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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郎

 

시작하며

 

갈다라는 행위는 초기 인류의 식량 생산, 식량 확보의 과정에 없었던 행위이다. 수백만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하는데, 이 대부분의 시간 인류는 '수렵'과 '채집'이란 방법으로 식량을 얻어 왔다. 수렵이란 활이나 덫 등의 도구를 써서 야생 동물을 잡는 행위이다. 채집이란 야생 식물이나 이동성이 부족한 소동물 등을 채취하는(또는 잡는) 행위이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깔려 있는 건 대략적인 계절성을 별도로 한다면 언제 무엇을 입수할 수 있을지가 예견하기 곤란하다는 점, 또 자원이 고갈되면 거주지를 떠나 집단별로 이동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까?

이것에 갈다라는 행위(농경)이 더해진 것은 오래된 것을 어림잡으면 수만년 전, 새로운 걸 어림잡으면 1만년 전의 일로 여기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다만, 수만년-1만년이란 폭이 있는 이유는 나중에 기술하겠다.

인류는 언제 갈다라는 일을 떠올렸던 것일까? 이런 점을 생각하는 분야를 "농경기원론"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등장한 가설은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농경이 시작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정도 전의 '신석기시대'의 시작 무렵으로 상정했다. 특히 고든 차일드가 제창한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혁명'이란 개념은 농경기원을 하나의 '이벤트'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농경기원을 느린 변화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최근엔 꽤 유력하다. 영국 저널리스트 콜린 텃지Colin Tudge는 Neanderthals, Bandis and Farmers: How Aqriculture Really Began이란 팜플렛을 내고 거기에서 농경의 기원을 좀 더 오랜 시기부터 서서히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것은 "농업은 인간의 원죄"라는 번역서로 출판되었다. 

두 가지 사고방식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하나는 '농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크게 관계되어 있다.  차일드의 생각에 의하면, 농경이란 사회의 발전에 의하여 인간집단이 갈다라는 복잡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진화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한편 텃지는 인간의 집단이 어느 장소에 정주해 생태계에 교란을 가한 것이 넓은 의미로 보면 농경기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차일드의 설이 고전적인 고고학의 학설인데 반해, 텃지가 현대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학문 분야와 교섭하고 있다는 학문적 배경의 차이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농경이라고 하면 논 벼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농경기원론은 오랫동안 벼농사 기원론, 그것도 논 벼농사 기원론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벼농사는 외래의 문화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일본의 농경기원론은 오로지 벼농사가 언제 도입되었는지를 논해 왔다. 1990년대에 아오모리현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의 재발견 등을 계기로 조문시대 사람들의 삶이 관심을 끈 무렵부터 상황이 변했다. 논의의 흐름을 바꾼 것은 일본에서는 고고학의 독무대였던 이 분야에 환경고고학, 식생사학, 농학 등 자연과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학제가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 크다.

일본에서도 농경의 기원을 이벤트가 아닌 천천히 변화한 것이라 생각하는 연구자가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사키 다카아키佐々木高明는 이 변화를 '과정(Process)'이라 부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농경기원론에서 특기할 만한 건 "씨앗을 심는 조몬인"을 저술한 오바타 히로키小畑弘己의 업적일 것이다. 오바타는 고고학자이지만 다른 학문 분야의 성과에도 밝아, 그것을 흡수하여 조문시대의 일본열도에서는 원시적인 대두 재배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명해 보였다.

 

 

1. 인간은 왜 갈게 되었을까?  

 

갈다라는 행위

그런데 갈다라는 행위는 어떠한 행위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 갈다라는 건, 협의로는 도구를 써서 초목을 베어내고 나아가서는 불을 지르거나 물을 넣는 등으로 밭을 만들고, 그곳에서 종자나 모종 등을 심어 밭에 침입하는 방해되는 식물이나 심어놓은 모종에 붙는 곤충 등을 제거해 최대한으로 수확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이다.

다만 이 행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술이나 그것을 뒷받침할 도구가 필요하다. 우선 초목을 베어내는 도구가 있다. 유물로 출토된 도구류를 연구하는 고고학은 출토된 농경도구 등을 유형화하여 그 옛것과 새것으로부터 도구의 기원이나 전파를 연구해 왔다. 또한 현재도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농기구류를 유형화하는 수법도 사용해 왔다. 이 방법은 문화인류학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세계적인 성과의 집적도 인정된다(예를 들면, 벨트 1968).

불을 놓더라도 그에 곁들인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정확한 지식 없이 산림이나 초지에 불을 놓으면 제어할 수 없어 큰 산불을 일으키게 된다. 안 좋으면 인명을 잃기도 한다. 갈게 된 토지가 경작지인데, 경작지나 그 주변의 환경은 생태학적으로는 교란 환경이다. 교란의 요인은 물론 인간 행위이다. 즉, 인간에 의한 교란 환경의 출현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연구는 주로 생태학의 수법이 쓰여 왔다. 

심는 대상, 즉 재배되는 식물은 야생 식물이 아닌 작물(재배식물)이다. 재배식물의 기원을 농경의 기원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 농학의 분야이다. 이 분야에서는 러시아의 유전학자 바빌로프 이래 고고학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을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농학과 고고학의 수법을 합친 식물고고학이라 부르는 새로운 연구방법도 등장했다. 이는 출토 유물에 자연과학의 분석기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필자가 1996년 제창한 'DNA 고고학'도 또한 그 하나이다. 

