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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어렵다.
오늘은 뉴욕타임즈에 실린 북미 자유무역 협정과 멕시코의 건강 문제에 관한 글을 보았다. 자유무역협정으로 멕시코는 분명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렵다.

지금 이 순간, WTO 협상이 한창인 아르헨티나의 어느 도시에서 그에 반대하는 시위도 열리고 있다.

뱀다리... 그런데 지난번 미국 농민들의 자살 문제에서도 그렇고, 멕시코도 80년대에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고 한다. 한국은 나름 80년대가 번영의 시대였는데 세계 경제는 안 그랬나 보다. 경제사에 어두우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관련 자료를 뒤적여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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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Ruiz Sánchez 씨는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햄버거를 굽고 페퍼로니와 치즈를 넣고 핫도그를 튀기며 지낸다. 코카콜라가 제공한 냉장고와 소방차 같이 빨간 식탁에는 그 음료수를 독점 판매하는 대신 회사의 상표가 찍혀 있다. 


Ruiz 씨의 가족은 여기에서 밥을 먹기도 하지만, 도미나 피자나 맥도날드에서 더 자주 식사를 한다.  점심 간식으로 Oxxo에서 도리토스(옥수수칩)나 치토스를 구매한다. 그곳은 영양학자와 공중보건 지지자들이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옥소스(San Cristóbal de las Oxxos)의 도시라고 조롱하듯이 이야기하는 편의점이다. 


이 가족이 식당은 운영한 건 1960년대부터이다. Ruiz 씨의 할머니가 인근 농장의 농산물로 타말리와 집에서 만든 음식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와 똑같은 식재료로 채소 스튜와 콩, 또르띠야, 달걀 등을 만들어아이들을 먹였다. 고기는 사치였다. 


그 이후 Ruiz 씨 일가는 그들을 포함해 수백만 멕시코인들이 식생활 관련 질병을 얻게 된 국가의 먹을거리 체계 변화의 와중에 소비자이자 참가자가 되었다.


몇몇 영양학자들이 과소평가되었다고 하는 원인인 자유무역으로 인한 격심한 변화이다.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루이즈 씨 식당에서 포장된 중국음식을 먹는 가족들.  William Ruiz 씨가 왼쪽, 그의 형 Gabriel 씨가 가운데, 아버지인 Gabriel 씨가 오른쪽에 있다.




왼쪽부터 Gabriel Ruiz, William Ruiz 씨와 가브리엘 씨의 딸 Emily.




멕시코는 1980년대 관세를 철폐하고 더 많은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기 시작했고, 멕시코가 미국, 캐나다와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을 제정한 1994년 자유무역으로 전환했다.  멕시코에서 반대하던 사람들은 문화적, 경제적 독립성을 잃어버릴 것이라 경고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식단과 먹을거리 생태계가 미국의 그것처럼 점차 바뀔 것이라는 비판은 거의 없었다.  워싱턴 대학 건강 측정 및 평가 연구소(Institute for Health Metrics and Evaluation)에 의하면, 1980년에는 멕시코인의 7%가 비만이었는데 2016년에는 그 3배인 20.3%로 증가했다.  세계보건기구는 현재 멕시코에서 주요한 사망 원인인 당뇨병으로 1년에 8만 명이 사망한다고 보고했다. 


터프츠 대학과 작은 행성 연구소(Small Planet Institute)의 전문가 Timothy A. Wise 씨는 많은 멕시코인들에게 나프타Nafta는 “현대 경제에 합류하는 열망”을 이루어줄 약속이었다고 한다.  “예전 농촌의 노동자 모두는 나프타 이후의 세상에서 급성장하는 제조업 분야의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멕시코가 ‘제1세계’가 된 것은 식단뿐이었다.”


이 현상은 멕시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유무역은 서구의 영양이 부족한 가공식품의 확산을 가속화한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이며, “중국과 인도, 기타 전세계의 개발도상국에서 비만의 유행을 추동하고 있다”고 하바드 대학 공중보건대학(School of Public Health)의 T.H. Chan 씨는 지적한다.


그러나 멕시코의 해당 조약 부협상가인 Jaime Zabludovsky Kuper 씨는 나프타가 비만의 원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 대신 먹을거리의 가격을 낮추고, 영양불량을 감소시켰다고 한다. 정부의 자료에 의하면멕시코 아동의 6.2%가 심각한 영양불량으로 고생했는데 2012년에는  1.6%로 급격히 감소했다고 한다. 


Zabludovsky 씨는 멕시코인들이 오랫동안 미국의 먹을거리에 이끌려 왔는데, 높은 관세로 비싸서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현재 경제는 더욱 안정되었고, 멕시코인들이 더 오래 살게 되면서 그것이 당뇨병과 심장병 같은 비전염성 질병으로 사망하는 원인이라고 한다.  “그것은 번영의 상대적 증상이다”라고 했다. 


나프타에 대한 광범위한 찬반 양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폐지 위협과 함께 정밀조사가 증가하고 있다.  주요한 수혜자에는 개방된 시장에서 엄청난 이익을 얻은 미국의 농장과 식품 소매업체 들이 있다. 멕시코는 미국으로수출하는 양이 급증했고, 멕시코의 경제 구조는 더 안정적으로 진화했다. OECD에 의하면 국가의 실업률은 대체로 일정했지만, 평균임금은 1994년 1만6008달러에서 2016년 1만5311달러로 떨어졌다.


나프타의 비판자들은 비만의 원인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자유무역이 멕시코의 고립된 경제를 개방함으로써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국가간 관세를 크게 낮추는 외에도, 나프타는 수십억 달러를 들여와 멕시코에 직접 투자하는 외국인으로 인해 미국의 패스트푸드점과 편의점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값싼 옥수수와 육류, 고과당옥수수시럽 및 가공식품에 문호를 열었다.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의 한 학교식당. 청량음료는 금지되어 있지만, 다른 많은 설탕 및 고칼로리의 음식은 이용할 수 있다. 




