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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1박2일에 이걸 다 맛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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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5일. 아침 6시 30분쯤 일어나 씻고 연풍이와 마지막 산책을 다녀왔다. 밖에서만 똥오줌을 싸니 귀찮아도 나갔다 와야 한다. 돌아와 준비를 마친 아내와 김밥을 3줄 사다가 먹고, 8시 드디어 집을 나섰다.

상록수역 앞으로 가서 수원역까지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다. 수원역까지는 버스로 30분 정도. 나주행 기차 시간은 9시 23분이다.

수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면서... 의기양양한 아내의 모습

 

 

버스 짐칸에 자전거를 싣고 얼른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막힘없이 내달려 8시 40분 수원역 정거장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수원역까지는 조금 걸어야 한다. 한 200m쯤 되는데 아내의 자전거가 이상이 생겼다. 일단 간단히 응급조치를 하고 얼른 역으로 들어갔다.

마침 철도노조에서 준법투쟁에 들어가 열차가 연착된다는 방송이 나온다. 법대로 하면 이렇게 늦어지는구나. 그럼 그동안 빨리빨리 시간 맞춰서 어떻게들 일했을까? 그렇다면 사고가 나거나 연착이 생기는 건 구조적인 문제라가 아니할 수가 없다. 입으로는 안전이 최고라면서 기관사를 줄이고, 열차 편성을 조정하고, 노후된 시설과 열차를 바꾸지 않아 사고가 생기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 열차는 제 시간에 도착해 열차에 올랐다. 재미난 것이 여수와 목포행 열차가 함께 붙어서 가다가 익산에서 서로 분리해 저마다 갈 길을 간단다. 그래서 열차 호수를 잘못 타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내릴 수 있으니 조심해서 타라고 주의 방송을 한다. 목포행이 아니라 여수행을 타면 그냥 그대로 통영 쪽으로 방향을 잡아도 좋으리라.

 

나주역에 도착해서... 한껏 들뜬 아내의 표정. 그러고 보니 진짜 둘이 여행을 온 것이 한 2~3년 만이다. 

 

 

나주역에 도착해 자전거를 다시 조정하고 바로 자전거에 올랐다. 도착 시간이 13시 5분쯤인지라 점심부터 먹고 시작하기로 했다. 헌데 난 가는 길에 그냥 이것저것 둘러보며 가고 싶었을 뿐이고, 아내는 밥부터 먹자고 성화였고, 결국 둘의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아내는 참지 못하고 빽 성질을 낸다.

배고픈 건 마찬가지니, 나도 그럼 밥을 먹자며 방향을 잡았다. 아니 그런데 가는 길에 볼 만한 건물이 하나 떡하니 서 있지 않은가. 얼른 다가가 잠깐만 보고 가자고 꼬셨다. 가까이 다가가니 옛 나주경찰서 건물이라고 한다.

 

옛 나주경찰서. 일제강점기부터 나주경찰서로 쓰다가 해방 이후에도 얼마 동안 경찰서의 기능을 유지하다가 소방서로 바뀌고, 현재는 여러 시민사회단체의 사무실이 운집해 있다. 일제의 경찰서가 그대로 미제의 경찰서가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뻔하다. 미국은 왜, 일제 앞잡이들을 다시 자기의 개로 내세웠을까? 이유야 뻔하다. 이거 참 씁쓸하구만...

 

 

이 건물은 1920년 5월에 일본인이 세웠다고 한다. 건물을 돌아다니면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던 유치장 등이 있다고 하는데 남의 집 들어가 들쑤시는 것 같아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현재 이 건물은 2002년 5월 31일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상태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치밀했냐면, 처음 이 건물을 지을 때 원래 조선의 상징이던 관아를 굽어살피는 위치를 선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경찰서 앞에는 본원사라는 일본 신사를 지어 조선의 정신까지 빼앗고자 했다. 현재 신사는 사라졌지만 경찰서 건물이 남아 그 시절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다.