간다는 행위에는 제사 등의 행사가 수반된다. 이들 여러 행사 등을 유형화하고 상호비교하는 것으로 농경의 기원이나 전파를 좇는다는 연구도 옛날부터 행해져 왔다. 이들은 주로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연구방법으로, 특히 일본에서는 방대한 성과의 축적이 인정된다. 

 

 

농경의 시작

그런데 인류는 왜 농경을 시작했을까? 즉, 갈게 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어 있는데, 모두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제시된 것은 아니다. '왜'라고 하는 질문은 그 사람 개인이나 사회의 이상이나 기호를 묻는 것이지, 만일 그것이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묻는 것일지라도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기록조차 없던 시대의 행위이다. 아무래도 유추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게 된다. 

"사람은 왜 갈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크게 구분하면 내인설과 외인설로 나눌 수 있다. 내인설은 인간 사회의 내부에 원인이 있다는 견해로, 예를 들면 차일드도 그 하나이다. 예를 들면, 큰 종교시설에 인간이 정기적으로 모일 때 그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외적인 요인을 고려한 설도 있다. 1980년대 이후 부활을 보인 환경결정론은 그 대표이다. 이전에는 농경의 개시 요인으로 1만3700년 정도 전의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짧지만 급격한 한랭기를 드는 견해가 있었다. 그 뒤 농경의 시작이 이 시기보다 늦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농경이 천천히 진전되었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다. 

어느 설이나 배경에 인구 증가와 식량난이 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 동일하다. 식량의 압박이 사회를 농경으로 몰고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일종의 인과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과론은 종교적 사고와도 관계되어 어느 시대에나 받아들여지기 쉬운 사고방식이다. 불교는 현세의 사건을 전생의 결과(업)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구성하는 것도 일종의 인과론이다. 더욱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뒷받침한 사상적 배경인 서양의 근대 합리주의 또한 기독교 사상이 뒷받침하는 인과론 위에 성립되어 있다. 인과론은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바탕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무엇인가를 반드시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농경의 시작을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브라이언 사이크스Bryan Sykes의 소설 <이브의 일곱 딸>에서는 현생 인류의 근원이 된 일곱 여인을 가정하고, 그들의 일생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수만년 전의 이름 없는 여성의 삶을 증거로 복원하는 등은 현 단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그건 '이야기'로, 사이크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이나 이야기를 사실무근으로 치부해도 될까? 현대 학문은 상상이나 이야기를 부당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은가? 확실히 상상에 근거는 없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 100년 동안 정당한 설로 믿어졌던 설 등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근거 없는 이야기가 거짓말인가 하면, 그리 생각할 근거도 또한 없다. 상상의 산물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가설로 취급하는 것이 좋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이브의 일곱 딸>에 등장하는 일곱번째 여성 자스민은 자기 근처의 꽃이나 식물에 흥미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이 이야기가 진짜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증거는 없지만- 갈다라는 행위의 시작은 이 여성의 일시적 기분이 시작이었다는 것이 된다. 즉 "우연히" 시작되었다는 설, "우연의 가설"이다. 나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인과론을 근대 합리주의에 따른 생각이라 한다면, "우연의 가설"은 양자론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 경작한 것일까?

갈다라는 행위는 그 뒤 꽤 일반화된 것 같다. 어느 토지에 있던 집단이 주변에서 식재료를 입수할 수 없게 된 때, 그때까지의 해결법은 그 집단 전부 또는 집단의 일부가 그 장소를 떠나 신천지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세계 거의 모든 땅은 1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 집단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자원 고갈에 대응하는 방법은 갈다라는 것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변덕스러운 농경이 인류의 생존에 필수 행위가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갈다라는 행위가 다음의 전기를 맞이한 것은 도시가 탄생했을 때이다. 그때까지 갈다라는 행위는 자기 자신, 자기의 가족 또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위한 행위였다. 모든 개인이 자신과 그 집단의 먹을거리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도시의 출현은 도시민, 즉 특정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경작하지 않는다. 물론 그때까지 겸업하는 사람들은 있을 수 있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 먹을거리를 스스로 완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먹을거리를 부양하는 생업이 새로 생겼다. 그것이 농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농업이란 다른 사람의 식재료를 생산하는 생업이다(佐藤 2016).

그 뒤 도시의 규모는 점점 확대되었다. 일본에는 이미 고대에 최초의 본격적인 도시인 헤이조쿄平城京가 출현한 이후, 중세까지 교토, 가마쿠라 등의 도시가 탄생했다. 그리고 주로 그 근교에 농업 인구가 집중되는 지역이 생겨났다. 지방에는 조세로 농산물 등을 납부할 의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똑같은 힘이 작용했다. 즉, 지방의 농업은 조세 때문에 식료품 생산을 위한 것으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도 있다.

다시 세계로 눈을 돌리자. 농업은 대륙마다, 또 같은 대륙 안에서도 지역마다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농경 도구나 작물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예를 들면, 작물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면 유라시아 동부에서는 벼, 대두나 토란 등이, 서부에서는 맥류와 십자화과의 작물 등이 우점했다. 반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옥수수, 감자, 토마토, 고추 등이 재배되었다. 

농경 기술에서도 큰 지역차가 인정된다. 유라시아 중앙부부터 서부에 걸친 반건조지대에서는 관개기술을 발달시켜 물을 조달할 필요가 있었다. 반면 동부의 몬순지대에서는 홍수 대책 등 '너무 많은 물'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연간 강수량이 400mm가 되지 않는 "갈" 수 없는 토지에서는 무리지어 사는 대형 초식 포유류를 길들여 그 젖이나 고기 등을 이용하는 유목이 발생했다. 이 생업은 그 뒤 수천년을 거쳐 농업과 융합해 목축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생업을 낳았다. 

