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22일. 안산의제21에서 기획한 대부도 생태투어 일정에 참여했다. 그 일정의 하나인 동주염전을 방문했는데, 그전부터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던지라 더욱 좋았다. 특히나 지금 보고 있는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가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여 더 뜻깊었다. 염전과 관련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벗(소금 굽는 가마)은 이 섬에는 100군데 있다. 그것들의 권리를 가진 10명 정도의 자본가가 사는데, 이들이 자본을 제공한다. 대부분 마을마다 있다. 1벗은 2칼반이 보통이다. 1칼반의 넓이는 1000평 정도다. 1칼반은 5명이 경영하고, 한 달에 20섬 정도의 소금을 만든다. 소금은 거간꾼이 사모아서 마포에 보낸다. 마포에는 소금 창고가 있다(소금과 물고기 거간꾼을 중상仲商이라 함). 가장 왕성할 때는 20년 전이었는데, 그 뒤 점점 쇠락했다. 간척의 장려와 노동력, 땔나무가 비싸졌기 때문에 빠르게 쇠락했다. 지금은 다섯 염막 10칼반 정도 있다. 현재 동리東里에 남아 있다. 그곳은 매립지로서 염분의 농도가 문제된다. 동리의 웃동네 앞에 남아 있다.
벗은 모두 국유지여서, 간척할 경우에는 나라에서 국유지를 돌려받기 위하여 벗을 가진 사람에게 권리금으로 1칼반에 200원을 주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벗은 빠르게 쇠퇴했다.
섬의 농사땅은 1호에 3600평(1町2反) 정도다. 벗이 폐지되어도 다른 곳으로 나간 사람은 적었다. 그리고 그때는 일반적으로 소금밭에서 열심히 일하여 농사는 오히려 부업 정도로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때 농사는 아주 엉성했다. 그 뒤 화학비료를 쓰고 벗이 사라지면서 노동력이 많아져 농사가 그런 요인들 때문에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얼마쯤 떨어졌을 것이다. 요컨대 벗의 폐지에 따른 과잉 인구는 섬의 농사에 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그 시절부터 대부도의 소금은 유명했다. 그때는 가마에 굽는 소금이었는데 지금은 그 생산방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대부도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동주염전. 주안염전, 대부염전, 소래염전이 옛날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이곳들을 서로 이으면 수인선 협궤열차의 선로와 일치한다. 일제는 철저히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조선을 발전시켰다.
동주염전의 대표이신 백승근 님의 말에 따르면, 소금의 생산방식으로는 현재 장판식과 토판식, 타일식이 있다고 한다. 장판식은 장판을 깔아서 소금을 만드는 방식인데, 생산량은 많아지나 맛은 물론 인체에 해로운 요소가 생긴다. 그래서 그런 장판을 걷어내고 요즘 토판염이라는 새로운 소금이 유행하고 있는데, 염도도 그렇고 맛도 타일식에 비해 떨어진다. 그래서 동주염전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은 타일식인데, 이 방법이야말로 펄을 살린 좋은 소금 생산방식이라고 한다.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는 것으로 강한 자부심을 가지신 백승근 님.
염전 옆에 있는 수로. 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들었다. 염전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의 땀방울이 대대로 쌓여 있는 공간이다. 소금이 짠 것은 그들의 땀이 서려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타일식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밑에 시멘트를 바르고 그 위에 타일을 붙인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펄흙을 잘 다진 다음 옹기를 만들 듯 구운 타일을 펄에 하나하나 붙인 것이 바로 타일식 염전이었다.
이런 타일을 바닥에 하나하나 붙인다. 그렇게 붙이면 어지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펄흙이 시멘트보다 단단하게 굳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펄흙을 단단히 다지는 데 쓰는 도구. 테니스장을 다지는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직접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이건 돌덩어리 같다. 염전의 둑은 말할 것도 없고 돌을 쌓을 때도 모두 이 펄흙을 쓴 것을 볼 수 있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염전의 생김새는 잘 정리해 놓은 논과 비슷한데 그 안에 담긴 물도 그 형태를 만드는 흙도 판이하게 다르다.
