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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지나는 고속도로에는 시간에 따라 막히는 구간이 거의 정해져 있다. 각오를 하고 천천히 지나다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챙 넓은 모자에 마스크로 얼굴 가린 사람들. 훔친 카드로 현금 찾으러 현금인출기 앞에 모습을 드러낸 범죄자 같은 행색으로 뻥튀기나 오징어를 파는 그들은 햇볕과 매연을 극도로 경계하는데, 소용 있을까 싶다. 차가 막히는 틈에 장사한다지만 돈 받고 물건을 건네면서 거스름돈을 내주려 이리저리 뛰는 그들이 오히려 도로를 막히게 하는 건 아닐까. 어쩌다 순찰대가 보이면 차선을 가로질러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그들의 건강은 내내 괜찮을지.

 

고속도로와 접속되는 도로 한쪽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좌판이 있다. 신호대기하는 자동차를 상대로 바나나를 파는데,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가 1루에서 사용하는 야구 글러브를 두개 엎어놓은 듯 커다란 바나나 한 송이가 오전에 3천원, 오후면 2천원이다. 한 송이만 사도 온 가족이 실컷 먹을 것 같은 바나나. 멀지 않았던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다. 1980년대 초, 생태조사를 위해 제주도로 간 대학원생은 호주머니와 한참 상의를 한 후 달랑 한 쪽을 사서 일행과 나누어먹었다. 대학 등록금이 지금의 10분의1도 되지 않았던 당시 5백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산 바나나는 제주도의 한 온실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1980년대 말, 그 대학원생은 미국에 갈 일이 있었다. 부자나라라 그런가. 그리 고급도 아닌 호텔의 로비에 바나나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마음대로 방에 가져가도 된다는 게 아닌가. 주위 눈치도 살펴야하니 딱 한 송이만 가져갔는데, 호텔을 옮길 때까지 시커멓게 변한 바나나를 몇 쪽 먹지도 못했다. 맛난 음식 먹을 일 많은 일정 중에 바나나에 미처 손이 가지 않았던 거다. 그 후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도 바나나가 흔해졌다. 흔해서 그런 건 아닌데, 웬만큼 배고프지 않으면 식품매장에 쌓인 바나나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참 좋은 식품임에 틀림없지만 좀 찜찜하다. 생산지에서 먼 길 수송되는 과정에 흥건히 뿌렸을 농약이 과육에도 스몄을 것 같다.

 

다년생 풀에서 재배하는 만큼 과일이라기보다 채소에 가까운 바나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농장에서 껍질이 파란 상태에서 출하돼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우리 고속도로 입구에 잔뜩 포개져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전문가는 멸종위기를 점친다. 품종이 지나치게 단순해 변화된 환경에서 여전히 재배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거다. 너나 할 것 없이 다수확 품종만을 심어 곳곳에 널렸어도 지구온난화로 재배 환경이 바뀌면 일거에 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유전적 다양성이 협애해진 요즘의 바나나는 머지않아 다시 선망의 대상으로 바뀔지 모른다.

 

사탕수수와 담배가 여전히 유명한 쿠바는 한때 그 사탕수수와 담배 때문에 굶주려야 했다. 몇 가지 안 되는 품종을 획일적으로 광활하게 심는 ‘단작’(單作, monoculture)이 원인이었다. 비옥한 땅의 끝에서 끝까지 사탕수수와 담배를 심은 쿠바의 농장을 소유했던 미국의 농업 자본은 지금부터 50년 전 아바나에 입성한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끌던 혁명군에 쫓겨 혼비백산 탈출하기 바빴고, 쉽게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미국에 주저앉아야 했다. 독재정권의 착취에 진저리를 친 민중이었기에 혁명세력에 대한 지지가 워낙 단단해 막강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군의 몇 차례 침입도 소용이 없었지만, 경제 사정이 이내 호전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턱밑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묶어두려는 소련에서 사탕수수와 담배를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구입했던 거다.

 

그런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은 재빨리 경제 봉쇄에 나섰고 판로가 막힌 사탕수수와 담배를 식량 대용으로 쓸 수 없는 쿠바는 굶주림을 한동안 감내해야 했다. 오로지 사탕수수와 담배만을 재배하다 호되게 혼난 쿠바는 지금 대부분의 식량을 자급자족한다. 아바나 곳곳에 유기농장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면서 건강도 자존심도 회복되었다고 한다.

 

호주에도 사탕수수를 끝 간 데 없이 심었다. 호주에 원래 사탕수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사탕수수 잎을 갉아먹는 해충이 있을 리 없지만 나타났다. 천지사방이 사탕수수로 가득하니 어떤 풍뎅이가 건드려 보았을 거고, 달짝지근한 게 먹을 만하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중간 중간에 다른 작물을 심었다면 풍뎅이는 그렇게 늘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청정한 습기가 보전되었다면 개구리가 풍뎅이를 먹으며 늘었을 테고,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다가온 뱀과 족제비도 풍뎅이를 조절했겠지만 오로지 사탕수수만 심은 관계로 한 번 맛들인 풍뎅이는 사탕수수밭에서 제 세상을 만끽했던 게다.

