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농경사 권1



대담   유라시아의 풍토와 농경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郞




풍토와 농경


사토; 오늘은 많은 사람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사키 선생에게도 참석해 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빨리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연구 프로젝트에서는 농업이란 것을 다시 한번 근본에서부터 생각해보자는 큰 주제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1만 년 동안의 농업과 환경이란 것이 지금까지 인류에게 본질적으로 어떤 것으로 이어져 왔을까?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앞으로 미래의 농업의 자세,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생각하기 위한 대비를 하고 싶다. 즉, 후속세대의 농업을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을지를 고안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좀 역설적인 주제를 내세운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주제이고……


사사키; 매우 선풍적이네요.


사토; 원죄론이란 사고방식이 있어서 대저 농업은 인류에게 나쁜 것이란 사고방식이 있지만, 그렇게 말해 버리면 너무 노골적이라 맛도 정취도 없기에…… 아까 이야기에서는 없었지만 뭐가 어떻게 되면 맛이 없을까, 뒤집어 생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놔두면 환경과 어느 정도 조화를 꾀할 수 있고, 또는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걸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세계의 …… 라고 하더라도 아프리카와 신대륙까지를 포함하여 의론할 만한 힘도 시간도 지금은 없기 때문에, 우선 유라시아에만 주목하여 이야기를 진행하려 생각합니다.


사사키; 일본의 농경을 생각만 해도 유라시아, 즉 유럽부터 아시아에 걸친 대륙과 그 남쪽에 있는 여러 도서의 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역의 1만 년 정도의 역사를 배경으로 고려하면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더구나 미래는 어떻게 내다볼지가 이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의 문제 같네요. 따라서 오늘은 조금 큰 시야부터 유라시아의 농경사, 농경문화사 같은 전체적 문제를,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귀하를 상대로 하여 생각해 나아가도록 하겠네요.


사토;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시작으로, 한 장의 지도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사사키; 유라시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도네요.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사토; 이것은 독일의 기후학자 W. 쾨펜(1846-1940)이 고안한 '기후 구분도'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지도입니다. 이 유라시아의 기후도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풍토 -인간학의 고찰>에서 문제삼는 세 가지 '풍토'를 기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의 남쪽 반부터 중국의 남부, 동남아시아의 대륙부를 지나서 인도의 동부에 걸친 지역이 '계절풍 풍토'. 그 다음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즉 유럽을 포함한 지역이 와츠지의 말을 빌리면 '목장의 풍토'. 그 다음 그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 '사막의 풍토'. 이 세 가지 정도를 무대로 하여 농경이란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사키; 어쨌든 농경이란 건 기본적으로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기에 자연조건의 특색을 배경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기후조건을 고려하는 것이 유라시아의 농경을 생각할 때 대략적인 틀 짜기가 되기에 이 그림이 이번 토론에서는 기본적인 지도라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 말씀드렸듯이 쾨펜이라든지 누구든지 좋습니다만, 기후 구분이란 건 전체적으로 추운 곳, 따뜻한 곳, 더운 곳이란 온도 조건과 비가 많은 습윤한 곳과 건조한 곳이란 건습 조건(기타 강수 계절도 있지만) 두 가지를 조합하여 생각합니다.

한편, 와츠지 데츠로라는 철학자가 1927년에 유럽으로 유학을 갔을 때는 배로 쭉 프랑스의 마르세이유까지 갔습니다. 그 길에 인도양과 인도에서는 혹서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공기가 매우 건조하다. 그 다음에 유럽에 도착하면 지중해 연안은 매우 환하다. 그렇지만 독일에 가면 그곳은 아주 음울하고, 숲의 세계이다. 그와 같은 인상을 바탕으로 '풍토'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리고 그 '풍토'가 인간의 존재든지, 문명이든지에 주는 영향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되었죠. 그 인상을 바탕으로 <풍토>라는 책을 쓴 것이죠. 위의 지도는 그러한 와츠지 씨의 생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크게 나누어 본 것이죠.

그래서 사토 씨, 문제는 지도 안의 굵은 선인데 이건 무엇입니까?


사토; 지도에서 일본 열도의 중앙부부터 중국을 통하여 히말라야 남단을 서쪽으로 이어진 굵은 선 말입니까? 그건 보리의 품종을 구분하는 선입니다. 보리의 이삭을 보십시오(그림4-1). 이건 옛날부터 유라시아에 있는 작물입니다. 보리는 그림의 가장 왼쪽 끝에 있습니다만, 이들을 대학원생에게 그 이름을 말해 보라고 하면 재밌어요. 반 정도는 틀립니다.



그림4-1 유라시아의 주요 곡물. 오른쪽부터 벼, 조, 피, 향모, 기장, 수수, 밀, 보리.



사사키; 요즘 농학부 학생은 반도 모를 거예요. (웃음)


사토; 반 이상 모를 거예요. (웃음) 가장 왼쪽이 밀이고, 오른쪽이 보리입니다. 타카하시 류헤이高橋隆平(1912-1999)라는 선생이 말씀하셨는데, 당시의 말로 '동아시아형' 보리와 '서구형' 보리 두 종류가 있다는 유명한 논문을 1955년에 발표했습니다.


사사키; 오카야마 대학의 선생이셨죠. 확실히 보리의 탈립성을 방지하는 유전자 조합의 연구에서 세계의 보리 품종에 서쪽(W)형과 동쪽(E)형이 있다고 기술되었죠.


사토; 그러한 것을 말하고 계십니다. 여러 보리 품종의 유전적 성질을 조사하면, 몇 가지 성질과 그 유전자의 분포에 지리적인 특이성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E형의 품종군에만 있는 유전자가 몇 가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찰보리라든지 쌀보리라든지……


사사키; 쌀보리라는 건 보리의 껍집이 잘 떨어지는 것이죠.


사토; 그렇습니다. 반대의 성질인 겉보리에서 종자는 풀 같은 물질로 '겉껍질'에 달라붙어 있는데, 쌀보리에서는 성숙기에 이 풀의 힘이 약해져 종자가 '겉껍질' 안에서 벗겨지듯 떨어집니다. 그래서 익은 이삭을 떨면 버석버석 소리가 나지요. '미숫가루'라든지 '보릿가루'로 쓰는 것이 쌀보리, 보리차로 쓰는 것이 겉보리입니다. 우선 굵은 선의 남동쪽에도 쌀보리 외에 겉보리와 메보리도 존재한다는 걸 주의하세요.


사사키; 유라시아 대륙의 쭉 서쪽부터 북쪽에 걸쳐서가 'W형 보리'의 분포 지역이고, 그 선보다 동쪽이 대략 'E형 보리'가 분포하는 지역이며, 이 선이 계절풍 지역과 건조 지역을 나누고 있는 선에 약간 가까운……


사토; 아뇨, 약간 가깝다기보다는 매우 잘 맞습니다. 잘 찾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잘 맞습니다. 


사사키; 요컨대 계절풍 지대는 기후가 온난하고 여름에 자주 비가 내리지요. 지도에서는 연간 강수량 400mm 선이 그려져 있네요. 이 400mm 선의 안쪽, 즉 강수량이 그 이하인 지역이 와츠지 씨 식으로 말하면 '사막의 풍토'입니다. 다만 이 지역 전부가 사막은 아니고, 반건조의 초원 지대도 꽤 넓죠. 맥류의 원산지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지요.


사토; 네, 대개 들어 있습니다. 보리와 밀의 원산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부르는 지대로, 이 지도에서는 카스피해의 남부에서 서쪽의 400mm 선을 따라서 겹쳐져 있습니다. 밀 가운데 '보통 밀'이라 부르는 우리가 지금 빵과 라면으로 먹는 밀에 대해서는 여기보다 약간 동쪽, 아나톨리아부터 카스피해의 남안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사사키; 400mm 선보다도 서쪽의 '목장의 풍토', 즉 지중해 연안의 지대는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나무가 드문 지대이고, 거기부터 알프스를 넘어 북쪽은 일반적으로는 산림 지대, 구체적으로는 졸참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주체로 하는 낙엽광엽수림이네요. 이 산림대는 쭉 유라시아의 북쪽부터 동북아시아까지 뻗어 있지요.


사토; 유라시아의 쭉 북쪽을 타고 그 낙엽광엽수림대는 옛 만주(중국 동북부)와 조선반도 북부를 거쳐 일본 열도의 동북부까지 닿아 있습니다.


사사키; 대충 그렇게 큰 범위 안에서 와츠지 씨가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건 동남아시아 섬들의 세계. 와츠지 씨는 그곳에는 가 보지 않았다. 유럽으로 배로 유학을 갈 때 여기는 들르지 않았다.


사토; 아뇨, 들렀죠.


사사키; 뭐, 싱가포르 정도는 들렀을지 모르지만, 섬에는 가지 않았다. 지구연(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타치모토立本 소장 등이 조사한 인도네시아 등은 간 적이 없다. (웃음)


사토; 옆은 스쳐 갔을지도요. (웃음)



종자번식과 영양번식


사사키; 그런데 지도에는 동남아시아 대륙부터 도서부에 걸쳐서 큰 원이 있으며 여기에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라고 적혀 있고, 그 옆으로 '종자번식'과 '영양번식'이란 굵은 녹색의 화살표 사선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금 설명해 주세요. 


사토; 이건 최근 내가 고안한 축입니다. 갖가지 재배식물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조사해 보면 맥류가 생긴 곳, 맥류는 완전히 한해살이인데 대부분은 가을에 그 종자를 뿌린다. 매우 추운 곳에서는 봄에 종자를 뿌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렇게 봄에 뿌리면 가을에, 가을에 뿌리면 봄에 꽃이 피어서 종자를 얻을 수 있다. 종자를 얻으면 부모인 식물은 완전히 죽습니다. 맥류만이 아니라 잡곡류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식물을 한해살이 식물이라 부르는데, 이런 식물이 생긴 곳이 유라시아에서는 지도의 왼쪽 윗부분입니다. 


사사키; 위라고 하기보다는 한가운데 왼쪽 부근. '사막'이라는 문자 위에 해당하네요. 그런데 일본어는 편리하여 맥류라 하면 보리도 밀도 모두 포함하지만, 영어 등의 서구어에서는 맥류란 단어는 없지요(표4-1).




잡곡에 관한 이름의 분화

맥류에 관한 이름의 분화

잡곡 농경문화

벼, 조, 수수, 기장, 피 등 종류마다 한자로 표시하는 개별 이름이 있고, 총칭하는 명사가 없다.

맥류란 총칭 명사만 있고, 개별 종류에는 대, 소, 연 등의 형용사를 붙여서 구별한다.

맥류 농경문화

millet이란 총칭 명사만 있고, 개별 종류에는 여우꼬리, 보통, 손가락, 농가 마당 등의 형용사를 붙여서 구별한다.

보리, 밀, 귀리, 호밀 등 종류마다 개별 명칭이 있고, 맥류에 해당하는 총칭 면사가 없다. 

표4-1 잡곡 문화와 맥류 문화에서 작물 이름의 분화. 잡곡 농경문화권의 언어를 중국어, 맥류 농경문화권의 언어를 영어로 대표하여 대비했다.



사토; 없지요. 그런데 최근 저는 무리하게 맥류라고 말하거나 적어 보는데, 이것이 제법 외국인에게 받아들여지네요. (웃음)


사사키; 원래 서구어에는 밀이라든지 보리라든지 호밀이라든지 귀리 등 각각의 개별 식물 이름이 있고, 맥류라는 총칭 명사는 없다.


사토;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 잡곡이네요. 일본어에서는 피, 기장, 조 등 정확하게 개별 이름이 있는데, 영어 등에서는 개별 이름이 아니라 '밀렛'이라 총칭한다.


사사키; 지금 '맥류'의 산지라고 하는 곳은 밀도 보리도 포함하고 있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아마 귀리 등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과연. 그들은 모두 한해살이이고. 


사토; 종자로 증식한다. 그래서 한해살이라면 부모가 죽어 버린다. 그러한 종류이지요. 그런데 오른쪽 아래의 동남아시아 쪽을 보면……


사사키; 영양번식 식물의 세계이다.


사토; 그렇습니다.


사사키; 영양번식이란 건 어떤 것?


사토; 종자가 아니고 뿌리 나눔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증식하는 겁니다.


사사키 ; 뿌리 나눔이라든지 포기 나눔이네요. 경우에 따라서는 접붙임 같은 것이네요.


사토; 접붙이기나 꺾꽂이 같은 겁니다. 꽃을 피워서 다음 세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와 같은 식물입니다.


사사키; 종자가 없는 건?


사토; 종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종자를 만들지 않는다. 혹은 종자는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지요. 전형적인 것으로는 토란이라든지 참마(그림4-3), 바나나 등입니다.



토란의 다양한 형태. A: 기는 줄기를 가진 야생형. B: 열대에서 많이 재배되는 어미토란형. C: 동아시아 온대권에 많은 새끼토란형.



통가의 참마 A-H: Dioscorea alata. I: D. pentaphylla. J: D. nummularia K: D. euculenta


그림4-3 대표적인 영양번식 식물 <덩이뿌리와 인간(イモとヒト) -인류의 생존을 뒷받침한 뿌리식물 농경>에서




사사키; 바나나는 전형적인 영양번식 식물이라 하겠네요. 바나나는 과실 안에 종자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종자로는 번식하지 않고 포기 나눔으로 대를 늘려 간다.


사토; 그렇네요. 일반적으로 영양번식 작물을 '뿌리 재배 작물'이라 합니다만, 이용하는 부분은 다르다. 어느 쪽이든 뿌리 나눔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증식하는 것이 '영양번식' 식물입니다. 그래서 이들 작물의 선조종의 존재는 필시 남쪽 섬들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사키; 요컨대 '영양번식'이란 연중 고온이고 다습한 열대 산림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번식의 양식이죠. 


사토; 어지간하면 계절풍 지대와 열대 아시아 섬들의 토지에서는 무엇인가 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곳에서 작은 종자가 탁 떨어지거나, 사람이 그것을 뿌리거나 해도 좀처럼 살아 남지 못하지요.


사사키; 그러니까 그러한 곳에서는 종자번식과 다른 영양번식 식물을 주체로 한 '뿌리작물 농경'이 발달했다는 것이네요. 그에 대해서는 또 나중에 문제로 삼고 싶습니다.

어쨌든 건조 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종자번식의 농경에서는 주작물로 맥류와 잡곡과 콩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뿌리작물 농경에서는 토란과 참마와 바나나와 사탕수수와 빵나무 등이 대표적인 작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계절풍 지대는 어느 농경 유형에 속하는 겁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벼가 많은 곳은 계절풍 지대이지요. 벼라는 식물은 어느쪽입니까?


사토; 이것은 재미난 문제이네요. 둘 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르다는 사람도 있겠지요. 벼라는 건 옛날부터 말하듯이 자포니카와 인디카라는 두 가지 집단이 있지요. 자포니카라는 장강 유역에서 발생한 유형의 벼는 작물로는 한해살이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가을에 벼베기를 하면 밑동에서 '움돋이'가 생기지요. 그 움돋이에 바로 몇 센치미터 정도의 이삭이 생길 수 있습니다(그림4-4). 



그림4-4 움돋이



사사키; 예를 들면, 타네가시마 등에서는 움돋이를 '힛쯔'라 부르고, 예전에는 그것을 키워서 움돋이의 종자를 수확했습니다. 그러한 사실도 있기에 벼라는 건 원래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사토; 자포니카 벼는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또 하나의 집단은 인디카인데, 자포니카 등에 비하여 움돋이가 나오는 게 좀 적다. 더욱이 거기에 이삭이 나오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결국 인디카라는 벼는 한해살이에 가깝다. 그래서 지도의 녹색 선 위로 가면,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에 더 가까운 곳의 자포니카는 약간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진다.


사사키; 이 지도에서 말하면, 계절풍의 풍이란 글자 근처의 둥그런 부분인데 그에 해당하는, 즉 장강 중하류가 자포니카의 기원지라고 사토 씨는 생각하고 있지요.


사토;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벼란 작물은 아시아의 계절풍 지대, 즉 인도 아대륙부터 중국 대륙, 일본 열도, 동남아시아까지 오늘날에는 널리 재배되고 있지만, 어느 쪽이냐 하면 자포니카는 원래 영양번식을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에 대하여 인도에서 그 뒤에 재배된 인디카는 자포니카에서 나왔다는 가설을 사토 씨는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인디카는 자포니카에 견주어 영양번식을 하는 성질이 꽤 적다는 것이네요.


사토; '자포니카에서 나왔다'란 것은 아니고, 자포니카의 유전자를 '획득한다'는 겁니다.


사사키; 어렵네요…… '유전자를 획득한다'라는 표현을 한다면,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렵네요. (웃음) 여하튼 자포니카란 벼는 원래 영양번식의 성질이 있다. 그러나 벼로 먹고 있는 건 종자를 먹는 것이고, 지금 우리는 자포니카의 종자를 심어서 재배하며, 포기 나눔으로 증식하거나 하지 않는다. 왜 원래 영양번식의 성질을 지닌 자포니카가 종자번식으로 바뀐 것입니까? 벼농사 기원론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점은 어떻습니까?


사토; 그것이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인데, 하나의 가설로 이는 벼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식물에게 공통의 성질이지만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 기후가 나빠진다든지, 건조해진다든지……


사사키; 압박을 받는 거네요.


사토; 그렇습니다. 그러하면 지금까지는 푸르러서 자주 종자를 맺지 않던 식물이 서둘러 종자를 맺게 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식물에게도 공통입니다. 그럼 자포니카의 벼가 종자번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냐면,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시대의 기후 한랭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만 1천 년 정도 전에 지구는 급격하게 추워졌다. 그러한 시기에 그때까지는 포기 나눔으로 번식을 했던 자포니카의 원시적인 유형이, 영거 드라이아스 한랭기에 이르러서 종자를 맺게 되었다.


사사키; 어쨌든 그러한 모양으로 종자번식을 하게 된 벼가 그 뒤 계절풍 지대에 퍼져 그 주작물이 된 것이네요.


사토; 그리고 그것이 수 천 년을 지나 1만 년 정도 전의 일이죠. 대략 이야기하여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자포니카 유형의 재배 벼가 열대 쪽으로 전파되어 가서 그때에 열대에 있던 야생 벼와 자연교배하여 생긴 것이 인디카였다고 생각합니다. 인디카의 벼는 한해살이인 본래의 야생 벼의 성질을 이어받아 한해살이 풀이 된 것이 아닐까? 요컨대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건조 지대에 있던 맥류부터 동남의 도서 세계의 뿌리작물 농경권의 영양번식 식물에 이르기까지 깨끗하게 선 위에서 경향이 생겼을 겁니다.



농경과 가축의 결합


사사키; 그렇다면 유라시아의 농경을 크게 나누자면, 서쪽에서는 건조 지대 기원의 맥류를 주작물로 하는 농경이 퍼져서 맥류농사 농경 지대가 되었다. 동쪽은 종자번식을 하는 자포니카 벼를 중심으로 하면서 벼농사가 퍼져, 그 속에서 인도 아대륙에서는 인디카도 생겨나고, 계절풍 지대 전체로서는 벼농사 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는 원래 영양번식 식물의 지대로, 바나나와 토란 또는 참마 종류 등을 중심으로 한 뿌리작물 농경이 옛날부터 성립되었다. 큰 배치는 그런 것이네요.


