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골드스미스의 취재기

 

 

 

초기 농업은 비생산적이라 치부되기 일쑤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미래에 가장 희망적인 농업이다. 농민인 무디얀세 테네쿤Mudiyanse Tennekoon 씨는 스리랑카의 전통적인 농촌 생활의 선지자이다. 그는 농사지으며 쿠레네갈라Kurenegala의 작은 마을에 산다. 최근 그는 FAO나 특히 세계은행이 스리랑카에 도입한 집약적인 근대농업 체계의 파괴성과 반생산성을 인식한 사람들 사이에 꽤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근대농업에 비판적인 두 박식한 남성과 함께 그와 만났다. 한 사람은 국무총리의 아들 두들리 세나나야케의 조카인 우팔리 세나나야케Upali Senanayake 씨, 다른 한 사람은 스리랑카의 전통 삶을 연구하고 있는 공무원 구나세카라Gunasekara 씨이다(에드워드 골드스미스Edward Goldsmith는 “생태주의자Ecoligist”라는 잡지의 편집자이다).

 

에드워드 스미스와 무디얀세 테네쿤 씨.

 

 

 

예전에 사람들은 자급했다

 

골드스미스(이하 G) : 이 지역의 평균적인 농장 크기는 얼마인가요?

테네쿤(이하 T) : 보통 가구에 2500평 이하입니다.

 

G : 자급하고 있습니까?

T : 유감스럽지만 아닙니다. 아버지 대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소금과 옷뿐만 아니라 전등에 쓸 등유도 사야 합니다.

 

G : 스스로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T : 할머니는 자신과 가족의 옷을 직접 만들었습니다. 마을 뒷산에 있는 땔감을 하고 부대밭을 만들던 숲인 첸나chenna에서 목화를 길렀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러고 있습니다. 게다가 옛날에는 미Mee 나무의 열매에서 추출한 미 오일을 썼기에 등유는 전혀 필요 없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미 나무의 묘목을 심는 영국인 고등판무관(출처 구글).

 

G : 미 오일은 요리에도 자주 쓰나요?

T : 네, 또 약으로도 썼습니다. 코코넛 오일도 그렇구요.

 

G : 인도처럼 현지의 장인들과 옛날처럼 물물교환을 했습니까?

T : 네, 10년 전 마을에서는 도공과 대장장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식량을 주고 항아리나 도구와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마을의 상점에서 이런 것들을 사야 합니다. 게다가 매우 쓸모 있던 점토로 만든 항아리는 이제 구할 수 없습니다.

 

G : 항아리는 주로 무엇을 담는 데 썼나요?

T : 물을 저장하는 데 썼습니다. 왕겨를 채워 그것을 태워 몇 시간 지나 재가 되면 씻어 내고 물을 넣습니다. 이렇게 물을 차갑게 보존했습니다.

 

G : 그거 끝내 주네요. 그런 지식은 아버지가 가르쳐주나요?

T : 물론입니다. 모든 농민은 연구자이자 교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이 아닙니다.

토지와 기후, 용도에 맞는 300종류 이상의 벼를 재배했다

 

G : 여기에서는 몇 종류의 벼를 재배했나요?

세나나야케(이하 S) : 예전에 스리랑카에서는 280종을 재배했는데, 지금은 15~20종만 남았습니다. 정부의 정책에 의해서 그 이외의 품종은 절멸되어 버렸습니다(D.Dreberg에 따르면 1974년에는 300~400의 벼 품종이 재배되었다<superintendent of school gardens quoted in C. Wright, Glimpses of Ceylon>).

T : 저는 지금 123종의 붉은벼를 기억하고 있는데, 남아 있는 건 겨우 3~4종뿐입니다.