 

풍뎅이가 눈에 띄게 늘자 살충제를 뿌렸던 농장주는 해마다 보강시킨 살충제도 소용없게 된 순간을 맞아야 했다. 알을 많이 낳는 풍뎅이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독성을 이겨내고 있었던 거였다. 독성을 갱신한 살충제는 엉뚱하게 남았던 개구리를 몰아냈고, 개구리를 먹던 다른 동물도 쫓아냈으니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농장주는 하와이의 수수두꺼비를 들여오기로 했다. 과연 덩치가 축구공 반 만한 그 두꺼비는 풍뎅이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고 걱정은 드디어 물 건너가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데에서 그만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엔 호주에 천적이 없는 수수두꺼비가 막대하게 늘어나는 게 아닌가.

 

경사가 심한 하와이에서 엉금엉금 기는 습성을 지닌 수수두꺼비는 평지인 호주에 오자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사탕수수밭에서 풍뎅이를 원 없이 잡아먹으며 집단을 키운 그 두꺼비는 떼를 이뤄 움직이는데, 멀리서 보면 땅이 들썩이는 듯해,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 정도였다. 풍뎅이로 양이 차지 않자 토종 곤충과 희귀한 개구리까지 먹어치우는 바람에 여간 골칫거리가 아닌 수수두꺼비를 주목하지 않던 언론은 악어가 죽자 난리를 쳤다. 당국은 뭐하냐는 거였다. 처음 보는 통통한 두꺼비를 냉큼 삼킨 호주 특산 크로커다일 악어가 수수두꺼비의 피부 독에 중독돼 자빠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는 수 없어 수수두꺼비 두 마리에 생맥주 한 컵을 경품으로 내놓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아무리 할일 없는 주당이라도, 일단 취하면 더 잡으려들지 않았던 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당국은 유전자조작 기술로 불임유전자를 삽입해 멸종으로 유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글쎄, 농작물에 대한 유전자조작도 대단히 어려운데, 수수두꺼비에 대한 유전자조작이 쉬울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그 뒤가 더 걱정일 수 있다. 조작된 유전자가 악어에 삽입된다면? 수수두꺼비를 회피해야 한다는 각인이 악어의 뇌리에 박히지 않는다면 사탕수수를 끝 간 데 없이 심도록 허용한 호주 당국은 악어마저 멸종될 우려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어디 악어에서 그치겠는가.

 

청송과 영양에서 오래 생산해 유명해진 청양고추는 청양에도 심지만 회사에서 구입해야 하는 씨앗의 유전자는 극히 단순해졌다. 고추를 비롯해 우리나라에 심는 대부분의 채소 씨앗의 사정이 그렇다.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씨앗을 넓게 심은 농부는 로또하는 기분이 들겠다. 수확이 모 아니면 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이 좋았는데 수확을 앞두고 질병이 돌면 일거에 못쓰게 되는 마술.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에 심으면 탈이 없지만 비용이 들어가 원가가 상승한다. 다른 농토에 질병이 돌고 나만 괜찮아야 로또에 당첨될 수 있는데, 운이 좋을 때는 그리 많지 않다.

 

유전자가 단순한 씨앗은 한꺼번에 꽃피고 열매를 맺으니 그때 농부는 몹시 바빠야 한다. 때를 놓치면 허탕이니 인건비가 적지 않게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에 거액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하우스용 딸기가 그렇다. 스페인에서 재배하는 유럽의 가지가 그렇다. 그렇게 ‘소품종 다량생산’으로 수확한 가지를 보조금 받아 원가를 낮춘 다음에 수출하면서 사단이 났다. 지역 특산 가지들이 자국 시장에서 추풍낙엽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한데, 지역 농부들의 파산을 부른 소품종 다량생산은 인큐베이터처럼 재배 환경을 통제하는 거대한 비닐하우스에서 싹틀 뿐이다. 지구온난화로 환경이 바뀌면 사라질 가능성이 지역의 가지에 비해 현저히 높다.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씨앗이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원시림 지대를 흐르는 커다란 강은 물이 항상 많고 맑아 그냥 떠 마실 수 있다. 아니 있었다. 아마존 숲을 끝 간 데 없이 불태워 콩을 심기 전까지 그랬다. 아직 공식적으로 유전자조작 콩은 아니라지만 분명한 건, 그 콩의 유전적 다양성도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재배 방식은 제한적일 테고, 살충제와 제초제가 적지 않게 들어갈 게 틀림없다. 원시림에서 사냥하며 식솔 먹였던 터전에 광활한 콩 농장이 들어서자 원주민은 사냥감만 잃은 게 아니다. 마실 물마저 말라버렸다. 웅덩이에 고인 물에는 비행기에서 살포한 농약이 뿌옇게 스몄는데 등에 업힌 아이와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은 목마르다 아까부터 보채니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흙탕을 가라앉힌 물통에서 뿌연 물을 한 컵 떠 주자 허겁지겁 마시는 아이들. 그들은 전에 없던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속절없이 죽고, 미국을 제친 브라질은 세계 최대 콩 수출 국가로 화려하게 등극했다.