선진국으로부터 농업 투자가 급증하자 멕시코의 농법은 근대화되었지만 가족농장에서 일하던 약 500만 명의 사람들이 농지에서 추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며 서구식 가공식품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멕시코의 상위 두 식료품 체인점과 최고의 요식업 매장은 미국인이 지원하거나 월마트, 서브웨이, 피자헛 같은 기업과 협력 관계이다.  편의점 체인인 옥소Oxxo는 외국인의 투자금이 수억 달러에 달하는 멕시코의 식음료 대기업 Femsa가 소유하고 있는데, 1990년 400개의 매장에서 1만6000개로 성장하는 데 그 도움을 받았다. 


루이즈 씨 일가는 가족농장에서 도시로 이주하여 새로운 미국식 식단을 채택하는 소비자이자  중개업자가 된 특유의 가족사가 있다.  그들은 월마트가 소유한 회원제 대형 소매업체  Sam’s Club에서 치즈와 마요네즈, 소고기 간 것 같은 식당에서 쓸 재료를 구입한다.


Ruiz(28) 씨는 “난 미국산 소고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멕시코산 소고기보다 더 부드럽고 기름지다.”


Ruiz 씨는 125kg이고, 그의 형 Gabriel 씨는 136kg으로 누가 봐도 과체중이다. 부모님의 식단도 바뀌었다. 2년 전 그들의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을 앓았고, 어머니는 당뇨병이다.


전세계적으로 무역협정은 먹을거리에 더 싸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95년에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의 주요한 장점은 무역 장벽을 완화해서 “먹을거리를 더욱 저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한 협정은 식단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월마트가 소유한 할인점인 산크리스토발에 있는Bodega Aurrerá에서 청량음료를 쇼핑하고 있다. 

Credit




 산크리스토발에서 약 10km 떨어진 산후안 차물라San Juan Chamula에 있는 보건소 외부의 가게에 코카콜라가 제품이 독점하고 있다.




2007년, 남태평양의 사모아 공화국은 지방질의 튀긴 음식인 칠면조 꼬리의 수입을 금지했다. 영양학자들은 그 음식이 이 섬의 약 30%에 달하는 비만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사모아가 2012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을 때, 칠면조 꼬리의 수입 금지령을 해제해야 했다. 


나프타의 영향력은 훨씬 더 널리 미쳤다.  나프타 이전 멕시코의 식음료 기업에 대한 미국의 직접 투자액은 23억 달러였는데 이후인 2012년 102억 달러로 급증했으며, 이는 확실히 무역협정과 연결되어 있다. 미국 농무부는 “이러한 투자의 대부분은 나프타가 시행된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공표했다.


그 뚜렷한 변화가 Ruiz 일가에게서도 나타났다.



농장부터 패스트푸드까지


어느 날 저녁 한산한 그들의 식당 Dogo Express에서 잠시 쉬는 동안, William과 Gabriel 씨의 어머니 Maricela Sánchez Espino(62) 씨가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옥수수와 주키니 호박, 버섯, 비둘기와 토끼를 키웠고, 가족들은 그들이 키운 것을 먹었다. 


그녀의 남편 Gabriel Ruiz Barbosa(60) 씨도 멕시코의 농촌에서 자랐다. 농부이자 양봉업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살해를 당했고, 그의 어머니는 음식을 만들어 팔며 겨우겨우 먹고살았다.  


발보자 씨는 농공학을 공부했지만, 멕시코는 소규모 가족농에 의존하는 것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멕시코는 보호주의에 기반한 내향적인 경제였는데, 1980년대 초반의 금융 위기로 인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며 성장을 촉진하고자 자유무역을 받아들이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6년, 맥시코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WTO의 전신- 을 체결한다. 이를 통해 외국인의 기업 소유에 대한 관세를 낮추고 규정을 완화했다.




산크리스토발 중앙광장에서 판매하는 간식.





산크리스토발의 노점에서 추러스를 구매하고 있다.



지지자들에게 나프타는 전환을 완료한 것이다. “그건 경제 모델의 변화였다.”고 조약의 부협상자 Zabludovsky 씨는 말했다.  “우린 미국과의 지리적 근접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 협정이 국가간 투자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멕시코 기업을 외국인이 소유하는 일에 대한 멕시코의 제약을 완전히 제거했다.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는 개방된 무역권이 되었다.  


멕시코가 미국에 채소와 과일을 수출하는 양이 급증했다. 엄청난 양의 가공식품 원재료가 반대 방향으로 흘러왔다. 


미국 농무부에 의하면. 지난해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수출된 농산물의 절반 이상이 과일과 채소, 주스였던 한편, 미국이 멕시코로 수출한 식품의 7%만 농산물이었다. 


미국은 주로 육류와 대두, 옥수수를 멕시코로 수출했다. 나프타 이전 멕시코로 건너가는 곡물의 연간 가치가 8억9700만 달러였는데, 2016년에는 47억 달러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돼지고기와 소고기 수출도  급격히 늘어났다. 고과당옥수수시럽의 수출은 연간 500만 달러에서 3억4500만 달러로 증가했다.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농업은 더 효율적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농업계가 구조화되는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Overall paid employment of farm workers rose by 2.8 million but there was a displacement of 4.8 million people who left family farms,나프타의 결점에 대한 증거로 일부 멕시코 관리들이 인용하는 우드로우 윌슨 센터(Woodrow Wilson Center)의 연구에 의하면,  농업노동자의 전체 유급 고용이 280만 명으로 증가했지만 480만의 가족농이 추방되었다고 한다. 


센터의 멕시코 연구소 소장 Duncan Wood 씨는 경기 침체와 함께 식량 가격이 떨어지면서 많은 멕시코인들이 특이한 경제적 지위에 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더 많은 가공식품을 탐닉할 수 있게 되면서 더 많은 칼로리를 소비하고 있다”고 우드 씨는 말했다. “하지만 더 건강해질 수 있는 풍요로운 생활양식을 누릴 만큼 부유하지 않다.”