사토; 지도의 한가운데부터 오른쪽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다시 한번 이야기로 돌아가, 지도의 왼쪽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와츠지 씨가 이에 대해 '목장의 풍토'라고 했지만, 몇 번 읽어도 감이 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와츠지 씨는 '목장'이란 단어로 유럽은 일본과 달리 유축농업이 성행하고,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가축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그 강한 인상을 기술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독일 북부의 호텔 등에 묵으면 햄과 소세지 등은 정말로 여러 종류가 나오더군요.


사토; 대체로 맛있지요.


사사키; 확실히 유럽의 문화, 그 기초가 되는 서아시아 기원의 맥류 농경문화는 우리처럼 그다지 목축과 관계 없는 민족문화와는 크게 다를 겁니다. 이 맥류를 주작물로 삼는 농경은 밭농사 문화이고, 밭농사만 지으면 양분이 고갈되어 황폐해진다. 그래서 목축과 결합하여 돌려짓기하는 농법이 필요해진다. 중세 독일사에서 유명한 삼포농법이란 건 여름 작물과 겨울 작물의 경지 구역에서 곡물을 재배하고, 휴한지에서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지요. 그 휴한지에는 개인 소유의 농지가 있어도 휴한기에는 완전히 공동의 목초지가 된다. 그와 같은 관계에서 공유라는 제도가 유럽 안에서는 나온 것인데, 그러한 휴한 방목, 즉 가축 사육과 결합된 농경이 있는 것이지요.


사토; 가축이라 하는 건 어느 의미에서는 맥류 농경의 시작부터 어른어른 보였다 안 보였다 하지요.


사사키; 어른어른이라기보다 염소와 양은 맥류 농경의 기원 단계부터 확실히 나타납니다. 이 농경은 시작부터 가축과 결합된 것이 특색이라 생각합니다. 맥류를 재배화하는 것과 그 초원에서 무리로 이동하는 동물(양, 염소)를 가축화하는 것이 병행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네요. 어느 쪽이 빠른지는 의론이 있겠지만, 저도 그것은 완전히 병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맥류 농경이란 건 주로 양과 염소를 중심으로 하는 목축이 시작되는 것과 병행하여 시작했다.


사사키; 그 다음에 나중에 소가 가축화되어 맥류농사 농경에 더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이들 가축은 모두 무리 동물이란 것이 특징이지요. 유명한 <농업의 기원>을 쓴 C. O. 사우어Sauer(1889-1975)라는 지리학자가 있는데, 세계의 가축을 두 종류로 나누어 무리 동물과 가축으로 분류했습니다. 가축, 즉 마을 안의 각 세대에서 사육하는 가축의 전형이 돼지와 닭 등입니다. 그에 반해 무리 동물은 주로 초원에서 가축군으로 방목의 형태로 사육하는 발굽 동물로, 건조지대의 초원에 결합됩니다.

돼지를 대표로 하는 가축은 어느 쪽이냐 하면 산림 지대에 결합된다. 유럽의 북쪽은 산림 지대이기에 돼지 사육이 성행하고, 그 산림대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쭉 동쪽까지 연속되어 동북아시아에서도 잡곡과 돼지 사육이 결합된 문화가 나옵니다. 그외에 아시아의 계절풍 지역의 벼농사 지대와 그 남쪽의 열대 산림대의 뿌리작물 농경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 가축=돼지 사육입니다. 유라시아의 농업이란 것은 서쪽에서는 양과 염소 등의 무리 동물, 동쪽의 벼농사 지대는 돼지를 주로 한 가축 지대입니다.

또 말하는 걸 잊었는데, 서쪽 건조지대에서는 양과 염소 외에 나중에 소와 말 등의 대형 짐승도 가축화되어 이들 무리 가축의 사육과 밀접하게 결합된 중요한 문화가 젖의 문화입니다. 실은 동쪽 문화에서는 본래 젖의 문화가 빠져 있습니다.


사토; 동과 서의 차이이지요.


사사키;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 근처 소산韶山이란 곳에 모택동 씨의 생가가 있습니다. 조엽수림대입니다. 가서 보면, 모택동 씨가 태어난 집에는 꽤 큰 돼지우리가 있다. (웃음) 역시 저 주변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두 돼지를 키우고 있습니다(그림4-5).



그림4-5 소산에 있는 전통 농가. 어느 농가에나 큰 돼지우리가 있다.



사토; 동쪽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돼지와 가금류(닭과 집오리 등)이지요. 새도 매우 특징적입니다. 그것과 식물화로는 물고기가 지닌 역할도 참으로 크다고 생각하네요. 벼논양어라는 말이 있는데, 저건 계절풍 아시아의 벼 생산의 장에서는 항상 물고기 -물론 이것은 밀물고기이지만- 를 잡았다. 저는 이것을 '쌀과 물고기의 동소성'이라 쓰고 있습니다만, 이 벼논양어도 조엽수림대부터 남쪽으로 펼쳐진 지역의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논의 시작과 벼농사 문화

 

사사키; 문제는 벼는 앞에서도 논했듯이, 종자번식을 하게 되어 작물로 성립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논에서 재배되었던 것입니까?


사토; 벼의 근간이 된 식물, 적어도 자포니카의 원종에 관한 한은 물이 철벅철벅한 곳이 생육 적지이지요.


사사키; 철벅철벅한 곳에서 재배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사토; 아뇨, 단지 그것만으로는 재배화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하네요. 그렇다는 건, 계절풍 지대의 그런 철벅철벅한 곳은 동시에 악어 등의 동물도 있겠죠. 그 다음 말라리아도 있을 것이고, 기타 여러 가지 천적도 있을 겁니다. 인간이 살기 쉬운 곳에는 없겠네요. 벼에게도 경쟁상대가 잔뜩 있을 겁니다.


사사키; 인간이 살기 쉬운 곳이라 하면?


사토; 음. 인간이 살게 된 곳은 좀 더 건조하다. 더구나 그곳에서 계절풍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물이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겁니다. 우기가 되면 물이 모이고, 건기가 되면 빠진다. 그러한 곳은 한해살이 풀밖에 적응할 수 없겠죠. 숲에서는 우기에는 물이 고여서 안 되고, 수생식물에게는 건기에는 강한 건조함 때문에 안 된다. 한해살이 풀만이 지면이 노출되어 있는 곳에서 생육할 수 있는 토지이기에, 아마 그런 곳이 최초의 벼농사가 시작된 곳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즉, 건기의 수위가 조금 오르지요. 그러한 곳이 아닌 한 재배 벼는 기르지 못한다. 역시 늘 습지인 곳은 벼농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매우 원시적인 것은 별도로 하고, '벼농사 문화'라고 말할 정도의 벼농사는 그러한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사키; 저는 '벼농사 문화'라고 할 때는 논두렁과 수로를 지닌 정비된 논이 그 기초에 있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논이란 특유의 생산기반에서 성립하는 논벼농사 농경이라는 것과 논벼농사 농경 이전의 농경은 대단히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논벼농사 농경이란 생산형태가 확립되고, 처음으로 벼농사 사회가 형성되어 벼농사 문화, 벼농사 문명이 나온다. 논벼농사 이전의 농경이란 것은 꽤 원시적인 것으로, 수렵채집 경제와 아직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토; 어제까지 채집하던 사람이 오늘부터 갑자기 벼농사를 개시하는 등과 같은 일은 생각할 수 없다고 보지요.


사사키; 이 시리즈의 안에 나카무라 신이치中村慎一 씨(가나자와 대학) 등도 서술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동아시아의 고고학자 의견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바는 논벼농사 농경이 완성된 건 양저문화 무렵. 기원전 3300년 무렵부터 2200년 무렵까지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상세한 건 여기에서는 생략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상황으로 판단하여 이 무렵이 되면 정비된 논을 지닌 벼농사 농경이 확립하고, 벼농사 문화가 형성되어 지방의 국가도 성립되지 않았나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에 거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벼농사는 벼는 농사지었지만 의지하지 않는, 사실 지금까지도 동남아시아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저는 '원초적 천수답'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벼와 잡곡을 함께 심어서 비가 내린 해에는 벼가 자라지만 비가 적은 해에는 잡곡이 자란다. 밭인지 논인지 알 수 없는 듯한 경지가 많이 있습니다.


사토; 밭과 논이란 명확한 구별은 없었다고 생각하지요. 예전, 미야자키 대학에 계셨던 후지와라 히로시藤原宏志 씨가 강소성 소주시의 좀 동쪽에 있는 초혜산 유적에서 논터를 발견했다고 하여……


사사키; 저, 후지와라 씨가 불러서 그곳에 견학하러 갔습니다.


사토; 아, 가셨습니까? 6200-6300년 전의 유적이지요. 대략 지금의 논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사키; 정말로 작지요. 제2장 그림2-7과 그림2-8이 그 유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구획이 몇 평방미터 정도인 것이 쭉 붙어 있다.


사토; 게다가 움푹하지요.


사사키; 움푹합니다. 그곳이 논 유적이라 하지만, 논이라 좋을지 어떨지 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웃음)


사토; 무리라고 저도 말합니다. (웃음) 그렇지만 이른바 벼잎 세포화석은 나왔지요. 그러니까 후지와라 씨 들은 잎의 세포화석이 나왔기에 이것은 논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벼잎 세포화석의 존재는 다른 생물종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과 마름 등 벼과 이외의 수생식물에는 잎의 세포화석이 없지요. 잎의 세포화석만으로는 다른 생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벼가 벼가 있었다고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벼 이외의 것이 없었다고 하는 증명은 아닙니다. 벼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곳에서 물을 펐을지도 모르고, 수생 동식물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을 저는 역시 상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사사키; 잎의 세포화석이란 건 벼과의 주로 잎 안에 있는 규산체이지요.


사토; 잠깐 사진을 보시지요(제2장 그림 2-2). 이것이 벼잎 안의 기동세포라는 세포에 모인 실리카와 유리질 덩어리입니다(그걸 규산체라고 합니다). 그것이 잎이 말라 버린 뒤에도 흙속에 남아 있다.


사사키; 잎의 세포화석은 벼의 종류마다 다양한 형태로 정해져 있어, 유리질이면서 썩지 않아 잘 남아 있다. 따라서 벼과의 어떤 식물이 있었는지를 고고학으로 실증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사토; 그렇지요. 그래서 대나무에는 대나무 잎의 세포화석, 벼에는 벼 잎의 세포화석이 있다. 그렇기에 벼 잎의 세포화석이 나오면 곧 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벼가 있었다는 증명이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다른 것이 없었다는 걸 유감스럽게도 증명할 수 없다. 그 주변이 어렵지요.


사사키; 이 유적의 상황은 매우 원시적이며, 논이라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래도 좋겠지만. (웃음) 이후 시대의 논두렁이라든지 수로로 정확히 구획된 정비된 논과는 다릅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러니까 잘 정리된 논, 논두렁과 수로로 구획된 생산성 높은 논이 나온 건 동아시아에서는 앞에 서술했듯이 양저문화의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중에 일본 열도의 이야기도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조몬시대의 말기부터 야요이 문화의 시작 무렵에 큐슈 북부 지역에서 출현하는, 예를 들면 이타즈케板付 유적의 논 등은 정말로 멋지게 정비된 것입니다.


사토; 그렇지요. 일본에는 완성형 논벼농사가 생긴 겁니다.


사사키; 그렇지만 그러한 논이 전래하기 이전에도 벼농사는 영위되고 있었기에,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유라시아 전체를 보면 서쪽은 어느 쪽이냐 하면 밭농사로 목축과 젖 문화에 결합된 농경이 있다. 동쪽은 논을 경영하고 무리 동물이 아닌 가축의 사육과 결합된 벼농사 문화가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조금 까다롭게 했습니다만, 문제는 인도 아대륙입니다.


사토; 인도와 인도의 북쪽이지요.

사사키; 네. 인도의 문제는 매우 어렵지만, 인도 아대륙의 농업 지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북서부의 펀자브부터 갠지스 상류에 걸친 맥류농사 지대, 중앙부의 데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잡곡(조) 지대, 수수와 향모 및 잡곡류가 재배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도 아대륙의 아삼과 갠지스강 중하류에 펼쳐지고, 인도 반도의 동서해안에도 분포하고 있는 것이 벼농사 지대입니다.

이처럼 아라칸 산맥에서 서쪽의 벼농사 지대는 매우 큰 논벼농사 지대입니다만 재배하는 벼는 자포니카가 아닌 인디카가 많고, 게다가 잡곡과 맥류농사가 중첩되어 있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인도의 벼농사는 파종과 탈곡의 방법, 젖 문화와의 관계와 가공 쌀 만드는 법 등에서 맥류농사 농경과 잡곡 농경 등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며, 아라칸 산맥에서 동쪽의 벼농사와는 꽤나 다르지요. 


사토; 아라칸에서 서쪽 지역의 벼농사는 동쪽의 벼농사와 완전히 이질적이라 생각하네요.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씨가 말했는데, '"인도에는 벼농사 문화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는 건 역시 확실하네요.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 인도의 벼농사 문화라는 건 언뜻 비슷하나 다른 것으로, 둘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벼농사 문화라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라시아 농경의 북쪽과 남쪽의 퍼짐새


사사키; 에전에 유라시아의 농경을 생각할 때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 유라시아 북부를 동서로 잇는 농경지대의 존재입니다.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북극해로 들어가는 큰강으로 오비강, 에니세이강이 있습니다. 이 두 강의 가장 상류는 알타이산까지 이르고, 그 가운데 오비강의 가장 상류 지역에는 기원전 3-5세기 무렵의 유명한 동결 고분군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파지리크 고분은 고분의 도굴 구덩이 등에서 물이 들어와 그 물이 얼었던 겁니다.


사토; 동결된 맘모스 같은 것이죠.


사사키; 그렇습니다. 큰 목재를 쓴 대형 목곽 무덤에 동결되었기 때문에 안에 있는 유물이 깨끗하게 남았던 겁니다. 그곳에서 페르시아산 커다란 양탄자를 시작으로 마구류와 장식품, 기타 나릇이 달린 마차 등도 출토되고, 말도 몇 십 마리가 묻혀 있었습니다.


사토; 말도 함께 남아 있었던 겁니까?


사사키; 일부는 미이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북방 유라시아 학회를 중심으로 1991년에 러시아와 공동으로 알타이의 우코크 고분을 조사하여, 저도 다른 고고학자와 함께 견학하러 갔습니다(그림4-6). 발굴된 고분은 완전히 동결되지 않아서 잘 되지 않았지만, (웃음) 여하튼 이 부근 알타이산의 북사면부터 산기슭 일대는 쭉 완전한 초원지대입니다.

기원전 3000년대 말 무렵부터 2000년대에 걸쳐서 아파나시에보 문화가 영위되었습니다. 특히 안드로노보 문화는 흑해와 카스피해의 북쪽부터 알타이산에 걸쳐 초원지대에 전개된 스키타이계의 청동기 문화로 가축으로 말을 소유하고, 쿠르간(옛 몽고 무덤)을 만들며, 소규모 농경도 경영하는 목축민의 문화입니다. 그 뒤 이 지역의 문화는 목축의 요소를 차츰 강화하는데, 그래도 관개 조직을 수반한 기장과 조 등의 재배 전통은 기원후 상당히 이후의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림4-6 알타이산의 초원과 유목민 천막. 알타이산과 그 북쪽 기슭에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진다. (사진: 사사키타카아키)



사토; 보리는 어떻습니까?


사사키; 물론 보리도 있었습니다. 기장과 조 등도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부장한 동결 고분은 목축귀족의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들도 농경민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초원지대에 농경이 서쪽부터 동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던 겁니다.


사토; 확실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은 북쪽의 농목문화의 회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농목문화의 길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사막이었는지는 잘 조사해 보지 않아서 알지 못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사키; 지금 어느 사막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잖습니까?  S. A. 헤딘(1865-1952)이 탐험한 20세기 초 무렵에는 현재는 말라 붙어 있는 로프노르 호수는 가득한 물로 칭송되었기 때문에……


사토; 네,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조사하고 있는 건 타림 분지의 동쪽 끝입니다. 여기는 실크로드의 길가이고, 예전에는 꽤 인구밀도가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아까 알타이 산맥의 남쪽에 동서로 지나는 천산산맥이 있고, 그것과 티벳 고원의 북쪽을 경계짓는 곤륜산맥 사이에 있는 타밀 분지는 지금은 아주 건조한 지대이지만, 2000년 정도 전에는 분지의 동쪽 끝에 누란왕국이란 오아시스 국가가 번영했던……


사토; 그렇습니다. 게다가 누란의 아직 전의 시대에, 역시 맥류 농경이 있었지요. '소하묘'라는 유적인데(그림4-7), 새삼스럽게 강좌에 몇 번이나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밀의 종자와 기장의 종자와 함께 소의 모피와 머리뼈, 양과 염소의 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막이라 부르는 저 풍토에도 역시 역사성이 있어서 누란 시기는 이미 건조함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꽤 많은 사람이 농경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축도 하고 있었겠네요.



그림4-7 소하묘 유적(2008년 9월 촬영)




사사키; 그래서 조금 뒤의 당나라 때에 인도로 향하던 현장삼장도 지금 같은 상태의 사막을 지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토; 그렇게 생각하네요. 그가 고창국高昌國을 지났던 때 마중을 많은 사람이 왔지요. 환영 인파에는 여성이 수십 명이나 왔고, 스님도 수천 명이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만약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한 나라를 뒷받침하는 농목업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타림 분지를 지나 '인도로 가는 길'도 천산산맥의 남과 북쪽 기슭을 지나는 '비단의 길'도 예전에는 풍요로운 오아시스와 초원을 동반하는 것으로, 그곳에서는 맥류와 함께 기장과 조 등의 잡곡류가 재배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도 북쪽은 지금은 밀 지대이지만, 원래는 호밀과 귀리를 농사짓고, 오트밀 같은 거친 죽, 거기에 조와 기장 등이 들어간 걸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북방 유라시아의 동서는 이처럼 맥류와 잡곡의 거친 죽이란 식문화를 가진 농경지대와 결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사토; 그렇지요. 그 위에 사막이란 건조의 풍토가 올라타서 목축업 같은 것이 들어왔다. 


사사키; 북쪽에 관하여 말하면, 에니세이강 상류의 타가르 문화기(기원전 10-8세기)에 말이 나오게 되지요. 그 무렵에는 재갈(말의 입에 물려 고삐를 붙이는 도구)이 출현하고, 승마 기술이 발달하며, 그것과 단궁을 쓰는 '기사'의 전술이 한묶음이 되어 전투적인 기마유목민족 문화가 형성된다. 그 뒤 몇몇 민족의 흥망을 거쳐 기원전후에는 어느 종의 목축민에 의한 권력구조가 생겨납니다. 그와 함께 그 권력구조를 뒷받침하는 맥류와 잡곡의 농경이 북방의 초원지대에 존재하고, 그 농경이 동북아시아까지 도달한다는 데 주목하고 싶네요.

여기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앞에 기술했듯이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는 원래 뿌리작물 농경의 지역입니다. 저는 그 일부, 동인도네시아의 핼마헤라섬이란 곳에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적도에 가까운 섬으로, 바나나와 덩이뿌리 종류를 주작물로 하는 전형적인 뿌리작물형 화전 농업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보면, 카사바를 재배하는 밭에 할머니가 수확하러 와서 수확한 카사바의 일부를 그곳에 곧바로 심는 겁니다(그림4-8). 고온다습한 열대 산림 지역이면서 1년 내내 언제나 심기와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수확과 심기가 연속하는 농법이 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바나나 등도 그러한 재배법에 가깝죠. 바나나에는 고정된 수확기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얻을 수 있고, 언제나 포기 나눔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뿌리작물 농경이란 것에는 기본적으로 명료한 수확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장도 없다.