 

옥수수가 원산지인 멕시코에서 원주민의 주식은 당연히 옥수수다. 옥수수를 갈아 반죽한 또르띨라를 화덕에 만두피처럼 둥글게 구워, 다진 풋고추와 잘게 자른 양파와 으깬 토마토를 넣고 말아서 먹는다. 그 3가지를 멕시칸소스라고 말하는데, 멕시코 국기는 초록색과 흰색과 붉은색으로 구성돼 있다. 멕시코에 일찍이 옥수수가 없었다면 마야도 잉카도 찬란한 문명을 꽃피울 수 없었다. 멕시코 원주민은 개구리를 신격화한다. 개구리가 있는 곳에 물이 있을 거고, 물이 있다면 옥수수를 재배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멕시코 원주민들은 옥수수를 가축에 함부로 먹이지 않는다. 성스러운 곡물이기 때문이다.

 

옥수수에 포함되는 탄소는 다른 곡물의 탄소와 동위원소가 다르다. 학자들은 탄소동위원소를 측정해 옥수수 섭취량을 국가 별로 비교한다. 아침에 우유를 부어 먹는 옥수수 가공식품 이외에 식단에 자주 옥수수 요리를 올리지 않는 미국인을 멕시코인과 비교했더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쓴 마이클 폴란이 “걸어 다니는 콘칩”이라고 해야 할 지경으로 미국인이 옥수수를 많이 먹는다는 게 아닌가. 원인은 음료수에 들어가는 옥수수 시럽과 고기였다. 미국에서 사육하는 대부분의 가축은 옥수수 사료를 먹는다. 그것도 유전자가 조작된 걸로.

 

하늘에서 보아도 끝이 없는 밭에서 걷은 옥수수의 양은 실로 막대한데 대부분 가축사료로, 일부가 시럽으로 가공되고 일부는 수출된다. 과학자의 성과로 옥수수 시럽의 당도가 설탕보다 높아지면서 가격까지 저렴해지자 코카콜라를 필두로 옥수수 시럽으로 설탕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부분의 음료수는 옥수수 시럽으로 단맛을 낸다. 그렇게 기업 수익을 늘린 음료수는 비만을 부추기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미국을 비롯한 북중미와 유럽의 많은 국가가 그렇다. 일회용 1리터 용기를 구입하면 대형 매장의 문을 나서기 전까지 몇 번이고 리필이 가능한 까닭에 가난한 이가 선택하게 된다. 옥수수는 고기의 값도 크게 낮췄다. 원료를 궁금하게 하는 다진 고기는 싱싱한 채소보다 가격이 쌀 뿐 아니라 갈증마저 부추긴다. 서구의 비만은 역설적으로 가난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민족 대 이동 현상이 전국에서 연출되는 추석, 혼자 사는 어떤 이는 반드시 차를 몰고 고향에 간다. 시골의 부모님이 이런저런 농산물을 잔뜩 싸주기 때문에 열차를 이용할 수 없다고 너스레떠는데, 멀지 않았던 과거, 우리 농촌이 다 그랬다. 이른바 ‘다품종 소량생산’이다. 지난 가을에 갈무리한 온갖 채소와 곡식의 씨앗을 여기저기에 심어 계절에 따라 다양한 풍미를 맛볼 수 있게 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은 해충 피해를 최소화할 뿐 아니라 가족의 영양을 높였고 무엇보다 자급을 가능하게 했다는 게 자랑이었다. 환경이 변해 어떤 곡식의 소출이 줄면 다른 곡식이 잘 돼 벌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곡식도 품종에 따라 심는 장소도 날짜가 달랐다. 50의 나이에 철학교수를 그만둔 초보 농사꾼인 윤구병은 《잡초는 없다》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한다. 할머니에게 콩 심는 시기를 물으니 “그 손 펴봐!” “그건 감꽃 필 때 심고, 저쪽 손!” “그건 감꽃 질 때 심는 거여.” 했다는 거다. 오랜 개성을 간직한 삼라만상의 생명에 곡식과 잡초가 따로 나누어질 리 없다는 걸 윤구병은 깨닫는다. 미안한 마음으로 곡식만 골라 심지만 개성을 배려하면 몸도 마음도 생태계도 건강하다는 걸 배웠다.

 

단작은 씨앗과 지역의 문화와 개성을 무시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토지의 환경이 다르건만 단작은 오로지 그 씨앗에 맞는 경작 조건을 요구한다. 만일 유전적 다양성의 폭까지 좁다면 경작 방식은 더욱 협애해지고, 유전자마저 조작했다면 환경변화에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씨앗은 동네 어른이나 선배의 충고를 배척한다. 종자회사의 매뉴얼을 잘 살펴야 로또에 당첨될 자격을 허용할 따름이다.

 

단작은 지구온난화를 맞을 후손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바뀐 경작 환경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단작의 유혹에 길들어 조상이 다채롭게 물려준 전통 씨앗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늦기 전에 획일적 편의에 길들여진 타성을 다양성으로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개성이다. 농작물에 국한하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출처 : 녹색평론 전국 독자모임
글쓴이 : 디딤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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