 

배고프다는 성화에 얼른 자전거에 올라 나주 금성관 앞을 향해 달렸다. 이곳에는 그 유명한 나주 곰탕집인 '하얀집'이 있다. 전부터 나주에 가면 곰탕을 먹자고 노래했던지라 별 망설임 없이 가게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아직도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곰탕을 시켰다.

가마솥에서 계속 곰탕을 몽근한 불에 끓이고 있는지라 잠시의 틈도 없이 바로 곰탕이 나왔다. 일단 모습부터가 심상치 않다. 입에서는 군침이 꿀꺽 넘어간다. 고명으로 얹혀 있는 소고기와 달걀, 그 위에 뿌려진 고춧가루를 잘 섞고, 맞다. 후추도 살살 치고 드디어 한 숟가락 듬북하니 떠서 한입에 쑥 밀어넣었다. 입안에 은은히 퍼지는 국물향과 혀의 오돌토돌한 맛세포를 깨우는 그 구수한 맛이란! 이것이 곰탕이다. 여느 집에서 나오는 국물이 뿌연, 뿌옇다 못해 우유를 탄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그런 국물과는 전혀 다르다. 이 집의 국물은 가마솥에서 약한 불로 끓이며 끊임없이 기름과 핏물을 건져내는 데 비결이 있다. 그래서인지 국물이 말갛다.

고명으로 얹힌 소고기는 또 얼마나 부드럽고 맛이 좋은지 모른다. 신선하고 좋은 고기를 썼다는 게 부드럽게 씹히는 맛에서 증명된다. 냉장고에 미리 삶아서 썰어 놓은 고기를 넣는 집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고기는 퍽퍽하기만 하고 맛이 없지만 이 집의 고기는 다르다. 둘만 아니라면 수육까지 시켜서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시작부터 배만 채우고 눌러앉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국밥만 뚝딱 해치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더 앉아 있다가는 퍼질러 앉게 될 것 같아서...

 

부른 배와 기가막힌 맛에 감탄하며 바로 앞에 있는 금성관에 들어갔다. 배불리 잘 먹었으니 잠시 쉬었다 가도 좋으리라. 금성관은 아직 공사를 하고 있었다. 원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는데,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쇠락한 조선처럼 금성관의 신세도 처량해졌다. 금성관에 들어오는 입구에는 그 시절의 사진이 있다. 사진을 보고 확실히 알았다.

 

커다란 건물이 바로 나주의 관아였던 금성관이다. 그 앞을 가로막은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나주군청이다. 이 모습에서  경복궁 앞에 세운 조선총독부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나주 땅의 생김이 한양과 닮아 작은 서울이란 뜻의 소경小京이라고도 불렀는데, 어찌 이곳에 해 놓은 짓까지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그놈들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서익헌에 대청마루에 앉아 뜨거운 햇볕을 피해 시원한 바람을 즐겼다. 잠시 더위를 피하며 관아 마당을 내려다 보았다. 저 멀리 망화루望華樓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번화한 모습을 바라본다는 뜻도 되겠고, 번화하기를 바란다는 뜻도 되겠다. 망화루에서는 율령도 반포하고 했으니, 그 앞에 자연스레 장이 들어섰을 게다. 곰탕집은 그때 장터에서 먹던 국밥이 그대로 자리를 잡아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나주羅州는 통일신라 때부터 진산인 금성산錦城山에서 이름을 따 금성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곳 금성관의 금성도 거기서 온 이름이다. 비단 금이나 비단 라나 그 비단이 비단이니, 그만큼 먹고살기 좋았던 곳이란 뜻이다. 옛부터 나주가 전라남도의 중심이었다는 말만 들었지 그 실체는 몰랐는데, 이곳 나주목의 행정지인 금성관에 와 보니 그 말을 실감하겠다. 이렇게 큰 지방 관아는 아직껏 보지 못했다. 처음 관아 마당에 들어서서 느낀 장대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망화루의 뒤에 서 있는 삼문은 현재 복원 공사를 마친 상태다. 앞서 말했듯 일제강점기에 군청사를 지으면서 망화루와 삼문을 싹 밀어 버렸다. 망화루에서 삼문까지는 종묘 같은 곳에 가면 볼 수 있는 왕의 길이 깔려 있다. 가운데 볼록하게 솟은 길은 왕의 길, 그 좌우에 있는 가운뎃길보다 좀 낮은 길은 오른쪽이 문신의 길, 왼쪽이 무신의 길이다. 이런 세심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잘 복원했다.