그런데 종자 작물의 지대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종자 작물에는 반드시 정해진 파종기와 수확기가 있어서, 그 수확기를 중심으로 해서 수확 축제가 있고, 수확의 풍성함을 기원하는 의례가 영위되며, 그것을 주관하는 사제가 생긴다. 그래서 그 사제와 왕이 한묶음이 된 사제왕 같은 것이 출현해 왕권이 형성된다.



그림4-8 화전에서 카사바의 수확과 심기(인도네시아 핼마헤라섬 1976년, 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카사바의 덩이뿌리를 수확한 뒤 이어서 그 일부를 잘라서 심는다. 수확과 심기 작업이 여기에서는 일련의 작업으로 행해진다.



사토; 그렇죠. 또, 종자번식 식물의 경우에는 종자를 저장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지요. 


사사키; 네 네, 그 저장을 대량으로 껴안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지요. 그런데 수확기가 확실하지 않고, 저장도 안 하는 뿌리작물 농경의 세계에서는 권력이 발생하는 계기가 부족하다. 따라서 왕권이 발생하고, 왕국이 나타나는 일이 거의 없다. 본래 뿌리작물 농경 지대에는 그러한 권력구조가 나오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토; 뿌리작물 식물은 진화가 매우 느리네요. 식물학적으로 말하더라도 그렇고, 영양번식을 되풀이하는 한 예외는 없겠지만 대부분 진화하지 않지요. 즉, 포기 나눔을 하면 몇 번을 반복해도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쭉 마찬가지이지요. 그러하면 유전적인 개량, 즉 품종개량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도 역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종자번식 식물에서는 인간이 품종개량을 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하면 그에 응하여 유전자의 조합이 얼마든지 변화하여, 그것으로 생산성을 유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왕권의 기초가 되는 수확물의 저장이라든지 증식이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잘 반응하는 거지요.


사사키; 그러니까 그러한 점에서는 유라시아 전체를 보아, 농경이 크게는 동과 서, 서의 맥류, 동의 벼라는 모습으로 대비할 수 있겠는데, 벼라는 건 어딘가에 영양번식적인 성격을 끌어당기고 있는 바가 있다. 그것에 대해 남쪽은 완전한 뿌리작물 농경 지대, 북쪽은 목축에 상당히 의존한 농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문제는 잡곡입니다.


사토; 잡곡에서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피와 조이죠. 피에 대해서는 이전 교토대학에 계신 사카모토 사다오阪本寧男 씨가 일본 원산설을 발표했는데, 조도 동북아시아 기원이란 설이 한때 강했지만 저는 저것은 의심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요즘 미국에서 인도를 연구하고 있는 동료의 연구실에 갔더니 "나는 25년 전 태국에서 조사했을 때의 조 종자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 수확물을 보았는데 확실히 조 같습디다. 그것에 사사키 선생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조는 동남아시아부터 남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도 매우 흔하게 재배하고 있습니다.


사사키; 조는 조금 전 사진에서도 있었네요. 


사토; 네, 그림4-1의 오른쪽에서 두번째입니다. 분명히 조는 한편으로는 어쩐지 북방 문화의 정취가 있지요. 그런데 아까 태국에서 행한 연구에서는 열대에도 조가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간단히 북방기원설이 좋을지.


사사키; 조의 분포는 열대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다고 이전부터 잘 알려져 있어서, 제가 조사한 핼마헤라섬에도 재래종 조가 있습니다. 아무튼 조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어요.


사토;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기장도 그렇지요. 도대체 잡곡의 계통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습니까?


사사키;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좀 더 정리하자면 피는 분명히 아주 오래된 것은 아시아 대륙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홋카이도 대학에 계신 요시자키 쇼吉崎昌一(1931-2007) 씨는 부유선별법이란 방법으로 발굴된토양을 물로 씻어서 그것을 0.45mm라는 매우 가느다란 망으로 선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종자의 파편 등이 나와서, 그것을 현미경으로 보고 동정하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요시자키 씨에 의하면, 홋카이도에서 도호쿠 지방의 북부에 걸쳐서 조몬시대의 전기 무렵부터 피가 출토되기 시작한다. 그 출토 종자는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커져, 조몬 중기부터 후기가 되면 재배 피라고 생각되는 것이 출토된다. 그것을 '조몬 피'라고 그는 부르고 있습니다. 피는 꽤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재배화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연해주까지 넣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사사키; 조에 대해서는 사카모토 씨는 광범위한 현장조사와 재배실험을 행하여, 아프가니스탄부터 인도 북부에 걸친 지역이 지원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북의 황토 대지의 페이리강裴李崗과 츠산磁山 등 약 7000년전이라 하는 옛 유적에서도 조 또는 피라고 추정되는 잡곡이 돼지의 유골과 함께 출토되고 있습니다.


사토; 요녕성 인근에서도 매우 오래된 조가 출토되고 있지요.


사사키; 유라시아의 여기저기에서 조는 오래전 시대의 것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한번 DNA라든지 무언가로 정확히 그 품종과 계통을 재조사하면 좋겠다.


사토; 조금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최종 빙하기 이전의 작물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사사키; 그건 있다고도 없다고도, 잘 말하겠지만서도. (웃음) 아무튼 조라는 작물이 꽤 오래된 것이고, 유라시아 농경사에서도 중요한 작물이란 점은 틀림없다. 그러나 현재 재배되고 있는 옛 품종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일찍 조사하지 않았고……. 어쨌든 유라시아 대륙의 조는 북쪽으로 분포가 확산된 조와 남쪽으로 확산된 조라는, 최소한 두 계통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사토; 그건 사카모토 씨도 이야기하셨죠. 그리고 피도 그렇나요?


사사키; 사카모토 씨는 아이누에서 재배되는 옛 피를 보면,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인근에서 재배되는 피와 매우 비슷하다고 합니다. 즉, 북회노선의 조, 피와 남회노선의 그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꼭 조사해 주세요.


사토; 그것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밀도 아무리 보아도 북회노선, 즉 지금의 실크로드보다 더 북쪽의 경로로 전파되었다고 생각되는 계통의 것과 남쪽에서 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사키; 예를 들어서, 최초로 이야기를 꺼냈던 타카하시 류헤이 씨가 연구한 보리의 E형과 W형이 있는데, W형의 보리는 유라시아의 북쪽 회랑을 지나서 동쪽, 즉 동북 일본에까지 왔지요. 한편 남회노선의 E형이란 건 중국 대륙에서 서일본으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으로 나눌 수 있는 일본의 농경


사사키; 그러한 점을 생각하면 일본이란 곳은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데도, 그 까닭에 유라시아의 농경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네요. 그림4-9는 동아시아의 식생을 주로 <중국식피中國植被>(1980년)을 참고하여 그렸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장강 유역을 경계로 그 북쪽이 낙엽광엽수림대(졸참나무숲지대. 전형적인 건 신갈나무≒물참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온대낙엽광엽수림대), 그 남쪽은 상록광엽수림대(조엽수림대)를 이루고, 그 졸참나무숲지대와 조엽수림대는 일본 열도의 동북부와 서남부에도 이르며, 이 열도의 문화와 농경의 지역차를 만들어내는 기초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몬시대의 인구 분포를 보아도 그 인구의 대부분이 동북일본의 졸참나무숲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정주를 하고 식량 비축이 풍부한 그 문화의 특색은 동북아시아의 졸참나무숲지대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 문화의 그것과 공통되는 점이 많고, 동북아시아와 깊은 관련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4-9 동아시아의 식생과 조엽수림 문화와 졸참나무숲 문화의 분포. 식생의 분포는 주로 <중국식피>에 따른다. 옛 만주를 중심으로 한 낙엽광엽수림대는 물참나무와 비슷한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한 산림대이고, 아무르강 유역과 연해주와 사할린의 아한대침엽수림도 실제로는 침광금강수림의 모양을 취하는 곳이 많고, 일부는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한 졸참나무숲지대와 비슷한 경관을 나타내는 곳이 적지 않다.




사토; 서장의 그림-2는 일본 열도에서 전개된 전통적인 농경의 지역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곳에 실선③이란 선이 있지요. 이것이 위의 지도에서 보시듯 보리의 W형과 E형의 경계선이고, 선의 동북쪽이 W형, 서남쪽이 E형인 보리의 분포 구역입니다.


사사키; 그밖에도 선과 표시가 적혀 있지요?


사토; 네,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느 시기인지에 따라서 이세만과 와카사만을 연결한 선으로 경계를 이루고, 태평양 쪽과 일본해 쪽을 나누는 선으로 구분된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구별하여 정리한 겁니다.

그런데 우선 명확한 건 벼이지요. 조몬 벼농사의 존재가 증명된 유적은 '이세만-와카사만' 선(실선②)의 서쪽이네요. 동쪽에 요시자키 씨가 찾아낸 조몬의 쌀이 하나 있지만, 전체의 경향으로 말하자면 조몬의 벼농사는 이 선의 서쪽에서 전개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요시자키 씨가 발견한 건 실선②의 동쪽 가운데 가장 북쪽, 하치노헤시 카자하리風張 유적의 조몬 후기 주거터에서 나온 쌀인데, 벼가 출토된 건 없어요. 아마 그 쌀은 서일본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몬의 벼농사는 동북일본에는 없었다고 생각해도 좋은 거지요.


사토; 쌀은 있어도 벼농사가 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몬시대에 벼가 재배되었단 건 이 서쪽, 즉 서일본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사키; 그러니까, 조몬시대의 곡물에 대하여 말하면 일본 열도의 동북쪽은 피였을지도 모른다.


사토; 피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피에도 두 가지가 있어서, 동(북)의 피는 돌피(Echinochloa crus-galli)라는 재배형 피입니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4배체입니다. 한편, 서쪽의 피는 물피(Echinochloa oryzicola)라는 논의 잡초, 6배체의 종이란 구별이 있습니다.


사사키; 이 동쪽의 피, 서쪽의 벼라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요시자키 씨가 이미 기술해 놓았지요.


사토; 그 다음에 재래종 보리 가운데 좀 전의 E형 보리라는 것이 서남서 일본에 주로 분포하고, W형 보리가 동북 일본, 특히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의 북부에 퍼져 있었어요.


사사키; 맥류만이 아니고 아시다시피 야마가타 대학 교수였던 아오바 타카시青葉高(1916-1999) 씨가 연구한 재래종 순무에 대해서도 서양종 계통의 순무와 일본종 계통의 순무라는 두 종류가 있어서(그림4-10), 서양종 계통의 순무는 보리의 W형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에 연결되고, 일본종 계통의 순무 그것은 중국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우엉이라든지 삼, 파, 유채 종류 등은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유적을 시작으로 몇 개의 조몬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림4-10 서양종과 일본종 계통의 순무 분포. 서양종 계통의 순무는 지도의 바깥, 도호쿠 지방의 일본해 연안에 많은 걸 알 수 있고, 옛날 대륙엣 직접 건너왔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일본종 순무는 서일본에 퍼져 있다. 교토의 전통식 절임인 센마이즈케千枚漬는 이 일본종 순무로 만든다.



  

 그러한 것은 모두 북쪽에 계통적으로 이어지는 작물이고, 저는 이들에 북회노선의 조와 피 등을 더하여 '북방계 작물군'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 북방계 작물군으로 상징되는 북쪽에서의 농경이 있었지요. 그것은 일본 열도에서는 낙엽광엽수림대, 즉 졸참나무숲 지대의 동일본부터 북일본에 펼쳐지고, 벼를 중심으로 일본종 계통의 순무와 쌀보리(E형 보리) 또는 남회노선 계통의 조와 피 및 토란 등으로 상징되는 농경이 조엽수림대, 즉 서쪽부터 남쪽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것이네요. 


사토; 그리고 생쥐의 계통 안에 무스(Mus)형이라 부르는 것과 카스타네우스(castaneus)형이라 부르는 것 두 가지 유형이 있어서, 쥐의 유전학을 연구하고 있는 이화학연구소의 모리와키 카즈오森脇和郞 씨에 의하면, 도호쿠 지방을 남북으로 분단하고 있는 선의 북쪽은 카스타네우스형이고 남쪽은 무스형이라고 합니다.


사사키; 일본의 농경은 전통적인 재래 작물의 특색으로 보아 북쪽 계통과 남쪽 계통 두 가지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지요. 그런데 조몬시대의 말, 야요이 시대의 시작 무렵에 아까도 서술했던 논벼농사를 수반한 벼농사 문화가 건너와서 일본 열도의 서쪽부터 퍼졌기 때문에, 재래 작물의 동서차, 남북차가 매우 희박해져 버렸던 겁니다. 어느 쪽이든 일본 열도 농경문화의 기층에는 유라시아의 북과 남으로 연결되는 계통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농경의 전통이 있다고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사토; 그렇지요. 그 차이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다고 생각하네요. 그래서 도호쿠예술공과대학의 아카사카 노리오赤坂憲雄 씨가 "여러 가지 일본"이라 말하듯이 똑같은 일이 재배식물과 식문화, 농경문화 같은 측면에서 보아도 역시 동북 일본의 문화와 남서 일본의 문화라는 명확히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어요.  


사사키; 동일본과 서일본에서 언어와 습속, 사회 및 그외의 여러 가지 점에서 지역차가 있는 건 모두 많은 사람에의하여 지적되지만, 그 배후에는 유라시아 농경문화의 계통 차이가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지요, 반영되어 있습니다. 일본 열도에서는 말에도, 문화에도, 인간에도 지역차가 있었을 텐데, 대립 등이란 것을 말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구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일종의 세계화에 의하여 뒤섞여 버렸겠죠. 


사사키; 서일본의 농경문화라고 하면, 일본 열도에서 뿌리작물 농경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됩니다. 

뿌리작물 농경에 상세한 서남일본식물정보연구소의 소장 홋타 미츠루堀田滿 씨에 의하면, 열대 계통의 2배체 미가시키ミガシキ군의 토란과 열대 계통 참마 다이죠ダイジョ의 분포가 중국 남부지방과 필리핀부터 류큐 열도를 따라서 북쪽으로 뻗어서 큐슈와 시코쿠 남부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실 고치현 해안부를 중심으로 열대 계통의 참마 야생종의 하나인 니가카시우이모ニガカシウイモ가 식물로 분포하고, 예전에는 물에 담가서 식용으로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 열대 계통의 덩이류는 아마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대만과 류쿠에서 전파되어 온 것으로, 열대에서기원하는 뿌리작물 농경문화의 일부가 직접적으로 남방에서 전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정말로 일본이란 곳은 아시아 안에서 경계인 곳이지요.


사토; 그렇네요. 경계인데, 경계이기 때문에 농경문화 그것이 매우 풍부하다고 생각되네요.



'풍부한 농경'이란?


사사키; 지금 농경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어떠한 농경이 '풍부한' 것입니까? 예를 들면, 미국의 면화 지대, 옥수수 지대에서는 옥수수와 면화를 집중적이고 대량으로 농사짓고 있습니다. 생산량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합니다. 그것은 농경으로서 '풍부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사토; 이 프로젝트를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에서 시작한 의향은 지금의 농업은 단기적(몇 십 년)으로는 풍부할지 모르지만, 백 년, 몇 백 년이란 단위에서 보면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는 측면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냉해가 있어 돌연 병과 해충에 의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괴멸적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죠.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즉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같은 기간으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대규모 단작(모노컬쳐)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네요. 이것은 현대의 일본 논을 고려해도 그렇습니다. 논벼농사는 매우 지속적이라고 모두 말씀하십니다. 그럼 지금의 논을 보고 지속적이냐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저는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사키; 그래서 다시 한번 묻고 싶은데, 지금 우리는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느 쪽이냐 하면 역사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시야에서 본 농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농경이란 것은 순환형이고 안정되어 있는 것을 본래 농경의 모습이라 생각해요.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밭농사의 경우에는 앞에도 기술했듯이 유럽 중세의 삼포농법에서는 돌려짓기를 행해 농지를 묵혀 가축을 방목하여 농지의 비옥도를 유지했다. 삼포농법은 유럽만이 아니라 네팔에서도 논과 밭의 그루터기에 방목을 행하여 일종의 삼포농법을 하고 있습니다(그림4-11). 휴한지 방목을 하는 겁니다. 



그림 4-11 네팔의 농목 경관(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위) 밭의 구역을 나누는 가축담. 중부 네팔 시카 마을의 가축담과 경지(1963년 9월). 마을 아래에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곳이 농지 구역을 나누는 나무 울타리에 해당하는 돌담. 돌담 아랫부분의 농지 구역에서는 옥수수의 수확이 끝나고, 그루터기에 가축 무리를 넣는다. 돌담보다 위는 향모의 경지로 아직 수확이 끝나지 않았다.

(아래) 논 그루터기의 방목. 가라 마을의 논 그루터기 방목(1963년 10월). 논의 그루터기에 일제히 방목하는 소의 무리. 가설된 가축의 우리가 두 개 보인다. 방목은 밀의 파종기까지 이어진다.




사사키; 소와 물소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넣는 겁니다. 마을 안에서 가축담으로 에워싼 농지 구역이란 곳이 몇 군데 있고 그 농지 구역마다 작물의 재배와 휴한 방목에 대한 규칙이 있어 휴한기에는 가설한 가축의 우리를 설치해 방목하는 일종의 삼포농법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밭농사라는 건 어떠한 형태로 목축과 연결되어서 경작과 휴한 체계가 있고, 그것이 정확히 기능하는 한 농경은 안정적으로 영위될 수 있는 것이지요.

화전 등에서도 그렇습니다. 화전은 최근에는 환경파괴의 원흉 등이라 이야기되고 있지만……


사토; 그건 터무니 없이 잘못된 의론이네요.


사사키; 전통적인 화전을 보면 숲을 벌채하고 불을 놓아서 화전 경지를 만드는데, 전통적인 화전민들은 벌채하기 전에 의례를 하는 게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고치현의 이케가와 마을(池川町) 등에서 조사한 바로는 불을 놓기 전에 '오타노미おたのみ'라고 부르는 산신에게 기도합니다.

"기어서 도망가는 건 기어서 도망가 주시고, 날아서 도망가는 건 날아서 도망가 주세요. 산신 님, 땅신 님, 부디 지켜 주세요."라고(그림4-12).

화전민들은 화전을 하는 동안만 산신에게 토지를 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땅 동냥'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동안 예를 들어 큐슈의 화전민은 산신을 '세비せび의 가지에 모신다. 그 세비의 가지라는 건 화전 경지의 가장 큰 나무의 꼭대기입니다. 그곳에서 산신이 잠깐 쉰다. 화전의 경작을 마치면 산신에게 다시 한번 원래의 산과 숲으로 돌려준다고 화전민들은 생각합니다. 결코 산과 숲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잠시만 신에게서 빌려 화전을 경영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림4-12 화전의 불을 놓기 전 산신에게 간절히 기도(고치현 이케가와 마을 츠바야마椿山 1970년 4월, 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전통적인 화전민들은 화전을 만들기 전에 산신에게 잠시 물러나 주기를 기원하고, 작업의 안전을 기원한다.




