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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농민 문화는 농민의 관행적 제도 운영을 통해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문화는 통합된 전체로서 존재”하기에 농민의 사회·문화 현상은 농민사회 내부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로까지 연장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동안의 두레 연구는 “다양한 문화요소가 하나의 뭉치를 형성하고 있다는 현상적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 논문은 “두레가 왜 그러한 문화적 전통을 형성”했는지 고찰하는 주요한 목적이다.

그를 위하여 먼저 “노동력 동원 형식으로 본 두레의 문화적 성격”을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1) 향도와 촌계 문화의 전통

두레가 발생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어떠한 자치조직의 전통이 두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보고 ‘香徒’를 살펴본다. 그 결과 조선 초기와 후기의 사료를 통해서 향도가 행한 여러 기능 가운데 ‘농작업’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이러한 “향도의 전통이 부분적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국가의 良役 부과 체제의 일부 기능을 촌락에 부여하는 里定制가 시행되면서 민중층의 村契도 활발하게 가동”된다. 여기서 촌계는 洞契처럼 명문화되지 않은 점이 많아도 마을 공동체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조직이다. 17세기 후반부터 양반 사족층의 약화와 함께 상하합계라는 형태의 동계도 등장하지만, 촌계는 자연촌락의 자주성이 확대되면서 성장한 자연촌락 단위의 민중 자치조직이다. 이와 같은 향도의 분화와 촌계의 활성화는 마을 단위 두레의 발생과 결성·운영의 근거가 된다.


2)계급적 측면에서 본 두레의 성격

두레는 촌락 사회의 지배권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문화, 생산농민과 지주 사이의 생산관계를 반영하는데, 선행연구에서는 두레가 “지주층이나 상층농이 실제로 더 이득을 보는 제도였다”고 한다. 두레꾼이 “직접 받는 대가는 밥·참·술과 같은 음식물에 한정되어” 있고, 田主가 내는 품삯은 “대부분 두레꾼의 기금으로 납입되고 그것은 다시 촌락 공동기금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두레가 존속된 까닭은 “촌락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각종 공납과 촌락 내 공동부역은 농가마다 균등하게 부담해야 했고, 이에 따르는 물질적 부담은 촌락 공동기금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17세기 두레가 한창 부상하던 때에는 사족 지주층이 일반 농민을 향약이란 제도를 통하여 저렴한 대가로 농업노동에 참여시켰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러한 상태에서 “노동집단이 확대되고 노동자율성이 강화”되면서 두레와 같은 형태로 운영될 수 있었다고 판단한다. 그 배경에는 자작농과 소작농의 경제적 지위 성장이 놓여 있다. “도맥 2작 체계를 운용하여 토지생산성을 향상함으로써 이윤을 높여 전답을 구입”하고, “신분제의 공고성이 차츰 와해되는 가운데 자영농민으로 성장”한 상민작인과 양인 들이 자율적으로 두레를 결성하여 운영한 것이다. 심지어 노비들도 경제적 성장과 “신분상승을 꾀하면서 두레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곧 “두레는 종래 挾戶, 下戶, 佃戶 등으로 지주의 농토를 병작하던 기층민과 촌계류 발달과 함께 성장한 촌락의 농민들이 만든 자율적인 노동력 동원체제”인 것이다. 이러한 “두레에는 마을의 호당 1명씩 동원되었”는데, 호는 자연호가 아니라 ‘편제호’라고 본다. 곧 주호, 처, 솔거하는 직계자녀, 노비와 고공을 하나의 호로 상정하여, 편제호당 장정 한 명이 출역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두레는 지주와 소자작 농민, 지주와 자작농민, 지주와 토지무소유자 등의 관계, 즉 생산관계를 드러내는 노동력 동원제도”이다.


