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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령방어를 주장한 김여물 장군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만 했어도
탄금대 전투와 같은 대패는 없었을 것......

김여물은 순천 사람으로 찰방 김훈의 아들이다. 자는 사수요,호는 파구라 했다.
명종 3년(1548)에 태어났으며 나이 20세에 진사가 되고 선조 10년(1577)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낭관으로부터 출발하여 충주도사(都事)가 되었다.
풍채가 준수하여 여럿 가운데 뛰어나서 당시의 호걸로서 그를 앞설 사람이 없었다 했다. 상국 박순기가 나라에 큰 일을 할 인물임을 알고 마음으로 그를 중하게 여기고 알맞는 길로 인도했으며 그를 맞이할 때는 반드시 손님으로 예를 다했다 한다. 추천을 받아 의주목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임진년 봄에 역인(譯人)의 죄에 연루되어 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는 김여물의 재주와 용맹이 아깝다고 생각하여 옥에 갇혔던 것을 풀어주고 방어가 긴요한 곳에 귀양보내어 공을 세우도록 하였다. 김여물이 출옥하자 유성룡이 불러서 나라의 위급함을 서로 이야기하여 보고는 크게 기특히 여겨 왕에게,
"신이 처음 김여물을 보고 병사를 의논해 보니 무용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으니 청컨대 막하에 두고 그 계획의 도움을 받게 하소서.."
하고 아뢰니 왕도 그를 허락하였다. 이 때 신임이 도순변사에 임명되고 용약 싸움터로 나아갈 때에 왕에게 또한 아뢰기를 ,
"신이 일찍 서도에 병사로 가 있을 때 여물을 알았는데 단지 재주와 용맹뿐만 아니라 충성과 의리가 있는 선비이니 신의 부하로 임명해 주소서"
하자, 왕이 또한 허락하니 김여물은 유성룡의 막하에서 신립의 부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왕은 조정관원에게 명하여 각각 말 한필씩을 내주도록 하였다.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서 매복 작전을 주장.

김여물은 신립과 더불어 길을 재촉하여 4월26일 충주에 도착하였다. 김여물은 조령으로 달려가서 그 형세를 깊이 살펴보고는 신립에게,
"적의 세력은 우리의 몇 배가 되니 이들의 예봉을 꺾기 힘듭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막기 위해서는 천험의 요새인 조령을 막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군사를 고개 양편에 매복시켰다가 이를 치면 가히 적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설사 적을 막지 못하더라도 서울까지 퇴각하여 방어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 의견을 폈다. 막료들은 대부분 김여물의 의견에 찬성을 하였으나 신립은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적이 벌써 재를 넘어 28일에는 길을 나누어 크게 밀어 닥쳤다. 김여물은 또한번 "먼저 고지를 점령해서 역습을 합시다"
하고 신립에게 의견을 제시하니 끝내 신립은 듣지 않고 탄금대를 뒤로하고 충주 분지를 향해서 배수의 진을 치기에 이르렀다.
전투가 벌어졌다. 적은 세 방향으로 밀고 들어와 아군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싸움이 처음 어울리면서 아군은 모두 흩어져 장수와 졸병이 겁결에 모두 달래강물에 뛰어들자 적은 칼로 마구 찍어 물에 뜬 아군의 시체가 강을 메웠다.


그대를 살려 볼까 하오..
......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

신립은 죽음을 각오한지 오래지만 그의 뜻을 펴보지 못함이 한스러웠다. 그는 김여물을 돌아보며 "그대를 살려 볼까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이미 김여물은 패할 것을 알고 아들에게 보낼 편지를 다음과 같이 썼다.
"3도에 근왕하는 군사가 한 삶도 없어 우리가 아무리 불러도 돕는 이가 없구나.남아가 나라일에 죽는 것은 직분이거니와 단지 나라의 수치스러움을 씻지 못하고 장한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 된다."
왜군은 미친 물결처럼 한꺼번에 솟구쳐 나오고 있었다. 신립은 창황한 가운데 급히 조정에 사세를 알리는 장계를 김여물에게 지으라고 하였다.
김여물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팔에는 활을 메고 허리에는 전통(箭筒)을 찬 채 붓을 놀리니 싹싹 소리가 났다고 한다.
다 쓰고 붓을 던졌는데 한 자도 틀림이 없으니 군중에서 보는 사람마다 놀라워 하였다. 위급과 경황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침착하고 담대하며 마음의 여유가 충만한 인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김여물은 신립과 더불어 적진으로 돌진하여 좌충우돌 왜병 수십명을 쳐서 거꾸러뜨리고 돌아와 북쪽을 향해 크게 절을 하고는 탄금대를 끼고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때 김여물의 나이 43세였다.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정조 12년(1788)에 장의(壯毅)라 시호했다.

忠臣贈領議政金公神道碑銘
(충신증영의정김공신도비명)

찬(撰):김상헌(金尙憲)
전(篆):이정영(李正英)
서(書):김좌명(金佐明)
연 대 :1662년(현종1)
소재지:경기도 안산시 와동
김여물(金汝물 1548~1592)은 조선시대의 충신으로 자(字)는 사수(士秀), 호(號)는 피구자(披구 子),외암(畏菴)이고, 본관은 순천(順天),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훈(壎)의 아들이며 영의정(領議政) 류의 부친이다.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서인(西人) 정철(鄭澈)의 당(黨)으로 몰려 파직 투옥되었다가,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왕의 특명으로 충주(忠州)의 방어를 나섰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새재(鳥嶺)의 고수를 주장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았고, 마침내 왜적에게 새재를 내주고 말았다. 또 불리하면 중앙으로 가서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으나 신립은 또 듣지 아니하였으니, 김여물은 미리 패할 것을 알았다. 우리 군사가 패하자 신립이 김여물에게 묻기를, "공은 살기를 원하오" 하니 김여물은 웃으며 "내 어찌 죽음을 아끼리오" 하고, 함께 탄금대(彈琴臺) 아래 이르러 적 수십 명을 죽이고 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이 때 공의 나이 45세였다. 이듬해 의관을 거두어 안산(案山) 동장리(洞長里)에 장사지내고 정려를 세웠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현 안산시 와동에 소재한 김여물의 신도비(神道碑)에는,「무릇 충신(忠臣), 열사(烈士)가 나라를 섬김은 국난(國亂)을 당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인(仁)을 이루는 데 있다. 하늘의 명 또한 위훈(偉勳)과 환업(煥業)으로써 그 자손을 반드시 창성하게 하니, 이것은 마치 상하가 서로 주고 받으면서 보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는 크게 밝아 조그마한 착오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군자는 이로써 천리(天理)가 없다고 탄식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글귀로 시작한 비석에는 그의 대인(大人)으로서의 공평무사한 행적이 새겨 있다.
김여물의 신도비 옆에는 1968년 세운 아들 영의정 김류의 신도비가 나란히 서 있고,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 있는데, 이것은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여물의 후실 평산신씨와 며느리 진주유씨, 손자 며느리 고령박씨, 증손자 며느리 진주정씨 등 4대가 가문을 위해 바다에 투신 순절하자 나라에서 내린 열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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