사토; 그림4-13은 라오스의 사진인데, 저도 역시 보러 갔지만 숲을 벌채하기 전과 씨앗을 뿌리기 전에 반드시 의례를 하고 있지요. 라오스의 사람들은 '피'라는 정령을 믿어서, 화전 전에는 꼭 피에게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려 피에게 힘을 빌린다는 허락을 얻는 겁니다.



그림4-13 하늘에서 본 화전 경지. 라오스 루앙프라방 부근에서




사사키; 그것은 제가 조사한 핼마헤라섬의 화전민들 역시 똑같았죠. 그곳에서는 숲에 모로라든지 멧키라는 숲의 정령이 있어서 이 숲의 정령에게 "화전을 하는 동안만 토지를 빌려 주세요. 화전이 끝나면 돌려주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화전 경지 안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를 '왕의 나무'라 부르며 벌채하지 않고 남겨 놓는다. 화전을 경영하는 동안 그곳에서 정령들이 잠을 잔다는 관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사를 잘 남기고 있는 화전민의 바탕에는 반드시 휴한기간을 충분히 두어서 화전이 버려진 뒤에 숲의 식생이 잘 회복되어 다시 숲으로 돌아가서 화전을 또 할 수 있게 됩니다.


사토; 즉, 가축의 대신에 식물이 윤회하는 거지요.


사사키; 그런데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자바섬의 인구가 매우 과잉이 되어 그곳에서 농업 이민이 칼리만탄 등으로 송출되네요. 그런데, 농업 이민은 신을 모두 고향에 놔둔다. 그래서 신이나 정령과 관계없이 숲을 벌채하고 불을 붙여 태우고, 그곳에서 농지를 만들어 농경을 합니다. 그들은 개척민이기에 숲을 신과 정령에게서 빌려서 이용이 끝나면 또 돌려준다는 정신이 없는 겁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개간을 하기 때문에 순환적인 농법이 아니게 되고, 그 결과 숲이 사라져 못쓰게 된다. 이런 종류의 영구적인 경지를 만드는 농업 개간(개척)에 따르는 불 놓기와 본래의 화전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화전 농경이란 건 본래는 순환형으로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농법입니다.


사토; 그렇습니다. 그림4-13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근처를 지나며 비행기에서 찍은 것인데, 허옇게 보이는 곳이 올해 벼를 심은 곳이지요. 조금 색이 옅은 곳이 지난해 그 전에 벼를 재배하고 올해는 휴한을 하는 곳이고, 좀 더 색이 짙은 곳이 몇 년 전에 화전이었던 곳입니다.


사사키; 더 짙은 곳은 식생이 완전히 회복되어 숲이 되었다.


사토; 그렇지요. 휴한하고 십 년, 십오 년이 되었다. 


사사키; 그러나 이 풍경은 화전으로 이용하는 장소가 양으로는 좀 너무 많네요.


사토; 좀 너무 지나칩니다.


사사키; 좀더 숲의 식생이 풍부하고, 숲의 면적이 넓은 곳에서 화전을 하는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화전의 비율이 과밀하지는……


사토; 않지요.


사사키; 이곳은 좀 토지이용이 과잉이고, 지나친 경작으로 좋은 숲이 점점 사라진다.


사토; 그렇지요.


사사키; 사실은 양호한 숲의 비율이 더 많으면 더욱 풍부한 화전을 경영한다. 본래 화전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완전한 순환형 농경일 텐데.


사토; 완전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삼포식 농업의 경우에는 가축의 배설물을 썼다. 동남아시아(계절풍 아시아)의 경우에는 무리 가축의 사육이 적기에 배설물도 적을 테지요. 그것을 대신하려고 식물성 소재를 쓰는 농경 체계를 탄생시킨다. 


사사키; 네 네, 식물의 힘으로 토지의 비옥도를 원래로 되돌린다. 그를 위해서는 휴한기간이란 것이 의외로 의미가 있지요. 휴한지에는 여러 가지가 생겨 납니다. 


사토; 약을 얻는다든지, 지붕의 재료를 얻는다든지, 새끼줄과 고삐가 되는 식물 섬유를 모은다든지 하지요. 그러니까 그 지역 사람들은 휴경지가 생산성이 없는 토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사키; 차가 자란다든지, 고사리와 칡이 자란다든지, 그것을 먹을거리로도 삼지만 두드려서 의복의 재료로도 쓰는 쐐기풀 따위가 자라기도 하지요. 휴한기간이란 건 숲 그곳이 회복함과 함께 그동안에 생활필수품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전이란 곳은 일반적으로 작물을 한 종류만 키우지 않고 주작물 외에 다양한 작물을 뿌리거나 심거나 합니다.


사토; 그림4-14 같은 상태이지요.



그림4-14 화전 작물의 다양성. 라오스 루앙프라방 근처에서.




사사키; 여러 가지 있지요.


사토; 조금 조사해 보았습니다. 타로 토란이 있고, 카사바, 오이, 참깨, 레몬그라스, 10가지 종류 정도의 작물은 간단히 꼽을 수 있지요.


사사키; 화전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은 매우 다양하고, 전체가 균형을 잘 이룬다.


사토; 그렇습니다. 게다가 콩류와 곡물을 함께 재배하면 콩이 공기의 질소를 고정시켜 좋은 거름으로 바꾸어주기에 그러한 힘도 빌리면서 현명하게 농업을 하게 되지요.


사사키; 화전만이 아니라 본래의 농업이란 것은 매우 다양성을 가지고 순환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 이야기로 돌아가서, 논도 지금은 벼만 농사지어 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사토; 옛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요. 가장 큰 건 수생 동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림4-15의 사진을 보아 주세요. 이것은 아십니까? 인도네시아의 셀레베스섬에서 찍은 건데, 논 한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있고 그곳만 깊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모내기할 때 물고기도 함께 놓아주고, 물고기에게 잡초를 먹게 합니다. 물고기가 똥을 싸기에 벼에도 좋다. 가을이 되어 수확철이 되어 벼를 수확하고 물을 빼면 물고기는 깊은 구멍의 양어지인 곳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림4-15 셀레베스섬의 벼논양어




사사키; 그리고 꼼짝않고 월동한다. 구멍 속에서 이듬해의 모내기까지 기다리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때로는 이 작은 못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새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안에 마른 대나무 가지를 놔두지요. 대나무의 마른 가지를 두어, 이것이 아프기에 새가 오지 않는다. 잘 되고 있어요.


사사키; 아무튼 벼논양어라는 건 계절풍 아시아의 논 지대에서는 어디에서나 하고 있다.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특히 구이저우의 묘족 등은 그 논에서 기른 물고기를 재료로 하여 식해를 만듭니다. 이와 같은 식해가 오늘날 초밥의 원조이지요.


사토; 논에서 전분도 얻고, 단백질도 얻는다. 이 체계가 계절풍 아시아의 농경 방식이라고 생각하네요. 저는 '쌀과 물고기의 동소성'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사키; 그래서 순환형이 되어 균형이 잡힌다고 하지요. 그런데 농약 등을 넣으면 그 균형이 무너져 사라진다. 그러니까 그러한 균형 잡힌 순형형이고 다양성을 잘 보전하는 것이 농경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네요.



농업의 다양성


사토;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을 말하면 생산성이 어떻다든지, 일본의 총인구를 먹여살리는 방책이 아니라든지, 곧바로 불만스런 이야기를 듣겠지만, 생각해 보면 농약을 치는 돈도 들지 않고, 농약이 소비하는 이산화탄소도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환경을 위해서는 결코 나쁘지 않을 거예요. 잘 생각할 수 있다.


사사키; 그러한 본래의 순환형 농경의 상태는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상에 입각하면 부정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 대규모 단작으로 앞에 서술한 미국의 옥수수 지대와 면화 지대 같이 되어 버리면 이번은 인공 비료를 연속적으로 계속 투입하게 되는데, 그래서 결국 토지가 피폐해져 생산성이 견디지 못하게 되어 버리죠.


사토; 그렇습니다. 견디지 못하게 되고, 생산량은 오르지만 투입량도 굉장하지요. 그래서 머지않아 파탄날 때가 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대규모 단작으로 놔두면 무엇인가 있었을 때에……


사사키; 한번 병이 발생하면 모두 쓸모없게 됩니다.


사토; 그것을 인류는 언제나 경험해 왔지요.


사사키; 당신의 연구 프로젝트 제목은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것이었지요.


사토; 네. 우리들의 프로젝트는 환경의 역사를 차근차근 밝혀서 인류의 미래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지구연의 '문명·환경사'라는 프로그램(연구영역)에 속하고, 특히 여기 1만 년의 농업과 환경의 관계를 밝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구반을 가동하기 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인데, 인류사 가운데 농업생산은 언제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때로는 대기근과 그에 수반한 인구의 격감, 유출 같은 이른바 '붕괴'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 '붕괴' 사례를 상세히 조사하면 농업이 무언가 나쁜 일을 하여 그를 빌미로 그렇게 된 사례가 많습니다. 연구반으로서는 여러 가지 풍토를 기반으로 그러한 붕괴가 왜 생겼는지 그 과정을 해명하는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요인 하나하나의 인과관계를 시계열로 정리해 간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농업이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되는 사례 가운데 큰 이유가 되는 것의 하나로 '다양성의 상실'이 있습니다. 다양성이란 생태계 안에 여러 가지 생물이 있는 상태, 또는 하나의 작물 안에도 여러 가지 품종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질 때 붕괴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가설을 세운 겁니다. 그리고 대규모 단작은 그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가설인 표현이지만……


사사키; 그래서 농업에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순환적 안정성이 사라질 때에는 정말로 그것 자체가 환경을 파괴하게 된다.


사토; 그렇습니다.


사사키; 그러하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웃음)


사토; 그것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3년이 남아서 3년 안에 생각한다는 건데, (웃음) 잘 나아가는 것이 그럼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비판하지만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란 건 최근 여러 가지가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벼를 예로 들면 갖가지 품종을 뒤섞어 놓는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콩과 벼를 함께 심어 놓는 새로운 방식도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예전의 생활 속에 남아 있던 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전통적인 지혜를 어떤 방법으로 잘 현대에 살릴지 하는 것이겠네요. 적어도 부시 전 대통령처럼 "옥수수를 모두 연료로 만들어 돈을 버세요"라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세계의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 옥수수를 연료로 쓴다고 하는 건 상식을 벗어난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저것은 옥수수의 가격이 싸기 때문에 그걸 높이려고 한 말인 듯한데, 그렇다면 말이 안 됩니다. 중요한 건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농업과 먹을거리 전체의 균형을 어떤 식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인지가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지 않으면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요. 그림4-16을 보아 주시겠습니까? 사사키 선생도 이 그림을 기억하고 계실 거라 생각하는데, 나카니시 타츠토시中西立太 씨라는 화가에게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 복원도를 그려 달라고 한 것이지요. 아래가 옛날판이고, 위가 최신판입니다.



그림4-16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 상상도


사사키; 이것은 주간 아사히 백과의 <일본의 역사>에 저와 고고학자인 사하라 마코토佐原眞(1932-2002) 씨가 야요이 시대에 행해진 벼농사의 구체적 모습을 그려 달라고 한 것으로, 맨 먼저 나카니시 씨에게 그려 달라고 한 게아래 그림이고 약 20년 전의 초판(1987년)에 게재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그 뒤 사토 씨와 함께 작업한 것으로, 2003년 신정증보판에 게재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그림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위 그림의 오른쪽 아래와 중앙부의 윗부분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고 있습니다. 20년 전의 아래 그림에서는 휴경 논이 있다는 등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논은 온통벼를 농사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꽤 휴경을 하여 그 휴경 논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고 있었단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잡초가 자란 휴경 논이 있는 모습의 그림으로 변경된 겁니다. 


사토; 예, 휴경 논의 발견이네요.


사사키; 그와 같은 점을 우리는 매우 강조한 겁니다. 기존에는, 라기보다 지금도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일본의 논에서는 휴경지 등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토; 저것은 어떤 것이죠. 난폭하군요.


사사키; 그건 열심히 해서 제가 발굴하고, 그곳이 휴경 논으로 벼를 재배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실망하지 않을까요?


사토;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씨에게 혼났습니다. (웃음) "벼를 재배하지 않는 논이 있는 등, 당신은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합니까"라고 이야기를 들었네요.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사키; 그런데요, 우리도 포함해서 지금 일본의 모두는 논이라 말할 때 떠올리는 인상은 황금빛으로 익어서 눈에 들어오는 논입니다.


사토; 그렇지요. 저것은 농약과 화학비료와 트랙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즉, 지금의 농업은 완전히 석유로 만들어진다. 그 세 가지가 몰수된다면 에도시대의 농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납작 엎드려 김매기를 계속 하지 않으면……


사사키; 에도시대의 논에는 말린 정어리 등의 거름을 꽤 넣고 있었지요.


사토; 물론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환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벼농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지요.


사사키; 이것은 그림에는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의 벼농사라는 건 홑짓기가 아니다. 많은 종류의 벼를 하나의 논에서 재배하고 있었다. 그 많은 종류의 벼는 수확할 때 밑동을 베는 게 아니라 이삭을 베었던 것이 확실해요.


사토; 밑동을 베게 된 것은 좀더 뒤의 일이었지요. 옛 시대는 이삭 베기였죠. 


사사키; 저는 일찍이 네팔에서 향모의 이삭 베기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작물 각각의 익음때가 다르다. 지금처럼 품종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에, 알곡이 성숙하는 시기가 제각각이지요. 이건 덜 익었으니 앞으로 일주일 뒤에 베는 등으로 이삭을 보고 베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삭 베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시대의 벼도 익음때가 일치하지 않아, 이삭 베기를 했습니다. 실제로 이삭을 베는 용도의 돌칼도 많이 출토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 그림4-16에는 묘사할 수 없었지만, 벼의 품종은 매우 다양했을 겁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오스의 화전에서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의 밭 안에 적어도 아홉 종류의 벼가 검출된 일이 있습니다. 사정은 예전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리고 잡초가 가득 자란 논, 즉 휴경 논이 그 근처 안에 많이 있었던 게 실태이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잡초 투성이라서 다양합니다. 그리고 해충이 오는 등으로 말하면, 그것을 일망타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아마 논과 수로에서 물고기도 많이 잡혔을 테죠. 


사사키; 물고기를 잡는 건 쓰지 않았는데요. (웃음)


사토; 어떻습니까. 다음에 나카니시 씨에게 의뢰할 때에는 통발 등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그려 달라고 하는 것이요. (웃음)


사사키; 그렇지만, 예를 들면 모내기도 아주 제각각인 방향으로 모내기를 한다. 이것 등도 그림을 그릴 때 아무쪼록 나카니시 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논두렁이 아주 똑바르지 않습니다. 사실 논두렁은 좀더 구부러져 있어서 믿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모두의 인상은 현대의 논이지요. 


사토; 저도 나카니시 씨에게 좀더 어지럽게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역시 화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웃음)


사사키; 저도 여러 주문을 했습니다. 큰 논두렁만이 아니라 작은 논두렁도 있다든지, 나카니시 씨는 대단히 이쪽의 주문에 응해 주셨지요.


사토; 확실히 꽤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것이 예전의 논벼농사의 구체적인 모습이어서, 이른바 생태학적으로 말하는 다양한 상황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사사키; 현재의 논벼농사는 완전한 홑짓기 형식이고 인공적인 면이 매우 높은데, 예전의 논은 그렇지 않고 그 자체 귀하가 말했듯이 생태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슬슬 시간이 되어가는데, 역시 농경이 다양성을 복원하고 순환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것은환경문제를 생각해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무엇을 참고할지 이야기하자면, 우리 인류는 1만 년에 걸쳐 농경을 해 왔고, 그 안에 축적된 여러 가지 지혜가 있을 테지요. 예를 들면 돌려짓기와 휴한을 한다든지, 대규모 단작이 아니라 다양한 작물을 섞어짓기하는 등 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 전통적인 지혜를 얼마나 잘 사용하여 새로운 안정적인 농경을 만들어내는지가 앞으로의 큰 방향성이라고 생각해요.


사토; 그래요. 그것은 농사짓는 쪽도 그렇고, 역시 먹는 쪽도 그렇다고 해야 한다. 지금은 슈퍼 등에 가면 일년 내내 토마토를 구할 수 있지요. 그것은 역시 이상합니다.


사사키; 역시 '제철'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래서 저런 똑바른 오이만 파는 건 저 같은 전쟁 중 태어난 인간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소비자도그러한 것을 잘 생각하여, 한번 더 풍부한 농경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곰곰히 따져야 한다.


사토; 가치관을 포함하여 재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프로젝트 안에는 철학자도 들어가고, 여러 사람을 넣고 있는 겁니다. 


사사키; 그것을 이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사토 씨, 당신이 열심히 잘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웃음) 


사토; 고맙습니다. (웃음) 그럼 시간이 되었기에 이 정도로 마치려고 합니다.




2008년 5월 17일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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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4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풍토 

        -풍토론의 가능성을 열며          쿠라타 타카시鞍田崇






풍토는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를 꿰뚫는 핵심어의 하나이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과 그 주변의 각지에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또 기후와 지형 같은 자연조건과의 관련 안에서 자연히 그 성격을 형성해 온 것이기도 하다. 풍토란 우선 그처럼 다양한 문화의 성립에 관련된 자연조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풍토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먼저 떠올리는 건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주저 <풍토>(1935)일 것이다. 이 책에서 와츠지는 문화 생성의 외적 제약이 되는 단순한 자연조건인 풍토가 아니라, 자연환경과 인간활동의 상관성을 명시하는 풍토라는 독자적 시점을 제기한다. 와츠지는 사회와 개인, 공간과 시간, 신체와 정신 같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에 주목하여 이들 두 항목의 어느 쪽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쌍방을 연결하는 이중성을 이중성으로 떠맡는 '사이(間)' 혹은 '관계()'란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독자의 윤리학을 수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和辻 1934). 그의 풍토 개념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바로 그러한 '사이'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론에서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생업문화, 특히 농경과 그 역사가 풍토와 어떻게 관련된 것인지를 요즘의 지구환경문제도 응시하면서 그려본 것인데, 다른 면에서 각 권의 제목에 '계절풍' '사막' '목장' 같은 와츠지의 풍토론 용어를 채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을 비교문화론적인 시점에서 눈여겨 본 그의 시선을 실마리로 삼는다. 따라서 시리즈의 시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와츠지가 말한 풍토란 어떠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확인함과 함께, 지금 풍토를 문제 삼는 의의와 그 가능성에 대하여 약간 검토해 두는 건 쓸데없지 않을 것이다.