그래서 Ruiz 일가로 갔다.  소년 시절 William Ruiz 씨는 호박, 당근, 감자, 강낭콩으로 만든 전통적인 되직한 스튜 같은 집에서 요리한 음식을 좋아했다. 그 가족은 거의 외식을 안 했다.


하지만 그가 11살 때, 가족이 미국의 패스트푸드가 넘치는 번화한 타바스코의 중심부 비야에르모사로 이사를 왔다. Ruiz 일가는 도미노 피자와 버거킹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다. 특히 맥도날드를 좋아했다.


William 씨는 처음 먹은 해피밀을 기억한다. 바삭한 감자튀김, 닭고기 너겟과 상자 안에 있던 장난감.  “개척되지 않은 목장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갖는 느낌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름다웠다.”


2012년, 타바스코에서 운영하던 술집을 닫은 뒤 산크리스토발로 이사하고  Dogo Express를 개업했다.


아들들이 10대 후반에 몸무게가 늘기 시작했지만 아버지 Ruiz 씨는 걱정하지 않았다.  사실 과시하고 싶기도 했다. “우린 재정 상태가 좋았기에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과 패스트푸드도 먹일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우린 서로에게 ‘좀 뚱뚱해도 잘 먹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산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에 있는 전통시장. 멕시코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품목 가운데 과일과 채소가 급증했고, 반대로 옥수수와 육류, 고과당옥수수시럽이 멕시코로 들어왔다. 




리서치 회사인 Euromonitor에 의하면, 옥소Oxxo는 멕시코 편의점 시장의 75%를 점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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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점의 부상


일요일에 Ruiz 형제는 Sam’s Club에 식재료를 마련하러 갔다. 그들은 마블링이 가득한 소고기를 파는 코너를 좋아하는데, 지역 정육점에서 파는 소고기보다 값이 싸곤 하다.  


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2015년에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멕시코인은 하루에 평균 1928칼로리의 포장된 식료품을 구매했는데 이는 미국보다 380칼로리 더 많은 수치이며, 시장 리서치 회사인 Euromonitor International에서 추적한 다른 어떤 국가의 사람들보다 많은 수치이다.


비만의 원인은 복잡하다. 유전적인 요인, 생활방식의 변화 및 기타 요인들이 있다. 하지만 여러 연구에서는 대형 업체의 필수품인 염분과 당분 및 지방이 풍부한 가공식품의 소비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1991년, 협상가들이 나프타의 세부사항을 타결했을 때 월마트가 멕시코 최대 소매업체인 Cifra와 제휴하여 최초의 외국인 투자를 시작했다. 


1997년 월마트는 Cifra의 지배 지분에 대해 12억 달러를 지불했다. 월마트는 현재 멕시코의 가장 큰 식품 소매업체이다. 


Oxxo는 식료품 시장점유율 2위이다. Euromonitor에 의하면, 이 기업은 75%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는 최대의 편의점 체인이기도 하다. 


Oxxo는 멕시코 기업인 Femsa가 소유하고 있지만 외부의 투자가 상당하다. 1993년 코카콜라는 펩시가 멕시코에 6억3500만 달러를 지출하며 세력을 확장할 것이라 발표한 지 얼마되지 않아  Femsa의 청량음료 부서의 1/3을 1억9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그런 다음 1994년, 캐나다의 맥주 기업 Labatt는 Femsa의 맥주 사업에 5억1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그 돈으로 Femsa의 자본은 부채를 탕감했고, 그 덕에 성장했다. 


“돈이 개발도상국으로 흘러갔다. 이들 국가에서 이러한 식료품이 빠르게 성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런던 대학의 식량정책센터의 소장이자 무역정책과 영양의 전문가인  Corinna Hawkes 씨는 말한다. “Oxxo는 정확히우리가 이야기하는 부류이다.”





산크리스토발에 있는 코카콜라 병 공장. 1993년 코카콜라는 Femsa의 청량음료 부서의 1/3을  1억9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왼쪽은 산크리스토발에 있는 식당에 버거킹이 주차해 놓은 쿠키 트럭이다.  오른쪽은  Sam’s Club의 식당에서 점심으로 피자와 청량음료를 제공하는 모습. 




그러한 제품이 Oxxo가 성공한 핵심이다.  예를 들어, 이들의 2003년 연례 보고서에서  Femsa는 Oxxo가 “최대의 맥주 및 청량음료만이 아니라 전화카드와 담배, 생수의 공급업체가 되었다.”고 자랑했다. 


11년 동안 Femsa의 최고재무책임자인 Javier Astaburuaga 씨는 자유무역으로 인해 비만이 증가했다는 주장을 일축하며, 나프타 이전에도 건강에 좋지 않은 식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He attributed Oxxo의 성장은 자유무역이 아니라 공격적인 기업 전략 덕분이라고 하면서, 외부의 투자가 Oxxo를 포함한 모든 부문을 성장시키는 더 강력한 재무 기반을 부여했다고 인정했다. 


In a twist, 가장 큰 공중보건 자선단체의 하나인 Bill & Melinda Gates 재단의 자금을 관리하는 트러스트는 미국 외부의 가장 큰 콜라 회사인 코카콜라 펨사의 가장 큰 외부 투자자이다. 비판자들은 약 4억7000만 달러에 이르는 이 트러스트의 투자가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살도록 돕는다는” 재단의 선언문과 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터프츠 대학의 Wise 박사는 그 투자는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 같다고 한다. 


Bill & Melinda Gates 재단 트러스트의 대변인은 논평을 거부했다.