 

G : 이러한 품종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T : 먼저 우리는 두 번의 농사철에 맞는 다른 품종이 필요합니다. 북동 계절풍과 관련된 마하Maha와 남서 계절풍과 관련된 야라Yala라는 두 농사철이 있지요. 마하 기간에는 ‘4개월’이라 부르는 품종을 심습니다. 그 이름처럼 자라는 데 4개월 걸립니다. 야라 기간에는 ‘3개월’이란 품종을 심습니다. 마하 기간의 품종에는 갈색과 흰색의 무룬가카얌Murungakayam, 웰라 일란가리야Wella illangaliya, 혼다라와라Hondarawara, 간가라Gangala, 베루위Beruwee가 있습니다. 야라 기간의 품종에는 다하나라Dahanala, 콕칼리Kokkali, 칸니 무룬가Kanni Murunga, 파츠하 페루말Pachha Perumal, 쿠루위Kuruwee, 수반델Suvandel이 기억납니다. 또 ‘6~8개월’이란 품종인 마위Mawee도 길렀습니다.

 

G : 마위는 무엇인가요?

T : 그건 승려를 위한 겁니다. 불교의 승려는 정오 이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아서, 다음날 아침까지 몸을 유지하려면 영양가 높은 음식이 필요합니다. 마위는 매우 영양가가 높고, 단백질 함량도 높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재배한 까닭입니다.

 

G : 그밖에 어떤 품종이 있었나요?

T : 아기 엄마를 위한 헨나티Heenati를 길렀습니다. 지방과 당분이 많아 젖이 잘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농사철에도 그것을 길렀습니다. 또 논에서 일하는 남자를 위해서는 탄수화물이 많아 힘이 나기에 칸니 무룬가를 길렀습니다. 그것은 전통 의식에 쓰는 우유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습니다. 수반델은 독특한 향 때문에 길렀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품종의 일부는 특히 논에 물이 충분할 때 길렀습니다. 반면 물이 별로 없을 때에는 다른 품종을 썼습니다. 물이 많은 곳에 쓰던 품종을 구델Goodel 또는 고다Goda라 부르고, 뒤의 것은 마다위Madawee 또는 알위Alwee라고 합니다. 어떤 품종은 특히 질퍽한 곳에 알맞은 게 있고, 또 진흙이 적은 고지대에 알맞은 품종도 있었습니다. 또 아주 기름진 흙에 필요한 품종도 있고, 매우 척박한 흙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품종은 다른 품종보다 해충에 강해서 전통적인 해충 방제법이 실패했을 때에는 다른 품종보다 그걸 심었습니다.

새를 위한 벼농사, 새는 그것을 알고 있다

 

G : 논의 해충을 방제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무엇인가요?

T : 해충은 오늘날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하나는 토종 벼는 줄기가 길어 바람에 날려서 곤충이 줄기에 붙어 있기가 어려웠습니다. 요즘 나오는 하이브리드 품종은 줄기가 짧고 훨씬 단단하여 해충이 붙어 있기 쉽습니다. 또 신품종 벼와 달리 토종은 잎이 커서 늘어지며 그늘을 만들어 풀이 자라는 것도 막았습니다. 벼는 특히 생육기 중에 짧지만 결정적인 기간인 약 2주일(이삭이 패고 나서 약 2주일의 물알들 때) 동안 해충을 예방해야 합니다. 이 기간에는 가족 모두가 경계 태세를 취해 어떠한 비상사태에도 대처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작물을 보호하기 위한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늘 하던 일은 다럭daluk이란 선인장 수액을 논에 넣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곤충을 물리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벼가 누렇게 물들면, 우리는 알곡이 생기기 시작할 때까지 논의 물꼬에 대나무 잎을 묻었습니다. 이 단계(물알들 때)에 알곡은 아직 거의 액체입니다. 그래서 곤충에게서 벼를 보호하려고 승려가 버린 옷을 구해다가, 그것을 코코넛 오일에 담가서 심지를 만듭니다. 그 다음 그걸 논의 이곳저곳에 불을 밝혀 놓지요. 승려의 옷에는 밝은 노란색 채소의 염료가 포함되어, 그걸 태울 때 빛과 함께 해충을 물리치는 매우 강한 냄새가 납니다. 또 다른 장치는 여기에서 자라는 덩굴식물의 잎을 부수어 가루를 내서 액즙을 만들어 논의 물꼬에 붓곤 했습니다. 이 액즙은 물에 떠서 벼의 둘레에 붙는데, 그것은 결정적인 2주일 동안 벼를 먹는 해충인 고드웰라Godwella를 죽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우리는 논의 네 귀퉁이에 마크라Makra 잎을 모아서 말린 걸 층층이 쌓았습니다. 또 거기에는 카두라Kadura의 나뭇가지도 심었습니다. 그것은 논의 벌레를 끌어 모으는 코코넛 등불의 받침으로 썼습니다. 또 점성학으로 점을 쳐 가장 좋은 날을 정해 볍씨를 심었습니다. 저는 이것도 해충의 침입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이것과는 별도로 하던 일은, 강바닥에서 모래를 긁어모아 논과 관개수로에 뿌렸습니다. 이것도 효과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 바라밀에서 끌어낸 매우 끈끈한 물질로 긴 밧줄을 만들어, 아이들이 논을 가로질러 줄을 질질 끌면 논의 벌레가 거기에 달라붙습니다. 그게 아니면 둠말라Dummala라고 부르는 나무의 진을 스며들게 한 여러 헝겊 조각을 묶어서 이걸 끌고 다녔습니다. 피노비아Pinovia란 특별한 도구를 손에 든 아이들이 논에 들어가 수면에 있는 벌레를 잡기도 했습니다.