 

손님이 오면 묵었다는 서익헌의 대청마루에 앉아 바라본 관아 마당. 가장 앞에 망화루, 그 뒤에 삼문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왕의 길은 아쉽게도 보이지 않는다. 대청마루는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이렇게 중요하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은 금방 무너지고 만다. 망화루 너머에는 일제강점기 때의 건물이 몇 채 더 있으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관공서가 아니여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이 일대에 아직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건물은 대부분 병원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날에는 이런 데 가만히 누워서 퍼지게 낮잠을 자야 제격이지만, 그럴 짬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잠에서 깰 겸 뒷뜰로 슬슬 걸어가보니 금성관의 역사와 함께했을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봐도 보통 나무가 아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런 신목은 살려 놓았구나. 일본인들은 커다란 나무를 신성시하는 습성이 있다. 몇 년 전 일본에 갔을 때 그런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뭐 이렇게 큰 나무라면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 신성시할 것이다.

 

700살이 된 은행나무 두 그루. 하나는 암나무, 다른 하나는 수나무일까? 나란히 자라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성균관대학교 안에 명륜당에 가면 그곳에도 은행나무 2그루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은행은 이렇게 암수 2그루를 심는 것이 원칙이었다. 가을에 다시 와서 맛있는 곰탕과 함께 은행잎을 즐겨야겠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데, 돌틈에서 어성초가 자란다. 밭에서만 보다가 여기서 보니 너무 반갑다. 더군다나 하얀꽃까지 달고 있어 더욱 그렇다. 어성초는 잎을 건드리면 비린내가 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데, 솔직히 난 이게 비린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좀 비린내에 민감하기는 한데, 이건 처음에만 비린내 비슷하지 가만히 맡고 있으면 향이 참 좋다. 내가 성격이 이상한 변태라서 그럴까?

 

돌틈에서 꽃을 피운 어성초. 누가 관아 뒷마당에 어성초를 심은 걸까? 아니면 저절로 자라고 있는 걸까?

 

풀처럼 살자.

풀처럼 살아야 한다.

뜯기고 밟히고 버려져도

자라고 자라고

또 자라고

말간 꽃을 피워 씨를 날리는,

풀처럼 살자.

풀처럼 살아야 한다. 

 

 

금성관을 나오며 새로 복원한 동·서익헌의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금성관의 현판 글씨도 참으로 절필이로세. 이 건물이 100평 가까이 된다니 그 크기가 상상이 되시는가! 일제는 이 건물을 관청으로 쓰다가 공간이 좁아서 그랬겠지만 바로 앞에 콘크리트로 2층 건물을 지은 것이다. 역사니 전통이니 문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실용만 따진 행태이리라. 그네들 입장에서는 뭐 그런 걸 따질 필요도 없었겠지.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금성관. 용케도 그 많은 전란을 피해 살아 남았구나. 장하다!

 

 

금성관을 나와서 나주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지방 소도시의 한가로움이랄까, 언제나 그렇듯 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보니 여기는 이발소가 많다. 외국영화에서 보면 이발소는 꼭 남자들의 잡담소 같은 곳으로 나온다. 그렇다, 이발소는 여자들의 미장원과 같은 곳이다. 헌데 요즘은 남자들도 다 미장원에만 가니 왜그런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요즘 남성이 여성화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조금만 가면 나오는 이발소의 모습에 아직도 공동체의 전통이 살아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사람이 산다면 이런 곳에 살아야 한다. 서울은 정말이지 사람이 살 곳이 아니다. 특히 아파트는 더 심하다.