와츠지의 원풍경原風景과 풍토론  

와츠지로 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그의 온화한 풍모이다. 특히 만년의 용모이다. 만년의 와츠지 데츠오를 찍은 사진은 몇 장 있는데, 그중에서 유명한 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가 촬영한 서재에서 서성거리는 와츠지의 사진일 것이다. 수북이 쌓인 도서의 그림자 너머로 겨우 어깨를 웅크리고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노인이 그곳에 있다. 그 시선이 참으로 온화하여 어딘지 천진난만할 정도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드러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온화한 풍모는 아무리 봐도 온화한 하리마播磨 출신의 사람다운 데가 있다. 더구나 도시민보다는 교외의 마을 사람다운 목눌한 멋이 있다. 와츠지 데츠로의 풍모는 하리마의 농촌 풍토에서 배양된 그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와츠지의 의론에서 생업문화, 특히 농경에 관한 기술이 표면화하지 않았다고 기술했지만, 이것은 약간 졸속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풍토>에서는 농경을 시작으로 하는 생업문화는 주제로 논하지 않는다. 그의 직접적 관심은 예술과 종교의 풍토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와츠지는 농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반슈播州 히메지姬路의 교외에 위치한 농촌, 옛 니부노仁豊野 마을에서 태어난 그에게 차라리 농경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노동활동이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장 만년에 저술한 <자서전의 시행(自叙伝の試み)>(1961)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파도가 밀려오기 직전, 1887-1906년(메이지 20년대부터 30년대) 지방 가정의 정경 -즉 차 덖는 일부터 베짜기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대부분의 용품을 직접 제조하여 마련하던 과거의 지방 가정의 모습이 참으로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농경에 관한 기술도 빈번하게 나온다. 예를 들면, 어린 와츠지의 눈에 비친 이런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아이인 나의 기억에는 모내기가 끝나기까지는 마을사람들이 별로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노동의 괴로움을 뚜렷하게 보인 건 모를 내고 1-2주 뒤에 시작하는 논의 김매기 노동이었다. 그것은 7월 중반부터 8월 상순에 걸쳐서 여름의 삼복 시기로, 그 기간에 심은 모의 뿌리 주변의 흙을 뒤집어서 잡초가 번성하는 걸 방지한다. 이 김매기를 3번쯤 반복하는 사이 벼는 맹렬한 기세로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경작자들은 땡볕 아래의 논 안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것을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 논의 옆에서 보고만 있지 못하고, 역시 마을 의사의 아들로서 이 노동으로 생기는 급병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위, 즉 일사병의 여러 가지 형태였던 것 같은데, 대개는 밤중에 명렬한 복통 등을 일으키고 너무 급하면 의사를 부르러 왔다. 논의 김을 매는 계절에는 매일 밤 한 명이나 두 명의 급병인이 발생했다. 그러한 관계로부터 나에게는 농경 노동 가운데 논의 김매기가 가장 맹렬한 노동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와츠지 데츠로 <자서전의 시행>)

와츠지의 생가는 '경작자'가 아니라 마을에 유일한 의사의 집이었다. 그 의미에서 농작업을 경험한 그의 시선은 결국 방관자의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환자의 대부분이 농가였던 '마을 의사'의 아들이었다면, 농업이 정말로 자연과 대치하는 인간활동이란 것을 일상적으로 깊이 느끼지 않았을까. 성인들의 가혹한 농경 노동을 지켜본 어린 와츠지의 긴장감은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이란 문장 안에도 남아 있다.

<자서전의 시행>에서 적고 있는 니노부의 일상은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의 원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부키와 아야츠리조우루리(操浄瑠璃)>를 시작한 뒤 그의 저작에는 니노부에서 보낸 어린 나날의 실제 체험에 근거한다고 생각되는 주제와 에피소드가 때때로 얼굴을 내민다. <풍토>도 또한 그렇다. 예를 들면, 앞에 인용한 것 같은 일본 농작업의 가혹한 '김매기'에 대해서는 <풍토>의 안에서도 유럽의 목장 같은 풍토의 특성을 일본의 풍토 그것과 비교하며 다음처럼 기록한다.

이처럼 (유럽에서) 여름의 건조함과 겨울의 습윤함은 잡초를 몰아내 온땅을 목장답게 한다. 이것은 농업 노동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농업 노동의 핵심을 이루는 건 '김매기'이다. 잡초의 제거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경지는 금세 황무지로 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김매기는 특히 '논의 김매기'란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일본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 -따라서 일본의 주택 양식을 결정하는 시기, 즉 폭염이 가장 심한 삼복 무렵에 꼭 그때를 번성기로 삼는 꿋꿋한 잡초와 싸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 싸움을 게을리하는 건 농업 노동을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마침 이 잡초와의 싸움이 필요하지 않다. 토지는 한번 개간되면 언제까지나 고분고분한 토지로 인간을 따른다. 틈을 보아 스스로 황무지로 전화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농업 노동에서는 자연과의 싸움이란 계기가 빠져 있다.

'김매기'를 잡초와의 '싸움'이라 하고, '일본 농업 노동의 핵심'이라 하는 와츠지의 기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사실을 전한다. 그렇지만 이 조금 단언적인 기술의 배경에 풀섶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여름의 니노부의 논두렁에서 어린 그가 숨을 죽이고 응시하던 광경이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와츠지의 <풍토>가 이 책을 집필하기 직전 유럽에 유학할 때의 견문에 기반하여 생생한 기술로 가득하다는 것이 이 책을 펴서 읽으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위의 두 가지 인용에서도 명확하듯이, 그 시선의 근저에는 유아기부터 소년기에 걸쳐서 그가 목격한 일본 농촌의 기억이 원풍경처럼 가로놓여 있다. 분명히 와츠지는 <풍토>에서 농경을 주제로 논하지 않았지만 유럽이든, '사막'이라 불리는 건조와 반건조지대이든 각각의 지역과 그 문화적 특성의 비교검토는 자신의 원풍경에 근거한 농경문화라는 시점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경문화론으로서 풍토론은

<풍토>의 권두에서 와츠지는 "인간 존재의 구조 계기로서 풍토성을 밝히는 일"을 이 책의 목적으로 하고, 그 구상의 배경으로서 베를린에 유학하며 우연히 만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든다. 즉 <존재와 시간>이 인간의 '주체적 존재 구조'로서 시간성을 논하면서도 공간성의 문제가 완전히 다루어지지 않는 것에 불복한 와츠지는 <존재와 시간>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풍토성이란 개념에 착목한 것이다. 사상사적으로는 이후에 레비 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1962)로 갔듯이, 시간에서 공간으로 좌표를 전환하는 것을 재빨리 시도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中村 1989).

그렇지만 이러한 점으로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오로지 추상적인 철학적 의론으로 가득찬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 <풍토>의 제1장 '풍토의 기초 이론'에서는 하이데거도 관여하는 당시 더없이 융성했던 현상학에서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에 관한 분석을 근거로 한 이론적 고찰이 전개되며, 말년의 대저 <윤리학>의 하권(1949)에서 <풍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재론했을 때의 의론도 또한 형식적, 윤리적인 느낌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와츠지의 저작을 손에 넣은 독자는 곧 깨닫는 바인데, 그러한 철학적 의론에서조차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때때로 통속적이란 생각이 들 만큼 알기 쉽다. 이 알기 쉬움이 무엇보다도 와츠지 저작의 매력인데(와츠지는 '일본어와 철학의 문제'(1935)에 한 문장을 남겨, 번역어로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본어로 철학하는 일의 가능성을 늘 추구했다), 그것은 의론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구체적 사례에 의한 것이다. 그 하나로 앞에 지적했듯이 농경문화에 관한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와츠지의 의론이 생업인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에 대하여, 이미 시마다 요시히토嶋田義仁의 명쾌한 의론이 있다(嶋田 2000). 시마다는 와츠지가 말한 풍토의 유형 가운데 하나인 '계절풍'을 '더위와 습기의 결합'으로 특징짓고, 그 선에서 일본적 풍토의 유형이라기보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의 열대 계절풍을 의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처럼 서술한다.

와츠지는 무슨 이유로 일본적 풍토를 열대 계절풍의 그것과 동일하다 보았을까? 그것은 '와츠지의 계절풍이란 것은 순수한 기후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논'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인간 존재의 주체적 표현이 되는 풍토 개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마다 요시히토 '풍토 사상의 가능성 -일본적인 근원적 반성-')

농경문화의 시점에서 다시 의론을 전개하면 똑같은 계절풍이라도, 예를 들어 인도에 대해서는 같은 사례로 논할 수는 없으며, 거꾸로 '사막'과 목장을 같은 맥류 농경권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없을 것이다(이 책의 서론 및 대담도 참고할 것). 그러나 어느 쪽이든 농경문화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와츠지의 풍토론은 지리학과 민속학은 물론, 농학과 민족식물학, 게다가 환경고고학과 연결되며 그 역사적 의의가 판명된다. 시마다는 야나기다 타쿠니오柳田國男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등에게서 발단하는 '벼농사 문화론', 우에야마 슌페이上山春平와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등에 의한 '조엽수림 문화론', 또한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제기된 '너도밤나무, 졸참나무숲 문화론',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와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에 의한 '숲의 문화'론 등 일본의 일련의 풍토론적 문화론을 개관하고 그 전개에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을 자리매김한다.

와츠지가 고향의 선배 야나기다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상세하게 조사하지 못했는데, 와츠지의 <풍토>는 야나기다의 벼농사 문화론을 근거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벼농사라는 건 풍토 그것이라 말하기보다도 어느 풍토에 입각한 농업기술이며 생업기술이다. 벼농사에 대응하는 풍토가 존재한다. 와츠지는 그것을 '계절풍'으로 인식하고, 다시 세계사적 시야 안에 넣어 '사막'과 '목장'을 함께 풍토의 세 유형으로 다시 파악했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논문)

시마다에 의하면, 이러한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의 공헌은 영역에 한정되어 오로지 일본의 사정으로 시종일관한 벼농사 문화론을 환골탈태시키고, 풍토론을 비교문화론적 의론의 장으로 전환시킨 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면에서, 철학자인 그의 의론에서는 취약했던 '자연과학적 기초'를 근거로 하여 그 뒤 조엽수림 문화론 이후의 풍토론에 의해 새로운 전개가 가능해진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개괄하는 시마다가 제기한 시점은 자칫하면 와츠지의 철학적 고찰에 질질 끌려 그 구체적 내실에 대해서 좀처럼 명로한 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기존의 해석에 대해, 와츠지만이 아니라 풍토론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명쾌한 자리매김을 가져왔다. 시마다는 또 최종적으로 개인에게 귀착하는 정신의 자유를 중시하는 나머지, 걸핏하면 풍토론을 단순히 환경결정론으로 멀리하려는 서양 근대사상에 대하여 평평하여 균질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거주 환경에 응하여 공간의 이해가 중층적으로 전개된 결과 자연히 관심이 '자기 이외로' 향해 온 일본의 풍토론적 발상의 의의를 위상적으로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새로이 '산이 많은 나라의 풍토론'을 제기한다. 그 시점과 문제 의식은 이 시리즈에서 풍토를 문제로 삼는 데에도 시사적이라 해도 좋다. 

그렇지만 정말로 위상적인 의론으로 귀착하는 것에 의하여 시마다의 의론은 뜻밖에도 풍토론의 한계를 드러낸다고도 생각한다. 그 한계는 또한 농경과의 관련에서 본 풍토론이란 자리매김에 잠재해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그점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 풍토를 문제로 삼는 것의 의의와 가능성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하겠다.


풍토론의 가능성

언젠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창으로 보이는 교외의 동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과연 이곳에 풍토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한 적이 있다. 형형색색의 네온이 반짝이고, 콘크리트 건물이 겹겹이 무질서하게 이어지며, 지면은 아스팔트로 덮이고, 하늘에는 전선이 종횡으로 내달리고 있다. 특별히 오사카 근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어디에나 있는 풍경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풍토>에서 와츠지도 지적하고 있듯이, 풍토는 옛날에는 또 수토水土라고도 하여 자연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단어이다. 가지각색 인간의 생업도 또한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인간 문화와 관련된 자연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마을의 옆으로 개울이 흐르고, 바람이 지나가며, 기름진 들이 펼쳐진다. 이것이 풍토의 올바른 인상일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위에서 묘사한 것 같은 현대의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풍경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이 단어에서는 이야기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앞에서 와츠지의 '원풍경'에 대하여 지적했는데, 아직도 풍토론을 받아들이려는 시도 안에는 때때로 어딘가 목가적이기까지 한 전원 풍경으로 풍토의 상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그러한 풍경을 원풍경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현대의 우리에게 풍토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참으로 저 어수선한 현대 교외의 길거리에 풍토적 현상은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풍토와 같이 인간 활동과의 관계성에 기반한 자연을 표현하는 '마을'과 '마을 산'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도시에서 괴리된 지역을 지시하는 장소적 한정을 수반한 단어이며, 생태계 전체에 걸친 인위적 관리를 전제로 하는 그 실태에서 보면 현대의 교외에는 이미 예전 같은 마을 산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라는 현상은 그러한 파악 방식으로 충분히 보아 온 것일까?

기존의 풍토론이 어느 쪽이냐 하면 도시보다 전원이나 농촌 같은 '시골'의 대상을 가장 자신있어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시마다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문화연구의 대부분이 벼농사 문화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고 있으며, 최근의 풍토론 재평가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지리학자 오귀스텡 베르크Augustin Berque가 예외적으로 벼농사 문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풍토론은 역시 시골에 조명을 비추는 데 주목하는 제약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론은 이러한, 말하자면 장소적 한정과 한계의 근원에 머무는 것일까?    

노마 하루오野間晴雄가 지적하듯이 문제는 단순히 장소적 한정과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토론에는 '역동적인 경제관계'에 관한 의론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野間 2005).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진전을 고려하면, 농촌이든 도시든 경제문제를 빼놓은 채로는 충분한 의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하다. 그렇지만 다시 물음을 거듭하면, 기존의 풍토론에 경제적 시점을 보완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론을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와츠지가 열었던 비교문화론적 관점을 다루었던 풍토론의 가능성은 장소적 한정은 처음부터 굳이 말하자면 표층적인 자연과의 관계조차도 뛰어넘는 곳에 있던 건 아닐까? 그 범위 안에서, 교외는 물론 도시의 한복판에도 풍토는 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측면이 실은 이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와츠지의 <풍토>는 부제에 '인간학의 고찰'이라 하듯이 단순히 자연조건의 열거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을 객체화하고, '자기 인식의 전형'이 되는 풍토를 밝히는 것이며, 단순히 객관적 대상으로 기상과 환경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의 관점을 제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원초적인 자연을 무시하고 인간화하며 왜곡된 자연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경험에 근거한 근본적인 자연과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일상생활과 자연의 관계이다. 그 의미에서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자연의 반대점에 있는 인위적 산물인 건축에 대하여 말한 다음의 이야기는 시사적이다. 

건축이란 진짜 자연에 쌓아 놓는 제2의 자연이다. 건축을 직업으로 삼는 자가 환경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렌조 피아노 <항해일지>)   

          
만약 우리에게 친근하다는 범위에서 도시의 건축 공간도 또한 '자연'이라 부른다면, 여기에도 또 풍토는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농경문화로 상징되는 시골 지역을 논하는 그것이 문제인 건 아니다. 그곳에서 적출된 의론을 어떻게 현대의 우리 일상생활의 문제와 접속시킬 것인가? -그러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도 풍토론에서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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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서장  계절풍 농경권의 사람들과 식물






들어가며



왜 지금 농경인가


인간은 왜, 농경이라 하는 '귀찮은' 일을 시작한 것일까? 그 전의 생업인 '수렵채집'과 어째서 결별하게 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답은, 사실 필요 없다. 여러 가지 가설은 있지만 모두 '넘고처지어' 결정적으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이 물음은, 말하자면 연구자의 놀이 같은 것이라 어떠한 결론을 내려도 일반 사회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농경이라는 생업은 -여기에서는 목축을 포함하여 농경이란 용어를 쓴다- 일단 시작하고 나면 다시는 그만둘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금단의 사과에서 '금단'이란 의미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농업을 시작하고 난 뒤 1만 년 사이에 인간 집단은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며 인구의 대부분이 사라지거나 사회가 큰 혼란에 빠져 생산활동이 마비되어 버리는 '붕괴'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게다가 이러한 실패를 되풀이해 왔다. 예를 들면, 사막의 풍토(와츠지和辻 1935)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왕조(우르 제3왕조) 무렵부터 염해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Maekawa(1974)에 의하면, 인간은 염해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에 필요한 대처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염해를 입어 붕괴한 사회가 잇따랐다. 2000년 전쯤 루란 왕국도 염해로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루란 왕국의 사람들은 우르 제3왕조의 붕괴에 대해 몰랐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객관적으로는 잘못을 되풀이한 셈이다. 인류는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역사라는 개념을 갖추어, 과거의 선배들이 저지른 이상한 실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농경의 역사를 아는 것은 단순히 교양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어떻게 했을 때 농업생산이 붕괴되었는지를 아는 길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무엇을 해서는 안 될지, 혹시 가령 불행하게도 붕괴가 찾아왔을 때에는 어떻게 하면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등을 알 수 있다. 


그 뒤쪽 끝부분은 특히 중요하다. 인류는 제2차대전 이후 반 세기 이상 지역적인 재해와 사회적 혼란은 이외에 큰 붕괴를 경험하지 않았다. 반 세기 이상이란 시간은 현재 인류의 평균수명으로 보면 한 세대를 넘는 것이다. 즉, 세계 인구의 대부분은 큰 붕괴 현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붕괴가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되면 붕괴라는 사실은 구전되든지 문서에 기록되든지 하는 것 말고 영원히 잊혀진다.




농경 -그 연구사  


농경과 목축에 관하여 포괄적인 연구를 행한 연구자가 세계에 몇 명 있다. Sauer(1952)와 나카오中尾(1996)은 세계의 농업 체계를 분류하는 작업을 행했다. Harlan(1975)도 유사한 연구를 행했는데, 나카오 등에게 없었던 점은 농업 이전 인류 집단의 생업에대하여 거론한 바이다. 20세기 말쯤부터 농업이 환경의 개변과 문명 발상에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농업의 기원을 종합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도가 몇 번이나 행해졌다. 콜린 텃지는 농경의 기원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현생 인류) 사이의 생태적 지위를 둘러싼 불화라고 파악한다(텃지 2002).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문명붕괴>, 피터 벨우드Peter Bellwood의 <농경 기원의 인류사>도 분야를 횡단하는 시각으로 쓰여진 훌륭한 저작이다.


재배식물과 가축의 기원, 전파에 관하여 연구한 연구자는 각론을 포함하면 여러 명이다. 오래된 것은 <재배식물의 기원>(de candolle 1953)을 시작으로, 그 뒤를 이은 같은 이름의 책(바빌로프의 <재배식물의 기원에 관한 연구(1928)>) 등이 고전으로 꼽힌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The Cambridge World History of Food는 인용이 좀 오래된 것이지만 비주류 작물까지 다룬 좋은 책이다. 벼에서는 가토 시게카네加藤茂苞에 이어 岡彦一과 그 공동연구자가 행한 품종의 유전적 분화에 관한 일련의 연구가 있다(Oka 외, 1953). 또 중국에서는 周拾錄(1957), 丁頴(1961) 등이, 특히 중국의 벼 기원에 대하여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1980년대부터 일련의 분자생물학 성과도 벼의 기원 연구에 크게 공헌했다. 그 상세한 내용은 이 책의 石川隆二, 中村郁郞 등의 논문에서 다룬다. 밀에 대해서는 水原均과 그 공동연구자들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다. 보리는 세계에서 생산량이 4위인 작물로서, 高橋隆平과 그 공동연구자가 많은 연구를 남겼다. 먼저 이른바 '맥麥'에 대해서는 2009년 봄 맥류 연구의 전문가들이 직접 <맥의 자연사(麥の自然史)>라는 책을 홋카이도 대학 출판회에서 간행했다. 이외에도 서류에 대해서는 <서류와 인간(イモとヒト)>(吉田, 堀田, 印東 2003)과 Salaman(1949)의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the Potato 등의 훌륭한 저작이 있다. 