2012년, Hawkes 박사는 멕시코 식단에 대한 자유무역의 영향을 공동으로 연구했다. 그 연구의 “수출되고 있는 비만”에서는 미국 기업이 투자를 증가시켜 평균적인 멕시코인들이 청량음료와 가공식품을 더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최소한 나프타가 멕시코 식단의 전환과 비만의 증가를 가속화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충격은 1994년 새해 첫날 산크리스토발을 휩쓸었던 사파티스타 반군을 두려워했던 것의 변형이다. 나프타가 시행되던 그날, 그들은 군대의 병영을 불태우고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 


“그들은 상황이 나빠질 것이라고 했다”며 산크리스토발 근처의 농촌인 산후안 차물라의 지역사회 지도자 Juan González Hernández(64) 씨는 이야기했다. “하지만 우린 그들을 믿지 않았다.”




왼쪽은 손녀 Marisol 양과 함께 있는 지역사회 지도자 Juan González Hernández 씨. 그는 “미국식 음식과 농산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른쪽은 산후안 차물라에서의 점심 




그는 지금 당뇨병이 대부분의 집에 영향을 미치고, 지역 주민들은 주변에서 재배하는 과일과 채소보다 가공식품과 청량음료에 더 매혹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식 음식과 농산물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당뇨병 환자이기도 한 González 씨가 말했다. “다들 변화에 슬퍼하지만, 그러면서 여전히 Sam’s Club과 맥도날드에 간다.”


Ruiz 일가도 공감했다.


“이 음식이 나에게 나쁘다는 걸 알지만 끊을 수 없다.”고 아들이 식당으로 나르고 있는 맥도날드의 선디를 바라보며 Gabriel Ruiz Barbosa 씨는 말했다. “나의 심장전문의는 잘 조절하라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의 아들은 강박적으로 콜라를 마시는데 고혈압과 관절이 아파 고생하고 있다.  “심장마비로 죽을까 두렵기는 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 가족은 자유무역에 관해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빈약한 번영은 미국의 음식을 판매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들의 식단은 생계이자 저주이다. 


“우리를 봐라”라며 초콜릿 선디 자국을 쓱 닦으며 아버지 Ruiz 씨가 말했다.  “우린 모두 교육 받은 사람들이지만 낚여 있다.”



산크리스토발에서 William Ruiz 씨. 멕시코에서 1980년대 이후 비만 인구는 3배가 되었다. 하지만 영양불량은 급격히 감소했다.

Credit



https://www.nytimes.com/2017/12/11/health/obesity-mexico-nafta.html?smid=tw-nytimes&smtyp=c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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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및 세계은행 농업관련 논의 동향.pdf



WTO의 세계무역 보고서를 통해 미래 세계무역 현황 및 결정요인을 살펴보고, 세계은행의 2013~2015년 농업분야 사업계획을 요약 및 정리하였다.


WTO 및 세계은행 농업관련 논의 동향.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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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사진과 글은 Robin Turner라는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British Columbia) 대학의 학생이 2003년 대만에서 몇 달 동안 여행하며 조사한 자료다. 이를 캐나다의 "City Farmer"라는 도시농업 단체에 보내서 올려 놓은 내용을 나는 무단으로 가져왔다. (그러니 쉬쉬 하며 조용히 보시길 바란다.)


이 자료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민에 의한 도시농업이다. 대만의 시민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휴지와 상자텃밭 등을 활용하여 집에서 소비할 농산물을 재배하고 있다. 이는 타이페이 같은 대도시보다 그 주변의 도시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이것도 한국과 유사한 모습이다.

둘째, 농민에 의한 도시농업, 즉 도시 근교농업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기농법으로 근교농업을 실행하고 있는 농민을 만나 인터뷰를 하여, 그들이 농사짓는 방법과 대만 특유의 기후 및 농업사 등에 대해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셋째, 실제 유기농업을 행하고 있는 농민의 농장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현재 대만의 농민들이 처한 상황 -중국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자본과 제조업의 유출, 그로 인한 실업자의 발생과 그들의 귀농, 또 자유무역을 기조로 하는 WTO 가입으로 인한 농민들의 시련과 변화 등- 을 알 수 있다.  


대만은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국민당 정부가 건너오면서 세워진 정부가 주도한 '토지개혁'과 이후의 좌우 대립, 그리고 농업 보호무역과 급속도로 이루어진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세계시장으로의 편입 등 한국과 매우 유사한 역사적 발자취를 겪었다. 그 때문인지 자연환경은 조금 차이가 나지만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는 서로 무척이나 닮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도시농업의 모습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국과 캐나다 및 유럽 국가들의 도시농업에서 보이는 이질감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냥 바로 옆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조사한 것은 아닌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서구 사회는 우리와 지나온 역사도, 문화도, 그리고 자연환경도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도시농업이란 부문에서도 유사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진 사례를 배운다며 서구 사회 따라잡기에 열심이다. 물론 그 사회를 보면서 얻을 교훈도 영감도 있기는 하지만, 너무 치우쳤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아무튼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맹목적 서구 사회 따라잡기보다는 우리와 비슷한 과정을 지나온, 또는 지나고 있는 아시아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신흥 선진국과 제3세계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만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아래의 글을 번역하며 읽는 내내 흥미진진하여 잠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영어 실력은 엉망이지만 함께 나누어 보고 싶은 마음에 번역을 해보았다. 가장 아래에 출처를 달아놓았으니, 영어를 잘하는 분의 수정을 바라면서 본격적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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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이완에 도착하여 타이페이에서 조금 떨어진 Hsintien에 살았다.



당신이 보듯이, 도시는 혼잡하지만 산비탈에는 농사에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많다. 당신이 볼 수 있는 녹색 공간의 대부분은 식량작물이나 꽃 등의 농사를 짓고 있다. 이 사진은 지역 주민들이 심어 놓은 꽃과 식물로 이어진 광범위한 산책로를 산에서 찍은 것이다. 도심지의 "산업"과 대조적으로, 산은 산책로와, 농막, 운동기구, 의자, 탁자를 포함하는 누구나 활용하는 공공 공간이다.



타이완은 쉽게 자연을 접할 수 있다 -여기는 타이페이시의 오른쪽 변두리다.





