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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업 전반

그래, 소농이다. 소농을 이야기하자.

by 石基 2016.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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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해충의 방제나 양분의 공급, 토양침식의 방지 등을 위해 전통적으로 사이짓기와 섞어짓기 같은 농법을 활용했다. 즉 농경지에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산업화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산업화의 논리와 함께 더 대규모의 농경지에서, 상품성 있는 극소수의 작물만 살아남도록 허용된 것이다. 수익을 최대로 낼 수 있는 작물 한두 가지만 남기고 여타의 식물들은 '잡초' 등의 낙인이 찍히며 제초제 같은 화학약품의 힘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식물들이 주던 양분 공급이라든지 토양침식 방지라든지 하는 효과들은 대체재를 투입하여 대신하기 시작했다. 화학비료나 경지정리나 농약 등이 그것이다. 농업의 현대화 사업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농사의 규모는 확대되고 효율성과 상품성은 강화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농민의 주머니는 갈수록 얄팍해져갔다. 결국 농민들 중 다수는 빚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땅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기까지 했다.


적정 규모를 넘어서며 그를 감당하기 위하여 외부에서 농자재를 구매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값비싼 농기계도 마련해야 하며, 규모를 위해 대출을 받아 농지도 새로 장만해야 했다. 그런데 생산성이 오르며 농산물 가격은 오히려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더 많은 수량이 나오는 종자도 사야 하고, 비료나 농약도 더 좋다는 걸로 듬뿍 줘야 하고, 할 수 있으면 더 마력 좋은 농기계, 더 넓은 땅을 확보해서 농사지어야 규모의 경제로 그나마 수익이 남게 되는 늪에 빠진다.


예전에는 집에서 받은 씨앗이나 이웃에서 얻은 씨앗이면 되었고, 집에서 나오는 똥오줌으로 거름을 만들거나 여러 식물을 체계적으로 심어 땅심을 유지하면 되었고, 소나 한 마리 키우면 남 부러울 것 없던 그런 환경이었는데 말이다. 상전벽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한국이 미국 같은 곳처럼 몇 만 평 규모의 농지를 확보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강구한 방법이 작은 규모에서도 집약적으로 농사지어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일이다. 이를 '강소농'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러저러한 지원사업으로 시설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300평에 몇 억이 들어가는 첨단시설을 갖춘 하우스, 그리고 그나마 돈이 된다는 축사들, 또 특용작물들이 논밭의 주인공이었던 전통적인 작물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그만큼 매출은 높다지만 투자비도 더욱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현실과 다른 길을 택한 농부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1960년대부터 씨앗이 뿌려졌다. 농약이 좋다고 농약을 쳤는데 애꿎은 사람이 쓰러져 죽는 모습을 보며 현대화된 농업에 의구심을 품고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서 자라던 중 1990년대에 생태농업과 귀농이라는 웃거름이 주어지고,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20여 년, 그 자식들이 또 그 흐름을 이어받기도 하며 튼실한 나무로 자란 모습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어디서는 커다란 마을나무가 되기도 했고, 어디서는 그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기도 했고, 어디서는 지자체의 상징목이 되기도 했고, 어디서는 기존 산의 여러 나무 가운데 하나로 모습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며 굳건히 뿌리를 내렸다.


어찌 어려움이 없었으랴. 거센 풍파와 강한 태풍이 수시로 엄습했지만, 때로는 가지가 부러지고 때로는 뿌리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해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시 씨를 뿌리며 살아간다.


그것이 내가 이 주변을 맴돌면서 보아 온 모습이다. 참으로 대단하고 대견스럽다. 누군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남겨 후대에 전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들이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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