세계를 석권한 가축 종의 수는 아마 주요 곡물 종의 수와 같을 정도로 소수일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소, 양, 염소, 돼지, 말 5종을 '주요 5종'이라 부른다. 이외에도 분포 지역이 제한된 가축(다이아몬드는 남미의 알파카, 라마 2종과 낙타, 순록, 당나귀, 물소 등14종을 들고 있다)이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도 분자유전학의 수법을 이용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유라시아에서 기원한 농경의 요소



농경은 녹말과 단백질을 얻기 위한 한 수단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에너지 공급원인 당분과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이다. 당은 보존이 꽤 어렵기 때문에 안정적인 에너지원으로 당의 분자가 중합되어 생성된 '녹말'을 쓴다. 그 때문에 필요한 영양소는 녹말과 단백질이라 바꾸어도된다. 녹말원으로는 쌀, 밀 등 곡류나 타로, 바나나, 백합 등의 뿌리채소류, 밤, 도토리 등의 견과류가 알려져 있다. 단백질원으로는 가축과 그 야생종인 포유류, 어패류, 조류, 곤충 등이 이용되고 있다.


어느 토지의 녹말원과 단백질원을 결정하는 것은 그 토지의 기후와 풍토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기후와 풍토에 의하여 규정되어 온 생태계이다. 농경 이전의 사회에서는 그 토지에 살고 있던 동식물이 이용되었다. 농경이 시작된 이후에는 여기에 가축과 작물이추가되었다. 가축도, 작물도 그 풍토에 살던 야생의 동식물을 인간이 가축화(재배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라시아 각지의 녹말원과 단백질원이 어떻게 조합되는지에 대한 佐藤(2008a)의 작업을 그림 1에 실어 놓았다. 그림에 보이듯이, 녹말원과 단백질원의 조합은 토지마다 뚜렷하게 다르다. 



그림1


흥미로운 점은 그 조합의 지역성이 크게는 和辻(1935)가 주장한 풍토와 매우 합치한다는 것이다. 계절풍 풍토에서 성립된 녹말과단백질의 기본적인 조합은 '쌀+물고기"이다(佐藤 2008a). 인도는 여기에 특수하게 '잡곡+콩'이 조합된다. 다른 곳에서는 단백질원으로 쓰인 동물성 단백질이 종교적 이유 때문에 쓰이지 않고, 대신 고단백질의 콩류가 활용되고 있다. 한편,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에서 생긴 것은 '밀+고기·젖'의 조합이다. 목장의 풍토에서 북쪽에서는 녹말 공급원으로 16세기 이후 감자가 추가되었다.또 북유럽에서는 보리·감자+물고기라는 조합이 등장한다. 유라시아의 북쪽에서는 '잡곡+고기·물고기'라는 조합도 볼 수 있다. 일본 열도의 동북부도 역사적으로는 이러한 지역에 속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녹말의 공급원은 크게 변천해 왔다. 그 일반적 경향으로는 (1)영양번식하는 것에서 종자번식하는 것으로, (2)목본을 시작으로 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에서 두해살이 초본으로라고 하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녹말의 특성은 그 운반과 보존이 쉬운 성질이 장점이다. 이 두 가지에 뛰어난 것이 옮겨져 결국 세계에 퍼진 것이다. 이 두 특성이 식물의 진화 방향과 비슷해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덩이줄기를 이용하는 감자는 유럽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퍼져 있다.


한편 단백질 공급원은 썩기 쉽고(보존성이 떨어짐), 또 운반도 어렵다. 그 때문에 최근까지 그 토지에 고유한 단백질 공급원이 있었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영국의 고고학자였던 고든 차일드는 인류사를 고찰하여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전환한 시점을 신석기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는 산업혁명에 대비될만한 인류 역사의 대변혁이란 의미이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사이에는 인간 활동에 확실히 크나큰 차이가 있다. 특히 토기의 등장은 먹을거리의 저장과 조리와도 관련되어, 인류의 식생활을 크게 바꾸었을 것이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먹을거리의 저장이 농업의 발달에 따랐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의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 체계의 변화, 토기의 등장과 보급, 식생활의 변화라고 하는 대변혁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렸을지에 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있다.


일찍이 佐佐木은 인류가 농경을 받아들인 과정을 '프로세스'라고 불렀다(佐佐木 1993). 즉 佐佐木은 농경문화의 수용이 혁명과도같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수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천천히 진행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중국 장쑤성의 룡큐쩡龍虬莊 유적에서는 7000년 전에서 5200년 전까지 1800년에 걸쳐서 수렵채집 경제로부터 벼농사 경제로 이행한 경향을 살필 수 있다(龍虬莊 1999). 그와 같은 점은 밀의 진화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Tanno와 Willcox(2006)는 서아시아 네 곳의 유적에서 출토된 밀(아마 사배성 밀로 여겨짐) 이삭의 가운데 축에 남아 있던 탈립의 자취를 상세하게 살펴, 주력이 야생형(탈립형)에서 재배형(비탈립형)으로 이행하는 데에 300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발표했다. 그러하다면, 농업을 수용하는 과정이 '프로세스'라는 佐佐木의 지적은 동아시아 벼에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서아시아의 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된다.


'프로세스'론은 농업을 수용하는 과정을 일직선으로 점점 올라가는 과정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다. 왔다리 갔다리 하는 과정을 엉성한 그물코를 통하여 보았기 때문에 일직선의 과정으로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의 학문에서는 그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지를 말할 뿐 정확히는 아직 모른다.


또한, 룡큐쩡 유적의 자료와 그 해석에 대해서는 졸저 <벼의 역사(イネの歴史)>(佐藤 2008b)에 상세하게 기술했기에 거기에서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농경이 기원하기 이전 시기


대저 현생인류가 생겨 그 한 무리가 아프리카를 떠난 것이 10만 년 전에서 15만 년 전 무렵이다. 아프리카를 떠날 당시 인류에게 농경 문화는 없었다. 그 뒤 그들은 급속하게 온 세계로 퍼졌지만, 그들의 행선지마다 선주민들과 만나 여러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그들의 일파가 서아시아, 곧 레반트 회랑 일대, 투르크 동남부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의 원류부 일대에 도달한 것은 몇 만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篠田 2007). 텃지에 의하면, 이때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다만 그 시기는 추위와 더위가 자주 오락가락하고, 지금의 페르시아만도 육지였다고 한다. 현생인류는 그 뒤 사방으로 이동해, 동으로 이동한 한 일파는 5만 년 조금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순다랜드라고 불리는 남중국해 일대에도 이르렀다.


텃지는 인류가 최초로 농경과 비슷한 행위를 행한 곳이 네안데르탈인과 만났던 페르시아만부터 서아시아가 아닐까 한다(텃지 2002). 도대체 인류는 왜 이동한 것일까? 그에 대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인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을 채택하려고 한다. 보통 생태계 안에서는 거기에 사는 동물과 식물의 수가 엄밀한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선주하던 인류도 또한 순수하게 생태계의 한 구성원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지금은 '현생인류'라고 불리는 집단이 침입해 왔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유사한 생태적 지위에 있던 선주민과 현생인류 사이에 긴장관계가 발생했다. 그러나 두 집단이 무기를 가지고 싸웠던 것은 아니다. 텃지는 현생인류의 승리는 그들이 더 농경과 목축에 가까운 생업 양식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현생인류는 토지의 한 귀퉁이를 점유하고 그곳을 갈아엎거나 간단한 울타리를 만들어 동물의 새끼를 기르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밀고 들어간 생태계는 현생인류의 '체취가 풍기는' 생태계가 되었다. 그곳은 어쩌면 야생동물에게도 선주민에게도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 같다. 신인류의 시치미 떼고 대수롭지 않게 하는 행위가 선주민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비슷한 일이 현생인류가 가는 곳곳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현생인류가 그와 같은 일, 즉 농경과 목축의 선구와 같은 생업을 확립할 수 있었다면, 그 성공담의 숫자만큼 '농경 기원'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쨌든 현생인류는 순수한 수렵채집인이었다기보다 유용한 식물에 눈을 돌려 그것을 확보하거나, 또는 길들이기 쉬운 동물을 길들이거나 새끼를 사육하는 일을 통하여 차차 주변의 생태계를 만들어 바꾸어 나갔다고 생각한다. 야생동물과 선주인류의 집단은 점점 현생인류의 영역에서 점점 멀어져 가지 않았을까 한다. 



농경의 완성까지 지난 길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농경이란 작업을 완성했을까? 이에 대해 몇몇 연구자가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하고 있다.


완성된 농경이란 먼저 (1)사람들에게 동식물을 관리한다는 명확한 의도와 지식이 있고, (2)그에 필요한 도구와 장치를 사회적으로 지니며, 또한 생활에 필요한 자재 가운데 적어도 일부를 그 행위에 의하여 획득하고, 더하여 (3)이러한 행위에 적응하는 전용 동물과 식물(곧 가축과 작물)을 지니고 있을 것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아마 인류가 가장 먼저 손에 넣은 것은 첫 번째 조건, 즉 동식물을 관리하는 의도와 지식이었을 것이다. 농경의 첫 번째 단계는 사람에 의해 동식물이 관리되는 것이다. 다만 이 단계는 이전의 수렵, 채집과 고고학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2)의 도구와 장치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한 덫이나, 숲과 초원에 불을 놓아서 식물의 발아를 유인하거나 그에 의하여 동물을 꾀어내는 행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새끼를 포획하여 사육하는 일 등도 이 단계에 들어갈지 모른다. 이러한 행위는 고고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조몬繩文 시대의 일본과 신석기시대의 중국에서는 멧돼지 새끼의 뼈가 출현하는 빈도가 높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內山 2007, 龍虬莊 1999). 이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의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최초의 두 단계까지는 생태계의 개변이 정주에 의하여 느리지만 착실히 진행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면 인류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가축과 작물이 무게 중심이 되면, 수렵·채집 경제로 회귀하는 일은 절망적일 정도로 어렵다. 그것은 가축과 작물은 사람의 손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그 무렵에는 인류의 주변에 수렵·채집의 대상이 되는 식량자원이 바닥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다.




풍토·기후와 농경


풍토와 기후


농경은 이전 시대인 '수렵과 채집'이란 생업을 이어받아 성립했다고 생각한다. 수렵과 채집은 완전히 자연에 의존하는 생업 형태이기에, 그곳에 어떠한 양식의 수렵·채집이 성립하는지는 자연식생과 마찬가지로 그 토지의 기후에 의하여 거의 일차적으로 정해진다. 기후학자 쾨펜Köppen은 이 관계를 기초로 하여 식생 등을 가미하면서 세계를 31개의 기후구분대로 나누는 발상을 발표했다(발견은 1920년 무렵). 이것은 지금도 쓰이는 개념으로, 교과서 등에 종종 등장한다. 또 키라吉良(1949)은 식생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온도(기온)을 들어 '따뜻함의 지수'(온량지수라고도 함)라는 개념을 발표했다. 뒤에는 여기에 추위의 지수도 추가해, 이들을 조합하여 온도의 월 변화라는 자료로 식생을 설명하는 방책으로 삼는다. 이와 같은 발상으로 '추위의 지수'도 고안된다. 따뜻함(추위)의 지표란 달마다 평균기온이 5도 이상(이하)이 되는 달에 대하여, 각각의 월 평균기온으로부터 5를 뺀 값(5에서 월 평균기온을 감한 값)의 합이라고 정의한다. 쾨펜의 기후 구분도 키라의 온량지수도 모두 식생을 온도와 강수량이라는 간단한 지표로설명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각각 그에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와츠지가 <풍토>의 집필을 시작한 것이 1928년 무렵으로, 이는 쾨펜보다 약간 늦다. <풍토>는 와츠지가 유럽 유학(1927~1928년) 때 견문한 각지의 모습을 기초로 썼는데, 이 유럽 유학 중에 쾨펜 또는 그의 학설과 접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풍토>에는 구체적인 기후의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토>가 규정하는 세 가지 풍토는 쾨펜을 시작으로 하는 기후지리학의 구분과 놀랄 만큼 일치한다. 그 정도까지 기후를 구분하는 경계가 명확하고, 또 그것이 자연식생만이 아니라 토지에 살고 있는 인간 집단의 농경과 문화를 규정하고 있다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풍토는 -그것을 기후 구분이라는 의미로 쓰든지 인간적 고찰과 와츠지 자신이 고안한 '풍토'라는 의미로 쓰든지- 각각의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농경이란 요소를 강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기후와 농경


농경이 성립하고 나서도 기후가 농경의 요소를 규정한다는 골조에 큰 변화는 없었다. 예를 들면 벼는 냉대에서는 최근까지 재배되지 않았고, 또는 보리가 열대 평야에서 재배되는 일도 없다. 


작물의 번식, 즉 개화와 결실을 결정하는 큰 요인으로 온도와 함께 일장(낮의 길이)을 빼놓을 수 없다. 이것은 야생식물에게도 공통인데, 식물에게는 크게 단일식물과 장일식물의 차이가 있다. 앞의 것은 가을에 해가 짧아지는 것에 감응하여 꽃을 피우고, 뒤의 것은 봄에 해가 길어지는 것에 감응하여 꽃을 피운다. 낮의 길이는 그 토지의 위도에 따라서 엄밀하게 결정된다. 그 때문에 위도대를 횡단하는 방향(즉 남북 방향으로)으로 식물을 이동시키면 개화하는 시기가 변하여 큰 어려움이 따른다. 식물은 동서 방향으로는 비교적 쉽게 이동하지만 남북 방향으로는 쉬이 이동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작물의 품종개량을 거듭하여 몇몇 작물에서는 위도대를 뛰어넘는 일이 가능해지는 큰 유전적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면 벼가 기원한 곳은 북위 20도에서 30도 사이의 아열대 지역인데, 현재는 적도 바로 아래에서부터 북위 45도에 이르는 냉대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이것은 '일장중위성日長中位性' 또는 '불감광성'이라 하는 단일성(또는 장일성)을 잃은 특수한 유형의 출현에 따르는 바가 크다. 나중에 기술할 '북쪽 회랑'에서는 가을에 심어서 추위를 겪고 나서 꽃을 피우는 것이 본래의 성질이었던 보리의 종류에 '춘파'라고 하여 여름철에 생육하는 특수한 품종군이 분화되어 있다.


인간에 의한 품종개량은 저지대부터 고산지대에까지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곡물이 이에 해당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고산에서 살았던 작물이 산을 내려온 사례도 있다(예를 들면 감자). 원래는 반건조지대에서 기원한 보리인데 습윤에 강한 '동아시아형'이 분화된 것도, 또 원래는 수생식물이었던 벼가 밭벼라고 불리는 밭농사용 품종으로 분화된 것도 인간의 노력으로 품종개량이 된 바이다. 이러하면 어떠한 작물(또는 품종)이 어디에 적응하는지에 대해서는 인간 집단의 선호와 문화가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동물에도 식물과 비슷하게 일장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다. 일장 시간이 길어지는 시기에 번식 시기가 겹치는 동물을장일동물(말 등)이라 하고, 또 그 반대의 동물을 단일동물(양, 염소 등이 해당됨)이라 부른다. 또한 그들도 위도대를 넘어가는 이동은 번식 시기를 변경시키게 되어, 그에는 큰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다. 유라시아는 본래 동서로 긴 대륙이라서 동물과 식물도 주로 동서 방향으로 이동하고 남북으로는 이동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장, 나아가 위도를 넘어가는 일의 어려움 때문이다.



풍토의 개념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풍토란 단순히 기후풍토라는 의미의 풍토(영어로는 climate)가 아니라, 그것을 기초로 하면서 기후의 요소에규정되는 각각의 생태적 요소와 나아가서는 그러한 자연의 요소에 의하여 강하게 규제를 받는 인간 사회의 구조와 문화, 그에 더하여 인간 집단의 자연관, 종교 등 사상도 포함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싶다. 이 풍토관은 말할 것도 없이 와츠지 테츠로우和辻哲郎가 말하는 '풍토'를 의식한 것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답습하는 것은 아니다. 와츠지의 풍토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풍토>에 '인간적고찰'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풍토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기질까지도 근본적으로 설명하려는 조금은 거칠다고 말할 수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와츠지의 이 사상은 그 이후의 연구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바타 토요노鯖田豊之의 <육식의 사상>, 스즈키 히데오鈴木秀夫의 <삼림의 사고·사막의 사고>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이들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러한 인과관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상세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와츠지의 풍토론을 참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 세 가지 풍토가 농경과 농경사의 지역성을 논할 경우에는 참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에는 년 강수량 400mm의 선을 넣어 놓았다. 물론 와츠지 본인은 세 가지 풍토의 경계선 등은 넣지 않았다. 그러나 편의상 이 선을 세 가지 풍토의 경계선으로 놓겠다. 


다음의 '계절풍' '사막' '목장'이란 세 가지 풍토의 농경에 대하여 그 역사와 함께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계절풍 풍토와 농경



계절풍 농경의 중심은 벼농사 


와츠지의 풍토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이 계절풍 풍토이다. 이곳은 대략적으로는 일본 열도의 남반부부터 중국의 남반부,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부분을 포함하며 인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벼, 그것도 자포니카 벼의 기원지가 있는 곳이자, 또 그 대부분이 벼농사 지대인 곳이다. 벼의 다른 종류 가운데 하나인 인디카의 기원지는 아직 불명확한데 아마도 열대 아시아에 있다고 한다면, 계절풍 풍토는 벼의 벼의 풍토이며, 또한 온대지역과 열대지역 가운데 산간의 화전지대가 자포니카의 풍토이고 열대 평지가 인디카의 풍토라고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열대 도서의 벼는 전통적으로는 자포니카의 지대인데 최근의 개량종에는 인디카에 속하는 것이 많다(盛永, 1959).


화전지에서는 벼 외에 최근에는 옥수수와 율무의 재배가 성행한다. 화전지에서 벼농사는 벼농사라고는 해도 여러 가지 작물을 섞어짓기해 왔다. 섞어짓기하는 것은 조 등의 잡곡, 메론과 호박 등의 박과 작물 외에, 바나나와 참깨 등의 유지작물, 허브 종류 등 다채롭다. 다만 화전은 겉으로 볼 때 생산성이 낮은 데 더하여, '숲 파괴'와 '환경에 나쁘다'는 등의 이유 없는 비판으로 급속히 그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열대 저지대에서는 뜬벼라고 부르는 것을, 수심이 몇 미터나 되는 땅에서 농사짓고 있다. 뜬벼만큼은 아니어도, 우기에는 수심이 1미터 가까이 되는 곳이 많다. 이러한 곳에서는 현재 벼논양어가 행해지고 있다. 


미얀마 중부와 인도의 데칸 고원에는 약간 건조한 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지역에서는 잡곡이나 잡곡과 콩의 농사가 전개되고 있다. 