유라시아와 남북 아메리카 사이에 작물의 교환이 일어난 건 콜럼버스 등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가 도래하면서이다. 그리고 대륙을 넘나드는 교역은 세계적인 대도시를 낳았다. 일본에도 히라도平戸, 나가사키長崎, 사카이堺 등의 도시가 융성했다.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시들을 이동하는 교역자들의 먹을거리 또한 주변 지역의 농업 생산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2010년 세계의 도시 인구가 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고 보도되었다. 즉,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자신이 먹는 식재료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가축을 위해 갈다

그런데 농업생산물은 인간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농업의 성격을 아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농업생산물의 상당 부분이 가축의 사료가 된다. 농림수산성 자료에 의하면, 유럽연합 28개국의 1억8150만 헥타르의 농지 중 4%인 7만6100헥타르가 사료작물을 생산하는 경작지나 방목지로 사용되고 있다. 작물별 생산성이 다르기에 토지면적과 생산량이 완전히 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유럽의 농업생산물 가운데 40% 정도가 가축을 위해 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 수치가 불과 6.5%에 불과해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유럽의 목축은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 중앙아시아부터 서아시아에 기원한다고 생각되는 유목에서 발단하고 있다. 유목은 가축의 무리를 무리마다 관리하는 형태로, 원래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초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유럽에 전개된 뒤, 그 먹이(사료)는 점차 농업으로 조달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연중 안정적으로 가축을 사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축은 일본 열도에도 있었는데, 그 절대적 수가 적었던 것 등이 관계되어 농경지의 대부분이 인간을 위한 작물 생산에 이용되어 왔다. 특히 쌀은 일본인에게는 특별한 작물이란 것이 오랜 기간에 걸친 '진리'였다. 1970년대 무렵, '초다수확 쌀'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에 반대하는 이유의 하나가 '인간의 식량인 쌀을 가축에게 먹이는 것'에 있었다. 결국 이때의 초다수확 쌀은 정착되지 못했다. 그러나 2010년 무렵부터 가축 사육을 위한 쌀을 개발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급속히 확산되려 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쌀 기피현상이 심화되면서 쌀을 신성한 음식으로 여기는 인식 또한 희미해졌음을 보여준다. 

 

 

 

먹을거리 패키지

 

당질과 단백질

동물로서의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 영양소가 있다. 그중에서도 당질, 지질, 단백질은 3대 영양소라고 이야기되어 왔다. 인간은 이들을 균형있게 섭취하지 않으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당질은 식물성 식품에서, 지질과 단백질은 동물성 식품에서 섭취해 왔다. 물론 여기에는 예외도 있어 당질을 젖 등 동물성 식재료에서 섭취하기도 하고, 지질이나 단백질을 콩이나 밀 등 식물성 식재료에서 섭취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예외가 생긴 이유의 하나가 동식물 분포의 불균일함이다. 극지나 고산지대, 사막 주변의 건조지대에서는 식생이 부족해 안정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식재료는 동물성으로 한정된다. 젖 등의 동물성 식재료에서 당질을 섭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는 극지에는 지질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의 이유 등으로 특정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는, 이른바 '금기'에 의해 동물성 식재료를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동물 종을 기피하는지는 종교에 따라 제각각이다.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매우 강하게 기피한다. 힌두교도 대부분이 동물성 식재료를 섭취하지 않는다. 자연히 그들은 단백질을 콩과 같은 식물성 식사를 통해 섭취하게 된다.  

3대 영양소를 무엇을 통해 섭취할지는 토지에 따라 다양하다. 왜냐하면 동물상과 식물상은 그 토지에 고유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대륙의 중앙부에 바다의 물고기는 없으며 19세기에 들어서기까지 홋카이도에는 벼가 없었다. 식재료의 토지 고유성은 프랑스에선 테루아terroir 등으로 불린다. 일ㄹ본어로 고치자면 "풍토風土"일까?

 

 

당질과 단백질의 패키지

매우 흥미로운 점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는 당질과 단백질(그리고 지질도)을 같은 곳에서 생산해 왔다. 이 현상을 당질과 단백질의 동질성이라 부르기로 하자. 일례로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논이라는 생산의 장에서 벼(쌀)와 물고기(민물고기)를 생산하던 "벼논양어"가 그것이다. 그것을 '벼와 물고기의 패키지'라고 부르기로 하자.

게다가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장에서도 동일성이 유지되어 온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벼와 물고기의 패키지'는 밥상 위에서, 예를 들어 '초밥'이란 요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말하는 초밥은 물론 지금 같은 초밥이 아니라 식해 같은 초밥 형태이다. 이와 같은 패키지는 일본 열도만이 아니라 대륙부 동남아시아부터 중국 남부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당질과 단백질 패키지는 세계 각지에 다양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부터 도서부 동남아시아의 넓은 지역에서는 쌀 대신 서류(고구마, 토란, 빵나무, 마, 바나나 등)이 쓰였다. 또 동북아시아에서는 쌀을 대신해 잡곡이 사용되었다.

유럽에선 '보리와 젖'이란 패키지가 생겼다. 중세 이후에 등장한 삼포식 농업은 여름작물, 겨울작물, 휴한(휴경)이란 작부방식을 차례로 반복하는 농법으로, 이 휴한지에서 가축을 방목한다. 이렇게 하여 2회 경작하고 지력을 잃은 토지에 가축의 배설물을 비료로 주어 지력의 회복을 도모한다. 