S :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매우 복잡한 농업 형태가 가능하려면 온 가족의 협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개발의 여파로 가족공동체가 파괴되면서 세대가 끊기고, 그것을 실천할 방법이 사라졌습니다. 서양에서 행해지는 매우 파괴적인 근대농업에 의지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T : 그렇습니다.

 

G : 서양에서는 그런 방법을 ‘생물 방제’라 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했던 겁니까?

T : 네, 사실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해충 방제법의 하나는 코코넛 껍데기를 부수어 논의 네 귀퉁이에 뿌리는 겁니다. 이것은 데말리츠츠Demalichch 또는 일곱 자매라 불리는 회갈색 새를 불러옵니다. 새는 부수어진 코코넛을 먹거나 논의 해충도 잡아먹습니다. 특히 가장 중요한 2주일 동안 벼를 먹는 벌레인 고드웰라를 잡아먹지요.

 

G : 해충 방제를 위한 전통 의식이 있나요?

T : 우유를 끓여서 흘러넘치게 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우유가 항아리에서 흘러 나온다’는 것을 뜻하는 ‘키리우투루네와kiriuturunewa’라고 불렀습니다. 논의 주요 해충인 벼멸구에 매우 효과적이라고 여겼습니다. 또 해충을 물리치는 데에 매우 효과가 있다고 여겨진 다른 의식은, 논 한가운데에 장식을 단 장대를 꽂는 것입니다.

 

G 설치류는 어떤가요? 그게 옛날에도 문제였나요?

T : 쥐를 잡는 데에는 미Mee 나무의 동쪽에서 캔 뿌리의 네 조각을 묻고서, 그걸 논의 네 귀퉁이에서 태웠습니다. 그렇게 하면 쥐는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G : 새는 어떤가요.

T : 각 논의 농사가 끝나는 쿠룰루 팔루와kurulu paluwa라는 시기에 새를 위해 조그만 부분에 벼를 길러서 잘 대처했습니다.

 

G : 그런데 어떻게 새가 그 벼가 자기 것인지 알았나요?

T : 우리는 몇 천 년 동안 이 일을 했습니다. 새에게 어느 것이 자신의 논이고, 어느 것이 우리 인간의 논인지 가르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물론 새들은 좀처럼 우리의 논 지역에 침입하지 않았지만, 침입하더라도 벼의 해충이나 ‘고드웰라’를 먹거나 아이들이 내쫓거나 했습니다.