2003년 1월 9일 


나는 전에 살았던 곳으로 나갔다. 여긴 다른 구릉 지역으로, 내가 사는 Hsintien에서 지하철로 네 정거장 거리다. 내가 돌아간 이유는 그곳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이건 여기에서는 전형적인 주택의 모습이다 -주로 아프트 단지와 높은 빌딩이 많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이런 주택을 찾으면 대개 옥상이나 짜투리 공간 및 화분 등에 식물이나 나무 등을 기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간이 제한적이라 길거리에서 식물이 늘어서 있는 걸 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확실히 대만인은 녹색 환경을 좋아한다.



여기는 Jingmei에 있는 산에 오르는 입구이다. 여기로 새벽에 운동하러 많이 간다. 옛날에 이 산을 부처님이 왼쪽 발로 밟았다고 하여 부처님의 발자국이라 부른다.



곧바로 산으로 오르니 길 양쪽에 농사짓는 모습이 나타난다.



작은 자투리 땅에 나무와 철사 등으로 울타리를 쳤다. 



산책로를 따라가면 더 많은 텃밭이 나타난다. 



내 다음 임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다시 오른쪽 산책로를 따라서.



단순히 보아도 농사짓는 곳이 많이 보인다. 



산책로 꼭대기에서 본 모습.



참고:

이건 늦은 오후에 가볍게 산책한 것이다. 난 전에 이 산에 자주 왔었지만, 이 텃밭을 돌보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난 결국 산 아래 쪽에서 할머니 몇 분을 보았다(사진 찍기 거부하셔서 사진은 없음).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판매가 아니라 자급용으로 농사짓는다고 하셨다. 한 할머니가 정부가 이런 텃밭을 관리하지 않고 모두 개인적으로 소유한다고 알려줬다. 그녀의 경우, 친구 소유의 이용하지 않는 땅에서 그녀가 채소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2003년 1월 23일


어제는 흥미로웠다. 난 타이페이 외곽으로 나가서 Urban Fringe Agriculture에 기사를 쓴 여성인 Zhang Tsan-Ru 씨를 만났다


그녀는 타이페이 주변의 도시 근교 지역에서 세 농장을 안내해 줬다. 그 길에 우린 타이페이 외곽에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몇몇 비닐하우스 농장을 지났다. 이 시설들은 온실과 비슷하지만, 더 많은 비와 해를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 비닐하우스에서 농민들은 1년에 9~13가지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비록 이런 유형의 농업이 화학 투입재에 의존하지만, 정부는 비화학적 병해충 방제를 활용하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나중에 더 이야기...



우리가 방문한 첫번째 농장은 콩나물(콩나물인지 모종인지 분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과 유기농 퇴비 농장이었다. 여긴 내가 본 가장 혁신적인 최첨단 농장이었다. 모종은 온실형 비닐 지붕이 있는 실내의 팔래트 안에서 자란다. 농부는 나에게 캐나다의 온실에 맞먹는, 햇빛과 빗물을 막기 위한 지붕이라고 했다. 콩나물은 물로만 기르고, 핸드폰으로 조작하는 기계에 의해 수확한다. 



수평 빔이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수확에는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고 나서 나물의 뿌리와 줄기는 퇴비더미에 버려진다. 거기에 왕겨와 달갈 껍질 또는 조개껍질이 추가되고, 트랙터가 뒤집는다. 



이렇게 된다:



그리고 나서 농부는 그 지역의 주로 시설하우스 농업을 하는 다른 농민 에게 퇴비를 팔 수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내 카메라의 사진들을 올리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Zhang 씨가 나에게 그녀가 찍은 사진을 보내주길 기다려야 한다. 당신이 위의 농장보다 흥미로워 할 두번째 농장의 개요를 소개하겠다. 

두번째 농장은 완전히 유기농 채소를 재배한다. 우리가 그 본관에 들어서자, 몇 사람이 손으로 상자에서 신선한 생산물을 꺼내 비닐로 포장하고 있었다. 약 10명이 이 작업에 참여하는데, 모두 가족이다. 이 농장의 경영자 Chen 씨는 다양한 밭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들은 위와 비슷한 시설하우스에서 14가지 잎채소를 재배하고 있었다. 양배추, 샐러리, 로메인 상추, 그리고 배추, 중국 샐러리와 몇 가지 중국 상추다.

모든 생산물이 놀랍게도 병이나 벌레 먹은 게 없어 보였다. 일관된 품질이 나를 놀라게 했다. Chen 씨는 그들이 돌려짓기와 닭과 병해충을 방제하기 위한 왕겨 목초액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들은 한 번이나 두 번 작물을 수확한 뒤 다른 작물을 돌려심고, 땅이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쯤 쉬도록 묵힌다고 한다. 그들은 타이완의 꾸준한 햇빛과 강수량 덕분에 1년에 9~12번 수확한다. 여름에는 강한 햇빛을 줄이고자 시설하우스에 차광막을 덮는다. 5월부터 10월까지 여름에는 노지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햇빛이 뜨겁다.


그들의 작은 퇴비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태운 왕겨에 유기 폐기물과 달걀 껍질, 쌀겨를 섞어 직접 퇴비를 만든다. 왕겨를 태울 때는 S자 모양의 관을 이용해서 그때 나오는 목초액을 받는다. Chen 씨는 앞서 말했듯이, 이것이 매우 강력한 해충 기피제라고 한다. 해충이 냄새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걸 토양에 200:1로 희석해서 뿌린다. 

돌아오는 길에 시설하우스 몇 동이 있었는데, 여기는 땅을 묵히는 곳이었다. 안에는 살이 오르고 행복해 보이는 닭 몇 마리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이것이 앞서 언급한 해충 방제 방법이다. 닭들은 1년에 한두 달 시설하우스를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흙에서 작물에 해를 끼치는 곤충과 애벌레를 잡아 먹는다. 