반면, 식탁에서 단백질은 가축에서 유래하는데 그 중심은 젖과 유제품이고, 고기는 그 다음의 식재료였다. 유럽의 북부에서는 귀리와 젖을 조화시킨 '오트밀'로 요리되었다. 신대륙에서 감자가 도래하고부터는 '감자와 젖'의 패키지도 생겼다. 

중부 이남의 유럽에서는 맬과 젖을 조화시킨 여러 요리가 생겼다. 밀은 가루로 빻아 빵이나 파스타로 가공되었다. 덧붙여 파스타의 원료는 빵을 만드는 밀(학명 Triticum aestivum)과는 다른 마카로니 밀(Triticum durum)이라 부르는 밀이다. 

'쌀과 물고기' 등 단백질을 물고기에 의존하는 패키지와 '맥류와 젖'처럼 그것을 가축에게 의존하는 패키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을까? 전자에서 물고기는 천연자원이다. 그리고 후자에서 가축은 '인간이 만든 동물'이다. 이 차이는 사회의 구조나 그곳에서 거주하는 인간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을 따른다'는 사상이, 그리고 가축에 의존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을 지배'하려 하는 사상이 뿌리를 내렸다. 

 

 

 

식물 소재의 패키지 

앞에서도 적었듯이, 단백질 공급원이 되는 식물성 식재료가 있다. 대두 등 일부의 두류나 밀이 그 대표일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제약으로 동물성 식재료를 생산, 소비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당질만이 아니라 지질, 단백질도 그러한 식물성 소재를 통해 섭취하고 있다. 마에다 카즈미前田和美에 의하면, 인도의 데칸 고원에서는 잡곡과 두류의 섞어짓기가 흔히 관찰된다. 인도는 잡곡의 세계적인 중심 가운데 하나로 아시아에서 기원하는 잡곡 등이 재배된다. 그리고 쌀 또한 이러한 잡곡과 함께 재배되는 경우가 많다(이러한 재배 시스템을 농학 분야에서는 섞어짓기라 함).

두류의 식물, 특히 덩굴성 종은 지주를 따라 위로 자라면서 생육하는데 잡곡이 그 지주 역할을 한다. 두류의 많은 종이 대기 중의 질소를 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질소 고정균'과 공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질소거름의 일부는 지주가 되는 잡곡에게 제공된다. 즉, 잡곡과 콩은 질소 고정균을 통해 공생하고 있다. 

밥상 위에서도 곡류와 두류는 동소성이 있다. 달 카레(콩 카레)나 프라오라 부르는 콩이나 채소를 섞어 지은 밥(프라오의 어원은 필라프인가 싶음) 등 곡류와 콩을 조화시킨 요리는 매우 많다. 

일본에서도 곡류와 두류의 패키지가 있다. 인절미는 쌀과 대두의, 팥떡은 쌀과 팥의 패키지이다. 세금도 그 일본식의 기본형이라 하는 '국 하나 채소반찬 셋'의 스타일인 '밥과 된장국'은 쌀과 콩의 패키지가 구현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형 가축의 전래가 늦고, 또 원시종교 및 밀교와 절충된 일본 불교는 일본 요리의 한 형태인 정진요리 스타일이 되기도 했다. 

 

 

 

변화하는 당질과 단백질 패키지

이와 같은 먹을거리의 패키지는 그 토지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는데, 사회나 경제의 세계화에 수반해 그 형태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이후에 일반화된 육식(특히 가축의 고기를 먹는 식문화)가 '쌀과 고기'라는 패키지를 만들어냈다. 이른바 '양식'의 메뉴인 '돈카츠 정식'이나 덮밥인 '소고기덮밥', 거기에 해군이 발명한 카레라이스 등이 그것이다. 싸과 고기의 패키지는 중앙아시아 기원이라 생각되는 양고기 스프로 섞어 만든 '필라프', 또는 '쌀과 젖'의 패키지아고도 할 수 있는 리조또 등을 들 수 있다. 

남아메리카 태생의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최초에 감자는 유럽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에 유럽 북부에서 당질 공급원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 독일은 감자 요리의 메카처럼 불리고, 영국의 '피시앤칩스' 같은 '감자와 생선'이란 패키지도 낳았다. 

이처럼 먹을거리의 세계에 초래된 세계화는 일면에서는 조합(패키지)을 다양화시켰다. 요리인의 창의력으로 새로운 요리가 점점 등장했다. 그동안 한정된 땅에만 있던 식재료와 그 조합이 이제 전세계의 식재료를 자유롭게 조합시키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이란 시대는 매우 풍요로운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도 식재료가 세계를 돌아다니게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식재료 운반에 많은 에너지가 쓰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공업화하는 경작

 

관개와 화학비료

갈다라는 행위는 인간 행위이면서도 어디까지나 자연 영위의 범위 안이었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즉 관개하지 않고), 거름도 식물의 부식이나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배설물, 사체였다. 지금 말하는 '유기비료'이다. 관개 기술이 없으면, 경지는 제한된다. 거름이 제한되면 단위면적당 생산은 늘지 않는다. 