S : 마법 같은 해충 방제법은 없습니다. 우리 농민은 모든 해충을 피할 수 있는 ‘기적의 품종’이나 ‘기적의 화학물질’을 팔려고 하는 서양의 과학자를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산업사회가 붕괴되고 서양의 과학자들이 사라진 훨씬 뒤에도 논의 해충은 주변에 있겠죠.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해충들과 함께 살며 그 약탈을 조절해야 합니다. 각각의 방법은 조그만 기여밖에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지식은 아버지에게서 아이에게로 이어질 겁니다. 아이들을 도시의 학교에 보내 당신의 서양 과학적인 미신을 가르치지 않을 때에만 이 일이 가능합니다. 또한 온 가족이 완전히 협동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작업한 시간마다 임금을 줘야 하는 종업원으로는 이러한 협동을 결코 달성할 수 없습니다.

 

 

질소고정 나무와 과일박쥐의 똥이 거름

 

G : 논의 땅심은 어떻게 유지합니까?

A : 매우 많은 방법을 썼습니다. 하나는 논에 미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미는 콩과식물로, 뿌리혹박테리아가 질소를 고정합니다. 이전에는 1헥타르에 20그루를 심었습니다. 잎에도 질소가 많은데 그 아래에 쌓여 덮였습니다. 또 매우 흥미로운 것은 과일박쥐가 미 나무의 열매를 좋아해 과실이 익을 때에는 엄청나게 모인다는 겁니다. 그 결과 질소를 많이 함유한 박쥐의 똥도 중요한 거름이 되었습니다. 또 첫비(Akwassa) 전에 볍씨를 심어 질소를 얻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비에는 많은 질소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는 쏘라Thora, 안다나Andana, 히리야Hiriya, 니디쿰바Nidikumba, 필라Pila라고 부르는 수확철 사이에 여러 콩과의 풀이 논에서 자라도록 했습니다. 그것들은 논의 옆이나 위에 자리한 작은 구역의 놔두는 땅인 필레와스Pillewas에서 자랍니다. 콩과의 풀씨는 필레와스에서 오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곳에서 농사짓지 않았습니다. 또 그곳은 쟁기질에 부리는 물소가 쉬는 곳도 됩니다. 물소의 똥은 비가 내리면 아래쪽의 논으로 흘러와 이것도 거름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가 똥을 누거나 오줌을 누는 곳도 필레와스에 자라는 떨기나무의 그늘입니다. 이것도 땅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물론 현재는 근대적인 개발로 논의 면적을 늘렸기에 필레와스도 농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땅심의 저하로 이어졌습니다.

또 이미 말했듯이 전통적인 벼 품종은 줄기가 길어 지금처럼 줄기가 짧은 품종보다 논에 돌려주는 볏짚이 많았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각 마을의 뒷산에는 정글이 우거지고, 거기에서 ‘저수지’로 흘러와 논에 물을 댈 때 쓰는 물이 흘렀습니다. 정글이 주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홍수가 나면 논으로 흘러오는 흙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방법을 써서 우리는 땅의 힘을 유지했습니다. 그것들이 기능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지요.

 

 

근대 보급(하이브리드) 품종은 가뭄에 약하다. 수확량이 늘어난 것도 수분이 많을 뿐

 

G : 화학비료는 쓰려고 했습니까?

T : 네, 이 몇 년은 화학비료가 필요한 하이브리드 벼를 재배했기에 그래야 했습니다.

 

G : 쌀에는 어떤 영향이 있습니까?

T : 제 논은 1200평입니다. 풍년일 때에는 2800kg을 생산합니다. 우리 가족이 1년에 2100kg을 소비하기에 풍년일 때에는 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자급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잉여물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아마 제 아버지 대에는 필요한 것이 적어서 논의 생산력도 적었을 겁니다. 또 그는 매우 많은 품종을 심었기에 해마다 수요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큼 생산했을 겁니다. 우리가 문제가 있는 해에 맞부딪쳐도 어떤 품종은 잘 자랐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품종은 현재 심고 있는 하이브리드 품종만큼 가혹한 상태에 취약하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나면 하이브리드 벼는 말라 버립니다. 지금 해마다 가뭄이 지독해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정글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하이브리드 벼는 보존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갈무리해 놓으면 2~3개월 뒤에는 곰팡이가 핍니다.