마지막으로 우린 외부의 텃밭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그들은 당근, 호박, 고구마, 토란, 메주콩, 완두콩, 강낭콩, 야콘 등등을 재배했다. 외부의 작물은 시설하우스의 깔끔한 잎과 달리 벌레가 많이 먹은 전형적인 유기농 채소 같아 보였다. 이 작물들 대부분은 자신과 주변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하우스의 작물은 시장에 낸다고 한다. 

Zhang 씨의 업무 가운데 일부는 새로 농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지원을 제공하여 돕는 것이다. 그녀는 한 달마다 방문하여 그들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며, 지속가능하고 수익을 낼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다. 원래 이 농장은 차를 재배했는데, 차 가격이 크게 떨어져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해야 했다. 그들은 현 시점까지 많은 투자를 하여 화학물질에 많이 의존하던 차 재배보다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해마다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작물은 모두 유기농 인증을 받아 타이페이의 상점에서 팔린다. Chen 씨는 그 시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타이완의 유기농 생산비율은 캐나다의 2~2.5%에 비교하여 약 1%뿐이다. 점점 많은 도시의 사람들이 건강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농장은 300g 포장의 잎채소 묶음을 소매 특판장에서 약 1.10캐나다달러에 팔고, 결과적으로 약 1.70캐나다달러에 판매하고 있다. 모든 농산물은 농장에서 포장하고, 가게에 도착하는 대로 판매된다. 

하나 더. 농장의 일꾼은 한둘을 제외하곤 거의 모두 가족이다. 그들은 한 명을 빼고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불교신자이고, 신앙의 연장선에서 이 농장을 생각한다. Chen 씨는 나에게 자신들은 매일 아침 5시부터 저녁 9시까지 일한다고 했다. 그들이 실제로 임금을 받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그냥 농장의 성장에 투자하고 있는 것 같다. 일꾼 중 몇몇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 기업들이 타이페이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첨단 기업에서 퇴직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생활방식에 행복한 얼굴을 하고 미소를 띠고 있었다. 타이페이에서 전형적인 사무직 노동자들의 단조로운 얼굴을 본 뒤 나는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참고사항:

  • 전체 농장은 약 2500평이고, 그 가운데 주요한 농사는 약 600평에서 짓고 있다. 
  • Zhang은 차에서 나에게  타이완을 떠나는 기업들이 늘어나며 2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다시 농촌의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그들은 WTO의 관세 인하가 농민들을 압박하면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Zhang 씨는 자신의 일에 진정 믿음을 지닌 매우 헌신적이고 활기찬 여성이다. 






2003년 4월 6일


내가 여기에서 마주친 현상 가운데 하나는 비록 도시농업이라 부를 수 있는 많은 사례가 있지만, 캐나다의 도시농업에 비교할 때 매우 소규모라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농촌이라 부를 수 있는 몇몇 곳은 도시화가 매우 조밀하다. 

지금 나는 타이완의 농업사에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이 1949년에 섬으로 건너온 뒤의 토지개혁이다.

타이완의 토지개혁은 시행한 지 10년 안에 순수 식량수출국이 되면서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하나의 사례로 판명되었다. 토지개혁은 또한 가난한 국가가 산업화와 개발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을 제공하여  꾸준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기본적으로 토지는 분할되어 원래 농사짓던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소작료가 37.5%로 감소하고, 정부의 대출이 토지를 구입하는 데 제공되었으며, 농지 규모가 1인당 최대 1,2000평으로 축소되었다. 또한 한 해에 농사짓는 추가 작물에는 세금이 적용되지 않았고, 이는 생산성과 농민 소득의 향상을 촉진했다.

토지개혁은 신중한 계획과 관리, 적극적인 참여만이 아니라 보호주의의 형태에 필요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실행되었다. 벼를 포함한 많은 작물의 무역을 완전히 금지하고, 모든 수입 농산물에는 무거운 관세를 매겼다. 비록 이러한 조치가 타이완에 세계 평균보다 비싼 물가를 가져왔지만, 이 가난한 섬나라에 완전한 식량안보만이 아니라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게 했다. 

당연히 타이완은 현대화로 나아감에 따라 자신의 모든 관심을 무역과 산업에 초점을 맞춘 반면, 한때 국가의 생계수단이었던 농업은 GDP의 단 3%만 차지하며 뒷자리로 물러났다. 현재 WTO에 가입하면서, 농업 부문은 늘 별로 보호되지 않는다. 그것은 관세 감소로 농산물 가격의 급락과 동시에 농민 소득의 손실을 가져왔다. 12월 타이페이에서 12만 명의 농민이 결집해 맹렬히 항의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타이완 농업의 이러한 새로운 장애물에 대한 몇몇 개인의 이해를 알아보고자, 나는 Hsintien에 있는 지역 농민회와 접촉했다. 나는 이러한 중요한 조직에서 타이완 농민을 위한 신용기관, 교육센터, 자문위원회, 협동조합, 정치적 교섭 창구로 활동하는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데 시간을 보냈다. 결국 나는 농민들과 함께 작물 전략과 그들의 수요에 가장 적합한 농법을 개발하고 있는 Ye 씨를 만났다. 그는 50년 동안 Hsintien의 근교에 있는 농지에서 농사를 지은 농민을 만나게 해주었다.




Lau 씨와 나는 이웃 농민의 창고에서 차를 마시는 한편, Ye 씨 뒤에서 이웃 농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현재와 비교하여 과거 농업에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적당한 사람을 찾았다. Lau 씨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어린 시절부터 Hsintien의 농지에서 일했다. 그는 예전에 어땠는지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3가지 작물만 재배할 수 있었다: 고구마, 순무, 양배추. 화학비료나 농약을 살 돈이 적어서 이러한 튼튼한 작물만이 식탁에 올리거나 시장에 낼 수 있는 보장을 받았다. 그들이 해충을 방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손으로 벌레를 잡는 것이었다! Lau 씨와 그의 아버지는 지역의 지주에게서 토지(6000평)를 빌렸고, 그들 작물의 2/3를 임대료로 지불했다. 고생스럽게 살았다! 또한 이는 농민들 주머니로 매우 적은 이득만 들어갈 수 있게 함으로써 농민들이 생산성을 향상시키거나 다각화를 모색하지 못하도록 절망시켰다. 그러고 나서 Lau 씨는 정부에서 지주에게 토지를 팔도록 하고, 소작료를 작물의 37.5%로 낮추도록 강요한 토지개혁과 함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했다. 그와 함께 작물 다각화, 돌려짓기, 해충 방제를 위한 방법을 촉진하는 데 훨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농약과 화학비료가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었다. 생산량이 폭증했고, 그들은 튼튼한 3가지 작물에서 지금과 같은 주로 고부가가치의 잎채소 품종인 13가지 이상의 작물로 빠르게 나아갔다.