인류가 관개를 발명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정도 전, 중앙아시아부터 지금의 이란에 걸친 지역이었다고 생각된다(종합지구환경학 연구소 2012). 일본에선 카와치河内 평야에 큰 고분이 조영된 뒤에 팠던 '고시대구古市大溝'가 최고의 본격적인 수로가 아닐까 이야기되는 것 같다. 오사카 평야의 남부에 있는 사야마이케狭山池는 일본 최고의 댐식 저수지라고도 하며, 그 건조 시기는 7세기 초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일본에서 관개는 15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것이 된다(사토佐藤 2020).

비료를 화학적으로 합성하는 단초가 된 것이 1906년에 하버와 보슈에 의하여 발명된 하버-보슈법이다. 이에 의하여 인류는 대기 중의 질소를 인공적으로 비료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작물의 단위면적당 생산을 극적으로 증가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화학비료의 다용은 환경에 부하를 주어 지구환경의 지속성을 해쳐 왔다. 비료의 제조에 다량의 석유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 비료 반응성이 좋은 작물이나 품종만이 남아서 대량 생산되고, 기타 작물, 품종은 차례로 배제되어 갔다. 이것이 작물종이나 품종의 다양성을 빼앗고, 식문화의 균일화, 세계화를 일으켰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갈다라는 작업 그것도 변화시켰다. 이전까지는 갈다라는 작업은 문자 그대로 흙을 갈고, 그 흙과 물과 태양광으로 작물을 키우는 작업이었는데, 비닐을 쓴 비닐하우스에서의 촉성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윽과 비닐하우스는 대형화되고, 또 유리온실이 등장한다. 온실이라고는 하지만, 가랭하면 저온 온실도 된다. 이윽고 흙은 수경액으로 대체되어 지금은 LED를 사용한 밀폐형 '식물공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는 재배의 3요소로 꼽히던 흙, 물, 태양광 가운데 흙과 태양광은 사용되지 않는다. 농업은 대지와 자연으로 뒷받침되던 산업에서 공업으로 전환되고 있다.

동물성 식재료의 생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축산업은 원래 유목 문화가 발명한 착유나 거세 등의 기술을 이어받은 산업이었는데, 주로 유럽에서 가축의 먹이를 농업이 지원하는 산업으로 전환된다. 그 뒤에도 사육 기간의 단축이나, 또 많은 개체를 더 좁은 사육사에서 사육하는 밀식 사육이 점점 진행되었다. 

축산업도 또 동물의 생명을 먹는 산업에서 공장에서의 식육이나 우유 생산이란 산업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다. 그 윤리적인 과제에 대해서는 한층 더 검토되어야 한다. 

 

 

갈다에서 가공하다, 운반하다

대량 생산된 식재료는 멀리 떨어진 대소비지 주변에 대량으로 운반되어 그것에서 가공하게 되었다. 공업화가 경작부터 요리하는 작업에까지 이른 것이다. 대량으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규격인 것을 한번에 생산해야 한다. 휘어진 오이나 크기가 제각각인 사과는 환영받지 못한다. 또 대량 생산은 생산되는 작물의 수와 품종의 수를 줄였다. 다양성이 줄어든 것이다. 

가공기술의 진보는 보존기술의 진보였다. 인류가 태고부터 알고 있던 가공기술은 가열, 건조, 소금이나 설탕 절임, 발효 등이었다. 공업화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하는 동시에, 통조림과 병조림, 플라스틱 용기나 식품보존료의 개발을 가져왔다. 일본에서는 발효를 이용한 가공기술은 무로마치 시대에 이미 확립되었고, 특히 술이나 간장 등의 조리료엣는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된장은 지금도 약간은 자가 제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술이나 간장은 거의 외부화되었다(양조는 면허와 신고가 필요). 병조림이나 통조림은 19세기 초의 발명품인데, 플라스틱 용기나 보존료는 석유화학공업의 융성 이후, 즉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급격히 보급되었다. 이러한 기술은 저장성이나 수송거리를 뚜렷하게 향상시켰다. 

또한 병조림과 통조림은 전쟁터에서 식량을 확보한다는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군대는 식량의 생산, 가공, 수송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현대 일본인의 음식은 이러한 기술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가공은 더욱 중첩되고, 가공과 다음 가공 사이에는 수송이라는 과정이 끼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건 이렇게 여러 겹으로 가공되고 운반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 먹을거리는 이제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식재료의 장거리 이동에는 배나 항공기가 이용되지만, 수송을 맡고 있는 건 석유 등의 화석연료이다. 배로 이동될 때 식재료는 냉장 또는 냉동되어 운반된다. 냉장과 냉동에 쓰이는 전기도 현대사회에서는 화석연료를 이용해 만들어진다. 전기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라는 표현은 표면적인 시각이다. 내침 김에 쓰자면, 원자력 발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온난화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원자로를 냉각하는 데에는 공기나 해수가 사용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원자로가 발하는 열은 대기나 해수를 따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략 인간의 활동 중에서 열을 발하지 않는 것 따위는 없다. 

이와 같은 먹을거리 시스템이 과연 지속가능한지 아닌지 이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경작하는 인간과 먹는 인간을 연결하다

인류가 '갈다'라는 작업을 익혔을 때, 함께 먹는 집단(사람수)는 몇 십에서 많게는 몇 백까지였다. 갈다라는 작업이 나라를 만들게 되자, 그 수는 단숨에 늘어났다. 고분시대에 조영된 다이센大仙 고분(오사카시 사카이시)에서는 본체 공사에 2000명 이상이 종사했다고 한다. 그 주변에서 일했던 사람의 수는 아마 만 명을 훌쩍 넘었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경작하는 사람들은 만 명 단위의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지원하게 된다. 당연히 먹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또 먹는 사람도 경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둘 사이를 잇는 새로운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식자재의 집하, 운반, 판매나 가공, 보존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형태로, 현대에는 이러한 형태가 극단적으로 비대해지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의 일이었던 요리 부분을 '가공'의 영역이 점점 대신하고 있다. 큰 역할을 한 것이 전자렌지 등의 가전제품이다. 손질한 재료를 냉동한 것을 전자렌지로 가열하면 요리가 완성된다. 전기와 가스 밥솥의 보급은 밭솥의 간편화를 가져왔다. 