 

G : 토종은 얼마나 보존하나요?

T : 적어도 3년은 갑니다.

구나세카라 : 저는 아버지가 아직 저장고에 3년 전의 쌀이 있는데 어머니가 햅쌀로 밥을 짓는다고 뭐라 하시던 일이 기억납니다. 보관 방법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쌀은 쥐가 들지 않는 대에 놓인 커다란 흙항아리에 보관했습니다. 항아리는 숨구멍이 있어서 쌀이 숨을 쉬고 서늘하게 있었습니다. 항아리는 라임 잎으로 안을 대고, 카라Kara의 잎도 해충을 쫓는 데 유용했습니다.

 

G : 근대적인 하이브리드 벼의 보관성이 나쁜 것은 수분 함유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화학비료를 쓰면 생산물의 무게는 늘지만, 이는 주로 수분 함량 때문입니다. 만약 말려서 재면 비료를 쓰지 않는 경우와 거의 같은 무게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유럽에서 두 연구를 통해 제3세계의 저장 문제는 주로 이 늘어난 수분 함량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는 서섹스Sussex대학, 다른 하나는 UNEP에서 실시했습니다.

T : 어떤 경우 하이브리드 밀은 밀가루를 만들어 먹어도 아무 맛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저는 하이브리드 벼농사를 그만두고 다시 토종으로 농사지을 계획입니다. 허나 문제는 씨앗을 찾는 일인데, 우리는 서로 전통농업의 체계로 돌아가는 걸 도울 수 있도록 현지의 농민들을 하나로 모으고 있습니다.

옛날 체계에는 다른 이점도 있습니다. 이제는 생산할 수 없는 다양한 먹을거리를 예전에는 생산했다는 점입니다.

물고기가 없어졌기에 말라리아가 늘었다

 

G : 예를 들면 어떤 것인가요?

T : 먼저 예전에는 바울루Baulu, 위라Weera, 바라밀, 힘부투Himbutu, 우드 애플Wood Apple, 히말라야 야생배와 아보카도 등 많은 먹을거리를 구하려고 자주 정글에 갔습니다. 지금은 정글이 벌목되어서 이제는 그런 먹을거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정글을 재생해야 합니다.

또 예전에는 시내, 저수지, 물을 채운 논에서 수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룰라Lula, 카와탸Kawatya, 하다야Hadaya, 아라Ara 등의 물고기는 말라 버린 못에서도 살았습니다. 적어도 이 지역에서 이것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정부가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틸라피아Tillapia에게 먹혀 버립니다. 정부는 틸라피아는 식물만 먹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다른 것들, 특히 논에 사는 물고기는 농약의 독으로 죽었습니다. 어떤 물고기도 더 이상 살지 않기에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 유충이 현재 건기에도 살아남습니다. 그 결과 말라리아가 이전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 저수지에서 번식하던 룰라는 피를 만드는 기능이 있어 늘 임산부에게 먹이던 가치 있는 물고기였습니다. 저수지에서 잡을 수 있던 다른 물고기로는 로랄레Lorale, 페티야Petiya, 히리카나야Hirikanaya, 와라야Walaya, 안다Anda, 안쿠타Ankutta도 있었습니다. 특히 코랄레Korale는 매우 맛있는 물고기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단지 틸라피아만 있을 뿐입니다. 나쁘지는 않지만 모든 토종 물고기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토종 물고기에는 모두 특별한 용도가 있습니다. 틸라피아는 논에는 넣지 않고 저수지에서만 서식합니다. 이 변화로 우리의 식사와 인생도 눈에 띄게 빈한해졌습니다.

 

우드 애플.

 

 

 

부대밭 농업이 부정되었다

 

G : 그밖에 어떤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었나요?