 

시내를 한바퀴 돌고는 옛 나주역사를 찾아서 방향을 잡았다. 동점문을 지나쳐 나주천을 정비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다가가 길을 여쭈었다. 어찌나 자세히 설명해 주시는지 눈을 감고 찾아가도 되겠다. 나주천 옆에 얕으막한 동산이 있어 그늘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하천 정비 때문에 일부러 물을 막아 놓아서 그런지 바닥에서 물비린내가 짙게 올라온다. 동점문이 자리한 위치와 이 동산을 연결해 지도를 보며 이어보니 옛 읍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성은 지형지물을 이용해 쌓았다.

 

동점문을 바라보며 쉬면서... 동네 어르신이 지나가시다 사진에 찍혔다. 동점문은 복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주는 동학혁명 때도 동학군에 함락되지 않을 정도로 굳건한 곳이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살기 좋은 곳이었던 만큼 지배층도 튼실했을 것이다. 더구나 전라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었던가. 전라도는 전주와 라주에서 따온 이름이란 데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말기 불꽃 같은 의병 항쟁으로 이어졌고, 일제에게 초토화된 뒤 한풀 꺾인다. 그 때문에 3.1 운동 때에는 오히려 다른 지역보다 기세가 훨씬 덜했다고 한다.

 

 

나주역은 꼭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내가 보는 다카하시 노보루의 자료에 나주를 방문한 기록이 나온다. 그때 틀림없이 기차를 타고 나주역으로 왔을 것이다. 옛 나주역사는 이제 한적한 곳에 버려져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여기를 중심으로 모든 상권이 몰려 있었을 테지만, 새 역사를 지으면서 이곳은 버려졌다. 지난번 대천에 갔을 때도 원래 쓰던 역사를 버리고 새 역사를 지었던데, 요즘 이게 추세인가 보다. 도시는 더 성장해야겠고, 기존 역사를 이용하기에는 어려우니 도심 외곽에 새 역사를 짓는다. 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옛 나주역사. 이곳에서 발단해 광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일제는 드센 나주 유림을 피해 광주를 신도시로 선정해 키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교육기관이 광주에 몰려 그곳으로 통학하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다툼이 발단이 되어, 천황 생일기념식을 기점으로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다.

 

 

나주역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생긴 역은 대개 이렇게 생겼다. 색도 상아빛에 연청색으로, 어디나 똑같은 색이다. 그래도 나주역은 다른 역보다 규모가 2~3배는 된다. 그 규모의 차이는 이용객의 많고 적음에서 생겼을 것이다. 역사 안에는 당시 학생의 모습과 역무원을 복원해 놓은 인형이 있다.