더욱이 최근에는 완성된 반찬을 사오는 점심이 크게 늘고 있다. 또 점심의 대구어처럼 쓰이는 외식도 현대인의 먹을거리에서 빠질 수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다른 장에서 자세히 기술되어 있기에 여기에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최후의 경작 -맺음말을 대신하여

인류가 갈다라는 행위를 익힌 지 만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그 이후 인류는 지상의 미개척지를 차례로 개척해 농지로 바꾸어왔다. 그때까지 미개척지였던 곳은 차례차례 개척되어 마을땅, 마을바다가 되어 갔다. 이 시점에서 '자연'은 '인간의 손이 닿은 자연'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작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바다이다.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재료는 지금까지 대부분 천연자원이었는데, 최근 반세기 정도 사이에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것은 양식의 확대이다. 양식기술 자체는 300년에 이르는 역사가 있다고 하는데,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950년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그 뒤의 성장은 급속해, 현재는 총 어획고의 20%를 넘을 정도까지 되었다. 자원의 고갈이 알려진 가운데 양식은 앞으로도 그 어종과 생산량을 늘릴 것이다. 자원 관리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육지에 사는 사람들의 이치만으로 바다를 경작할 수는 없다. 이 공간에서 계속 살아간 해양 민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삶이라고 해도 바닷물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니다. 대양에 산재한 섬들이 삶의 무대였다. 이런 사람들의 사람을 살피지 않는다는 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곳을 수탈의 장소로 삼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해안지대에는 반드시 이러한 해양 민족과의 접촉이 있고 교역을 통해 삶을 지탱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의 일본 식문화가 이렇게 성립되어 온 것도 생각하면서 바다를 경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Colin Tudge(竹内久美子 번역), 2002, 『農業は人類の原罪である』, 新潮社
小畑弘己, 2016, 『タネをまく縄文人』, 吉川弘文館
総合地球環境学研究所(편집), 2012, 『地球環境学辞典』, 弘文堂
Emil Werth(藪内芳彦・飯沼二郎 번역), 1968, 『農業文化の起源 -堀棒と鍬と犂』, 岩波書店
佐藤洋一郎, 2016, 『食の人類史』, 中公新書、中央公論新社。
Bryan Sykes(野晶子 번역), 2006, 『イヴの七人の娘たち』, ヴィレッジブック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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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소농이다. 소농을 이야기하자.






전통적으로 농부들은 병해충을 방제하고, 땅심을 돋우며 작물에 양분을 공급하고, 토양의 침식을 막고자 여러 작물의 사이짓기와 섞어짓기, 돌려짓기 같은 농법만이 아니라 농경지에서 풀과 나무를 함께 가꾸기도 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농경지에 작물만이 아니라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그리고 그에 기대어 살아가는 수많은 곤충과 새 같은 동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농경지가 그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많은 농경지가 그러했을 것이다. 요즘은 그런 모습을 ‘농업경관(Landscape of agriculture)’이라 부르며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하던 농업의 풍광이 어느 날인가 확 달라져 버렸다. 농경을 중심으로 하던 시대에 산업의 논리가 뒤덮이면서 농사가 농업으로 변모함에 따라 차츰 더 대규모의 농경지에, 상품성 있는 더 소수의 작물만 살아남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도 ‘농사’와 ‘농업’이란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려 한다. 농사는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가꾸고 기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면, 농업은 직업이나 산업의 하나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농사가 농업이 되며, 가족들이 집에서 먹을 다양한 작물들이 재배되던 농경지에는 최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작물 한두 가지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여타의 식물들은, 심지어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임에도 '잡초' 등의 낙인이 찍히며 제초제 같은 화학약품에 죽임을 당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가 몰아낸 농경지의 동식물들이 잡스럽고 해롭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러한 동식물들은 농업생태계 안에서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다. 지렁이는 식물의 생장에 이롭게 흙을 가꾸는 역할을 담당하고, 미생물이 풍부한 흙은 작물들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효과들을 가져왔다. 또 풀과 나무들 역시 여러 곤충과 미생물에게 서식처를 제공하고, 심지어 작물과 다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분을 공급하기도 했으며, 비바람에게서 흙을 지켜주는 역할도 담당했다. 그렇게 다양한 동식물이 어우러져 살면서 건강한 흙은 보수력과 배수력 등이 좋아 가뭄과 폭우에도 작물을 더 잘 보듬는다는 사실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들이 쫓겨나면서 그러한 기능과 효과들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른바 흙이 죽어 버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농경지에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이나 행위를 투입했다. 화학비료와 농약, 비닐, 양수기, 경지정리 등이 그것이다. 농업의 현대화란 이름으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농사의 규모가 확대되고, 작물 생산의 효율성과 상품성이 강화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농민의 주머니는 갈수록 얄팍해져갔다. 주머니만 얄팍해진 것이 아니다. 시간적인 여유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는 사시사철 밤낮 없이 일해야 겨우 먹고살 만한 그런 형편이 되었다. 결국 농민들 대다수는 빚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땅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는 일까지 있었다. 농사가 적정한 규모를 넘어서며 그를 감당하기 위하여 외부에서 농자재를 구매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값비싼 농기계도 마련해야 했으며, 규모의 확대를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농지도 새로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생산성이 올라 수확량이 증가했지만, 어떻게 된 것이 농산물 가격은 오히려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수량이 더 많다는 종자도 구매하고, 비료나 농약도 더 좋다는 걸로 듬뿍 치고, 가능하면 더 마력 높은 농기계를, 그리고 더 넓은 땅을 확보해서 농사를 지었다. 그래야 규모의 경제로 그나마 수중에 돈이 남게 되는 늪에 빠졌다. 강원도 고랭지의 농사는, 그곳만이 아니라 이러한 농사들 대부분은 이제 투기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상황에 처했다. 예전에는 집에서 받은 씨앗이나 이웃에서 얻은 씨앗이면 되었고, 집에서 나오는 사람을 포함한 짐승들의 똥오줌으로 거름을 만들거나 여러 식물을 활용해 땅심을 유지하면 되었다. 거기에 소나 한두 마리 키우면 남 부러울 것 없던 그런 집이었는데 말이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해 상전벽해가 어울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 같은 곳처럼 몇 만 평 규모의 농지를 확보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래서 머리 좋은 사람들이 강구한 것이 작은 규모에서도 집약도를 높여 높은 수익을 올리는 일이다. 이를 '강소농'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 이러저러한 지원사업으로 농경지에 여러 시설들이 도입되었다. 300평에 몇 억이 들어가는 첨단시설을 갖춘 하우스, 그리고 그나마 돈이 된다는 축사들, 또 특용작물들이 논밭의 주인공이었던 전통적인 작물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투자한만큼 매출은 높아졌지만 투자비도 더욱 올랐으니 빛 좋은 개살구이다.