3 )군사문화적 성격

두레가 띠는 강제성은 군사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두레꾼의 깃발과 그 풍물패의 복장이 대표적인 예이고, 또한 풍물패의 대열은 군인의 훈련 모습을 표현한 ‘진법놀이’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군사문화를 수용했는가? ‘屯田兵’과 ‘束伍軍’에 근거가 있을 것이다. 임란 이후 제도의 변화에도 고쳐지지 않은 ‘兵農一致 제도’의 영향 때문일 것으로 보는데, 둔전병으로 군역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자와 일종의 예비군인 속오군이 동원되었던 ‘防川役, 堤堰役’ 등의 일이 농민들의 공동체적 노동으로 진행되었으리란 점을 감안하면 그렇다. 또한 노동력 집중도가 높은 농업노동을 적기에 마무리하려면 군사조직의 운영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두레 조직 운영의 “노동력 동원의 강제성은 바로 이런 군사조직이 조선후기에 노동조직으로 전환된 사실에서” 일정 부분 찾을 수 있다. 그 직접적 원인은 이앙법과 함께 도맥 2작 체계가 확산되면서 발생한 시한성 때문이다. 그리고 간접적 원인은 첫째, 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걸쳐 양란으로 농토가 황폐해지고 농업노동력이 감소한 상태에서 농경지를 신속히 복구하려는 압박. 둘째, 17세기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인구가 급감하는 비상 상황에서 영농조건이 갖추어지는 대로 신속히 대응할 필요가 커졌다는 점에 있다.


다음으로 “활동과 기능으로 본 두레의 문화적 성격”을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1) 두레의 노동공동체적 성격

두레는 주로 “시한성이 크고, 동종동질의 작업이 지속되는 모내기와 논매기를 할 때 집중적으로 조직·운영되었다.” 그 원인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단순히 이앙법의 확산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퍼진 도맥 2작 체계에 있다. 조선 초·중기에만 하더라도 이앙법은 수리시설 불비로 실농하는 사례가 잦았는데, 명종 때부터 보 축조에 성공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7~18세기 거의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런데 도맥 2작 체계는 언제 일반화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사료를 통해 볼 때 이앙법과 맞물려 17~18세기 삼남 지방에서 일반화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도맥 2작 체계는 2년 3작 체계를 거쳐서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내기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지기에 노동력 동원에 문제가 생기고 집중도를 높여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걸 해결하기 위한 조직이 바로 두레였다.


2) 두레의 놀이공동체적 성격

 근대 농민들의 일과를 통해 조선후기 두레꾼들의 ‘논매기’ 일과를 추정하고자 한다.

그림과 같이 두레꾼들의 일과를 보면 일 말고도 “풍물, 농요, 참, 낮잠과 같은 놀이와 쉼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구성”된다. 이러한 구성은 일의 고됨을 중화시키는 문화적 장치이고, 이를 통해 “고통→고통의 해소”를 넘어 놀이의 신명 체험을 생각할 때 “신명→신명의 확산”이라 해석할 수 있다.


3) 두레의 의례공동체적 성격

두레는 마을 사회의 의례를 수행하는 주체이기도 했다. 두레가 담당한 의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두벌논매기를 마치고 대농의 집에 찾아가 유희적 농경의례를 수행한 ‘마당매기’ 또는 ‘마당논매기’가 있다. 이때 도롱이와 삿갓을 쓰고 소에 올라타는 것은 그것들이 더 이상 필요 없음을 뜻하는 행위이고, 논매는 흉내를 내며 칭칭이를 하는 것도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기쁨을 표출하는 뜻이다. 이때 주인은 간소하게나마 잔치를 베풀고 두레꾼들은 그 음식을 즐기는데, 여기서 지주와 농민 사이의 생산관계가 드러난다.