시멘트를 발라 놓은 듯한 염전의 둑. 언제 둑을 칠 때 한 번 와서 봐도 재밌겠다.
소금은 4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렇게 5월 중순부터 7월까지가 가장 소금의 생산량이 많은 철이고, 8월이 되면 오히려 소금을 만들기 좋지 않다고 한다. 요즘은 아예 손을 놓고 지내는 때인데, 염전에 물을 받아 놓은 것은 내년에 다시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 일부러 받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논처럼 벼를 수확한 다음 말려 놓는 게 좋지 않은가 보다.
내년에 좋은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묵히고 있는 소금밭.
소금을 만들려면 먼저 바닷물을 끌어와야 한다. 바닷가에 둑을 만들어 저류지라는 곳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모아 놓는다. 그걸 펄흙을 이용하여 낸 물길을 통해 소금밭 사이에 있는 둠벙 같은 곳에 모아야 그걸 이용해서 소금을 만들 수 있다. 소금밭의 둠벙에서는 무자위나 용두레를 이용하여 소금밭으로 물을 옮긴다.
소금밭에 들어가는 물을 책임지는 둠벙 같은 곳. 지금은 무자위나 용두레 대신에 경운기 엔진을 활용한 양수기를 쓴다.
꼼꼼하게 잘 연결되어 있는 소금밭의 물길.
그렇게 1차 증발지로 들어간 바닷물은 쨍쨍한 햇빛을 받은 다음, 다시 2차 증발지를 거치면 마침내 소금이 오는 그날을 맞는다.
소금을 만드는 것은 강렬한 햇빛과 염부들의 굵은 땀방울, 그리고 위처럼 고무래와 같은 도구이다.
소금이 오면 소금 창고에 잘 쟁여 놓고 간수를 뺀다. 직접 찍어 먹어 보니 그리 짜지 않고 달달한 맛이 느껴진다. 백승근 님의 말을 들으니 동주염전의 소금은 염도가 74% 정도라고 한다. 중국산은 90%가 넘어 그 소금은 짠맛밖에 나지 않는다며, 동주염전의 소금을 자랑하신다. 확실히 이 소금은 다르다.
염전 바로 옆에 소금창고를 두어 손쉽게 운반해 저장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염전에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제 염전 일도 다른 힘든 일처럼 젊은 사람은 하지 않으려고 한단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할아버지들이었다. 그 맥이 끊기는 것은 이제 곧 다가올지도 모른다. 또한 기상 이변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폭우가 자주 쏟아져 생산량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고부가가치의 일로 만드는 것이 요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하신다.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이곳에 찾아와 소금을 취재했을 만큼 대부도에서는 소금이 참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걸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하나 이곳에 서 있다.
일제시대에 지은 염전 관리사무소. 우리나라에 천일염을 전파한 것이 일본이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마에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이 전부였는데, 그건 품질이나 맛이 지금의 방식보다 떨어진다고 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되어 곧 쓰러질 것 같다. 이런 건물을 잘 살려서 현장학습이나 체험학습 때 이용하면 좋지 않을까?
1층 내부의 모습.
소금기 가득한 땅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소금밭 주변에서는 함초를 자주 볼 수 있다. 빨간 함초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은 단풍 못지않게 예뻤다.
지난 2013년 4월 27일, 아내와 함께 대부도를 지나는 길에 동주염전에 들렀다.
봄의 염전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더욱 황량했던 것은 염전 관리사무소 건물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흔하지 않은 역사적 유산이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또 하나 사라져 버렸다.
그저 안타깝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더 무어라고 할 말이 없다.
염전 관리사무소가 있던 자리는 철거된 건물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이걸 잘 살리면 좋은 소재가 되었을 법한데 거기에까지는 여력이 미치지 못하였나 보다. 동주염전은 이렇게 경쟁력을 잃고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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