바로 옆에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시간은 14시가 조금 넘어 너무 뜨거워 시원하게 쉴 겸 기념관 안을 보기로 했다. 자전거를 기념관 앞에 세우고 들어가니, 한적한 곳에 자리해 그런지 나주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참 한산했다. 방명록에 이름과 주소를 적고 2층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나주 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의 사진을 보니 참 앳된 모습이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는데 왜 그리 어려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리라. 20대 초반 전경이나 군인을 보면 참 늠름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는데, 이제 그런 사람을 보면 참 어리다. 저런 사람이 무슨 나라를 지키냐는 생각이 먼저 드니 말이다. 당시 독립만세를 이끈 학생들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주에는 특히 일본인들이 일찍부터 진출해 있었다. 1900년대 초반부터 영산포에 진을 치기 시작했으니, 1929년 나주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30여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더군다나 경술국치가 있었던 1910년에서는 20년쯤, 차별과 천대, 수탈과 억압에서 오는 수치심과 분노가 쌓일 만큼 쌓였을 시간이다. 그러던 차에 일본인 학생과 충돌이 있었으니, 가뜩이나 잘 말라 있는 장작에 불씨만 필요했을 청년들의 가슴에 불이 났을 게다. 이후 전남 일대에 들불처럼 번졌을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결과 단숨에 무언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 하나하나가 가슴속에 살아 남아 이후 삶을 사는데 커다란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운동이란, 혁명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눈에 보이게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결을 보듬고 새로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개개인의 선택과 또 사회 환경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본 영상물. 학생독립운동 시위 및 백지동맹을 주도했다는 이광춘 할머니. 몸은 많이 불편하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증언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한참을 관람하고 있는데, 이 기념관의 전시기획팀장 박진우 선생님이 다가와 멀리서 오셨다며 말을 건네셨다.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주에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렸다. 그러니 참고하라면 자료집을 하나 주셨다.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나도 갈 길이 있고 이번은 여행이 목적이라 준비를 많이 못한지라 그냥 이 정도에서 작별을 고했다.

 

이후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 영산포로 향했다. 나주 시내보다 영산포에서 더 일본인의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영산포 자체가 일본인이 개발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나주학생운동기념관에서 얻은 좋은 정보. 일제강점기 영산포의 분포도.

 

 

영산포로 건너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산대교를 건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산교를 건너는 것이다. 영산대교보다는 영산교가 더 오래된 다리라 생각해 그리로 향했다. 아내는 연신 지도를 확인하고 가라고 난리다. 어디를 불쑥 불쑥 찾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꽉 짜인 경로와 프로그램에 따라서 움직이는 걸 좋아한다. 그에 반해 난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가고 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다니는 편이라 함께 어디를 다닐 때마다 부딪치곤 한다. 이제 슬슬 이해할 때도 됐는데, 아마 이렇게 평생 가야 원래 저런 사람이니까 하고 넘어가려나 보다.

 

영산교에서 바라본 영산강의 모습. 고려시대부터 포구로 개발되기 시작해 조선시대 세곡 운반을 위해 영산창을 설치한 이후, 근대 일제강점기에는 일대의 쌀을 일본으로 내가는 창구 역할을 하다가 해방 이후 1977년 마지막 배를 바다로 떠나보낸 뒤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지금은 4개의 댐과 하구둑을 쌓으면서 물의 양도 팍 줄어든 것이라 한다.

 

 

영산강은 바다와 통하는 창구였다. 지금은 상류에 4개의 댐을 짓고 하구에 둑을 쌓으면서 물깊이도 얕아졌지만, 예전에는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분주하게 드나들던 포구였다. 세곡선이며 젓배, 여러 상품을 실은 배들이 오고갔을 것이다. 지금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 그치지만, 그렇게 배들이 드나들던 때는 정말 볼 만했으리라. 이명박 정부에서 지금 4대강 살리기라는 명목으로 영산강을 운하로 개발하겠다고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냥 놀고 있는 건설경기를 부흥하려는 큰 부흥회 같아 보인다. 배가 드나들려면 먼저 하구둑을 부숴야 하고, 댐도 처리해야 한다. 그런 건 그대로 두면서 4대강 살리기를 해 배가 드나들도록 만든다? 말도 되지 않는다. 눈가리고 아웅해도 유분수지.

영산포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자리하며 산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그 전에는 세창은 있어도 사람이 살지는 않았다. 사람은 나주에 살았을 게다. 나주에 자리잡지 못한 새로 들어온 일본인들이 자연스레 나주 건너편 영산포에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도정업자들이 선창의 주역으로 자리했다. 그리고 이 일대의 어머어마한 땅을 차지한 일본인 지주가 자리하고, 여러 공장과 그에 소속된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을 것이다. 그렇게 대규모 일본인 주거지가 형성된다.