우리는 Lau 씨의 300평(10m x 100m) 규모의 시설하우스를 둘러보았다. 그는 나에게 이게 60~70년대에 타에완에서 매우 수익성 좋은 사업이었다고 알려줬다. 사람들이 농업으로 소득과 함께 번영을 누리고, 상업과 더 많은 음식에 대한 수요가 인구와 함께 성장했다. 수입 금지는 농민이 매우 편안한 생계수준을 누릴 수 있고, 농민이 농업을 유지하는 것이 합당했음을 뜻한다. 그는 나에게 농산물의 적재와 함께 시장에 나가고 정오까지 다 팔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사업을 돌보는 데 하루의 나머지를 쓴다. 이렇게 번 돈으로 그는 타이완에서 가장 일반적인 시설하우스의 하나를 지을 수 있었다. 여름의 집중호우와 뙤약볕을 막기 위해 비닐로 마감한 이곳은 관개용 파이프도 갖추고 있다.




사진 뒤에 보이는 땅은 1년마다 한 달씩 묵히는 땅이다. 작물 돌려짓기는 똑같은 작물을 재배하면 병해충이 조장되기에 일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작물의 식별은 모두 중국식 이름뿐이어서 나에게 늘 어려운 일이었다.




크고 건강한 머리라는 뜻의 Da Bai Cai(이는 로메인 상추의 잘못으로 보임).



중국 본토에서 Dalu Mei라 부르는 작물



옛 시절보다 훨씬 많은 품종. 


우리의 방문을 마무리지으면서 창고에서 차를 좀 더 마시고,  Lau 씨는 현재 타이완에서 농민들은 훨씬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이야기했다. 시련의 대부분이 WTO의 가격 인하를 동반한 낮은 가격이란 문제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는 자매국가인 중국 본토와 다시 관계를 맺으면서 공장과 자본이 사라졌다고도 비난을 퍼부었다. 타이완에서 식량 가격은 떨어지고 있는 반면, 돈은 또한 놀라운 속도로 공장과 일자리들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고 있다. "타이완은 자신의 농민을 지원하기 위해 더 많은 소비할 사람이 필요한 때인데, 재정적 어려움으로 사람들이 진열대에서 가장 싼 물건만 찾고 있다. 그 결과 타이완 농민들이 힘든 것이다."


그것이 Lau 씨의 이야기다. 다음은 시장에 낼 허브와 꽃을 재배하는 그의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겠다. 그는 WTO 이후 타이완의 낮은 가격이란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노력을 하고 있는 농민으로서 방향의 지표가 된다. 






2003년 4월 24일

Liang Shan 씨의 유기농 농장이 지닌 구성요소


1. 인간: 이것은 아래의 지역사회 부분에서 살펴볼 것이다. 간단하게, 이 유기농 농장은 노동집약적이고, 농장을 유기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일할 수 있는 가족과 친척들의 진정한 노력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파종부터 수확과 포장까지, 이 농장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손으로 이루어진다. 전기로 가동하는 파종기, 로터리를 치는 경운기, 퇴비를 뒤집는 굴착기 빼고 모든 일이 손으로 이루어진다.


2. 흙과 퇴비와 영양소: 유기농 농장이기에, 여기 투입되는 모든 것이 유기적이어야 한다. 그리스에서 수입된 퇴비에는 왕겨재(타이완산)를 섞는다. 일본산 생선 수용액으로 질소를 추가할 뿐만 아니라, 유통기한 지난 두부로 보충한다. 모종을 위한 흙도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질소질이 낮은 것이다.


3. 시설하우스와 관개 체계: 대부분의 재배가 그물망을 덧씌운 비닐을 덮은 시설하우스 안에서 이루어진다. 옆면은 벌레를 막는 촘촘한 그물망이고, 윗부분의 그물망은 다른 광선이 아닌 강한 햇빛만 차단한다. 또한 일부 빗물은 들어오지만 호우철에 작물을 보호한다. 관개는 전기로 운영한다.


4. 해충 방제: 해충은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처리한다. 먼저, 흙은  타이완의 경우 산도 6.5의 매우 강한 산성이라 왕겨재를 넣는다. 이는 흙을 깨끗이 하는 데 도움이 되고, 왕겨재의 냄새가 해충을 쫓는다. 한편 강한 산도는 병균의 번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둘째, 왕겨를 태우면서 연기를 증류하여 목초액을 모은다. 목초액은 물과 1:800의 비율로 섞어서 작물에 뿌린다. 그것은 완전히 유기적이고 비독성이면서, 그것이 지닌 강한 냄새를 많은 해충들이 기피한다. 병원균을 살포해서 잎채소에 아주 성가신 애벌레를 억제하는 데 쓴다. 이 병원균은 곤충의 척수와 신경계를 공격하여 매우 빨리 죽이지만 인간에게는 전혀 해가 없다. 

땅은 1년에 한 달 정도 묵히고, 그때 닭을 자유로이 다니도록 풀어놓아 땅에서 벌레를 잡아먹게 한다. 이것이 땅에서 하는 "봄철 청소"이고, 새로운 농사철을 준비한다. 이들 닭은 고품질 유기농으로 다른 농산물과 함께 팔린다.