둘째, 호미씻이가 있다. 이는 김매기를 완전히 끝내고 음력 7월 중순 무렵 행하던 농경의례이자 축제로서, 두레꾼을 주축으로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풍물 치고 논다. 호미씻이는 농작업의 전환을 뜻한다. 이때 “부자는 많은 음식을 제공하고, 가난한 농민과 머슴은 대체로 얻어먹는 형상을 취”한다. 셋째, 상여계를 주도했다. 이는 향도의 전통을 이어받고 촌계의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의 성격을 보여준다. 넷째, 마을공동체의 동제를 주관했다. 두레꾼의 일부는 윤번제로 제관을 맡고, 나머지는 풍물패 등으로 동제의 분위기 고조시켰다. 이것도 촌계에서 분화·파생된 증거의 하나다.


결론

1. 두레의 결성·운영방식은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두레는 향도, 촌계 등과 같은 지연공동체의 전통에서 출발해 조선시대 군사문화의 전통을 원용하여 형성된 강제성을 띤 목적 공동체이다.

2. 두레는 이앙법과 도맥 2작 체계의 확산에 따라 노동력을 집약시킨 노동공동체이다.

3. 두레는 놀이공동체이자 의례공동체이다.

이렇듯 두레는 지연·노동·의례·놀이공동체로서, 종래의 다양한 사회제도와 관습, 문화요소들이 결합되어 형성된 문화복합체이다.




논평


이 논문은 필자의 지적처럼 그동안의 두레 연구가 “다양한 문화요소가 하나의 뭉치를 형성하고 있다는 현상적 접근”에만 주목하고 다루지 않은 두레의 문화적 전통의 형성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크게 “노동력 동원 형식으로 본 두레의 문화적 성격”과 “활동과 기능으로 본 두레의 문화적 성격”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그를 통하여 두레가 형성될 수 있었던 문화적 전통인 향도와 촌계의 역할, 두레의 계급적 성격 및 군사문화의 영향을 명확히 하고, 두레 특유의 성격을 논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런데 필자는 두레가 실제로는 지주층이나 상농층이 더 이득을 보는 제도였고 두레꾼은 어쩔 수 없이 참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지적하는데, 거꾸로 지주층이나 상농층도 어쩔 수 없이 참가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다시 말해 향촌지배층도 두레를 통해 농업생산성 증가와 경제 성장이란 혜택을 입는 계층의 하나로서, 두레를 적극적으로 결성하고 운영하지는 않았는가? 또한 ‘마당매기’와 ‘호미씻이’에서 하는 그들의 역할 ―음식과 금전의 제공 등― 을 두레의 한 동력으로 볼 수는 없으며, 그들에 의한 부의 재분배라는 측면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필자는 “모든 지주층의 농업경영 실태를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칠곡과 임천 지역의 답작 사례를 통해 작인의 시대별 신분 구성을 분석한 다음과 같은 자료를 제시한다.


칠곡 지역과 달리 임천 지역에서는 18세기 전반에도 이미 노비작인이 거의 없었다. …… 노비제 해체의 물결은 18세기 전반에 이미 主家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휩쓸고, 18세기 중·후반이 되면 주가 인근까지 밀려왔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분석이 옳을지도 모르나, 충주는 칠곡에 비하여 중앙정계로의 진출을 노리거나 좌절된 쇠락해가는 양반층이 더욱 많이 살던 지역이라는 점 때문에 ‘노비작인이 거의 없었’고, 또한 주가에서 멀리 떨어진 조건 때문에 노비작인보다는 자소작농을 작인으로 더 선호했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칠곡 지역에서도 노비작인의 비중이 1733년 65%에서 감소했다가 1781년 다시 61%까지 증가하는 등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필자의 노비작인이 감소한 반면 병작자가 된 양반·상민의 수가 차츰 증가했다는 근거로는 제시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17~18세기 삼남지방에서 일반화되었다고 보는 도맥 2작 체계가 중부 이북, 특히 황해도와 영동 이북 지역에서는 충분히 이루어졌으리라 본다. 정치적 상황 등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지만, 이후 그 지역의 두레란 조직의 존재 유무 및 형태와 특성 등도 함께 포괄하여 다루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두레가 군사조직의 운영방식을 채택한 직간접적인 원인의 제시와 분석은 뛰어나며, 앞으로 더욱 집중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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