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있는 직업 대장장이.
농기구를 사려고 철물점이라도 가면 값싼 중국산 호미와 낫이 차고 넘친다.
좋은 농기구를 구하고자 지방의 장터에 아직 남아 있는 대장간을 찾아가도 썩 마음에 드는 농기구를 만나기란 어렵다.
10년 전쯤인가, 농사짓는 사람들과 함께 일본으로 유람을 간 적이 있다.
모두들 일본 농기구에 뿅가서 몇 개씩 사들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때 사온 농기구는 특별히 벼르는 일이 없어도 아무 문제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저 일본의 쇠를 다루는 기술과 그걸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부러울 뿐이다.
아래 글을 보면 일본 대장간의 사정도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규모의 대장간이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울 뿐이다.
눈을 씻고 찾아봐라. 한국에서 이런 곳을 찾을 수 있는지... 없다는 데에 500원 건다!
아무튼 글 말미에 나오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농사짓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역시 사람은 바닥을 쳐야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
한국도 2008년 광우병 사태 이후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확 높아진 기억이 난다.
또 다른 전환점이 다가오겠지. 그날이 오든 안 오든 난 오늘도 씨앗을 뿌리고 가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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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 사토시 아이다 씨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일본식 낫과 괭이 등으로부터 이 사람이 범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철제 날 괭이의 나무 손잡이를 들고 그는 “이게 보여요? 이건 야마나시현에서 포도나무의 껍질을 긁는 데 쓰려고 만든 겁니다. 옆에 있는 삼지창은 치바현의 땅콩 재배 농민을 위해 만든 것이고요. 그리고 저기 있는 길고 얇은 날의 농기구는 초봄에 교토에서 죽순을 캐는 데 쓰는 겁니다.” 아이다 씨의 말에 따르면, 일본에는 특정한 목적과 지역, 토양,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약 1만 가지의 농기구가 있다.
51세의 아이다 씨는 푸른 산의 다락논에서 고품질 쌀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니가타현 산조시에 있는 소규모 농기구 대장간인 아이다 합동공장의 대표이다. 이 마을은 17세기 이후부터 대장장이들의 공동체로 유명했는데, 지금도 부엌칼부터 분재가위까지 전문적으로 작은 금속을 가공하는 사업의 중심지이다. 오래된 목조건물에 있는 이 공장은 1930년 타다오 아이다 씨의 할머니의 시숙이 되는 사람이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매년 14만 가지의 농기구와 부품 등을 손으로 제조한다.
모종삽... 그저 아름답다고밖에...
삼지창... 이걸로 땅콩을 캔다고 함. 좋은 농기구를 보면 욕심이 나서 시골 장터에 갈 때마다 대장간을 들르지만, 이런 건 품질은 결코 보지 못했다. 부럽다.
손낫... 이런 거 하나 정말, 꼭 갖고 싶다.
바깥의 조용한 골목을 지나 들어서니, 공장보단 농가처럼 보이는 작업장이 나타난다. 1층짜리 농촌의 민가 양식(전통적으로 농민들이 거주하던 형태)의 기와지붕을 인 높은 천장을 지닌 60평 규모의 이 건물은 약 70년 전에 지어졌다. 작업장 안은 재료와 기계로 정신이 없었다.
대장간의 일꾼들 —귀마개와 고글을 끼고, 이마에는 땀을 닦는 수건을 묶었다— 은 부지런히 타고 있는 석탄 위에 금속을 녹였다. 40년 된 빛이 바랜 회녹색 기계들, 먼지 낀 시계, 어울리지 않는 의자와 주문을 가득 적어 놓은 칠판이 70년 된 농기구 제조 작업장을 대변하고 있다.
꼼꼼함과 정밀함에 전통 공예를 융합하여, 17명의 직원 —20세부터 77세까지— 이 4천 종의 다양한 농기구를 생산한다. 각각의 농기구는 일본열도의 산악 지형부터 토양, 기후, 작물의 종류에 따라 알맞게 만들어진다. 그들의 모든 작업을 잘 보여주는 것은 약 3500가지의 괭이이다. 봄철 죽순을 캐는 데 쓰는 괭이부터, 남성용 전통의상의 외투인 톰비와 비슷하게 생겨 그 이름으로 불리는 가벼운 종류의 괭이까지 다양하다.
각 농기구는 단순하고 기능적이다. 일본의 나무 손잡이는 카시라 불리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진다. 날카로운 날의 강철과 쇠날은 왜 그 옛날 닌자들이 농기구로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일꾼들은 우뚝 솟은 기계로 가득 찬 비좁은 방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이루어지는 좀 더 넓은 옆방으로 이동하기 전 농기구의 형판을 자르면서 일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집게로 뜨거운 석탄 위에 있던 금속을 집어 커다랗고 시끄러운 자동 망치 기계에 두들겨 멋지게 농기구를 만든다.
옆방은 더 조용하다. 여기에서 일꾼들은 나무의자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금속을 연마하여 날카롭게 날을 간다. 마지막으로 미리 구입한 나무 손잡이에 농기구를 끼운다.
이러한 농기구는 평생 쓴다. 공장에서는 해마다 수천 개의 농기구를 수선하기도 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수요가 줄긴 했지만, 새로이 젊은 농부들이 농기구를 찾기 시작했다.
총 17명의 직원 가운데 쇠를 연마하는 3명의 직원.
공장의 설립자이자 현재 사장인 사토시 아이다 씨의 삼촌 타다오 아이다 씨.
“농기구는 오래 사용할수록 주인의 몸에 맞게 길듭니다”라고 금융 판매원을 하다가 28세부터 이 사업을 시작한 아이다 씨가 설명한다.
아이다 씨가 채소농사용 괭이를 집어들어 날을 살피자, 그의 근육질 팔뚝이 20년 넘는 대장간 일로 잔뼈가 굵은 그의 경력을 알 수 있게 한다.
“농기구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연륜과 체력과 기술이 필요해요. 농기구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에 10년 정도 걸리죠.”
최근 공장에서는 새로 작은 공간을 마련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경제적, 사회적 요구의 변화를 반영해 제품을 다각화하여 정원용 도구를 제조하는 기계를 들일 것이다. 급속한 고령화로 농민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는 한편, 대량으로 생산된 중국산 제품과 경쟁해야 한다.
거기에다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하며 농민들의 수요가 급락했다. 한때 농산물로 유명했던 일본 북동부 현의 생산 —과 그에 대한 수요— 가 방사능 오염에 대한 공포로 확 떨어졌다.
공장 입구. 상호는 아이다 합동공장.
타다오 씨의 부인 에미코 아이다 씨.
사무실에 전시되어 있는 괭이, 낫, 쇠스랑 등의 모습.
그러나 재해의 여파 속에서 새로운 유형의 농부가 나타났다. 아이다 씨는 방치된 농지를 개간하여 직접 농사짓는 일본의 젊은이들의 농기구에 대한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핵발전소 사고 이후 바뀌었어요” 그는 말한다. “식품안전에 대해 엄청 신경을 쓰고 있죠. 사람들은 안전한 과일과 채소, 쌀을 먹고자 해서 스스로 자기 먹을거리를 재배하기 시작했어요.”
현재 20살짜리 조카에게 대장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아이다 씨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람은 늘 먹어야 살 수 있을 겁니다. 농기구는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라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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