이 책의 저자인 전희식 선생은 이러한 농민, 농촌, 농업의 현실을 20여 년 동안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대안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소농은 혁명이다”라는 문구에 잘 요약되어 있다. 저자는 농촌다움이 사라진 작금의 현실에서, 지역 자치에 기반을 둔 소농들이 농촌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일으켜 세상을 변화시킬 동력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언급하는 소농은 농지의 규모가 작은 그런 농민이 아니다. 소농은 농지의 규모보다는 어떠한 농사를 짓느냐가 핵심이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여 이윤만 중시하며 생명을 죽이는 그러한 농사가 아니라, 농지와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 및 농민과 도시민까지 함께 살리는 그러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진정한 소농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이러한 사람들을 기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데, 협동조합이나 교육제도, 농지문제, 농민기본소득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그 일환이 된다며 하나씩 논의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는 그동안 여러 곳에 기고한 글들이 실리면서 일관된 흐름을 잡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기고문의 성격상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른 내용들도 많아 사고와 주장을 찬찬히 살펴보며 따라가 전체를 구축하기 어려웠다. 이는 모두 나의 능력과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 소농이 지닌 의의와 중요성에 대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소농은 이미 준비되어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앞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현실에서 부딪치며 만들어 나아가야 할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 일은 저자의 말처럼 정말 혁명과도 같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래를 상상하며 책을 덮는다.






김석기   전통농업과 토종씨앗에 빠져 지내다가 육아와 지방 이주로 경력단절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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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농사짓는 교도소 이야기. 커다란 미국 사회에서 아주 작은 부분일지 모르지만,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부러운지 모른다. 몇 년 전,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입은 사람들에게 텃밭농사를 교육한 적이 있다. 그때 상실감으로 인해 술에 쩔거나 삶의 의욕을 잃은 분들이 농사를 지으며 조금씩 변화하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물론 근로복지공단에서 재취업의 일환으로 농사교육에 접근해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산재를 입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농사를 취미와 여가의 일환으로라도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든다면 각박한 환경도 조금이나마 풀리지 않을까 싶다.


농사가 사람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이다. 아마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 그런가 보다. 자기보다 약한 생명을 돌보고 보살핀다는 행위는 인간을 순화시키고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원예치료가 성행하는 걸 보면 이에 대한 연구도 많이 있을 텐데 그건 각자 알아서 찾아보시라. 


아무튼 "농사는 험상궂은 흑형들도 순한 양으로 만든다!"



뱀다리: 의역과 오역이 많으니 영어 해석이 가능하신 분들은 꼭 원문을 참고하시길.





32센트면 우드번(Woodbourne) 교정시설의 매점에서 허니번을 얻을 수 있다. 


그건 화학물질의 뒷맛과 이상한 재료의 상표 없는 제과점 제품이다. 저렴하고 달달한 허니번은 오랫동안 이 교도소의 최고 간식거리였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먼치가 허니번의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 


“이제 여기 사람들이 ‘케일 칩에 빠졌다!’고 하는 걸 들을 수 있다”고 이 교도소의 방문 공중보건 교수 Jocelyn Apicello 씨는 말한다.