T : 많은 식물성 먹을거리를 저수지에서 구했습니다. 예를 들면 연밥, 일종의 연의 씨앗입니다. 또 연의 푸른 줄기도 먹었습니다. 게다가 저수지에서는 연근도 자랐고, 카케티의 뿌리로 가루도 만들고, 망고·바나나·코코넛·바라밀·후추·병아리콩과 콩나물 등도 구했습니다. 아직 어느 정도는 재배하지만 그것들은 옛날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는 부정적인데, 우리는 첸나chenna나 부대밭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논농사에 맞지 않는 마을 뒷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몇 년 농사지은 뒤 그곳을 버리면 정글이 재생하는 데에 10~14년이 지나면 회복되었습니다. 각 가족은 약 600평 정도 농사지었는데, 그곳은 사유지가 아닌 마을 공유지였습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기른 주요 작물은 조, 쿠루켄Kuruken 외에 건조 곡류였습니다. 요즘은 인구가 늘어나 그 주기가 정글이 완전히 화복할 수 없는 4~5년으로 짧아졌습니다. 현재 첸나 재배는 정부에서 장려하지 않고, 예전에 이 목적으로 쓰던 대부분의 땅은 그에 적합하지 않게 영구적으로 농사짓게 되었습니다.

 

바라밀.

 

 

말라리아의 전통적인 특효약을 정부가 금지했다

 

G : 실제로 모든 전통식에는 약효도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효과적인 말라리아 전통요법도 있었나요?

T : 매우 효과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보통 알려져 있듯이 반자Banja나 간자-마리주아나Ganja-marijuana를 씁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약품의 하나로, 예전에는 ‘온 세계에 이길 수 있는 잎’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약효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루로 내 홍차처럼 우려서 자게리jaggery(Kittul palm으로 만든 설탕)를 넣습니다. 그것은 말라리아에 유일하게 효과적이었는데, 해충에도 유효했습니다. 또 피에 흡수되는 시간을 줄이려고 우리는 다른 먹을거리와 섞어서 그것을 먹기도 했습니다. 벌꿀에도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구나세카라 : 16세기에 스리랑카에 난파되어 왕의 죄수로 17년 동안 지낸 영국인 로버트 녹스Robert Knox는 반자를 실론의 말라리아 요법이라 불렀습니다. 그 식물은 ‘세 세계의 지배자’라고 불렸습니다.

 

G : 약용으로 아직도 반자를 씁니까?

T : 아니요. 지금은 정부에서 금지했습니다.

환경에 맞지 않는 일본의 모내기 기술을 정부가 강제하다

 

G : 어린모일 때 모내기하여 수확량을 늘린다고 하는데, 이것을 하려고 합니까?

T : 정부에서는 그것을 강제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이 기술을 일본인에게 배웠습니다. 일본의 벼농사 지역 대부분에는 보통 3주일 정도 이어서 서리가 내리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때 벼가 논에 있으면 손상을 입습니다. 그래서 일본인은 온실 안에서 씨앗을 심어 서리로부터 보호하고, 논에 모내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스리랑카에서는 모내기한 뒤에 모가 아프다는 걸 알면 회복에는 최대 2주일이 걸립니다. 이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화학비료를 쓰는 것이고, 약한 벼의 해충에게는 농약을 뿌리는 것입니다. 모내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첸나 농사나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등 다른 활동을 방해합니다. 정부에서는 두그루짓기가 아닌 세그루짓기를 해야 한다고 열성입니다. 정부의 주장은 근대농법에 따를 때 가능한데, 벼멸구가 영구히 서식할 수 있는 곳을 만든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시간이 걸리며 사회생활을 포함하여 우리의 여가 활동에 참견하는 셈입니다.

 

 

트랙터는 땅심을 저하시키고, 실업을 늘린다

 

G : 트랙터를 쓰려고 했습니까?