계절풍 풍토의 농경사


온대의 계절풍 풍토는 1만 년에 이르는 벼농사 지역이지만, 자세히 보면 농경의 양식에 큰 지역차가 있다. 일본 열도에서 벼농사를 수용한 것은 조몬시대 후기는 확실시되고 있지만, 열도의 동반부(이세만伊勢湾-와카사만若狹湾을 연결한 선의 동쪽)에서는 더디게 수용했다. 중기 이전의 일본 열도의 조몬문화는 초원의 농경과 수렵·채집을 조합한 형태였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도 기술하겠지만, 농경의 요소는 중국으로부터가 아니라 북쪽에서 전해졌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 논농사의 수용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잡초 방제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온대 계절풍에 속하는 일본 열도에서는(특히 그 남서부에서는) 농경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잡초이다. 사람들은 잡초 방제에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러나 결국에는 논에 납작 엎드려 뽑는 것 말고는 유효한 수단이 없었다. 땅에 여유가 있던 중세까지는 잡초의 대책으로 아마 지금은 휴경 또는 경작방기라고 하는 일을 행하였을 것이다(宇野 2001, 佐藤 2003). 또 고대 이후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도 벼농사로 회귀하는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대의 왕조는 종종 포고를 통해 육식의 금지령을 내렸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색채를 띠면서도 실은 벼농사의 비중을 높이려는 일종의 경제정책이었다고 한다(原田 2005). 그것은 걸핏하면 이동이 따르는 수렵과 채집 경제로 회귀하는 일을 막는 측면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구조를 벼농사로 전환하는 일에는그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장강 유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벼농사가 행해져 온 지역으로, 그 역사는 1만 년을 넘는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조차 벼가 사람들의 주요한 전분 공급원이 된 것은 양저문화기 이후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저문화기 무렵에 장강 유역은 중국에서 북쪽의 문명이던 황하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로서, 깊이 파고들어 이야기하자면 이 시기가 되어 처음으로 현재의 논벼농사의 원형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현대의 논을 방불케 하는 장치가 최근에는 장강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많이 발견된다. 이는 논이라는 장치가 나중에 이야기할 황하문명의 강한 영향을 받아 발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 이전의 '벼농사'는 아마 매우 조방한 양식을 띠고 있었다. 논벼농사의 시초에 대하여 후지와라藤原(1998)는 장쑤성의 초혜산草鞋山 유적(약 6400년 전)의 논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논벼농사의 기원을 이 시기에서 찾고 있는데, 여기에는 의론이 있다. 왜냐하면 '논'이란 장치를 오로지 벼농사를 위해 물을 담기 위한 논두렁과 관개를 위한 수로 등을 수반하는 구조물이라고 고려한다면, 그러한 장치는 일본 열도에서도 근세에 이르기까지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논이 지극히 한정적이며, 벼를 심을 수 있는 논은 다른 수생동식물이 공존하는 다양한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중국이라는 풍토


계절풍의 농경을 생각하면 특필할 만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중국'이다. 와츠지 또한 중국을 '계절풍 풍토의 특수 형태'로 취급한다. 중국 농경의 기원과 전파를 고려할 때, 회하 또는 장강을 경계로 남북의 차이가 당연한 문제가 된다. 이 경계의 남북에서는 지금도 '북쪽의 맥류, 남쪽의 벼'라고 할 정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말이 생긴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남북'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변함이 없었다고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선의 남쪽은 벼농사 지대이며 계절풍 풍토에 속하고, 북쪽은 밭농사 지대인 데다 그 서쪽은 방목 등을 수반하는 건조, 반건조 지대를 지나 사막의 풍토로 이어진다.


이 밭농사 지대의 작물은 옛날에는 조, 수수 등의 여러 잡곡이었다. 이들은 황하문명의 옛 유적에서도 출토되며, 최근에는 요녕성과 내몽골 자치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도 출토되는 일이 보고되고 있다. 다만 조와 수수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설이 없다.특히 수수는 여전히 불명이다. 또 피도 동북아시아에서 기원한 잡곡이라고 하는데, 그 기원에 대해서는 사카모토阪本의 '일본 열도기원설' 이외에는 뚜렷한 논고가 없다(佐々木 2007을 참조). 여기에서 열거한 잡곡류는 맥류와 같이 한해살이인데, 여름농사라는점에서 맥류와는 매우 다르다. 


아무튼 황하문명은 그 뒤 차례로 그 주곡을 잡곡에서 밀로 바꾸어 간다. 이 전환은 밀이 생산성에 더 뛰어났다는 사정이 있는지 불가사의한 현상이다. 왜냐하면 앞에 서술했듯이, 여기에서 재배되었던 잡곡은 모두 여름작물인데 이 지방에서 밀은 겨울작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름작물과 겨울작물의 전환은 인더스 문명기의 하라파Harappa 유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Weber 1991). 관개 체계 또는 물의 수입과 지출을 고려하면, 이 전환은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전환을 가져왔을지 흥미로운 문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밀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서아시아에서 기원한다. 그것은 5000년 전쯤에 육로, 지금의 신장 위구르를 통하여 중국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그곳은 중국 문화가 아직 미치지 않았던 시대이다. 밀이 도래한 당시의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포함하여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기대되는 바이다.


더구나 최근 중국에서 행한 농경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는 민족주의를 시사하는 듯한 '하나의 중국론'에 입각한 논조가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허난성의 가호賈湖 유적(8000년 전)에서 볍씨가 출토되었는데, 그것이 야생 벼인지 재배 벼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만약 거기에 야생 벼가 있는 동시에 그곳이 벼농사의 기원지 가운데 하나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벼농사의 기원지는장강 유역에서 단숨에 황하 유역에도 이를 만큼 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고려하면, 가호 유적 일대에 야생 벼가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열대에서 벼농사의 개시


열대 계절풍 풍토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도서 지역의 열대우림으로 이어지는 '우록림雨綠林'의 풍토이다. 이곳은 우기와 건기가 비교적 뚜렷하게 구별되어, 건기에는 상당히 건조하다. 이 강한 건조함이 우록림의 나무들이 건기에 낙엽이 지게 하는 원인일 것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와 버마(미얀마)부터 서부 지역에서는 똑같은 열대 계절풍이라 해도 기후 요소가 꽤 다르다. 왜냐하면 인도차이나 반도는 그 위도가 북위 20도에서 10도에 넓게 걸쳐 있는 데 반하여, 버마부터 서부 지역은 남단이 북위 8도에서 인도차이나 반도와 늘어서 있으면서 북으로는 북회귀선(북위 23.5도)을 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벼는 갠지스 유역 일대에 주로 분포한다. 남부는 데칸 고원의 반건조지대이다. 


그러나 열대 아시아에서 농경의 시작은 온대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진다고 생각한다. 열대 아시아의 고고학 유적의 발굴이 온대의 그것보다 훨씬 뒤쳐져 있다고 해도, 농경의 증거를 남긴 옛 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간의 집단이 큰강 하구의 삼각주에서 침입했던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태국에서는 지금의 수도 방콕이 개발된 것은 겨우 18세기의 일이었고, 그전에는 정치경제의 중심이 70킬로미터 북쪽의 아유타야였다. 아유타야 이전에는 차오프라야강을 더 거슬러올라간 수코타이가 수도였다. 아유타야 왕조 시절에 아유타야는 운하를 통하여 곧바로 바다로 나갔다. 방콕 평원이 지금처럼 된 것은 겨우 200-3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일이 메콩강 삼각주에서도 있었다. 메콩강 삼각주는 현재 개발되어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인데, 여기에 사람들이 이주한 건 불과 200-300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다. 인도차이나에서 인간 집단은 강의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했을 것이다.


인도차이나 대륙부에서는 전통적으로 화전으로 벼농사를 행해 왔다. 단, 고고학적으로 화전을 증명하기란 어려워서 그것이 어느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에서 농경을 시작한 걸 고고학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앞으로의 큰 과제이다. 


인도차이나부터 열대 도서에서 농경은 아마 4000년 전쯤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긴 하지만, 파퓨아뉴기니에서는 9000년 전쯤 인간이 활동한 흔적이 나타나고 있어 지금까지의 학설이 확 바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을 출발해 태평양으로 확산된 몽골로이드 이전 인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과 몽골로이드에 의한 원시적 농경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갠지스강 유역의 이른바 강가Gaṅgā 평원 북서부의 유적에서 8600년 전쯤의 볍씨가 출토되어 그것이 재배 벼인지 야생 벼인지를 둘러싼 논의가 있다.




사막의 풍토와 농경



사막의 풍토

 

와츠지의 '사막'은 꽤나 개념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보았던 '사막'은 아덴 부근(즉, 아라비아 반도의 아주 일부)의 사막이어서, 유라시아 내륙부의 사막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막의 풍토'는 이 책에 끼워 넣은 지도의 연 강수량 400mm 선 안쪽의 건조, 반건조 지대이다. 


이 지대 안에는 예를 들면 다클라마칸 사막 같이 연 강수량이 겨우 몇 밀리미터에서 몇십 밀리미터인 극단의 건조지대가 있어서, 식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사막'의 경관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그곳보다는 강수량이 많은 토지도 있어 약간의 식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이른바 사막은 건조만이 문제인 토지가 아니라, 그 강한 염성에 의하여 식생의 생육을 방해받는 토지가 많다. 


사막의 풍토에서 이루어진 전형적인 농경이 유목이다. 이는 약간의 식생을 필요로 하여, 양 등의 무리를 이루는 가축을 이동시키면서 사육한다. 더구나 사막의 풍토에서는 양과 염소 외에 소와 말, 낙타 등 다른 대형 가축이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 강수량이 400mm 이하면 밀을 재배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보리는 300mm 정도인 곳에서는 재배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기장과 조 등의 잡곡은 더욱 소량의 강수로도 재배할 수 있다.


사막의 풍토가 지닌 한 특징은 오아시스이다. 오아시스는 지하에 있는 수맥이 지표에 이르는 곳에 생기는 녹지로서, 큰 오아시스에서는 벼농사까지 이루어진다. 


한편, 토양의 염성화를 불러온 이유로 유력한 설의 하나가 염해이다. 그것은 관개수에 포함된 미량의 염분이 농경지에 축적되거나,아니면 태고부터 지하에 괴어 있었던지 하여 일어난다고 한다. 염해가 생기면 그 토지는 염분을 씻어내지 않는 한 농경지로 사용할수 없다. 중앙아시아의 아랄해 주변에서는 옛소련이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아무다리야강의 물을 끌어다 대규모 면화밭을 개간했다.그로 인해 아랄해로 흘러들어오는 수량이 줄어 호수의 면적이 뚜렷하게 감소했다. 또 면화밭에서는 토양의 염성화에 의해 광대한 면적이 사막화되었다. 그렇게 하여 사막의 면적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 사막의 풍토


다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근처에서 발견된 소하묘小河墓 유적(3000여 년 전)은 묘의 유적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미라가 담긴 관이 발견되었다. 그 관은 호양나무(야생 포플러)의 나무판을 짜맞추어 만든 것으로, 그 뚜껑 부분은 살아 있는 소의 생가죽으로 덮어 놓았다. 관 안에는 풀로 엮은 바구니가 있고, 그 바구니 안에 보통 밀과 기장으로 여겨지는 식물의 씨앗이 들어가 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3000년 전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밀 등과 소, 양 등을 조합한 복합적인 농업+목축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문헌에서도 과거 2000년에 걸쳐서 건조화가 진행되었음이 밝혀졌다. 뒤에 서술하듯이, 풍토에는 역사성이 있어 그 기후와 생태계의 상태는 시간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화한다. 조금 대담한 추측을 더하자면, 사막의 풍토 가운데 적어도 그 일부는 지금과 같은 건조 상태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은 누란왕국의 발굴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누란왕국은 기원전 4000년 전쯤에 기록에 나타나, 그 뒤 약 800년에 걸쳐서 존속했다고 한다. 누란왕국의 위치는 고고학적으로 엄밀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공작강孔雀川의 하류에서 발견된 몇 곳의 유적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른바 뤄부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일찍이 호수의 기슭이었다. 누란왕국은 인구가 1만4천 아니면 1만7천이라고 기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에 상당하는 규모의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스웨덴의 탐험가 S. 헤딘이 탐험할 때 카누로 내려갔던 공작강에는 이제 거의 물이 없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의 건조화는 이 100년 사이에도 진행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타클라마칸에서부터 1500킬로미터 동쪽의 헤이허 유역에서는 이 1500년 사이 강물을 이용을 둘러싸고 유목민과 농민의 이해 대립이 있었다(日高, 中尾 2006). 반건조지대에서는 이처럼 수리권을 둘러싼 다툼이 늘 발생한다.  



고대 문명과 염해


그런데 '사막'의 풍토에서 사막화는 어떻게 하여 발생하고, 또 진행되는가?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부분은 오랜 기간의 기후변동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사막화는 인위적인 요인이 크다는 설도 있다.


Maekawa(1974)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기(우르 제3왕조)에 앞에 언급한 메카니즘에 의해 염해가 발생해 겨우 25년 사이에 그때까지 경작할 수 있었던 밀을 재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며 염해설을 지지했다. 그와 같은 일은 고대 인더스 문명에서도 일어났다고 한다. 또 누란왕국이 쇠망한 원인으로 이 염해를 드는 연구자도 있다(山田 2006). 다만, 예를 들면 오사카교육대학의 이토 토시오伊藤敏雄 씨와 같이 이에 이론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인더스 문명의 범위에서도 특히 남부의 구자라트 지방에서 토양의 염성화가 심각하다고 한다. 누란왕국의 쇠망처럼 염해가 인더스 문명이 붕괴한 직접적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그것과 인과관계가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장래의 기후변동 등에 의하여 강수량이 늘어났던 곳에서 풍요로운 대지가 회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확실하다.


이러한 과거의 염해가 정말이었다면, 토양의 염화에 의한 사막화는 인위적 색채가 짙은 현상이었던 셈이다. 사막화와 같은 전 지구수준의 환경문제는 지금까지 걸핏하면 기후변동 등의 자연현상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재검토하고 있다. 





목장의 풍토와 농경



목장의 풍토


목장의 풍토는 대개 유럽과 겹친다. 유럽에서 농경의 확산은 벨우드(2008)에 의하면 1만 년 전에 시작되어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7600년 전쯤에, 영국에서는 6000년 전쯤에, 그리고 북유럽에서는 2500년 전쯤에 전해졌다. 이러한 시간차와 함께, 재배되었던 작물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지중해 연안 지방에서는 지금도 사배체인 듀럼밀이 널리 재배되고 있다. 미국 농무성의 통계에의하면, 지중해 지방에서 가장 마카로니밀을 많이 생산하는 곳은 이탈리아(연간 약 400만 톤), 터키(230만 톤), 스페인(210만 톤), 알제리(200만 톤), 프랑스(140만 톤) 순이다. 이에 대하여 같은 유럽에서도 독일은 겨우 2톤밖에 안 된다. 한편 빵밀 쪽은 전 유럽에서 대개 널리 재배되고 있다.


마카로니밀과 대조되는 것이 감자이다. 감자의 생산량은 유럽에서 우크라이나, 독일, 폴란드, 벨라루시, 네덜란드, 프랑스 순으로서 '북고남저'의 경향이 뚜렷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감자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이후의 일이다. 특히 북유럽에 전해진 건남유럽보다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감자 이전의' 유럽, 특히 북유럽에서 주곡은 보리와 호밀, 귀리 등 이른바 '맥류'라는 잡곡의 무리였다(벨우드 2008).


그러나 목장의 풍토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목축이다. 목장의 풍토에서 그 근간이 되는 생업은 이른바 '무리 가축'이라는 큰 무리를 단위로 이동하는 가축을 이용한 목축이다. 이것은 원래 서아시아에서 발단한 일이다.



목장의 풍토를 바꾼 신대륙의 농경 요소


목장의 풍토는 16세기까지 맥류+젖, 육류가 조합을 이룬 풍토였다. 그러나 그 생산성이 반드시 높은 건 아니고, 특히 북유럽의 식량생산은 비참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 16세기에 도입된 감자였다. 감자는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신대륙의 '발견'에 의하여 유럽에 전해진 신참 식량이다. 신참이지만 감자는 유럽의 풍토에 잘 적응했다. 밀레의 '만종'에는 저녁에 교회 종소리에 기도를 드리는 농부들의 발 밑에 감자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자는 생산성이 매우 낮았던 유럽 북부에서는 남부보다 아주 빨리 전파되었다. 다만 감자는 그 덩이줄기에 의하여, 즉 영양번식에 의하여 자손을 늘리게 된다. 물론 씨앗으로 번식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싹 부분을 남기며 자른 씨감자로 늘리게 된다. 씨감자로 늘어난 각 개체는 말하자면 복제물로서,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한 집단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셈이다.


1980년대 감자는 영국부터 아일랜드에서도 주요 작물로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감자에 역병이란 질병이 발생했다. 질병은 순식간에 섬 전체로 퍼지고, 감자를 파멸시켰다. 절반이 감자였던 섬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기근에 빠졌다. 역병은 이듬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발생하여 혼란이 이어졌다. 이후 몇 년 동안 아일랜드를 빠져나온 난민이 200만을 넘었다고 한다(Zuckerman 2003).


그밖에도 남미 원산으로 세계를 돌아다닌 식량이 있다. 옥수수와 토마토, 고추 등이 그것인데, 이들은 감자와 마찬가지로 겨우 400년 사이에 세계를 돌아다녔다.



목장의 풍토와 사막의 풍토가 갖는 일체성


풍토에는 역사성이 있다. 즉 영원히 불변하는 풍토란 없다. 와츠지는 '풍토의 역사성'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를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썼듯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과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는 건조함이 지금에 비하여 아주 경미했다. 현장 3세의 여행기에서도 그 행보가 이르른 곳에 나라가 있거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長沢 1998). 사막의 풍토의 전역이 그러했는지 어땠는지, 일찍이 그곳은 농업, 목축업이 행해진 풍토였던 것을 살필 수 있다.


그곳에 있었던 작물과 가축이 현재 목장의 풍토와 유사한 걸 보면, 사막의 풍토가 예전에는 목장의 풍토와 유사한 경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또 그림1에 보이듯이, 중국 북서부에서는 마치 사막의 풍토와 계절풍의 풍토에 끼어 있는 모양으로 목장과 비슷한 풍토를 볼 수 있다. 상상을 마음껏 한다면, 사막의 풍토는 3000년쯤 전에는 현재 목장의 풍토 같은 경관을 나타내고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어떤 이유로 인해 바다에서먼 일부 지역에서 건조함이 진행되어 지금 같은 사막의 풍토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점에 대한 상세한 건 앞으로 연구할 주제의 하나로 남겨두고 싶다. 또 이 시리즈에서는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를 합쳐서 '맥류의 풍토'라고 부르고 싶다.


여기에서 계절풍의 풍토와 맥류의 풍토에 있는 농경 요소를 비교해 보자.


먼저 곡류에 대하여. 계절풍 풍토에서 곡물은 먼저 뭐니뭐니 해도 벼이다. 다음 메밀도 중국에서 생겼다고 한다. 백합, 칡 등 일부 뿌리식물도 계절풍에서 생겼을 것이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 생긴 것은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여러 '맥류'이다. 콩과에 대해서는 대두, 팥 종류가 계절풍 풍토에서 생긴 콩임에 대해, 맥류의 풍토에서는 누에콩, 병아리콩 등이 생겼다.


가축으로는 계절풍에서 생긴 건 무리를 이루지 않는 여러 '집 가축'인 돼지나 가금류 외에 물소, 인도 혹소 정도이고, 나머지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는 세계의 주요한 무리 가축의 주축인 소, 말, 양, 염소가 기원하고 있다. 