 

영산포하면 홍어를 빼 놓을 수 없다. 고려 말기 흑산도 부근에서 잡힌 홍어를 항아리에 넣어 옮기다 발효, 숙성된 것을 먹기 시작한 게 효시라고 한다. 실제로 목포 근처에서는 숙성시킨 홍어보다 날것을 더 좋아한다. 숙성 홍어는 바다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영산포였기에 태어날 수 있는 음식이다. 영산교 건너편에는 이런 홍어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영산포를 꼼꼼히 돌아보고 싶었지만, 오늘 이렇게 오랫동안 자전거를 처음 탄 아내가 슬슬 퍼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영산강 강가에 마련되어 있는 마을 주민들의 정자에 퍼질러 누워버리기까지 했다.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한 난, 아내에게 맞춰 숙소를 잡기로 했다. 동네를 슥 한바퀴 돌면서 괜찮은 숙소가 없을까 둘러보았다. 그리곤 강가에 있는 부영모텔이란 곳으로 숙소를 결정했다.

먼저 방을 잡고 자전거와 짐을 올린 뒤, 씻고 옷을 빨고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어느덧 시간은 6시가 조금 넘었다. 나중에 인터넷지도를 이용해 오늘 이동한 거리를 알아보니 15km 정도다. 5시간 동안 15km를 참 알차게 다녔다. 속도 이런 건 중요치 않다. 오늘 보고 듣고 느낀 바에 비하면 말이다.

 

영산포 등대로 알려진 내륙 등대. 처음 이 등대는 일본인들이 자주 넘치는 영산강의 물높이를 재려고 세운 것이라 한다. 등대 뒤편으로 보이는 벽이 바로 영산강의 범람을 막으려고 세운 제방이다. 이 제방이 있어 그나마 일본인의 주거, 상업용 건물이 무사했을 것이다. 영산강을 따라 오르면 이런 제방을 많이 볼 수 있다. 제방을 쌓고 그 너머에는 주로 논농사를 짓는다. 이런 제방이 없던 조선시대에 이곳은 그냥 습지나 범람원, 충적평야가 자리했을 것이다. 쌀에 눈이 먼 일본인에게 이런 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실제로 그들은 조선인을 동원해 서둘러 제방을 쌓고 농경지를 확보해, 다시 조선인에게 소작을 주고 그 소작료로 일본에 수출해 엄청난 부를 쌓는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지주는 거의 그런 식으로 부를 이루었다. 기존 농경지는 조선인 지주들이 장악하고 있어 끼어들기 어려워 선택한 길이다.

 

 

영산포 거리에는, 특히 영산강 가의 거리에는 홍어 냄새가 가득하다. 강가를 따라 걷노라면 홍어 냄새가 어느새 내 몸을 감싼다. 암모니아란 놈에 중독된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는 법, 홍어는 대표적인 암모니아 먹을거리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김치에 중독된 것도 그 안에 있는 여러 균의 맛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홍어도 발효음식인데 거기에 김치라는 발효음식까지 곁들여 먹으니 이건 소화가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얼른 홍어로 저녁이나 먹자고 들어간 집에서 정식을 시켰다. 둘이 배가 터지도록 먹고 어두운 영산강 가를 거닐며 바람을 쏘이며 배를 꺼트렸다. 토할 것 같은 배부름은 트림 대여섯 번으로 꺼트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내일은 다카하시 노보루가 찾아갔던 나주군 금천면 월산리 월정마을을 갔다가 담양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그런데 조금 걱정스럽긴하다. 아내가 첫 여행이라 너무 무리하면 안 될 듯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일 사정에 맞춰서 여정은 조정하면 되겠지. 뉴스가 끝나고 10시가 조금 넘어 잠자리로 날아갔다.

 

뱀다리... 배 터지게 먹은 홍어는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새벽에 부스스 일어나 화장실로 직행! 변기를 깨부수고 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서도 또 한 번. 점심을 먹고도 또 한 번.

 

홍어의 애 먹는 아내. 오늘 참 애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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