5. 포장, 마케팅, 유통: 채소는 농장에서 일꾼들이 250g씩 신경 써서 손으로 포장한다. 소비자는 농장에서 약 1.20캐나다달러에 직거래로 살 수 있다. 또는 정부가 인증한 유기농산물 매장에서 살 수 있다(타이페이에만 약 20곳). 그 당시, 이러한 방법이 약간의 폐기물과 함께 농장에서 재배한 모든 채소를 팔기에 충분했다. 


6. 정부 지원: 정부는 재정적 지원과 전문기술을 모두 제공하며 이러한 농장의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 농장은 자립하기 시작하여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정부는 대출과 유기농인증 농민을 위한 교육을 제공할 것이다. 


Liang Shan 씨 유기농 농장을 표현한 도표



농장에게 지역사회는 어떤 의미인가?

농장은 사돈을 포함하여 친척에 의해 운영된다. 그들 모두는 불교신자이고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다. 불교신자의 윤리는 매우 엄격하여 술을 마시는 것도 허용되지 않고, 그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서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생활습관을 가져 농사일에 아주 적합하다. 농장 주인은 가족 구성원이 아니지만 그도 엄격한 불교신자이고, 나는 이것이 농장의 탄생에 필수 요소였다고 느꼈다. 기본적으로 농장은 큰돈을 만드는 사업이 아니고, 일꾼의 헌신과 희생이 필요하다(오랜 시간 일하고 보수가 적으며, 땅에 기반을 둔 전원적 생활양식을 보답으로 받는다는 면에서) 정부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고, 불교신자인 지주에게 땅을 빌렸다. 내가 땅을 소유한 농장 관리인에게 물었을 때, 그는 "여긴 신의 땅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수양아들이 나에게 나중에 알려준 그 말의 의미는, 주인과 일꾼 사이의 불교라는 공통적 결속 없이 농장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영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농장 주변의 땅이 대부분 그렇게 쓰이듯이 이곳에서 농약과 비료 집약적인 차 농장을 운영하면 훨씬 큰 돈을 쉽게 벌 수 있는데, 소유주 스스로 큰 희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농장이 지닌 또 다른 지역사회의 요소는 Liang Shan 씨가 농산물을 판매하는 유기농 생협을 매개로 연결된 타이완의 성장하고 있는 유기농산물 소비자들이다. 농장에서 나의 친구 Zhen Zhong 씨는 많은 사람들이 농장을 보려고 몇 시간을 운전해 와서  그 농산물이 깨끗한 유기농산물임을 확인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첫 번째 방문 이후 대부분이 농장에 방문하는 걸 즐거워하기 때문에 또 방문한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농장의 가족들이 확대된 연결망을 만드는 것 같다. 


어떻게 농장의 체계가 자신의 물리적/생물학적 환경 설정(농생태학/토지 지킴이)에 관여하는가? 기후, 경관, 토양, 식생, 야생생물을 포함시키는가?

농장은 소규모 직물공장, 도로, 차 농장 사이에 끼인 5000평 정도의 토지에 위치해 있다. 비록 매우 작은 규모지만, 실제 재배는 아마 이 공간의 1/6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잎채소는 집약적인 생산이 가능한 시설하우스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한다. 타이완의 기후 때문에, 전형적인 시설하우스에서 연간 9~13번 재배하여 놀라운 양을 생산한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투입재는 유기농 자재이고, 따라서 주변 환경에 나쁜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다. 집약적인 농산물 생산 덕분에, 물론 많은 나비와 애벌레 개체수가 있어서 새들의 먹이가 된다. 그 농장의 시설하우스가 아닌 땅의 절반은 뿌리채소를 재배하고, 나머지 절반은 숲이다. Zhen Zhong 씨는 농장 주변의 숲에 여러 종류의 새들과 함께 부엉이가 산다고 알려주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정부는 인증과 전문기술의 형태로 유기농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런 지원의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공장과 화학물질 집약적 농업에 의해 황폐해진 타이완의 자연환경 보호 때문이다. 당신이 상상하듯이, 1년에 13번의 재배를 가능하게 하는 기후는 곧 13번의 제초제, 살충제, 화학비료 살포를 의미하고, 따라서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친다. Liang Shan 씨의 농장은 확실히 개별 유기농 농민은 토지의 "청결"함에 의존하여 먹고 살기 때문에 독립적인 토지 지킴이를 홍보하는 좋은 사례이다 -그리고 타이완에는 이러한 일에 대한 장려책은 없다.


정부의 국내(공급 관리)와 국제 정책(NAFTA와 GATT)은 낙농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0%)

타이완이 외국과의 경쟁에 농산물 시장을 개방함으로써 일부 상품, 특히 쌀에서 이웃 국가들과 경쟁할 수 없음을 간단히 꺠달았다. 그래서 정부는 한때 경제의 토대였던 농업 부문이 최대한 가장 싼 채소와 과일을 생산할 것이 아니라, 타이완 시장에 더 선별성을 갖춘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도록 바꾸고 특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전한 농산물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타이완인들에게서 현재 유기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농민들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이 관심을 촉진시키고 있다. 따라서 나는 WTO가 지역의 유기농업을 촉진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와 함께 WTO는 농산물의 수입 관세를 낮춤으로써 정부가 국내의 식량 공급을 보호하려는 시도를 약화시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WTO 때문에 유기농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있을 수 있는 한편, 전반적인 식품 가격이 떨어지고 있어 그를 재배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태롭게 한다. 과거에 농민은 더 많은 돈을 벌고자 유기농업으로 이동했지만, 지금은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고 있다. 사람들은 유기농산물에 프리미엄을 지불할 의사가 있지만 거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WTO가 모두를 위해 판매가를 낮추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소비자의 승리는 그들이 승리함으로써 단지 유해한 농법을 사용하고 있는 외국의 농장을 지원하는 것이지, 진정한 승리인가??





출처 http://www.cityfarmer.org/taiwa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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