T : 저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많은 농민이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소만큼 좋지 않습니다. 한 쌍의 물소는 약 900kg의 무게이고, 그 발은 논의 흙을 밟는 데에 알맞은 모양입니다. 그 결과 논에는 물이 빠지는 걸 줄이는 점토와 딱딱한 표면이 형성됩니다. 한편으로 진흙 위쪽을 휘저어 무르게 합니다.

물소는 1년에 약 680kg의 똥을 싸고, 오줌도 많이 쌉니다. 모두 엄청 땅심에 공헌합니다. 한편, 트랙터는 논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트랙터가 지나간 곳은 점토층이 파괴되어 물이 지하로 침투됩니다. 트랙터를 쓰면 대량의 물이 필요한데,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될 겁니다. 또 흙을 뒤섞어서 가벼운 유기물이 표면에 떠올라 홍수 때 떠내려가 버립니다. 그래서 트랙터를 쓰면 땅심의 저하로 이어지는 겁니다. 트랙터는 똥이나 오줌도 싸지 않고, 흙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공헌하지 않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식사에 매우 중요한 우유와 기ghee(불순물을 뺀 탈지유), 커드curd도 만들지 못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것은 번도 못합니다. 한 대가 죽으면 다른 트랙터를 사와야 합니다.

물론 트랙터는 노동력을 절감시키고 늘 얘기하지만, 저의 직업은 늘 논밭에 나가야 하는 농업입니다. 그것이 저의 삶입니다. 물론 저는 하루 종일 자고 싶지도, 이웃과 한담을 나누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높은 실업률의 나라에서 노동 절약의 핵심이 무엇인가요. 옛날에 노동 절약 장치는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가족과 지역사회가 온전하여, 충분한 사람들이 쟁기질, 씨뿌리기, 수확, 저수지 유지에 나섰습니다.

저수지 부흥에는 전통 문화의 부흥도 빠질 수 없다

S : 만약 그런 협동이 없었다면 저수지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나 폴로나루와Polonaruwa 문명도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어쩌면 현 인구와 필적하는 1500만 명이란 인구도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G : 정부는 지금 옛 관개 체계를 복구하려 하지는 않나요?

세나나야케 : 그들은 세계은행의 원조로 많은 저수지를 복구했습니다. 하지만 큰 저수지만 그렇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큰 저수지는 마을의 작은 저수지가 침전물로 막히는 경우에만 유용합니다. 그것들을 유지하는 것이 관개 당국의 일인데, 관료 제도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마을의 사회구조가 붕괴된다면 침전물로 막힐 겁니다. 전통농업을 회복하고 싶다면 먼저 사회생활과 문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T :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복구해야 하는 것은 저수지가 아니라 모든 저수지 농사의 체계입니다. 관료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5개 유형의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먼저 마을의 위에는 정글에 파 놓은 숲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관개가 아니라 정글에 사는 야생 동물에게 물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몇 천 년이나 걸려서 동물들은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배웠고, 물을 구하려 마을에 내려와 농업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저수지는 산의 저수지입니다. 그곳의 목적은 운하가 아니라 첸나에서 농사짓는 물을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포타 웨팅PPota Wetie으로 알려진 모래막이 저수지입니다. 그것은 쉽게 준설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네 번째는 저장용 저수지로서 보통 그것은 2개가 같이 있어 쌍둥이 저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곳은 차례대로 쓰여서 한쪽이 유지되는 동안 다른 하나가 쓰였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마을 저수지로 이어졌습니다.

S : 이러한 저수지는 전통 농촌에 꼭 필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우리는 사원이나 논도 없는 건조한 지역의 저수지가 없는 마을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마을의 세 가지 기본 구성요소는 사원(불사리탑), 논(Kumbura), 저수지(Wewa)였습니다. 물론 테네콘 씨가 말했듯이, 그것 말고도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위쪽의 정글, 채소밭과 첸나 농사가 이루어진 떨기나무숲입니다.

T : 물론입니다.

 

G : 전통적인 마을은 어떠했습니까?