뉴욕 주 설리반 카운티(역사적으로 우드스탁을 개최한 곳으로 알려져 있음)에 있는 우드번은 중구금 남성 교도소이다. 우드번에는 강도나 살인으로 기소되어 거친 시설로 전송되어 교화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기존의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받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다른 감옥에서는 마사지와 케일 건조를 배우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드번 교정 시설



Apicello 씨는 뉴욕 주의 교도소 여섯 곳에서 Bard Prison Initiative에 따른 프로그램을 가르친다. 여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철창 너머에서 교양학부를 졸업할 기회를 얻는다. 그런데 우드번에만은 공중보건 프로그램에서 먹을거리 정의와 영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꽤 넓은 유기농 텃밭이 있다. 수감자 학생은 지속가능하게 농사짓는 법과 수확물을 요리하는 법, 그리고 이러한 기술을 더 큰 사회정치적 경관(먹을거리 사막, 공업형 농업 등)에 맞추는 법을 배운다. 


최근 수요일 오후, 다섯 명의 수감자들이 마당의 텃밭에 모였다. 완두콩과 호박, 양배추와 케일 중에서 자칭 자본주의자가 그의 사회주의자 친구를 괴롭히고 있다. “적어도 내 체계가 작동해, 새꺄!” 그러나 비웃음으로 소란을 떠는 때, 세 번째 수감자가 심각해진다. “이봐, 거기 호박 밟지 말아!”


호박 손보기



텃밭에서 Anthony Rose 씨



Javier Gomez 씨가 고수 씨앗을 보여준다



Richard Gamarra 씨가 텃밭 간식을 즐긴다




간섭자는 33세의 도미니카계 McClain 씨이다. 그는 강도로 우드번에 들어온 초범이다. McClain 씨는 파이를 만들 큰 계획이 있어 호박이 익을 때까지 안절부절이다. 요리는 당연히 이 프로그램의 가장 인기있는 과정이다. 또 다른 수감자는 자신이 맨하탄 레스토랑에서 20달러에 파는 딸기와 체리토마토, 근대가 들어간 샐러드를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한다. 또 다른 사람은 싱싱한 레몬 바질 페스토 요리법을 알려줄 수도 있다.


견주어 보면, 교도소 식당의 모든 식사가 무려 7년 전에 미리 만들어진 것도 있는 냉동식품을 전자렌지에 해동시킨 것이다. 차이는 엄청나다. “(Bard 텃밭이 있기) 전에는, 마지막으로 언제 신선한 채소를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1992년에 수감된 Anthony Rose 씨는 말한다. 


성공담

Bill Jett 씨는 살인과 방화로 유죄판결을 받은 뒤 철장에서 오십 평생의 반을 보냈다. 몇 년 전 우드번 텃밭이 시작될 때, 그는 초기 참가자의 한 명으로 나섰다. “내 손을 더럽힌 게 처음은 아니었다”고 그는 농담을 던진다. “그러나 난 전에는 한 번도 텃밭에서 일해본 적이 없다.” 2011년 출소한 이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교도소에서 받은 교육을 활용했다. Jett 씨는 뉴욕의 농민장터를 담당하는 비영리단체 GrowNYC에서 정규직으로 일한다. 그는 퇴비팀의 정규직원이며, 매순간을 즐긴다. 또한 Jett 씨는 뉴욕대학교의 도시계획과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수확물이 너무 풍부해 골치를 앓고 있다. 그들은 일하면서 체리토마토와 깎지콩, 양상추를 간식으로 먹는다. “사탕보다 달아요”라고 수감자 Javier Gomez 씨가 말한다. 나중에 요리하고도 남는 양이다. 텃밭의 수확물이 풍족하여, 매년 지역의 푸드뱅크에 약 230kg의 농산물을 보낸다. 


물론 일부는 맨하탄 수준의 샐러드와 신선한 구운 파이를 제공할 만큼 교도소가 편한 곳이 되면 안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부소장 Jean King 씨는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모범적 행동과 지적호기심에 따라 선발된 “정선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의 범죄는 심각했지만 —살인 이상— 그들은 개선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많은 프로그램의 수업에는 토질, 퇴비 만들기, 유기적 병해충 방제(양배추에 계피를 심는 등)과 같은 원예가 들어간다. 그러나 이 계획의 설립자이자 감독인 Max Kenner 씨는 아무도 이를 직업훈련이라 부르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학생들의 창의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텃밭 수업에서는 <좋은 먹을거리 혁명(Good Food Revolution)>과 <잡식동물의 딜레마(Omnivore’s Dilemma)> 같은 책을 읽는 시간도 있기 때문이다. 농사는 잘 먹기 위한 길만이 아니라, 자급을 재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외에 작은 유기농 농장을 가진 Apicello 씨는 학생들이 먹을거리에 관한 문제에 관해 골몰할 때 좋아한다. “그 사람들은 결코 ‘왜 우리 이웃에는 신선한 식료품점이 없지’와 같은 말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더 큰 맥락에 이 문제를 넣기 시작하면 ‘아하!’ 하는 순간이 오죠.”


먹을거리 활동가 Marion Nestle 씨는 2010년 BPI 졸업식에서 졸업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문했다. “먹을거리를 기르는 것은 개인과 사회에 그들의 자원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일입니다. 저는 이보다 더 혁명적인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25세의 Richard Gamarra 씨는 폭행으로 5년형을 받아 이제 출소까지 90일 남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텃밭을 이어받아 6살 난 아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집에서 혁명을 일으킬 계획이다. 그러나 그 전에, 그는 밖에서 할 첫 식사를 기대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 전에는 맥도날드로 달려갔을 겁니다. 지금은 바로 농민장터로 갈 거예요”라며 Gamarra 씨는 웃음을 터뜨린다.







http://modernfarmer.com/2013/08/growing-organic-behind-b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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