 구매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값비싼 농기계도 마련해야 했으며, 규모의 확대를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농지도 새로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생산성이 올라 수확량이 증가했지만, 어떻게 된 것이 농산물 가격은 오히려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수량이 더 많다는 종자도 구매하고, 비료나 농약도 더 좋다는 걸로 듬뿍 치고, 가능하면 더 마력 높은 농기계를, 그리고 더 넓은 땅을 확보해서 농사를 지었다. 그래야 규모의 경제로 그나마 수중에 돈이 남게 되는 늪에 빠졌다. 강원도 고랭지의 농사는, 그곳만이 아니라 이러한 농사들 대부분은 이제 투기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상황에 처했다. 예전에는 집에서 받은 씨앗이나 이웃에서 얻은 씨앗이면 되었고, 집에서 나오는 사람을 포함한 짐승들의 똥오줌으로 거름을 만들거나 여러 식물을 활용해 땅심을 유지하면 되었다. 거기에 소나 한두 마리 키우면 남 부러울 것 없던 그런 집이었는데 말이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해 상전벽해가 어울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 같은 곳처럼 몇 만 평 규모의 농지를 확보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들이 강구한 것이 작은 규모에서도 집약도를 높여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일이다. 이를 '강소농'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 이러저러한 지원사업으로 농경지에 여러 시설들이 도입되었다. 300평에 몇 억이 들어가는 첨단시설을 갖춘 하우스, 그리고 그나마 돈이 된다는 축사들, 또 특용작물들이 논밭의 주인공이었던 전통적인 작물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투자한만큼 매출은 높아졌지만 투자비도 더욱 올랐으니 빛 좋은 개살구이다.
이 책의 저자인 전희식 선생은 이러한 농민, 농촌, 농업의 현실을 20여 년 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대안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소농은 혁명이다”라는 문구에 잘 요약되어 있다. 저자는 농촌다움이 사라진 작금의 현실에서, 지역 자치에 기반을 둔 소농들이 농촌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일으켜 세상을 변화시킬 동력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언급하는 소농은 농지의 규모가 작은 그런 농민이 아니다. 소농은 농지의 규모보다는 어떠한 농사를 짓느냐가 핵심이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여 이윤만 중시하며 생명을 죽이는 그러한 농사가 아니라, 농지와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 및 농민과 도시민까지 함께 살리는 그러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진정한 소농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이러한 사람들을 기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데, 협동조합이나 교육제도, 농지문제, 농민기본소득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그 일환이 된다며 하나씩 논의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는 그동안 여러 곳에 기고한 글들이 실리면서 일관된 흐름을 잡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기고문의 성격상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른 내용들도 많아 사고와 주장을 찬찬히 살펴보며 따라가 전체를 구축하기 어려웠다. 이는 모두 나의 능력과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 소농이 지닌 의의와 중요성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소농은 이미 준비되어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앞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현실에서 부딪치며 만들어 나아가야 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저자의 말처럼 정말 혁명과도 같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래를 상상하며 책을 덮는다.
김석기 전통농업과 토종씨앗에 빠져 지내다가 육아와 지방 이주로 경력단절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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