T : 집들을 매우 가깝게 붙여서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귀중한 땅을 최소한으로 차지하도록 했습니다. 이 배열은 마을의 빠질 수 없는 협동을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면 한 여성이 여러 이웃의 아이를 맡았습니다. 작물 수확과 저수지를 유지하는 등 많은 사람이 필요할 때 이것은 중요했습니다.

 

G : 저수지를 유지하는 조직은 어떻게 되나요?

T : 그것은 왕의 권한인 라자카리야Rajakariya 봉사의 일부였습니다. 누구나 1년에 40일은 이 봉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왕의 개인적인 욕심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를 위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구나세카라 : 실제로 어떤 왕은 라자카리야의 일이라며 캔디Kandy에서 자신의 왕궁 정면에 있는 인공 호수의 진흙을 치우라고 시켰는데, 사람들이 ‘이는 지역사회의 일이 아니다’라며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왕의 개인적인 책임이라 개별적으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S : 물론 영국인들은 라자카리야의 완전한 원칙을 오해하여, 학정이라 여기고 캔디의 봉건적인 과거의 유물이라며 철폐시켰습니다. 이는 영국인이 지금까지 한 일 가운데 가장 파괴적인 일의 하나였습니다. 이 나라에서 협동의 원칙을 파괴한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초보적인 모양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공익을 위하여 아직도 1년에 14일은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970년에 관개 당국이 최종적으로 폐지한 관습입니다. 관료들은 마을 사람들이 협동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봉사를 위한 수요를 감소시켰습니다. 만약 라자카리야 체계가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면, 관개 당국의 관료들은 전혀 필요 없을 겁니다. 물론 지금은 저수지를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책무이지만, 그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G : 저에게 말한 모든 이야기를 통해 서양식 기술 농업의 모든 선물을 완전히 거절하는 것이라 해석해도 좋습니까?

T : 그렇습니다.

 

G : 옛 농민들의 전통농법을 좋아하는 거네요.

T : 네, 좋아합니다만 모든 여건이 가능하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관점으로 보면, 저는 ‘자급 농민’이기에 가난합니다. 서양식 교육도 받지 않아서 무교육자입니다. 특히 저의 모든 지식, 전통과 문화는 계량화할 수 없습니다. 정규 경제로도 다룰 수 없기에 실업자라고 합니다. 저는 시장에 공헌하고 있지 않으며, 거지라고까지 불렸습니다.

 

 

스리랑카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S : 이 모든 것이 금세 바뀔 거예요. 당신이 모범이 되어 우리의 전통을 배우려고 젊은이들이 모일 겁니다. 지금의 경향은 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습니다. 플랜테이션을 계속하려고 정글을 모조리 베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례가 없는 속도로 토양침식이 늘어나고, 저수지는 진흙으로 틀어 막히고 있습니다. 모래막이 저수지나 쌍둥이 저수지, 마을의 저수지를 유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완전히 침전물로 저수지가 막힌 마을도 존재합니다. 당장은 누구나 시내와 도시로 이주하려 합니다. 현재 콜롬보에는 10년 전에는 없었던 커다란 빈민가가 있습니다. 지금의 경향이 계속되면 콜롬보는 캘커타처럼 되어 버리겠지요. 사람들은 자신의 식량을 시장경제에 의존하게 되고, 그 가격은 오르고 있습니다. 정부는 사람들을 먹이는 일보다 수출하는 돈벌이작물을 생산하려 하고, 습지 지역에서 우리 토지의 절반이 묵혀지고 있습니다. 또는 마하웨리 계획을 세워 커다란 댐 들을 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의 농업 체계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물론 현재 우선시되고 있는 개발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를 서양과 같은 열대판 산업 국가로 바꾸려는 시도는 자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섬뜩한 영양불량과 기아를 가져올 뿐입니다. 이 스리랑카에 있어야 할 것은 과거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농장 앞에 선 테네쿤 씨.

 

 

<참고자료>

Edward Goldsmith, Traditional Agriculture in Sri Lanka, interviews Mudyanse Tennekoon, Goviya: Traditional Sri Lankan agriculture,2000.

 

 

translated by 김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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