식품의 보존기술의 하나인 발효에 대해서도 두 풍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계절풍 풍토에서 발효는 대부분 곰팡이 종류인 누룩곰팡이가 쓰인다. 이 지역의 양조주와 증류주(모두 곡물을 원료로 함) 대부분은 이 방법으로 만든다. 또 된장, 간장, 청국장 같은 고유한 발효식품도 대부분이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법으로 만들고 있다. 다만식해나 어간장 같은 식품에서는 그 방법이 조금 다르다. 한편 맥류의 풍토에서 발효법은 유산균을 이용하거나 또는 체내의 효소를 이용하는 것이 중심이다. 이집트에서 기원한 맥주는 엠머밀의 빵을 설구워서 그대로 살아남은 아밀라아제의 힘을 이용하여 녹말을 당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맥주를 만든다.




남단과 북단의 풍토



북쪽 회랑


유라시아의 북단은 북극해에 접한 매우 추운 땅이다. 토지는 영구동토이고, 지표에는 지의류 이외의 식물은 거의 없다. 여기는 쾨펜의 기후구분도에 따르면 한대(E 지역)이다. 여기에서는 순록을 사육하는 것 말고는 농경의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남쪽에는 타이가라고 부르는 침엽수를 중심으로 한 숲이 펼쳐진다. 쾨펜의 냉대(D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서는 봄밀, 호밀, 순무, 메밀 등이 재배되어 왔다. 겨울철은 어떠한 경작도 할 수 없고, 여름철도 짧다. 봄밀이란 초봄에 심어서 여름철에 생육하고, 가을에 수확하는 재배방식을 취하는 밀로서, 그 전용 품종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계절풍 북부에 농경이 건너오게 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몇 가지 재배식물이 여기를 통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운송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북쪽 회랑'이라 부르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작물의 이름을 들자면, 순무와 보리, 우엉, 메밀 등이다. 이 가운데 보리와 순무는 다른 위도대에서 적응하는 여타의 품종군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 여러 경로를 거쳐 전파되었다고 생각한다. 상세한 건 '일본의 풍토'에서 이야기하자.




인도의 풍토와 농경


인도의 풍토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의 하나이다. 인도는 계절풍 권역이지만, 그 광대함과 기후, 지형의 다양성 때문에 한마디로 '계절풍'이라고 묶을 수 없는 존재이다. 특히 반건조지대에 걸쳐 있는 남인도에서는 이곳 고유의 작물이 옛날부터 재배되어 왔다.  또한 이 지역은 일찍이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작물을 유라시아에 최초로 들여온 장소라고 지목되며, 독자의 농경문화를 형성해 왔다. 


와츠지는 인도를 '계절풍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토지'라고 하는데, 그의 풍토론과 마찬가지로 풍토에 주목하여 비교문명론의 논의를 전개한 우메사오 다다오梅棹忠夫는 인도를 동양과 서양에 대비해 '중양中洋'이라고 불러 두 지역과 구별한다.


계절풍 풍토의 벼, 사막과 목장, 즉 맥류 풍토의 맥류와 마찬가지로 인도의 풍토를 특징하는 작물을 들자면 '잡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 피, 기장 등의 종으로 대표되는 'millet' 외에 인도 고유의 잡곡도 있다. 또 콩 종류에서도 인도 고유의 종이 있다(前田, 1987). 특히 다양한 콩 종류는 그 종교적 금지에 의하여 육류(때로는 알까지도)를 입에 대지 않는 많은 인도 사람들에게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콩과작물과 벼과작물을 섞어심는 재배양식이 있다고도 한다. 콩과식물의 대부분이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시키는 '질소 고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콩과작물이 지주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질소 성분의 공급을 받아서 자라는 벼과작물을 함께 재배하여 서로 돕는 관계를 구축하는 독특한 농법이다. 벼농사에 대해 말하자면, 인도에서도 벼농사가 행해졌는데 인도의 벼농사는 계절풍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논할 수 없다(이 점에 대해서는 이 책 말미의 대담에 나온다).


인도의 '중양적' 성격은 그 지리적 위치와도 관계가 있다. 우리들의 프로젝트와 같이 지구연에 속한 '인더스 프로젝트'의 오사다 토시키長田俊樹 교수에 의하면, 인더스 문명은 벼와 맥류를 모두 수용한 문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도의 독자적 풍토에 대해서는 농경과의 관련성부터 더 상세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대 도서부의 풍토와 작물의 진화


열대 도서의 농경 풍토는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라고 말할 것이다. 그곳은 토란, 얌 등 덩이줄기 식물, 빵나무와 바나나, 판다누스 등의 보고임과 함께 그것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곳이 원산지이다. 이러한 식물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다. 그것은 계절풍이나 맥류 풍토의 주요 작물, 특히 맥류가 한해살이 작물인 것과 대조적이다. 


한해살이 작물은 1년에 1회, 반드시 번식을 행한다. 종자는 통상 3년쯤 지나면 발아력을 잃기 때문에, 어느 종의 품종이나 종자인 채로 오래 놔둘 수가 없다. 종자를 저온, 건조 등의 조건으로 놔두면 장기간 보존할 수 있다는 건 20세기 후반에 발명된 기술이다. 게다가 한해살이 식물의 종자는 뿌리면 다음 농사철에는 반드시 죽기 때문에, 그 농사철의 마지막에 파종했던 것에서 다음 세대의 종자를 확보해야 하는 숙명이 있다. 즉 어느 문화가 한해살이 작물을 가지고 있다는 건 파종과 채종의 주기를 끊임없이 계속 행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곳에서 한해살이 작물의 농경이 일단 시작되면 이제 원래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동시에 이런 점은 한해살이 작물이 1년에 1회의 유성생식으로 급속히 진화하는 기회를 획득한다는 걸 의미한다. 한해살이 식물 가운데에는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과 딴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이 있다.  이 가운데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유형은 많은 품종을 만들어내기 쉽고, 그만큼 환경이 상이한 여러 지역에 전파되기 쉽다.


한편 여러해살이 풀은 극단적으로 말해 몇 백 년, 몇 천 년에 걸쳐 유성생식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적으로는 몇 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적으로는 이동도 느리고, 높은 토착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풍토



일본의 남북


일본 열도의 문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지적은 이미 상록활엽수림 문화를 둘러싼 논의 안에서 발생했다. 이 지적은 일본의 숲이 동북부의 낙엽활엽수림대와 남서부의 상록활엽수림대로 크게 양분될 수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농경 문화에 대해서도 이 지적은 그대로 해당된다. 다만 남북(또는 동서라 하는 것이 적당할지 모름)을 나누는 선은 문화 요소에 따라 조금 다르다. 남북의 다른 농경 요소와 그에 관련된 요소를 그림2에 표시해 놓았다.



그림2


요소

경계

동(북)

서(남)

조몬 벼농사

순무 품종

보리 품종

보리 품종(겉보리)

파 품종

잠재식생(숲의 수종)

생쥐의 계통


매우 드묾

서양종 순무

W형이 있음

겉보리

흰파(카가加賀 파)

낙엽수림

식용(E. crus-galli)

mus 형

있음

일본 순무

E형

쌀보리

청파(9줄 파 등)

상록활엽수림

잡초 피(E. oryzicola)가 많음

castaneus 형


'남북'의 경계가 가장 북쪽에 있는 요소로는 생쥐, 왕대 등이 있다. 왕대 분포의 북방한계는 아키타현 부근이라든지, 쓰가루 해협이라든지, 또는 후쿠시마현 부근이라 일컬어진다. 경계선이 그 다음으로 북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 순무, 파, 보리 등이다. 순무를 예로 들면, 순무에는 아종 수준에서 2가지 품종군이 있다. 이 가운데 서일본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품종은 일본 순무라고 부르며, 잎 등에 가느다란 털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북일본 등에 분포하는 품종은 서양종 순무라고 부른다. 야마가타현의 쇼나이庄内 지방을 중심으로 재배되는 이른바 '붉은 순무'가 그 전형이다(靑葉, 2000). 파의 분포도 이와 유사하여 북(동)일본에는 이른바 흰파가, 반대로 남(서)일본에는 9줄 파 형의 녹색 부분이 많은 유형이 분포해 있었다. 경계선이 가장 서(남)쪽에 있는 것이 피, 수종 등이다. 조몬 토기의 한 유형인 돌대문 토기의 분포도 이 선과 같다. 또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고 생각되는 사투리의 동서 차이, 간장의 기호성 차이 등도 대체로 이 선이거나, 약간 동쪽 지역에 경계를 가진다고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 열도에서 남북(서동)의 요소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유라시아에서 동서의 요소와 일치하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서양종 순무의 분포역은 시베리아에서 더 서쪽에 이른다. 한편 일본 순무의 분포역은 중국의 강남 지방이 중심이다. 거의 마찬가지로 보리도 이에 해당한다. 즉, 이러한 재배식물들을 똑같은 순무, 보리라고 하지만, 실은 두 가지 다른 유형이 건너와 적어도 하나는 중국의 강남에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라시아의 서쪽에서 각각 따로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 열도의 풍토는 그 남(서)반분은 계절풍 풍토이고 북(동)반분은 훨씬 목장의 풍토와 유사성을 나타낸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은 일면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일본(いくつもの日本)>(赤坂, 2000)이란 발상은 풍토의 입장에서도 정당성을 갖는다.



일본에서 농경의 시작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시작은 언제로 잡으면 좋을까? 이전에는 고고학을 중심으로 조몬시대는 수렵채집의 시대, 야요이시대 이후는 논을 수반한 농경의 시대라고 단순하게 생각해 왔다. '조몬 농경론'도 되풀이하며 나왔지만, 지금까지는 어느 것도 세상에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점점 '조몬-야요이'를 재검토하자는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조몬 농경론에 부정적인 견해는 주로 논의 유적이 조몬시대의 만기의 종말기까지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농경이라 하면 벼농사, 게다가 논벼농사라는 견해가 마치 상식인 것처럼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말하자면 '벼농사 지상주의'라고 할 만한 무대에서 조몬 농경에는 의론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홋카이도에서 피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지적되는 점, 아오모리현과 산나이마루야마 유적에서 밤나무의 재배에 대한 연구 등에 의하여 농경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의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서일본(여기에서는 와카사만과 이세만을 잇는 선의 서쪽)에서는 조몬시대 후기에 들어오면 여러 유적에서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대에는 벼농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동일본에 언제 벼농사가 전해졌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앞에서 기술했듯이 조몬시대의 일본 열도는 크게 남북(동서)으로 양분할 수 있고, 북쪽 조몬은 훨씬 맥류의 풍토와 상관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풍토와 지구 환경문제



풍토에 적응하기


앞에서 와츠지의 풍토론이 지닌 문제점의 하나로 사람의 기질이나 사상 같은 것을 너무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이나 사회의 기질과 사상이 그 풍토의 기후, 생태계나 농업 등의 영향을 완전히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아니, 기질이나 사상 같은 것은 확실히 그 풍토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또 풍토에 적응한 생활이나 농경문화의 생성에도 관여해 왔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토착 애니미즘적인 자연관과 세계관의 영향이 뿌리 깊었다고 생각하는데, 고대 이후에 건너온 불교는 이 애니미즘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독자적 불교를 형성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일본 특유의 사상이 적어도 중세까지 사람들의 넉넉함, 또는 자연에 따르는 생활방식의 기반이 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 시리즈 5권에서 소개하는 오사카부의 이케시마池島와 후쿠만지福万寺 유적에서 검출된 중세의 '시마바타島畑'는 그 구체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시마바타는 특히 큰 홍수 이후 등에 퇴적된 모래를 쌓아올려 두렁을 만들고 밭작물을 심고, 또 낮은 곳에는 벼를 심을 수 있도록 한 장치이다. 홍수라는 자연의 맹위를 헤어나기 위한 '견딤의 기술'이라 해도 좋다. 현대의 발상으로 홍수의 방지는 오로지 치수사업에 의한 것인데, 실제로 나중에는 이케시마와 후쿠만지 유적의 부근에서도 '자주 넘치는 강'이란 이명을 가지고 있던 야마토강을 바꾸어 놓는 공사가 행해져(1703년) 홍수 피해는 경감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형 공공투자를 할 수 없었던 시대에는 시마바타는 흔히 생각할 수 있던 '견딤의 기술'이었다.



농학적 적응과 공학적 대응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에서도 '견딤의 기술' 같은 방식이 있다. 그 좋은 예가 '뜬벼'이다. 뜬벼는 앞에서도 적었듯이, 동남아시아 평야부에서 우기에 몇 미터나 되는 수심에서도 살아가는 벼이다. 벼는 그 줄기에 생기는 마디와 마디의 사이에 있는 분열조직의 세포를 늘려서, 그로 인해 수심에 따라 키를 변화시킨다. 교토대학 동남아시아 연구센터에 있던 타카야 요시카즈高谷好一 씨는 이러한 벼가 지닌 적응력을 이용한 적응 방법을 '농학적 적응'이라 불렀다. 한편, 이외에도 댐을 만들어서 수량을 조절하거나 배수로를 만들어서 물빠짐을 좋게 하면 일반적인 벼를 농사지을 수 있다. 이것을 농학적 적응에 대비해 '공학적 적응'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태국의 방콕 평원에서는 지금까지 광대한 뜬벼의 논이 펼쳐져 있었다. 즉 농학적 적응을 하여 사람들은 벼농사를 영위해 왔다. 최근 이곳을 흐르는 차오프라야강의 상류에 거대한 댐을 만들어 홍수를 일으키지 않고 토지를 '유효하게' 사용한다는 시도가, 곧 공학적 적응이 검토되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정말 평원의 광대한 토지는 우기와 건기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고, 계속해서 벼농사도 가능하다. 생산성도 향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학적 적응이 도입됨에 따라 기존의 뜬벼를 심던 논에 성립되어 있던, 사람들의 삶과 이어져 있던 생태계는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뜬벼의 논은 어로의 장으로 사용되어 거기에서는 벼만이 아니라 잉어과나 메기과의 담수어 등을 잡았다. 또 그들의 배설물이나 물에 녹은 영양분이 뜬벼의 논에서는 거름이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공급되었다. 뜬벼를 폐지하면 이와 같은 체계를 단숨에 사라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공학적 적응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우수한 적응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투자되는 에너지도 많아지는 데다가 예기치 않은 재해 등에는 적응할 수 없는, 유연성이 떨어지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에 반하여 농학적 적응에서는 생산성은 낮지만 생태계의 안정을 손상시키지 않고, 높은 지속성을 가지고 생산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모두 풍토에 적응하기라 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이 풍토의 실태에 꼭 맞는 것인지는 명확할 것이다. 


농학적 적응이 계절풍 풍토의 고유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훨씬 예전에 쓸모없어진, 유럽의 중세에 널리 행해졌던 '삼포식 농업'도 일종의 농학적 적응이었다. 그럼 공학적 적응은 단순히 근대화의 산물로 도입된 것뿐일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을 비롯한 계절풍 풍토에서는 애니미즘 사상을 현재에 이어받아, 그만큼 농학적 적응을 이어받으려는 행동규범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풍토의 사상적 우열을 이야기할 요량은 아니지만, 풍토와의 관련에서 생긴 사상이 풍토에 적응하기란 방식에 대하여 지닌 의의를 새로이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지구 환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처음에 적었던 농업 생산의 모순과 붕괴로 가는 길은 풍토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물을 둘러싼 문제를 예로 들자면 계절풍 풍토처럼 남아도는 물이 홍수와 습해를 일으키는 곳도 있다면, 사막의 풍토처럼 물의 절대량이 부족하건, 그것을 완화하기 위한 관개가 가져온 염해로 고생하는 곳도 있다. 또한 같은 계절풍 풍토에서도 홍수의 상습 지대(일본에서는 수향水郷 지대나 키소산센木曾三川 지대)도 있다면, 반대로 여름철의 적은 비로 가뭄의 피해를 받기 쉬운 지대(일본에서는 사누키讃岐 평야나 오사카 평야의 남부)도 있다. 문제는 매우 지역적이다.


기후변화, 특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온난화에 대해서도 어느 작물의 재배 적지가 고위도 지대로 이동해 버린다는 문제가 있는 토지(일본처럼 남북으로 긴 나라는 그렇다)도 있다면, 빙하의 해빙으로 홍수가 빈발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지역도 있다. 강수의 패턴이 변하여 작부체계에 영향이 나타나는 지역도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지구 환경문제는 그 근본은 동일한 원인에 지배되더라도, 나타나는 바는 풍토에 따라 여러 모습이 된다.


해결을 목표로 방책을 채택하는 법도 또한 풍토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뜬벼의 체계를 채택해 온 열대 계절풍의 사람들은 해마다 홍수에 대해 체념하는 듯한 대응을 채택한다. 2008년 여름, 나는 라오스의 비엔티엔에 있었다. 40년 만에 메콩강의 홍수가 난다 하였는데, 사실 일부에서는 제방이 터져 무너져 침수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엔티엔 시당국은 군을 동원하여 제방 위에 모래부대를 쌓는 대책을 채택했는데, 시 안에서는 양동이와 바가지를 사서 그때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수위가 예상을 뛰어넘으면 재산의 일부를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강이 범람하면 물고기가 시 안으로 흘러 들어와 생각하지 않게 고기를 잡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관공서와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예전에는 짚신을 신고 통근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의 규범의 문제 등이 아니라, 언제 물이 넘을지 모르는 풍토에 사는 사람들이 적응한 모습이었다. 


한편, 공학적으로 적응해 버렸던 일본에서는 일단 홍수가 일어나면 넘친 물도, 고기도, 토사도 모든 것이 재해의 원인이 된다. 물이나 아스팔트 위의 모래는 교통의 장애가 되고, 물고기는 죽어서 부패해 위생 문제를 일으킨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적응에 대한 사고방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처가 바뀐다는 걸 우리는 깨닫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지구 환경문제의 역사도,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 왔느냐 하는 인간의 역사도 잘 모른 채로 현재에 이르렀는데, 지금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풍토에 적응하는 방식 하나만 해도 이미 크게 변용하려고 하고 있어서, 올바르게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되는 앎을 획득하려 한다는 역사적 시점의 의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해도 좋다. 풍토와 그 역사라는 관점(이것을 환경사의 관점이라 해도 좋다)에서 환경문제를 재검토하는 일은 지구 환경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한 중요한 과제이다.




마치며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는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연구 프로젝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일환으로 프로젝트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의 연속 공개강좌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서적의 형식을 위하여 새롭게 저술을 부탁한 부분도 많다. 프로젝트의 이름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주제는 조금 역설적인 말이지만, 인간에 의한 농업(목축을 포함)이란 행위와 주위의 환경, 특히 생태계와 관계를 맺어 온 역사를 연구하려고 한 것이다. 근저에 있는 발상은 우리들은 이 관계에 대하여, 특히 그 역사에 대한 긴요함을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역사의 연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연구 대상으로 한다. 역사 연구의 기초에 있는 문서만으로는 이 '관계'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다. 여러 가지 자연과학의 방법과 조합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문자가 없는 시대의 일은 고고학의 방법이 유력하다. 이와 같이 농업과 환경의 관계사의 해명에는 분야의 제한을 넘어 학문의 융합이 필요하다. 


지구연의 프로젝트는 그 대부분이 이러한 분야를 횡단하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도 모두 80명 정도의 연구자가 있는데, 그 전문 분야는 여러 갈래이다. 분야의 제한을 넘는 건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보다어려울 때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을 뛰어넘어 기대한 바의 목적을 달성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분야의 장벽을 넘은 대화를 시도했다. 이 시리즈도 또한 그러한 대화를 시도한 하나로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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